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12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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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이이, 이만큼 파면 돼요?”
손과 바지, 얼굴이 흙투성이가 된 마리안이 손바닥만한 모종삽으로 열심히 땅을 파다 말고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고작 자기 머리만한 구덩이를 파 놓고는 뜬금없이 웃으며 애교를 떠는 아이의 모습에 카렐은 아이가 돌밭을 파다가 손이 아파 꾀를 부린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고는 피익 웃었다.
수베르 별궁 정원에 카렐과 엄마 솔, 할아버지 네피 부부와 함께 정원놀이를 빙자한 저녁 소풍을 나온 마리안은 기분이 붕붕 들떠 날아갈 것 같았다. 궁 안에서처럼 사방팔방 뛰어다닌다고 붙잡을 사람도 없고, 사방에 그리 좋아하는 꽃과 나무, 풀벌레들까지 가득하니 아이에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아이는 엄마 솔이 챙겨 온 저녁 도시락에 비둘기구이 한 마리까지 눈 깜짝할 새 다 먹어치우고는 그 기운으로 나름 열심히 땅을 파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아케메니아의 기름진 황궁 정원에 익숙해 있던 아이에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흙을 약간 걷어낸 정원 땅 밑은 굵은 돌과 말라비틀어진 마사토뿐이었다.
묘목을 손보고 있던 카렐이 큰 삽을 쥐고 일어섰다.
“네가 파긴 힘들겠구나. 땅 파는 건 내가 해 줄 테니 잠깐 쉬고 있어라.”
“피곤하실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카렐이 고개를 휙 돌렸다. 조금 떨어진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아버지 네피, 의붓어머니 마자리크와 다과를 즐기고 있던 솔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고 계시니 쌍둥이 인형 같아요.”
솔은 마치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 쏙 빼닮은 카렐과 마리안이 나란히 땅을 파고 정원을 손질하는 모습이 우스운지 혼자 웃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카렐이 허벅지에 와락 매달린 마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엷게 웃었다.
“아이가 이렇게 신나 하는데 오늘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놀아주겠습니까, 황빈.”
아이는 모처럼 황제를 독차지한 것이 좋아 죽겠는지 카렐의 허벅지를 껴안고 졸졸 따라다니다가, 꽃들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또 할아버지 네피와 마자리크의 목을 한 번씩 껴안고 뽀뽀를 했다가 사방팔방 신출귀몰하며 평소보다 더 정신이 없었다. 네피가 삽을 바닥에 대는 카렐에게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힘은 오늘밤에 침대에서 써야지 삽질하는 데 다 써 버리면 어쩌려고?”
네피가 입에 가득 든 고기를 꿀꺽 삼키며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제발.”
얼굴이 새빨개진 솔이 아빠의 허벅지를 찰싹 소리가 나게 후려쳤지만 뻔뻔한 네피가 그런 것을 신경 쓸 리 없었다.
“뭘, 내가 틀린 말 했냐? 한 달 넘어서 같이 자는데 밤에 뿅 가게도 못 해주면…….”
이번엔 네피의 반대편 허벅지에서 또 찰싹 소리가 들렸다. 마자리크의 눈초리에 네피는 그제야 어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카렐이 네피에게 능글맞게 웃어 보이며 냉큼 대꾸했다.
“아까 주방 뒤편 창고에서 잠깐 한 번 갔다 왔는데?”
“엥?”
놀란 아빠의 눈길에 당황한 솔의 얼굴이 더 빨개졌고, 마자리크는 한쪽에서 남편의 허벅지를 마구 두들기며 폭소를 터뜨렸다. 기가 막혀진 네피가 솔이 먹다 만 비둘기구이를 냉큼 빼앗아 입에 덥석 물었다.
“뭐야, 아까 도시락 싸 놓고 한참을 안 보이더니 그거였어?”
“어우, 아빠.”
민망해진 솔이 계속 헛기침을 하며 아무 볼 것도 없는 어두운 숲 쪽으로 빨개진 얼굴을 돌리고만 있었다.
네피의 입을 단박에 막아놓은 카렐은 아이의 구덩이에 큰 삽을 한 번 푹 박아 넣었다. 바싹 말라붙어 돌처럼 단단한 지면에 순식간에 수박만한 구덩이가 입을 드러냈다.
“수베르는 땅이 척박해서 다른 데보다 훨씬 깊이 파고 밑거름을 많이 줘야 해.”
“우와아. 저도 할래요.”
