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18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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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를 일단 끈 루토는 마우저를 쥐고 바위 아래를 지키고 있는 바에자에게 헐레벌떡 달려갔다.
- 여긴 내가 지킬 테니까 넌 케이블 걸고 올라오는 놈들 없는지나 확인해! -
“알겠습니다.”
루토가 크바르나들의 폴암과 마우저를 양손에 들고 뒤돌아섰다. 그는 칼과 마우저를 들고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바에자를 문득 돌아보았다. 지금의 그는 전혀 마구스같지 않은, 한 명의 전사였다.
수베르의 토로 기지 공격을 실패하고 가까스로 탈출해 아라무트에 도착한 직후, 바에자가 제일 먼저 한 건 덩치 큰 전사 한 명을 더 숨길 수 있는 특수한 석관을 직접 설계하는 일이었다. 철제 프레임을 대고 껍데기에 돌을 씌운 이 부실한 관에 바에자 스스로가 숨어들 것이라고 했을 때 루토 자신은 물론이고 슈라와 테나스까지도 펄쩍 뛰었지만 감히 마구스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위험하다 못해 무모한 일도 마다하는 법이 없는, 정말로 희한한 마구스였다.
사실 그는 이번에 바에자의 ‘특별한 능력’이 머릿속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 말고도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석관 구석에 몸을 구겨 넣어 숨긴 루토는 자신의 위에 바에자가 누워있는 동안 그의 바이탈 사인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뚜껑이 닫힌 후, 그는 혹시나 하는 맘에 바에자를 슬쩍 불러도 보고, 찔러도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반응도 없었고 그의 몸은 정말로 굳은 시체 같았다. 그는 바에자가 정말로 죽은 게 아닐지 공포까지 느꼈을 정도였다.
관이 신전에 들어온 직후, 깜짝 놀랄 만큼의 짜릿한 전류와 함께 바에자가 눈을 번쩍 뜬 순간에서야 그는 이 현신의 심장박동을 처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같았다.
- 놈들 관심을 여기로 집중시켜야 해. 계단을 살려두고 녀석들이 계속 올라오게 꼬셔야 하겠다. -
바에자가 여전히 아래를 노려보며 머릿속으로 뜻을 전했다. 루토는 한참 적에게 집중하고 있는 바에자에게 뜬금없는 한 마디를 꺼냈다.
“아까는……정말 죄송했습니다.”
루토는 자신의 입에서 이 말이 왜 튀어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를 한 순간, 바에자가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루토의 가슴이 철렁했지만 아침보다는 한결 너그러워진 눈길이었다.
-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
바에자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다정하게 울렸다.
“얼른 주변이나 확인해.”
루토는 평소 그리도 명랑하고 당당하던 바에자의 눈시울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의 그런 모습에 당황한 루토는 아침에 ‘현장’을 들켰을 때보다 더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때, 주변을 몇 바퀴나 헛돌아야 했던 근위대의 강습셔틀 20여대가 다시 이 카히나 성의 상공으로 다가왔다. 공중 에너지장벽이 꺼진 지금, 이곳은 완전히 발가벗겨져 있었다.
“어이! 어이!”
루토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강습셔틀이 제일 먼저 친 곳은 이곳을 가까이에서 노려보고 있는 서쪽과 동쪽 2개의 높은 바위 꼭대기였다. 그곳에서 막 켜진 장애파 발생기에 걸린 3대의 강습 셔틀들이 중심을 잃고 까마득한 땅바닥으로 내리꽂히는 모습이 보였고 발리스타들이 이곳을 향해 막 포격을 시작하려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일단 공중 에너지장벽이 풀린 그곳의 바위 위로 뒤이어 다른 근위대 셔틀이 계속 들이닥쳤고 중무장한 수십 명의 근위대 병사들이 줄을 걸고 줄줄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곳의 발리스타병들은 중앙바위 정상을 향해 제대로 포탄 한 번 날려보지 못한 채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가장 높은 바위산 세 곳 모두의 정상에 근위대들이 발을 디디면서, 카히나 성에 붕괴의 서막이 울리기 시작했다.
“못 올라갑니다! 이미 침입자들이 정상을 점거했습니다!”
뒤늦게 무기를 들고 중앙 바위 밑으로 달려온 베흔과 자이납을 크바르나의 사관이 급히 막아섰다.
“중앙 바위는 완전히 점령당했고 동쪽과 서쪽 바위 정상은 격전중입니다!”
