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32화 (1,027/1,132)

< -- 1032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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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의 진압군에 포위당한 헬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지만 아직까지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3천의 황실군을 이끌고 [평화 감시단] 명목으로 이곳에 주둔한 베아트릭스는 진압군 측에 반란군과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협상을 하라는 황실 명의의 빤한 권고서를 몇 번이나 써서 보냈지만 그들이 정말로 협상에 나서리라고 기대해서 보내는 건 아니었다.

그것을 빼면 그가 별로 할 일은 없었다. 모처럼 짬을 얻는 그는 매일 투창연습을 하고 잠시 미뤄놓았던 탄도학 공부도 해 가며 사실상 며칠을 할 일없이 보냈다.

그것에 비하면 엘룬은 하루가 30시간이어도 부족할 것 같았다. 워낙 군대에 관한 것이라면 눈이 두 배는 커지곤 했던 엘룬은 엘리트 느낌의 황실군과는 사뭇 다른 거친 분위기의 남부제후군에 호기심이 제대로 발동해서 요즘은 거의 그쪽 병영에 처박혀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그는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쉬라는 의사의 경고도 무시한 채 신분을 속이고 플라칼 가의 중장보병대 신병으로 모의전투 훈련에까지 참가해 베아트릭스를 기겁하게 했다. 그는 병사들과 어깨를 맞대고 스크럼을 짜며 치고받고 힘겨루기를 했지만 결국 대오가 무너지면서 가상적군에게 짓밟혀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패한 제대원들과 함께 플라칼 가의 전통대로 [돼지18번]라는 큼직한 등딱지와 돼지코를 붙인 채 창피한 얼차려를 받고 나서 분을 못 참고 씩씩대며 돌아왔다.

그를 벌주었던 사관과 고참병들은 다음날 하루 일과가 다 지나고 [황자 엘룬 리쿠의 선물]이라며 18번 딱지를 단 토실토실한 돼지 한 마리를 받고 난 후에야 그날 아침 자신들의 부대에 들어왔던 정체불명의 ‘신병’이 누구였는지를 알고 기겁을 했다. 하지만 그날 엘룬이 보인 서글서글하고 허물없는 태도에 매료된 그들은 돼지를 잡아 저녁상에 올리는 대신 ‘18번’이라는 금딱지를 붙이고 예쁘게 단장해 부대 마스코트로 삼아버렸다.

그런 엘룬에게 군사도시가 되어버린 헬홀은 거의 천국 같았다. 그는 지독한 블리자드와 추위도 아랑곳없이 오늘은 중장보병대에서 진흙밭을 뒹굴고, 다음날은 중장기병대에서 돌격 연습을 하다가 나뒹굴고, 그 다음날은 산악 경보병들과 어울려 빙벽 타는 법과 얼음스키 타는 법을 배우며 마치 놀러온 것 같은 활달한 일과를 보냈다. 의도했든 아니든 그 와중에 엘룬의 존재는 남부, 특히 플라칼 가 장병들에게 확실한 존재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정확히 누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플라칼 가 장병들 사이에선 이 ‘또 다른 플라칼’이 공포와 협박으로 다스리는 지금의 종가에 대안이 되지 않겠냐는 말이 알게 모르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베아트릭스는 엘룬이 플라칼 가 내에서 인지도가 높아지는 것이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그는 딸이 쓸데없는 정치문제에 휩쓸리지 않고 정치나 군대와 무관한 직업을 얻어 좋은 사람 만나 가정 꾸리고 드러나지 않게 사는 게 솔직한 바람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고작해야 ‘황실 정원사(?)’가 되겠다는 딸을 둔 솔이 부러울 때도 많았다.

하지만 딸의 핏속을 흐르는 황제의 피는 아이를 그렇게 놓아두지 않았다. 사람들 이끌기 좋아하고, 포부도 큰 딸아이는 아무래도 엄마 바람대로 살아 줄 것 같지 않았다. 엘룬은 벌써부터 ‘내가 플라칼 가에서 뭐 할 수 있는 게 없을까?’라며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도 중장보병대에서 한바탕 뒹굴고 온 딸과 함께 저녁을 먹던 베아트릭스는 흙투성이가 되어 테이블 옆에 쌓여 있는 플라칼 가 중장보병대 갑옷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빈 마마.”

