< -- 1006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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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회의의 둘째 날 오늘은 남부의 곡물 금수조치 해제라는 가장 민감한 사안을 다루어야 하는 날이었지만 황자의 죽음으로 본회의는 하루씩 미뤄지고 이렇게 제후들과의 작은 사전 협의 겸 만찬으로 대치되어 있었다.
만찬장으로 향하는 황제의 표정엔 핏기도 없었고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듯 눈빛도 풀려 있었다. 황제를 보좌하는 루스탐은 그가 오전부터 내내 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들의 죽음이라는 참사에 더해 또다시 연이어 받은 충격적인 연락들을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겉으로나마 태연히 있는 것만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망할 년.’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케스난에게서 받은 연락은 그에겐 충격이었다. 사실 마누엘이 배신을 꾀하고 있다는 건 어차피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지만 황족들과 그간 교단에 어렵게 심어놓은 프락치들이 이번에 몰살당했다는 건 큰 타격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충격은 바로 며칠 전, 그가 남극성당 지하에서 품에 안았던 이디나가 아스탈의 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카렐은 아직 그 소식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멍청한 년, 이렇게 속다니.’
카렐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몸은 회의장에 들어와 있지만 깜박깜박 드는 터무니없는 잡생각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적의 대신관’과 잠자리를 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언젠가 아스탈과 교단을 무너뜨리고 나면 화합 차원에서 그 딸인 이디나를 직접 거둘까 하는,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이상한 건 속았다는 분노보다 이디나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지금 더 간절하다는 사실이었다.
만찬장 문 앞에 멈춰 선 카렐은 한숨을 다시 푹 내쉬었다.
“폐하.”
산만한 눈빛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보다 못한 세네피스가 다른 용무가 있는 척 슬쩍 다가와 카렐의 가슴을 짚었다.
“예?”
카렐이 세네피스를 문득 돌아보았다. 북부 최고제후 자격으로 만찬에 함께 들어갈 세네피스는 사뭇 걱정 어린 얼굴로 카렐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힘드시면 오늘 만찬은 취소하세요.”
애써 정신을 차린 카렐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멀찍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세데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안 됩니다. 오늘 내일 남부에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이러다 또 쓰러지시면 어쩌고요?”
“걱정 마세요, 이겨낼 수 있으니.”
세네피스는 마치 황후처럼 카렐의 허리를 꼭 안으며 발돋움을 해 그의 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하려면 당당하시고요, 아시겠죠?”
카렐의 입가에 비로소 웃음이 번졌다. 별 것도 아닌 듯 보였지만 세네피스의 포옹을 받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카렐은 세네피스의 어깨를 한 번 안아주고는 어깨를 펴고 두 손으로 만찬장 문을 확 열어젖혔다.
카렐이 아들의 죽음까지도 머리에서 지우고 이렇게 서둘러야 할 만큼, 제국의 기근 문제는 이 하루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한 달 전, 황제가 제국회의 개최를 선언하면서 비축곡물을 대량으로 풀겠다며 한바탕 공갈포를 날려 제국의 곡물가가 잠시 폭락을 했었지만 잠깐에 불과했다. 페스트의 폭동과 곡물 오염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곡물가는 다시 폭등을 시작했다.
지금 제국의 곡물가격, 아니 정확히는 오염에 그나마 안전하다고 알려진 남부와 황제령 산의 곡물가는 이젠 카렐이 회의를 선언했을 때보다도 도리어 훨씬 더 올라 있었다. 반면 절반 이상,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오염된 것으로 밝혀진 서부나 동부의 곡물은 굶어죽기 직전의 빈민들이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시겠지만……지금은 저희 남부도 다른 지역에 곡물을 수출할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전채요리 시간이 끝날 즈음, 제일 먼저 입을 연 남부최고제후 카나르 플라칼 공도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지난 제위전쟁으로 제국의 무장과 제후들도 크게 물갈이가 되어 한때 테번과 제롬의 그늘에 가려 있던 그는 이제 명실상부 제국의 가장 경륜 높은 무장의 지위에 올랐지만 그 역시 ‘제후’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델루지 가의 종장 세데스를 견제하기 위해 제국의 식량 문제에서 황제 편을 들던 비둘기파였다. 그렇지만 막상 세데스가 권력을 잃고 델루지 가가 내분에 빠지자마자, 그는 이전 델루지 가보다 더 강경하게 곡물 독점을 주장하는 매파로 변신을 해 버렸다. 막대한 이권이 놓인 상황에서 어차피 ‘제후의 충성’이라는 건 딱 필요한 때의 1회용에 불과했다.
