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13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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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는 정원 한쪽의 짙은 산딸기향에 문득 고개를 돌랐다. 어린 카렐이 영문도 모른 채 잔딕을 박는 수술에 들어가기 직전, 그에게 먹으라며 한 줌 주었던 산딸기의 달콤시큼한 냄새였다.
“10살도 되기 전에 심었던 그 흉물이 왜 150년도 더 지나 나타난 거냐? 그게 시작되는 것도 미리 정해놓은 거냐?”
“미리 설정은 하지만 오르마즈 경이나 황상의 경우는 일반인보다 심신이 워낙 강인하셔서 그 예측치를 크게 벗어났습니다. 그들의 처음 의도대로라면 황상께선 오르마즈 경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4, 50대 무렵에 발병하셨어야 했죠.”
충격을 받은 페로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지만 곧 느리게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격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100년이나 잘 버티어 놓고 왜 그때, 하필 막 가디언 신세를 벗어나 장태자로 날개를 펴려는 그때 발병을 한 거냐? 왜 하필 그때냐고!”
니사는 갑자기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페로가 갑자기 우뚝 멈춰서며 니사의 멱살을 덥석 붙들었다.
“빨리.”
페로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잡힌 채 떨고 있던 니사가 결국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실을 알고 싶으신 게 아니고 자신 때문인지 두려우신 것이군요.”
페로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페로의 입술 양끝이 당장이라도 울려는 사람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니사가 마지못해 최대한 에둘러 입을 열었다.
“오르마즈 경께선 남편들을 사고에서 구하려다가 아주 큰 변을 당하셨습니다. 사경을 헤맨 끝에 목숨은 건지셨지만 그 4달 후에 첫 악몽과 발작이 왔죠.”
니사는 휘청거리는 페로를 얼른 부축했다. 그는 잔뜩 굳어있는 페로를 억지로 끌고는 한참 앞에서 기다리고 페다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페로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 푸엘 숲에서 날 구하러 절벽에 뛰어들지만 않았더라면…….”
“원인은 누구도 모릅니다. 그맘때 워낙 몸이 성한 날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니사가 달래주었지만 페로의 무거워진 마음은 쉽사리 떨쳐지지 않았다.
“416년 10월.”
페로는 카렐이 첫 발작을 했던 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첫 발작 며칠 전부터 분명 조짐은 있었다. 코리온의 교리정치 선언으로 폐쇄된 아켐에 고립되어 한동안 도주 생활을 하던 카렐은 악몽을 꾸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카렐의 눈빛은 분명 고통과 공포를 호소하고 있었지만 페로는 그의 괜찮다는 말에 남 일처럼 넘어갔었다. 그 며칠 후, 카렐이 그의 영지 루쿠스탄에서 첫 발작을 했을 때도 페로는 증세가 심상치 않다며 호소하는 킵에게 전투를 앞두고 사기를 떨어뜨리지 말라 도리어 호통을 쳤었다.
니사는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그 모든 일은 푸엘 숲에서 카렐이 자신을 구하려 굶주린 호랑이와 끔찍한 절벽 앞에 몸을 내던진 그 사건이 있고 정확히 4달 후였다. 그때 입은 부상은 카렐의 삶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다.
니사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상께선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을 지니고 계셨을 뿐입니다. 황상께서도 단 한 번도 총리 각하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책임이라니? 누가 그래!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페로가 일순간 마치 딴사람이 된 듯 굳었던 얼굴을 확 풀고는 태연히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도와달라고 했던 것도 아니고.”
페로는 맘에도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모진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내 잘못이 아니야.’
페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저히 사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죄책감을 떨쳐낼 때 그가 매번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그는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뻔뻔해지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정말로 죽고 싶을 것 같았다.
‘황제가 되려고 자기가 택한 길인데 내가 왜 미안해 해?’
“이제 오셨나요?”
평소처럼 북측 사랑에서 페로의 침구를 펴고 있던 알리야 아야톨라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베르에서 먼저 출발했던 알리야 부인은 그새 페로의 방도 직접 다 치워놓고 간단한 다과에 잠옷까지 한쪽에 다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여기까지 모시고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모시죠.”
