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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030화 (1,025/1,132)

< -- 1030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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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 사령관 헤즈는 바깥에 온통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따뜻한 병영에서 엉덩이를 지지며 느긋하게 쿠데타군의 내분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초기여서인지 기다렸던 대대적인 내분은 없었다. 2군단의 보병대 제대장과 대대장 두 명이 탈영병을 통해 본토의 식솔들을 해치지 말아달라며 몰래 협조 의사를 보내왔지만 그 정도로는 대대적인 내분을 바랐던 헤즈의 성에는 차지를 않았다. 그에겐 후스의 목을 따서 가져올 측근의 배신이 필요했다.

사실 헤즈에겐 반란군과 싸우는 것보다는 급조된 대군의 운영이 더 힘들었다. 며칠 만에 뚝딱 대군을 모으는 것까지는 가능했지만 문제는 보급이었다. 필수품목인 군량 조달은 도리어 가장 쉬웠다. 처음 가져온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헬홀 주변을 장악하면서 노획한 군량만으로도 창고가 차고 넘칠 지경이라 더 보내지 말라고 본가에 따로 연락을 보내야 했을 정도였다.

가장 절박하게 속을 썩이는 건 방한복이었다. 갑옷 자체의 단열과 발열 기능은 칼릴의 혹한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겨울용 망토는 온천이 있는 홀에서는 그럭저럭 버틸만했지만 111번 홀처럼 지열이 별로 안 나오는 곳이나 빙하 위에선 10분 이상 버티기도 버거웠다. 그렇다고 칼릴 주둔군에게만 공급해 온 특수 방한복은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어 12만의 대군에게 모두 지급하는 건 턱도 없었다. 블리자드로 운송로가 막히기 직전, 그는 다행히 급조한 방한복 3만 벌을 넘겨받았지만 블리자드가 시작되고도 며칠째 골머리만 썩을 뿐 아직 일선에 지급을 못 하고 있었다.

“5일 전에 도착한 방한복은 어찌된 겁니까?”

사령관실을 불쑥 찾아온 예르마크 경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추위에 유독 약한 세닉 가 병사들 때문에 속을 썩고 있던 그는 방한복 입고 소식에 가장 기뻐했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눠준다는 소식이 없자 결국 참다못해 헤즈에게 찾아온 참이었다. 평소처럼 쿠키를 씹고 있던 헤즈는 ‘방한복’이라는 말에 경기라도 하듯 화들짝 놀랐다.

“그거야……창고에 잘 있죠.”

“보아하니 아직 받은 부대가 하나도 없는 것 같던데요, 이미 추워질 만큼 추워졌는데 방한복으로 무슨 제사상이라도 차릴 참이십니까?”

예르마크가 시비조로 물었지만 헤즈는 평소라면 짜증을 냈을 그의 추궁 아닌 추궁에 얼버무리며 시간만 끌었다. 다행히 군대의 안살림을 직접 책임지고 있는 참모장 클리멘트가 들어와 난처해진 헤즈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방한복 안 나눠주는 이유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던 클리멘트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인수한 3만 벌이 문제가 좀 있어요. 방수코팅이 불량이라 물이 스며들더라고요. 원래 북부 산 원단을 썼는데 그 망할 놈들이 식량금수 보복으로 군수품 금수를 걸었거든요. 주문일자에 맞추려고 하는 수 없이 다른 원단을 쓰다 보니 그리 됐답니다.”

“예에?”

예르마크가 기가 막혀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소바람과 함께 반 스타디아 앞도 내다보기 힘들 만큼 무섭게 몰아치는 눈보라가 이 순간도 창을 쾅쾅 두들기고 있었다.

“아니, 눈이 이렇게 몰아치는데 물 먹는 방한복이라뇨?”

당황한 클리멘트가 얼굴을 붉히며 둘러댔다.

