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7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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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르 공이 쿠베로부터 ‘남부의 독립선언’이라는 솔깃한 제안을 받은 건 델루지 가의 종부 오르테 부인이 피살된 직후였다. 새 남부최고제후로서의 자신의 위상에 항상 불안감을 느끼던 그는 오르테의 죽음에 내심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세데스는 미숙하고, 미련한 마누엘은 능력이 안 되는 이상, 그는 더 이상은 황제의 힘에 기대어 근근이 자리를 간수하는 불안한 남부최고제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쿠베는 그에게 상급제후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왕’이 되어 완전히 독립된 권력을, 카나르에게는 ‘왕 중의 왕’ 지위를 줄 것을 약속했다. 곡물 가격을 낮추라는 황제의 압박이 지속되면서 남부인, 아니, 정확히는 남부 지주들의 불만도 점점 커져왔고, 이젠 독립선언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빈민들은 황제보다는 자신들이 굶주리게 만들고 있는 제후들을 지금까지처럼 미련하게 계속 따를 테니.
“왜? 무슨 문제 있는가?”
황제가 다시 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흰 털끝만큼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델루지 가, 호지 가, 세닉 가와 슬쩍 눈짓을 주고받은 카나르 공이 얼른 표정관리를 했다. 황제가 조사단을 보내겠다는데도 생각 외로 태연한 그의 표정에 동부최고제후 다히르 공의 표정이 굳었다. 남부가 연극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가진 곡물이 없는 것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침착한 반응이었다. 뼛속까지 군인인 카나르 공은 사실 거짓말에 그리 능한 사람은 아닌데도 신기한 노릇이었다.
카렐은 그런 이상한 눈치를 모르는 척, 혼자 말을 이었다.
“잘됐군, 내 조사팀이 8시간 정도면 도착할 것이니 성의껏 맞아달라고 미리 얘기해 주게나. 요즘 남부에 해적이 많다고 하니까 웬만하면 경호팀도 좀 붙여주고.”
“알겠습니다.”
안 된다며 펄쩍 뛸 줄로 알았던 남부가 생각 외로 흔쾌히 좋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초조해진 건 동부와 북부였다. 혹시라도 조사단이 곡물을 못 찾는다면 괜스레 남부에 면죄부만 주는 꼴이었다. 측근들과 몇 마디의 귀엣말을 주고받은 다히르 공이 황제에게 슬쩍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폐하, 조사단에 저희 동부 사람들도 참여시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됐네.”
카렐이 기름이 잔뜩 붙은 양고기를 입에 넣으며 무심하게 손을 저었다.
“우리 황실 조사관들의 능력을 못 믿는 건가?”
“물론 아닙니다만…….”
“그럼 날 믿으라니까.”
황제의 밑도 끝도 없이 믿으라는 말에 동부의 다히르 공이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북부 최고제후인 세네피스만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만 띤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수베르 별궁의 만찬이 채 끝날 시간도 아니었지만, 8시간 후 황실의 조사단이 온다는 급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전해들은 비엔 6번 행성의 제7식량기지는 이미 비상이 걸려 있었다. 지금 쓰이는 초대형 사일로 25개, 먼 옛날 폐쇄된 비슷한 크기의 사일로 18개를 가지고 있는 이 식량기지는 공개한 서류대로라면 5개의 사일로에 고작 절반 정도씩만 차 있어야 했다.
“빨리! 빨리! 벌크선 수배했어?”
기지 책임자가 밤늦게 자다 말고 불려나와 아직 정신이 없는 직원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잠이 덜 깬 운송 책임자가 떡이 진 머리를 긁적거리며 거래하는 벌크선 목록을 뒤적거려 연락을 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 어디 가 있다고? 코윈! 제기랄! 끊어!”
운송 책임자는 뒤에서 도끼눈을 뜨고 있는 플라칼 가 적장자 헤즈의 눈치를 보며 급히 다른 곳을 불러냈다. 몇 분 전, 저자로부터 [6시간 이내에 사일로를 서류에 있는 양 정도까지 비우지 못하면 보리 더미 사이에 산 채로 파묻어버릴 테다.]라는 소름끼치는 협박을 들은 책임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후군 사령관으로 제위 전쟁 때도 잔혹한 전술과 민간인 학살로 악명을 날렸던 저 뚱보는 보리더미가 아니고 염산통에라도 산 사람을 처박고 남을 잔혹한 사내였다.
