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26화 (1,021/1,132)

< -- 1026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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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자가 이끄는 근위대 8군단이 카히나 성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황제령 타르서스에 정박하고 있는 크테시폰 궁에서는 작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코런덤 병영의 작은 예배실에서는 야투 박사를 선두로 한 다하카르 교단 신관 9명과 대신관의 생모 나키아가 횃불을 든 채 서 있고 병실에서 갓 나온 코런덤 여단장 사카와 고위급 헤네티 20여명이 다시 그 주변을 감싸고 동심원으로 서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 놓인 건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 하나였다.

검은 가운을 걸치고 나타난 이디나는 그들을 지켜보며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헤네티와 신관들 사이를 가로질러 의자 옆으로 다가갔다.

“물감 자체는 특별히 해가 없는 것으로 준비했사오나 혹 통증이나 스트레스가 새로운 현신의 씨앗에 문제가 될까 걱정이…….”

야투 박사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이디나는 별 대답 없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의자 옆에 섰다.

“이것도 못 버틸 약한 아기라면 태어날 가치도 없다.”

이디나가 딱 잘라 대답하며 의자에 어깨를 펴고 앉았다. 그렇지만 그의 두 손은 소중한 생명이 숨 쉬고 있을 아랫배 위를 살며시 덮고 있었다.

“세상을 바꿀 출정을 앞두고 이제 위대한 현신으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새 몸이 많이 나아진 사카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어깨에서 검은 가운을 벗겨내자 대신관의 하얀 알몸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슈라였다면 송구하니 어쩌니 몸이 예쁘다느니 요즘 살이 붙어 보기 좋다느니 몇 마디를 구구절절 붙였을 테지만 도무지 말 한 마디 듣기 힘든 이 과묵한 무장은 대신관의 알몸을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묵묵히 멀어져 자기 자리에 섰다.

뒤이어 가방을 든 젊은 청년 두 명이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예배실 안에 들어섰다. 그는 조심조심 들어와 이디나의 등 뒤에 대고 절을 올렸다.

“미천한 인간이 위대한 현신의 옥체에 감히 손을 대려 하니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허락한다.”

이디나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거려보였다. 문신가는 가방에서 바늘과 물감, 몇 개의 도구와 피를 닦아내는 비단천을 옆에 내려놓았다.

“지난번 말씀하신대로 도안을 그렸습니다.”

이디나는 문신가가 내민 도안을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신가는 작은 티끌 하나 없는 이디나의 하얀 알몸에 조심스레 밑그림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의 아랫배 치모에서 시작된 꼬리가 허리를 감고 돌아 등에서 세 갈래 머리로 갈라지며 양 어깨와 목을 타고 넘어가 감는 형상이었다.

“용의 세 머리가 위대한 현신의 옥체를 안아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디나는 고개를 반쯤 쳐든 채 펜 끝이 스치는 감촉을 느끼며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든 자신의 도안을 보며 검고 힘이 넘치는 용이 긴 칼을 휘감고 있는 카렐의 선 굵고 위압적인 문신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그와는 사뭇 다른 이 문신을 하고 그와 사랑을 나눈다면 마치 두 마리 용의 짝짓기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디나의 살결이 가늘게 떨리며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문신가 중 한 명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프십니까?”

“계속해라.”

밑그림이 거의 끝나자 문신가가 이디나의 앞에 큰 거울을 세워보였다.

“맘에 드십니까?”

“색깔이 조금 더 화려했으면 좋겠다.”

“어떤 색깔 말씀하시는지요?”

잠시 생각하던 이디나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의 갈기털은 붉은 색으로 해 다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눈동자는……오팔 광택으로 해 줬으면 좋겠다.”

이디나의 말에 움찔한 건 문신가가 아니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신관들이었다. 불안한 표정이 된 그들을 향해 이디나가 음산한 웃음을 보였다.

“내 아이가 그리 태어날 듯한 느낌이 드는구나.”

옆에서 지켜보던 야투 박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디나와 아스탈 모두가 R이었으니 뱃속의 아이가 그레이오팔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디나가 느닷없이 낮은 확률―그것도 기분 나쁜 황제와 닮을―에 베팅하는 것이 맘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신관의 문신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고, 그에겐 이 자리에서 입을 열 권리가 없었다.