“그렇다고 뭐 줄줄 새는 정도는 아니고요……회전 같은 거 할 때 잠시 입는 정도는 상관없을 것 같은데 장시간 입고 작전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미리 나눠줬다가 안 좋은 말 새어나가면 괜히 긁어 부스럼 될 것 같아서 나중에 꼭 필요할 때 일회용으로나 쓸 참입니다.”

예르마크는 더 화를 내려다가 이쯤에서 접기로 했다. 헤즈나 클리멘트의 잘못도 아니고, 애당초 준비도 덜 된 12만의 대군이 극단적인 환경의 칼릴에 출동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러게 북부하고 서부 긁어도 좀 적당히 긁지 그러셨습니까.”

예르마크가 슬쩍 감정을 드러냈다. 막상 칼릴에서 싸움을 벌이려고 보니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북부와 서부의 보복조치가 생각 외로 자잘한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얼음 위에서 움직이는 빙하차와 트레일러도 북부 쿠트라스에서 당국에 통관이 막혔고, 서부에서만 생산되는 극한 환경용 통신장비는 판매를 하루이틀 미루고만 있었다. 덕분에 빙하 위의 극한지에선 차량이나 일부 장교들을 빼면 할룩스가 먹통이 되어 속을 썩이곤 했다.

예르마크는 뚱한 표정을 억지로 감추고는 둘에게 대충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나가버렸다.

“염병할, 골칫거리도 한둘이 아닌데 이젠 저놈까지 속을 썩이네.”

헤즈가 쿠키 한 줌을 집어 신경질적으로 입에 확 쑤셔 넣었다.

“그나저나, 클리멘트 경 표정을 보니 또 내 두통거리 하나 늘리러 온 것 같소?”

헤즈의 눈썰미에 클리멘트가 멋쩍게 웃었다.

“지난번 배탈 역학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또오.”

헤즈가 다시 머리를 싸쥐었다. 방한복에 이어 두 번째로 그의 속을 썩인 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였다. 열대 정글도 아니고 이런 추운 곳에서 병사들의 배탈로 앓아누울 줄은 누구도 상상을 못 했었다. 블리자드 시즌이 시작되고 4일 정도 지난 후, 111번 홀과 몇 개 홀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사들의 집단 배앓이가 벌어지면서 조용하던 진압군 병영을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다.

클리멘트가 내준 서류를 확인한 헤즈가 아연실색을 했다.

“뭐라고? 곰팡이라니?”

“아직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습니다만 곰팡이 독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미량으로도 치명적인 성분이라 지금 출처가 어디인지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니, 내가 생물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말이요.”

헤즈가 씹고 있던 쿠키를 옆에 내던지며 버럭 짜증을 냈다.

“식자재 보관을 잘못해서 곰팡이가 났다면 어디 한 지역에서만 났어야지! 5개 홀에서 동시에 300명이 넘게 곰팡이로 배탈이 난 게 어디 말이 되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문제 지역에 공통으로 들어간 식자재가 뭔지 파악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각 창고에 곰팡이가 난 식자재를 파악하라고 일렀습니다.”

“빨리 처리 못 해서 멀쩡한 식자재까지 곰팡이가 번졌다가는 알아서 하시오!”

헤즈가 씩씩거리며 쿠키를 다시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었다. 그가 쿠키를 막 목구멍 뒤로 넘긴 순간, 클리멘트는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군수참모를 발견하고는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딱 때마침 와 줬군요.”

헤즈의 눈치를 힐끔 본 참모는 몇 장의 서류를 클리멘트의 앞에 내려놓고 얼른 부동자세를 취했다. 먼저 서류를 살피는 클리멘트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클리멘트 경, 뭐 할 말 있나보오?”

헤즈의 물음에 클리멘트는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쿠키 바구니부터 힐끔 쳐다보았다. 헤즈가 능청스레 웃으며 쿠키 한 움큼을 집어 내밀었다.

“왜? 같이 먹겠소?”

클리멘트는 쿠키를 받는 대신, 방금 건네받은 서류를 헤즈의 앞에 쓰윽 내밀었다. 별 생각 없이 서류를 본 헤즈의 표정이 흙빛이 되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쿠키를 접시 위에 와르르 도로 쏟아놓았다.

