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27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
.
.
카나르 공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당장은 칼릴부터 정리해야 돼. 등짝에 비수를 박은 채로 하임달을 먹겠다고 대들 수는 없으니까.”
때마침 그의 할룩스로 아들 헤즈가 보낸 메시지가 들어왔다.
- 칼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연합군 12만 대기 완료되었습니다. 제국회의 종료되는 대로 칼릴로 출격하겠습니다. 헤즈. -
카나르 공은 즉시 답신을 보냈다.
- 당장 공격해라. 반역자들에게 자비 따위는 없다. -
호지 가 종장 헬리노스 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서둘 이유가 있으십니까? 아직 준비도 덜 되었을 텐데요. 어차피 하임달까지 길이 뚫리려면 3, 4달은 남았습니다.”
“보름 이내로 칼릴에 블리자드 시즌이 온다네. 블리자드 시즌엔 육로밖에 이용을 못 해서 방어엔 유리하지만 공격에는 독약이 돼. 그러니 그 전에 헬홀 주변의 작은 군소 홀들을 싹 포위해서 봉쇄해 버리면 놈들은 한 달 동안 일체의 외부 지원도 못 받으면서 손가락 빨고 하늘만 보게 되니 버틸 리가 없지. 지금 황제 사후와 하임달에 주력해야 할 판국에 그 따위 반란에 병력을 낭비할 상황이 아니잖나.”
남부 제일의 무장이며 전략가답게 카나르가 남부 수행원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풀어놓았다.
“반란이라는 게 절대 오래 못 가는 이유가 뭔지 아나? 분열이야 분열. 하루 이틀 지나면 질서가 있던 때가 좋았다고 타령하는 놈들도 나올 테고, 옛날 히르직스처럼 윗사람 등쳐서 인생역전 노리는 놈도 등장하게 마련이야. 반란 당사자는 처음엔 성공한 듯해도 진압을 당하든 배신자에게 당하든 어떤 식으로건 망할 수밖에 없어. 그리 되면 골 아프게 황실군과 싸울 일도 없으니 일거양득이지.”
카나르가 제후들을 둘러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 장담하지만 한 달이나 블리자드에 갇혀 있으면 헬홀 내부에서 세데스나 후스 놈 등에 칼 꽂겠다고 우리한테 밀서 보내는 놈들이 줄을 설걸. 우린 초반에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입장을 한 번 보여주면 그걸로 끝이야.”
“어떻게 말입니까?”
‘강경한 대응’이라는 말에 세닉 가 종장 이렌느 경이 걱정스레 물었다. 카나르 공은 그를 향해 한 번 픽 웃어보였다.
“4시간 후면 알게 될 거요.”
세데스와 후스가 머물고 있는 칼릴의 수도 헬홀은 도둑 수출 사건―남부제후들의 표현대로라면―이 있고 이틀 후, 큰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황실의 검은 용 문장을 단 날렵한 중형 수송함이 헬홀의 하늘을 가르고 나타나자 미리 기다리던 세데스와 후스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의 주변엔 이번 혁명―이들의 표현대로라면―에 앞장선 1백여 명의 산악 경보병과 플라칼 가 보병대 5백여 명이 줄을 맞춰 서서 사열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송함이 빙하 위에 내려서고 해치가 열리자 검은 갑옷과 망토 위에 황족의 일원을 상징하는 금빛 케이프와 머플러를 건 베아트릭스가 붉고 건장한 말을 몰고 제일 먼저 내려섰다.
“위대한 대제의 동반자이신 베아트릭스 플라칼 황빈이며 대장군을 칼릴 주민과 주둔군을 대표해 열렬히 환영하옵니다!”
베아트릭스의 바로 옆에는 엄마 못지않게 큰 말을 탄 엘룬도 소속 부대 표시가 없는 사제 갑옷에 황실 문장 머플러를 걸고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그에게는 태어나 첫 공식 석상 등장이었다.
“이분께서…….”