머리 위를 올려보니 깎아지른 바위 거의 꼭대기의 계단에 2명의 크바르나들이 묶여 오도가도 못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성의 방공망을 맡고 있는 세 바위가 모두 무력화되면서 이스마엘 가의 문장을 단 소형 수송선이 대담하게 성의 시가지 광장 위까지 다가와 수백, 수천의 보병들을 줄을 타고 줄줄이 내려 보내고 있었다. 크바르나 5백과 제후 정규군 1천으로는 상대하기 힘든 상대들이었다.
“틀렸다.”
베흔의 입에서 절망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베흔의 말에 항상 깐죽거리던 자이납도 이번만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베흔은 얼른 할룩스를 들고 아직까지 창고에서 문서나 뒤지고 있을 코나와 우베를 불러냈다.
“너흰 학장 숙소로 가서 그 양반 지키고 있어. 자이납 넌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찾은 문서나 자료들 언제든 갖고 튈 수 있게 챙겨 놔. 조짐이 안 좋다.”
“여기서 문서 찾는 건 어떡하고요?”
자이납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돌아온 건 베흔의 호통이었다.
“성이 넘어가면 문서가 다 무슨 소용이야? 저놈들이 점령한 후에도 계속 찾고 있으라고 방이라도 내줄 것 같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베흔의 고함에 깜짝 놀란 자이납이 무기벨트를 조이고 아래층 숙소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깎아지른 계단 몇 개를 부리나케 뛰어 내려간 자이납은 바위에 난 작은 굴 중 하나로 쏙 뛰어들었다. 이 성의 다른 여느 방들처럼, 며칠간 묵어 온 그의 숙소도 돌을 파내어 만든 벌집 같은 구멍 안쪽에 만들어진 옹색한 작은 방이었다. 지금까지 그와 코리온이 이곳 창고를 뒤져 찾아낸 여러 자료들이 모두 그의 방 안에 모아져 있었다.
“학장님이나 지키러 보내줄 것이지 맨날 이런 게 내 일이야, 에이 씨.”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간 자이납은 눈앞의 광경에 순간 당황했다.
“이게 뭐야?”
그가 자료를 넣어두었던 구석의 붙박이장 문이 무언가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 애써 찾아낸 자료와 책자들이 옷과 뒤엉켜 사방에 어질러져 있었다. 눈앞이 아찔해진 자이납은 그 중 가장 중요한 한 개를 떠올렸다.
“상자, 상자는?”
그는 상자를 숨겨놓았던 옷장을 확 열어보았다. 순간 그는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는 것 같았다. 소화기를 들고 코리온과 싸워가며 가까스로 지켜냈던 그 종이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뭐 어떻게 된 거야.”
지금까지 큰 실수라고는 저지른 일이 없었던 자이납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때, 그의 할룩스가 갑자기 울렸다. 코리온에게 보냈던 우베였다.
“왜!”
자이납이 할룩스를 켜며 홧김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쪽의 표정은 더 창백했다.
“학장님이 안 보여요! 라스도 없고요!”
“이거 설마…….”
자이납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갔다.
“맙소사! 당장 소각장으로 가!”
자이납은 일단 남은 문서들을 배낭에 서둘러 쑤셔 넣고 일어섰다. 방에 남은 잡다한 신변용품들이 있지만 다 챙겨갈 여유는 없었다. 그가 소각장이 있는 서쪽 바위로 가려 밖으로 나섰을 때, 그의 귀청을 때린 건 고막을 찢을 듯 높은 톤의 셔틀 엔진소리였다.
“맙소사.”
그가 짐을 챙겨 돌아 나오는 동안, 카히나 성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성을 새카맣게 뒤덮은 강습 셔틀에서 수많은 로프가 내려져 수백,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병사들을 풀어놓고 있었고, 크바르나들과 사방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카히나 성이 자랑하던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호칭은 바에자의 교묘한 속임수에 뒤이은 에너지장벽의 붕괴와 함께 끝장이 나 버린 후였다.