하지만 거의 수백만의 인구를 1년간 먹여 살릴 만큼의 양이 되는 43개 초대형 사일로를 한 번에 비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금 어디야! ……탈라스? 이런 씨발!”
할룩스를 끊은 책임자가 머리털을 움켜쥐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흉작으로 일거리를 잃어 그동안은 조합에 연락만 했다 하면 몇 척씩이 몰려와 일감을 놓고 싸우던 벌크선들이 무슨 일인지 하필 오늘 죄다 북부로 몰려가 있었다. 그는 다른 벌크선을 다시 불러냈다.
“넌 어디야? 수베르? 넌 또 거긴 왜 가 있어!”
공포에 질린 책임자의 얼굴이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그 때, 건너편에서 짜증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코윈하고 쿠트라스에서 광물 수송 큰 건 선착순 입찰이 있다고 그래서 웬만한 벌크선장들은 다 여기 모였을 거야. 대체 왜 그러는데?”
“끊어!”
책임자는 머리를 싸쥔 채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그 짧은 시간에 이 어마어마한 곡물 사일로를 비우는 법은 둘 밖에 없었다. 사일로를 통째로 태워버리거나, 혹은 조사단이 와 있는 동안 벌크선에 실어 스페이스에 띄워놓는 둘뿐이었다.
하지만 이곳 사일로를 비울 만큼이면 웬만한 벌크선 열댓 척, 제국에 몇 척 되지도 않지만 초대형 벌커라도 서너 척은 필요한 상황이었다. 벌크선들은 수십 일 전 연락해 수배하는 것이 보통이니 이렇게 급작스런 부름에 저들도 당황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곳 직원들에겐 남 걱정 따위 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목록에 있는 다른 벌커를 급히 불러냈다.
“위저? 이봐, 넌 지금 어딨어?”
“클리코브인데 왜?”
“잘됐다! 당장 이리로 좀 와! 빨리! 급해!”
“참, 나, 오늘 무슨 일 있어? 1분만 일찍 연락하지. 나 19번 기지에 일 받아서 가는 길이야. 2배 줄 테니 당장 오라고 길길이 날뛰던데? 뭔 일 있어?”
“19번? 호지 가 놈들이?”
담당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비슷한 처지에 처한 19번 식량기지에서 몇 분 앞서 선수를 친 모양이었다.
“미친놈.”
옆에서 노려보고 있는 헤즈의 시선이 당장 그의 머리에 구멍이라도 낼 것 같았다. 당황한 담당자가 고함을 질렀다.
“3배 줄게 이리로 와! 우리가 더 급해!”
“에이, 하루이틀 할 장사도 아니고, 신용이 있지. 그거 더 받자고 밥줄 끊길 일 있나. 됐어, 나중에나 건수 있거든 연락해.”
그 벌커 선장은 아까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연락을 끊어버렸다. 당황한 담당자는 목록에 있는 나머지 벌크 화물선을 모두 불러냈지만 다른 식량기지로 가 버린 놈들을 빼면 8척이 북부에 가 있고, 5척이 다른 일을 하는 중이고, 2척은 수리 중이고, 나머지는 놀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있어 하역시간 고려하면 6시간 내에 실어 내 갈 수는 없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이대로는 황실 조사단이 오기 전에 사일로를 비우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정말로 헤즈에게 죽을 수밖에 없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봐! 이봐!”
자리를 빙빙 맴돌고 있는 책임자에게 사무실의 다른 동료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쿠엘스크하고 타이마르 제철소에 20만급 초대형 벌커 네 척이 그제부터 들어와 있대! 철광석하고 석탄 하역이 조금 있으면 끝난다는데! 당장 불러올 수 있어!”
책임자의 눈이 확 커졌다. 그동안은 보안을 유지하려 정해진 벌크선과만 거래했지만 이젠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비밀 옵션 붙여서 5할 더 쳐 준다고 하고 당장 이리로 불러 와! 빨리!”
지금까지 책임자를 노려보던 헤즈가 그제야 한 발씩 물러났다.
“후우.”