알리야 부인은 니사가 붙들고 있던 페로의 왼팔을 슬쩍 잡아당기며 엷게 웃어보였다.
“행랑에 숙소 마련해 두라 하였으니 하인 따라가시면 됩니다.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간단히 말해 빨리 나가 달라는 의미였다.
“그럼 오늘밤 몸조리 잘 하십시오. 부인 같은 분께서 곁에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니사가 머쓱하게 웃음을 보이며 물러났다. 이미 가문 원로들 사이에서 페로와 부인과의 혼인이 기정사실처럼 오가고 있었고,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미래의 남편’을 헌신적으로 수발하는 부인의 모습에 사람들도 부러움과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부인은 앞을 제대로 못 보는 페로의 곁을 내내 지키며 간단한 심부름부터 식사 수발, 목욕이나 몸 꾸미기는 물론이고 서류나 편지 대필 같은 일까지 그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간 혼담이 오갔던 사우드 부인이나 나람 부인 같은 제후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고, 카렐조차도 최소한 겉으로는 ‘그런 사람 있어 다행이네.’라고 말해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알리야 부인은 황제를 부담스러워하며 만나려 하지 않았다.
니사가 자리를 비워 준 후, 알리야 부인은 앞을 제대로 못 보는 페로를 이끌어 요를 깔아 따뜻하게 해 놓은 아랫목 좋은 자리에 조심조심 앉혀 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허리 아래가 차가워지지 않도록 담요까지 덮어주었다.
“아랫목 적당히 달궈 놨어요. 주무시기 딱 좋을 거예요.”
알리야 부인이 따끈해진 아랫목 바닥을 더듬으며 웃었다.
지금껏 무장인 남편 뒷바라지에만 헌신해 온 여인이다 보니 아픈 페로를 돌봐주는 손길도 익숙하고 편안했다. 지난 며칠간 부인의 세심한 병간호를 받고, 그가 차려 준 상을 받고, 손수 떠 주는 밥과 반찬을 먹다보니 페로도 진짜 결혼을 한 착각에 종종 빠지곤 했다.
다만 아직 ‘딱 한 가지’만은 진짜 부인의 몫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부인의 잠자리는 아랫목의 그를 지켜볼 수 있는 한쪽에 따로 펼쳐져 있었다.
“없으신 동안 압둘 모투바 경 배우자가 다녀갔어요. 다른 관료들 부인하고 남편들도 여럿 다녀갔고요.”
알리야 부인은 페로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올리며 온후하게 웃었다.
“여독이 있을지 모르니 오늘은 옷 갈아입고 주무세요. 내일 다시들 오라고 했어요.”
부인은 한쪽에 곱게 접어놓았던 잠옷을 그의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그렇군요. 잘 하셨습니다.”
정실부인 같은 그의 태도가 페로도 내심 부담스러웠지만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마당에 괜히 다른 여자들에게처럼 쌀쌀맞게 굴어 다히르 공과 슈트란 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입으시는 잠옷이 솔기 때문에 불편하실 것 같아 직접 만들어 봤어요.”
알리야 부인에게서 잠옷을 받아든 페로가 문득 그의 까맣고 맑은 눈을 쳐다보았다. 5척 6촌(168cm) 될까말까한 크지 않은 체구에 적당한 살집과 여성적인 매력이 흘러넘치는 미녀 중의 미녀였다. 페로의 눈길을 받은 알리야 부인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페로는 알리야 부인이 지어 온 잠옷 저고리를 펼쳐보았다. 수베르에서도 내내 이 옷을 꼼꼼히 손바느질하고 있던 부인의 모습이 기억났다. 눈이 흐릿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이 저고리도 어디 한 군데 실밥 하나 허투루 나간 곳이 없을 만큼 꼼꼼히 마무리되어 있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한쪽 어깨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페로의 모습에 알리야 부인이 얼른 나서서 그의 비단포와 안에 입은 원피스의 고름을 풀고 직접 벗겨주었다.
페로의 완전히 벗은 상체를 본 알리야 부인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항상 느끼지만 몸 참 좋으세요.”