후스가 베아트릭스의 처소 문을 똑똑 두드리며 나타났다. 딸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하던 베아트릭스는 얼른 고개를 들고 그를 맞았다. 엘룬도 그의 방문에 환히 웃음부터 보였다.

“진압군이 거의 궁지까지 몰린 것 같습니다. 조만간 움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네가 기다렸던 때가 왔군.”

베아트릭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후스가 그에게 종이 한 뭉치를 내놓았다.

“2군단에서 황빈 마마께 연판장을 보내왔습니다. 엘룬 리쿠 옹주께서 부디 앞으로도 계속 플라칼 가에 머무르시며 가문 중책을 맡아주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베아트릭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표현은 온건하지만 의도는 빤했다. 베아트릭스가 대답을 하기 전에 엘룬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저도 플라칼 가가 황상께 충성하는 좋은 가문이 됐으면 좋겠어요.”

베아트릭스가 딸을 말리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 친구들 뜻은 알겠지만 엘룬은 이제 겨우 11살이야. 덩치만 컸지 아직 애라네.”

“11살이면 될 나무인지 안 될 나무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때지요.”

“…….”

“두 분께서 확실한 답변을 주시면 플라칼 가가 분열하지 않고 뭉치는 데 큰 힘이 될 겁니다.”

후스는 이번엔 엘룬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황자분들께선 처음부터 가문의 좋은 자리를 타고나셔서 종장이 되실 수 있으셨지요. 하지만 옹주 마마께선 노력으로 그리 되실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괜한 바람 넣지 말게나, 장군.”

베아트릭스가 후스에게 살짝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엘룬이 끼어들었다.

“황상께서 출발 직전에 저한테 지금 생각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전 그분 말씀을 믿어요. 엄마 저 걱정하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 자신 있어요.”

엘룬의 대담한 말에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소심한 처신만으로는 쑥쑥 커가는 아이의 포부를 막을 수 없음을 느꼈다.

“곧 진압군과 교전이 있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 옹주 마마께서 ‘중재단’으로 저희와 함께 움직여 주셨으면 합니다.”

아이를 전장에 데려간다는 말에 베아트릭스의 가슴이 다시 덜컥 내려앉았다. 이미 호드르 산에서 실전까지 경험했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어린 딸아이에 불과했다.

“정히 그렇다면 내가 직접 데리고 있겠네. 열 살 조금 넘은 아이가 무슨 중재단이란 말인가.”

“그럼 2군단에 이번 전투를 두 분께서 지켜보실 것이라 전하겠습니다.”

후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베아트릭스는 혼자 들떠있는 딸을 보며 무거운 마음을 달랬다. 딸은 황제, 그리고 멀리 올라가면 대신관의 후손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핏줄을 낳았는지를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 며칠 거의 굶다시피 했던 111번 홀의 진압군 장병들은 갑자기 늘어난 저녁 배식량을 보았을 때부터 어떤 일이 있을지를 직감하고 있었다. 전날 저녁, 군장을 모두 갖춘 장병들은 기름 범벅의 양고기스튜와 모처럼 푸짐한 빵을 배급받고 터지도록 배를 채웠다. 언제 다시 그런 식사를 받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전날 미리 준비해 놓은 군장을 짊어지고 길을 나선 진압군 장병들의 앞에는 지평선까지 휑하니 뚫린 빙하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평소 그래왔듯, 장교들이 명령하는 대로 묵묵히 그 얼음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헤즈를 따르는 1군 6만 대군은 보병 5만에 각종 지원이나 수송을 담당하는 1만의 지원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111번 홀에서 헬홀까지는 이론상 걸어서 꼬박 4일 정도의 거리였지만 그것도 아무 문제도 없이 전군이 블리자드 속에서 하루 15시간의 강행군에 성공한다는 전제하에서였다.

