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15화 (1,010/1,132)

< -- 1015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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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자료를 뒤지는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든 건 오르마즈가 마지막 물건을 이곳으로 보냈던 하임달의 결전 직전에 코윈과 카파키 가가 근위대에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가 보냈다던 물품들 중 절반 가까이가 근위대의 검문에 압수되어 도착도 할 수 없었다. 울피의 설명에 따르자면 당시 운 좋게 도착한 수백 점의 물건들도 잡동사니 옷가지와 시중에서 살 수 있는 책, 심지어 냄새 나는 신발과 양말까지 대체 왜 보냈나 싶은 것들뿐이었다고 했다. 이 상자도 처음엔 그 중 하나였다.

당시 밀물처럼 들어온 쓸모없는 쓰레기 반입품들에 질려 있던 이곳의 담당 성직자들은 양초 무더기만 보고는 ‘또?’ 하며 제대로 조사할 생각도 않은 채 그냥 서고 한구석에 처넣어 버렸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제값을 인정 못 받고 있던 것을 코리온이 비로소 찾아낸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저 벽창호가 길길이 뛰며 불을 들이댄 것이 문제였다.

4일 전, 이곳에 온 코리온은 황제를―그리고 아들 주페까지― 구할 수 있다는 말에 거의 잠도 자지 않고 [타리프의 일지]를 찾아 창고를 뒤졌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는 거의 10만여 권 가까운 바람어 책자들 중 손으로 쓴 것들 수천 권을 모조리 뒤졌지만 일반 성직자들의 수기나 경전의 필사본들만 지겹도록 많이 나왔을 뿐 타리프의 일지는 없었다.

“기분이 찝찝하긴 하네.”

베흔이 타다 만 상자 앞에 서서 입맛을 다셨다. 오르마즈를 죽인 당사자로서, 그가 마지막으로 보냈다는 이 물건 앞에서 맘이 편할 수가 없었다.

“검문하던 놈들도 이 비밀 공간을 못 보고 그냥 보내줬나 보군.”

당시 근위대의 검문을 지휘했던 베흔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윗부분의 양초더미는 누가 봐도 사교도의 물건이고, 당시 코윈에서의 반출 금지물품으로 지정했던 ‘무기, 다량의 금, 책이나 서류, 데이터 저장장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당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던 사교도를 괜히 자극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던 것이 베흔 자신이었다.

베흔은 당시 자신이 오르마즈와 카파키 가를 무자비하게 대했던 것을 ‘처음으로’ 진심어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오르마즈가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졌더라면 어쩌면 카렐은 이미 잔딕을 빼내고 제국의 혼란 따위를 옛날에 휘어잡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황제를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교단을 물리치고 짐의 병이 낫는 대로 친위군 사령관으로 복직시켜 아리아노와의 결혼도―네피와 시로처럼 아이만 안 갖는 조건 하에― 승인해 주마.’라던 카렐의 약속이 현실화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것에 짜증이 나서였다.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그가 얼떨결에 시라즈 여단장이 되어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 건 애당초 원했던 게 아니었다. 지난 제위전쟁 마지막 순간에 말을 갈아탄 덕분에 목숨만은 건졌지만, 연합군의 사실상 수장 노릇을 했던 처지에 어차피 근위대장이라는 정든 직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황실군 고문’이라는 뭐 하는 건지 알쏭달쏭한 직책을 받고 카렐 수하들의 눈칫밥 속에서 천덕꾸러기로 살던 그에게 황제는 출혈열에 제국을 휩쓸던 어느 날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그는 ‘황실과 제국을 구한 영웅으로 만들어 황실군과 쌍벽을 이루는 [친위군]의 실질적인 사령관으로 삼아 줄 테니 몇십 년만 눈 딱 감고 내가 준 임무를 할 생각 있느냐?’고 물어왔다.

