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11화 (1,006/1,132)

< -- 1011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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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부 참석자들과 함께 숙소에 도착한 카나르 공이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으며 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헤즈를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지금 니 딸이 그놈 아이 임신 중이지?”

“당장 지우라고 명령했습니다. 반역자의 씨 아닙니까?”

“아니, 저놈 잡아들일 때까지 죽이지 말고 놔둬. 반역자한테 본때를 보여줘야지.”

“어쩌시게요?”

카나르 공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믿었던 만큼 분노도 강렬했다.

“뱃속에서 키웠다가 그 아비한테 먹이라고 해.”

카나르 공의 끔찍한 지시에 헬리노스 호지 경이 움찔하며 몸서리를 쳤고, 이번 일에 장남이 연루되어 있는 이렌느 경의 얼굴은 납빛이 되었다. 헤즈도 친손자의 시체를 그리한다는 것이 못내 내키지는 않는지 선뜻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카나르 공은 이미 겁에 질려 있는 이렌느 경 들으라는 듯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 새끼 죽은 처자식 시체는 어딨어?”

“얼마 전 산사태로 쿠엘스크의 소년단 집단묘지가 무너져서 지금 다른 시체 수백 구와 함께 공시소에서 복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복구 따위 필요 없어. 그 시체들도 갈가리 찢어서 보병대 훈련소 앞에 널어 놔. 배신한 놈은 끝까지 쫓아가 끝장을 낸다는 걸 알려야지.”

씩씩거리던 카나르 공은 보좌관이 가져온 보고서를 받아들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곳엔 북부와 동부가 그새 칼릴의 세데스와 수송선 두 척 분량의 곡물 매매계약을 마쳤다는 내용과, 황제가 칼릴의 ‘가문과 지방정부와의 사소한 마찰’을 중재하기 위해 ‘평화 유지 특사’로 황비 베아트릭스와 엘룬 옹주를 파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놈들 이미 알고 있던 것 아냐!”

카나르 공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계약 가격은 지금껏 그들이 암거래를 통해 팔아먹던 곡물 가격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어차피 계약일 뿐입니다.”

서류를 함께 살펴본 하디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칼릴의 워프게이트 통제소를 플라칼 가 헌병대가 아직 장악하고 있으니 계약만 했을 뿐이지 인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카나르 공이 한숨을 내쉬며 하디 델루지를 돌아보았다. 델루지 가의 조달 책임자, 회계사이고 상급 법률사, 교역 전문가라는 이 남자의 근사한 간판 뒤로는 대형 투자조합의 운영을 좌우하고 있는 시장의 소위 ‘큰손 투기꾼’이라는 실체가 숨어 있었다. 이번 곡물가 폭동을 시장에서 직접 조종하고 있는 것도 이 남자의 조합과 그곳에 소속된 트레이더들이었다.

“칼릴의 반란이 알려지고 가격이 얼마나 떨어졌나?”

“어제 하루 22.6% 빠졌습니다. 트레이더들에겐 최악의 날이었습니다.”

카나르 공이 턱을 똑똑 두드렸다. 하디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어떡해서든 워프루트 통제소를 지켜내셔야 합니다. 거기까지 넘어가서 곡물이 북부와 동부 손에 넘어간다면 지금까지 버티던 자들도 투매를 쏟아낼 테고……곡물가가 5분의 1토막 나는 건 각오하셔야 합니다.”

“가만, 그런데 황제가 베아트릭스 그년을 거기에 특사로 보냈다고?”

카나르 공이 눈가를 찡그렸다.

“황제의 중재 특사라니, 쌈박질밖에 모르는 그년이 뭘 안다고 중재를 해?”

카나르 공의 지적에 가장 당황한 건 다름 아닌 플라칼 가 사람들이었다. 카나르의 표현은 거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베아트릭스는 정치의식 빵점에 말주변도 없고 그냥 전형적인 군인일 뿐이었다. 그런 그를 중재 특사로 보냈다는 건 황제가 미치지 않았다면 말도 안 될 소리였다.