지휘부가 가장 힘들다고 예견한 첫째 날은 111번 홀에서 산맥의 밑자락까지 가는 탁 트인 길이었다. 사방이 개활지다보니 지휘부의 걱정도 컸지만 운 좋게도 블리자드는 평소보다 조금 약했고, 걱정에 비하면 비교적 순조롭게 전진이 이루어졌다. 백여 대의 빙하차들이 앞장서며 블리자드를 막아주는 가운데 보병들은 제대별로 12X10의 사각형 대오를 이루고 얼음 속을 침착하게 나아갔다. 나름 잘 훈련된 플라칼 가 보병들은 추운 바깥쪽과 그나마 나은 안쪽이 시간 맞춰 자리를 바꿔가며 힘을 비축하는 데도 익숙했고, 고통스런 상황을 참아 넘기는 데도 도가 튼 거친 군인들이었다.

델루지 가 병력도 ‘방계 곁가지 가문’에게 질 수 없다는 경쟁의식이 동원되면서 크게  뒤처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애당초 이런 추운 곳에 얼씬할 일도 없었던 세닉 가의 보병들이었다. 이렌느는 카나르 공에게 ‘더운 곳에 살던 병사들이니 너무 추운 곳의 전투에는 동원하지 않겠다.’는 당부를 몇 번이나 했었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그런 약속이 지켜지기는 어려웠다.

예르마크는 그 약속을 들어 세닉 가 군대는 후방의 홀에 남는 수비군으로 편성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헤즈는 다른 가문과의 형평성 문제라며 그의 부탁을 거절해버렸다. 그가 해 준 호의라고는 세닉 가 군대를 가장 무난하다는 행군 대오 중간에 배치한 정도였다.

둘째 날은 첫째 날보다 블리자드는 훨씬 심해졌지만 산맥을 옆에 끼고 전진하는 덕분에 서북쪽에서 몰아치는 황소 눈바람은 피하면서 나아갈 수 있었다.

다만 둘째 날 언젠가부터 웬 불청객이 하나 들러붙어 진압군의 속을 불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바로 세미온에게 참패를 안겼던 델루지 가 산악 경보병대였다. 짤막한 빙하스키와 이곳 날씨에 최적화된 방한복을 갖춘 그들은 보란 듯 산 중턱을 따라 나란히 나아가며 안 그래도 속이 불편한 헤즈가 먹는 족족 체하게 만들었다. 그 얄미운 적들은 산 밑의 진압군이 쉬면 함께 쉬고, 전진하면 함께 나아가면서 진압군 장병들이 모르고 스캐너를 볼 때마다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들은 심지어 밤중에 모닥불까지 피워놓고 연기를 풀풀 내며 식사준비까지 하고 차를 끓여먹었고, 가끔 거리가 가까워지면 큰 함성으로 인사까지 건넸다.

정말 날씨만 좋고 기병대만 있다면 중장기병대를 풀어서 벌레 잡듯이 싹 밟아버리고 싶은 게 헤즈의 본심이었지만 얼어 죽는 것만 겨우겨우 면하고 있는 둔해터진 보병만 수만을 거느린 처지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첫날 ‘생각 외로 선전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 세닉 가도 이날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거의 열 명에 한 명 꼴로 손발과 얼굴에 심각한 동상을 입어 움직일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고, 성한 병사들도 제대로 걷지 못해 결국 선봉대인 플라칼 가의 발목을 붙들었다. 결국 둘째 날의 목표한 숙영지 터에 도착한 건 처음 예상시간보다 3시간이나 늦어진 후였다.

3일차, 헬홀에 4분의 3정도 다가간 진압군 1군은 선봉을 이룬 플라칼 가 보병대 3만, 중간의 델루지 가 보병대 2만, 그리고 후미의 세닉 가 보병대 5천과 지원부대5천이 산맥 동쪽 사면을 따라 길게 뱀처럼 이어져서 행군하고 있었다.

헤즈는 하는 수 없이 셋째 날에는 느려터진 세닉 가를 행군의 제일 후미로 돌려버렸다. 원칙에도 어긋나는 위험천만한 결정이었지만 세닉 가 하나 때문에 헬홀의 공략이 늦어진다면 자칫 10만대군 전체가 블리자드 속에서 산 채로 굶어죽을 판이었다.

찜찜한 건 어제 들러붙었던 산악 경보병들이 오늘 오전부터 스캐너에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놈들이 제정신이라면 주변 어딘가에 있는 건 분명했지만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몰라, 처져서 얼어 뒈지면 지 탓이야.”

