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28화 (1,023/1,132)

< -- 1028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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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11번 홀을 어쩌시려고요?”

예르마크가 신경질적으로 물었지만 헤즈는 능글맞게 웃기만 하며 딸에게 물었다.

“111번 홀의 3군단은 비엔으로 이동 준비 끝났나?”

“예, 말씀하신대로 본가가 있는 6번 행성으로 30분 후 이동할 예정입니다.”

딸의 대답에 헤즈가 손바닥을 비비며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3군단장은 믿지만 3군단은 믿을 수가 없어. 일단은 여기서 떼어놓는 게 상책이지.”

무장들이 수긍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박이 출신들이 장병의 대다수인 칼릴연합군에서 델루지 6군단과 플라칼 2군단이 세데스와 후스 편에 가 버렸지만, 다행히 쿠데타 당시 111번 홀에서 식량폭동을 진압하고 있던 플라칼 3군단만은 여전히 종가 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헤즈 입장에선 그들도 믿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칼릴의 궤도에 진입합니다. 행성 에너지장벽이 꺼져 있어 111번 홀로 바로 접근합니다.”

“가만, 아직 들어가지 마.”

헤즈가 허리를 펴며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111번이 처음 반란을 일으킨 곳이었지?”

“그네들이 처음 일으키긴 했지만 자발적인 식량폭동이었지 헬홀의 무리들과는 무관했을 겁니다. 헬홀의 폭도들에게 빌미가 되었을 뿐이죠.”

마누엘의 맏딸인 참모장 클리멘트가 고개를 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름 늘씬하고 잘생긴 아버지에 비하면 험상궂은 얼굴과 떡 벌어진 굵직굵직한 몸매가 뭔가 이질감을 주지만 그래도 최소한 군인, 그것도 우직함으로 승부하는 남부 지휘관으로서는 어찌 보면 가장 잘 어울릴 당당한 체구였다.

“상관없소, 남들 보기엔 다 그 폭동이 그 폭동이니까. 세미온, 111번에 민간인 인구가 몇이냐? 뭐 하는 곳이냐?”

헤즈의 딸 세미온이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냉큼 대답했다.

“인구가 많지는 않습니다. 기록상 9천 정도고 워낙 추워서 농사가 안 되는 곳이라 대부분 인근 홀의 농장에서 일하는 빈민들입니다.”

“듣자하니 주민들 거의 전체가 동조했다지?”

“워낙 가난한 지역이라 너도나도 한패거리로 폭도가 되어서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창고를 공격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플라칼 3군단과 헌병대가 폭도들을 완전히 진압해서 몇몇 50여 명의 극렬 가담자만 체포하고 귀가시킨 상태입니다. 달아났던 관리와 지주들은 아직 안 돌아왔고요.”

“딱 좋네. 역시 아버지가 잘 보셨어.”

헤즈가 히죽거리며 턱을 똑똑 두드렸다. 예르마크가 다시 짜증스레 물었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예르마크의 물음에 헤즈는 대답 대신 사령실 사람들 모두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혹시 가족이나 친척 있는 사람 나중에 나 욕하지 말고 지금 손 들어. 벌하자는 거 아니니까 솔직히 들어.”

사령실의 하급 장교 한 명과 사관 한 명이 잔뜩 움츠러든 채 손을 들었다.

“제 여동생이 거기서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만…….”

“조카가 빙산 엔지니어로 있는데요.”

“10분 줄 테니까 다른 데 떠들지 말고 가족들하고 당장 홀을 떠나라고 해. 어디 연락했다가는 그 일가 먼저 잡아 죽일 테니 알아서 하고.”

“예에?”

헤즈의 의도를 눈치 챈 예르마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헤즈는 그에게 입 다물라고 무섭게 눈짓을 하고는 사령실 한쪽에 아까부터 서 있던 건장한 사내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자네, 집안에서 여러 번 봤는데 자네 이름이……뭐더라?”

“중장보병단 제11군단 31연대장 쿤제 스비아토 중랑장입니다.”

쿤제가 어깨를 딱 펴며 부동자세를 잡았다. 그의 이름을 들은 헤즈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한때 베아트릭스의 약혼자였던 저 단순우직한 남자야말로 이번 일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이고 한편으로 희생양이었다. 그가 저 남자를 괜히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자네 군단엔 칼릴 출신이 거의 없지?”

“11군단은 거의 본토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쿤제가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30분 후, 111번 홀에 자네 연대를 이끌고 제일 먼저 상륙하게.”