“플라칼 혈통의 딸과 군대를 보내기 위한 핑계겠죠.”

하디가 이번에도 정확히 지적해냈다. 황제의 수를 읽어낸 카나르 공의 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황빈이지만 한편으로 황실 대장군이 ‘평화 유지 특사’ 명목으로 가는 행차이니 상당한 황실군 병력도 칼릴로 함께 간다는 의미였다.

그는 할룩스 너머에 있는 아들 헤즈에게 단호한 어조로 지시했다.

“제국회의 신사협정 따위 신경 쓰지 말고 3가문 연합 진압군 12만을 비엔에 당장 집결시켜. 놈들이 통제소를 먹기 전에, 아니 옹주 그년이 황실군을 몰고 와서 반란군의 지주 역할을 맡기 전에 최대한 속전속결로 놈들을 끝장내야 한다. 어차피 집결 끝날 때면 제국회의도 끝날 테니 바로 칼릴로 진격한다. 황실군인지 평화유지군인지 잡것들인지가 거기에 끼어든다면……거기가 우리와 황제와의 첫 전쟁터가 되겠지.”

남부 제후들의 표정에 비장함이 번졌다. 카나르가 서류를 탁 덮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독립 선언하며 각오했던 싸움이다.”

“알겠습니다.”

그때, 헤즈는 누군가에게서 보고를 전해 듣고는 갑자기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의식하며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세데스 그자가 2천의 산악 경보병들을 이끌고 통제소 공격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벌써?”

카나르 공이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세데스와 후스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쨌든 빨리 진압군을 편성해서 그놈들을 다 잡아 죽여!”

카나르 공의 분노에 찬 고함이 방 안을 쩌렁 울렸다.

통제소 장악에 며칠은 걸릴 것이라던 헤즈의 큰소리를 무참히 무너뜨린 주역들은 델루지 가의 산악 경보병들이었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며 사령부를 차지하기가 무섭게 헬홀을 박차고 나온 세데스와 그를 따르는 2천의 산악 경보병들이 택한 건 그들의 장기인 빙하 공략이었다.

“직접 안 올라오셨어도 됐을 텐데요, 제후님.”

빙하 꼭대기에 서 있던 경보병여단장 히론 중랑장이 하네스를 풀고 있는 세데스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다른 경보병들과 함께 까마득한 수직 빙벽을 피크와 로프에 의지해 오른 기어오른 세데스는 높이 1스타디아가 넘는 까마득한 수직 절벽 아래로 워프루트 통제소를 내려다보며 피익 웃었다. 빙하 위에는 이미 9백 명 가까운 경보병들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있었고 세데스의 뒤로도 제일 마지막으로 올라오는 백여 명의 경보병들이 수직의 빙하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간만에 기분 좀 내 보려고.”

마주보며 눈웃음을 짓는 히론과 세데스의 눈썹에 하얀 얼음조각이 보석처럼 맺혀 있었다.

“기분 제대로 내시려면 올라올 때 보안경 쓰셔야죠. 제가 설맹 된다고 옛날에 얼차려 몇 십번이나 세웠는지 그새 잊으셨습니까?”

“미안하지만 자네의 얼차려보다 첫 휴가 때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한테 팬더라고 놀림당한 게 더 가슴 아팠어.”

세데스가 히론의 까만 얼굴과 대조되는 하얀 눈언저리를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하지만 손으로는 히론이 시키는 대로 산악 경보병대의 상징인 보안경을 내려 쓰고 있었다. 헬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빙하 꼭대기는 대패로 민 듯 매끈하고 새하얀 얼음과 눈 평원이 사방의 지평선까지 뻗어 있었다. 경치는 그럴싸하지만 이 아래의 훈훈한 홀과는 완전히 다른, 입 한 번 크게 벌리는 것도 자칫 동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 살인적인 저온의 공간이었다.