마리안이 손뼉을 치며 카렐의 무거운 삽을 냉큼 빼앗듯이 가져갔지만 콩알만한 몸에 키보다 큰 삽을 제대로 다룰 리가 없었다. 구덩이에 삽을 꽂아보려던 아이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벌렁 엎어져 방금 판 구덩이에 쏙 빠져버렸다.
“지지, 삽은 좀 더 크면 쓰렴.”
카렐이 엎어져 흙투성이가 된 아이를 끄집어내며 키득거렸다. 마리안은 자잘한 돌과 푸석한 흙뿐인 구덩이 안을 더듬으며 툴툴거렸다.
“근데 여기 땅속이 너무 이상해요. 이런 데다가 나무 어떻게 심어요?”
마리안이 큰 눈을 똥글똥글 뜨고는 카렐을 올려보았다. 수베르 별궁 정원에 ‘가족 나무’를 심겠다며 나름 의욕에 가득해서 나왔던 아이는 아직 한 그루도 못 심고 척박한 흙과만 한참을 씨름하는 중이었다.
“여긴 원래 식물이 하나도 없었던 곳이란다.”
카렐이 낙담한 아이의 옆에 앉으며 깊은 땅 밑의 거친 흙을 한 움큼 집어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마리안도 그제야 호기심어린 눈을 크게 뜨며 카렐의 옆에 바싹 붙어 쪼그려 앉았다.
“그럼 이 정원은 다 어떻게 만든 거예요?”
“수베르는 원래 황무지였던 곳이야. 여기 토로 시는 비가 오는 고산에서 내려오는 강이 있어 낫긴 하지만 일 년 내내 비도 거의 안 오고 얕게 뿌리를 내린 잡초 몇 포기가 전부라 바람 좀 세게 불면 다 날아가 버리곤 했단다. 그래서 기계로 모조리 갈아엎고 다른 데서 가져온 표토를 덮어 정원을 만들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한 뼘만 들어가면 원래 땅이었던 형편없는 흙이 나오지.”
카렐이 가져온 포대에서 퇴비와 부엽토를 꺼내 구덩이 안에 삽으로 적당히 뿌리고 물을 뿌렸다.
“땅이 이래서 어떤 나무도 그냥 심으면 다 죽어버린단다. 이런 곳에 이렇게 큰 정원을 만들려고 황궁 정원사가 고생 엄청 했었지. 돈도 많이 썼고.”
카렐은 갖은 수종이 다 심어져 있는 별궁의 거대한 정원을 가리키며 엷게 웃었다.
마리안이 주먹만한 작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근데 황궁 사람들 보기 좋은 정원 만들자고 이런 데 돈 많이 써도 돼요? 국민들도 배고프고 병들었다는데. 저도 정원 예쁜 게 좋지만 배고프고 병든 사람들이 우선이잖아요?”
아이의 어른스럽고 기특한 질문에 카렐이 흐뭇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여긴 보기 좋자고 만든 게 아니란다. 수베르 토양과 기후에 잘 맞는 수목과 곡물을 찾아내려고 만든 거대한 실험실이야. 그래서 수백 수천가지 식물을 다 이렇게 심어놓고 성장을 관리하고 있단다. 그래서 맞는 걸 찾아 번식시키고, 농부들한테 보급하고.”
“그럼 저 성 밖에 있는 밭도요?”
마리안이 작은 손으로 토로 기지 밖의 밭을 가리켰다.
“여기 밭도 다 기계로 개간하고 10년 넘게 유기물 뿌려 관리한 밭이란다. 여기 정원사들이 찾아낸 옥수수나 감자 종자를 심었는데 아직은 소출도 형편없고 질도 나빠. 그래서 여기 밭에는 앞으로 20년간은 세금도 안 걷을 거란다. 제국에서 농토가 될 가능성이 보이는 얼마 안 되는 곳 중 하나니까 황실에서 일종의 투자를 하는 거지. 그맘때면 세금도 걷을 수 있는 좋은 땅이 될 거다.”
“아아, 그래서 수베르를 개간했어도 기근이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거구나.”
마리안도 카렐을 따라 작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부엽토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럼 농사지을 땅은 이제 없는 거예요? 아케메니아에도 땅은 그렇게 많잖아요?”
어린 딸의 계속된 진지한 물음에 카렐이 웃으며 손을 털었다.
