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29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젠 전문 암살수가 되어 중령 계급으로 40세의 생일을 맞은 오르마즈는 여전히 엄마와 가족 생각에 맘이 편치 않았다. 이미 다른 여자와 살림을 낸 아버지는 수용소에 잡혀 있는 처자식에는 더 이상 관심도 없었다. 토로에게 듣기로 투르케스크는 종장인 아버지 빌루이에게 아지드와의 이혼과 동거녀와의 결혼을 승낙해 달라고 찾아갔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채 쫓겨났다는 것 같았다.
무심한 듯 보이는 빌루이였지만 며느리 아지드를 아주 내버린 건 아닌 듯했다. 그는 코메트 수뇌부에 종종 뇌물을 전해가며 양아들의 식솔을 해치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아직 너무 어린 막내 세네피스만이라도 빼낼 수 없겠냐고 따로 알아보기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업가인 그가 눈치를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런 빌루이를 빼면 바깥세상에서 가족들을 염려해 주고 있는 건 오르마즈뿐이었다. 그는 자존심과 분노를 접고 몇 번이나 파냐드에게 찾아가 가족이 있는 수용소를 알려만 달라고 몇 번이나 애원했다. 그는 다른 지원 없이 자신의 팀원들만으로도 수용소를 공격해 수용자들 모두를 탈출시킬 수 있다며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파냐드는 요지부동이었다.
오르마즈가 두 번째 탈영을 생각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10대 때처럼 무작정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는 꼼꼼히 자신의 가짜 신분을 만들었고, 민병대에서 먼저 도망친 망치와 톱날을 시켜 콜로니에서도 가장 외진 하임달로 도망칠 탑승권, 외모를 바꿀 마스크와 렌즈, 가발은 물론이고 하임달에서 숨어 살 작은 집과 가게자리까지도 미리 파악해 두었다.
그는 팀원인 베흔과 이트닌에게도 그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감추었다. 소령으로 승진한 베흔은 자신감을 찾고 이전 자신을 따돌림했던 X 동기들 사이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고, 이트닌은 특무대 내에서도 알아주는 보안전문가니 그 둘은 어차피 자신이 탈영한 후에도 잘 지낼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와헷이었다. 오르마즈 자신만을 보고 민병대에, 그것도 특무대까지 따라온 그 젊은이는 충성스럽고, 힘세고 싸움을 잘 한다는 것 빼고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었다. 특무대에서 탈영자가 생기면 팀 내 한 명을 희생양으로 삼곤 하는 관례를 생각해 보면 와헷이 본보기로 처형당할 것이 뻔했다. 오르마즈는 하는 수 없이 와헷에게도 자신의 탈영 계획을 귀띔해주고 함께 빠져나갈 준비를 시켜두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쳐가던 오르마즈는 어느 늦은 저녁, 지도자 파냐드의 부름에 크게 당황했다. 직속상관인 특무대장이 아니고 지도자가 그를 부른다는 건 무언가 ‘중대한 임무’가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탈영 거사일’이 고작 이틀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집무실에 든 오르마즈는 눈동자를 굴려 파냐드의 주변을 얼른 살폈다. 무슨 일인지 지도자 주변을 24시간 지키는 경호원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정말로 비밀스런’ 임무를 내리려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파냐드는 오늘도 여전히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사실 요즘 파냐드는 내내 기운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장 믿음직한 조언자였던 남편 입실론의 죽음 이후로 줄곧 내리막길만 걷고 있었다. 그는 조금씩 의욕도 잃어갔고, 큰 정책이나 리더쉽을 드러내기보다는 치졸한 음모나 공작에 점점 더 의존하며 몇 개의 국지전을 빼면 지금껏 눈에 띌 승전 한 번 거둬보지 못했다. 지금껏 열 번 가까이 계속 이어진 적의 암살 미수도 비록 한 번도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를 점점 히스테리로 몰아가며 조금씩 갉아먹었다. 민병대 내의 충성도 이전 같지 않았다.
