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19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
.
.
“맙소사! 여기 있다간 다 죽어!”
민간인들의 공포는 극한으로 치솟고 있었다. 그들은 다리에 뛰어들려다가 타죽은 시체들을 빤히 보면서도 어떡해서든 탈출하겠다는 생각에 이성도 잃고 계속 구름다리로 몰려들었다. 몇몇은 겁에 질려 성 안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뒤에서는 아직 이곳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다. 뒤늦게야 옳은 판단을 한 이들도 뒤에서 계속 몰려오는 사람들에 뒤엉킨 채 아우성을 치며 다리 위로 밀려나갔다.
포병은 그런 민간인들을 최대한 시선에서 외면하며 다시 좌표를 수정해서 불렀다.
“너무 멀어! 44방향 9척 반!”
곧바로 산 밑에서 두 번째 불덩이가 솟구쳐 올랐다. 이번엔 다리 위를 때렸고, 그 위의 사람들도 함께였다. 다리 위의 민간인들이 불꽃에 휘말려 재가 되고 파편이 되어 다리 주변 사방으로 튀었다. 시체와 살점으로 얼룩진 다리 중앙에는 큼직한 구멍이 났지만 여전히 다리는 건재했다.
“안 돼! 돌아가는 게 낫겠어!”
그제야 근위대보다 발리스타 포격에 타죽는다는 공포가 더 절박해진 앞쪽의 사람들은 이제라도 물러나려 했지만 여전히 뒤에서 몰아붙이는 사람들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앞줄 사람들은 뒷줄에 밀려 집단도살장이 되어버린 다리 위로 계속 밀려갔다.
“조금 더! 45방향 0.5척!”
포병의 유도를 받은 붉은 불덩이는 이번엔 다리 중앙, 사람들이 새카맣게 몰려 있는 곳을 제대로 때렸다. 거의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불꽃 속에서 사라졌고 바닥엔 큰 구멍이 생겼다. 아직 비명을 지를 만큼 목숨이 붙은 사람들의 절규가 사방에서 이어졌고 사람들은 이 와중에도 계속 몰려 내려왔다.
“왜 이렇게 안 무너져.”
사이르가 짜증을 냈다. 유도를 하는 포병이 내심 불편한지 머뭇거리며 뭐라 말을 하려다가 결국 목 뒤로 삼켜버렸다.
“위치 좋다. 계속 그대로 쏴.”
이젠 다리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앞줄 사람들과 성에서 계속 몰려나와 밀어붙이는 뒷줄 사람들 간의 처절한 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앞 줄 사람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다리 위에 줄줄이 쓰러졌고, 그 뒤의 사람들이 쓰러진 사람들의 등과 가슴을 밟고 다시 그 앞에 쓰러지며 한 켜를 덧씌웠다. 다리 위엔 쓰러진 사람들과 그 위를 넘어가려는 사람들까지 온통 한 덩어리가 되어 거의 100명 가까이가 짐짝처럼 쌓였다.
“제발 밀지 마!”
우는 아기를 안은 채 다리 중간께에서 깔려 절규하는 한 엄마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포탄 날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전장을 울렸다. 그리고 이들의 머리 위를 잔혹한 불덩이가 다시 덮쳤다.
“끄아악!”
깔린 사람들과 위에 있는 거의 백여 명의 비명소리는 발리스타의 폭음에 파묻혀 함께 재가 되었다. 운 좋은 몇몇은 살아남았지만 교각 한쪽이 무너지며 그들의 행운도 끝이 났다. 먼저 죽은 수십 명의 타고 남은 잿더미, 불이 붙은 채 발버둥치던 사람들, 아기 엄마의 절규와 아기의 마지막 울음소리, 백여 명의 그 주변 사람들의 비명 모두가 무너지는 교각, 상판과 함께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한 번에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전부 민간인들이었다.