부인은 그의 불룩한 가슴 위를 손끝으로 살짝 만져만 보고는 살포시 웃었다. 비록 잠자리까지는 아직 못 해봤지만 뜨거운 키스와 애무를 나누며 접한 부인의 몸은 페로의 넋을 앗아갈 만큼 달콤하고 매혹적이었다. 지금도 페로는 갑자기 달아오른 몸을 어찌할지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깨 아프면 말씀하세요.”
부인은 페로의 굵은 팔을 붙들고는 조심조심 잠옷 저고리를 입혀주었다. 살갗을 스르르 스치는 부드러운 비단의 감촉이 마치 알리야 부인의 고운 젖가슴을 만졌을 때 같았다. 지금껏 그는 부인처럼 따스하고 포동포동하고 고운 살결과 향기를 느껴 본 기억이 없었다.
페로는 그제야 자신이 꺼칠해진 카렐에게 왜 그리 화가 났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 여자와 카렐을 비교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그는 알리야 부인의 몸에 정신이 팔려 있는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본능은 그의 의지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1년도 안 남았을지 모를’ 카렐을 놔두고 이러고 있는 자신이 미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럼 누워 주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알리야 부인은 페로의 머리 뒤를 한 팔로 받치고 아이처럼 베개에 눕혀주었다. 그때, 부인의 벌어진 저고리 틈새로 볼록한 젖가슴을 본 페로가 침을 꿀꺽 삼켰다. 향수 하나 쓰지 않았지만 옷깃 안에서 풍겨오는 순수한 살내음이 달콤했다. 페로는 카렐에게 밴 짙은 피냄새와 약냄새를 또다시 떠올렸다.
‘내가 왜 이래, 도대체.’
자신의 잠자리로 가려던 알리야 부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페로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되돌아왔다.
“오늘밤 곁에 있어드릴까요?”
부인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조심조심 물었다. 잠시 망설였던 페로는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이불을 가슴 위로 바싹 당겨올렸다. 그 뜻을 이해한 알리야 부인은 머리맡의 작은 불을 끄고 오늘은 그의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페로가 자연스레 팔을 뻗어 팔베개를 해 주자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기대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 자신이 매 주었던 저고리의 고름을 살며시 풀고는 그 사이로 손을 넣어 페로의 몸을 더듬었다.
페로는 다시 이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슈트란 가에 도망가서 지냈던 젊은 시절에는 남편 샤자한 공을 헌신적으로 내조하던 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보며 ‘저런 부인 데리고 살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겠다.’며 그도 다른 남자들처럼 군침만 흘렸었다. 그때는 망상이라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이제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에겐 한편으로 꿈만 같았다.
‘하긴, 자기도 비빈을 다섯이나 거느렸으면서.’
그는 이번에도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죄책감을 억지로 떨어냈다. 죄책감 따위로 거부하기엔 부인의 손길은 너무도 달콤했다.
그는 속내를 감추려 사무적인 내용으로 대화를 돌렸다.
“모투바 대신 배우자라고요? 그 남자가 왜 다녀갔답니까?”
“아, 남편 일 때문에요.”
알리야 부인이 페로의 얼굴을 올려보며 잠시 망설였다.
“말해 봐요.”
페로가 낮게 물었다. 그는 바깥일을 안에서 언급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런 예민한 시국에 자신의 정파 2인자격인 사람의 배우자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남편이 이번에 왜 부총리 대리가 되지 못했냐고요. 혹시 황상께서 남편도 의심하고 계신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더라고요.”
“그건…….”
페로의 말문이 팍 막혔다. 사실 그도 카렐에게 가장 화가 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신들 중 서열이 가장 높던 재무대신 겸 부총리 이브라힘 경이 이번 반란 사건으로 쫓겨났으니 관례에 따르자면 그 다음 서열이고 자신의 오른팔인 내무대신 압둘 모투바 경이 부총리 대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카렐은 그 관례를 무시하고 파벌이나 정치와 직접적으로는 무관한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을 전격적으로 부총리 대리로 선언해 페로를 크게 실망시켰다. 말이 대리지 상황만 수습되고 나면 사실상 정식 부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수사관 출신의 법무대신을 부총리로 삼는다는 건 정치적인 타협보다는 정면 돌파로 불만세력에 맞서는 것이 황제의 뜻이라는 의미였다.