칼릴의 홀들은 항상 빙하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인간으로서는 버티기 힘든 외부의 혹한 속에서 계속 성장하는 빙하들은 홀 주변을 압박했고, 지열과 온천으로 온도가 올라가는 홀 주변까지 성장한 빙하는 마치 탈피를 하듯 어느 순간 한 꺼풀이 우르르 붕괴되고 녹아 호수물이 되었다.

빙하의 붕괴는 분명 홀을 풍요롭게 하는 자연 순환의 한 축이지만 빙하의 바로 밑에 살 수밖에 없는 주민들 입장에선 예고도 없이 목숨을 앗아가는 저승사자였다. 당국에서 나름 열심히 관측을 해서 대피령을 내어도 매년 수십, 수백 명이 빙하의 붕괴로 죽어나가는 현실은 막을 수가 없었다.

“작업은 다 되어가나?”

스키로 바꿔 신은 세데스가 능숙하게 눈 위를 미끄러지며 통제소 바로 뒤쪽의 빙하로 향했다. 이곳에도 워프루트 통제소의 뒤로 접근을 노리는 적을 관측하는 경비 초소가 여럿 있지만 일반 보병들이 이 끔찍한 빙하 위의 경비를 맡을 리가 없었다. 경비 초병이 경보병들이니 통제소는 등 뒤를 세데스에게 고스란히 내주고 있었던 꼴이었다. 헤즈가 미처 몰랐던 것이 그것이었다.

빙하 밑 통제소는 2만 가까운 친(親) 가문측 보병들이 후스가 이끄는 1만의 반란군 보병대와 날카롭게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그들 중간에 놓인 통제소 철조망은 양측이 전초전 겸해서 주고받은 발리스타 공격에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언제든 맘만 먹으면 서로 달려가 충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빙하에 매달린 경보병들이었다. 친 가문측 보병들은 자신들의 등 뒤를 보란 듯 오르고 있는 경보병들을 사뭇 걱정 어린 얼굴로 올려보고 있지만 그들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빙하를 오르고 있는 경보병들을 향해서도 발리스타를 겨누고 잔뜩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정말로 쏜다면 그들의 머리 위로 빙하가 연쇄적으로 무너질 테니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잘 확인한 거지? 잘못하면 건물 다 무너뜨릴라. 통제소는 건드리면 안 돼.”

세데스는 빙하 꼭대기에 진동 로드(rod)를 꽂고 있는 경보병대 엔지니어에게 말했다.

“한두 번 해 본 일도 아닌걸요.”

엔지니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로드를 박아 넣은 깊이를 확인했다. 이 빙하 위의 모든 작전을 경보병대가 담당하고 있는 만큼, 빙하를 ‘관리’하는 역할도 경보병대 엔지니어들의 몫이었다. 로드의 깊이를 확인한 엔지니어가 됐다는 손짓을 보내자 히론 여단장이 불꽃을 피워 올려 각 중대에 알렸다. 불꽃을 본 중대장들이 경보병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물러나! 물러나! 1스타디아 이상 물러나!”

세데스와 함께 제일 늦게 올라온 중대도 서둘러 스키로 갈아 신고 눈밭을 미끄러져 빙하 뒤쪽으로 움직였다. 스키를 신은 1천여 명의 경보병들이 로드가 설치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스타디아가 넘는 큰 호를 그리며 일제히 물러났다. 진동 로드가 설치된 바로 밑으로는 친 가문파의 델루지 가 헌병대와 6군단, 플라칼 가 2군단이 머무는 통제소의 병영이 위치해 있었다.

경보병들이 모두 물러난 후, 혼자서 빙하 끄트머리에 서 있던 세데스가 할룩스를 빼들고 그들을 불러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다. 지금이라도 종장인 내게 복종한다면 더 이상의 사태 악화는 없을 거다. 플라칼 가 무장들은 굶주리고 있는 인민과 이 와중에 떼돈을 벌며 전쟁 야욕에 잡혀 있는 탐욕스런 종장 일가를 생각해라. 그 탐욕스런 일가가 너희를 버린다면 내가 거두어줄 것이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델루지의 일족인 플라칼 가는 제국에 충성하는 인간적인 가문으로 어차피 새로 태어날 것이다.”