이디나는 펄이 들어간 물감을 섞는 광경을 보며 다시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관례대로, 자신의 가죽 허리띠를 입에 물었다. 두 명의 문신가가 그의 앞뒤에 꿇어앉아 작업을 시작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바깥에서 들어온 헤네티 간부가 이디나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헤네티가 내민 쪽지에는 [바에자 현신이 카히나 성의 장벽을 해체했습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이디나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쪽지를 야투 박사에게 건넸다. 쪽지를 돌려 본 신관들이 작게 박수도 치고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와중에 첫 번째 바늘이 그의 아랫배 살갗 위를 찌르자 이디나가 움찔했다. 하지만 한 마디 신음도 내지 않고 지그시 눈만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마치 칼날 같은 금속성의 비늘을 가진 용의 형상이 조금씩 그의 몸 위에 그려져갔다.

두 시간이 훨씬 넘게 지난 후, 그의 몸에는 어느새 용의 모양새가 거의 갖춰져 가고 있었다. 비늘도 선명하게 드러났고 붉은 갈기도 그의 살갗 위로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그림이 퍽이나 맘에 들었지만 아직은 뭔가 부족해 보였다. 계속해서 살을 찌르는 고통도 조금씩 적응되면서 이젠 견딜만했다.

그때, 두 번째 쪽지가 다시 전해졌다. [근위대 8군단은 적을 마지막으로 몰아붙이는 중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디나는 이번에도 쪽지를 사카에게 건네주었다.

쪽지를 받은 사카는 기쁘다기보다는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말 한 마디 없었지만 이디나는 이미 딱한 눈길로 그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들어 사카는 퍽이나 운이 나빴다. 그는 누구보다 충성스럽고 유능했지만 매번 황제와 직접 마주치다보니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모처럼 거둔 큰 승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무장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당연했다.

“으읍.”

갑자기 근육 속까지 깊숙이 찌르는 아픔에 이디나가 눈물을 찔끔 하며 파르르 떨었다. 놀란 신관들이 하마터면 단 위로 뛰어오를 뻔했다. 당황한 문신가가 얼른 해명했다.

“오팔 빛을 내는 염료는 금속성 입자가 있어서 많이 아픕니다. 원하시면 진통제를 사용하겠습니다.”

이디나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태아가…….”

참견하는 야투 박사에게 이디나가 물러나라며 짜증스레 손짓했다. ‘그’와 첫 관계에서 느꼈던 짧은 고통을 연상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독한 아픔과 함께 매섭게 부릅뜬 용의 오팔빛 눈동자가 조금씩 완성되어갔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본 그의 눈가에 조금씩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새기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이디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문신가가 마지막 염료를 넣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의 몸에서 손을 뗀 순간, 세 번째 사자가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뻐하십시오, 카히나 성이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적은 외곽의 마을로 달아났습니다. 우리의 완승입니다.”

이디나가 그제야 입에 물고 있던 가죽벨트를 놓으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다친 이가 있느냐?”

“우리 측 전사자는 200명이 되지 않습니다. 바에자 현신도 무사하시고 슈라와 루토, 테나스 이그나토 장군도 모두 무사합니다. 다만…….”

사자가 흘끔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윗사람들의 기분이 좋은 듯하자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사이르 이스마엘 경이 피다이 수장 데이에게 암살당한 듯합니다.”

이디나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내 바에자 현신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는데 사이르 그자가 부주의했나보군.”

“저희의 권고를 어기고 단독으로 시내에 들어갔다가 당했다는 보고입니다.”

“차라리 다행이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멍청한 짓으로 분위기 흐린 놈이 가 주는 게 낫지. 사이르 경에게 아들 후계자가 있었지?”

“예, 아들 아살리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바에자 현신께서 이미 슈라 대장을 보내어 충성서약을 받으셨습니다.”

“역시 바에자 현신이야.”

이디나가 픽 웃었다. 재빠른 바에자가 너무 늦기 전에 그 아들까지 확실히 코를 꿰어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황제는 곧 죽을 테고, 우린 반란이 일어난 칼릴만 조용하게 만들고 서너 달 후에 하임달을 슬쩍 차지하면 제국은 사실상 끝인가?”

“12만의 남부 진압군이 곧 출동할 것이라는 연락입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야투 박사가 다시 슬쩍 끼어들었다. 이디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전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용 문신을 앞뒤로 확인했다. 이것으로 그는 이제 두말할 나위 없는 완벽한 대신관으로서의 모습을 갖춘 셈이었다.