“이런, 염병할. 어디서 들어온 밀가루라는 말이야!”

사령관의 불호령에 파랗게 질린 군수참모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5군데 창고 중 3군데에서 곰팡이 확산이 확인되었고 나머지 2군데도 포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부는 포대 내용물 전체가 거의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블리자드 때문에 햇빛도 없고 습한 환경에서 식자재를 좁은 실내에 모아서 보관하고 있어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습니다. 곡물뿐만이 아니고 육류와 과일, 채소도 모두 썩어가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출처가 어디냐고!”

“보름이 넘게 좁은 공간에 함께 보관한 상태라 시작점이 어딘지 기술적으로 파악하긴 어렵답니다.”

“맙소사.”

헤즈는 방금 전까지 집어먹던 쿠키 접시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가 비엔에서 가져온 식자재가 있고……여기서 노획한 곡물이…….”

헤즈가 말을 끊고 파르르 떨었다. 기술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면 정황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의심이 가는 곳은 하나였다.

“염병할 반란군 놈들.”

헤즈가 이를 갈았다. 반란군은 진압군이 노릴 홀들에 곰팡이에 오염시킨 곡물을 군량 명목으로 미리 원조해 주고는 곰팡이 포자로 오염된 군량 창고를 일부러 진압군이 쓸 수 있게 놔둔 채로 퇴각한 것이 분명했다.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진압군은 빈 창고에 자신들의 군량은 물론이고 다른 식자재까지 넣었다가 모조리 곰팡이에 오염되어 이젠 손도 쓸 수 없는 지경이 된 꼴이었다.

헤즈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군수참모에게 물었다.

“노획한 군량이 지금 어디에 얼마나 들어와 있지?”

“대부분 밀과 보리이고 모든 각 홀의 저장고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블리자드 시즌엔 이동이 어려워서 각 홀의 주둔군별로 비축량을 미리 확보해 두라 했습니다. 비축 곡물량의 7할 이상입니다.”

“미치겠네.”

헤즈는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뱃속을 누군가 꼬챙이로 마구 후비는 느낌이었다. 진압군이 칼릴에 급하게 진주하며 함께 가져온 군량은 5일 남짓에 불과했다. 원래는 본토에서 추가로 군량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노획한 군량만으로도 차고 넘치다보니 그는 추가 군량 운송을 취소해 버렸었다.

“당장 오염된 것들을 찾아내서 불태우던지 야적하던지 해결하란 말이다!”

“하지만 이미 다른 것에까지 포자가 번져 있어서……일단 살균기로 최대한 확산만은 막아 보겠습니다.”

군수참모를 내보내고 씩씩거리는 헤즈에게 클리멘트가 서류를 보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긴 건 일단 불태우든 뭘 하든 없애버린다고 치고, 부족해진 식량은 이제 어쩝니까?”

클리멘트의 물음에 사령관실 안에 일순간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어떡하긴……, 가져와야지…….”

무심결에 창밖을 내다보는 헤즈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111번 홀은 1스타디아는 고사하고 그 절반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운 강풍과 눈발이 사방에서 제멋대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병사들은 소변까지 얼려버리는 아수라장 같은 맹추위 속에서 본토의 겨울에 맞춘 방한복과 망토로 온몸을 꽁꽁 가린 채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저렇게나마 차리고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추위에 익숙한 플라칼 가, 혹은 이곳 칼릴에 근무 경험이 있는 많지 않은 다른 가문 장병들뿐이었다.

“육로로 가져온다고요? 농담이시죠?”