“수출을 하면 가장 큰 이득을 볼 농민들마저 수출 재개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건 저희 내부 필요량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에…….”
“뭐긴 뭐야, 밀수로 더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거지.”
황제 옆에서 듣고 있던 부총리 대리 아리아노가 작은 소리로 분통을 터뜨렸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겐 다 들릴 정도였다.
사실 이번 기근이 다른 지역엔 참극이었는지 몰라도 오염되지 않은 곡창과 우수한 종자를 독점하고 있는 남부 제후들―척박한 이그나토 가만 빼면―에겐 대박에 가까웠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곡물 금수(禁輸)를 걸었지만 뒷구멍으로는 정상 가격의 대여섯 배, 심하게는 열 배 가까이로 오가는 암거래와 밀수를 눈감아주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지난 3년간은 평년의 몇 배는 되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덕분에 돈방석에 앉은 남부의 지주와 부유한 농민들은 다른 지역의 흉작과 곡물 오염이 계속 이어지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곡물 가격이 정상’이라고 우기며 암거래 가격을 공식적으로도 인정해주지 않는 한 금수 해제는 절대 있을 수 없다고 극렬히 반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부가 남부인 모두를 풍요롭게 해 준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턱도 없는 곡물가 거품을 유지하려면 남부 내의 곡물가도 높게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상당수의 남부 빈민들은 사방에 안 팔리고 남아도는 풍요로운 밀밭과 목초지 사이에 살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너무 비싸 사먹을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나은 중간층들도 곡물에서 시작된 극심한 물가상승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도 남부가 다른 지역에 비해 별 탈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곡물 가격을 잔뜩 올려놓은 그 주체세력들이 ‘빈곤층 배급’을 실시하기 때문이었다. 곡물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가격을 올려 못 사먹게 만들어 놓고, 또 한편으로는 딱 먹을 만큼만 공짜로 ‘베푼다는’ 것이 언뜻 우스꽝스런 모양새이지만 그들로서는 대외적으로 비상식적인 곡물가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내부 통제를 강화하는 또 다른 수단이기도 했다.
결국 금수조치로 사실상 돈을 번 건 남부에서도 제후들과 일부 부농, 지주들뿐이었고 대다수의 노동자들과 중산층은 도리어 밑바닥으로 몰락해가고 있었다.
남부제후들은 그런 부작용을 감수해가며 굶주린 동부와 북부에 암거래로 공급줄을 당겼다 놓았다 해 가며 그들이 점점 약해져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필요한 순간, 암거래까지도 딱 끊어 그들의 숨통을 끝낼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여 저희 가문에서는 일단 수출은 내년 이후에 재검토하는 쪽으로 방침을…….”
카나르 공이 다시 카렐의 눈치를 보았다.
“수출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
생고기로 만든 오늘의 메인 요리를 받은 황제가 제후들을 둘러보며 간단히 한 마디를 꺼냈다.
“제국의 경작 가능지역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지금 생산량은 오염된 곳을 빼도 제국민 전체를 충분히 먹여 살릴 정도다. 모든 게 그렇지만 누군가는 너무 많고, 누군가는 너무 적어서 문제지.”
카렐이 손끝으로 델루지 가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세데스가 사나운 표정의 가문 실무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델루지 가도 그런가?”
황제의 물음에 세데스가 일어나 답했다.
“아닙니다. 제국 전체의 안위를 위해 비축곡물을 3년 전 거래가에 7할을 더한 수준에서 판매할 의향이 있습니다.”
세데스의 선언에 동부와 북부에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것도 싼 가격은 아니지만 이전 가격에서 최고 10배까지 올라 있는 암거래 가격에 비한다면 눈 딱 감고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때, 델루지 가 수행원 중에 있던 하디 델루지가 불쑥 나섰다.
“가문의 상급 법률사로서 말씀드립니다. 세데스 델루지는 살인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범죄자로, 종장 권한이 정지되어 있으므로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세데스가 이 방계 숙부를 대뜸 노려보았다. 쿠트라스에서 트라카의 팔찌를 훔쳐내고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하디는 이번엔 세데스를 공격하는 저격수 역할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가문 보안군의 1급 수배 명단에 올라 있다는 걸 모르고 있나 보지요? 조카님?”