다른 건 몰라도 ‘기회를 기다리는 것’에는 능한 베흔이 그런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황제는 베흔이라는 사내가 결코 충성심 하나만으로 헌신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그와의 약속대로 이전 근위대 가디언부대와 보안국, 여러 특수부대를 총괄하는 최강의 정예군인 친위군에 아직 총괄 지휘 조직을 두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그로서는 빨리 세상에 나가 이전처럼 떵떵거라고 살려면 반드시 황제를 살려내야 했다.

우베가 다시 물었다.

“당시에 압수된 물품들은 어찌되었죠?”

“보안국으로 넘겨져서 2차 검문을 받은 후에 쓸모없는 잡동사니라고 판단되면 소각했고 아니면 목록으로 만들어서 창고에 보관했지. 창고는 이미 다 확인했지만 그런 책은 없었어. 당연히 이리로 왔을 줄 알았지.”

“그럼 소각되었다는 뜻인가요?”

“쳇.”

베흔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코리온을 안에 데려다주고 돌아 나온 자이납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아우, 미치겠네, 학장님이 단식하고 파업하시겠대요. 이것들 다 태워 없애기 전까지는 식사도 안 하시고 방에서 안 나오시겠대요. 더 이상 황상께서 시키신 일도 못 하시겠대요. 이걸 어떡해요?”

“파업? 노동자도 아닌 게 뭔 파업? 그냥 명령 불복종이지?”

베흔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됐어, 싫으면 굶으라고 해. 지가 배고프지 내가 배고프냐.”

퉁명스레 대꾸한 베흔은 ‘문제의 상자’를 툭툭 걷어찼다.

“근데 내가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사료로도 중요한 것 아냐? 저 벽창호가 그걸 나보다도 모르지는 않을 테고, 태워버리려고 미쳐 발광하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은데?”

베흔이 이 ‘사건’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던 자이납을 슬쩍 흘겨보았다. 코리온을 겨냥한 험악한 어휘들에 자이납이 입을 삐죽거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휴, 내가 저 분 속을 아나요. 처음부터 태우라고 하신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쓸모 있겠다고 하셨다가 안에 있는 로브를 펼쳐보시더니 갑자기 돌변하신 거 있죠. 아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네.”

자이납은 짜증을 내며 소화기를 한쪽으로 툭 차냈다. 이곳에서 코리온을 지키라는 황제의 엄명을 받아 왔지만 ―이전에도 그랬듯― 학장은 그에게 행복한 눈요깃거리 이상은 되어주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학장님을 지키러 온 건지, 학장님한테서 여길 지키러 온 건지 당최 모르겠다니까요.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자이납이 계속 투덜투덜거렸다. 황제에게서 ‘특별휴가’를 받아 암살교단 궁전에서 미소년들과 며칠을 신나게 놀고 이번엔 코리온과 함께 있겠다며 나름 기대에 들떠서 왔지만 좋은 때는 암살교단의 하렘 문을 나선 순간 끝이었다. 사흘 동안 코리온이 태워 없애겠다고 든 물건들만 십여 개가 넘었고, 지금까지는 자이납과 우베가 진땀을 빼며 그를 뜯어말려야 했다.

그러더니 이번 상자 건에선 워낙 사태가 심각해 결국 황제가 베흔까지 보내야 할 결과가 되고 말았다.

“내, 참 저 벽창호 덕분에 여길 다 와 보네.”

베흔이 숨을 고르며 카히나 성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즐린 가의 본거지인 카히나 성(城), 혹은 카히나 시는 제후 아샤드와 울피 부부를 중심으로 1천의 크바르나들과 3천 남짓의 정규군, 그리고 이 황량한 땅에서 레즐린 가에 기대어 사는 80만 영지민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총본산이었다.