공포에서 벗어나 긴장이 풀린 책임자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플라칼 가의 무시무시한 폐쇄사회에서 정말로 [산 채로 보리더미에 파묻어 죽이는 것] 정도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같은 시각, 델루지 가의 비엔 5번 행성의 4번 식량기지, 세닉 가가 다스리는 이베르에 있는 8번 식량기지, 호지 가가 다스리는 클리코브에 있는 19번 기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당장 남의 식량기지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운 좋게’ 수배한 4척의 초대형 벌커는 30분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하늘을 새카맣게 덮을 만큼 큰 이 거대한 벌커는 43개의 사일로에서 나오는 곡물이 모이는 지점에 착륙해 거대한 입을 벌렸다.
“실어!”
책임자의 명령과 동시에 사일로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밀과 보리, 콩과 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제국민들, 특히나 동부나 북부 사람들에겐 황금보다도 더 소중한 누런 보물이 순전히 황제와 외부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 거대한 벌크선을 가득 채워갔다.
굶주리고 있는 동부나 북부인들이 본다면 눈이 뒤집어질 광경이었다.
“몇 시간이나 걸리지?”
맘이 급해진 헤즈가 하역 담당 기사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이 속도라면 5시간 조금 넘게 걸립니다.”
헤즈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도 수베르의 제국회의에 가 있는 아버지 종장 카나르 공에게서 [황실 조사단이 오기 전까지 서류대로 꾸며놓지 못하면 눈밭에 산 채로 파묻어버릴 거다.]라는 협박을 듣고 파랗게 질려 있던 차였다.
그는 보안 할룩스로 이런 문장을 보낼 수 있었다.
- 황실 조사단이 오기 전에 4척의 벌커에 실어 내보낼 예정입니다. 해결되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아버지. -
오늘 밤 황제와 함께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베아트릭스는 [오늘 저녁은 좀 늦을 것 같소. 들를 곳이 많으니 너무 늦어지면 먼저 자고 있으시오. 정말 미안하오.] 라는 황제의 쪽지에 야속함보다는 안쓰러움과 걱정이 먼저 들었다.
세상 빛도 못 본 아들을 잃고, 귀인과 딸이 다쳐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황제 노릇을 하느라 제대로 슬퍼해 볼 시간도 없었던 것 같았다. 황제는 만찬을 끝낸 후 에스더의 병실에 저녁 내내 머물고 나서 그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나와 줄 참인 모양이었다.
그는 저녁 내내 딸 엘룬의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마음은 황제가 저러다 또 발작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딴곳으로 가 있었다. 그는 그렇게 몇 시간을 시계만 보며 황상께서 납신다는 루스탐의 목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30여 분 전, 에스더의 병실을 나온 황제가 뜬금없이 별궁 지하실로 갔다는 연락이 있은 후 아무 소식도 없었다. 먼저 자고 있으라는 말은 들었지만 차마 자리에 누울 수가 없었다.
“엄마, 나 괜찮아.”
엘룬이 엄마의 손을 어루만져주며 씩 웃었다. 볼트에 맞은 등의 상처로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매사 낙천적인 이 딸아이는 ‘그놈 때문에 가디언하고 달리기 내기 다 이긴 거 놓쳤다’며 툴툴거릴 만큼 여유가 넘쳤다.
“엄마, 근데 외가에서 뭐 잘못했어?”
평소답지 않게 갑자기 진지해진 딸의 물음에 베아트릭스가 움찔했다. 아이가 말하는 ‘외가’는 다름 아닌 남부 플라칼 가였다.
“갑자기 그런 건 왜?”
“아까 저녁때 카이 오빠랑 주페 오빠랑 몰래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우리 외가가 황상을 배신했다고 그러더라. 정말이야?”
갑자기 마음속이 콱 막혀 온 베아트릭스가 억지로 웃으며 딸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었다.
“정치라는 게 하다 보면 내막을 다 모르는 사람 눈엔 그냥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 아직 넌 그런 거 몰라도 돼.”
베아트릭스는 ‘플라칼 리쿠’ 성을 가진 딸아이가 행여 상처를 받을까 하는 맘에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둘러댔지만 이미 머리가 많이 굵어진 딸에게 자신의 구차한 설명이 통할지는 확신이 없었다.
“나도 플라칼 가 혈통인데 무조건 몰라도 된다고만 하면 어떡해.”
