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34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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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테르의 죽음은 헤즈에게도 당혹스런 사건이었다. 에우테르는 아버지 예르마크를 잡아놓는 유용한 인질이었다. 비정한 종장 이렌느 경도 조카의 죽음 자체엔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겠지만 그가 자신의 딸 세미온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딱히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없었던 플라칼 가로서는 내심 이번 일로 일부러 황제의 심사를 뒤틀어 선제공격을 해 오기를 바랐으니 황실은 신경 쓸 이유도 없지만, 생각보다 일이 심각해지면서 자존심이 상한 세닉 가 사람들이 반발하며 나섰다가는 이렌느 경이 정치적인 부담을 느낄 것이 분명했다.
에우테르의 죽음을 놓고 발을 동동 구르던 헤즈는 다행히 이곳의 세닉 가 무장들이 자신들의 본가와 예르마크 경에게는 아직 연락을 못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보고를 받자마자 헌병들을 풀어 그 일대를 폐쇄했고, 에우테르의 죽음을 본 무장과 부상병들을 재빨리 격리해 소문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본가의 아버지에게 먼저 연락했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플라칼 가 종장 카나르 공은 에우테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세닉 가에 서둘러 사람을 보냈다. 진압군 2군에서 4만 대군을 이끌고 있는 예르마크가 딴마음을 품게 할 수는 없었다. 예르마크의 자식들 중 코리온은 그의 손 밖이지만 다행히 딸 상지가 아직 루게에 있었다.
제국회의 직전, 헤네티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대공주와 동생 에우테르를 지키느라 어깨와 팔이 심하게 부러졌던 상지 대군은 두 번째 수술을 받고 하루 한 번씩 대공주와 함께 루게의 공공 병원을 찾아와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상지도 원래 종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었지만 가족을 루게에 억류하고 남편과 막내아들을 전장에 내보낸 시누이 이렌느의 처사에 화가 난 대공주는 그 뒤로 종가에 발길을 끊어버리고 일부러 먼 공공병원까지 다니는 수고를 사서 하고 있었다.
덕분에 카나르 공이 급파한 팀은 대공주를 찾느라 그의 집과 종가 주변에서 몇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일반인으로 북적대는 공공병원 한쪽에서 경호원만을 대동한 채 딸 상지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대공주를 찾아낼 수 있었다.
지난밤 이유도 없이 잠을 설쳐 데데해진 얼굴의 대공주는 신경이 잔뜩 곤두선 얼굴로 대사에게 삿대질을 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대공주는 예고도 없이 병원까지 불쑥 찾아와 마치 포위하듯 자신과 딸을 에워싸고 선 플라칼 가 대사와 무관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말도 없이 병원까지 쫓아와서 뭐 하는 수작이냐고! 지금 줄 서 있는 거 못 봤어?”
“치료는 잠시 미루시고 당장 칼릴에 가 주셔야겠습니다. 최고제후님의 명입니다.”
부상으로 진압군 징집을 면했던 상지는 이 몸으로 전장에 나가라는 말에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딸의 병간호를 하고 있던 레곤 대공주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네놈들 눈깔이 삐었냐! 팔도 못 드는 애를 보고 전장에 나가라니!”
“직접 싸우시라는 건 아닙니다. 연락관 역할을 부탁하셨습니다. 전장에 나가 계신 예르마크 경과 에우테르 대군에게도 힘이 될 것 같아서 말이죠.”
‘연락관’이라는 말에 대공주의 얼굴이 더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제위전쟁 당시에도 ‘연락관’ 명목으로 연합군에 인질로 끌려갔던 넷째 건연 대군이 병으로 어처구니없이 죽었던 기억이 그의 머리에 퍼뜩 떠올랐다.
그때,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온 종장 이렌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플라칼 가 대사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경을 쓰이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상지대군을 잠시 칼릴에 모셔갈까 해서 왔는데 어쩌다 그쪽까지 연락이 갔군요.”