난생 처음 본 엘룬의 모습에 잠시 말을 더듬었던 후스가 베아트릭스의 고갯짓에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황상의 위대한 기상과 우리 플라칼 가의 용맹한 혈통을 이으시는 엘룬 플라칼 리쿠 옹주 마마께서 가문의 땅인 이곳을 찾아주시니 가히 영광이옵니다.”
해치 앞에 선 후스는 ‘플라칼’이라는 부분에 특별히 더 힘을 주어 큰 소리로 말했다.
엘룬의 등장에 플라칼 가 장병들이 낮게 웅성대기 시작했다. 엘룬은 누가 봐도 11살 꼬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강인한 인상을 주는 짙은 구릿빛 피부에 떡 벌어진 어깨와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5척 7촌(171cm)의 큰 키는 누가 봐도 당당한 무골이었고, 안장에 비스듬히 채워진 창에는 전장에서 적군을 죽인 경력을 나타내는 남부식 킬마크 배너까지 달려 있었다. 아직 앳된 얼굴만 아니라면 전장에 무장으로 들여보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외모였다.
“옹주 마마를 뵈어 영광이옵니다.”
세데스가 베아트릭스의 옆을, 후스가 아직 어린 엘룬의 옆을 각각 옹위하고 장병들을 앞을 나가가기 시작했다. 사열을 하던 후스가 엘룬의 귀에 대고 작게 주의를 주었다.
“위험하니 제게 붙어 계십시오, 옹주 마마. 장병들 모두가 우리를 잘 따르는 건 아닙니다.”
엘룬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아요. 근데 며칠 전에도 등에 한 발 맞았는걸요. 기왕 맞을 거라면 병원 치료 받고 있을 때 다 맞고 치우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후스는 소녀의 낙천적인 대답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쾌활한 옹주의 한 손은 허리춤의 이상한 기계에 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 후스는 교단이 쓰는 ‘마우저’를 본 일이 없었다.
베아트릭스와 엘룬의 뒤를 이어 황제가 ‘호위 명목으로’ 함께 보낸 2천의 에키트 족 보병대가 왁자지껄 줄을 맞추는 둥 마는 둥 수송함에서 난잡하게 몰려 내려왔다. 이 거구의 야만족들이 등장하자 제위 전쟁 당시 이들에게 제대로 데었던 남부 보병들이 일제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퍽이나 다행히도, 이번에 이들은 그들의 편이었다.
죽음을 신봉하는 탈라스의 이 사나운 전사들에게 공식적으로 지급된 제식 경갑주는 그냥 속옷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겉에는 부족과 경력, 나이와 전적을 상징하는 털가죽 옷과 갖은 장식품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덩치 크고 무섭다’는 것 말고는 외모에서 거의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다. 이들에게 공통점이라고는 황제가 하나하나 친필로 주인의 이름을 새겨 하사하는 큼직한 도끼와 둥근 방패뿐이었다.
겉보기는 멋진 정규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지만, 이들은 사납기로 유명한 부족 내에서도 가히 선망의 대상이었고, 매년 수십 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용사들이었다. 이들 사이에선 황제를 구하고 자살공격으로 가디언들을 떼죽음시킨 야즈디기르드 추장―락시 대장으로 더 잘 알려진―을 모범으로 삼아 지금껏 단 한 명도 적에게 항복한 일이 없는 무시무시한 전통이 지켜져오고 있었다. 덕분에 제위전쟁 당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황제의 가장 큰 신임을 받으며 그에 못지않은 충성과 용맹으로 보답을 다하고 있었다. 오늘 이들을 이끌고 있는 건 그 ‘야즈디기르드 추장’의 아들이고 이번에 교위로 승진한 루스탐이었다.
그들 양옆으로는 베아트릭스를 따라온 5백의 슈로 기사단 중장기병대와 5백의 슬레이프니르 경기병대가 이 난잡한 보병들과는 대조적인 사뭇 엄숙한 분위기로 자로 잰 듯 줄을 맞춰 내려섰다.
“황상께서 제대로 보내셨군요.”