“신이시여, 이 죄를 제가 어떻게 감당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유도를 한 사관은 수백의 목숨과 함께 다리가 무너지는 끔찍한 광경에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사이르 경이 그런 그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벌떡 일어났다.
“됐다, 다리를 끊었으니 크바르나 놈들도 이젠 못 달아나. 우린 할 일 다 했으니 정찰도 할 겸 성 안으로 되돌아간다. 근위대 너흰 여기서 계속 감시하고 있어.”
사이르 경은 울먹이고 있는 근위대 포병사관을 놓아둔 채 자신을 따라온 가문 근위병들을 불러들였다. 성에 다시 들어간다는 말에 근위병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여기서 근위대 입성을 기다리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멍충아, 우리가 뭐 전쟁 구경하러 왔어? 막 무너진 성에 제일 먼저 들어온 놈이 하는 게 뭐야? 먼저 챙기는 놈이 임자인데 미쳤다고 근위대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가 다 내줘?”
“아하.”
“4층하고 5층에 가문 보물 보관소가 있다고 하더군. 너희 몫도 일부 떼어주마.”
한몫 건질 기대에 눈이 벌개진 근위장교와 병사들이 카히나 성 안쪽으로 서둘러 향했다. 그곳엔 근위대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지고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카히나 성이 있었다. 아직 전투가 완전히 결판난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급해진 그는 근위대가 차지하기 전에 먼저 먹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성벽을 타고 재빨리 이동한 20여명의 사이르 일행들은 레즐린 가의 행정관청과 제후 관사가 있는 바위에 재빨리 올랐다. 혹시라도 근위대와 마주한다면 같은 편인 척 하면 될 테고, 크바르나와 만나면 아샤드 경을 만나러 온 척 하면 될 일이었다.
“근위대가 이긴 모양입니다.”
함께 온 근위장교가 귀엣말을 전했다. 근위대의 초기 강습목표 중 하나였던 이곳은 맹공격을 받은 막 크바르나들이 퇴각하고 근위대 후속부대도 도착하기 전의 딱 중간 시간이었다. 이곳은 말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운도 좋네.”
사이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군데군데 시체가 늘어져 있는 관청 동굴들은 누구든 제발 약탈해 달라며 입을 벌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미리 조사해 두었던 통로를 타고 4층에 있는 레즐린 가 수장고로 재빨리 향했다. 약삭빠른 슈라 녀석이나 눈치 빠른 민간인들이 손을 대기 전에 먼저 털어야 했다.
“너흰 여기서 바깥 지키고 있어.”
레즐린 가 수장고 굴 앞에 선 사이르가 돌연 함께 온 십여 명의 근위병들을 저지했다.
“예에?”
지금까지 욕심으로 그득해서 쫓아온 병사들의 표정이 의심으로 확 굳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이 타이밍에 막아서는 제후의 속셈을 모를 만큼의 바보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험악해진 시선에 지레 움찔한 사이르가 버럭 화를 냈다.
“꺼내올 동안 기다리고 있으라고. 누군가는 지켜야 할 것 아냐.”
뚱해진 사병들을 일단 달래놓고 들어왔지만 사이르는 물론 그들에게 제몫을 다 떼어줄 맘은 추호도 없었다.
“내 알기로 이놈들 아케메니아에서 빼돌린 교단의 값나가는 성물들 많이 갖고 있어. 문화재급의 물건들도 많아. 거기에 황제도 레즐린 가에 뒷구멍으로 지원을 많이 했으니 숨겨놓은 채권이나 귀금속도 많을 게 분명해. 저 바깥의 멍청이들은 보석이나 좀 떼어주면 좋아라 하겠지.”
그는 대충 입단속이 가능한 가문 근위장교와 사관 3명, 그리고 절단기 같은 장비를 지닌 노예 6명과 함께 조명도 꺼진 어두운 굴 깊숙이까지 랜턴으로 비추며 조심조심 들어갔다. 예상대로 크바르나들이 지키는 경비초소는 텅 비어 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니 내부의 보물을 지키는 철문이 보였다.