클리멘트 델루지가 고개를 저었다. 대다수의 델루지 가 장병들은 웬만해선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1년 내내 온화한 루게에서 따로 적응훈련도 없이 바로 달려온 세닉 가는 거의 병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사흘 만에 서둘러 진압군을 조직하며 12만의 머릿수만 번갯불에 콩 볶듯 채웠다보니 부대의 특성이나 개개 장병들의 출신지, 장비 따위까지 하나하나 따질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군량을 가져오려면 본토 수송선이 올 수 있는 적도까지 내려가야 하니 수십 일은 걸립니다. 게다가 블리자드 속에서 육로로 빙하를 뚫고 오려면 혹한에도 움직일 수 있는 빙하차를 동원해야 하는데 대수도 부족하고 모두 작전용이라…….”

“뭐 하러 가져와? 갖고 오라고 해야지. 여기서 적도까지 다녀오려면 블리자드 기간 다 지나가라고?”

헤즈가 버럭 화를 냈다.

“남쪽의 다른 홀들에 연락해서 비축곡물을 당장 육로로 보내라고 하라고! 후스 그놈이 준 건 빼고 순수 비축분 말이요!”

“그런 게 있기나 할까요?”

헤즈의 험악하고 무례한 말투에 부아가 난 클리멘트 델루지가 대뜸 빈정거렸다. 참모장 신분으로 오기는 했지만 그는 다음번 델루지 종장이 유력한 마누엘의 장녀이고, 아직 델루지 가는 플라칼 가가 최고제후라는 것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쩌면 자신보다 급이 낮을 수도 있는’ 헤즈에게 이런 취급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눈치를 챈 헤즈가 일단 말꼬리를 한 단계 내렸다.

“일단 보내면 본토에서 실어오는 군량으로 대신 채워준다고 약속하면 될 것 아니요? 호송대도 편성하고.”

“그렇게 전합지요.”

클리멘트가 빈정거리며 사령관실을 휙 나섰다.

헤즈는 뚱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사령부 병사들이 블리자드 속에서 방한복을 챙겨입고 식자재 창고 부근으로 와글와글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안에 그득하게 쌓여 있던 식량들을 줄줄이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저 많은 것을 다 버려야 한다니 피눈물이 났지만 일단은 다른 선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바로 책상 위에 있었다.

“쿠키 다 버려.”

헤즈와 클리멘트의 비교적 빠른 대응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집단 중독 사태는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동안은 그냥 복통이나 독감이려니 하고 대충 참아 넘겼던 병사들까지 중독이라는 말에 앞 다투어 병원으로 몰려들면서 진압군의 야전병원은 순식간에 마비 상태가 되었다. 환자로 판정되면 누구나 싫어하는 혹한 속에서의 작업과 경계 근무까지 열외가 되니 병사들은 몸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무조건 군의관에게 달려와 중독 환자로 판정해 달라며 생떼를 써서 골치를 안기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적도 이남의 홀들 대부분이 헤즈의 식량 징발령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었다. 칼릴이 사실상 폐쇄된 상태에서 지역민이 굶어죽게 생긴 마당에 군량으로 곧 채워준다는 뜬구름 잡는 약속에 기대어 민간인 수천을 몰살시킨 진압군에 식량을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본토에서 군량이 도착하면 그때 보내주겠다는 ‘완곡한’ 답변을 보냈지만 그때는 어차피 홀에서 보내주나 본토에서 온 식량을 갖고 오나 거기서 거기니 순전히 말장난이었다.

그 와중에 진압군의 요구에 응한 곳은 18번 홀 하나뿐이었다. 20여대의 빙하 차량에 식량을 가득 싣고 블리자드 경계까지 달려온 18번 홀의 자경대장은 식량을 가져온 것이 자기들뿐이라는 사실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희 말고 또 없습니까?”

눈발이 가득 날리는 벌판에는 군량 호송대를 태우고 온 병력수송용 빙하차 30대가 전부였다. 2천이나 되는 호송대를 이끌고 나와 얼음벌판에서 벌벌 떨며 기다렸던 헤즈의 딸 세미온이 자경대장보다 더 민망한 표정이었다.

“염병할, 또 있으면 내 표정이 이 모양이겠냐.”