할룩스 건너편에서는 그들 지휘부 사이의 내분을 보여주듯 시끌시끌한 소음이 섞여 들려왔다.

“1분을 주겠다. 그동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내가 직접 들어간다.”

빙하 끄트머리에 선 세데스가 붉은 불꽃이 활활 이는 조명탄을 높이 쳐들었다. 빙하 아래, 통제소 외곽 쪽에서 대치하고 있던 후스의 플라칼 가 군단이 그의 신호에 발을 맞춰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통제소를 지키고 있는 친 가문파 장병들의 공포가 극한으로 치솟았다.

세데스는 시계를 보며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처음 준 1분이 지나고 30초 정도가 더 지났지만 할룩스 너머에선 다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델루지 가는 투항을, 플라칼 가는 저항을 주장하며 다투는 듯했다.

“우리가 들어간다. 너희들 죽이고 싶지는 않다. 파내 줄 때까지 살아있고 싶으면 갑옷 단단히들 챙기고 있어라.”

세데스가 붉은 조명탄을 절벽 밑에 휙 내던지고 스키를 휙 돌려 경보병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이 새하얀 빙하 옆을 빙빙 돌며 떨어지고 있는 모습에 통제소에 주둔하는 보병들 몇이 비명을 질렀다.

“거기서 뒈지기 싫으면 당장 빠져나와!”

빙하 아래에서 반란군 보병대를 거느리고 있던 후스가 아직까지 견고한 스크럼을 찌고 통제소 앞을 지키고 있는 친 가문파 보병들 앞을 말을 타고 맴돌며 확성기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저 인정사정없는 장교 놈들이 나중에 본가에서 처벌받을까봐 너희들 다 죽은 다음에 못 이기는 척 항복하려는 속셈인 걸 모르냐! 이 멍청이들아! 그놈들 보신하려는 수작에 개죽음당하지 말고 빨리 나와!”

후스의 고함에도 무시무시한 사관들과 장교들의 눈이 노려보는 가운데서 쉽사리 빠져나오는 병사들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대오는 남부보병대에게 생명과도 같았다.

빙하 위 경보병들의 대오로 돌아간 세데스가 팔을 번쩍 쳐들었다. 그의 지시를 받은 엔지니어들이 로드의 전원을 넣자 이들의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져오기 시작했다. 긴장한 경보병들은 스키 폴을 겸한 폴암을 꼭 쥐고 결정적인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들의 발밑에서 진동이 조금씩 커지더니 로드 부근의 빙하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보병단 엔지니어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빙하를 미리 계획해서 무너뜨릴 때처럼, 이번에도 로드를 꽂아놓은 지점들을 따라 긴 균열이 찌직거리며 경보병들의 발밑을, 그리고 밑에 있을 친 가문파 남부 보병들의 머리 위를 울렸다.

“당장 나와! 너희가 죽는 만큼 윗대가리들은 웃는다! 우리도 너흴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무기를 감추고 오면 우리도 공격하지 않겠다!”

후스의 마지막 경고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사병들이 아닌, 델루지 가의 한 소대장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벌벌 떨고 있는 부하들을 보다 못한 소대장이 손을 저으며 부하들에게 도망치라 손짓했다. 비로소 명령을 받은 백여 명의 병사들이 칼을 집에 꽂아 넣으며 맞은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다른 소대들도 하나 둘씩 붕괴되며 통제소의 무너진 담 바깥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너집니다!”

엔지니어들의 고함과 동시에 큰 균열이 생긴 빙하 끝부분부터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보병들의 절반 가까이가 무기를 챙겨 넣으며 건너편의 반란군 쪽으로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자리를 지키던 많지 않은 보병들은 빙하가 쏟아지는 곳을 피해 옆으로 필사적으로 뛰었다.

“우와우.”

