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10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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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령관님께서 갑자기 왜 모이랍니까?”
후스는 대답을 미뤄둔 채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이곳 칼릴 주둔 연합군 전체를 지휘하는 지휘소 건물에 삼엄한 경계 하에 놓여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그 앞을 지키는 부대였다. 오늘 아침까지 이곳을 지키던 플라칼 가 헌병대가 후스의 지시로 정세가 불안정한 111번 홀로 파견되면서 다른 부대가 임시로 맡고 있었다.
“산악 경보병대가 웬일로요?”
요아킴은 별 생각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나같이 마르고 다부진 몸에 눈밭의 반사광으로 까맣게 탄 얼굴, 꾹 다문 입술에서 풍기는 인상으로도 웬만한 사람들은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할 모습들이었다.
델루지 가의 산악경보병 기동대는 유사시 적 후방 침투와 게릴라전을 위해 편성된 특수부대였다. 이들은 30여 년 전에는 플라칼 가 본토인 비엔6번 행성의 고산지대 두딘카에서 라마단 학회 기습에 투입되어 코리온과 하심을 곤경에 모는 악역을 맡았었고, 제위전쟁 때도 황제령의 흥안령 산맥에 배치되어 연합군의 후방을 지키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었다.
옛날 오르테 부인이 딸 세데스에게 신분을 감추고 말단 사병 딱지를 달아 등 떠밀어 입대시켰던 것도 남부제후군 최강으로 꼽히는 혹독한 군기와 유별난 자부심, 유대감 때문이었다. 한 번 경보병으로 들어오면 부대에서 죽을 때까지 뼈를 묻다보니 외부에서의 전입과 전출이 거의 없는 것도 이들만의 특징이었다.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뺀질한 헌병들보다는 이네들이 나을 것 같아서.”
후스가 최대한 짧게 설명했다. 요아킴은 지휘소 앞 철조망 출입문을 지키는 그들 경보병 분대 병사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경보병이라 무장은 칼과 투창을 겸한 짧은 창, 제후군으로는 드물게 작은 석궁을 허리춤에 달고 있었다. 칼릴에 주둔하는 산악경보병은 2천 정도에 불과하지만 홀을 벗어난 고지대 빙하지역에서까지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병력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님, 중랑장님. 모시겠습니다.”
분대장은 안에 드는 장군 후스와 중랑장 요아킴에게 기계적인 부동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2명의 병사들에게 그들을 호위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요아킴은 그들의 얼굴을 힐끔 보았지만 경보병들이 설맹(雪盲)을 막기 위해 끼는 거울빛 자외선 보호경 때문에 어딜 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지휘소 홀에는 30여명의 핵심 참모진과 운영요원들까지 50여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비 임무를 맡은 산악경보병 30여명이 무장을 한 채 무표정하게 그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젊은 친구들이 왜 이리 늦어?”
지휘소 메인 홀에서 두 젊은 무장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칼릴연합군 사령관인 두지아이 델루지 대장군이었다. 사령관 마누엘의 사촌누나인 이 늙수그레한 여인은 스루바라 교단 고위신관이었던 어머니의 이름과 직업까지도 그대로 물려받아 한때 교단에 성직자로도 몸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름 연륜도 있고 모난 곳 없는 온화하고 무던한 성격에 사람들을 잘 이끌기는 하지만 주로 행정 쪽에만 몸담았다 보니 실전 경험은 거의 없는 것이 흠이었다. 덕분에 전장에서 잔뼈 굵은 변방의 사나운 장교들 사이에선 그냥 계급 좀 높은 행보관 정도로나 인식되고 있었다. 조심스런 성격 탓에 위험을 감수하고 세데스를 지지할 간 큰 무장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누엘을 위시한 원로들 편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전에 세데스의 어머니 오르테가 중립적이면서도 사실상 문관에 가까운 두지아이를 남부의 화약고 칼릴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던 것도 뒤집어놓고 보면 그동안은 이곳의 긴장감이 그만큼 낮았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이번에 세데스가 쫓겨나고 남부가 서부와 협약 파기를 선언하면서 조만간 이 자리도 경험 많고 마누엘을 잘 따르는 야전 출신 무장으로 교체될 것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돌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요아킴은 어딘지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후스에게서 서둘러 벗어나 두지아이에게 다가갔다. 두지아이는 지휘소 테이블 위에 몇 장의 서류들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엥? 오는 길에 후스 경이 얘기 안 해 줬나? 지난번 남부 벌크선 20여대를 통째로 훔쳐간 해적들이 지금 우리 쪽 워프루트로 나오다가 딱 걸렸어. 2척은 페스트 쪽에서 걸렸고 나머지 18척이네. 조금 전 18척 모두 나포에 성공해서 방금 우리 경보병 기동대가 진입했네.”