“선봉장의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봉장’이라는 말에 예르마크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선봉장은 적진에 들어가는 것이 선봉장이지 이미 아군이 진압을 마치고 평정해 놓은 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선봉이라고 하는 것부터가 우스꽝스런 일이었다. 그가 뭐라 말하려는 것을 헤즈가 다시 손을 뻗어 저지했다.

“내 파악한 바로는 111번 홀에 반란군들이 심어놓은 프락치들이 버글거리고 있어.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아무도 못 믿는다. 아까 들었지? 어차피 다 폭도들이니까 3군단이 떠나는 대로 쓸어버리게.”

“예? 쓰, 쓸어버리라뇨? 이미 진압이 끝난 것 아닙니까?”

헤즈의 뭔가 애매모호한 명령에 쿤제가 순간 당황했다.

“깨끗이 청소하라고. 석궁이 필요할 테니 갖고 들어가서 말이야. 내 말 못 알아듣겠어?”

“알겠습니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헤즈의 명령은 여전히 애매모호했지만 그의 호통에 쿤제가 일단 다시 부동자세를 잡았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명령의 진실은 뻔했다. 그는 헐레벌떡 부하들이 있는 선창으로 뛰어 내려갔다.

예르마크가 만류하고 있는 아들을 거칠게 뿌리치며 결국 고함을 질렀다.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반란군도 중장보병대인데 석궁은 대체 뭣 하러 가져갑니까!”

“뭐 하다니? 우린 폭도들을 진압하는 거요. 이봐, 우리는 저 뒤로 천천히 따라가.”

헤즈는 고함을 지르는 예르마크를 슬며시 외면하며 스크린 쪽으로 의자를 휙 돌려버렸다. 쿤제가 이끄는 31연대 3천여 명이 탄 30여대의 수송셔틀을 앞장세운 주력군 선단이 칼릴의 대기권에 진입했다.

“볼만하겠어.”

111번 홀의 풍경이 가까워지자 헤즈가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내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간 이곳에 주둔했던 1만 7천의 3군단 병력은 이미 이동 준비를 마친 채 홀의 시가지에서 빠져나와 북쪽의 무너진 작은 빙하 위에 와글와글 모여 진압군 선단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에이, 추운 날씨는 질색인데.”

헤즈는 망토를 3겹이나 둘둘 두르고 무장들과 함께 사령함에서 내려섰다. 가뜩이나 비둔한 몸 위에 몇 겹의 방한복을 두르고 나니 정말로 굴러가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빙하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3군단 장병들이 12만의 쿠데타 진압군과 함께 도착한 가문 사령관의 등장에 일제히 부동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가 오건 말건 시큰둥하게 서 있는 한 명이 있었다. 백발과 흰 턱수염이 성성한 노(老) 장군이었다.

헤즈가 싱글벙글 웃으며 이 노장의 쭈글쭈글한 손을 기세 좋게 덥석 잡아주었다.

“그동안 이 험한 데서 수고 많았으니 안드레이 종조부께선 날씨 좋은 본토에서 푹 쉬시구려.”

헤즈의 넉살에도 장군은 뚱한 눈길로 별 대답도, 표정도 없었다. 노인은 수명개조 당대임에도 불구하고 크고 떡 벌어진 등판에 짧고 굵은 목, 웬만한 젊은이는 후려쳐 한 번에 쓰러뜨릴 수 있음직한 굵직굵직한 팔다리의 무골이었다.

“카나르가 날 못 믿는다고 하더냐?”

3군단장이 굵고 걸걸한 목소리로 한참만에 퉁명스레 물었다. 그가 본토로의 퇴각에 불만이 많음을 눈치 챈 헤즈가 껄껄대고 웃으며 손을 저었다.

“설마요, 아버지께선 다음에 종조부님을 본토의 1군단장으로 두실까 생각 중이신 것 같던걸요.”

노장은 빙하처럼 새하얀 구레나룻을 씰룩거리며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는 헤즈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버렸다.

“탑승해라!”

나이가 무색할 만큼 쩌렁쩌렁한 장군의 목소리에 2만 가까운 플라칼 3군단 장병들이 진압군이 타고 온 수송선에 오르기 시작했다. 병력은 물론이고 각종 장비까지 한 번에 옮기려니 빙하 위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저러니 만년 군단장이지, 쯧쯧.”