베아트릭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에게 차마 얘기는 못 하고 있지만, 황족 구성원을 못 얻어 안달인 다른 가문과는 달리 유독 플라칼 종가 일가만은 ‘플라칼’ 성을 가진 황족 엘룬을 경계하고 있는 눈치였다. 극도의 폐쇄사회를 이끌며 그 스스로도 병적인 의심과 피해망상증에 빠져버린 그들은 이 아이가 가문 내에서 유일하게 상급귀족의 혈통을 잇고 있는 종가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씨로 보는 듯했다.
종가의 의심에 지친 베아트릭스는 다음 황자를 낳으면 그때는 ‘바툴 리쿠’로 할 생각이었다.
“엄마가 가문에 황상 말 좀 들으라고 얘기하면 안 돼? 엄마도 그 가문 사람이잖아? 엄마도 황빈이라 무지 높은데 왜 엄마 말은 안 들어?”
“엄만 말이야……황상 곁에선 높은 사람이 되지만 가문에선 그냥 힘없는 방계일 뿐이야.”
베아트릭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한때 남부에서 황제의 충견으로 통했던 자신의 가문이 곡물 금수에 갑자기 앞장서며 황제와 등을 돌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스스로는 가문과 철저히 벽을 두고는 있지만 주변에서는 그리 보아주지 않았다. 그는 비빈들 중 유일한 남부 혈통이고, 플라칼 가가 척을 진다는 건 내명부에서 그와 딸의 지위도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황상께서 엄마한테 섭섭해 하실까봐 그러지. 나도 커서 오빠들이나 마하 언니처럼 가문 종장이 될 수 있다면 황상이나 엄마한테 힘이 될 텐데.”
베아트릭스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밝기만 해 보이던 이 아이도 베아트릭스만큼이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속 좁은 분 아니시란다. 엄만 무조건 황상 편이라는 거 잘 알고 계셔. 그러니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엄만 좋아한단 말도 못 하고 맨날 꽁하게 속으로만 걱정하잖아. 전에 내가 황상 드리라고 모종 갖다 준 것도 못 드리고 우물쭈물하다 죽여버렸지?”
베아트릭스는 어느새 부쩍 생각이 깊어진 아이를 보며 피익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도 어쩔 수 없는 플라칼 가 사람이라 그런가보다.”
“쳇, 또 핑계.”
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엘룬은 진지한 성격의 두 오빠들이나 살살거리는 애교덩어리 마하와는 또 딴판이었다. 아이는 사교성 빵점의 엄마에게 난 것이 맞나 싶을 만큼 서글서글하고 쾌활한 성격에 그 쌀쌀맞은 세네피스 황태후도 차마 안 좋은 말을 못 할 만큼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아이였다. 덕분에 황실 학교에서도 항상 리더였고 친구들도 워낙 많아 담당 시녀들이 관리하기 어렵다며 투덜댈 정도였다.
다만 책과 공부라면 질색을 하다 보니 S 준발현자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성적은 잘해봤자 중간을 맴도는 것이 엄마에겐 고민거리였지만 그저 황제에게 물려받은 그 좋은 머리가 공부가 아닌 다른 쪽으로 발산되었을 뿐이었다. 엘룬은 무기라고 이름 붙은 것들은 모두 능숙하게 잘 다뤘고 군대에도 제일 관심이 많은 타고난 무골인 것이 엄마의 피가 어디 사라진 건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황제가 사나흘에 한 번은 꼭 짬을 내어 직접 딸에게 무술과 병법을 가르쳐주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베아트릭스에겐 가장 행복했다. 엘룬도 어딘지 부족한 황실 교사들 대신 자신의 실력과 호기심을 완벽히 보일 수 있는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지만 황제의 몸이 좋지 않은 근 몇 달간은 그럴 시간이 없어 베아트릭스를 더 안타깝게 했다.
엘룬은 보조침대에 있는 엄마의 베개를 냉큼 집어 품에 안으며 병실 한쪽 구석에 있는 보온병을 가리켰다.
“엄마도 내 옆에 계속 있지 말고 빨랑 황상한테 가요. 저것도 드려야 되잖아. 난 이 방 혼자 차지하고 편하게 잘래요. 엄마가 계속 있으니 제대로 잘 수가 없어.”
베아트릭스도 딸의 넉살에 시계부터 보았다. 오늘도 12시 가까운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몸으로 어떻게 버티고 계시려나 모르겠다.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하셨을 텐데.”