뜨뜻한 빙하차의 온풍구 앞에서 느긋하게 젖은 발을 녹이고 있던 헤즈는 부대가 길게 늘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딸 세미온에게 짜증스레 말했다. 첫 전투에서 큰 패전을 겪고 돌아온 세미온은 그 일 이후 많이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헤즈는 참패를 하고 돌아온 맏딸을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진압군 입장에선 뼈아픈 패배였지만 젊은 의욕이 과하던 종손에게는 따끔한 약이 된 것도 같아보였다.

세미온은 창을 살짝 열고 지휘부 빙하차 밖을 내다보았다. 블리자드가 너무 강해서 대낮인지 해 지기 직전의 어스름인지도 당최 구분이 되지를 않을 정도였다. 그저 희뿌연 스카이라인 너머로 전진로의 왼쪽을 담처럼 가리고 있는 높은 빙하산맥의 실루엣이 보일 뿐이었다. 이 산맥이 바람방향을 감싸주는 덕분에 이들은 세미온이 남쪽의 골짜기에서 겪었던 최악의 강풍은 피해가며 전진할 수 있었다.

그는 지휘부 옆을 지나가는 보병들을 힐끔 보았다. 침낭을 고친 두꺼운 방한복을 입은 보병들이 양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묻은 채 뒤뚱뒤뚱 걷는 모습들이 군인이라기보다는 털 빠지기 직전의 뚱뚱한 새끼펭귄들 같았다.

“반란군이 언제쯤 반격을 해 올까요?”

“글쎄, 아마도 우리가 행군하느라 진이 다 빠진 마지막 날을 노리고 있겠지. 그편이 자기네한테는 행군할 거리가 줄어드니 유리하니까.”

“내일이라는 말 어렵게 하지 마세요.”

세미온이 툴툴거리며 차에 달린 스캐너를 보았다. 하지만 이런 혹한과 블리자드 속에서 스캐너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배운 세미온은 이젠 기계를 맹신하지 않았다. 게다가 혹한과 블리자드 때문에 차량에 달린 고출력의 대형 기계를 빼고는 병사와 지휘관들의 개인 할룩스나 스캐너도 모조리 먹통이었다.

목표로 한 숙영지가 슬슬 가까워질 무렵, 평소 저녁때처럼 슬슬 블리자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젠 아무리 [털 벗기 전 새끼펭귄] 모양으로 행군하는 보병들도 도저히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멀리 북쪽에서 눈가루를 하얗게 날리며 달려오는 정찰대 트라이크가 보였다. 빙하 위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다보니 육중한 빙하차 아니면 저 기계가 유일한 동력 운송수단이었지만 그나마 보급이 원활치 않아 3군단이 놓고 간 몇 대를 어렵게 주워 정찰대에서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젠장, 날씨가 웬수야.”

헤즈가 빙하차의 할룩스를 두들기며 투덜거렸다. 한 시간 정도 앞장서가고 있는 정찰대의 할룩스까지 먹통이 되어 결국 직접 연락을 전하러 달려온 모양이었다. 온몸이 눈과 얼음조각으로 뒤덮여 눈사람 모양이 된 정찰병이 따뜻한 빙하차 안에 뛰어오르며 살았다는 듯 숨을 한 번 푹 내쉬었다.

“전방에 적군입니다! 빙하산맥이 끝나고 평원과 만나는 곳에 집결해 있습니다! 1시간 정도 후에 우리 선봉과 조우하게 됩니다.”

“엥?”

눈이 휘둥그레진 헤즈가 얼른 지도를 보았다. 적이 당연히 행군 마지막 날 공격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던 그는 적이 서둘러 나왔다는 말에 갑자기 웃고 싶어졌다.

“대충 얼마나 되냐?”

“블리자드 때문에 정확히 파악은 되지 않지만 델루지 가 6군단이 주력인 것 같습니다. 세데스 경의 깃발을 보았다는 정찰병이 있었습니다. 약 1만 5천 정도로 추정됩니다.”

헤즈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에 후스와 그 일당을 끝장내주고 싶었지만 이번 상대는 그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쫓아다니던 산악 경보병 놈들은 어디 갔는지 찾았냐?”