“휴우, 이제야 해결됐군요. 어머니께서 그것 때문에 밤잠도 못 주무셨다던데.”
요아킴이 이런 중요한 내용을 아직 안 알려준 후스를 책망하듯 슬쩍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굳은 표정으로 미동도 없었다.
‘행보관’ 두지아이는 지금껏 승전은 고사하고 변변한 참전 딱지 한 번 없던 처지에 처음으로 공훈다운 공훈을 세운 것이 만족스러운지 잔뜩 고무되어 묻지도 않은 것을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벌크선 20대를 털어갈 정도면 보통의 해적떼는 아닐 것 같아서 치안군 대신 우리가 직접 나섰네. 플라칼 가에서 프리깃과 선원들을 갹출했고 우리 가문 경보병 대대 5백이 투입되었지.”
후스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두지아이가 짜증을 내며 그를 다시 불렀다.
“후스 경! 뭐 불만 있나?”
“회수한 후엔 어찌합니까?”
후스의 엉뚱한 물음에 두지아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알 바 있는가? 착륙하지 말고 바로 비엔으로 되돌리라는 명령이야.”
후스가 사령실 안의 모두가 들으라는 듯 갑자기 목소리를 두 배는 키웠다.
“그 안에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이 실린 것으로 압니다. 본가에서 무슨 권리로 그걸 바로 가져갑니까?”
“자네 지금 뭐라 했지?”
두지아이는 물론이고 주변을 둘러싼 본가 출신 참모진들의 표정이 일제히 험악해졌다.
“본가에선 해적선에 실린 곡물이 분명 밀수품이라 이미 밝혔습니다. 정식 운송품이 아닌 밀수품이라면 치안 협약에 의해 그 물품은 압수한 칼릴 지방정부와 칼릴 주민들의 소유가 됩니다. 본가에서 무슨 권리로 칼릴 주민의 재산을 동의도 없이 그냥 가져갑니까?”
후스의 반발에 이번엔 이곳 칼릴 토박이 출신인 하급 장교들과 운영요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후스의 말은 분명 군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당황한 두지아이가 목소리를 낮추고 후스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입 닥치지 못해?”
“전 군인이고 정당한 집행자로서 체포한 해적선에 대해 합리적인 처분을 요구할 뿐입니다.”
후스의 눈빛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두지아이가 이곳 사령실 경비를 서고 있는 델루지 가 경보병들에게 지시했다.
“콘스탄츠 장군을 데리고 나가게. 사령관의 권한으로 장군의 권한을 일시 정시시킬 테니 선임 무장인 플라칼 가 3군단장을 데려와.”
두지아이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건 딱 두 명 남아있던 플라칼 가 헌병대 사관들이었고 경보병들 중엔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으음?”
후스를 체포하려던 플라칼 가 헌병들도 주변에서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움찔하며 얼른 눈동자를 굴려 눈치를 보았다. 사실 그들로서도 델루지 가 사령관의 명령에 자신의 가문 무장을 잡는 셈이니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이것들이?”
정작 자신 가문의 경보병들이 전혀 지시를 따르지 않는 모습에 당황한 두지아이가 그들을 돌아보며 다시 명령했다.