“테나토에도 이스마엘 가의 영지가 있습니다. 원한다면 우리 쪽에서도 칼릴 진압군에 지원군을 보낼 수 있습니다.”

“남부 놈들이 12만이나 간다니까 알아서 하게 놔둬. 혹시라도 놈들이 멍청하게 굴다가 궁지에 몰리기 전까지는. 괜히 우리가 끼었다가는 황제가 직접 참전할 빌미만 준다.”

“추우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카가 이디나의 벗은 어깨에 검은 망토를 다시 덮어주었다. 사카의 손끝이 닿은 순간 지레 놀란 이디나가 짧게 움찔거렸다. 문신을 새기는 내내 황제 생각만 하고 있었다보니 몸이 잔뜩 달아올라 있던 모양이었다.

‘뭔가 해야지 안 되겠어.’

이디나가 한숨을 내쉬며 사카의 몸매를 슬쩍 훑었다. 옷깃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목과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는 언뜻 보아도 남자로서 정말 매력적이었다. 황제의 기억을 잊기 위해선 이편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다.

이디나는 그의 귀에 대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 내 침소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명령이 아닌, 부탁하는 말투였지만 사카에겐 아무 차이가 없었다. 그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즉시 고개를 숙였다.

“이 천한 몸을 택해주셔서 영광이옵니다.”

제국회의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는 5일차는 사람들의 예상대로 동부와 북부제후의 환한 표정과 남부제후들의 굳은 얼굴로 시작되고 있었다. 2번이나 개회 시간을 연기해 달라며 자신들끼리 마라톤 회의 끝에 또 1시간이나 늦게 들어온 남부제후들은 예정되어 있던 ‘정리발언’을 생략하겠다는 메모를 황제에게 전해왔다.

“이게 사실이요?”

피라미드 위에 앉은 카렐이 쪽지를 흔들며 카나르 공에게 물었다.

“제국회의의 정리발언이 없다는 건 황제인 짐이 정리한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겠다는 뜻인데 그런 거요?”

카렐이 아주 진지한 톤으로 물었다. 제국회의 자체가 황제령과 4제후지역 전체의 합의 형식을 띠는 만큼 마지막 날은 각 제후들의 지지 혹은 반대가 드러나야 했다. 정리발언을 통해 누군가 황제의 최종안에 거부를 하면 추가 논의를 시작하고, 회의는 결론이 날 때까지 며칠이건 계속 이어져야 했다.

“저희 남부제후단은 이번 위기 극복을 위한 황상의 큰 뜻을 모두 수용해 따른다는 충정의 뜻에서 저희들만의 의견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사옵니다.”

카나르 공의 대답은 이렇지만 속은 쓰리다 못해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 원래 오늘의 정리발언에서는 [남부의 독립]이라는 폭탄선언과 함께 황실에 대한 선전포고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칼릴의 반란으로 그 계획은 일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 지긋지긋한 제국회의를 빨리 끝내는 게 관건이었다.

“그럼 지금까지의 합의사항을 알리겠습니다. 기립하십시오!”

모두의 합의가 확인되자, 황제의 피라미드 밑에 선 부총리 아리아노 라자루스 경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홀 안을 울렸다. 4백여 대표단과 비슷한 숫자의 일반 참가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앞에 모았다.

“일단 잉여곡물의 재분배 문제는 남부의 비축곡물이 수출에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어 일단 유보하였습니다. 동부와 북부, 서부의 기근 문제는 일단 상품시장의 유통구조에 맡기고, 차후 문제가 생길 시 다시 대응하겠습니다.”

얼핏 듣기로는 남부의 승리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은 똥 씹은 남부제후들의 표정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반면 칼릴의 반란군을 통해 몇 달치의 곡물을 확보한 북부와 동부제후들은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들이었다. 그들로서는 최소한 한 번의 수확을 더 기다릴 수 있는 여유시간을 번 셈이었다.

아리아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염된 곡물 [키니]와 그 유전코드를 포함한 곡물은 황실에서 사전 허가받은 실험 용도를 제외한 일체의 유통도, 이동도 금지하며, 현지에서 소각을 원칙으로 합니다. 키니를 허가 없이 소유하고 있거나 알면서도 심거나 판매한 자들은 개인용도, 판매목적을 불문하고 살인에 준해 처벌할 것입니다. 유통 상인의 경우 키트를 이용한 오염 점검을 필수로 할 것이며, 점검 없이 유통한 자는 면허를 취소할 것입니다.”