상자를 메고 코리온의 뒤를 따라가는 라스의 걸음이 무거웠다. 그도 원해서 온 건 아니었다. 학장은 직접 만든 도구로 자이납의 방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 문제의 상자를 훔쳐내어서는 그에게 들고 따라오라며 지시했다. 그뿐이었다. 그도 이 일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에겐 주인, 아니 한때 주인이었고 그가 누구보다 존경하고 따르는 코리온의 명령을 코앞에서 거부할 용기는 없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라스가 상자를 추켜올리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코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묻기는 했지만 그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학장은 ‘쓰레기 처리장’이라고 쓰인 팻말을 따라 가파른 철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한때 남부의 푸줏간에서 일하는 까막눈 노예였던 라스지만 황제의 은혜로 면천을 받아 서부 콜로니 아카데미의 언어학과 학생이 된 지금은 공용어와 고대어, 그리고 바람어까지도 능수능란하게 읽을 수 있었다.
파예드가 아직 평민에게는 문을 닫고 있는 탓에 존경하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흠모하는 코리온의 제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학구열이 높고 호기심도 많은 청년이었다. 자이납이 가져온 ‘정체불명의 도형 모양 문자’를 코리온이 해독할 때 옆에서 조수를 했던 것도 그였다.
둘은 심야의 어둠 속에서 위험천만한 계단을 조심조심 디디고 아래의 광장까지 내려왔다. 밤이 늦어 광장의 청과시장도 거의 문을 닫았고 지금은 찌꺼기를 주우러 다니는 거지 두셋이 오갈 뿐 겁날 만큼 썰렁했다.
둘은 서쪽 바위 밑을 관통해서 낸 작은 굴에 들어섰다. 이 반대편, 카히나 성의 외벽과 맞닿은 곳에 처리장이 있었다. 몇 걸음을 갔을까, 갑자기 바깥이 시끌시끌해지는 소리에 코리온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 난 것 같다.”
자신의 ‘도둑질’이 들켰다고 넘겨짚은 코리온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의 옆구리에서 할룩스가 울리고 있었지만 그는 들은 척 만 척 걸음만 재촉했다.
“그 상자가 황상 손에 들어가선 절대 안 된다.”
상자에는 전임 대신관이 황제에게 남기는 유품들이 들어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고 황제가 알게 모르게 마구스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사교도들 편이 되어버린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큰 문제는 이젠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죽은 할머니 수나 마구스는 매일 밤 꿈에 나타나 그를 쓰다듬어주고는 사라졌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바람어로 잠꼬대를 하고, 무심결에 경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혐오스러웠다. 그의 몽니는 공포와 함께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는 이 행동이 분명 과하다는 것을, 아니 한심한 몽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을 무릎 꿇게 하려는 트라카 마구스의 운명도, 아니 카렐까지도 황제 겸 대신관의 길을 밟아가는 최악의 상황을 도저히 막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도 제국은 충분히 더럽혀졌어. 황상까지 더러운 사교도들에 물드신다면 제국은 끝장이다.”
이 말도 진심이 아니었다. 황제가 사교도에 물든다고 제국이 망할 리는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도 다 잠들었을 밤 시간이다 보니 처리장 문 앞도 텅텅 비어 있었다. 코리온은 라스와 단둘에 안에 들어서서 둘러보았다. 이런저런 용도로 분리되어 있는 처리장 한쪽엔 보일러를 돌리는 소각로로 들어가는 입구가 시뻘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당장 상자를 저기 넣어.”
라스는 알면서도 왔던 것이지만 움찔거렸다.
“아까 황상께서 귀한 것이니 꼭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내 명령이니 넣으라고!”
코리온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지만 라스는 쉽사리 소각로로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몇 시간 전, 그는 황제와 코리온이 이 상자를 놓고 말다툼을 벌이는 것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었다. 코리온이 문서 찾기를 거부했다는 말에 당황한 황제는 상자는 일단 자신에게 가져오고 나서 생각하라며 코리온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완강했다.
“하지만…….”
라스 생각에도, 코리온의 태도는 분명 과했다. 코리온이 그의 고용주이지만 황제는 그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준 은인이었다. 보다 못한 코리온이 직접 소각로에 던지려는 듯 그의 등에 진 상자에 손을 뻗었다. 겁먹은 라스가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죄송합니다. 학장님.”
코리온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휙 돌아선 라스가 처리장을 뛰어나가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네 이놈!”
격분한 코리온도 허겁지겁 달아나는 라스를 쫓았다. 좁고 어두컴컴한 지하 복도에서 큰 짐을 메고 도망을 가는 자그만 체구의 라스와 뒤를 쫓는 코리온의 짧은 추격전이 벌어졌다. 키가 큰 코리온은 좁고 낮은 천장 때문에 중간중간 엉거주춤하며 걷느라 조금씩 뒤처졌다. 작은 체구 덕분에 무리 없이 굴을 빠져나간 라스는 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장 풍경에 놀라 멈칫거렸다.
