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8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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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조사단은 미리 예고했던 대로 8시간 후, 수베르의 기준시각으로는 새벽 3시가 넘어갈 무렵 4곳의 식량기지에 도착했다. 7번 식량기지에 와 있던 헤즈도 평소 같은 군인의 때를 싹 벗어내고―유별난 쿠키사랑 덕분에 턱 밑까지 뒤룩뒤룩해진 그를 첫눈에 군인이라 여겨주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단정한 비단포와 서류가방을 든 엘리트 비슷한 모습으로 조사단의 셔틀을 맞았다.
누가 봐도 공무원 냄새를 풀풀 풍기며 셔틀에서 내려선 십여 명의 황실 내무부 직원들은 미리 준비해 온 두툼한 서류철에 견본을 담을 봉투 몇 개, 현장 사진을 찍을 자료 정도를 빼면 별반 가져온 것도 없었다. 내심 잔뜩 겁에 질려 있던 헤즈는 이들의 부실한 조사 준비에 내심 기가 막혔다. 조사를 받는 처지이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들은 이전에 플라칼 가에서 제출한 자료를 들고 사일로 이리저리를 뛰어다니며 대충 재고량을 체크하고 얼마 안 되어 돌아 나왔다. 반입과 반출 송장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컨베이어에 남아있는 반출 흔적도 변변히 체크하지 않았다.
서류만 들고 지금 있는 재고량만 대충 파악한 그들은 집에 있을 마누라와 남편 이야기로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1시간만에 되돌아왔다.
‘게을러터진 놈들, 봉급이 아깝네.’
헤즈는 가문 적장자답게 이런 생각부터 했다. 물론, 지금의 그로서는 이런 저들의 무사안일주의가 반가울 따름이었다.
“뭐, 서류가 대충 틀리지는 않네요.”
내무부 무슨 국장이라는 사내는 가져온 자료들에 서명을 해 넣고는 헤즈에게 불쑥 내밀었다. 서류는 이 창고의 곡물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지금 있는 딱 이만큼이며, 최근 들어 신고 안 된 반입이나 반출은 없었다는 확인 문서였다.
“여기 서명하면 되는 거죠?”
헤즈는 그들이 내민 자료들 대충 확인하고는 자신의 서명을 써 넣고 그 틈새에 작은 쪽지 하나를 끼워 돌려주었다.
“황상께서 부디 오해하시는 일 없게 잘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헤즈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쪽지를 받은 국장이라는 작자도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쪽지에 적힌 건 몇 줄 안 되는 사서함 번호와 비밀번호였다. 황제가 관료들의 뇌물 수수를 엄단한 이후 새로이 등장한 전달 방법이었다. 헤즈가 적어 준 그 사서함에는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인 2만 다리크 정도 가치의 금괴가 들어있을 터였다.
“보시다시피 우린 있는 그대로 보고 올린 거였고요, 황상은 물론이고 동부나 북부에서 행여 잘못 아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런 것 같군요.
국장이 뇌물 쪽지를 슬그머니 주머니에 감추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함께 온 직원들에게 셔틀에 타라고 손짓했다.
“뭐야, 별 것 아니잖아.”
황실 조사단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확인하며 헤즈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밤새 부산을 떨고 고민을 했었지만, 조사는 생각보다 훨씬 싱겁게 끝나버렸다.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고 달려온 보좌관이 멀어지는 셔틀을 보고 있는 헤즈에게 알렸다.
“델루지 가 4번 기지로 찾아온 조사단도 방금 떠났답니다.”
헤즈가 두둑한 턱을 만지작거리며 히죽 웃었다.
“황제 그놈, 조사단이라고 보내면서 나름 기대도 했을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서 어쩔꼬.”
헤즈가 대충 따져보니 4개 기지에서 잠시 빼돌려놓은 곡물만 해도 굶주린 북부와 동부가 반년은 족히 먹고 살 만큼의 양이었다. 그 많은 양을 시장에 안 풀고 움켜쥐고 있었으니 황제가 별짓을 다 해도 곡물 가격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됐어, 그럼 아까 띄워놓은 벌커들은 내일 저녁때쯤 다시 와서 쟁여놓으라고 해. 난 본가로 가서 한숨 좀 자야겠다.”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헤즈는 불룩한 배를 조이는 비단포의 벨트를 끄르며 타고 온 셔틀로 뒤뚱뒤뚱 향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식량기지의 직원들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하나 둘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
그렇게 거의 셔틀에 도착한 헤즈는 누군가 서둘러 쫓아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벌크선을 수배했던 이곳 운송 책임자가 사색이 다 되어서 달려오는 중이었다.
