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9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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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에 연락해 보니 비엔에 갔다고 그러던데?”
“그쪽 묘역에 눈사태가 났다고 해서요.”
세데스의 물음에 후스가 쓰게 웃었다. 그때, 호수 쪽에서 들린 물소리에 긴장하고 있던 후스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무기를 쥐었지만 별일은 아니었다. 뿌연 수증기는 여전히 이 둘을 완벽히 감싸주고 있었고, 주변에는 행여 접근하는 사람이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는 세데스의 두 가디언들이 전부였다.
세데스는 후스의 가슴에 달린 상장(喪章)을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무 늦었지만 명복을 비네. 장례엔 내 직접 못 가 미안하네. 괜히 플라칼 가에서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제 종장님도 아니신데 꽃까지 보내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내 상관이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그래, 묘는 괜찮고?”
“소년단 묘 절반이 파묻히고 쓸려가서 눈밭을 열흘이나 뒤졌습니다. 시신이 쓸려가다가 많이 상해서 장의사에게 다시 맡겼습니다.”
후스의 눈꼬리에 눈물이 조금 맺혔다.
후스에게 비극의 시작은 얄궂게도 그의 놀라운 공훈 때문이었다. 이전 베아트릭스 일가에게 비극을 불러왔던 플라칼 가의 가혹한 혼인제도와 군사문화는 델루지 가의 충견 신세를 벗어나 최고제후가 된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강제결혼과 소년단 체계를 유지했고, 가혹한 민간인 통제도 여전했다.
가문에서는 다른 촉망받는 무장들에게 지금껏 그리했듯, 이 젊고 잘생기고 전도유망한 청년에게도 후계자인 헤즈 사령관 딸과의 결혼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평민 출신 약혼녀가 있었던 후스는 이상한 조짐을 눈치 채자마자 서둘러 결혼식을 올려 종장 카나르 공과 헤즈를 크게 실망시켰다.
결국 화가 난 가문에서는 후스를 고향인 변방 칼릴로 발령을 내면서 남편의 품에서 신혼의 행복에 빠져 있어야 할 아내는 남편의 새 근무지와 상극인 비엔 6번 행성의 북극권 쿠엘스크에 있는 ‘군인 가족 마을’에 강제 이주시켜버렸다.
사실상 유배에 가까운 이런 강제이주는 구성원과의 혼인을 거부하는 기혼의 무장들을 압박해 이혼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미노아와 히르직스의 끔찍한 결혼의 말로를 눈으로 보았던 후스는 사랑하는 아내와 출세를 맞바꾸는 선택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음모와 정치가 난무하는 중앙에 있기는 애당초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왕이면 묘라도 좋은 곳에 쓰지 그랬어.”
세데스의 물음에 후스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는 휴일마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 먼 거리를 오가며 그리움을 달랬고, 아내도 남편을 위해 극지의 추위를 감내하며 20년을 넘게 버티었다. 그리고 8년 전에는 아버지를 쏙 닮은 예쁜 아들까지 낳아 주었다.
하지만 6달 전, ‘소년단 가족 동계훈련’을 떠났던 후스의 아내와 아들은 눈보라 속에서 실종되었고, 열흘이나 지난 후, 캠프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얼음동굴에서 껴안은 채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뒤늦게 연락을 받은 후스가 달려갔을 때, 가문에서는 이미 처와 아들의 시신을 다 수습해 염과 입관까지 다 마쳐놓은 상태였다. 후스에겐 관을 닫기 직전 처자식의 얼굴을 잠깐 본 것 외에는 오열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처자식의 유품조차 받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의혹 투성이였다. 남편의 일로 누구보다 조심스럽던 엄마와 8살 소년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밤중에 불침번의 눈에도 띄지 않고 캠프를 벗어나 죽었는데도 후스가 들은 설명은 ‘아이 화장실을 데려가다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훈련 책임자는 감봉을 당했고, 그날 캠프 불침번을 맡았던 말단 초병 2명이 태형을 받는 선에서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소년단 묘지에 묻어야 하는 게 규칙이랍니다.”
한참만에 나온 후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지만 세데스는 후스의 입술이 더 하고픈 말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살아있는 가족을 못 잡아둔다면 죽은 시체라도 잡아두는 것이 플라칼 가의 방식이었다. 배신하거나 항복한 무장들의 죽은 부모형제나 자식들의 시체가 무덤에서 꺼내어져 토막 나 걸리거나 짐승에게 먹이로 던져지는 광경은 플라칼 가에선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신만이라도 제가 있는 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는데.”