하디의 무례한 언사에 세데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대로 높은 곡물가를 유지한다면 남부의 노동자층과 경제도 붕괴됩니다, 하디 숙부. 경제 전문가께서 그걸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요?”
“그러니까 그런 건 원로들에게 맡기고 조용히 계시라고요. 조카님.”
하디는 논쟁은 피한 채 일부러 세데스의 속만 더 긁었다. 테번 공의 첫 번째 첩 예레니의 아들로 테번에겐 사실상 장남이었던 저 남자는 호리호리한 몸에 가는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말처럼 길쭉한 얼굴만 보아도 ‘전형적인 델루지 남자’의 외모였다.
하지만 저자가 가문에서 잘 나가는 건 ‘작은 테번’이라고 불릴 만큼 아버지를 빼닮은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워낙에 처세술에 밝고 똑똑해 서자라는 한계만 아니었다면 델루지 가의 종권을 노리고도 남았을 남자였다. 테번 공은 걸핏하면 ‘하디 이놈이 서자로 태어난 게 정말 아깝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카렐이 보기엔 미련한 적생자 마누엘보다 저 남자가 훨씬 세데스에겐 위협적이었다.
그때, 가뜩이나 시끌시끌해진 델루지 가의 싸움에 최고제후 카나르 공의 목소리까지 더해졌다.
“이보게, 종권에 문제가 있으면 회의를 주관하신 황상의 권위를 생각해 이 자리에 나오지를 말았어야지.”
남부최고제후의 힐난에 아직 나이도 어리고 정치 경험도 짧은 세데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껏 중앙정치무대에서는 대담하고 뻔뻔한 어머니 오르테가 방패 역할을 해 주었었지만 이젠 그가 혼자 모든 것을 버티어내야 했다. 사실 나이 40이면 수백 살의 제후와 원로들이 판치는 이 자리에서는 거의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껏 이런 비난을 직접 받아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전 황상의 초청으로 이 자리에 온 겁니다!”
세데스가 나름 저항을 했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남부가 단합해야 하는 이때에 괜히…….”
카나르 공이 황제를 의식하며 얼른 말꼬리를 흐렸다. 결국 그가 나선 것도 이 철없는 젊은 제후가 멋대로 황제 편을 들어 남부 전체의 ‘곡물 금수 담합’을 깰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가장 생산량이 큰 델루지 가가 정말로 금수를 푼다면 나머지 가문들의 담합 카르텔도 우르르 무너질 절박한 상황이었다.
뒤이어 비슷한 생각의 호지 가 종장까지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 일은 경륜 높은 원로들 손에 맡겨두고 조용히 근신하고 있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바로 체포하지 않고 근신 상태로 수사하려 한 걸 고맙게 여겼어야지 여기까지 도망을 와서 뭐 하는 짓입니까?”
잇속이 맞는 다른 남부 가문의 원로 정치가들의 협조까지 받은 델루지 가 실무자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4제후 세닉 가의 이렌느 경도 다른 남부제후들을 도와 한 마디 돕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지난밤 아들이 황제가 소개해 준 밀리타에게 저지른 무례한 행동 때문에 차마 나서지는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은 세데스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정말 한심한 양반들이군요! 영지민들의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폐하.”
생때같은 외손녀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모습에 발을 동동 구르던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이 무심하게 주스를 마시고 있는 황제를 야속한 듯 돌아보았다. 종권 문제는 황제가 관여할 사안이 아닌 게 사실이지만 웬일인지 황제는 저들의 싸움을 말릴 생각도 없어보였다. 황제가 아들 생각으로 잠시 넋을 놓았다고 생각한 아리아노는 결국 다혈질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보쇼, 지금 나잇살들 처먹어서…….”
“아리아노 경, 가만히 있게.”
황제의 저지에 아리아노가 재차 야속한 얼굴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허나 폐하, 지금 저대로 놔두면…….”
“왜? 지금 세데스가 나쁜 악당들에 맞서 남부 민초들을 위한 투사가 되고 있지 않나?”
황제가 한쪽에서 이 만찬의 대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서기를 턱으로 힐끗 가리켰다.