이곳은 아주 멀리서 보면 뾰족뾰족한 첨탑을 수없이 매단 어마어마한 높이의 마천루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막상 가까이 와 보면 인공의 구조물이 아니고 황무지 중간의 뾰족한 탑 모양 바위들이 한 다발로 뭉쳐 있는 기이한 형태의 산이었다. 레즐린 가 관청 겸 종가로 쓰이는 성은 그 중 가장 높은 3개 바위에 수많은 구멍을 뚫어 굴을 내고 얄팍한 석조 껍데기와 공중의 사다리, 발코니 혹은 베란다만 덧씌웠을 뿐이었다. 덕분에 레즐린 가에선 고소공포증 환자는 절대 군인이나 관리가 될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민간인들이 사는 산 중턱의 ‘광장’은 최소한 그런 걱정은 없었다. 광장은 성을 이루는 바위묶음 사이를 마치 거대한 숟가락을 찔러 한 번 푹 떠낸 것 같은 모양의 넓은 분지에 위치해 있었다. 이 광장과 비교적 낮은 바위에 뚫은 굴들에는 레즐린 가를 따르는 민간인 2만여 명이 토산품과 청과시장을 중심으로 작은 시가지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구조가 구조다보니, 이곳엔 변변한 성벽도, 웅장한 문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애당초 필요가 없었다. 성 자체는 물론이고 중턱의 광장과 시가지도 가파른 고지대에 있는데다가 접근로라고는 가파른 바위 틈새로 난 좁은 골짜기로 올라오는 계단뿐이었다.

거기에 성의 창문에 서면 먼 황무지를 거의 지평선 부근까지 볼 수 있다 보니 방 하나하나가 사실상 경비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별도의 성벽이 필요할 리가 없었고, 웬만한 군대로서는 공격할 엄두조차 못 낼 천혜의 요새지였다. 덕분에 성 내에 주둔하는 건 크바르나 1천 중 절반인 5백과 레즐린 가의 제후 정규군 1천까지 합쳐 총 1천 5백이 전부였다.

“그나저나, 저 벽창호가 이걸 들어보고 발끈했다고?”

베흔이 코리온을 그리도 놀라게 했다는 그 대신관 로브를 들어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그래, 그래, 태우라고 광분할만하네.”

“예에?”

베흔이 로브를 들고 옷 고르듯 자기 어깨에 맞춰 보았다. 그의 우람한 어깨에 맞을 정도의 품에 길이도 딱 발목까지 덮을 정도였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자이납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대충 어깨하고 길이는 맞겠네요. 근데 허리 맞추려면 살 좀 빼셔야겠어요.”

“미안하지만 생각 없어. 이 옷이 딱 맞을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창백해진 자이납이 얼른 입을 가렸다.

베흔이 냉소적으로 웃으며 로브를 다시 상자 안에 던져 넣었다.

“저 벽창호 딴에는 황제를 지킨다고 저러는 거야. 죽음에서 지키는 게 아니고 이단의 유혹에서 지킨다는 거지. 어쩌면 저 벽창호 서생께선 황제가 이단에 빠지느니 콱 죽어버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를걸.”

“그, 그럼 오르마즈 그 양반이 미리 황상의 몸에까지 맞춰서 다 준비해놓은 것이었다고요?”

“그럴걸.”

베흔이 대신관의 로브와 장신구들을 상자 안에 넣고 처음처럼 잠가놓았다. 껍질로 씌운 합판이 왕창 그슬려 꼴사나워졌지만 그럭저럭 상자는 아직 쓸 만했다.

“이건 그 양반 못 보게 자이납 네 숙소에 꼭꼭 숨겨 놔. 또 불태우겠다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오는 길에 울피 부인 좀 와 달라고 부탁하고.”

“그럼 저분 없이 우리끼리만 조사해야 하는 거예요?”

“별 수 없지, 저 서생 양반 파업인지 몽니인지 부리게 놔두고 우리가 뒤지는 수밖에. 설득한다고 들을 인간도 아니고. 울피 부인이 바람어에 능통하니까 나하고 같이 확인하면 대충 될 거다.”