세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수천, 수만 년간 쌓여 있던 어마어마한 빙하는 중력의 힘에 미끌려 지진 같은 굉음을 울리며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빙하절벽 바로 밑에 있던 창고와 초소 건물이 순식간에 얼음과 눈더미에 파묻혀 박살이 났고 통제소 내부를 구획하는 담도, 경비부대가 머물던 막사와 연병장까지 눈 깜짝할 새 흔적도 없이 쓸려나갔다.

부서진 어마어마한 양의 얼음덩이와 눈가루는 일순간에 통제소를 뒤덮고 강을 만들어 저지대의 헬 호수로 물이 되어 쓸려 내려갔다.

하지만 고도로 계획된 빙하 붕괴는 딱 그 정도까지였다. 미리 충분히 예고를 한 탓에 얼음에 휩쓸린 자는 거의 없었고, 구석에 박힌 통제소와 통신소 건물도 지붕을 드러낸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투항하지 않고 버티던 1만여 명은 뿌연 얼음 안개가 사방으로 피어오른 가운데에서 방향도 못 찾고 얼음과 눈에 푹푹 빠져가며 어수선하게 도망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인명 피해는 없지만 이 정도로도 겁을 주기는 충분했다.

“경보병대 돌격!”

스키를 탄 1천여 명의 경보병들이 폴암으로 얼음 바닥을 밀며 빙하가 무너지며 생긴 가파른 얼음비탈을 무서운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빙하에 절반이 휩쓸린 통제소는 이제 무방비상태였다. 하얀 위장복의 경보병 1천여명은 얼음비탈을 순식간에 뒤덮고 통제소를 두 번째 흰 물결로 휩쓸었다.

“내가 델루지 가의 진짜 종장이다! 지금이라도 내게 복종해라!”

경보병 사병 차림으로 제일 선두에서 깃발을 들고 내려온 세데스가 요란한 눈보라를 일으키며 통제소 앞에 스키를 세우고 깃발을 눈에 푹 꽂았다. 그를 뒤따라 순식간에 바닥까지 내려온 경보병들은 발목 혹은 허리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보병들의 팔을 폴암으로 후려쳐 무기를 떨어뜨렸다.

“제발! 제발 치지 말아요!”

지휘부의 사수 명령과 사관이나 장교들의 강요에 못 이겨 지금껏 마지못해 자리를 지켜야 했던 병사들은 경보병들이 결국 통제소 안까지 난입하자 기다렸다는 듯 앞 다투어 무기를 버리며 눈더미 위에 납작 엎드렸다.  특히나 델루지 가 병사들은 바로 며칠 전까지 자신들의 종장이었던 사람 앞에서 쓸데없이 고집을 부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싸우려는 게 아니었어요! 정말입니다! 종장님!”

경보병들은 자진해 엎드린 보병들을 번쩍 일으켜 그들의 허리에 다시 칼을 채워 주었다. 경보병들도 어차피 이들을 해칠 맘은 없었다. 이들은 그저 상관을 조금 잘못 만난 전우들일 뿐이었다.

“후스 경! 자네가 뒤를 정리해라!”

보병대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을 확인한 세데스가 반쯤 눈에 파묻혀 있는 통제소 건물로 성큼성큼 향했다. 먼저 도착한 경보병들이 폴암을 삽 삼아 출입구 부근의 얼음더미를 파내기 시작했다. 워낙 빙하 붕괴가 잦은 곳이라 통제소 건물 자체는 이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베테랑 경보병 사관들이 눈에 찌그러들어 있던 문짝을 때려 부수고 안에 난입하자 안에서 웅성대고 있던 친 가문파 지휘부 무장들이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투항하겠습니다. 이젠 어쩔 수 없이…….”

“개새끼들!”

세데스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투항할까 말까 탁상공론만 하고 있던 델루지 가 6군단장과 플라칼 가 2군단장을 사정없이 발로 걷어찼다.

“그래! 너희들은 이 안전한 곳에 처박혀 갖은 충성스런 척은 다 하고 나서 죄 없는 쫄따구들 다 죽고 나면 그때 생색내고 항복하려 했지! 아니냐!”