세데스가 황제가 보낸 3천의 정예병들을 보며 슬쩍 웃었다. 이 정도면 ‘황실 중재 사절단’을 호위하기에 살짝 과도한 숫자고, 그렇다고 황제가 남부를 침략했다고 주장하기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애매한 규모였다. 하지만 추위와 산악에 익숙하고 1대1 싸움의 전문가인 에키트 족을 보낸 것만 보아도 황제의 숨은 의도를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부대 편성하고 보급품 문제 해결하려면 며칠 걸리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셨습니다.”
“진압군보다는 먼저 도착해야 했으니까.”
베아트릭스가 무표정하게 대답하며 뒤따라오는 수행원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곳엔 이번 ‘황실 중재 사절단’의 실질적인 주역인 보안국장 사에나가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남부 식량기지에서 빼돌린 18척 중 칼릴 주민과 우리 군대가 소비할 2척 분량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출을 끝냈습니다. 적이 우리를 포위한 채로 장기전을 시도한 경우에 대비해 충분한 식량을 비축했습니다. 아마도 진압군은 우리 숨통을 막고 산발적인 위협을 가하며 스스로 분열하기만 기다릴 겁니다.”
베아트릭스의 표정이 굳었다. 황제가 자신과 딸을 이곳에 보낸 건 혁명 세력에서 플라칼 가의 이탈을 막기 위한 마스코트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쟁에 닳고 닳은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엄마의 눈에는 마냥 철없고 착해 보이기만 하는 딸에게 벌써부터 치졸한 공작과 속임수, 피가 난무하는 전쟁터를 겪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게 본심이었다.
“자네들도 무언가 전략이 있겠지?”
베아트릭스는 이곳 사정에 가장 익숙한 후스에게 먼저 의견을 물었다. 그도 플라칼 가 기병 시절 칼릴에서 온 일은 몇 번 있었지만 그저 며칠 정도 몇 번의 자잘한 전투만 치르고 떠났을 뿐, 이 별난 행성의 구체적인 사정은 알지 못했다.
“약 12일 후부터 헬홀을 비롯한 북회귀선 지역에 블리자드 시즌이 옵니다. 아시겠지만 블리자드 시즌엔 길게는 한 달까지 수송선이나 셔틀이 못 드나듭니다. 육로만 제한적으로 뚫릴 뿐이지 공습도 불가능집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난 아직 모르겠군.”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후스가 옆에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서둘러 오는 걸 보니 진압군은 최대한 빨리 이 헬홀 주변을 포위해서 블리자드 동안 우릴 봉쇄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판사판 다 죽자고 덤비는 바보가 아니라면 한참 사기가 올라 있는 헬홀을 바로 치지는 못할 테니까요.”
새삼 아버지 생각이 난 베아트릭스는 헬홀을 병풍처럼 빙 감싸고 있는 높은 빙벽을 빙 둘러보았다. 그의 아버지 조지프 경은 약간의 실수로도 퇴로가 막혀버리는 이 좁은 ‘링’에서 결국 버린 ‘말’이 되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세데스가 후스에 받아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네들 생각이고요, 본토 출신들은 여기 토박이만큼 이곳 혹한과 블리자드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놈들 이렇게 서둘러 오는 판에 온화한 루게에서 오는 세닉 가 병력은 방한복이나 입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베아트릭스가 픽 웃었다. 생각해 보니 카나르 공이 길길이 날뛰어 단 며칠 만에 번갯불에 콩 볶듯 구성한 12만 대군이 칼릴의 혹한에 맞는 준비를 갖췄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도 시간이 길어져 블리자드 기간을 넘어가면 우리가 불리합니다. 어떡해서든 놈들이 블리자드 중에 우리와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잠시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뒤쪽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보안국장 사에나가 가까워지자 지레 놀란 사람들이 주변으로 슬쩍 흩어졌다. 중앙이건, 지방이건, ‘공직자’ 이름을 단 사람 치고 저 소름끼치는 여자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무심한 베아트릭스는 예외였다.