“당장 콘스탄츠 장군의 권한을 박탈하라니까!”
“한 번만 언성을 더 높이면 내 종장의 권한으로 그대의 사령관 권한을 박탈하겠네.”
후스를 따라온 경보병대 사병이 눈에 낀 자외선 보안경을 휙 벗으며 두지아이의 앞에 불쑥 나섰다.
“세데스?”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치던 두지아이는 하마터면 뒤에 놓인 테이블에 걸려 자빠질 뻔했다. 두지아이만큼이나 놀란 건 후스의 뒤에 있던 요아킴이었다. 그는 무심결에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미 후스를 따라온 델루지 가 경보병들이 출입문을 모조리 봉쇄했고 사령실에 배치되어 있던 30여명의 경보병들도 일제히 석궁과 칼을 양 손에 빼들고 이곳의 지휘부 참모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데스가 경보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옛 전우인 경보병들은 원로회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고 진짜 종장인 내게 계속 충성할 것이네. 쓸데없는 생각들은 말게나. 두지아이 경, 요아킴 세닉 중랑장.”
“세데스, 지금 설마 쿠데타를…….”
공포에 질린 두지아이가 참모들 사이로 주춤주춤 뒷걸음치며 고개를 저었다.
“쿠데타? 지금 쿠데타라 했는가! 난 종장이고 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인데 무슨 빌어먹을 쿠데타란 말인가!”
세데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사령실을 쩌렁 울렸다. 두지아이는 어느새 코앞에 닿아 있는 세데스의 칼끝에 놀라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때, 사령실의 공용 할룩스에서 거친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보병 대대장입니다. 18척의 벌크선 접수 끝났습니다. 명령을 주십시오.”
“헬홀 북쪽 빙하평원에 착륙해 대기하라.”
“알겠습니다, 종장님.”
경보병대 대대장은 ‘종장님’이라는 목소리에 유독 더 힘을 주어 대답했다. 구석에서 칼자루를 쥐고 떨고 있던 요아킴이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세, 세데스 경, 지금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세데스가 지휘소 스크린에 보이는 18개의 작은 점들을 가리켰다.
“저 18척의 벌커 중 10척엔 우리 델루지 가의 4번 기지에서 실은 식량이 가득 실려 있고, 초대형 벌커 4척은 플라칼 가의 7번 기지에서, 중형 벌커 4척엔 그대의 고향 루게에서 가져온 곡물이 가득 실려 있네. 제국민 전체가 2, 3달을 먹고 살 분량이고, 시장에 푼다면 제국의 곡물 가격을 지금의 5분의 1까지 떨어뜨릴 수 있는 양이지. 저것 말고도 세 가문의 창고엔 남부 전체가 2년은 먹고 살 곡물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다네.”
“그럴 리가요, 어머니 말씀이 올해도 흉작이 들어…….”
칼을 쥔 요아킴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가? 자네 고향 루게에서 동부나 서부에서처럼 오염되어 태운 밭을 한 곳이라도 본 적 있나?”
말문이 막힌 요아킴이 입을 꾹 다물었다. 군인이 되기 전, 그도 한때 농업행정관으로 있었던 만큼, 그도 흉작이라고 주장하는 가문 통계국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반신반의했었다.
세데스는 그 이상의 말을 유보한 채 사령실의 스크린만 보고 있었다. 사령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몇 분 후, 그의 경보병대가 ‘해적들에게서 되찾은’ 18척의 수송선이 칼릴의 대기권으로 접어들더니 헬홀 상공으로 접근했다. 멀쩡하던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고 난데없이 나타난 이 어마어마한 선단에 놀란 군인들이 각자의 막사에서 튀어나왔다. 군부대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시가지에서도 하나 둘 불이 켜지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 놀란 민간인들도 몰려나오는 듯했다.
황금보다 귀한 누런 보물을 실은 18척의 수송선은 헬홀의 군사훈련을 위해 비워져 있는 북쪽의 광활한 얼음벌판과 가까운 빙하 위에 차례대로 내려앉았다. 이곳 사령부는 물론이고 헬홀에 사는 민간인들도 모두 볼 수 있는 위치였다.