“왜?”
헤즈가 셔틀에 오르려다 말고 짜증스레 물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진 그 운송 담당자는 헤즈의 그 사나운 눈길을 차마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더듬더듬거렸다.
“방금……여길 떠난 벌크선에 태운 사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해적에게서 공격을 받은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연락이 끊겼습니다. 다른 기지에서 출발한 벌커들도 마찬가지랍니다.”
셔틀에 오르는 계단에서 다리가 풀려버린 헤즈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날 하루 미뤄져서 열린 제국회의 2일차, 아니 하루를 건너뛰었으니 실제로 3일차 회의는 우거지상이 된 남부제후들의 한숨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남부에서 유일하게 기근으로 날벼락을 맞은 5제후 마자리크 경을 빼면 약속이나 한 듯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진 4명의 제후들은 무어라 밀담을 나누며 바닥에 구멍이 날 듯 한숨만 거듭 내쉬는 중이었다.
어제 만찬장에서 나가버렸던 세데스의 모습은 오늘 어찌된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이런 차가운 분위기도 황제의 입장과 함께 일단 밑으로 가라앉았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차가운 표정의 황제는 피라미드 위 옥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남부제후들의 우울한 분위기만 빼면 다른 지역들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어제 파견한 조사관 친구들이 1차 보고를 보내왔는데.”
카렐이 서류들을 뒤적거리며 뚱한 표정으로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동부나 북부에서 괜히 남부를 의심했던 것 같소. 황실에 올린 서류들에는 크게 흠이 없는 듯하오.”
황제의 말에 북부최고제후 자격으로 참석한 세네피스가 벌떡 일어서며 언성을 높였다.
“말도 안 됩니다! 그간 남부의 연평균 생산량이 얼마인데 갑자기 그렇게 재고분이 확 줄어들 수가 있다는 겁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황제에게 모든 것을 맡겨둔 채 고분고분하던 세네피스의 변신에 어제까지만 해도 남부와 멱살잡이를 했던 다히르가 다 당황했을 정도였다. 일단 세네피스가 시작을 끊자 다히르도 질세라 뒤따라 일어섰다.
“그렇습니다. 어딘가 은폐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룻밤 조사로 남부의 재고량을 파악한다는 게 가능할 리가 있습니까? 다른 지역 사람들을 참가시켜 대규모 2차 조사단을…….”
“그렇습니다. 저희 서부에서도 대표단을 보내겠습니다.”
내내 조용하던 서부최고제후 네페티 황비까지 갑자기 일어서며 언성을 높이자 또다시 제국회의장은 시작부터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끄럽네!”
황제가 세 최고제후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황제가 특별히 뽑아서 보낸 조사단을 못 믿겠다니, 황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인가!”
“그런 건 아니오나…….”
“내 곡물 수급 문제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니 입을 다물지 못할까!”
다히르 공이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도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건 직감하고 있었다. 황제의 어머니와 비인 세네피스와 네페티가 황제에게 덤비는 상황도 구린내가 나는 듯했고, 황제가 분명 서류가 진짜임을 인정했는데도 ‘전혀 기뻐하고 있지 않은’ 남부제후들의 무거운 분위기도 어딘지 어색했다.
“아참, 그나저나.”
황제가 남부 3제후 호지 가 종장 헬리노스 경을 손짓했다. 제위전쟁 당시 전사한 카산드라 경의 장남으로 가문을 물려받은 그는 생긴 것부터 마치 쌍둥이처럼 어머니를 꼭 닮은 남자였다.
“내 여기 들어오기 전에 일리안의 황실군에서 급보를 받았는데, 위저 호라는 초대형 벌크선이 혹시 그대들 가문 것인가?”
벌크선이라는 말에 헬리노스뿐만이 아니고 방금 전까지 쑥덕대던 남부 종장들이 모두 화들짝 놀랐다.
헬리노스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제 가문에서는 벌크선을 직접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거래하는 민간 선박이겠죠. 종장인 제가 그런 것까지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별 것 아닐세, 해적에 납치되어 가던 벌크선 2척을 일리안의 황실군 프리깃이 포착했는데, 추격을 피해 해적들이 벌크선을 일리안에 불시착시켜놓고 도망갔다네. 지금 황실군이 도망간 해적들을 추격 중이야. 내 그러게 어제도 해적들이 들끓으니 치안군을 좀 강화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4명의 남부 종장들의 얼굴이 놀란 정도가 아니고 흙빛이 되었다. 기근으로 고생을 겪고 있는 마자리크 경의 영지 일리안은 종장의 협조 요청으로 황실군이 공식적으로 진주해 있는 상태였다.