헤즈가 뚱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노장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3군단장 안드레이 플라칼 경은 종장 카나르 공의 숙부이고 플라칼 가 원로 중의 원로이지만 가문 내 정치 따위와는 담을 쌓고 군대에만 몰두하는 남자였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으로만 치자면 조카 카나르와 종손자 헤즈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 어느 면으로는 더 나은 걸출한 보병지휘관이지만 형편없는 정치감각과 맘에 없는 소리는 죽어도 못 하는 고지식함, 한 번 전투에 달려들면 만신창이가 되건 전멸을 당하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이 문제였다. 덕분에 이 노장은 수백 년을 진급도, 그렇다고 딱히 말썽도 없이 일선 군단장 자리만 쳇바퀴처럼 돌며 살고 있었다.

이번 쿠데타 사건에서 후스가 3군단을 빼놓았던 것도, 종장 카나르 공이 3군단만은, 아니 정확히는 군단장 안드레이 경만은 믿었던 것도 그의 이런 고리타분함 때문이었다.

안드레이의 3군단이 빠져나가고 나자 빙하 위에는 헤즈를 따라온 진압군 사령의 지휘부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진압군 장병들은 여전히 수송선에 탄 채 궤도 밖에 머물러 있는 중이었고, 상륙한 건 선봉대의 쿤제의 31연대뿐이었다. 빙하 위에 작은 천막을 친 헤즈는 큼직한 의자와 난로를 가져다놓고 111번 홀의 풍경을 여유롭게 구경했다.

“111번 홀은 대군이 머물기는 너무 좁습니다. 어차피 다른 홀을 공격해야…….”

참모장 클리멘트가 제대로 정비 안 된 복잡한 골목과 더러운 빈민가 판자촌으로 그득한 111번 홀 안쪽을 둘러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시가지 중심에서는 연대장 쿤제는 휘하의 병사들에게 불탄 관청과 식량폭동 와중에 정체모를 자들에 의해 죽은 치안군과 헌병 시신 5구를 가리키며 무어라 격앙된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었다.

“걱정 마, 폭도들만 다 처리하면 자리는 곧 날 테니까.”

헤즈가 난롯가에 시린 손을 비비며 혼자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봐, 31연대 시작하라고 해.”

헤즈의 지시가 떨어지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홀 중심가 쪽에서 큰 나팔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극렬 폭도를 잡아내기 위한 전원 검문이 있겠다는 헌병대와 31연대의 경고방송에 집안에 머물던 수천의 민간인들이 좁은 골목을 꾸역꾸역 채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지금은 홀랑 타버린 관청이 있는 중심가의 광장, 혹은 외곽의 쓰레기장과 지금은 텅 비어버린 셔틀 터미널 부근으로 군데군데 모이기 시작했다. 이미 폭동은 완전히 지나간 상태이고, 주동자들은 이미 다른 홀로 도망갔거나 잡혀간 상태다보니 저항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민들은 병사들의 지시에 순순히 줄을 맞춰 집결지로 모여들었다.

“이제와 폭도를 어떻게 잡아낸다는 겁니까!”

아직 분이 덜 풀린 예르마크가 언성을 높였지만 헤즈는 이번에도 성의 없이 대꾸했다.

“어차피 저놈들이 다 폭도들인걸.”

헤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광장 쪽에서부터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중무장한 3천의 31연대 보병들이 비무장의 젊은이, 아기와 노인 할 것 없이 에워싸고 볼트를 쏘아대고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채 공격을, 그것도 자신의 영주의 군대에게서 공격을 받은 민간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광장 사방으로 흩어지고, 도망치고 넘어지고 바닥을 기었다. 차마 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여지없이 사관과 장교들의 발길질과 고함이 쏟아져 그들을 궁지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쓰레기장에서도, 터미널에서도 동시에 벌어졌다. 빈민굴인 111번 홀 일대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찢어지는 비명과 살려달라는 애원, 그리고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며 울부짖는 몇 안 되는 병사들의 절규에 일순간 지옥이 되었다.

“지금 미쳤습니까! 저게 뭡니까! 당신네 영지민 아닙니까!”