강력한 대응책에 소비 측 사람들이 손뼉을 쳤지만 아직 그쪽의 위험을 실감하고 있지 않은 생산지역 제후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이 역시 남부에는 당연히 맘에 드는 조항이 아니었다.

“수명개조가 풀린 자들을 위한 수용 의료시설을 황제령 4번 도시와 수베르, 코윈, 요동, 비엔에 하나씩 설치해 운영하며, 비용 일체는 황실과 각 제후들이 부담해 무료로 운영합니다. 수명개조 복원을 위한 45호 바이러스 연구는 황실 유전자연구소 주도로 진행하며, 연구를 위해 각 지역에서 인구 비례로 최대 4천만 다리크를 지원합니다.”

남부제후들이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이 역시 그들에겐 달갑지 않은 조항이었다. 남부에 수명개조가 풀린 자들은 아직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적은 반면 인구는 가장 많았다. 결국 얼마 안 되는 대상자들을 위해 가장 많은 연구비를 부담해야 할 판이었다.

어제 회의에서 당연히 남부가 이 조항에 이의를 제기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뜻밖에 그들은 아무런 이의도 없이 이 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황제의 손짓에 모두들 자리에 앉고 4명의 최고제후들만 우뚝 서서 남았다. 최고제후로서의 연차에 따라 카렐의 손끝이 가장 선임자인 네페티부터 향했다. 평소처럼 히잡으로 얼굴을 모두 가린 네페티가 황제에게 살포시 고개를 숙이며 웃어보였다.

“저희 서부는 황상의 현명하신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옵니다.”

방향을 휙 돌린 카렐은 두 번째로 세네피스가 있는 북부 쪽을 향했다.

“북부의 충성스런 시민들은 황상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사옵니다.”

세 번째는 다히르와 같은 연도에 올랐지만 연장자인 카나르였다. 그는 낮은 한숨으로 잠시 시간을 끌며 자신의 불만을 슬쩍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정도를 넘기지는 않았다.

“남부 또한 이번 합의안에 동의합니다.”

카나르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불리한 조항들에 대한 물고 늘어지기까지 모조리 포기하고 일단 합의를 해 준 것도 칼릴의 다급한 사정 때문이었다. 빨리 제국회의를 마무리하고 칼릴의 반란군들이 더 이상의 큰 사고를 치기 전에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들어가야 했다. 그에겐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합의사항 따위는 지킬 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손끝이 향한 다히르 쪽은 말하나마나였다. 북부와 함께 이번에 가장 크게 이득을 본 동부의 최고제후인 이 남자는 굵고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상의 현명함에 동부의 시민들이 모두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사옵니다.”

“이제야 끝났군, 지긋지긋하네.”

카나르 공이 옆에 있는 보좌관들에게 다 들릴 만큼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폐회를 알리며 울려야 할 나팔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때,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황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에 놀란 참석자 8백여 명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제국회의를 접기 전, 내 제국 황제의 권한으로 한 가지만 말하려 하네.”

좌중이 갑자기 웅성대기 시작했다. 중요 사항들에 합의가 다 끝난 마당에 갑자기 황제가 무슨 돌발행동을 하려 하는 것인지 걱정과 기대가 절반씩 뒤섞여 홀 안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흰 로브에 검은 머플러, 금빛 케이프를 두르고 피라미드 정상에 우뚝 서 있는 황제의 모습은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카나르가 얼른 끼어들었다.

“폐하, 이미 합의가 다 끝났사온데 이제와 새 안건을 내놓으심은…….”

“내 지금 말하려는 건 제후들에 합의를 요하는 사항이 아니고 내 뜻을 알리는 것이네, 카나르 플라칼 공.”

무서운 힘이 깔린 황제의 목소리에 카나르의 몸이 확 움츠러들었다. 카렐이 턱을 쳐들고 쩌렁한 큰 소리로 참가자 모두에게 알렸다.

“출혈열과 기근 사태로 침체에 처한 제국의 먼 미래 비전을 위해, 이전 교단 시대에 설치되었다가 폐쇄된 [삼각 루트]를 재개통할 것을 명한다.”