“이런, 염병할.”
굴 안쪽에 불을 비춰 본 사이르의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철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안쪽의 철창도 활짝 열려 있었다. 근위대의 강습과 공격이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크바르나들이 재빨리 가져갔거나, 아니면 누군가 정말로 재빠른 놈이 그새 먼저 털어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 가져가진 못했나봅니다.”
낙담하고 있는 사이르에게 가문 근위장교가 말을 건넸다. 문은 열려 있지만 아직 많은 상자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상태였다.
“일단 뒤져 보면 뭐 좀 나오겠지.”
랜턴을 쥔 그들 십여 명은 철문을 조심조심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때, 베테랑 선임 근위장교가 갑자기 무기에 손을 가져가며 옆으로 휙 돌아섰다.
“누구야!”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두 개의 눈동자에 놀린 장교들이 잽싸게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흐트러진 상자들 사이에 머리를 짧게 친 호리호리한 남자 한 명이 미동도 않고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짐꾼들이 입는 허름한 셔츠와 더러운 바지를 본 사이르는 상대가 군인이 아니라는 데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 이놈, 도둑놈이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사이르의 호통에 남자가 갑자기 가소로운 듯 웃기 시작했다. 굴의 짙은 어둠 속에서 랜턴에 비치는 남자의 움푹한 뺨과 도드라진 광대뼈가 귀신처럼 음산해 보였다. 사이르는 이유 모를 공포감에 슬금슬금 장교들 뒤로 물러났다.
중앙 바위 밑에 여전히 서 있던 베흔은 1백여 명의 크바르나들을 이끌고 중앙 바위 밑에 도착한 제후 아샤드 경을 힐끔 돌아봤다. 중앙 바위를 올려보는 그의 시선이 사뭇 무거웠다.
신전과 에너지장벽 포스트가 있는 바위 정상으로 오르는 철제 계단에는 아직도 크바르나들 수십이 다닥다닥 붙어 탈환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머리 위에서 계속 쏘아대는 근위대의 석궁과 마우저 사격에 머리도 제대로 못 내밀고 귀한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저곳에도 근위대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문외한이 보기에도 분명 올라가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현신이라고 다 정의롭지는 않은 모양이구려.”
베흔의 핀잔에 아샤드의 표정이 사나워졌지만 이 판국에 대놓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중앙 바위 꼭대기를 계속 올려보며 한숨과 함께 무거운 한 마디를 내뱉었다.
“1만 5천의 근위대와 3만의 이스마엘 가 보병대가 외곽을 포위하고 있소.”
베흔은 그간 바위를 올려보느라 미처 관심을 못 두었던 성 아래 황무지를 둘러보았다. 웬만한 도시 하나 같은 수많은 불빛이 성 주변을 이미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었다.
“2천 계단으로도 근위대 2천 정도가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요. 성을 사수하기는 어려울 것 같소. 우리도 준비하고 있으니 당신도 퇴각할 준비 하시오.”
베흔은 자기가 하려 했던 말을 아샤드가 먼저 해 주자 내심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는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바깥뿐만이 아니고 성 내부는 더 난장판이었다. 몇몇 바위나 방들은 크바르나들이 사수하고 있고, 또 몇몇 지역은 근위대가 이미 장악해서 수색하고 있고, 대부분의 지역은 누가 차지한 건지도 모른 채 놀란 민간인들만 아우성을 치며 돌아다니고 있는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시장은 근위대들이 지른 불로 군데군데 매캐한 연기가 덮고 있어 상황이 어찌된 것인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성을 내주는 건 전혀 아깝지 않소. 어차피 크바르나들은 여기를 떠나 그분께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허나 황상께 꼭 필요한 타리프의 일지를 결국은…….”