베흔이 동굴 안쪽의 병영 창고를 가리켰다. 카파키 가 멸망 직전 들어온 오르마즈의 공식 유품은 이미 다 뒤졌지만 소득이 없었고, 방금 이 상자도 생각지도 않은 크바르나 병영의 서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을 찾아낸 것이었으니 이젠 오르마즈의 보물, 혹은 타리프의 일지가 어디 이상한 곳에서 툭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상자를 든 자이납을 따로 보내고 베흔을 따라 서고에 들어선 우베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이미 이틀째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는 이 서고는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갖은 상자들이 꽉 채워져 있어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황제가 보안국에서 보낸 몇 명의 학자들이 안을 뒤지고는 있지만 저 속도대로라면 열흘도 더 걸릴 것 같았다.

상자 몇 개를 대충 둘러본 우베가 10분도 못 되어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 꼬라지가 도서관 하나 차려도 되겠어요. 언제 다 봐요?”

“여기 말고도 창고가 두 개 더 있는데?”

자이납을 따라 이곳까지 올라온 영주 아샤드 경의 아내 울피 부인의 목소리였다.

“맙소사, 내가 미쳐.”

우베가 머리를 싸쥐었다. 우거지상이 된 우베가 뚱한 얼굴로 베흔에게 물었다.

“근데 정확히 뭘 찾으라는 거예요?”

“몰라, 그냥 손으로 쓴 바람어 노트는 일단 다 가져와 봐. 공용어는 너희들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대충 골라내고.”

“어휴, 학장님이 달라붙어 했어도 며칠이 걸렸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느 세월에요?”

자이납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베흔이 짜증을 버럭 내며 자이납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황상 그 양반 당장 오늘 죽을 거 아니니까 잠자코 하기나 해.”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자이납과 우베는 학자들 틈새에 끼어 마지못해 뒤지기 시작했다. 반면 한때나마 헤네티였던 코나는 어느새 구석에 코를 처박고 노트들을 이미 몇 권째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긴, 어느 세월에.”

베흔이 작업 광경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오르마즈를 죽인 것을 지금 정말로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때마침 우베가 웬 빛 바랜 종이뭉치를 들고 울피에게 달려왔다.

“이거요, 아까 찾아냈던 건데 바람 문자도 아니고 공용어도 아니라서 안 물어봤었거든요? 이게 대체 뭘까요?”

우베가 내민 건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은 너덜너덜한 갱지 뭉치였다. 그 위에 손으로 빼곡하게 쓰인 글자 중에는 공용어와 바람어도 몇 있지만 대부분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문자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타리프 신관님 시절 카파키 가의 잡다한 집안 메모뭉치들 사이에 있었어요. 영수증이니 방명록 같은 뭐 그런 것들이요. 카파키 가 집사 방에서 나온 것 같긴 한데 도무지 못 읽겠어요.”

사람들이 일제히 모여들었지만 누구 하나 읽을 수가 없는 낯선 문자였다.

“나도 처음 보는데?”

울피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이납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혹시 지난번에 학장님께서 비엔에서 해석하셨다는 그 문자 아닐까요?”

자이납의 물음에 베흔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고향행성 문자라는 거? 아냐, 그건 나도 조금은 알지만 그것하곤 달라. 그건 30개 내외의 정해진 문자만 쓰는 거지만 이건 수백 개 글자 하나하나가 모양이 다 다르잖아.”

“그럼 이놈도 고대어처럼 이것도 글자 수천 개가 다 따로따로 의미가 있는 거지발싸개 같은 문자 아닐까요?”

자이납의 표현에 우베가 깔깔거리고 웃었지만 아무도 따라 웃어주지를 않았다. 울피 부인이 글자 하나하나들을 따라서 베껴 써 보며 말했다.

“아니야. 글자 각각은 모두 다르지만 글자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정작 몇 개 안 돼. 동그라미, 네모, 꺽쇠, 가로줄, 세로줄, 꼬리 달린 것도 있고……, 음소들을 나름의 룰로 결합한 것 같은데? 고대어처럼 중구난방 거지발싸개는 아냐.”