“두지아이 경, 내 그대를 탓하자는 건 아니니까 일어나게.”
경보병 둘이 바닥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던 두지아이 델루지 대장군을 일으켜 세웠다. 후스와 수십의 경보병들을 거느린 세데스는 사령실 문을 확 열어젖히고 지휘소를 나섰다. 지휘소 바깥의 넓은 광장에는 영문도 모른 채 나와 있는 세 가문 장병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엉?”
이곳에 대놓고 얼굴을 드러낸 세데스의 모습에 몇몇 병사들이 경악을 했고, 장교들은 앞장서서 체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들만 살폈다. 누군가는 쿠데타가 아니냐며 쑥덕거리고 있었지만 세데스와 그 주변엔 피 한 방울 흘린 기색도, 심지어 가벼운 몸싸움 한 번 한 흔적도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지휘소의 철조망 문을 밖으로 나선 세데스의 앞에는 산악경보병 여단장 히론 중랑장이 수백의 부하들을 이끌고 서 있었다. 체구는 작지만 다른 여느 산악 경보병들처럼 까뭇까뭇한 얼굴에 움푹한 뺨, 눈가엔 매서운 기운이 감도는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세데스의 사병 시절 중대장으로 귀족의식에 물든 철없는 신병 세데스를 어지간히도 들들 볶았던 엄격한 군인이었다.
“저희 경보병 여단은 부당하게 전횡을 저지르는 원로회를 따르지 않고 정당한 명령체계에 따라 제후이신 세데스 델루지 경을 따를 것입니다! 다른 보병군단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할 것입니다!”
최정예부대인 경보병대의 선언에 델루지 가의 다른 장병들이 무섭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화답하듯 세데스가 장병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난 델루지 가의 종장 세데스 델루지다. 저 18척 중 10척에는 우리 가문의 곡물이 실려 있다, 그 곡물을 3년 전 가격의 1.7배에 팔 것이다. 북부나 동부를 위해서가 아니고 코앞에 산더미같이 쌓인 식량도 비싸서 못 사먹고 굶어죽는 남부인 10명 중 9명을 위한 것이다.”
뒤이어 그와 함께 나온 후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연합군 부사령관이고 칼릴 주둔 플라칼 가 제후군 지휘관이며 최고행정관인 후스 콘스탄츠다. 4척의 초대형 벌크에 실린 곡물은 가문에서 밀수품이라 밝혔으니 칼릴 지방정부 소유임을 선언한다. 플라칼 가 몫의 곡물도 델루지 가와 같은 조건에 판매할 것이다. 이곳 주민들에게도 해당된다.”
황금과도 같은 곡물을 염가로 푼다는 선언에 잠시 어리둥절했던 장병들이 하나 들 손을 쳐들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의 군인들은 굶은 가족들을 위해 배식을 바깥으로 빼돌리거나, 얼마 되지도 않는 봉급을 모두 털어 가까스로 가족들의 입에 풀칠만 해야 했던, 절망까지 몰린 가장들이었다.
“최소한 칼릴에는 앞으로 굶어죽는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후스가 팔을 번쩍 쳐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함성에 장병들의 박수 소리가 두 배, 세 배는 커져갔다. 중간중간 장교들이나 본토 출신들이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압도적인 숫자의 이곳 토박이들의 반응 앞에서 함부로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그대는 어찌할 텐가? 반대할 텐가? 요아킴 경?”
세데스가 휙 돌아서서는 뒤따라 끌려나오다시피 한 요아킴을 노려보았다.
“성인군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공짜로 기부하라는 것도 아니야. 그저 본토로 돌려보내어 누군가의 입에도 못 들어가 보고 빈민들을 굶어죽이는 무기로 만들지 말고 필요한 사람에게 정당한 값을 받고 팔라는 것이네.”
“하지만…….”