결국 참다못한 후스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세데스는 그에게 짐짓 안타까운 얼굴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사실 그는 종장에 있을 때부터 이 남자, 심지어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명색이 2제후였던 그가 최고제후가의 일개 중랑장에게 관심을 두며 심지어 개인적으로 위로의 꽃다발까지 보냈던 것이 그저 옛날의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 플라칼 가와 적당한 거래를 통해 이 유능한 무장을 스카웃해오거나, 혹은 그 이상의 쓸모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지만 자신이 종장에서 밀려난 후에 그런 날이 온 건 퍽이나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참, 약혼했다지?”
후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데스도 후스에겐 가슴을 후벼 파는 질문이리라는 것을 알고 던진 것이었다. 아내와 아들의 공식적인 장례기간이 지나고 며칠 후,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플라칼 종가로 불려가 강제로 약을 탄 술을 먹은 후 그 자리에서 헤즈의 장녀와 상견례를 갖게 하고 약혼을 치렀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그는 칼릴연합군 부사령관인 장군으로의 승진을 받았다.
플라칼 가는 누가 봐도 미심쩍은 처자식의 죽음에 관해 후스가 깊이 생각하고 분노하고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아내와 아들이 죽은 지 정확히 6달이 되어 금혼 기간이 풀리는 1달 후면 쿠엘스크의 차가운 눈벌판에 묻힌 처자식을 놓아둔 채 플라칼 가의 맏사위가 될 운명이었다. 그도 어느새 미노아의 남편 히르직스의 길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헤즈 녀석은 딸이 자네 아이를 가진 것 같다고 그런다던데?”
“거짓말입니다. 제가 딴생각을 못 하게 하려는 수작이죠.”
후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 불임시술을 했습니다. 그년이 그맘때 같이 잔 다른 어떤 놈의 아이일 겁니다.”
세데스가 화들짝 놀랐다. 후스는 결혼을 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가문을 한 발 앞서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라는 걸 부인 안 한 게 혹시 이유가 있나?”
세데스가 조심스레 묻자 후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혹시 이런 날이 올까봐 그랬을지도 모르죠.”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데스는 홀 주변을 커튼처럼 에워싸고 있는 높은 빙하들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여긴 어쩌면 또 전쟁터가 될지도 몰라.”
“알고는 있습니다.”
“그냥 전쟁이 아니야.”
세데스가 재차 후스를 돌아보았다.
이곳 칼릴은 서류상으론 플라칼 가의 영토로 되어 있지만 그들도 원해서 이런 이상하고 위험천만한 곳을 가지게 된 건 아니었다. 원래는 델루지 가에서 방계 플라칼 가가 분가하면서 ‘여기를 지킬 최종 책임’을 그들에게 넘겨주며 플라칼 가의 어깨 위에 강제로 얹어놓은 것일 뿐이었다. 이곳은 남부의 부를 노리는 서부를 막는 최전방이었고, 플라칼 가 혼자 떠맡는 건 분명 억울한 처사였다.
그래서 서류상 주인과는 별개로, 이곳은 델루지, 플라칼, 세닉 가에서 각각 파견된 5만의 연합군단이 맡고 있었다. 동부를 상대하는 남부의 반대편 접경 페스트에도 원래는 델루지, 호지, 이그나토 가가 함께 주둔했었지만 황제가 페스트를 이그나토 가에 준 것에 대한 항의의 뜻에서 두 가문이 철수하면서 지금은 이그나토 가 혼자 맡고 있었다.
원래 이런 최전방은 3년 단위 순환근무를 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 본토 출신들은 후방 정규군단이 올 때까지 ‘시간 때우기 소모품’ 역할을 해야 하는 이곳 상주군단 근무를 극도로 기피했다. 덕분에 사병과 사관, 일선 장교의 대부분은 이곳 거주민 출신의 토박이 지원병이고, 그런 그들을 각 가문 본토에서 파견한 소수의 고위 장교들이 지휘하는 모양새였다.
카렐 황제의 즉위 직후, 테나토와 칼릴은 황제의 중재 하에 서로의 자원을 나누는 협약을 체결하고 30년이 넘는 모처럼의 평화를 누렸지만 보름 전, 델루지 가와 플라칼 가에서 일방적으로 협약 파기를 선언하면서 이곳에도 살벌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남부가 다른 지역들 모두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할 것 같아. 어쩌면 독립을 시도할지도 모르지. 전략적으로는 다른 지역들이 굶주려 있는 지금만한 기회가 없으니까.”
“제후님께서 현직에 있을 때 시작된 일 아닙니까?”