“내 허락도 안 받고 멋대로 가문 사람을 데려가려 하다니?”
“공적인 임무로 가시는 게 아니고 사적인 일로 가시게 되어서요.”
대사가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고 웃었다.
“최고제후께서 직접 명하셨습니다. 예르마크 경께서 부쩍 향수를 느끼셔서 따님께서 함께 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분께서 곧 연락하실 텐데 다른 일로 약간 시간이 어긋난 듯합니다.”
“……다음부터는 내게 미리 알려주시도록 그분께 알리게. 이건 예의가 아니니.”
눈치 빠른 이렌느는 플라칼 가의 속셈을 바로 눈치 챘지만 차마 대놓고 막을 수는 없었다. 이미지 관리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그가 워낙 북적거리는 공공병원에서 함부로 낯을 붉히며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약간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정도로 물러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군, 이 사람들을 따라가십시오.”
이렌느는 무관들에게 상지를 데려가라며 손짓하고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이전에도 이미 인질 생활을 하면서 동생 건연의 죽음까지도 보았던 상지는 또다시 인질로 잡혀간다는 데 당황한 듯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이렌느가 오며 나름 안심하고 있던 대공주는 그마저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격분하며 얼른 딸의 앞을 막아섰다.
“젠장! 어미가 안 된다는데 누가 멋대로 데려가고 말고 허락을 해!”
“가문을 위한 것이니 대공주께선…….”
대공주는 자신을 옆으로 밀어내려는 이렌느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염병할! 보내려면 네 새끼나 보내! 니가 종장이라고 남의 새끼 맘대로 팔아먹어도 되는 줄 알아!”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철없는 어린애도 아니시고…….”
이렌느가 짜증을 내며 대공주를 다시 밀어내려 했지만 키는 크지 않아도 육중한 체구의 대공주는 이 꺽다리 시누이를 힘으로 거칠게 밀어내며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못 데려가! 누가 내 새끼 멋대로 데려가!”
악이 뻗친 대공주와 이렌느, 그리고 플라칼 가 대사 사이에 옥신각신 싸움이 벌어지면서 병원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플라칼 가 무관들이 둘이 멱살잡이를 하고 있는 사이에 상지를 데려가려 했지만 대공주의 개인 경호원들이 다시 힘으로 그들을 막아서면서 일이 더 커졌다. 루게 사람들 사이에선 나름 존경받는 원로인 대공주와 종장이 공공장소에서 볼썽사납게 싸우고 있는 모습에 구경꾼까지 몰려들면서 일은 점점 커졌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반항하는 대공주의 딸을 플라칼 가에서 억지로 끌고 가는 건 지금까지 이미지 하나로 정치를 해 온 이렌느로서는 부담스러웠다.
“지금은 때가 별로 좋지 않으니 일단 가게. 내 나중에 설득해서 보내 줄 테니.”
한 발 물러난 이렌느가 플라칼 가 대사에게 일렀지만 이미 시간을 많이 허비한 대사는 맘이 급했다. 에우테르의 죽음이 알려지기 전에 상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촉박해서 지금 모셔가야만 합니다.”
투닥거리고 있는 동안, 대공주의 할룩스가 갑자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딸을 데려가려는 대사와 멱살잡이를 하고 있는 대공주는 받을 정신이 없었다. 상지가 마지못해 한 손으로 엄마의 할룩스를 대신 받았다.
“지금 말고 나중에…….”
다짜고짜 할룩스를 끊으려 했던 상지가 부들부들 떨며 손을 떨어뜨렸다. 그는 앞에서 자신을 막아서고 있는 엄마의 등을 움켜잡았다.
“어, 엄마…….”
“넌 가만히 있어!”
“엄마, ……제발 그만 해요.”
상지가 말렸지만 화가 난 대공주는 다시 무관들에게 발길질을 하며 성질을 참지 못했다.
상지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만 해요! 에우테르가 죽었다고요!”