지독한 블리자드 속에서 느려터진 빙하차를 차고 이곳까지 오는 길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중간에는 빙하가 갈라진 거대한 절벽도 있었고, 불쑥 융기해 오른 아찔한 빙하 옆도 언제 무너질까 덜덜 떨면서 지나와야 했고, 빙하차가 크레바스에 빠져 아찔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차가 있었기 망정이지 빙하 위의 야외에서 행군하거나 전투를 벌인다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강력한 엔진과 빙판용 궤도가 달린 트랙터와 70명의 병력이 탄 대형 캐빈을 앞뒤로 연결한 빙하차는 칼릴의 홀 밖의 빙하 위를 움직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었다. 빙하에서는 빙하차가 다른 지역의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가져온 것들은 나중에 쓴맛을 제대로 보게 될 거야.”

세미온이 한숨을 내쉬며 함께 온 병력에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지독한 고초를 뚫고 무려 이틀이나 걸려 이곳까지 나왔지만 그가 얻은 건 호송대의 병력수송차보다도 적은 고작 20대분의 식량이니 본전도 못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탑승! 탑승! 되돌아간다!”

마치 애벌레같이 울룩불룩한 누런 색 두툼한 포대를 뒤집어쓴 채 떨고 있던 호송대 병사들이 그제야 안도하며 뒤뚱뒤뚱 캐빈에 올라탔다. 이들의 국적불명 방한복은 사실 겨울용 침낭을 뜯어 개조한 임시 방한복이었다. 방한복 문제로 골머리를 썩던 참모장 클리멘트가 남부제후군 침낭에 팔이 따로 있는 것에 착안해 막힌 밑단을 뜯어내고 몸에 걸치게 한 것이 나름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둔하고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것을 감수한다면 이동할 때나 작업할 때 정도는 나름 쓸 만했다.

40여대의 차가 빙하를 뚫고 달리기 시작하면서 사방으로 하얀 눈가루 얼음가루가 안개처럼 퍼져 시야를 가로막았다. 30여대의 병력수송용 빙하차는 식량을 가득 실은 20여대의 육중한 빙하 화물차를 앞뒤로 호위하고 얼음과 눈을 박차며 전진해 나아갔다.

“뭐, 20대?”

출발하며 보고를 올린 세미온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터질 것 같던 뺨이 이틀새 홀쭉해진 헤즈가 버럭 화를 냈다.

“지금 당장 12만 명이 곯고 있는데 20대?”

“아니, 왜 그걸 저한테 그러세요.”

억울해진 세미온이 얼굴을 붉혔다. 홀들이 말을 안 들은 건 일개 말단 기병대 참모인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헤즈도 너무 심했던 것을 깨달았는지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오기나 해.”

심통이 난 세미온은 아버지와의 통신을 확 끊어버렸다. 빨리 오라고 했지만 어차피 돌아가는 길도 고난의 행군이 될 게 뻔했다. 세미온은 지도를 펼치고 돌아갈 길을 대충 그려보았다. 학살사건 이후로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칼릴 토박이들을 진압군에서 거의 배제했다보니 그들은 전적으로 이런 공식적인 작전지도에만 의존해서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세미온과 함께 작전차에 탄 18번 홀 자경대장이 지도의 붉은 줄을 보며 정색을 했다.

“설마 올 때 이 길로 오셨습니까?”

“그럼 이 길로 오지 산꼭대기를 넘어오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세미온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들이 온 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빙하산맥을 옆으로 빙 돌아오는, 거리는 멀지만 나름 평탄한 길이었다.

“산맥에 저희들이 블리자드 시즌에 쓰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거기로 가면 하루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이틀 동안 추위에 시달리느라 돌아갈 생각만 해도 살이 떨리던 세미온은 ‘지름길’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열리는 것 같았다.

“하루면 된다고?”

세미온은 창밖의 지긋지긋한 눈밭과 지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이틀이 넘게 이 눈밭만 봐왔다보니 이젠 흰색만 봐도 골이 아플 지경이었다. 자경대장은 지도의 북쪽을 열고 손가락으로 길을 죽 가리켰다.