격분한 세데스가 마찬가지로 이곳에 숨어 있던 플라칼 가 헌병대장의 뺀질한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리고는 여기에 웅크리고 있던 연대장급들과 고위 참모들도 사정없이 걷어차며 미친 듯 씩씩거렸다.

“여기 숨어있던 새끼들 모조리 밖으로 끌어내어 영창에 처박아버려! 어떻게 죽여줄지 찬찬히 생각해야겠다. 델루지 가 부대는 내가 이끌 것이고 플라칼 가 부대는 후임이 결정될 때까지 후스 경이 직접 통솔한다!”

바깥에서 사병들을 친근하게 대하는 경보병들의 모습에 내심 안도하고 있던 이들 무장들은 세데스의 돌변한 태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무장을 마주한 세데스는 사병들에게만큼 너그럽지는 않았다.

무장들을 모두 끌어낸 세데스는 엔지니어들을 대동하고 통제소 안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칼릴에서 출발하는 3개의 워프 루트―하나는 비엔과 루게로,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서부 테나토와 연결되는―가 모두 ‘차단’ 표시가 된 채 붉은 등이 들어와 있었다. 이 상태에서는 들어올 수는 있지만 칼릴에서 아무도 나갈 수는 없는 상태였다.

세데스와 후스가 연합사령부를 장악한 직후, 친 가문파 지휘관들이 곡물을 다른 지역으로 반출하지 못하도록 해 놓은 짓이었다.

“서부로 가는 워프루트를 열어라.”

“알겠습니다.”

엔지니어들이 재빨리 자리에 앉아 계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조작 몇 번에 몇 시간 동안 폐쇄되어 있던 서부행 워프루트가 다시 작동을 시작했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벌크선 두 척 서부로 내보내라.”

세데스가 할룩스를 켜고 지난밤 들어온 벌크선 중 이미 판매 계약을 체결해 놓은 두 척에 신호를 보내고는 얼른 통제소 옥상으로 밖으로 뛰어올랐다. 헬홀의 북쪽에 잠시 정박되어 있던 18척 중 두 척의 벌크선이 다시 길을 떠나고 있었다. 한 척은 북부로, 한 척은 동부로 가서 그곳의 굶주리고 있는 빈민들의 배를 채워 줄 터였다.

“됐다. 이제 칼릴 전체는 우리들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통제소 옥상에 깃발을 꽂은 세데스가 두 팔을 공중으로 번쩍 치켜 올리고는 장병들을 내려다보며 손뼉을 크게 쳤다. 곡물가격을 쥐고 흔들며 다른 지역을 굶주리게 만들어 제국을 무너뜨리려 했던 남부의 탐욕스런 카르텔이 변방인 칼릴에서, 그것도 그 카르텔을 처음 주도했던 당사자의 손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제후님.”

밑에서 서둘러 달려 올라온 후스가 그에게 쪽지 두 장을 건넸다.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 하나입니다.”

내용을 본 세데스는 이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나쁜 소식은 그냥 나쁜 소식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후스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침착한 표정이었다.

“황실 특사인 황빈께서 엘룬 옹주와 내일 도착하신다는 연락입니다. 황실의 평화유지군은 3일 이내로 도착할 예정이고요.”

“나쁜 소식은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

“그 정도도 각오 안 했다면 이렇게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후스가 입가에 엷은 웃음을 품었다.

“하긴.”

세데스는 [12만의 남부 진압군 비엔에 집결 중, 3,4일 이내로 칼릴로 진격 예정]이라는 쪽지를 북북 찢어 공중에 날려버렸다. 지금까지 제국의 모든 혼란에서도 내내 무풍지대로 남아있었던 남부가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내전에 접어든 순간이었다.

“제국회의 끝나는 순간에 여기선 개전 나팔이 울리겠군요.”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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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칼릴 이야기는 다음 파트로 넘어가고~

다음 파트에서 후스와 엘룬, 베아트릭스와 세데스의 활약이....^^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 ̄∇ ̄)ブ~~★

설문은 3강이 엎치락뒤치락중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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