카렐이 서류를 뒤적거리며 아무 일도 아닌 양 말을 이었다.
“그쪽이 기근 때문에 워낙 분위기가 흉흉해서 말이야, 주민들이 벌크선을 약탈하려고 하는 걸 다행히 마자리크 경의 군대가 재빨리 진주해서 지금 지키고 있다네. 그런데 안에 보니 곡물이 잔뜩 들어 있지 뭔가? 운항 자료에 보니 그대들 벌커가 영지에서 출발한 걸로 되어 있던걸?”
카렐이 슬쩍 눈을 흘겨 마자리크 경과 헬리노스 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지만 방향은 정반대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요즘 금값인 곡물인데 정상적인 운송이었는지, 밀수선인지 모르겠어. 해적에게서 되찾은 정상 운송품은 화주(貨主)에게 돌려주는 것이 법이니까 마자리크 경도 자네 가문 것이라고 확인해 준다면 규정대로 바로 돌려준다 했네. 허나 자네 가문 것이 아니고 밀수선이면 압류한 이그나토 가의 소유지.”
황제의 물음에 헬리노스 경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신들이 반출한 것이라 말한다면 꼼수가 고스란히 드러날 테고, 그렇다고 밀수선이라고 해 버리면 일리안의 주민들이 몇 달은 먹고 살 수 있을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을 이그나토 가에 공짜로 바치는 꼴이었다.
주변 남부 제후들과 잠시 눈짓을 주고받은 헬리노스 경은 피눈물을 참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제 가문에선……그런 운송을 한 일이 없습니다.”
“이런, 그럼 밀수선이었다는 말이네? 허어, 요즘 밀수꾼들은 간도 크지. 그 많은 곡물들을 대체 어디서 났을까?”
카렐은 눈꺼풀 하나 까딱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마자리크 경에게 고개를 끄덕거려보였다. 어마어마한 곡물을 공짜로 얻은 마자리크의 표정이 순간 기쁨에 넘쳤고, 헬리노스 경은 울기 일보 직전이 되어버렸다.
황제의 표정은 여전히 평상시와 아무 차이가 없었다. 그의 표정연기가 완벽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번 일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인지 누구도 읽을 수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헬리노스 경이 다른 남부제후들의 눈치를 보며 황제에게 애원했다.
“저어, 잠시 혹 다른 가문에서 잃은 것이 아닌지 확인할 수 있도록 잠시만 회의를 좀 중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음대로.”
카렐은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마냥 어깨를 으쓱하며 그들에게 시간을 내 주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헬리노스 경을 따라 남부제후들과 마누엘을 대신해 들어온 하디 델루지가 제국회의장 한쪽 구석에 모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황제가 관련된 것 같나? 벌커가 20척이 통째로 없어졌어. 세상에 그럴 해적이 어디 있냐고?”
최고제후 카나르 플라칼 공이 벌커로 곡물을 빼돌리는 이번 계획을 추진했던 하디 델루지에게 사납게 따져 물었다. 남부제후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배후를 의심했지만 그저 의심일 뿐 아무 근거도 없었다. 황제가 대놓고 곡물을 훔쳐간 것도 아니고 실제로도 해적들이 곡물을 노린다는 첩보가 최근 빗발쳤던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해적 문제는 하필 어제 황제가 대놓고 ‘남부에 경고했던’ 내용이었으니 다시 언급할 면목도 없었다.
“그럼 없어진 곡물들은 어쩌죠? 못 찾은 게 아직 18척이나 남았습니다.”
하디의 물음에 카나르 공도 한숨만 내쉬었다. 다른 지역을 몇 달 가까이 먹여 살릴 어마어마한 곡물이지만 당장은 찾을 도리가 없었다. 이렌느 경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른 지역 제후들을 살기어린 눈길로 노려보며 말했다.
“만의 하나 그 곡물이 동부나 북부, 서부로 들어갔다면 이번 제국회의에 맞춰 독립 선언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는 어려워집니다. 몇 달치 전략곡물을 확보한 자들이 쉽게 무릎을 꿇겠습니까?”
“그럼 독립 선언을 미뤄야 하나?”
카나르 공이 이마를 싸쥐었다. 하디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북부 하임달로의 워프 개통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늦어도 두세 달 후면 비엔에서 하임달과 수베르, 탈라스로 직통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 전에 미리 본격적인 개전을 시켜 놓아야 이 개통이 효과적인 일격이 될 수 있습니다.”