요아킴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자신이 박애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배웠었다. 하지만 저걸 헐값―암거래가 기준에서―에 파는 건 분명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나름 정의감이 강한 그는 끝도 없이 올라가는 곡물 가격이 무언가 잘못되었고 생각은 했지만 제후들이 배후에서 올리고 있다는 세간의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병들어 태어난 손자들을 아버지 몰래 독살할 사람이 뭔 짓은 못하겠는가?”
“그건 헛소문입니다!”
요아킴이 울부짖었다. 그도 먼저 죽은 8명의 자녀들이 어머니 이렌느 경의 손에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일은 있었지만 그것 역시 곡물가에 얽힌 더러운 음모론처럼 지금까지는 믿지, 아니 믿고 싶지 않았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 황실에서 주고 간 딸의 약 이틀치가 떠올랐다. 세데스의 배후에 곡물가를 떨어뜨리고 싶어 하는 황제가 있다면, 그를 거역하는 순간 딸의 목숨도 끝이라는 공포가 현실이 되어 다가올 것 같았다.
세데스는 약을 안 주겠다느니 하는 치졸한 협박은 최후의 순간을 위해 일단 가슴 속에 감춰둔 채 조용히 요아킴의 반응을 기다렸다. 결국 요아킴은 조용히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주둔군 지휘관으로서……세닉 가문의 몫도 그 가격에 함께 팔겠습니다.”
바로 이 시간, 이미 제국 최대의 비엔과 황제령 4번 도시의 상품 거래시장에서는 ―황실 보안국의 의도적인 정보 유출로―누구보다 빨리 정보를 입수한 투기꾼들이 앞 다투어 곡물을 내다파는 투매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칼릴에서의 ‘사실상 쿠데타’ 소식이 알려진 건 제국회의 3일차 오전 회의가 진행되는 중간이었다. 그 소식이 알려지기 직전 아침까지만 해도 남부제후들은 거의 축제분위기에 가까웠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해적인지, 황제의 꼬붕이인지 알 수 없는 세력에 납치당한 벌크선들을 어찌 찾아야 하나 골머리를 썩으며 잠도 제대로 못 이루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뜬 그들의 눈앞에는 18척의 벌크선이 한 번에 칼릴 행 워프루트에 탔다는 기분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젠 군대를 보내어 그것들을 한 번에 싹 잡아버리면 잃었던 곡물도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잔뜩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둘째 날 황제가 개최한 만찬에서 울며 사라진 세데스에 대한 생각을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풋내기가 지금쯤 수베르 어딘가에서 며칠째 울고 짜고 있을 것이라 넘겨짚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잊고 있던 그 사람에 관한 두 번째 소식은 그들의 환호성을 순식간에 비명으로 바꿔놓았다. 남부제후들은 그가 전혀 엉뚱한 칼릴에서 툭 튀어나와 단 이틀 만에 그곳의 젊은 무장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통째로 장악해 버렸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루 새에 천국과 지옥을 두 번이나 오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 칼릴을 차지한 젊은 무장들은 [우리는 법 규정대로 처리한 것이지 본가의 방침을 거스른 것이 아니다.]라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그건 그들에게도 나름 명분이 있다는 의미일 뿐 외부인들이 보는 시선은 분명 가문에 대한 저항이었다.
덕분에 ‘키니’의 치료약 문제를 다루려던 제국회의 3일차는 남부제후들의 요청으로 반일만, 그것도 대충 얼렁뚱땅 마무리되었다. 볼일을 마친 남부제후들은 도망치듯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자신들만은 곡물 오염이나 수명개조 파괴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들에겐 변종 바이러스건 나발이건 문제가 아니었다.
“썩을 놈.”
제국회의장을 나선 남부최고제후 카나르 플라칼 공의 눈에서 살기가 이글거렸다. 남부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정규군의 쿠데타에 그는 물론이고 제후들 모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나르 공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으며 할룩스로 연결된 아들 헤즈에게 마구 짜증을 부렸다.