올 초의 암살 미수도 마찬가지였다. 기원 25년 이후 가장 치명적이었던 이번 암살 미수는 차량 충돌이었다. 그는 손발을 잃고 허리를 다치는 치명상을 입어 몇 달을 병상에 누워 보내야 했다.
이번에도 그는 불사신처럼 일어났지만 더 신경질적이 되었고, 자신의 자리에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걸핏하면 ―강경파의 압박에 못 결국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입실론을 그리워하며 혼자 우울증에 빠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 기억을 쫓기 위해 이런저런 남자를 침실에 들이기도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누구도 다정하고 현명했던 첫 남편의 자리를 대신해줄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회의 자리에서 입실론 이야기에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탈진해가는 그는 자신의 역할을 이제 입실론의 혈통인 아들 에르네스토에게 하나 둘 넘겨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강경파의 손에서 못 벗어난 어머니와 온건파를 중용하는 아들 사이에는 아직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있었다. 거기에 어머니에겐 반항적인 말썽꾼으로, 아들의 눈에는 숨겨진 보물로 보이는 오르마즈도 떡하니 걸림돌로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 바쁜가봐?”
파냐드가 잔주름이 잔뜩 낀 가는 눈가에 희미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이 여자에게선 어지간해선 보기 힘든 미소였다. 오르마즈는 뭔가 불길한 낌새를 챘지만 표정만은 평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더 빠르게 발전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법이니까요.”
“누군가는 그런 게 피곤해서 아예 탈출하고도 싶어하지.”
파냐드가 하얀 앞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오르마즈의 가슴이 다시 덜컥 내려앉았지만 암살수로 다듬어진 그의 표정도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특무대 요원과 암살수로 십여 년을 버텨오면서 이젠 그도 단순히 부하들을 잘 다루는 지휘관 그 이상의 무언가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들놈이 참 사람을 잘 봤다는 생각이 들어.”
오르마즈는 이번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딱 하나면 빼고는 말이야.”
파냐드는 탁자 위에 손바닥만한 딱지 하나를 탁 올려놓았다.
“네가 헤크마 무리에서 도망쳤었다는 전력을 봤을 때 알았어야 하는데. 거기에 깜빵살이까지 했었지. 사고 친 놈은 언젠간 꼭 다시 치는 법이거든.”
오르마즈는 이 상황에서도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지도자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것이 그가 와헷에게 ‘깊숙이 숨기고 있어라’며 주었던 하임달 행 탑승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조차도.
“이젠 24년 전 일입니다.”
오르마즈는 파냐드가 내놓은 탑승권을 전혀 못 알아본 사람마냥 살짝 웃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파냐드가 그에게 눈을 살짝 흘겼다.
“그러게 난데없이 술집에 외상값을 갚고 다니지 말았어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파냐드는 관사 뒤쪽으로 난 커튼을 확 걷고 창문을 열었다. 집무실 뒤뜰에는 쌀쌀한 날씨에 온통 발가벗겨진 와헷이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이미 몇 대나 얻어맞았는지 온몸이 멍투성이였고 몸 곳곳, 심지어 입술과 고환에까지 전기로 태운 자국이 남아있었다.
와헷의 머리를 공처럼 툭툭 걷어차고 있던 헌병대 하메스타 소령이 창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오르마즈와 와헷 주변을 호시탐탐 노리던 저 하이에나 같은 작자의 소행이 분명했다.
파냐드가 뒤뜰을 무심히 내다보며 말했다.
“고문에 저항하는 훈련을 잘 받았나봐. 자네 이름의 앞자도 꺼내지 않더군. 암살팀원은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는 게 관례니 오늘밤 처리할 참이야. 관례대로 뒤쪽 절벽에서 깨끗하게 던져버릴 참이네. 자네 팀엔 한 명 새로 들여보내주지.”
오르마즈는 이번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매서운 눈길을 의식한 파냐드가 갑자기 씩 웃었다.
“아참,……내 아들놈에게 큰 선물을 하나 주려고 열흘 후에 작전을 하나 준비했거든. 혹시 거기에 지원할 참이라면 새 팀원을 적응시키기도 골치 아파지니 그냥 저 녀석을 놔두고.”