상지의 외침에 병원 대기실은 일순간 정적에 잠겼다.
“어젯밤에 플라칼 가 종손 년한테 채찍으로 맞아 죽었다고요!”
대공주에게 멱살이 잡혀 있던 플라칼 가 대사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고, 그제야 플라칼 가의 속셈을 알아챈 이렌느는 주변의 분위기부터 얼른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가문 영지민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대사가 더듬더듬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 그게……동생의 장례 문제를 논의하고자 상지 대군을 조용히…….”
“닥치고 나가시오, 빨리!”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이렌느가 짐짓 엄한 표정으로 플라칼 가 대사에게 나가라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는 나가고 싶어도 대공주에게 멱살이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힘으로 대공주를 떨구려 했지만 귀신처럼 파랗게 얼어붙은 대공주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찢어죽일 놈!”
이성을 잃은 대공주의 주먹이 플라칼 가 대사의 뺨을 단번에 으스러뜨려놓았다. 대공주의 주먹에 얻어맞은 대사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대공주는 넘어진 대사를 깔고 앉아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러대며 울기 시작했다.
“내 새끼 어떡할 거냐! 이 망할 놈아!”
당황한 이렌느가 대공주를 말리려 했지만 도리어 마구 휘둘러대는 그의 주먹에 맞아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그는 재차 대공주를 뜯어말리려다가 도리어 멱살이 붙들렸다.
“이 개 같은 년! 도대체 내 새끼를 몇이나 죽여야 니가 만족할래!”
이성을 잃은 대공주가 멱살이 잡혀 버둥대는 시누이의 턱을 박살을 내 놓았다.
대공주의 오열과 얻어맞는 대사의 비명으로 대기실이 난장판이 된 새 플라칼 가 무관 한 명이 다친 상지의 입을 틀어막고 끌고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앞을 막아 선 건장한 시민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어딜 가? 또 때려죽이려고?”
시민들을 밀치고 나가려던 무관까지 시민들에 밀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존경받는 가문 원로의 아들이 전사도 아니고 다른 가문 종가 사람에게 맞아죽었다는 말에 자존심이 크게 상한 시민들까지 격분해 싸움에 뛰어들면서 병원 전체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참모장 클리멘트와 함께 4만의 진압군 2군을 지휘하던 예르마크 경은 목적지인 헬홀에 도착할 때까지도 아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플라칼 가와 델루지 가에서 온 측근들이 그에게 가는 통신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고, 심지어 세닉 가에서 온 참모들조차 종장 이렌느의 지시에 따라 그 일을 함구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아들의 죽음을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 종장인 누나가 아내 대공주와 딸 상지, 임신한 에우테르의 아내를 집안에 가두었다는 것도, ‘가문 사람을 또 인질로 갖다 바쳤다가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분노한 수천의 사람들이 진압군 철군을 요구하며 그 주변에 운집해 있다는 사실도, 황제가 황실을 모독한 플라칼 가와 세닉 가에 사실 여부 확인을 명하는 칙서를 보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게 어찌되신 겁니까?”
예르마크는 자신보다 몇 시간 먼저 도착해 숙영지 작업을 끝냈어야 할 헤즈와 플라칼 가 보병대가 눈보라와 빙하 속에서 병든 닭처럼 떨고 있는 모습에 기가 막혀하며 물었다.
“대체 언제 도착하신 겁니까?”
“우리도 방금 도착했소.”
군데군데 그슬린 궁색한 사령부 막사 안에서 떨고 있던 헤즈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근데 왜 이네들뿐입니까?”
예르마크의 물음에 헤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6만이 출발했던 1군은 중간에 뭘 빼먹었는지 2만으로 푹 줄어 있었고 자신의 세닉 가 보병대는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숫자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투 한 번 치르지 않은 병사들은 이미 동상과 피로, 굶주림으로 유령 같은 몰골들이었다. 2군이 바로 오지 않았더라면 반란군의 선제공격으로 이미 박살이 났을 꼴이었다.