“정북쪽으로 죽 올라가서 이 골짜기만 지나면 됩니다. 험한 길은 100스타디아(15km) 정도밖에 안 되죠. 눈사태도 별로 안 나는 안전한 길입니다.”

자경대장의 말대로, 지도상에는 눈사태 위험지역이라는 표시도 없었다. 이틀을 혹한과 씨름한 세미온에게는 뭐니뭐니해도 가는 길을 하루나 당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혹했다. 자경대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앞에서 저희 차로 인도하겠습니다.”

이틀 동안 지도만 의지하며 이리저리 헤매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세미온은 우호적인 현지인인 18번 홀 자경대장의 인도에 가슴을 확 쓸어내렸다. 그저 그의 차를 따라기가만 하면 되니 크레바스에 빠질까 덜덜 떨 일도 없었다. 다만 밤을 꼬박 새며 달려오는 동안 계속 오르막이다보니 고산병이 와서 머리가 조금씩 아파졌다.

새벽이 되었어도 블리자드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희미한 여명 너머로 거의 수직에 가까운 빙하가 서로 마주본 채 칼날처럼 얇은 틈만 열어주고 있는 좁은 골짜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앞이 골짜기입니다. 저기 능선만 넘어가면 111번 홀까지는 15시간 정도면 될 겁니다.”

자경대장의 연락에 세미온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미온을 따라온 장교가 차창을 열어 밖으로 몸을 내밀고 계측기로 골짜기 주변 지형을 얼른 확인했다. 길 왼쪽을 따라 깊은 크레바스가 나 있기는 하지만 차가 일렬로 전진하는 데는 아무 무리가 없어보였다.

“얼음층은 단단하고 안전해 보입니다. 붕괴나 눈사태가 날 것 같지는 않네요. 새벽이라 하루 중 가장 추운 때이기도 하고요.”

살을 베어내는 듯 끔찍하게 차가운 새벽 공기가 따뜻한 차 안으로 몰려들자 놀란 세미온이 벗어놓았던 방한복을 허둥지둥 뒤집어썼다.

“설마 적 매복은 없겠지?”

“여기서요? 빙하 위라 함정 같은 것도 못 팝니다. 숨을 곳도 없고요. 까짓 경보병 놈들 나타나도 차로 그냥 짓뭉개면 됩니다. 스캐너에도 아무 것도 안 나옵니다.”

휘하 대대장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세미온의 맘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막상 골짜기 틈새에 가까워지자 상황은 그리 좋지 않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훤히 뚫렸던 길이 조금씩 좁아지고 길이 가팔라지자 50여대의 차량들이 한 줄로 모여드는 과정에서 잠시 혼란이 벌어졌다. 곡물과 식자재를 가득 실은 무거운 차들이 속도가 처지면서 전방을 맡은 경계차량 10여대와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선두의 세미온이 탄 차도 어어 하는 새 뒤따라오는 곡물 차량과 점점 멀어졌지만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에겐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봐, 바람이 갑자기 좀 세지는 것 같지 않아?”

세미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것처럼 엄청난 북풍이 블리자드를 싣고 파도처럼 몰려와 차의 정면을 때렸다. 얼마나 바람이 강한지 육중한 빙하차 트랙터의 유리창이 쾅쾅거리고 소리를 낼 지경이었다.

“에이, 씨, 무슨 날씨가 이래?”

세미온이 버럭 화를 냈다. 흰 눈보라가 시선을 막아버린 사이, 자경대장이 탄 인도차량도 짙어진 블리자드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이봐! 정지! 정지해! 앞이 안 보이잖나!”

세미온이 고함을 질렀지만 스코프에 보이는 인도차량은 아무 연락도 못 받은 것처럼 빠르게 북쪽 능선 너머로 멀어지며 사라져버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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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 1부 9, 10권은 작업중이고요, 다음주중에 심사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나저나 염병할 올레e북에 전자책은 감감무소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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