“지금 놈들이 장악한 곳이 정확히 어디어디냐?”
“수도인 헬홀과 그 부근의 대형 홀 50여개입니다. 그자들이 식량을 똥값에 풀면서 빈민들이 사방에서 호응을 하고 있어서 상황이 어렵습니다. 민간인 밀집 지역들은 거의 넘어가고 있습니다.”
“미치겠네!”
카나르 공이 이마를 탁 치며 욕을 내뱉었다.
“다행히 헬홀 남쪽구역에 있는 워프루트 통제소는 가문 2군단과 헌병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델루지 가 6군단 일부 병력도 합류해서 지금 2만의 병력이 철통방어를 펼치고 있습니다. 반란군들이 통제소까지 장악하기 전에 빨리 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제기랄! 제국회의 기간 중에는 외부침략이 아니면 군대의 배치 이동이 일체 금지되어 있단 말이야! 이 멍청아!”
성이 난 카나르 공이 목소리를 높였다가 당황하며 얼른 목소리를 낮추었다. 건너편의 헤즈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쨌든 병력이 비등하니 제국회의가 끝날 3일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곳은 빙하를 등지고 있는 요새지라 어렵지 않습니다.”
맥이 빠진 카나르 공이 자리에서 벌써 몇 번째나 멈춰서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후스 그 빌어먹을 새끼 처자식 말고 다른 핏줄은 없어?”
“그놈 칼릴 출신이라 가족들도 그쪽에 있습니다. 이번에 약혼을 하면서 너무 마음을 놓았던 것 같습니다.”
카나르 공이 다시 이를 갈았다. 후스는 죽은 장녀 미노아가 그에게 남긴 선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던 미노아는 변방 칼릴의 가난한 직업군인 가문의 아들에게서 처음 가능성을 본 사람이었다. 미노아는 말단 기병이던 그를 종가의 경비소대장으로 전격 발탁했고, 결국은 그의 품 안에서 최후를 맞았다.
목숨을 걸고 미노아를 지키려 했던 후스의 충성심을 산 카나르 공은 가문 출신도 아닌 젊은이에게 단 30년 만에 대수에서 장군까지의 초고속 승진이라는 선물까지 안겼건만 결과는 이렇게 돌아오고 말았다.
“가문 피도 안 섞인 하급귀족 출신 잡놈을 결혼도 안 시킨 채로 중용한 게 애당초 잘못이었습니다.”
후스를 사위로 맞을 뻔했던 헤즈가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그런 놈을 내 장손녀랑 결혼을 시켰으면 더 큰일 났게?”
카나르 공이 다시 버럭 화를 냈지만 후스의 처자식을 살해하는 무리수를 놓아가면서까지 그와 장손녀와의 약혼을 서두른 건 바로 자신이었다. 후스는 남부 사람으로는 보기 드물게 크고 다부진 훌륭한 체구였고, 호감을 주는 서글서글하고 잘생긴 얼굴에 머리도 좋고 책임감도 투철했다.
별 볼일 없는 학력과 약간 고지식한 면이 흠이기는 했지만 플라칼 가에선 군인으로서의 소질이 중요할 뿐 학력이나 출신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우수한 피’에 굶주려 있는 까다로운 종장 카나르 공의 기준에서도 후스는 출혈열 창궐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장손녀에게 최고의 정자를 제공할 남자였다.
헤즈의 다른 딸들도 저런 괜찮은 남자를 왜 이미 결혼까지 했던 맏언니에게 또 주냐며 아빠와 할아버지에게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카나르 공의 눈에 장증손자의 아버지감으로는 후스만한 남자가 없어 보였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기대도 다 무너져버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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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의 미훈남들이 사고를 쳤습니다. ㅎㅎㅎ
후스와 약혼한 카나르 공 장손녀만 할아버지 잘못 만나 낙동강 오리알 불쌍하게 됐습니다.~~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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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은 마리안이 주페 옵빠와 마하 온냐에게 결국 1등을 빼앗겼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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