아샤드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처음엔 냉소적이었던 베흔도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남자가 같은 군인으로써 좀 안쓰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황상께 보고는 했소?”
“황실 서부 파견군 분견대가 주둔하고 있는 카즈빈 마을로 가겠다 말씀드렸소. 크게 낙담하신 듯하오.”
“그런데 퇴각할 거라면서 왜 아직까지 쓸데없이 저 바위는 공격하고 있는 거요? 빨리 수송선이나 셔틀은 대지 않고?”
“에너지장벽이 다시 쳐졌소.”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베흔이 다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밤하늘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희미한 푸른빛이 보이는 듯도 싶었다.
“이런, 니미럴.”
“지금 같아선 육로로도, 공중으로도 못 나갑니다.”
“난 괜히 들어왔다가 이게 뭐야.”
나갈 길이 없다는 말에 베흔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샤드는 작은 깡통 안에 꼬깃꼬깃 들어 있는 종이를 불쑥 내밀었다.
“방금 저 바위 꼭대기에서 떨어진 거요.”
베흔이 허겁지겁 펼쳐 보니 미려한 필치의 바람어가 쓰여 있었다.
- 지금이라도 부대원들과 함께 진정한 대신관의 품에서 신성을 찾게나, 아샤드.
바에자 빈트 에시마. -
“이 좀비 년 지랄하고 자빠졌네.”
베흔이 신경질을 내며 다시 바위 위를 올려보았다. 아샤드가 그에게 망원경을 넘겨주며 말했다.
“궤도에 있던 수송선과 셔틀들을 불렀지만 접근을 못 하고 있소. 이젠 우리가 저길 탈환하지 않으면 달아날 가망이 없소.”
베흔이 눈에 망원경을 대고 바위 정상을 뚫어지게 살폈다. 그때, 중앙의 바위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쑥 내밀더니 바위를 올라오려 시도하는 크바르나에게 마우저를 쏘는 모습이 보였다.
“어, 저놈?”
베흔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한때 그의 밑에서 보안국 부국장이었고 카렐 밑에서 보안국장으로 있었다가 황궁 지하에서 행방불명되었던 루토였다.
“저 갈아먹을 놈이 저기 있었네.”
베흔이 이를 박박 갈았다. 지난 페스트의 반란 당시 루토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정확히 그가 교단 편에 있는지는 아직 확인이 안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정상 밑의 바위에 매달린 크바르나들은 그가 머리를 내밀 때만 기다리고 석궁을 계속 겨누고 있었지만 루토는 쉽사리 적에게 급소를 대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렇게 바위에 다닥다닥 달라붙어서 가망도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요?”
베흔이 버럭 짜증을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에게 점거당한 중앙바위 양쪽으로는 그보다 조금 낮은 바위 두 개가 마치 호위하듯 서 있었다.
“저 양쪽 바위들 정상에 발리스타가 있지 않나? 저기 안 빼앗기고 사수했다면 그걸로 쏘면 저 정상에 닿을 것도 같은데?”
“그렇긴 한데 놈들이 저기에 제일 먼저 강습해서 이미 두 대 다 부서졌소,”
“허, 씨, 바에자인가 그년 제법이네. 발리스타가 얼마나 손상된 거요?”
“동쪽 바위 정상의 한 대는 케이블이 타서 끊겼고 서쪽 정상의 하나는 놈들이 밀어 떨어뜨려서 형체도 안 남고 박살이 나 버렸소.”
아샤드는 턱으로 시장 서쪽을 가리켰다. 시장 곳곳을 뒤덮고 있는 매캐한 연기 너머 상점의 지붕을 박살내고 흉물스럽게 거꾸로 처박혀 있는 발리스타가 보였다. 그의 말대로, 둘 다 별 수를 다 해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때, 잔뜩 성이 난 얼굴의 코나 시디크가 2명의 크바르나들과 함께 입술이 터진 채 발악하는 코리온을 죄인처럼 질질 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옆에서 우베가 말리고는 있지만 그 전직 헤네티는 상황만 이렇지 않다면 당장이라도 코리온의 머리를 때려 부술 기세였다.