“옛날 고향행성이라는 곳은 수많은 미생물들이 산소를 만들어내는 깊고 넓은 바다도 있고, 숲과 나무도 많아서 지금의 제국민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한 행성에 살았다지. 아무 곳이나 땅만 파면 다 농사가 되었단다.”
카렐은 마리안이 본토에서 나름 열심히 골라 가져온 무화과나무 묘목을 가져와 세웠다.
“히이, 이건 네피 할아버지 나무.”
무화과나무에 리본을 달아 준 마리안은 작은 모종삽과 맨손으로 방금 파낸 흙을 부엽토와 섞어 열심히 구덩이에 쓸어 넣었다. 카렐 눈에는 서툰 솜씨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입이 귀밑까지 걸린 아이의 행복한 얼굴에 카렐도 그냥 웃으며 기다려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우리 제국은 왜 그만큼이 못 돼요?”
“제국은 개척해서 생명을 정착시킨지 아직 1천 년도 안 되었단다. 유기물이 있는 땅은 얼마 없고 바다는 근해 약간만 빼면 텅텅 비었고 행성 하나가 먹여 살리고 숨 쉬게 할 수 있는 인구는 한계가 있지.”
“우와, 그럼 나도 나중에 황궁 정원사가 될 거야. 할 일 많겠다.”
그새 구덩이를 다 채운 마리안이 작은 손으로 흙을 꾹꾹 눌러 자리를 잡아주었다. 카렐은 부엽토를 만져 더러워진 아이의 작은 손을 손수건으로 잘 털어주고는 옆의 연못에서 물을 떠다가 손으로 뿌리 주변에 뿌렸다.
“이건 된 것 같다.”
나무 한 그루를 끝낸 마리안은 후다닥 뛰어가 키보다 큰 산딸기나무 묘목을 껴안고 뒤뚱뒤뚱 돌아왔다.
“이건 국구 할아버지 나무.”
카렐이 다시 삽으로 단번에 구덩이를 파 주자 마리안은 방금 카렐이 했던 그대로 바로 흉내 내어 부엽토에 밑거름을 넣고 나무를 세웠다.
“그분 산딸기 좋아하시니까 여기서 많이많이 따서 갖다드릴 거예요.”
아이가 묘목 중간에 페로의 이름이 적힌 리본을 걸며 다시 웃었다. 카렐은 이 아이가 자신에게 이름을 물려준 외할머니에게 페로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나중에 알게 되어도 과연 지금처럼 그에게 허물없이 생각할까 하는 생각에 내심 가슴이 먹먹했다.
“어, 손이 왜 그러세요?”
삽에 기대앉아 아이가 나무 심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렐은 그제야 자신의 왼손을 보았다. 그 스스로는 느끼지도 못하는 새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 순간 마리안보다 더 놀라고 당황한 건 카렐 자신이었다.
“설마…….”
카렐의 숨이 탁 막혀왔다. 그는 언젠가 니사가 말해 주었던 ‘최후의 시나리오’에 한 발씩 다가가고 있었다. 충격에 대답조차 못 하고 있는 카렐의 손을 먼저 덥석 잡은 건 마리안의 작은 조막손이었다.
“아아, 날도 추운데 찬물 막 만지시니까 그렇지.”
카렐의 앞에 쪼그려 앉은 마리안이 카렐의 왼손에서 장갑을 벗기고는 그 작은 손으로 꼭꼭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자기 몸통만한 큼직한 손을 가슴에 안은 아이가 놀라움과 공포에 멍해진 카렐의 얼굴을 올려보며 이를 드러내고 히이 웃어보였다.
“호오오~.”
아이가 작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서는 카렐의 거친 손등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주었다. 아이의 정성스런 손길에 정말로 손끝에 온기와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찾은 카렐은 억지로 웃으며 기특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맙다. 이제 된 것 같구나.”
마리안은 카렐의 손과 뺨에 뽀뽀를 쪽 해 주고는 다시 장갑을 끼워주었다. 자신을 그대로 빼닮은 아이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방금 전의 충격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카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묘목을 붙들었다.
“빨리 흙 안 채우면 산딸기나무 뿌리 마르겠다.”
깜짝 놀란 마리안이 작은 모종삽으로 산딸기나무 밑에 흙을 채워 넣었다.
“국구 할아버지 나무는 다 내가 다 심을 거니까 손대지 말아요.”
아이는 카렐이 찬물에 손을 담그기 전에 잽싸게 물통을 가져다가 직접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저 작은 손으로 한나절은 뿌려야 할 것 같았지만 카렐은 그냥 흐뭇하게 웃으며 지켜보기만 했다. 아이가 물을 뿌리며 물었다.