“말해 보게.”
사에나가 이 자리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베아트릭스의 귀에 대고 작게 무언가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베아트릭스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때마침 세데스의 할룩스가 울리기 시작했다.
“움?”
할룩스를 확인한 세데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12만의 진압군이 방금 워프루트에 접어들었답니다. 4시간 정도 후면 이곳에 도착할 듯합니다.”
“사령관이 누구요?”
“헤즈 플라칼이 총사령관 겸 보병사령관이고 참모장은 마누엘의 장녀 클리멘트, 기병사령관은 예르마크 경입니다. 헤즈의 딸이고 플라칼 가 종손인 세미온 플라칼도 참모 자격으로 온 모양입니다. 포진 하나는 진짜 화려하네요.”
베아트릭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면 남부 제일의 신구세대 무장들이 모두 동원된 셈이었다. 이제 4시간 후면 그도 자신의 가문과 이제 맞상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저 친구도 난처하겠네.”
베아트릭스는 후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세미온 플라칼은 며칠 전까지 후스의 약혼녀였던 30대 초반의 새파랗게 젊은 무장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황빈께서도 미리 알고 계셔야 할 듯합니다.”
세데스가 눈치를 보며 이번 진압군 지휘부 목록을 불쑥 내밀었다. 별 생각 없이 목록을 받아들었던 베아트릭스는 대뜸 얼굴이 붉어지며 종이를 확 쥐어 우그러뜨려 버렸다.
“빌어먹을.”
베아트릭스의 일행이 거의 사열의 끝무렵에 접어들면서 처음의 긴장도 조금씩 풀려갔다. 그가 막 칼릴 주둔군 사령부로 돌아서려는 순간, 사열중인 보병대 한쪽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이 들려왔다. 뒤이어 그쪽에서 무언가 반짝 하는 것이 엘룬을 향해 날아들었다.
놀란 후스가 휙 돌아서며 엘룬을 몸으로 덮쳤다. 엘룬은 어어 하는 새 말에서 밀려나 눈과 흙이 섞여 진창이 진 바닥에 후스와 함께 철푸덕 나뒹굴었다. 5백의 플라칼 가 병사들도 이 돌발 사태에 놀라 일제히 부대별로 흩어지면서 엄숙하던 사열 행사는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괜찮으십니까! 옹주 마마!”
후스는 엘룬을 몸으로 감싼 채 뭐가 날아온 것인지 얼른 주변을 확인했지만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진흙투성이가 된 엘룬이 투덜투덜거리며 후스를 밀고 일어났다.
“에이, 내가 미쳐. 황상께서 해 주신 새 옷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흙투성이가 된 엘룬이 진흙탕에 빠진 생쥐가 된 자신의 몰골에 후스를 살짝 흘겨보았다. 호들갑을 떤 후스는 그때까지도 ‘대체 뭐가 날아온 것인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사나운 플라칼 가 사관들이 아직 앳된 얼굴의 보병 한 명을 붙들어 질질 끌고나왔다. 그 말단 초급 보병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있었다.
“저어, 이놈이…….”
“네 이노옴……!”
격분한 후스가 칼을 빼들며 고함을 지르려 하자 진흙투성이 꼴사나워진 엘룬이 더러워진 손으로 그의 입을 툭 막았다.
“알아요. 나한테 꽃 던진 거였잖아요.”
엘룬이 벌떡 일어나서는 웅성대는 병사들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장미꽃 한 송이를 얼른 집었다. 방금 햇빛에 반짝거린 주인공은 꽃과 편지를 싼 비닐이었다. 당혹스러워진 후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예에?”
“칼릴에 오자마자 학교에서도 못 받은 꽃도 받고 이게 웬일이야. 이건 꽃값이야.”
엘룬은 자신에게 꽃을 던진 병사의 목을 와락 껴안고 뺨에 뽀뽀를 해 주고는 진흙으로 더러워진 뺨을 마구 부벼서 깨끗하던 병사의 갑주를 엉망을 만들어버렸다. 옹주의 벼락 키스와 포옹에 병사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어 화, 황상 덕분에 저도 노예가 아니고 시, 시민이 되어서, 가, 감사드리려고 편지를 썼는데 저, 전해드릴 방법이…….”