심지어 이번에 3자리나 무더기로 비어버린 대신직에 그의 측근들은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했다. 파벌의 상당수가 반란에 연루된 처지에 차마 늘려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최소한 볼토가 잃은 한 자리는 되돌려줄 것으로 기대했던 페로에겐 황제의 친위체계 강화를 내건 새 내각은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었다.
“황상께서 당신 당파를 의심하고 계신 게 아니라면……아니에요, 모르겠어요. 제가 정치 같은 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그 일로 다녀갔다고요. 총리께서 알아서 잘 처리하실 거라고 대답해 줬어요.”
하마터면 예민한 문제를 건드릴 뻔했던 알리야 부인은 얼른 발을 뺐다. 사실 페로도 카렐이 자신의 당파 전체를 의심해 모투바 대신을 등용하지 않은 게 아닐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카렐이 이번 일로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페로도 자신의 수하들이 반란을 주도한 것이 화가 나긴 했지만 따져보면 그들이 자신의 정파라서가 아니고 페로 자신으로 대표되는 중앙귀족 상류층 거의 대부분의 바람을 시도한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무서운 카렐 황제가 제발 빨리 죽고 자신들의 수장인 페로 혈통의 카이가 ‘황제를 쓸데없이 너무 닮기 전에’ 새 황제가 되는 날만 손가락 빨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황제의 죽음까지 못 기다린 성질 급한 놈들일 뿐이었다. 분명 쳐 죽일 놈들이지만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카렐은 이들을 달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줄 감투마저 빼앗아버렸으니 페로로서는 ‘넌 너무 정치를 모른다.’며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카렐은 그 대신 공석이 된 차관 두 자리를 주었지만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알리야 부인이 그의 허리를 꼭 안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감히 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이제라도 황상께 좀 잘 보여 보세요. 귀인 에스더의 태아가 죽었다던데, 황상께 위로라도 해 드렸어요?”
“내 핏줄도 아닌데 왜요. 그깟 핏덩이 죽을 수도 있지.”
무심결에 본심을 드러낸 페로는 아차 싶었다. 사실 한 달 반 전, 네페티의 아들 오렌 대군이 죽었을 때도 그는―황제가 그 충격에 쓰러져 발작하기 전까지는― 내심 ‘쌤통이군.’하며 일부러 모른 척 했었다. 마하까지 발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주페 다음으로 위험한 황자가 사라져 준다는 생각에 표정관리하느라 애를 먹었을 지경이었다.
차마 말은 못 해도 카이와 어릴 적 카렐을 쏙 빼닮은 마리안 정도를 빼면 황자들 모두 싹 죽어버린다 해도 하나도 슬프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그도 ‘유사시’ 카이 외의 다른 황자들을 어찌해야 할지 고심에 빠지곤 했다. 이런 고민을 아랫사람들, 그리고 황제 본인이라고 안 할 리가 없었다.
전에 언뜻 들은 극비 정보에 따르면 황제가 ‘혹 자신에게 일이 생길 경우’ 제네르와 코리온, 법무대신 아리아노에게 황자와 비빈들을 꼭 지켜 줄 것을 당부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런 중요한 부탁을 자신에게 안 하고 엉뚱한 자들―특히나 주페의 생부인 코리온―에게 한 것이 아직까지도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황제와 페로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병세가 심상치 않아지자 서부 제후들은 이미 서부 혈통인 마하를 어떡해서든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그간 황제의 언행록을 모두 뒤져가며 그를 후계로 세우기 위한 명분을 찾고 있다는 정보였다.
어미인 네페티까지 관계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페로가 파악하고 있는 그 일의 선봉장은 네페티의 이모인 3제후 사우드 발 부인이었다. 페로와의 혼인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으면서 그는 슬슬 페로와의 거리를 두고 다른 쪽으로 방법을 찾는 듯했다.