“근데 고향행성이 어딘데요?”
카렐이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지금 어딘지 찾고 있단다. 지금은 멸망해서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하는구나. 그 많던 생명체도 다 없어지고 죽음의 땅이 되었다지. 탐욕의 결과일 거다.”
“찾으면 저도 꼭 데려가 줘요. 약속.”
아이가 흙과 물로 범벅이 된 더러운 손가락을 쑥 내밀었다. 카렐이 손가락을 찍기 전 얼굴을 바싹 대고 물었다.
“넌 가서 뭐 하게?”
아이가 갑자기 두 팔을 활짝 벌려 보이며 명랑하게 말했다.
“여기처럼 황궁 정원사가 가서 꽃이랑 나무 심어야 할 거 아니에요.”
아이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카렐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아이가 내민 손가락을 엮을 수가 없었다. 과연 자신이 살아있을 때 그곳을 찾아내어 딸아이를 데려갈 수 있을지, 혹시 이 약속이 자신이 죽은 후에 세상에 홀로 남겨질 아이에게 괜한 상처만 되지 않을지 갑자기 울컥해졌다.
“빨리 약속. 안 데려가면 울 거예요. 꼭 저랑 같이 가요.”
아이가 다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카렐은 하는 수 없이 크고 굵은 손가락으로 아이의 작은 조막손에 살며시 엮었다.
“그럼, 이 손에 널 안고 데려가 줘야지.”
카렐이 웃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꼭 살아야 했다.
“헤헤, 약속, 약속. 알았죠?”
마리안은 앞니를 드러내고 방긋 웃어보였다.
“근데 엄마 나무는 어디에 심지?”
‘페로 나무’를 다 심은 아이는 다시 자그만 모종삽을 들고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새 나무 심을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제국회의가 있는 수베르에서 황제령 페로관으로 돌아온 페로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숙부 헤데론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으로 화도 나 있었고 자신의 수하들, 그것도 자신의 왼팔이던 볼토 트라우제 이부대신과 직계 수하들이 이번 반란사건의 주동자들이었다는 것도 그의 맘을 무겁게 했다.
카렐은 널 믿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며 웃으며 말했지만 이번 반란에 자신의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도 한편으로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는 카렐에게 개혁이랍시고 밀어붙이지만 말고 상류층 부호들과도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카렐은 이번 일로 도리어 그들을 제대로 눌러야겠다는 맘을 더 굳힌 듯했다.
페로는 이런 중요한 시국에 업무에 복귀할 수도 없는 스스로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아주 크게 다쳐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라면 깨끗이 단념했겠지만 몸에서 다친 건 바에자의 칼에 벤 허벅지와 말에서 떨어지며 삐끗한 왼쪽 어깨뿐이었다. 그가 업무에 못 돌아가고 있는 건 바에자의 마우저에 맞아 못 쓰게 된 왼쪽 눈 때문이었다.
일행이 페로관의 주기장에 내린 건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셔틀에서 내린 후, 이동의자에 앉아 사랑채로 향하던 페로가 뒤에 선 페다이에게 말했다.
“갑갑하니 걸어가고 싶다.”
“아직은 불편하실 텐데요? 게다가 어두워서…….”
뒤를 따르던 니사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페로는 못 들은 척 고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부득불 자신의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당황한 니사와 페다이가 양쪽에서 그의 팔을 얼른 붙들었지만 페로는 바로 코앞에서 만난 문턱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적응이 안 되었을 뿐이야. 젠장, 여기도 가로등 좀 달라고 해, 왜 이리 어두워.”
페로가 자존심에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카렐이 직접 마련해 준 특별한 투구 덕분에 왼쪽 안구를 잃는 정도로 즉사만은 피했지만 안구 뒤 신경다발이 손상되어 남은 오른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어도 코앞의 사람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신경이 회복될 때까지는 보조 장치도 쓸 수가 없고 심지어 길을 걷는 것이나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황상한테는 이런 얘기 하지 마.”
이 상황에도 강한 척을 하려는 페로의 모습에 니사가 억지로 웃음을 감추었다. 페로의 체구가 워낙 크고 팔도 웬만한 사람 종아리만하게 굵다보니 말이 부축하는 것이지 거의 가슴에 끌어안고 끙끙대며 받쳐야 했다. 페로가 괜히 한 마디 더 꺼냈다.