파냐드의 명백한 협박에 오르마즈의 다리가 휘청할 뻔했다. 탈영 계획이 들통 난 이상,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와헷의 신음소리가 점점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오르마즈는 이번에도 표정에 살짝 웃음을 보탰다.
“언제는 지원을 받으셨나요? 전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입니다.”
“잘 생각했네.”
파냐드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열흘 후에 남극성당으로 가게나.”
오르마즈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목적지가 남극성당이라면 상대가 토벌군인 코메트가 아니고 교단이라는 의미였다.
“표적이 누굽니까?”
파냐드가 묘한 웃음과 함께 짧게 대답했다.
“대신관.”
오르마즈는 충격이 큰 만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엔 정말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을 받았지만 어차피 길은 정해져 있었다. 뒤뜰에서는 와헷을 고문하던 헌병들이 그를 나무 위에서 끌어내리고 있었다.
“대신관이 그맘때 남극성당에 머물며 행사를 연다는 정보야. 자네 어깨에 민병대의 미래가 걸려 있네. 자세한 내용은 무라드 준장이 전해줄 것이네.”
파냐드는 와헷의 기소 내용이 적힌 서류를 오르마즈의 눈앞에서 북북 찢어 옆의 난로에 던져버렸다.
“가 봐.”
오르마즈는 들어왔을 때처럼 그에게 경례를 올리고 휙 돌아섰다. 손끝이 떨리도록, 이가 갈리도록 저 여자를 죽이고 싶었다.
오르마즈가 나간 뒤, 파냐드는 집무실 뒤쪽의 작은 쪽문을 돌아보았다.
“나오시오.”
문 안에서는 머리 꼭대기까지 긴 망토를 뒤집어쓴 한 사람이 느릿느릿 나와 파냐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갑갑한 망토깃과 후드를 내렸다. 후드를 벗은 순간, 윤기가 흐르는 검고 긴 머리칼이 허리춤까지 찰랑거리며 내려왔다. 호리호리하고 큰 키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의 희고 고운 얼굴은 제정신 박힌 여자라면, 아니 남자라도 시선을 맘대로 떼지 못할 미모였다.
“감사합니다.”
여성적인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굵고 침착한 목소리가 남자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감정이라고는 거세된 채 살아왔던 파냐드였지만 이번만은 이런 절세의 미남이 자기 밑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부터 했다. 이상하게도 교단 신학자인 이 남자에게서 죽은 남편 입실론과 비슷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위대한 현신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그 양반이 기뻐하건 말건 난 관심 없어. 약속대로 잘 이행해 주기만 한다면.”
파냐드가 자꾸 남자의 얼굴에 쏠리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며 억지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남자가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약속대로 포로 100명을 석방하고 50만 다리크를 말씀하신 비밀계좌에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이오타 요아킴 제 이름도 함께 걸겠습니다.”
“고작 중령 하나 따위에 그 큰 돈을 내놓으시다니, 연합의회장 지하에서 한이 크게 맺히셨군.”
파냐드가 히죽히죽 빈정거렸다. 요아킴은 이 무서운 여자에게 눈빛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능청맞게 대답했다.
“의원 수백을 죽이고 그분에게까지 감히 무기를 겨누었던 자입니다. 절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를 못 잡아들이고 있다는 건 정치적인 부담이기도 하고요.”
파냐드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 크고 잘생긴 남자에게 바싹 다가섰다.
“확실히 할 게 있다. 우리 계약 내용은 저놈 하나뿐이니 저놈만 데려가고 팀원들은 건드리지 마라. 무슨 말인지 알지?”
“물론입니다.”
요아킴은 자신의 가슴으로 닿을 듯 다가선 이 여자에게서 한 발 물러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파냐드가 그를 올려보며 씩 웃었다.
“기왕 온 김에 내 조건 하나만 더하고 싶은데?”
“말씀하십시오. 그분께 전하겠습니다.”
파냐드의 살냄새까지 느낀 요아킴은 다시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위에 전할 필요 없이 여기서 자네가 정하면 돼. 내 이번에 입금될 금액에서 10만 다리크를 떼어 줄 테니까.”