후스다운 직설적인 지적에 세데스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변명은 하지 않겠네. 내가 시작했어. 다른 지역들이 기근에 빠지길래 난 남부가 돈을 많이 벌고 다른 지역과 황실이 낭패에 처하기를 바랐네. 최고제후로 돌아가고 싶어 몸이 달아 있던 어리고 철없는 초짜 제후의 치기였지. 남부의 생산력을 보여주고 합당한 대우를 요구할 참이었어. 그런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내가 밀려나고 어어 하고 손을 못 쓰는 새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커지더군.”
세데스는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지도자가 함부로 잘못을 시인하는 게 아니라지만, 내 철없는 야심을 자극한 배후에 얼마나 무서운 음모가 있었는지 몰랐던 건 분명한 내 잘못이네.”
“남부가 독립을 한다고요? 허, 윗분들이 감투에 목마르셨군요.”
후스가 코웃음을 쳤다.
“황제령이 황상께서 30년간 개혁을 밀어붙여 평민에 노예까지 두루 살만한 지역이 되어갈 동안 남부는 대지주들의 배만 불려가며 거꾸로 갔습니다. 제가 지난 전쟁에서 플라칼 가를 위해 싸우며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제 처자식이 철조망에 갇혀 한심한 몰골로 사는 것도 아니었고요. 전쟁이 또 난다면 돈 없는 사람들만 전장에서 무수히 죽어나가겠죠. 항상 그랬듯이 돈 많은 자들은 전쟁 특수로 더 부자가 될 테고요.”
후스의 꽉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 제후였던 세데스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후스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전 다른 지역 사람들 굶는 것을 두루 생각할 만큼 박애주의자는 아닙니다. 다만 제 고향 칼릴과 아내가 살던 비엔의 평민들이 점점 커지는 빈부격차에 절망하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플라칼 가가 최고제후가가 되었지만 도리어 보통 사람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습니다.”
세데스는 후스의 꽉 쥔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칼릴과 비엔의 민심을 아십니까? 북부에선 너도나도 다 먹을 게 없으니 탐내고 원망할 일도 없지만 남부에선 마당 앞 지주의 밭에선 어마어마한 밀이 멀쩡히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것들이 수확 후엔 누군가 감쪽같이 가져가고 가격만 올라갑니다. 누군가 빈민들의 주린 입에 들어가야 할 빵을 빼앗아 가격만 올리고 있죠. 먹을 것이 너무 비싸 병사들은 배식을 빼돌려 가족들에게 가져가고 농장마다 좀도둑으로 난리입니다. 칼릴에서만 지난 열흘간 29명을 농작물 절도로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쓰던 철조망과 무인 정찰셔틀이 지금은 대지주들 농장에 죄다 동원되어 배고픈 좀도둑들을 잡고 있죠. 방금 전쟁이라 하셨나요? 여긴 이미 전쟁 중입니다.”
흥분한 후스를 세데스가 얼른 진정시켰다.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
“그러시겠죠. 아니면 쫓기는 신분에서 칼릴연합군 부사령관을 뭣 하러 찾으셨겠습니까?”
후스가 절반 진지하게, 절반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세데스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14시간 후, 그러니까 저녁 10시 55분에 여기로 벌크선 20대의 선단이 들어올 게야.”
“혹시 이번에 해적에 공격당했다는 그 선단입니까?”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네. 그 선단을 여기에 억류해 주게. 그게 전쟁을 막고 곡물가를 떨어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제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거긴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이 가득 실렸겠군요.”
의도를 간파당한 세데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후스가 계속 따져 물었다.
“억류해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혹시 남부인들의 땀을 팔아 외세를 끌어들여 복직을 노리시는 것이라면 전 협조 못 합니다.”
“난 남부제후일세, 황상의 큰 뜻에 따르지만 그렇다고 남부를 배신하지는 않아. 난 제국의 곡물가를 폭락시키려 하네.”
세데스의 단호한 대답에 후스의 표정이 비로소 진지해졌다.
“그 곡물은 델루지 가, 플라칼 가, 세닉 가가 곡물가를 폭등시키려 감춰뒀던 것이네. 가문에선 해적의 것이라고 해명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니 자네도 곡물이 해적의 것이니 본가에 못 넘긴다고 하게 해적의 압수물품은 그 지역의 것이 되니 플라칼 가 몫은 자네가 칼릴 주민들의 이름으로 팔면 돼. 난 델루지 가의 몫을 3년 전 가격의 1.7배로 받고 팔 것이네. 현 시가의 5분의 1이지. 보통의 남부인들에겐 절대 손해가 아냐.”
“그럼 당연히 본가가…….”