“어디 이 꼴로 전투에 내보내기나 하겠습니까?”
사령부 막사 밖으로 보이는 패잔병 같은 1군 병사들의 몰골에 예르마크가 혀를 찼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4만은 중간에 돌려보냈소.”
헤즈가 동상으로 퉁퉁 부은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식량과 숙영지가 너무 부족해서 차라리 거둘 수 있는 놈들만 거둬서 끌고 오는 게 낫겠더군.”
예르마크가 얼굴을 다시 찡그렸다. 헬홀의 반란군은 많아야 2만 남짓이니 사실 6만의 진압군으로도 충분하고 남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무리해서 10만의 대군을 몰고 오자고 했던 건 당초 헤즈 쪽이었다.
“식량은 주고 돌려보내셨겠죠?”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돌아가는 놈들 먹일 게 어딨소? 대충 죽지 않을 만큼만 줬지.”
예르마크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헤즈가 죽지 않을 만큼만 줬다는 건 거의 빈손으로 돌려보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4만 중 몇이나 무사히 111번 홀로 돌아갈 수 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빙하 위에 수많은 시체들을 남겨두고 거지떼처럼 비틀비틀 행군하는 끔찍한 광경이 스쳤다.
헤즈는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빙하 위로 나섰다. 이곳도 따져보면 끔찍한 혹한이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사방에 흰색밖에 안 보이는 빙하 위에만 있다가 그나마 뿌연 블리자드 너머로 헬홀의 모습이 희미하게 시작하니 공기가 좀 달라진 것도 같은 느낌이었다.
“정찰병들 보고가 놈들 홀 안에서 꼼짝도 않고 있는 것 같소. 빙하 위는 깨끗한 것 같소.”
그는 참모장 클리멘트를 돌아보며 사뭇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당장 전투 준비시키시오. 헬홀로 내려갈 테니까.”
“예에?”
클리멘트가 기가 막혀 다시 물었다. 헤즈가 막 데려온 병력은 제대로 걸을까 싶은 거지꼴이고 그가 데려온 4만의 2군도 아직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헤즈는 블리자드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중천의 해와 시계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이 맹추위에 1분이라도 더 떨어봤자 전투력만 더 떨어지지 뭐요, 우리가 숫자도 압도적이니 일단 밀어붙여서 헬홀에 최대한 가까이 붙는 게 상책이요. 한 발짝이라도 가까워지면 한결 덜 추울 테고.”
“그런데 어디로 공격하시려고요?”
“지난번 산악경보병 놈들이 통제소를 습격하기 위해 무너뜨린 빙하 경사로로 내려갈 수 있을 거요. 놈들이 뚫은 길 우리가 이용해 줘야지. 플라칼 가가 선봉에 설 테니 2군이 가져온 방한복은 플라칼 가 보병대에 나눠주시오.”
헤즈는 뚱한 얼굴로 서 있는 예르마크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워낙 거짓말을 잘 못하는 솔직한 사내다보니 표정에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나곤 했지만 지금 그의 표정을 보니 아직 아들에게 벌어진 일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헤즈는 짐짓 아무 일 없는 척 서류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부마께선 2군을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수고하셨소. 내 헌병대를 호위로 붙여 줄 테니 111번 홀로 돌아가시구려.”
“예에? 뭐라 하셨습니까?”
예르마크 경은 자신의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전투에 나가지 말라고요?”
헤즈는 그를 짜증스레 쳐다보며 다시 반복했다.
“여기 전투는 저와 클리멘트 참모장이 처리할 테니 빙하차 타고 돌아가시라고요.”
예르마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며 돌아섰다. 어쨌든 끼고 싶지 않았던 전투였고, 돌아가라고 하니 한편으로는 홀가분하면서 한편으로는 뭔가 찜찜했다. 그는 헤즈에게 형식적인 인사만 휙 건네고는 막사를 나가버렸다.
“아니, 저렇게 돌려보내도 되는 겁니까? 지금 막 싸우실 거라면서요?”