요아킴은 표정을 안 보여주려 했지만 워낙 키가 크다보니 밑에서 올려보는 파냐드의 매서운 눈빛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자네 미혼이더군. 그리 좋은 곳은 아니지만 하룻밤 묵고 가는 게 어떤가?”
낯빛이 창백해진 요아킴이 결국 마지막 수를 내놓았다.
“소인 이미 현신께 예속된 몸이옵니다.”
예상대로, 파냐드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도 남자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괜히 마구스의 남자까지 건드려 자신의 정치생명까지 걸 만큼은 아니었다.
“어쩐지.”
파냐드가 툴툴거리며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이 남자의 체취는 죽은 남편과 너무도 비슷했다. 기분이 푹 가라앉아버린 그는 이 시간, 요아킴이 ‘거짓을 말한 것을 용서하소서.’라고 낮게 중얼거리고 있는 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전 이만.”
요아킴은 다시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지도자의 집무실을 나섰다.
파냐드의 집무실은 1년 내내 유황 냄새가 끊이지 않는 판지셰르 화산자락의 가파른 화산암 골짜기 중턱에 세워져 있었다. 그는 자글거리는 돌조각들을 밟으며 서둘러 그곳에서 걸음을 옮겨 멀어졌다.
‘감히 이름을 팔아 죄송합니다, 현신님.’
요아킴은 다시 수나를 떠올렸다. 눈부신 미모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를 자신의 시동으로만 보는 수나에게 ‘예속되는 것’은 그저 소원일 뿐이었다. 병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미끄러운 산길을 막 내려가려 했던 요아킴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방금 파냐드의 집무실에서 나온 오르마즈가 길 중간에서 만난 파란기스와 나란히 서서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굳은 얼굴의 오르마즈를 걱정스레 올려보던 파란기스는 돌연 요아킴 쪽을 휙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지레 놀란 요아킴이 얼른 얼굴을 더 깊숙이 가렸지만 파란기스의 눈은 무언가를 알아본 듯 갑자기 빛을 뿜고 있었다. 요아킴은 파란기스가 자신을 보며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허둥지둥 얼굴을 더 깊숙이 가리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파란기스는 요아킴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얼굴이 아니고 느낌으로 바로 그라는 것을 알았다. 고향행성에 있었을 때, 그를 누나처럼 잘 따랐던, 그리고 검은 철성 앞에서 약혼녀이자 최후의 사제 카히나를 자신의 목숨으로 지키고 죽어갔던 그 청년이었다.
“뭘 보십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파란기스의 모습에 오르마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눈에는 망토를 두르고 어딘가로 바삐 사라지는 키 큰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을 뿐이었다.
“잘 다녀와요. 당장은 못 온다 해도 언젠간 다시 보겠죠.”
파란기스가 돌연 눈물을 글썽이며 오르마즈의 가슴을 와락 껴안았다.
“예?”
파란기스의 뜬금없는 태도에 오르마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이번 작전을 밝히지도 않았고, 그저 ‘한동안 어딘가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파란기스가 그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운명이 당신을 지켜줄 테니.”
파란기스는 오르마즈의 품을 한 번 꼭 안아주고는 주변 경호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팔을 풀었다. 그리고는 아쉬운 듯 그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가던 길로 멀어져갔다. 오르마즈는 그가 뭔가 자신보다 더 아는 것을 직감했지만 이번에도 묻는다고 말해 줄 리가 없었다.
그때, 오르마즈는 헌병들이 곤죽이 된 와헷을 질질 끌고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허겁지겁 달려가 헌병들을 밀어내고 기운을 잃은 와헷을 품에 안았다. 오르마즈를 마주한 와헷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내게 맡겨 둬.”
와헷을 데려가려는 오르마즈의 손을 하메스타가 확 떼어냈다.
“바로 숙소로 옮겨다 놓으라는 명이십니다.”
“병원이 아니고?”
“일이 커지길 원하십니까?”
하메스타의 빈정거림에 오르마즈가 이를 드러냈다. 와헷을 병원에 데려가 사람들 눈에 띄게 하지 말라는 경고가 분명했다.
“알았으니까 당장 꺼져라, 하메스타 ‘소-령’.”