“응, 알았어, 황상께 꼭 전해드릴게.”
엘룬이 흙투성이의 엉망진창 얼굴에 해사하게 웃음을 지으며 방금 받은 장미꽃과 편지를 가슴의 망토 핀에 꾹 꽂았다.
“자네들도 이 친구 잡아오느라 수고들 많았어요.”
엘룬은 이 병사를 잡아 끌고 온 플라칼 가 사관들도 한 번씩 돌아가며 다 끌어안고 죄다 엉망을 만들었다. 엄숙하던 사열장, 그것도 살벌하기로 소문난 플라칼 가 중장보병대 사이에서 일순간 폭소가 터져 나왔다.
괜히 민망해진 후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꽃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날아오를 때 바로 봤어요. 아니었으면 내가 쏴서 바로 부쉈죠. 내가 누구 딸인데.”
엘룬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에 다가갔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뒤따라오는 후스를 다시 슬쩍 째려보았다.
“괜히 오바해서 나 이 꼴로 만들었으니까 후스 경은 저녁때까지 장미꽃 한 다발 사와요. 나 꽃 선물한 이 친구 괜히 들볶지 말고 오늘 사열하느라 수고도 많았으니까 이 부대에 특식이라도 줘요. 안 그러면 내일 흙 바가지 씌워줄 거예요.”
더러워진 엘룬이 다시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솔직하고 허물없는 모습의 황족을 본 일이 없는 병사들이 웃으며 환호성과 박수를 올렸다.
뒤따라 말에 오른 후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런 ‘철없는’ 옹주에게 입을 열었다.
“옹주 마마, 이번은 운이 좋았지만…….”
“4시간 후라죠?”
엘룬이 돌연 진지해진 얼굴로 자신처럼 더러워진 몰골의 후스에게 물었다.
“예?”
“적이 도착할 시간이 말이에요.”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런 건 어른들 일이니 옹주 마마께선 신경 쓰지 않으셔도…….”
“죽을지도 모르는 시간이 4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괜히 나 같은 부담스런 손님 때문에 얼어붙지 않아도 얼마나들 무섭겠어요? 이번은 그냥 넘어가요.”
얼굴이 굳어진 후스가 이 조숙한 소녀의 까맣고 맑은 눈을 새삼 빤히 쳐다보았다.
“가요, 나 배고파요. 식당부터 좀 알려줘요.”
흙투성이의 더러운 황자가 앞장서는 사열은 처음처럼 멋지고 근사한 모습은 아니었고, 병사들도 처음의 경직되고 억지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이왕에 대오 따위는 무너져버린 그들은 옹주의 양옆으로 몰려들어 손을 쳐들고 웃음과 휘파람으로 이 손님을 기쁘게 맞아주었다. 엘룬이 흙으로 더러워진 얼굴에 환한 웃음을 보태고는 옆에서 앞 다투어 내미는 병사들의 크고 거친 손을 한 명 한 명씩 꼭 잡아주고 앞으로 나가갔다.
10척의 선단에 12만의 대군을 싣고 칼릴로 향하는 남부연합군의 분위기는 사뭇 비장했다. 제위전쟁 이래 남부와 황실이 직접적으로 충돌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 혹시라도 황실이 개입한다면, 카나르 공의 말대로 양쪽의 첫 충돌이 되는 셈이었다.
“워프루트를 나왔습니다. 이제 칼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황실군이 있을지도 모르나 싸움을 피하지는 마라. 최고제후님의 명이다.”
사령관 헤즈는 풀 죽은 얼굴로 서 있는 기병사령관 예르마크 경을 힐끔 노려보았다.