“자이납은?”
베흔의 물음에 우베가 고개를 저으며 시가지를 가리켰다.
“모르겠어요. 라스가 아까 그 상자를 갖고 도망갔는데 중랑장님이 쫓아갔어요. 저기 시가지 어딘가에 있나본데 워낙 난리통이라 연락도 안 돼요. 지금 여기 크바르나들이랑 제후군이 쓰는 군용 비상코드 할룩스 빼고 민간 할룩스는 다 끊겼어요. 당장 우리 할룩스도 다 불통이에요.”
우베가 시장이 있던 광장을 가리켰다. 광장은 군데군데 크바르나들과 근위대들이 산발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고, 양쪽의 대치 중간에서 양떼처럼 끼어버린 수백의 민간인들이 오도 가도 못한 채 뛰어다니는 난장판이었다. 광장 주변의 골목골목에 숨어있는 민간인들까지 생각하면 저 중간 대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놀란 베흔이 비명처럼 소리를 버럭 질렀다.
“상자라니? 아까 그 종이상자?”
우베가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코나와 실랑이중인 코리온을 슬쩍 턱끝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상황을 눈치 챈 베흔은 자기가 코나였다면 이미 저놈의 머리를 박살내었을 것이라며 이를 갈았다.
“이런 씨발, 당장 여기서 퇴각해야 하는데 어쩌라고! 당장 찾아내서 늦기 전에 오라고 해!”
베흔의 호통에 크바르나 두 명이 헐레벌떡 자이납이 사라진 시가지로 달려나갔다. 씩씩거리던 베흔은 구석에 팽개쳐진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저 속 터지는 학장을 노려보았다.
“이 인간은 기껏 와서 밥값은 고사하고 남의 밥상까지 엎어놓고 가네.”
그때 그의 시선은 시장통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부서진 발리스타와, 나머지 부서진 발리스타가 있을 서쪽 바위 정상을 올려보았다. 무언가 퍼뜩 생각이 스친 그는 아샤드 경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발리스타 팀은 어딨소?”
아샤드는 한쪽에서 성의 중요한 자료들을 짊어지고 집결지로 나르고 있는 5명의 병사들을 가리켰다. 무기를 잃어 쓸모없어진 가문 정규군 발리스타병들을 짐꾼으로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놈들 좀 빌려주시오! 이 벽창호 양반 서쪽 바위 위에 좀 데려다 놓으시고!”
베흔은 아샤드의 알았다는 말이 채 떨어지기도 발리스타병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짐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발리스타 분대장의 뒷덜미를 다짜고짜 붙들고 산발적인 교전으로 난리통인 시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너희들 다 따라와! 정비용품 챙겨오는 거 잊지 말고!”
느닷없는 지시를 받은 코나와 우베, 발리스타병들은 영문을 모른 채 일단 베흔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시장 동쪽은 이미 근위대들이 점령한 상태였고, 골목골목 어디에서 근위대 가디언이나 병사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민간인들은 성의 바위굴로 도망을 쳤거나 아니면 광장에서 탈출하려 아우성을 치고 있을 뿐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좁은 시장골목엔 만나자마자 으르렁대고 싸울 양쪽 군인들뿐이었다.
베흔과 코나가 시장 깊숙이까지 계속 들어가자 겁먹은 분대장이 멈칫거리며 물었다.
“여긴 위험한데요?”
“그게 왜?”
등에 메고 있던 긴 플람베르주를 죽 뽑아든 베흔은 골목 앞을 막고 있는 불타고 있는 좌판을 힘껏 걷어차 쓰러뜨렸다. 좌판 쓰러지는 소리에 골목 한쪽에 숨어있던 근위대 가디언과 2명의 병사가 확 튀어나왔다. 그들은 상대가 크바르나인줄로 알고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어, 엇.”