성직자 출신인 울피가 유학자들이 쓰는 고대어를 비꼬는 말투에 사람들이 그제야 킥킥거렸다. 코리온이 있었다면 한바탕 뒤집어지고 남았겠지만 다행히 이 자리엔 맞장구를 칠 사람들뿐이었다. 평소 그리도 진지한 코나가 웃음을 보인 것도 퍽이나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거지발싸개든 명품 구두건간에……이게 대체 뭘까요?”

우베는 자리에 모인 보안국 학자들에게도 물었지만 그들도 하나같이 전혀 모르는 문자라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한 건.”

베흔이 종이에 돋보기를 대고 말했다.

“타리프 신관의 필체는 절대 아냐. 그 양반 겁나게 악필이었거든.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이 글자들은 선이 섬세하고 미려한 것이 글씨를 꽤 잘 쓰는 여자의 필체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맥이 쑥 빠진 우베가 그 이면지 뭉치를 옆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그럼 일단 옆으로 치워놔도 된다는 의미죠?”

“어허, 급하긴.”

베흔이 꾸러미를 다시 받아들고 몇 장을 넘겨보았다. 낯선 문자가 쓰인 종이뭉치 뒤쪽엔 이번엔 눈에 익숙한 공용어와 바람어가 조금 전의 이상한 문자와 뒤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빙고.”

베흔이 손뼉을 짝짝 쳤다.

“이건 글자가 훨훨 날아다니는 게 타리프 신관의 글씨체하고 비슷하지 않아?”

“그걸 누가 알겠어요, 그냥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지. 근데 배울 만큼 배운 타리프 신관님이 할 일이 없어서 ‘나는 성직자이고 코윈에 삽니다.’ 라는 똑같은 문장을 여기 수십 번이나 연습했겠어요? 애들 국어공부용 문장이잖아요?”

“맞아, 정확히 봤네. 딱 국어공부용 문장이 맞아.”

베흔이 킬킬거리며 이면지 뭉치를 바닥에 순서대로 죽 흩어놓았다. 바람어, 공용어, 그리고 정체불명의 문자가 마구 뒤섞여 있었고 같은 문자도 필체도 제각각 달랐다.

“타리프 신관이 고향행성 생존자들을 콜로니에 데려온 당사자라는 걸 몰라?”

베흔은 돋보기로 각 글자들을 조심조심 확인하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 정체불명의 글자가 이미 알려진 게 아니라면 고향행성에서 쓰였던 수많은 언어 중 하나일 수도 있지. 생존자가 몸뚱이만 들어올 리는 없으니까. 언어하고 지식도 함께 갖고 들어왔겠지.

“그런데 세 언어가 왜 한 꾸러미에 다 있어요? 보니까 쓴 사람도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두 명? 아니면 세 명?”

“내가 그랬잖아, 딱 국어공부용 문장이라고. 밑에 봐봐, ‘나는 성직자이고 코윈에 삽니다.’ 라는 문장 밑으로는 또 그 이상한 문자로 쓰여 있고, 똑같은 패턴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지. 이게 무슨 상황이겠어?”

“…….”

“고향행성 생존자가 우리말을 배우려 했거나, 반대로 타리프 신관 같은 콜로니 사람들이 그네들 말을 배우려 했던 흔적일 수 있다는 시나리오 안 나와? 서로서로 같은 내용의 문장을 적어주면서 공부하는 거지.”

베흔이 그다운 거만한 태도로 설명을 잇자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진 사람들이 3개의 언어가 모두 쓰인 종이들을 죽 둘러보았다.

“우와, 이게 그럼…….”

“내 가설이 사실이라면 이 정체물명의 종이뭉치는 고향행성 언어 중 하나를 해독하는 힌트가 되는 보물일 수 있다는 거지.”

베흔은 종이뭉치를 주섬주섬 모아 자이납에게 불쑥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까 단식투쟁 중이신 분 심심하지나 않게 해 드려.”

얼떨결에 종이뭉치를 받아든 자이납이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학장님이요? 그분 이미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선언하셨어요. 괜히 들고 갔다가 저만 날벼락 맞으라고요?”