격분한 예르마크가 헤즈의 멱살을 붙들려다가 근위병들의 저지에 붙들려 몸부림을 쳤다. 예르마크뿐만이 아니고 다른 무장들도 반쯤 넋을 잃은 채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어치라며 악을 쓰는 예르마크를 빼고는 감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쿤제의 31연대는 헤즈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광장에서는 군인들의 포위망을 운 좋게 빠져나간 십여 명의 사람들이 집으로 도망치자 뒤쫓아간 병사들이 집을 에워싸고 인화물질을 뿌려 불을 질렀다. 터미널에서 아기를 안은 채 옥상까지 도망가 우왕좌왕하던 한 남자는 쫓아오는 병사들을 피해 5층 아래로 몸을 던진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장에서는 병사들이 쓰레기와 뒤엉킨 시민들의 시체를 일일이 창으로 찍어 확인사살을 하고는 한쪽에 산처럼 쌓아올렸다.

시가지에선 군인들이 초토화 작전을 할 때 쓰는 특수 인화물질로 지른 불이 사방에서 검은 연기와 불꽃을 올리며 질서도, 위생도 없던 더러운 빈민가를 잿더미로 만들어갔다. 시간이 지나 불이 시가지 절반 이상을 덮어가자 이젠 안쪽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맙소사, 내가 이 따위 짓에 손을 더럽히다니.”

절망한 예르마크 경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세미온.”

학살이 시작되고 거의 1시간여가 지나자 헤즈가 돌연 딸을 불렀다. 그는 옆에서 부동자세를 잡은 딸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당장 네 기병들 몰고 들어가서 쿤제 저놈 붙잡아오고 남은 민간인들 구해. 난 폭도들을 쓸어버리라고 했지 민간인들까지 다 죽이고 시가지까지 불사르라고 명령한 일은 없어.”

순간, 지휘부의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이 헤즈 부녀에게 일제히 쏠렸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세미온은 즉시 백여 기의 기병들을 이끌고 검은 연기로 가득 차 앞도 분간되지 않는 시가지로 뛰어들었다. 이미 빈민굴의 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다 타 없어지기 전까지는 어차피 끌 수도 없는 상태였다.

시가지로 들어간 세미온이 되돌아 나오기까지는 또다시 30분 가까이가 걸렸다. 그의 뒤에는 어리둥절해진 표정의 연대장 쿤제가 근위기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뒤따라오고 있었다. 세미온이 아버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명령하신대로 제 기병들이 민간인들을 구출하고 있는 중입니다.하지만 살아남은 건 절반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두 이놈의 소행입니다!”

당황한 쿤제가 더듬거리며 변명을 하려 했다.

“사령관님, 전 명령하신 대로…….”

“이놈! 명령이라니! 내 폭도들을 쓸어내라고 했지 언제 민간인들을 마구 죽이라고 했어!”

헤즈가 얼굴을 붉히며 쿤제에게 버럭 호통을 쳤다. 얼떨결에 학살 책임자로 몰린 쿤제가 사령부의 다른 장교들을 돌아보며 호소했다.

“하지만……주민들이 다 폭도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전 그저…….”

“닥치고 당장 이놈 끌고 가지 못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

세미온의 부하 근위기병들이 억울하다며 몸부림치는 이 거구의 무장을 붙들어 질질 끌어내갔다. 지휘부 내엔 이 황당한 사건에 모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대충 끝났냐?”

한 시간 넘게 난롯가에서 홀의 학살극과 어처구니없는 ‘구출극’을 지켜본 헤즈는 그제야 손을 툭툭 털고 천막을 빠져나가 대기 중인 자신의 말에 올랐다.

“이제 슬슬 들어가 볼까나.”

백여 명의 지휘부와 소수의 근위병만을 동반한 헤즈는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내 씹으며 사뭇 여유롭게 홀의 시가지로 향했다. 9천 가까운 빈민들이 허름한 판잣집을 지어 살던 더러운 주거지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있었지만 이젠 어차피 돌아올 사람도 없었다. 모조리 타 버린 111번 홀은 타버린 집과 불탄 시체 빼고는 말 그대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폐허의 중간중간엔 자신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여전히 어리둥절한 31연대 장병들이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서 있기도 했고, 몇은 구석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엉망진창이 된 빈민굴을 가로질러 광장에 도착한 헤즈가 휑해진 홀 주변을 손으로 가리켰다. 판자촌이 다 타 없어진 시가지에는 이제 타고 난 재밖에 없었다.

“아까는 좁다고 그랬소? 이쯤이면 12만 대군이 머물긴 충분하겠소? 클리멘트 경?”

“그, 그렇습니다.”

“자아, 이걸로 종가의 단호한 뜻은 보였으니 이제 겁먹은 놈들이 분열하고 지레 지쳐 나동그라질 때까지 헬홀의 목을 아주 천천히 조여야지.”