“바에자인지 뭔지 그 썩을 년 내 손에 잡히면 양 눈깔을 확 뽑아버리면 돼.”
마구스를 향한 페로의 거친 말투가 내심 귀에 거슬렸지만 니사도 일단은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한 보름쯤은 불편해도 참아주세요. 어제 넣은 전극이 제대로 작동 시작했으니 그래도 회복기간을 많이 당겼어요.”
“알았다.”
페로는 황제가 이번 여행길에 함께 보내 준 이 자그만 의사를 보며 괜히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은 제국 최고의 신경외과의를 데려가야 하지 않겠냐며 자신의 주치의를 이렇게 보내주었지만 카렐 자신이 언제 발작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발작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까지 이렇게 보내준 것이 민망해 미칠 것 같았다.
“페다이, 잠깐 자리 비켜다오.”
딱히 걸릴 것이 정원에 접어들자 페로가 페다이에게 앞쪽을 손짓했다. 페다이는 내심 불안한지 쭈뼛거리며 일단 페로의 팔을 놓고는 앞쪽 멀찍이에서 먼저 나아가기 시작했다. 페로가 무얼 물으려고 하는 건지 직감한 니사가 입술에 잔뜩 힘을 주었다.
아니나다를까, 페로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잔딕을 빼내지 못한다면……황상께서 얼마나 더 버티실 수 있으신 거냐?”
페로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한 달만에 수베르에서 만난 카렐의 얼굴은 ―제대로 볼 수는 없어 그냥 입맞춤을 하며 살짝 만져본 느낌이었지만― 근육과 가죽밖에 잡히지 않을 만큼 말라 있었고 피부도 모래알처럼 거칠었다. 입술도 심하게 갈라져 사람 입술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니사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주치의로서 황상의 건강에 관한 사항은 함부로 밝힐 수 없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페로가 눈가를 씰룩거렸다. 그는 직접 묻는 대신 최대한 돌려서 다시 물었다.
“그럼 잔딕이라는 게 어떻게 죽이는 것인지만 말해 봐라.”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 따르면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발작 간격이 짧아집니다. 3, 4개월 정도를 앞두고는 잠잘 때 말고 깨어있을 때도 발작을 하고, 간헐적으로 수전증이나 경련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
“하루나 이틀 정도 앞둔 상태에서는 발작의 간격이 두세 시간으로 확 줄어듭니다. 간격이 짧아져서 10분 이내로 줄어들면 결국 신경계가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파괴되면서 죽습니다.”
잠시 멈춰 섰던 페로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상께선 이미 깨어 있다가 발작을 하신 일이 있지 않느냐?”
“황상의 경우는 다른 분들보다 워낙 몸도 강하시고 살겠다는 의지도 굳으십니다. 사형수들은 첫 발작 후 몇 년밖에 못 살았지만 황상께선 30년을 넘게 버티고 계십니다. 그들과는 다를 겁니다.”
니사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하며 그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페로는 이번에도 카렐에게 또 실언을 한 것 같아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그는 한 달 만에 만난 자신에게 꺼칠해진 얼굴로 반갑게 입을 맞추어 준 카렐에게 ‘악어와 키스하는 느낌’이라며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는 몸 관리 그 따위로 할 거면 자신과 살 맞댈 생각은 하지도 말라며 짜증부터 냈었다.
페로 딴에는 투병 와중에도 일 중독을 못 벗어나고 있는 카렐에게 몸도 돌보라며 한 소리였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약이 아니고 도리어 가슴에 비수만 박은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카렐은 내내 침울한 얼굴로 페로와 거리를 유지했고, 그가 마지막에 작별 포옹을 하려 했을 때도 움찔하며 그냥 가볍게 팔만 두드리고 물러나버렸다.
그도 카렐의 마른 몸과 차고 거칠어진 피부가 발작의 통증을 덜기 위한 독한 진통제와 불면증의 부작용임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툭 튀어나온 실언일 뿐이었다.
그는 진심이 아니었다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항상 그랬듯,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단어는 너무 낯설었다. 그는 작별인사를 마친 후 부르튼 입술을 가리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돌리는 카렐에게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냥 수베르를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는 내내 속으로 더한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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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 아니면 다음편이 길어져야 하는데 다음편이 길어지는 쪽을 택했습니다. ㅎㅎㅎ
모처럼 카렐의 오붓하고 행복한 가족시간입니다. ^^
설문도 마리안이 다시 옵빠 온냐를 제치고 1등으로.....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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