세네피스가 수장으로 있는 북부라고 카이를 온전히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일찍이 북부최고제후 후보로 정해서 후계수업을 받아 온 주페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비록 수장인 세네피스는 후계 어쩌고 말을 꺼내는 것 자체에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지만 나머지 제후들은 걸핏하면 병약한 카이는 장태자로서 자격이 없으니 강건하고 올곧은 성격의 발현자 동생이 진짜 제위 후계자라며 툭툭 이슈를 터뜨리곤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주페가 황제가 되고, 또 다른 카파키이고 황제를 아주 많이 닮은―한 다리 건너면 오르마즈를 빼닮은― 마리안이 새 북부최고제후 후계자가 되는 시나리오까지 자신들끼리 짜 놓은 모양이었다.
거기에 애당초 황실을 인정하지 않고 틈만 나면 독립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남부는 아예 말할 것도 없었다.
그에 질세라 얼마 전, 페로의 최측근들도 ‘붕어에 대비한 작전계획’을 페로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만든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황제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카이가 안정을 찾기 전, 가능하다면 황제의 사망 즉시 또래의 10대 소녀 4명과 서둘러 약혼을 시키는 것이 1순위로 언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핵심은 그 뒤였다. 그곳엔 아메스와 카이를 뺀 나머지 황제 일가는 황제의 장례와 장태자의 약혼식을 빌미로 불러들여 모두 제거하고 황태후 아메스가 섭정으로, 페로가 내각 수장이 되는 비상내각으로 후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 내용 중엔 카렐 혈통의 강한 생명력을 고려해 황자들은 모두 목과 손목을 자르고 소각한 후 기체와 함께 바다에 폐기한다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세간에 손자로 알려진 주페까지 함께 죽이는 건 페로가 의심에서 벗어나고 동정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라는 내용도 언급까지 있었다.
사실상 황제 일가를 몰살시키자는 끔찍한 시나리오에 충격을 받은 페로는 길길이 날뛰며 폐기하라 호통을 쳤지만 아랫사람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작계를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정파를 떠나겠다며 핏대를 높이던 아랫사람들의 권력욕과 살기에 찬 눈빛을 보며 페로는 툭하면 ‘내가 죽으면 가족들도 다 죽어.’라던 카렐의 혼잣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카렐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내가 멀쩡히 있는데 무슨 그런 헛소리를 하냐.’며 화를 냈던 페로였지만 막상 그런 짓을 저지를 ‘악당 1순위’가 바로 자신일 수 있다는 건 충격이었다.
그 시나리오로 대치하던 며칠간, 그는 온몸이 토막 난 어린 카렐 혹은 마리안이 불구덩이 속에서 살려달라며 울고 있는 끔찍한 꿈으로 제대로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얼마 전 자신의 생일에는 직접 키워 알알이 딴 산딸기 한 봉지를 웃으며 내밀던 어린 마리안 앞에서 부끄러워 고개도 들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마리안만이라도 살려주자는 타협안도 내놓았지만 황자들 중 황제를 가장 많이 닮은 마리안을 어떻게 살려두냐는 아랫사람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배수진을 친 수하들과 대치하며 몸살까지 앓고 며칠을 속앓이한 페로는 결국 [솔과 마리안 모녀는 고통 없이 미리 독살한 후 처리할 것]이라는 메모만 덧붙이고 마지못해 승인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황자와 비빈들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셔틀 사고로 사망 처리하고 다음 황제가 될 카이에게는 영원히 모르게 할 계획이었다.
어쨌든 황제나 비빈들이 알면 까무러칠 그 시나리오는 이제 극비 작계 리스트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황당무계한 작계는 적당히 기회를 보아 눈치껏 폐기할 참이기는 하지만 불안정한 카이의 위상과 그간 황제의 죽음 때마다 있어 온 혼란을 생각하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건 사실이었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카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이 정말로 온다면, 페로는 자신이 절대 제정신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아니, 저승에 따라가 카렐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편을 선택하겠다고도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승의 일은 정리해야 했다. 끔찍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카이가 이전의 로노 장태자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독해져야 했다. 자신과 카렐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카렐의 일가 정도가 아니고 황족들 전부, 아니 제국민의 절반이라도 기꺼이 죽여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황상께서도 자식 일로 힘드실 텐데 좀 살갑게 대해 보세요. 그러시니 황상께서 당신보다 리쿠 학장을 더 총애하시죠.”