그들은 눈에 익은 베흔의 모습에 순간 멈칫거렸다. 하지만 정작 베흔은 자신의 이 옛날 부하들에게 자비 따위를 베풀 맘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는 칼을 든 채 머뭇거리고 있는 가디언 사관의 머리를 그 무지막지한 플람베르주로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놀란 가디언이 뒤늦게 막아보려 했지만 카렐만 뺀다면 그 누구도 못 당할 이 괴물 5세대의 상대는 아니었다. 부서지는 칼과 함께 가디언의 목이 찢겨나가 재로 더러워진 골목을 굴렀다.
“귀찮게!”
베흔은 옆에서 우베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적병의 뒷덜미를 덥석 붙잡아 사정없이 목을 꺾어 내던졌다.
“또 하나는?”
고개를 휙 돌린 베흔은 옆에서 뇌수로 범벅이 된 철퇴를 무표정하게 털어내고 있는 코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저 소름끼치는 전직 헤네티는 사람을 죽일 때도, 대화를 할 때도 아무 표정이 없었다.
“따라와, 빨리!”
베흔은 바위산 정상에서 떨어진 발리스타가 꽂혀 있는 잡화상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베흔은 지붕을 뚫고 꽂혀 있는 발리스타 쪽에 데리고 온 분대장을 확 떠밀며 고함을 질렀다.
“빨리! 저기서 케이블 뜯어내!”
“예에?”
발리스타병이 박살이 난 발리스타를 힐끔 돌아보았다. 지지대와 고정장치, 조준장치 모두 박살이 나 있지만 장력을 내는 금속 케이블만은 다행히 멀쩡했다. 병사들이 무너진 집터에 기어올라 자신들의 부서진 발리스타에서 케이블을 떼내기 시작했다.
“조심해! 기화 탄두들도 몇 개 같이 떨어졌어! 잘못하면 불바다 될 테니까!”
분대장의 조심하라는 말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해한 한 조그만 사내가 집터에 훌쩍 뛰어올랐다.
“우와, 이게 웬 떡이야?”
한동안 못 써먹었던 파이로매니아 기질이 되살아난 우베는 발리스타와 함께 떨어져 돌더미 사이에 꽂혀 있던 발리스타 기화 포탄의 탄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주먹만한 인화물 캡슐들이 줄줄이 박혀 있었다. 발사된 탄두가 목표물에 닿는 순간 공기 중으로 기화해 넓은 면적에 폭발을 일으키는 강력한 인화물질이었다. 인화물 전문가였던 우베는 제 세상 만난 듯 능숙한 솜씨로 캡슐들을 분해해 가방 안에 우겨넣었다.
부하들이 케이블을 뜯어내는 모습을 지켜보던 분대장이 베흔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혹시 저걸 서쪽의 케이블 끊어진 발리스타에 연결해 쓰시려고요?”
“왜? 못 하냐?”
“그게 양쪽 발리스타의 제원이 다릅니다. 이 발리스타는 서쪽 발리스타보다 장력이 큰 케이블인데 저걸 연결해 썼다가는 림이 못 버티고 박살이 날 겁니다. 설사 쏜다고 해도 서쪽 발리스타는 조준기도 부서져서 수동 조준을 해야 하는데 케이블이 엉뚱한 게 달리면 탄도계산표가 전혀 맞지 않을 겁니다. 이게 손으로 뚝딱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저희도 생각은 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분대장이 수첩에 있는 복잡한 도표를 보이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베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풀어낸 케이블을 지고 내려오는 병사들에게 빨리 서두르라며 신경질적으로 손짓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건 너무 무거워서 원래 장비로 옮기는 거지 인력으로는 거의…….”
“저기다!”