“그래, 부정하지 않겠네. 플라칼 본가에서 펄펄 뛰겠지. 황상께서 보호해 주실 테니 최대한 버티며 다 팔아버린 후에 황제령으로 달아나게. 곡물가를 떨어뜨려 플라칼 가, 아니 남부와 제국 전체 시민들을 살릴 수 있지. 손해는 대지주들과 제후들의 몫이네. 어떤가?”
후스가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세데스를 올려보았다. 잠시간 말이 없던 후스가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었다.
“고작 그 정도 생각하고 오셨다니 실망이네요. 싫습니다. 전 그렇게 무력하게 도망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전 고향 칼릴을 떠나지 않습니다. 제후님도 계속 떠돌이로 사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후스의 거절에 순간 당황한 세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손이 하마터면 뒤춤의 단검으로 갈 뻔했지만 한 박자만 참기로 했다. 후스가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었다.
“30년 전 제위전쟁 때 플라칼 가문도 물갈이가 되었어야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전쟁 중에 갖은 악행을 저지른 카나르 공 일가가 막판에 황제를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물갈이되지 않은 게 비극이었습니다. 전쟁에만 이기면 변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폭압정치를 하는 가문에 충성을 바친 저 역시 책임이 있습니다.”
후스의 대담하다못해 충격적인 발언에 놀란 세데스가 반사적으로 수증기로 가득한 주변을 재차 둘러보았다. 이 남자는 그가 예상한 것보다 도리어 더 큰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 지금…….”
“가문은 최고제후가 된 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플라칼 가는 최고제후로 자격이 없습니다. 카나르 공은 변화를 모르고, 장남 헤즈는 전보다 더 야비해졌죠. 양심과 권위가 충돌한다면, 전 양심을 따릅니다.”
세데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생각한다면, 그도 생각을 바꿔야 할 듯했다.
후스가 입술에 야무지게 힘을 주며 물었다.
“늙고 변화를 모르는 남부를 바꾸려면 제후님이나 저 같은 젊은 군인들이 움직여야 합니다. 여긴 3만의 델루지 가 군대와 2만의 플라칼 가 군대, 5천의 세닉 가 군대가 있습니다. 사병과 사관의 대부분은 여기 출신이고 본토 출신들은 고위 장교단에만 얼마 있을 뿐입니다. 제후님. 델루지 가의 종장이신 제후님의 군대도 3만이 있습니다. 여기 칼릴을 지키기엔 충분한 병력입니다.”
반복해 말하는 후스의 의도를 읽은 세데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황상께 서부가 어떤 상황에서도 이곳을 먼저 침략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받아 주십시오. 플라칼 가 군대는 제가 맡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기득권의 명령에 반기를 들려면 기댈 곳이 필요합니다. 델루지 가는 제후님께서 계시지만 플라칼 가를 제가 계속 이끌 수는 없습니다. 처음엔 그간의 분노로 절 따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이반할 겁니다. 구심점이 될 ‘플라칼’ 혈통이 필요합니다.”
후스가 세데스의 눈을 힐끔 올려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엘룬 플라칼 리쿠 옹주께서 어떤 분이신지 꼭 뵙고 싶습니다.”
순간 세데스는 오싹함까지도 느꼈다. 이렇게 나올 정도라면 이 남자는 이미 ‘플라칼 가의 피갈이’를 생각해 왔다는 의미였다. 가족의 죽음과 강제 약혼으로 한이 서린 남자의 눈가에 핏빛이 묻어나고 있었다.
“자네가, 아니, 플라칼 가 무장들이 원한다면, 내 여기로 모셔오지.”
“이곳의 세닉 가 주둔군은 가문 후계자 요아킴 세닉 중랑장이 맡고 있어서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 친구를 억류하고…….”
“아니, 그 친구는 내게 맡기게.”
후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데스는 나름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날의 늦은 저녁 무렵, 후스는 요아킴 세닉 중랑장과 연합사령부 영내를 걸으며 가볍게 말을 건넸다.
24시간 내내 안개가 뒤덮고 있는 헬 호수의 동쪽 귀퉁이에 위치한 칼릴 연합사령부는 세 가문에서 파견한 1만 5천이 상주하고 있는 중심지였다. 여기에 헬홀 주둔군 모두를 합치면 칼릴 연합군 절반이 넘는 3만의 병력이 모여 있으니 이곳을 차지한다는 건 사실상 칼릴을 차지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칼릴 연합군의 세닉 가 연대 지휘관인 요아킴 세닉 중랑장은 조금은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아, 딸아이가 상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허어, 그동안 딸 때문에 그리 걱정하더니.”
요아킴은 함께 걷는 후스를 힐끔 돌아보며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처와 아들을 잃은 후스에게서 이런 축하를 듣는 것이 그다지 맘 편하지는 않았다.