“그러니까 계속 여기 나와 가문 망신시키지 말고…….”
원로 중 한 명의 힐책에 결국 버티지 못한 세데스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억지로 감추며 만찬장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아, 아니…….”
아리아노 경이 안타까운 얼굴로 벌떡 일어섰지만 세데스는 이미 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폐, 폐하, 이래도 되는…….”
“자네 외손녀는 곧 남부를 구한 투사가 될 것이야. 투사는 악당이 있어야 더 빛나는 법이지.”
놀란 아리아노는 급히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황제는 최고제후로 만들어 준 자신을 배신한 플라칼 가를 응징하고 남부의 판도를 다시 짤 맘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리 없는 남부제후들은 소원대로 귀찮은 배신자를 성공적으로 회의장에서 쫓아낸 것을 축하하듯 눈짓을 교환하며 쾌재를 부르는 분위기였다.
황제가 그들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 이제 정리가 된 건가? 그럼 남부의 통일된 의견은 대체 뭔가? 곡물을 계속 쥐고 있겠다고?”
황제의 감정 섞인 물음에 카나르 공이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가격 폭등은 저희가 계속 쥐고 있어서가 아니옵고 내부 필요량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워…….”
“아하, 공이 말하는 내부 필요량은 10배 받고 팔 밀수 수요도 포함해서겠지?”
황제의 물음에 만찬장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이 붉어진 카나르 공이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밀수출은 저희도 집중 단속하고 있으나 워낙 치안군 인력이 부족해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듣다 못한 다른 제후들 사이에서 우 하고 야유가 터져 나왔다. 남부 치안군들이 곡물 밀수출을 단속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심지어 밀수를 사실상 지휘하는 것이 제후들이라는 소문도 자자했다.
“해적과 밀수를 단속하는 치안군을 근 3년간 10분의 1로 대폭 줄인 게 그대들 아니었던가? 요즘 해적들이 창궐해 곡물 벌크선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는 그대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러하오나 말씀드렸다시피 치안 인력 부족으로…….”
“그런데 아무리 인력이 없기로 고작 1년에 밀수 3건 잡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될 일이요?”
“그만큼 밀수가 적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빤해도 너무 빤한 변명에 카렐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수출을 하고 말고는 제후들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이고, 엄밀히 말해 저들의 치사한 담합을 처벌할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남부의 곡물 금수로 식량자급능력이 아예 없는 북부와 동부의 경제는 이미 절반 무너진 상태고, 테나토와 수베르 덕분에 근근이 유지한 서부도 거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카나르 공이 계속 자기 의견을 이어갔다.
“아시겠지만 곡물은 생산량이 1할만 줄어도 가격은 2배씩 올라갑니다. 오염된 키니나 키니가 의심되는 것들을 제외하고 지난해 소출이 4할이나 가까이 줄어든 마당에 밑바닥 시중 거래가가 10배로 오른 건 결코 과도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지금의 시중 거래가를 양성화하여 10년간 장기계약을 맺어 준다면 쿼터를 정해 수출을 고려해 볼 의향은 있으나…….”
“이 도둑놈 같으니!”
듣다 못한 다히르 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언성을 높였다. 결국 당장의 기근을 인질삼아 앞으로도 10년 동안 다른 지역을 5배에서 10배의 폭리로 뜯어먹겠다는 속셈이었다. 남부도 당연히 지지 않았다.
“도둑이라뇨! 팔 곡물이 없어서 못 팔겠다는데 그런 막말이 어딨답니까!”
다히르 공의 욕설에 격분한 남부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아니, 자급도 못 하는 당신네가 문제지, 우리도 딱 우리 먹을 것만 있는 것을 어쩌란 말이요!”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지면서 제후들 사이에 품위 없는 막말이 마구 오갔지만 황제는 이번에도 참견하지 않고 혼자서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었다.
“남부가 곡물 금수를 풀지 않겠다면 우리도 남부에 광물과 중장비 금수를 고려할 참이요.”
북부 2제후 조르그 펠머슨 경이 늙고 주름진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카나르 공은 그럼 어쩌겠냐는 듯 어깨만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사실 북부는 이미 몇 달째 광물과 중장비 수출을 제한을 협박하고 있지만 군용 중장비 같은 몇몇 전략물자를 빼면 정작 실행은 못 하고 있었다. 남부가 북부에서 광물과 중장비를 한동안 못 사들인다 해도 자체 생산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이상, 곡물 부족으로 북부가 겪는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고, 괜스레 북부의 수입만 줄어들 판이었다.