그때, 골목 너머에서 다시 근위대 대여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색이 된 발리스타병들은 거의 허벅지 굵기에 사람 서너 명의 체중은 되는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발리스타 케이블을 끌어안고는 무너진 집 잔해를 타고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
“으악!”
막 일어나려던 발리스타병이 얼굴 앞을 스치는 볼트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베흔이 반사적으로 손도끼를 던져 석궁을 쥔 선두의 적병을 쓰러뜨리자 그들도 놀라 허겁지겁 모퉁이 뒤로 몸을 피했다.
“빨리! 빨리 가!”
베흔은 넘어진 병사를 일으켜 엉덩이를 걷어찼다. 케이블을 어깨에 줄줄이 짊어진 5명의 발리스타병들은 크바르나들이 있는 서쪽으로 부리나케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평소 훈련 때라면 휘청거리며 겨우 옮겼을 무게이지만 등 뒤를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순식간에 초인으로 돌변해 있었다.
“쫓아가!”
근위대 분대장은 주변을 뛰어가던 민간인 한 명을 덥석 붙잡아 앞에 인간방패로 세우고는 베흔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귀찮게, 진짜!”
도망치는 발리스타병들의 제일 후미를 지키고 선 베흔은 뒤를 따라붙으려는 근위대들에게 방금 죽인 적 가디언에게서 빼앗은 큰 검을 휙 던졌다. 민간인 인질 따위로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사내를 막는다는 생각은 애당초 틀린 것이었다.
“으익!”
단검도 아니고 어마어마하게 큰 장검이 공중을 빙빙 돌며 날아오는 모습에 놀란 근위대들이 인질을 내동댕이치며 경악을 하며 쫙 흩어졌다. 구사일생한 인질은 비명을 지르며 한쪽으로 도망을 쳐 버렸다.
============================ 작품 후기 ============================
.
.
.
이번 편부터 베흔의 진가가 슬슬 나타납니다. ㅎㅎㅎ
◆ 아, 그리고 오늘 연재를 끝으로 출판본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책이 나오는 연말까지 잠시 연재를 쉬어야 할듯합니다. 출판본은 진도가 좀 앞서가고 있지만 연재본 따로 작업하는 것도 부담이 되어서요. (정확한 연중기간은 며칠 후에 공지로 알리겠습니다.) ◆
월요일인 19일까지 예약인데 이번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쇄 원판작업 들어갈 예정이니 구매하실 분들께선 신청 서둘러서 해주세요~ 실은 주문이 이전보다 부진해서. ㅠ.ㅜ;; ....이번 인쇄 부수 결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연말이라 인쇄소에 미리 종이 확보량을 알려줘야 하는데 난감하네요.)
홍보가 잘못된 건지;;; 아는 분들 홍보 좀 부탁드립니다~ 이번엔 인쇄에 쌩돈들이게 생겼네요. 글을 쓰고 책을 낸다는 게 경제적으로 너무 힘드네요. 휴우~~ 차기작을 공개할지 말지도 심란해졌고요.
어쨌든 예약분이 적으면 여분 인쇄도 조금만 할 수밖에 없거든요;;;나중에 사실 분이 얼마나 되실지는 모르지만 그몫까지 많이 두기는 수백만원이나 되는 인쇄비나 재고 부담이 크거든요. 완결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때까지 재고 안 남기고 다 팔려면 여분을 많이 뽑기도 그렇지만요...;;; (그래서 전자책이 좋습니다~ㅋㅋ)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 ̄)ブ~~★
(혹시 아나요, 삼종세트라도 좋으면 연중이 비교적 빨리 끝날지...ㅎㅎㅎ)
♠ 아참, 그리고 전자책 서비스 업체에 올레e북이 추가되었습니다. ♠
아직은 승인중인데 월말 정도에 서비스가 가능해질 적 같습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조아라 노블레스 : http://t.co/ErnaaB0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올레e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