“라스! 서지 못할까!”
등 뒤에서 들리는 코리온의 고함에 놀란 라스는 왜 이리 광장이 북적거리는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지 이유도 모른 채 무작정 인파에 뛰어들었다. 바로 뒤이어 굴에서 나온 코리온도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라스를 보고는 서둘러 다시 쫓으려 했다. 그 순간, 바위 꼭대기의 숙소에서 그를 쫓아 내려온 코나와 우베가 불쑥 나타났다. 소각장에서 돌아 나온 코리온의 손이 비어있는 것을 본 코나의 눈에서 불꽃이 확 일었다.
“씨발! 이 벽창호 새끼! 상자 어쨌어!”
갑자기 맹수로 돌변한 코나가 이를 드러내며 코리온에게 달려들어 바닥에 벌렁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우베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우읍!”
그의 일격에 턱이 옆으로 휙 돌아간 코리온은 순간 정신이 멍해져 입을 열지 못했다. 분노에 차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는 코나를 우베가 덥석 붙들었다.
“저기! 저쪽이요!”
우베가 인파 사이로 막 사라지는 라스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줄을 매어 등에 짊어진 상자 덕분에 라스의 뒷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때, 다시 이들의 뒤를 쫓아온 자이납이 계단에서 훌쩍 뛰어내려왔다.
“야, 야, 상자 어떻게 됐어!”
“라스가 갖고 도망친 것 같아요! 저쪽이요!”
“뭐? 제기랄! 내가 잡아 올 테니까 넌 학장님 모시고 가!”
자이납은 코리온을 이 둘에게 와둔 채 상자를 갖고 사라진 라스를 찾아 인파에 뛰어들었다.
슈라의 지휘 하에 무려 3천의 근위대가 눈 깜짝할 새 강습을 한 카히나 성 내부는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사방에 불을 지르고 크바르나나 제후군들과 따로 진형도, 방어선도 없이 사방에 흩어져 난잡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불에 놀란 민간인들이 죄다 쏟아져 나와 출구로 이어진 광장 쪽은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근위대들이 불을 지르고 민간인들을 몰려나오게 해 혼란을 야기한 건 크바르나들의 저항을 더 어렵게 하려는 의도였을 뿐 일부러 살해할 의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불을 지르지 말라며 애원하거나 무모하게 침략자들에 저항하려 하는 민간인들에게까지 자비를 발휘하지는 않았다. 불과 연기, 골목골목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민간인들의 모습이 사람들을 더 패닉으로 몰아넣었다.
겁에 질린 민간인들은 광장을 통해 2천 계단이 있는 문 쪽으로 이성을 잃은 채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평소 그들을 지켜주던 그 좁은 계단은 이제 탈출을 가로막는 장벽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안이나 성의 굴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하다는 울피의 다급한 방송이 성 전체에 울렸지만 사방에서 솟구치는 불 때문에 따르는 사람 반, 안 따르는 사람 반이었다. 그나마 그 방송도 케이블과 동력원이 파괴되면서 얼마 안 가 끊겨버렸다. 근위대가 상륙과 동시에 이 일대에 장애파를 터뜨리면서 군용 비상코드를 제외한 민간의 할룩스는 모조리 끊겨 사람들의 공포를 부채질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 상황이 어떤지도 전해듣지 못한 채 일단 살겠다고 몰려나온 수천의 민간인들이 한 번에 광장과 성문으로 몰리면서 자칫 압사사고가 날 판국이었지만 성을 빼앗기게 생긴 크바르나들도, 공격하는 근위대도 지금 민간인들을 단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물러가십시오! 성 안에 들어가 있는 편이 안전합니다!”
성문을 지키는 위병소대장이 몰려드는 민간인들을 향해 확성기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만 이미 공포와 집단의식에 사로잡힌 민간인들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제발 들어가십시오! 바깥은 더 위험합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쏘겠습니다!”
소대장의 절규에 가까운 마지막 경고도 군중의 발소리에 파묻혀버렸다. 소대장이 결국 고함을 질렀다.
“사격 준비!”