“저 녀석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건지 알 수가 없군. 자식까지 줄줄이 잃고 아직도 제정신일까?”
카나르 공이 고심을 하며 황제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속으로는 얼마나 곯았을지 몰라도, 피라미드 위의 황제는 사뭇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류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황제가 훔쳐간 것이라면 그것을 빌미로 대놓고 이참에 독립선언과 선제공격의 명분으로라도 삼겠지만 그것도 아니니 미칠 지경이었다.
카나르 공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해적의 짓이든 황제의 짓이든, 주머니에 들어가는 보석이나 금괴도 아니고 웬만한 마을 하나만한 벌크선이 18척이야. 어느 벌크선인지도 다 알고. 워프루트만 막고 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남부를 절대 못 빠져나가. 괜히 벌벌 떨 것 없다. 마자리크 저년한테 뺏긴 건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는 잡히게 되어 있어.”
“그럼 일단은 예정대로 진행하는 겁니까?”
헬리노스 경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하디와 슬쩍 눈짓을 주고받은 카나르 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끝나기 전에 어떡해서든 곡물을 찾아야지. 그것밖에 더 있나?”
남부 제후들의 짧은 논의가 끝나고 그들은 서둘러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럼 본격적으로 오늘의 안건을 시작하겠소.”
황제가 남부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못 본 척 파일을 펼쳐들었다. 이상한 조짐을 눈치 챈 다히르 공도 그 이상 식량 문제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제국회의가 3일이나 더 남아있었다. 카렐은 미리 배포한 회의 자료를 펼쳐들고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의 안건은, 오염된 곡물의 확산 방지를 위한 조치이니 내 전에 통지했던 대로 각 가문에서는 마련해 온 정책 방향들을 보고하도록 하시오.”
어차피 황제든, 제후들이든, 안건 자체는 뒷전이었다. 회의는 이들의 전쟁터를 연출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곡물을 놓고 남부제후들의 탐욕이 극을 달리던 그 시각, 남부의 접경 지역에서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기근 3년차에 접어들고 다른 지역들의 기근이 극단의 상황까지 치달으면서, 풍요로운 남부의 변방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양쪽의 극단적인 빈부 격차에 정확히 비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변경 지역의 주민들은 굶주리고 사나워진 이웃들에게서 흥청망청하는 남부를 앞장서서 지켜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맘에 들 리가 없었다.
게다가 군사지역은 한편으로는 교역의 중심지라는 뜻이기도 했다. 곡물 금수와 그에 따른 상대방의 보복 조치가 반복되면서 주된 수입이던 교역 중개가 개점휴업이 되고, 결국 변방 주민들은 후방의 주민들의 입는 풍요의 대가를 대신 치러줘야 하는 억울한 처지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서부 테나토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남부 칼릴이었다. 이곳은 제후지역간의 경계 중에서 회수로만 치면 제국에서 단연 가장 많은 분쟁이 있어 온 지역이면서 동시에 최대의 교역 허브라는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엔 10년이 멀다하고 테나토와 번갈아가며 전쟁터가 되었던 이곳도 강력한 카렐 황제의 즉위 이후로는 몇 번의 사소한 대치상황을 빼면 단 한 번의 직접적인 분쟁도 벌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이젠 전쟁보다 평화에 더 익숙해진 주민들은 더 이상 서부와의 싸움을 원하지 않았고, 한 시간짜리 짧은 워프루트 건너 서부 테나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에게 요즘의 긴장된 정세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근 며칠간은 이웃 서부가 동부나 북부처럼 빈사상태가 되기 전에 선제공격을 시도하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주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전쟁 여부를 결정하는 건 운명을 내맡겨야 할 이곳 주민들이 아니고 멀리 후방에서 계산기를 놀리고 있는 제후들이었다.
사실 칼릴 자체는 남부 치고는 그리 풍요로운 지역이 아니었다. 칼릴은 강도, 바다도 없는 황량한 육괴 위로 두께 0.5~1스타디아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얼음층이 덮인 행성이었다. 당연히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식물 한 그루 없는 얼음과 거친 산악으로 뒤덮여 있고 그 중간중간 지열이 나오는 곳에 얼음이 녹아 생긴 깊은 구멍들이 곰보처럼 널려 있었다.