헤즈는 교전 명령을 내리기 전, 하루 종일 찜찜했던 내용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들에게 제대로 데었던 세미온이 스캐너를 확인하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오전부터 내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선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는 놈들이니 이미 전방의 본대에 합류했거나 우리가 교전할 때 후방을 치려고 준비 중일 겁니다.”

세미온은 스키와 얼음신을 번갈아 바꿔 신어가며 빙판 위를 종횡무진 누비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플라칼 가와 델루지 가 보병대는 조금씩 폭을 넓혀 포진하면서 전진하도록 해. 우리 병력이 2배가 훨씬 넘고 아직은 상태가 나쁘지 않으니 충분히 꺾을 수 있다. 세닉 가는 상태가 안 좋으니 보급부대나 지키고 있으라고 해.”

헤즈가 여유만만하게 양손을 비볐다. 세미온이 후미에서 세닉 가와 함께 따라오고 있는 보급부대를 가리켰다.

“사라진 경보병 놈들이 위장포로 감추고 숨어서 우리 주력 보병대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후미를 치는 건 아닐까요?”

“그래 봤자 세닉 가하고 지원 병력 합쳐 1만이나 돼. 고작 경보병 2천으로 중장보병 1만을 친다고? 경보병은 야전에선 그냥 덜 무장한 핫바지들일 뿐이야. 그리고 위장포로 감추면 스캐너는 피할지 몰라도 둔해져서 제대로 못 싸워. 아직 많이 배워야겠구나.”

헤즈는 산악경보병대에 단단히 트라우마가 걸려버린 딸에게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산악경보병대가 험준한 산악이나 치고 빠지는 빠른 기습전에선 전문가일지 몰라도 견고한 대오의 힘으로 맞붙어 싸우는 야전에선 중무장한 중장보병대의 상대가 아니었다.

“숫자는 우리 3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안심하지는 마라.”

헤즈가 각 대대 지휘부인 빙하차를 연결해 일렀다.

“병과 사관 대부분은 여기 토착민 출신이라 추위에 대단히 강한 놈들이다. 추위에 대비한 무장도 우리보다 나아.”

공격명령을 받은 1군의 5만여 중장보병들은 전열이 속도를 늦추고 후열이 속도를 붙이며 하나 둘 전투 대오를 이루기 시작했다. 힘겨운 행군을 이어가던 베테랑 사관들은 내일 더 지쳤을 때 싸울 바엔 차라리 오늘 싸우는 것이 낫다며 병사들을 몰아붙였고, 추위에 얼어붙어 있던 병사들도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였다.

“전진! 전진! 속도 붙여!”

일렬로 행군하던 대군이 좌우로 길어지면서 ∧자로 쐐기꼴을 만들기 시작했다. 몰아치는 블리자드로 전투를 벌이기엔 최악의 상황이지만 상대가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워낙에 둔중한 중장보병대의 표준 무장에 코트 모양의 무거운 방한복까지 입은 보병들은 방패와 무기를 빼들고 뒤뚱뒤뚱 전진해 나아갔다. 칼과 방패를 든 양팔을 빼면 사실상 몸을 거의 움직일 수도 없는 지경이지만 밀집대오로 밀어붙여 싸우기만 한다면 큰 문제도 없었다.

대오를 거의 완성한 남부보병들은 그동안 이틀 동안 옆에서 강풍을 막아 준 빙하산맥 밑을 막 빠져나가 사방이 탁 트인 광활한 빙하지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순간 그들을 맞아준 건 사람을 옆으로 날려버릴 듯 몰아치는 강력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시야도 산맥에 보호를 받을 때보다 확 좁아졌다.

“젠장, 적이 보여야 말이지!”

전진하던 일선 장교나 사관들이 일제히 불만을 터뜨렸다. 늦은 오후의 어스름과 블리자드가 겹치면서 시계는 10척(3m) 앞도 제대로 분간이 안 될 만큼 최악이었다. 각 대대의 지휘부 빙하차에 달린 스캐너에는 정면에 자로 잰 듯 일렬로 대오를 이룬 적군의 거리와 모습이 보였지만 막상 일선에서 전진하는 장병들의 눈에는 적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본부에 거리 얼마나 남았나 물어보고 와!”