베아트릭스는 딸의 손등을 두드려주고는 어깨까지 이불을 폭 덮어주고 일어났다. 그는 방금 엘룬이 가리켰던 보온병을 슬쩍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약간 누린내가 나는 사슴뿔 달인 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내가 왜 이딴 짓을 했을까.’
보온병을 도로 닫으며 베아트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살갑거나 곰살맞은 짓이라고는 모르는 그가 오랜 바깥생활에서 돌아온 황제를 위해 모처럼 맘먹고 고향에서 가져온 사슴뿔을 며칠 걸려 달여 놓은 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속으로는 이런 걸 어떻게 황제에게 줄까 남세스럽고 막막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버릴 수도 없었다.
“나 아파서 푹 자야 되니까 오늘밤엔 절대 오지 말아요.”
엘룬이 방을 나서는 엄마에게 능글맞게 웃어보이고는 불을 확 꺼 버렸다.
베아트릭스는 행여 남들 볼까 보온병이 든 가방을 슬쩍 겨드랑이에 끼고 종종걸음으로 황제가 있을 별궁 지하실로 향했다. 별궁의 축축한 지하창고로 내려온 베아트릭스는 물어물어 황제가 있다는 1층의 수납실 창고로 향했다.
‘한밤중에 대체 그런 데는 왜 가셨담.’
어제 새벽 테번의 난동 이후로 별궁의 내부의 경계도 사뭇 삼엄했다. 비빈들이나 황자들의 경호 가디언도 보강되었고 토로 기지 구석구석엔 가디언 분대장들이 이끄는 위병들이 끊임없이 경계를 돌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세 명으로 늘어난 가디언 경호원들을 의식하며 희미한 불이 군데군데 켜진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복도 끝부분에 큰 철문이 하나 보였다.
“황빈 마마?”
문 앞에서 보안국 요원과 귀엣말을 나누던 루스탐은 갑자기 나타난 황빈의 모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베아트릭스는 무언가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황상께선 안에 계신가?”
“그, 그렇습니다만…….”
루스탐이 말을 더듬거렸다.
“이 안에는 들어가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마. 죄송합니다.”
루스탐의 붉어진 얼굴을 본 베아트릭스는 퍼뜩 딴생각이 들었다.
‘설마 오늘 같은 날에?’
순간 황제에 대한 안쓰러움이 확 날아가 버린 베아트릭스는 화가 버럭 치밀었다. 자식이 죽고, 귀인과 딸이 병실에 있는 이때에 황제가 원래 함께하기로 되어 있던 자신까지 내버려둔 채 이런 음침한 곳에 내려와 엉뚱한 놈을 안아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혈압이 확 치솟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어느 날 누구에게 승은을 내리건 그가 뭐라 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돌아섰다.
“누구인지나 알자.”
“예에?”
루스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오해하고 계신 듯…….”
“오늘 같은 날 안고 싶어 하실 놈이 대체!…….”
자기도 모르게 발끈해 목소리를 확 높였던 베아트릭스는 문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황빈 마마?”
창고에서 나오던 보안국장 사에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는 평소처럼 단정하게 딱 붙는 코트에 기름 발라 붙여 넘긴 짧은 커트머리 그대로였다. 오해를 깨닫고 민망해진 베아트릭스의 검은 얼굴이 루스탐보다 더 달아올랐다. 그 때, 그는 집무실 안에서 풍겨오는 짙은 피냄새를 맡았다. 수납실에서 날 냄새가 아니었다.
“보시겠습니까? 황빈 마마?”
사에나가 뜬금없이 물었다.
“보다니, 뭘?”
베아트릭스는 영문도 모른 채 창고에 발을 들여놓았다. 창고 중간에는 마치 관처럼 생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황빈?”
창고 안쪽에서 반쯤 넋이 나간 피곤한 얼굴로 상자에 걸터앉아 있던 황제가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무안해진 베아트릭스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황제를 못 믿은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한심했다.
“피곤할 텐데 여기까지 뭣 하러 내려왔습니까.”
그에게 다가오는 황제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따뜻했다. 맘 같아선 다가가 꼭 안고 그의 가슴에 기대고 싶었지만 뒤에서 쳐다보고 있을 아랫사람들 생각에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지간해서는 ‘침대 밖에선’ 애정표현을 하는 데 워낙 서툴렀다.