“앉아있게.”
제후들의 싸움 내내 피가 뚝뚝 흐르는 생고기만 몇 입 먹고 난 황제가 비로소 격앙된 분위기를 일단 진정시켰다. 그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카나르 공과 델루지 가 대표들에게 재차 물었다.
“어쨌든 수출할 곡물이 없어서 가격을 높게 부른다는 그대들의 말을 일단은 믿겠네. 없어서 못 팔겠다는데 내 그걸 어쩌겠는가? 살점을 떼어 팔라고 할 수도 없고. 그대들이 올린 재고량 자료를 보니 정말로 부족한 것이 사실인걸.”
카렐은 회의 직전 남부가 올린 곡물 재고량 자료를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황제가 갑자기 맞장구를 치고 나오자 도리어 당황한 건 남부 쪽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변심이 무슨 일이냐며 눈짓을 주고받았고, ‘배신’당한 다른 지역들도 폭발했다.
“아, 아니, 폐하, 그 자료는 엉터리…….”
지금까지 황제가 자신의 편인 줄로만 알았던 동부와 북부가 발끈하고 있었다. 북부 최고제후로 온 세네피스가 뭐라 항의하려는 것을 황제가 다시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남부에게 일렀다.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동부와 북부에도 그대들의 진심을 납득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납득……이라뇨……?”
“내 어젯밤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네만 남부의 처지를 이해해 줘야 하겠더군. 하지만 굶주리고 있는 동부와 북부에서는 저렇게 그대들의 자료를 믿지 않고 있으니 내 중간에서 황제로서 뭔가 설명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저들에게 현황을 객관적으로 알려주기 위해 황실 조사단을 보낼까 하네.”
예상도 못 했던 ‘조사단’이라는 말에 카나르 공은 물론이고 남부 대표단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무얼 조사하신다는 건지…….”
동부 역시도 황제의 말이 불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히르 공도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한 달 전이라면 몰라도 이제와 조사단이라뇨? 조사가 끝날 즈음엔 저희 동부나 북부는 다 굶어죽습니다! 서부도 이미 식량이 바닥난 상태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야.”
카렐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당황하고 있는 남부 제후들에게 지난 한 달간 꽁꽁 감춰두었던 비수를 꺼내들었다.
“내 조사단이 비엔과 루게, 클리코브에 있는 4번, 7번, 8번, 19번 식량기지를 방문하려고 이미 셔틀에 올라 준비하고 있네. 하루면 끝날 것이니 염려 말게, 다히르 공.”
황제가 이미 방문단 준비까지 다 해 놓았다는 말에 남부 제후들이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방금 황제가 말한 그 기지들은 남부의 전략 비축곡물 대부분이 보관되어 있는 곳들이었고, 지금껏 극비로 관리해 온 곳들이었다. 세데스가 그 정보를 흘렸음을 눈치 챈 카나르 공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곳의 비축 곡물량을 누군가 확인한다면 자신들이 올린 재고량 자료가 엉터리라는 것이 바로 밝혀질 판이었다.
“어쩌지? 무조건 떼쓰면서 시간을 더 끌어볼까?”
당황한 카나르 공이 황제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 하디 델루지와 여러 종장들을 가까이 불러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싶던 하디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러면 괜히 우리만 더 의심받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우린 황제에게 부당하게 핍박받은 희생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날 독립선언을 터뜨릴 명분이 생깁니다. 끝나기 직전까진 고분고분 들어주는 게 낫습니다. 저깟 조사단 따위는 대충 시간 좀 끌고 꼼수 약간만 쓰면 충분히 따돌릴 방법이 있습니다.”
“하긴, 관료들이 다 그렇지.”
카나르 공이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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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도 나름 황제를 이겨보려 머리털에 연기나게 굴리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은 전야제이고 결과는 다음 회에.....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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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주고 가시는 분들 복받습니다. ㅎㅎㅎㅎ
요즘 여기도 평점테러하는 분이 나타나셔서....곧 숫자가 떨어질 것 같네요';;;
글만 읽고 가시는 분들 밉습니다~~ (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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