그들 중 사람이 살 수 있는 저위도의 구멍들 중 몇에는 얼음 녹은 물로 생긴 호수를 중심으로 한 거주지가 여럿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곳들이 소위 ‘홀’이라 불리는 칼릴만의 거주지였다. 나가는 즉시 얼어 죽는 다른 얼음지대와는 달리 이런 홀에서는 지열 덕분에 시설 농사도 가능했고 풍성한 담수와 온천수로 다른 핸디캡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다만 홀들은 까마득한 얼음병풍과 1년 내내 사라지지 않는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폐쇄된 공간이다 보니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사생결단을 하고 둘 중 하나가 다 죽어나가야 끝나곤 했다. 베아트릭스의 아버지 조지프 플라칼 경이 전사한 곳도 바로 이곳의 홀들 중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악명 높은 ‘헬홀’이었다.
이곳 칼릴이 나름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이 살기를 꺼리는 곳이 된 것도 이런 주기적인 침략과 잊을만하면 벌어지는 빙하의 붕괴 때문이었다. 서부 테나토는 이곳의 풍성한 물이 필요했고, 남부 칼릴은 테나토의 뜨거운 태양과 비옥한 흙이 필요했다. 둘이 한때 죽자사자 싸웠던 이유는 그뿐이었다.
헬홀은 항상 그렇듯 오늘도 1스타디아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희뿌연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헬홀 북쪽의 텅 빈 호수변 하역장에는 군단장급을 뜻하는 장군 제복의 한 다부진 남자와, 그와는 대조적인 산악 경보병대 사병 제복 차림의 호리호리한 여자가 마주서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제복과 계급만 보아서는 그렇게 단둘이 얼굴을 바싹 맞대고 마주서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둘 중 저자세를 보이고 있는 건 사병이 아닌, 장군 쪽이었다.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겠지요?”
그 ‘장군’은 혹시 누가 쳐다보는 사람이 없는지 벌써 몇 번째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열로 따뜻하게 데워진 호수에서 살을 에듯 차가운 대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뿌연 물안개가 이 둘의 어딘지 이상한 만남을 마치 베일처럼 주변의 눈에서 가려주고 있었다.
“제가 제후님을 이렇게 만났다는 사실을 가문에서 알면 어찌될지 아시겠지요?”
“다행히 자넨 플라칼 가 소속 아니던가, 콘스탄츠 장군.”
세데스는 그 장군을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니 보안군에 날 신고할 의무는 없지.”
세데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눈앞의 이 남자, 칼릴연합군 부사령관인 후스 콘스탄츠 장군의 크고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부와의 접경을 지키는 5만이 넘는 칼릴의 남부연합군은 전통적으로 델루지 가와 플라칼 가가 10년 단위 교대로 사령관과 부사령관을 맡고 있고, 현 사령관은 델루지 가 사람, 그리고 이 젊은 무장이 바로 그 뒷서열이었다.
후스 콘스탄츠 장군은 세데스가 20살 무렵 이곳 칼릴에서 신분을 감추고 산악 경보병으로 복무할 때부터 내심 눈독을 들였던 심지 굳고 유능한 무장이었다. 옅은 다갈색 머리칼에 귀족적 외모의 이 미남자에게선 군인, 그것도 강인하기로 소문난 플라칼 가의 장군이라는 인상은 전혀 풍기지 않았지만 경력은 그와는 딴판이었다.
지난 제위전쟁 당시, 플라칼 종가 근위부대의 말단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후스는 남편 히르직스에게서 버림받은 종장의 장녀 미노아를 델루지 가 근위병들에게서 구해내고 카나르 공의 눈에 들었던 일이 있었다. 비록 미노아는 부상으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고 말았지만 카나르 공은 무거운 임산부를 업고 압도적인 숫자의 적과 용감히 적과 맞섰던 젊은 사관의 충직함을 사 특진과 함께 근위연대의 요직으로 바로 등용을 했다.
그 뒤로도 그는 제위전쟁 막판의 여러 전투들에서 큰 공훈을 세우고 카렐 황제의 눈에까지 띄어 전후엔 상급귀족으로의 신분 상승까지 받고 순식간에 교위까지 올라 플라칼 가 내에서도 가히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폐쇄적이고 인명을 경시하는 플라칼 가의 군대 분위기에서 그의 선하고 강직한 성격은 항상 문제를 일으켰고, 결정적인 한 사건이 가문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싹 앗아가 버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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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를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2부 중반에 잠시 괜츈하게~ 나왔던 친구인데 작가가 한동안 꿍쳐놨습니다. 당시에 이름에서 1회용 캐릭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신 분이 계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연재분에서는 511회부터 잠시 나오고요, 출판본은 2부 3권 315쪽입니다. 그런데 찾아서 알려드리는데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안 주고 가시면 밉습니다~~
~~ ( ̄∇ ̄)ブ~~★
(설문은 마리안이 단연 1등이고 카이와 마하가 2등을 놓고 다투는 중이군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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