다행히 이럴 때 항상 먼저 안아주는 건 황제 쪽이었다. 카렐은 베아트릭스를 살며시 안고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파충류의 단단하고 차가운 몸인데도 그에겐 퍽이나 포근했다. 빨리 편안한 방으로 올라가 이 안에 맘 놓고 머물고 싶었다.
“폐하야말로 이런 곳에 왜 내려와 계신지요?”
“……그대에게 보여줘도 되는지 모르겠소.”
잠시 망설이는 듯 싶던 카렐이 그를 안은 팔을 풀고 굳은 얼굴로 옆의 관 뚜껑을 조금 열었다. 그곳엔 공포와 고통에 뒤섞인 눈을 크게 뜨고 혀를 길게 뺀 젊은 테번의 잘린 머리가 보였다.
“당연하지요.”
베아트릭스는 입가에 악마 같은 웃음과 함께 뚜껑을 확 열었다. 메네스를 죽이고 에스더와 딸 엘룬에게도 중상을 입혀놓고 도망갔던 원수가 머리와 팔다리가 토막 난 핏덩이가 되어 그 안에 들어있었다. 그가 에스더에게 하려 했듯, 배가 십자로 갈린 채 내장이 온통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상태를 보니 산 채로 이렇게 만들어놓은 후 죽을 때까지 놔두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잔혹하다 할지 몰라도, 베아트릭스는 내심 속이 후련했다. 그는 황제의 보안국 요원들이 이자를 붙잡아 이리 해 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밤은 편히 잘 수 있겠습니다. 에스더가 기뻐하겠네요.”
베아트릭스가 황제를 다시 올려보았다. 그런데 아들의 살인자 시체를 보며 후련하고 기뻐해야 할 황제의 표정이 이상하게 어두웠다. 죽은 아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 생각한 베아트릭스는 내심 안쓰러운 마음에 차가워진 황제의 뺨을 만져주었다.
“힘드실 테니 올라가세요, 따뜻한 거라도 한 잔 드시고 주무세요.”
베아트릭스가 새끼손가락 끝으로 카렐을 보일 듯 말 듯 슬쩍 잡아끌었다. 그 의미를 눈치 챈 카렐은 베아트릭스를 따라 창고를 나섰다.
“저 시체는 내일아침 저대로 연병장 광장에 널어놔라.”
베아트릭스를 따라 위층 황빈 침실에 오르던 카렐은 손에 쥐고 있던 이디나의 자필 편지와 수정용 캡슐이 들어있던 작은 통을 슬며시 옷자락 안에 감추었다. 테번의 갈린 뱃속에 들어있던 이 편지와 통은 아들의 죽음으로 이미 충격에 빠져 있던 카렐의 심기를 나락까지 잡아끌었다. 그는 원수 테번의 시체를 보고서도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적 대신관 이디나의 뱃속에서 지금 그의 핏줄이 자라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편지 끝머리의 한 문장이 들어왔다.
- 죽은 아기에게 줄 사랑을 제 뱃속의 딸에게 주시죠. 당신과 아이들은 어차피 모두 죽겠지만 이 아이가 다하카르의 피를 이을 겁니다. -
“폐하.”
앞장서가던 베아트릭스가 돌아보는 느낌에 카렐은 얼른 편지를 다시 감추었다. 베아트릭스는 주변을 잔뜩 의식하는 듯 싶더니 카렐의 손에 작은 보온병을 슬쩍 쥐어주고는 혼자 총총걸음으로 몇 발짝 앞서갔다.
“음?”
얼떨결에 보온병을 받은 카렐은 아무 생각 없이 열어보았다. 약 냄새와 누린내가 풍기는 액체가 그 안에 가득 들어있었다. 카렐은 이미 멀찍이 앞서가 버린 저 부끄럼 많은 황빈을 보며 모처럼 웃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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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작수가 드디어 10,000을 찍었습니다. (10,000 찍고 떨어지면 낭패인데;;;)
선작 자릿수 돌파 축하 의미에서 설문 업뎃했습니다. 황자들 인기투표(!!!) 입니다. 실은 한 명을 더 올려야 하지만(?) 사정상 공개할 수 없는 것을 양해해 주시고요... ^^;;
오늘은 분량도 빵빵하고 길게 올립니다. ㅎㅎㅎ (또 짤리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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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안 주고 가시는 분들 밉습니다
~~ (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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