“황상의 덕분입니다.”
요아킴이 들릴 듯 말 듯 낮게 중얼거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사흘 전, 황제가 소개해 준 밀리타를 거부하면서 어머니와 가문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당사자였다. 그 일로 황제와 어머니인 종장 이렌느 경을 볼 면목이 없어진 그는 도망치듯 수베르를 빠져나와 이곳 칼릴의 영내에 소리 없이 처박혀 있었다.
조강지처 아내가 죽은 후, R의 자가면역질환으로 사경을 헤매는 어린 딸을 혼자 데리고 살아야 하는 그에겐 일상 모두가 줄타기나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황실 내의원에서 그 병을 완화시킬 수 있는 약을 찾아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딸과 함께 뛸 듯 기뻐하기는 했었지만 기쁨은 그날 하루였다. 생각해 보니 그 약은 이제야 막 시제품이 나온 상황이었고, 황제는 보나마나 황자들에게 제일 먼저 쓸 터였다. 그렇다면 어느 세월에―그것도 자신이 소개한 여자를 대놓고 차 버린 괘씸한 남자의 딸에게까지― 그 약의 순서가 올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요아킴은 그날 밀리타를 너무 야박하게 대한 것을 뒤늦게나마 후회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이렌느는 후계자인 장남이 쓸데없이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해 탈이라며 그를 일부러 이 고약한 변방부대에 처박았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이름과 성격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의 천성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로 속앓이를 하던 오늘 낮, 황실 내의원의 하심 예킨터스 응교가 주사약 시제품을 들고 그를 불쑥 찾아왔다. 내심 보복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기고 있던 요아킴은 황제의 느닷없는 선물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심은 아직 생산량이 적어 3회분밖에는 줄 수 없다고 미안해하며 딸아이에게 첫 주사를 놓아주었다.
효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단 1시간 만에 딸아이의 호흡과 체온, 맥박이 안정되었고, 몇 달 만에 아빠와 눈도 맞추고 손도 잡아주었다. 아이가 당장 나은 건 아니지만 매일 식물인간처럼 누워 가쁘게 숨만 몰아쉬는 딸의 모습에 익숙해 있던 요아킴에겐 아빠의 거친 손가락을 꼭 쥐는 딸아이의 작은 손길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기적을 선사한 하심은 더 만들어지는 대로 가져오겠다며 그에게 이틀치 주사약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요아킴은 이제 아이를 정말로 살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들었나? 111번 홀에서 일가족 3명이 죽은 채로 발견됐다네.”
자식 생각에 빠져 있던 요아킴은 후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또요?”
“빙하감시원이었다가 해고당했는데 그 전에도 월 88다리크밖에 못 받아 모은 돈도 없었나봐. 다섯 식구 하루치 빵값만 5다리크 들었다지. 맏딸이 군대에 있고 농사도 못 짓는 땅 한 뙈기가 있어서 식량지원 대상에서도 탈락했다지. 외진 데 사는데 할룩스하고 당나귀도 팔아버려서 외부에 도움도 요청 못 한 것 같아. 엄마가 굶어죽고 아빠가 마을에 걸어서 도움을 구하러 간 동안 남아있던 두 아이들도 굶어죽었다더군.”
요아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도 남부제후들의 고(高)물가 정책에 동참한 어머니 이렌느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의 가족사를 챙기느라 요즘은 정치 문제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여유가 없었다. 최소한 그의 영지인 루게에서는 아직 그렇게 눈에 띄는 아사 사태는 없었고, 자신의 땅도 아닌 칼릴의 일반인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일가족 아사가 이번 달만 8번째야. 111번 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요아킴은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자신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부는 썩어가고 있어.”
후스의 공격적인 말투에 요아킴은 화들짝 놀랐다.
“자네 어머니도 한몫 하고 있네. 자네도 젊은이라면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발끈한 요아킴이 뭐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바로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는 대화 내용을 돌리는 선에서 일단 민감한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령관님께서 갑자기 왜 모이랍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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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은 알고보니 남부의 미훈남집합소(?) 였습니다. ㅎㅎㅎ
에구구, 근데 오늘 다른 일로 연재가 좀 늦었습니다. (실은 어젯밤 출판본 작업하느라 3시간밖에 못 잤더니 너무 피곤해서.... 딱 10분만 눈 붙이고 일어난다는게 깨어보니;;;)
어쨌든 오늘도 연재주기 맞추고 갑니다.;;;;
늦었다고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 ̄∇ ̄)ブ~~★
(설문은 마리안이 단연 1등이고 적었더니 바로 마하랑 오빠들이 치고 올라왔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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