답답해진 일선 제대장들이 거의 2, 3분에 한 번 꼴로 빙하차에 전령을 보내며 짜증을 냈다. 스캐너도 말을 안 듣고, 할룩스도 먹통이니 불쌍한 전령의 두 다리에 모든 것을 의지해야만 했다.

답답하기는 말 대신 빙하차에 타고 대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는 빙하차가 앞장서며 보병들의 방향을 잡아주었지만 전투를 위해 보병들을 앞세우자 바로 탈이 나기 시작했다. 블리자드에 할룩스와 스캐너 먹통까지 겹치면서 수만의 보병들은 집단으로 화이트아웃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이리저리 방향이나 속도를 못 잡고 헤매다가 엉뚱한 곳에서 다른 제대와 만나 적인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너무 앞장서거나 혹은 뒤처져서 대오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뒤따라가는 지휘차량은 쉴 새 없이 전령을 내보내고 사이렌을 울려 경고를 하고 부대에서 보내오는 전령들을 확인하느라 정신 차릴 새가 없을 정도였다. 여차저차 헤매기는 했어도 일선 대대장과 일선 지휘관들의 생고생 덕분에 5만 대군이 최소한 뿔뿔이 흩어지지는 않고 적을 향해 꿋꿋하게 나아갔다.

“1스타디아 남았다!”

대대장들이 빙하차의 확성기에 대고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빙하를 거대한 장벽처럼 가로막고 선 적군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흰 방풍망토를 입은 그들은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거의 구분이 되지를 않았다. 그저 바람 속에서 길게 줄을 지어 가늘게 펄럭거리는 흰 천과 적의 군데군데 솟아 있는 6군단의 군기만 보일 뿐이었다. 적의 존재는 하루 동안의 행군에 지쳐 있던 그들의 다리에서 피로감을 삭 달아나게 했다.

적당한 거리가 왔음을 확인한 헤즈가 그들에게 돌격령을 전했다. 그와 동시에 각 대대장이 탄 빙하차에서 돌격을 알리는 사이렌이 길게 울렸다.

“돌격!”

“으아아아!”

적과 제일 가까이 있던 중군의 보병들을 선두로 5만의 보병대가 눈앞을 가리는 블리자드를 뚫고 맹렬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소처럼 동료와 어깨를 바싹 맞댄 채 방패로 가슴과 몸통을 가리고 큰 함성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흰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 나갔다.

“투창!”

때마침 적진 쪽에서 몇 발의 투창까지 날아와 이들의 흥분을 자극했다. 동료의 방패에 쿵 소리를 내며 박히는 많지 않은 투창은 이들에게 공포를 주기보다는 흥분제를 먹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짙은 눈보라 때문에 전 전선에 걸쳐 얼마나 많은 투창을 쏘고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돌격! 돌격! 적을 무너뜨려!”

맹렬한 기세로 돌격하던 보병들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건 선봉대가 눈보라 속에서도 적의 형체를 거의 구분할 수 있는 50척(15m) 남짓 거리까지 도착해서였다. 되짚어보니 몇 발의 투창이 산발적으로 날아온 것을 빼면 적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어엉?”

눈치 빠른 사관과 고참병들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에 주춤거리기 시작한 때,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돌진한 말단 보병들이 사방에서 쿵 소리를 내며 ‘적군’과 정면충돌하고는 눈바닥에 볼썽사납게 얼굴부터 철퍼덕 엎어졌다.

“뭐야, 이거?”

‘적군’을 끌어안고 엎어졌던 병사들이 기겁을 하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들이 끌어안고 엎어진 건 흰 방수포와 발열 팩을 엮어놓은 나무막대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이들에게 투창을 던지고 후다닥 달아나고 있는 많지 않은 쿠데타군들이 보였다. 이곳에서 5만의 대군을 맞은 건 많아야 몇 백에 불과한 발 빠른 현지인 보병들과 흰 천, 발열 팩을 머리에 쓴 허깨비들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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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바깥도 추운데 엄청 추운 상황으로 더 춥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

(여름에 보시는 분들께는 나으려나요???)

이번편 까메오 출연이 예정되어 있던 카렐은 요즘 급한 일거리가 생겨서 잠시 출연을 연기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그나저나 염병할 올레e북은 3월에나 오픈된다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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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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