지시를 받은 성문의 크바르나들은 불과 적의 공격으로 난장판이 된 성에서 나가겠다며 몰려드는 민간인들을 향해 일제히 석궁을 겨누었지만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소대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위대한 현신을 받들고 정의를 수호한다며 맹세했던 크바르나의 전사들이었다.
“제기랄, 제발 좀 돌아가라고.”
칼을 높이 쳐든 소대장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쏘아야 했지만 이들은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자신들과 농담을 나누고 수고한다며 과일과 떡을 건네주던 선량한 주민들이었다.
“소대장님?”
선임 사관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분대장을 돌아보았다. 벌벌 떨고 있던 소대장은 결국 칼을 힘없이 떨구고 칼집에 꽂았다. 저 많은 군중을 향해 고작 20명의 크바르나들이 석궁을 쏘아 봤자 분노와 혼란만 자극할 뿐 저지하지는 못할 것이 뻔했다. 저들은 어차피 문을 무너뜨리고 나갈 기세였다.
“바위 위로 물러나라.”
결국 민간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크바르나들은 성문을 버리고 서둘러 양쪽의 바위 위로 기어올랐다. 소대장의 판단은 옳았다. 공포에 질린 수천의 민간인들은 성문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2천 계단이 있는 가파른 골짜기로 물밀 듯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중간엔 성을 출입하는 마지막 관문인 구름다리가 있었다.
그 시간, 민간인이 몰려드는 그 구름다리를 노리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하나 있었다. 가짜 자수를 하고 얌전히 영빈관에 들어가 있는 척했던 사이르 이스마엘 경은 혼란이 벌어지기 직전, 20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그곳을 빠져나와 2천 계단으로 내려가는 성문과 구름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바위 위에 올라와 있었다.
“허, 무기도 안 든 민간인들이 수천 병력보다 강력하네.”
성문을 지나는 민간인들의 인파를 본 사이르가 빈정거렸다.
“어떡하죠? 예정대로 합니까?”
그를 따라온 근위대 포병사관이 걱정스런 얼굴로 구름다리를 가리켰다. 사이르와 그를 따라온 포병의 임무는 성 내의 크바르나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유일한 통로인 저 구름다리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근위대의 기습으로 성 내부가 아수라장이 된 사이, 성 아래의 황무지에는 사이르가 바에자에게 지원해 준 2대의 초대형 발리스타가 막 설치를 끝내고 대기하고 있었다. 저들을 견제해야 할 성 내의 발리스타 분대들이 곳곳의 바위에 배치되어 있지만 이미 근위대 병사들이 그곳을 제일 먼저 강습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보니 저들의 보란 듯 발리스타를 전개하는 상황에서도 변변한 견제공격을 할 여유가 없었다.
“민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민간인 희생이 생기면 바에자 현신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
“다리를 못 끊으면 더 화내실걸?”
난감해하는 포병에게 사이르가 진행하라며 손짓했다. 포병은 하는 수 없이 미리 준비해 간 유도기계로 구름다리의 좌표를 후방에 알렸다. 구름다리는 발리스타가 있는 저지대에서는 봉우리 몇 개를 넘겨 포탄을 날려야 하는 위치다 보니 누군가 이곳에서 유도를 해 주어야 정확했다.
“혹시 모르니 숙이고 계십시오, 제후님.”
병사가 계측기를 읽으며 주의를 주었다. 잠시 후, 이 카히나 성의 군인은 물론이고 이번엔 민간인 모두에게까지 최악의 순간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날카로운 굉음이 공기를 울렸다. 산 밑에서 날아오른 시뻘건 불덩이 하나가 겁에 질려 구름다리 부근으로 몰려들던 민간인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으, 으악!”
변변한 훈련도 받아 본 일 없는 대다수의 민간인들은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어마어마한 불덩이에 순간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뒤이어 땅을 울리며 폭발한 불덩이에 그 반경 수십 척 일대의 사람들 십여 명이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몸과 얼굴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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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온이 드디어 진상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ㅎㅎㅎ
(그래도 소설 초반의 진상짓보다는 약과입니다만....)
* 출판본 3부 5/6권이 현재 주문게시판에서 예약중에 있습니다. 이번엔 크리스마스 전에 끝내려 예약기간을 조금 짧게 잡았으니 서둘러주시고요,~~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 ̄)ブ~~★
아참, 그리고 전자책 서비스 업체에 올레e북이 추가되었습니다. 아마 월말 정도에 서비스가 가능해질 적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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