오르마즈는 말단 일병 출신에게 계급을 추월당한 하메스타의 가장 큰 흉터자리를 대놓고 찔렀다.
“쳇.”
하메스타와 헌병들을 쫓아낸 오르마즈는 벌거벗은 몸에 더러운 담요 한 장만 두른 채 떨고 있는 와헷을 등에 업었다. 헌병에게, 그것도 어린 시절 그를 추행하고 죽이려 했던 하메스타의 손에 얻어맞고 고문을 당한 와헷은 그의 목을 껴안으며 거의 경기를 하듯 바들바들 떨었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이에요.”
“누구 잘못도 아냐. 그냥 운이 없을 뿐이지.”
업힌 와헷의 어깨에 담요를 덮은 오르마즈는 그의 숙소가 있는 동굴로 걸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작전 하나만 성공하면 돼. 그럼 다 없는 일로 해 준댔어.”
‘작전’이라는 말에 와헷이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강경파에서 도망치고 사막을 떠돌았던 바로 그때처럼. 와헷은 여전히 오르마즈에겐 ‘누나야’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6살 소년이었다. 오르마즈는 목을 안은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그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여 주었다.
“울지 마. 좀 위험하지만……다 잘 될 거다.”
“정말이요? 저 때문에 다 떠안으신 건 아니고요?”
오르마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와헷의 굴이 있는 가파른 계단을 비틀비틀 걸어 올랐다.
독신의 특무대 시민병 사관들이 머무는 숙소는 산 밑자락을 따라 뚫어놓은 벌집 같은 굴이었다. 와헷의 굴에 도착한 오르마즈는 고문으로 온몸에 피멍이 든 그를 침대 위에 눕혀놓았다.
“의무대에 친구가 있어, 가서 몰래 데려올 테니 기다려.”
오르마즈는 와헷의 가슴에 담요를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헷이 그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지 마, 누나야.”
와헷의 애원이 가늘게 떨렸다.
“누나 없으면 또 X들이 나 끌고 갈 것 같아…….”
오르마즈는 피멍이 든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와헷의 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샤워장에 잡혀가 죽을 뻔했던 그날의 공포가 어느새 소년으로 돌아간 그의 까만 눈동자에 다시 맴돌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와헷의 침대 구석에 걸터앉아 조용히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누나 어디 안 가.”
오르마즈는 천천히 몸을 숙이고 주먹질과 전기고문으로 퉁퉁 부은 와헷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해 주었다.
“정말이야.”
와헷은 몸을 일으키려는 오르마즈를 와락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9일 후, 특무대 제1팀장 중령 오르마즈 카파키는 [대신관 암살]이라는 민병대 암살수로서의 마지막 임무를 받고 베흔, 이트닌, 와헷과 함께 막 겨울에 접어든 남극성당으로 향했다.
스스로의 예상대로, 그리고 파란기스의 말대로, 그는 결국 판지셰르로 돌아오지 못했다. 버팀목을 잃은 와헷도 오르마즈를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로 가슴에 품은 채 베흔의 손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어수선해진 세상이 다시 부를 때까지, ‘31대 대신관 아르잔’이라는 얼굴 위에 ‘대신관을 죽인 민병대 영웅 오르마즈’라는 가면을 쓰고 세상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그는 이제 상념 속에서 다시 몇 년간을 역사 속에 묻혀 지내야 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작품 후기 ============================
.
.
.
드디어 [젊은 오르마즈]가 나오는 마지막 편입니다. ^^
이 이야기에서 634회의 과거 이야기가 연결됩니다.
다음 파트부터는 전혀 다른 시기의 이야기가.....과거 이야기가 한 에피소드밖에 안 남으니 이제 슬슬 대단원의 느낌이 나네요.
그리고 다음 회부터는 현재로 돌아가 칼릴의 너죽고 나죽고 치고받고가 시작됩니다. ^^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 전자책은 1부 9, 10권 작업중이고요;;;
염병할 올레e북은 언제 올라올지 감감무소식... -,.-;;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조아라 노블레스 : http://t.co/ErnaaB0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올레e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