참모장 클리멘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사실 예르마크라는 걸출한 무장을 전투 직전 내보내는 것이 아까워 뱃속이 쓰라릴 지경이지만 세닉 가를 남부연합군 내에 계속 잡아두기 위해선 한 발 물러나는 게 낫겠다는 카나르 공의 판단이었다.
“가문 헌병들이 함께 따라갈 거야. 여기서 함께 전투 벌이다가 아들 소식이라도 들으면 뭔 짓을 벌일지 알아? 최소한 돌아가는 동안에는 귀를 막아놓을 수 있으니 그편이 낫지.”
헤즈가 막사 창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4만의 병력이 헬홀에 공격 준비를 바삐 갖추는 가운데 예르마크 경 혼자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와 111번 홀로 돌아갈 빙하차에 올라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헤즈에게 충성하는 플라칼 가 헌병들 몇이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쫓아내니 속이 다 후련하네.”
예르마크 일행이 남쪽으로 멀어져가는 것을 확인한 헤즈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모르니 예르마크 그놈이 자기네 제후군에 직접 연락하지 못하게 할룩스 차단해.”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클리멘트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예르마크가 행여 아들의 죽음을 알았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33년 전에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으니까.”
부장에게 막 전군 출동 준비를 명하려던 헤즈는 딸 세미온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에 일단 입을 다물었다.
“왜 그리 호들갑이야?”
“아버지, 헬홀에서 황실 사자가 막 왔는데 어쩌죠?”
“지금? 에이씨. 왜 하필.”
헤즈는 시계를 재차 보며 겨우 차려입은 방한복을 얼른 벗어던졌다. 몇 시간 후 해가 지고 깜깜해질 테고, 이 빙하벌판에서 추위에도 약한 진압군에겐 점점 더 불리해질 터였다. 이젠 하룻밤을 지낼 때마다 전력이 10분의 1씩은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좀 오라고 그래.”
잠시 후, 사령부 막사에 든 거한의 모습에 지레 놀란 헤즈는 하마터면 의자 뒤로 넘어갈 뻔했다. 7척(210cm)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키와 덩치의 에키트 족 전사가 지난 불로 너덜너덜해진 사령관 막사의 문을 통나무만한 굵은 팔로 거세게 확 열어젖히고 들어서자 문짝의 경첩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뚝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익.”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몰아치는 블리자드에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당황한 근위병들이 헐레벌떡 달려들어 덜렁거리는 문을 자리에 끼웠지만 몰아치는 바람이 부서진 문을 계속 밀어붙이는 통에 근위병들은 팔자에 없이 문짝을 계속 붙들고 벌을 서야만 했다.
루스탐을 따라온 십여 명의 건장한 에키트 족들은 사령부 막사 밖에 건들거리고 서서는 지나가는 애먼 남부 보병들에게 괜스레 으르렁거리고 시비를 걸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이끌었다. 그들 덕분에 ‘괴물들 구경하러’ 모여든 남부보병들은 자신이 곧 상대할 적이 누군지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었다.
“어허, 돈 많은 남부제후군 사령관의 막사가 어쩌다 이리 되셨습니까?”
루스탐이 부서진 문짝을 툭툭 차며 뻔뻔스럽게 물었다. 자존심이 상한 헤즈가 짜증스레 물었다.
“어허, 그대가 왜 왔는가? 반란군 일당의 항복문서를 대신 들고 와 준 것이라면 내 기쁘게 받아주겠네.”
“황실 중재사절이신 베아트릭스 플라칼 황빈이며 대장군님의 서한을 가져왔습니다.”