누구보다 군인으로서 충실한 예르마크 경이지만 명색이 부마로서 황실과 맞선다는 상황이 내킬 리가 없었다. 그는 명목상 [기병사령관]이지만 추위에 약한 말은 빙하 위에서는 쓸모가 없다보니 기병은 홀 안에서 싸울 때를 빼고는 별 쓸모가 없었다. 위계로는 총사령관 헤즈의 바로 밑이지만 고작 기병 5천을 거느린 허수아비 인질일 뿐이었다.
그는 헤즈의 옆에 서서 아버지를 돌아보고 있는 아들 에우테르 대군을 쳐다보았다. 아들 에우테르는 헤즈의 부장으로 징집되었지만 사실상 아버지를 묶어두는 인질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사실 이틀 전, 이부대신으로 있는 푸아킨의 급박한 연락을 받은 대공주는 가족 모두가 황제령으로 도망치자고 했지만 그는 자신이 군 사령관을 맡고 있는 가문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도망갈 짐까지 다 꾸려놓은 아내와 자식들을 만류해 놓고는 누나에게 자신과 가족만은 원정에서 빼 달라고 부탁하려 했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이렌느는 무거운 얼굴로 연락을 해 온 이 책임감 강한 남동생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근위병들에게 ‘대공주 일가의 신변을 잘 지켜주라.’며 선수를 쳐 버렸다.
그렇게 루게를 끝내 못 떠난 아내 대공주는 이제 딸 상지와 함께 꼼짝없이 집안에 억류되어 있고, 에우테르와 함께 끌려온 그는 처가인 황실에 칼을 겨누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오늘의 목표는 111번 홀이다.”
흔들리는 함교에서 이리저리 중심을 못 잡던 헤즈가 결국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가 허리를 펴자 뚱뚱한 엉덩이살 덕분에 지휘석 팔걸이가 터질 것 같았다.
“거긴 우리 3군단이 아직 장악중이다. 그리고 칼릴에서 처음 폭동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고.”
“수도인 헬홀은 언제 들어갑니까, 아버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은 건 크고 다부진 체구를 한 여자였다. 여자의 어깨에는 플라칼 가 주력군인 중장기병대를 뜻하는 화려한 붉은빛 망토가 걸려 있었다.
“일단 주변 홀부터 싹 쓸어내고 나서.”
헤즈가 손바닥을 비비며 칼릴의 지도를 펼쳐놓았다.
“지금 한참 독기가 올라있을 때 쥐구멍 같은 헬홀에 손가락 쑤셔 봤자 도망갈 곳 없는 쥐새끼한테 확 물리기나 하지. 머리를 써, 머리를.”
헤즈가 짧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넌 너무 급해서 탈이라니까, 세미온.”
헤즈가 가문 종손인 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뱃속에 꾸역꾸역 쌓인 쿠키 덕분에 굴러다니는 지경이 된 헤즈와 비교하면 소년단과 군사학교, 기병대 초급장교의 엘리트 코스를 충실히 밟아온 딸의 몸매는 군인답게 잘 다듬어지고 근사한 편이었고, 이목구비 잘 잡힌 얼굴도 괜찮다는 소리는 들을 정도였다. 이것도 종가 며느리나 사위 선택에 유독 까다로운 잣대를 대는 할아버지 카나르 공 덕분이었다.
한때 1등 신랑감으로 생각했던 약혼자 후스의 소행에 분노한 세미온은 ‘내 손으로 그 새끼 목을 따겠다.’며 이번 진압군에 앞장서 지원해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플라칼 가의 후계자수업으로서 이번이 첫 실전 경험이지만 의욕만은 누구보다 높았다.
============================ 작품 후기 ============================
.
.
.
헤즈도 외모만으로는 나름 혈통개량(?)에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ㅋㅋㅋ
그나저나 잠시 잠잠하다 했더니 1점 테러리스트께서 다시 등장하셨네요....-,.-;;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 전자책은 1부 9, 10권 작업중이고요;;; 전자책 서비스 업체에서 염병할 올레e북은 여전히 승인중... -,.-;;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조아라 노블레스 : http://t.co/ErnaaB0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올레e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