“누가 그래요?”
코리온과의 비교에 발끈한 페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알리야 부인은 당황한 듯 얼른 입을 다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페로도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어쨌든 그 개자식은 앞뒤 꽉 막혀서 안 돼요.”
“아까 연회장에서 듣자하니 무슨 보물 구해오라고 황제 특명까지 받고 아라무트에 갔다면서요.”
알리야 부인은 당겼다 놓았다 해 가며 페로와 코리온의 감정을 살살 긁었다.
“가서 혹시 뭐 찾은 거라도 있다고 해요?……제발 그 미치광이한테 좋은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알리야 부인의 갑자기 격해진 말투에 페로는 문득 안쓰러운 눈길로 알리야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제위전쟁 끝 무렵, 트라카의 석궁으로 부인의 전 남편 샤자한 공의 머리를 부숴 죽인 것이 바로 코리온이었다. 알리야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페로의 가슴을 더듬었다.
“저 같은 게 궁금해 할 일이 아닌 건 알지만……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요. 그런 놈이 당신보다 더 황제의 총애를 받는 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안 그래도 나 여기 출발하기 전까지도 그놈 황제하고 투닥거리고 있던걸요.”
“무슨 일로요?”
알리야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라무트에서 무슨 옛날 대신관의 유품함을 찾았다던데 그걸 태우려고 드는 걸 황제 수하들이 가까스로 말렸다죠. 교단 자료를 조사하라고 보내놨더니 그런 황당한 짓을 하는 놈이 세상에 어딨답니까?”
“유품이요? 뭐 중요한 건가 봐요?”
“몰라요, 대신관이 입던 옷하고 팔찌 같은 악세사리인가 보던데요. 당장 안 태우면 더는 일 못 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모양입디다.”
“그렇군요. 여전히 미치광이로군요.”
알리야 부인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페로의 가슴에 뺨을 부볐다. 슬픔에 빠진 부인의 모습은 어찌된 일인지 더 매혹적으로 보였다.
“정말로……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자한테는 절대로 지지 마세요. 아시겠죠?”
페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도 항상 하던 생각이었다.
“저요……오늘밤 한 번만 안아주실 수 있어요?”
알리야 부인이 어느새 축축해진 눈길로 페로의 뺨을 쓰다듬었다. 페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을 망설였다.
“30년 넘게 독수공방만 했어요. 이젠 옛날만 떠올리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슬퍼요. 누군가의 든든한 품에 머물고 싶어요.”
페로는 부인의 얼굴만 내려다보며 침만 몇 번이나 삼켰다. 이 여인과 혼담이 오가던 지난 몇 달간, 관례대로라면 둘은 이미 몇 번이나 잠자리를 함께 했어야 했지만 부인은 항상 ‘돌아가신 분이 생각나 아직은 불편하다.’며 주변의 압박을 슬쩍 넘기곤 했었다. 그렇게 사람을 애타게만 했던 부인이 결국 맘을 푼 모양이었다.
페로는 이 미녀의 가슴 위에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어차피 카렐의 묵인 아래 이런저런 여자들을 많이 품었지만 이 여인은 의미가 달랐다. 오늘 떠날 때 마지막으로 만났던 카렐도 ―본심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네가 결혼하는 건 안 말리겠다고 했잖아.’라며 어색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그는 알리야 부인의 옷고름을 살며시 풀고 폭신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카렐에게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고운 살내음과 솜털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런데 몸은 반응하고 있지만, 맘은 편치 않았다.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않아도, 비단결처럼 부드럽지 않아도, 이렇게 따스한 느낌이 없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가슴 아래 있는 사람이 카렐이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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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대로, 이번 편 좀 깁니다 ㅎㅎㅎ
(근데 좀 살벌합니다. ^^;;)
페로를 실망시킨(?) [전편을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강력한 카렐의 친위내각]은 다음편에 등장합니다. ^^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 ̄)ブ~~★
아참, 전자책 1부의 5~8권이 이번주중에 유페이퍼에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링크 서비스인 예스24 등 대형서점들에는 다음주중에 오를 예정이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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