자이납의 핑계에 베흔이 입가를 찡그리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런 국어공부용 낙서가 어딜 봐서 교단 문서냐? 이건 그냥 옛날 문서일 뿐이야. 그 인간은 모르는 것에 한 번 호기심이 당기기 시작하면 완전히 미치거든. 교단과는 무관하니 그냥 보라는 식으로 대충 빠져나갈 구멍만 만들어주면 하지 말래도 해독하고 싶어 눈이 홰까닥 돌아갈 거야.”

베흔의 말에도 여전히 학장에게 혼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인 자이납은 마지못해 꾸러미를 바리바리 싸들고 창고 밖으로 사라졌다.

타리프의 일지 찾기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카히나 성’이 지평선의 점 정도로 보이는, 거리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스마엘 가가 운영하는 거대한 철광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이곳엔 ‘철광석을 내가기 위한’ 초대형 수송선 한 척이 이틀 전부터 세워져 있었다.

광산의 수송선이야 노상 오가는 것이니 별로 의심을 받을 일이 없겠지만 누군가 자세히 본다면 보통의 철광석을 나르는 벌크선이 아니고 컨테이너 수송선이 있는 것이 좀 이상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오늘 그 앞에는 이상하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50여대의 대형 화물차에서 큰 곡물포대와 식자재 상자들이 바삐 내려져 수송선의 빈 컨테이너에 실리고 있는 광경이 철광 앞 풍경으로는 어딘지 어색했지만 워낙 외진 오지에 처박혀 있는 광산이라 이런 풍경을 지켜보며 의심을 할 만한 외지인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시간 수송선의 높은 뱃머리 갑판에서는 짙은 회색 망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꽁꽁 가린 한 사람이 멀리 지평선 부근의 카히나 성이 있는 바위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현신이시여.”

회색 망토의 뒤로 살그머니 다가온 한 잘생기고 건장한 남자가 그의 어깨와 허리를 다정하게 품어 안았다.

“조금 전 선교에서 봬온 것 같은데, 그새 여기 와 계셨습니까?”

루토의 자극적인 포옹에 움찔하며 놀란 그 사람은 무심결에 루토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잠시 갈등 끝에 마음을 바꿨는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어젯밤 정말 즐거웠습니다. 현신께서 제 품안에서 기뻐하시는 모습에 제 가슴도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루토가 온몸을 쓰다듬으며 보내는 뜨거운 속삭임에 그 사람이 가늘게 숨을 내쉬며 떨었지만 여전히 어딘가 경직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치 빠른 루토는 바로 어젯밤까지도 품에 안았던 이 현신의 태도가 어딘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시기라도…….”

“네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등 뒤에서 울린 귀에 익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루토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혀, 현신님?”

그곳에 멀쩡히 서 있는 바에자의 모습에 놀란 루토는 당황한 나머지 방금 전까지 품에 안고 애무하던 ‘회색 망토’를 앞으로 거칠게 확 떠밀었다. 넘어지며 절반 벗겨진 망토 사이로 문둥이처럼 뭉크러지고 흉한 얼굴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안았던 사람은 바에자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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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베가 발견했고 타리프가 다 늙어서 머리털 빠지게 공부하던 이상한 언어와 문자(??)는 대체 어느 문자일까요. ^^;;

그나저나, 오늘의 하일라이트는 루토의 초대형 사고입니다. ㅋㅋㅋ

* 출판본 3부 5/6권이 현재 주문게시판에서 예약중에 있습니다. 이번엔 크리스마스 전에 배송을 끝내려 예약기간을 조금 짧게 잡았으니 서둘러주시고요, ^^;;

전자책 1부 5~8권은 유페이퍼에선 업데이트된지 꽤 되었는데 대형서점들에는 아직도 안 올려주고 ㅤㅁㅟㅇ기적거리고 있나보네요;;; 이번주 내엔 오르겠죠 뭐;;;;

1월엔 나머지 9, 10권까지 내어 전자책도 1부를 완결할 참입니다.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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