순간 기겁을 한 카나르와 하디가 동시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특히나 하디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황제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 종점인 하임달 9번 행성을 이번에 정식으로 황제령에 편입할 것이며, 그곳에 상주하는 현재의 소규모 분견대는 연대 규모의 황실군 정식 주둔군으로 확대할 것이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충격에 빠진 남부제후들을 빼면 왜 그 쓸모없는 행성을 황제가 굳이 황제령에 편입시키려 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하임달 9번 행성은 제후들에겐 속된 말로 ‘줘도 안 가지는’ 곳이었다.

“이상이다.”

황제가 손뼉을 짝짝 치며 폐회를 알리자 종료를 알리는 긴 나팔소리가 비로소 아스트라이아 홀 안을 울렸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나온 황제의 폭탄선언에 당혹해했지만 황제가 대체 어떤 의도로 그런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눈치 채고 있는 건 소수의 남부제후들 뿐이었다.

얼굴이 흙빛이 된 카나르 공은 서둘러 회의장을 나서서 비엔 행 셔틀이 기다리고 있는 주기장으로 향했다.

“황제가 우리 계획을 눈치 챈 것 같은가? 하디 델루지 경?”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저렇게 대놓고 선언하기 전에 우리의 비엔 통제소부터 먼저 쳤을 겁니다.”

“하긴.”

똘똘한 하디의 조언에 카나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자기 밑에는 왜 이렇게 똑똑한 놈이 없을까 하는 아쉬움에 죽은 장녀 미노아 생각이 다시 났다.

하디가 그의 뒤를 바삐 따르며 조언을 이었다.

“황제가 어떤 식으로든 하임달 9번 행성의 가치를 알아낸 게 분명합니다. 워프루트 하나의 유지비용이 얼마인데 계산적인 황제가 그걸 감수하고 열겠다고 덤빌 이유가 없습니다.”

“어쨌든 절대 하임달을 황제에게 뺏길 수는 없다.”

카나르 공이 이를 악물었다. 하디가 여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미 우린 설비를 다 복원해서 개통작업을 시작해 늦어도 서너 달 후면 개통합니다, 저놈들은 이제 시작해야 할 테고, 시설 복원에만 몇 달은 걸릴 겁니다. 팔찌도 달랑 에아의 팔찌 하나뿐이고 제대로 쓸 줄도 모릅니다. 절대 우리를 추월 못 합니다.”

늦은 오후의 아스트라이아 홀을 나선 카나르 공 일행은 토로 기지의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멀리 주기장에 남부제후들이 탈 셔틀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제국회의가 끝나자나자 이렇게 서둘러 떠나는 건 ‘내부 문제’로 저녁의 파티 참석을 고사한 남부제후단 뿐이었다.

“하임달 5번 행성에서 직접 가는 길이 있지 않나?”

“이론적으로야 그렇죠.”

하디가 냉큼 대답했다.

“그런데 제국에 4일을 계속 달릴 수 있는 화물선이 없으니 탈이죠. 2일을 꼬박 달릴 수 있는 상용화된 고속 셔틀도 없고요. 지금 그 거리를 달릴 수 있는 건 그쪽 분견대에서 쓰고 있는 개조한 장거리용 소형셔틀뿐입니다. 한 번에 많아야 20명 남짓 싣고 오간다죠. 보급품 합치면 더 줄고요.”

“그럼 황제가 말한 연대 병력의 지부를 설치한다는 건…….”

“하임달의 결전 때도 근위대가 거길 공격하려고 대형 수송선을 개조하느라 몇 달을 애를 먹었죠. 워프루트 뚫기 전까진 연대규모 주둔은 황제의 공상일 뿐입니다.”

하디가 맘껏 빈정거렸다. 그제야 안심한 카나르가 웃었다.

“그럼 당장은 염려할 것 없다는 말이군. 어차피 하임달엔 우리가 몇 달은 먼저 진주할 테니.”

카나르 공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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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에서 카렐은 단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이제 무대는 다른 곳으로~~ 이번 파트는 올 겨울의 맹추위와 아주우~~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ㅋㅋㅋ (여름에 보시는 분들은 시원함 느끼실지도....)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 전자책은 1부 9, 10권의 작업이 생각보다 늦어져서 2월에나 올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가을까지 종이책을 따라잡아야 하는데.... 전자책 서비스 업체에서 염병할 올레e북은 여전히 승인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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