헤즈가 다시 히죽거리며 시체의 피비린내와 악취, 탄내가 진동하는 중간에 서서 쿠키를 맛나게 씹어 삼켰다.

111번 홀에서의 학살 소식은 오래지 않아 헬홀에도 전해졌다. 헬홀의 세데스는 그 소식을 받자마자 민간인 학살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고, 헤즈가 ‘곧 발표할’ 성명서 내용까지 대충 예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헬홀 주변의 각 홀들에 ‘결사 항전’을 지시하면서 장기간 버틸 수 있는 군량을 대대적으로 뿌렸다.

세데스의 예상 그대로, 진압군 사령관 헤즈는 [폭도들이 치안군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하고 진압군을 공격했다.]며 세데스의 예상과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헤즈는 그 모든 배후에 민간인들을 폭동에 동원한 헬홀의 쿠데타 무리가 있다며 강도 높게 비난을 퍼부었다.

반란군은 4배나 되는 압도적인 진압군 병력 앞에서 일단은 섣부른 움직임을 자제한 채 그들이 약점을 보일 순간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하지만 헤즈의 예상대로, 그리고 후스의 걱정대로, 반란군 내부에서 슬슬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는 111번 홀의 참사에도 반격이 없는 지도부를 비난했고, 다른 일부는 정반대로 ‘이쯤이면 됐으니 본가와 협상해서 한 발 물러나자.’며 공포감을 드러냈다.

황실 중재사절로 와 있는 베아트릭스는 종장 카나르와 헤즈에게 [민간인 학살과 혁명군과의 충돌을 중단하고 하루빨리 협상에 임하라]는 빤한 내용의 편지를 하루가 멀다 하고 보냈고, 돌아가는 답변도 [학살은 일선 연대장의 오판에 의한 과잉진압일 뿐이며, 세데스와 후스가 무조건 항복하지 않는 한 협상은 어렵습니다.]라는 똑같은 내용들이었다.

그 와중에 12만의 진압군은 황실의 협상 권고를 비웃듯 반란군의 본거지인 헬홀을 둘러싼 군소 홀들을 빠르게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111번 홀에서의 참사를 전해들은 홀들은 세데스의 항전 호소와 식량 배분이 무색하게 순순히 백기를 들거나 헬홀로 도주해버렸다.

그렇게 홀들을 하나 둘 손에 넣은 헤즈는 그들이 반란군에게서 지원받은 엄청난 곡물도 모조리 압수했다. 도둑맞은 양에 비하면 턱도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적잖은 식량을 ‘탈환’해서 자신들의 곳간을 블리자드 시즌 동안 쓰고도 남을 만큼 그득하게 채울 수 있었다. 덕분에 보급품 준비가 부족했던 그들도 최소한 식량 걱정은 덜 수 있었다.

그리고 예보대로, 11일이 지난 늦은 밤부터 예보대로 칼릴의 악명 높은 블리자드 시즌이 시작되었다.

주변의 9개 홀이 모두 진압군에 항복하면서 칼릴의 수도 헬홀은 완전히 포위되어 누가 보기에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것도 내분으로 시끌시끌해진 분위기까지 껴안은 채 이 춥고 잔혹한 시기를 맞이했다. 이전엔 블리자드 시즌에도 빙하차를 동원해 생필품을 육로로 일부 들여올 수 있었지만 진압군이 헬홀 주변의 모든 육로를 봉쇄하면서 이젠 그것도 불가능했다.

반란군은 빼앗아온 곡물을 빼면 사실상 빈손이었다. 시장은 문을 닫았고, 에너지 절약을 위해 모든 차량은 압수되었고, 학교도 교문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값싼 곡물 하나에 모든 운명을 팔아버린 듯 보였다.

그렇게 그들을 포위한 헤즈와 진압군은 이제 몰아치는 블리자드와 맹추위 속에서 111번 홀의 뜨뜻한 난로 곁에 머물며 헬홀의 누군가가 몰래 항복문서를 들고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충격 요법으로 진압을 시작한 카나르 공과 헤즈의 계획은 대충 맞아 들어가는 듯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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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즈는 33년 전의 습관을 못 버렸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부녀의 활약(???)을 기대해 주시고요...플라칼 가의 영웅이 될지 숨은 엑쑤맨이 될지...

근데 미노년 안드레이 플라칼 장군님 왠지 외모도 이름도 멋지지 않나요?? ^^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 전자책은 1부 9, 10권 작업중이고요;;;

염병할 올레e북은 언제 올라올지 감감무소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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