루스탐이 헤즈에게 뚜벅뚜벅 다가가 품에서 봉인이 된 편지를 꺼내어 헤즈에게 넘겨주었다. 황실 사자라는 것을 나타내듯, 그는 헤즈 앞에서 고개만 한 번 까딱했을 뿐 전혀 몸을 낮추지 않았다. 루스탐의 어깨에 걸린 육중한 도끼에 지레 기가 죽은 헤즈는 얼른 편지만 받아들고 재빨리 물러났다. 봉투에는 [지엄하신 황상을 대리하는 황빈 베아트릭스 플라칼이 플라칼 가의 헤즈 플라칼에게.] 라는 서명이 되어있었다.
‘옛날엔 내 앞에서 설설 기었던 년이 감히 어딜…….’
헤즈가 입을 씰룩거렸다. 맘 같아서는 이 뻔뻔한 편지를 저자의 눈앞에서 북북 찢어버리고 싶지만 이곳에 와 있다는 3천의 최정예 황실군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이 ‘먼저 덤빈다면 기꺼이 싸우겠지만’ 일부러 덤벼들어 적을 만드는 건 바보짓이었다.
헤즈는 서한을 꺼내어 대충 읽어보는 척했다. 물론, 내용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받았던 그대로였다.
“이미 여기까지 와 있는데 교전을 중단하고 평화협상을 하라니 말이 되는가? 우린 수배자 세데스와 가문에 반역을 저지른 후스 놈만 잡으면 돼. 게다가 자네도 와서 알겠지만 여긴 너무 추워서 도저히 오래 머물 수가 없는 곳이야.”
“그 자리에서 이동하지 말고 협상에 임하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이라도 되돌아가시면 혁명군 측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루스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헤즈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럼 공격 안 할 테니 우리 군대를 헬홀 안에 들여보내주게. 다들 추워서 힘들어하거든.”
헤즈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이번엔 루스탐이 혀를 찼다. 칼 든 강도가 ‘밖이 추우니 들여보내 달라.’며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협상에 임하시고 전군의 무장을 해제하시면 황빈께 그리 전해드리지요.”
루스탐의 반격에 헤즈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디 가능하겠나? 우린 군대란 말일세.”
둘의 대화는 거의 평행선이었다. 루스탐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겹게 말꼬리를 잡고, 억지를 쓰고, 논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떠들어가며 실컷 시간을 끌고는 헤즈의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낼 무렵에야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돌아가서 황빈께 장군님의 뜻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물러나는 루스탐의 모습을 확인한 헤즈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움켜쥐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만만하고 무식한 야만족이라고 생각했던 저 황제 내관 출신 무장은 한 시간 내내 말장난으로 같은 자리만 뱅뱅 오가며 가뜩이나 일 분 일 초가 아쉬운 그의 짜증을 꼭대기까지 올려놓았다.
루스탐을 어렵사리 ‘쫓아낸’ 헤즈는 얼른 밖을 내다보며 벗어놓은 방한복을 도로 꾸역꾸역 챙겨입었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하늘도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저놈 일부러 지금 와서 시간 끈 게 분명해. 당장 진격명령 내려. 시간이 없다.”
헤즈의 손짓을 받은 근위장교가 그제야 달려나가 출동나팔을 길게 불었다. 도착과 거의 동시에 출정 준비 명령을 받은 6만의 대군은 채 숙영지를 꾸리고 채 엉덩이도 붙이기 전에 바로 무기를 챙겨들고 달려나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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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이번 파트의 마지막 하일라이트가~~
이제 두세 편 정도밖에 안 남았군요.
그나저나 대공주 집안은 마눌님이 제일 무섭습니다. (전에도 세데스의 엄마 오르테 부인의 코뼈를 뭉개놓은 전과가....) 아무래도 대공주가 시집을 잘 간 게 아니고 예르마크가 장가를 잘 간 것 같습니다.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지난번 올린 9, 10권 전자책은 지난 금요일에야 예스24 등등 대형서점들에 넘어간 모양입니다. (답답해서~~) 다음주중에는 9, 10권을 서점들에서도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보문고에 관해 문의주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교보는 epub 파일의 호환 문제로 지체되고 있는 중입니다.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교보에도 오픈예정입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예정) 조아라 노블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