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35화 (1,030/1,132)

< -- 1035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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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대 선봉은 클리멘트 그대가 지휘하시오, 기병 1천5백은 예르마크 경이 없으니 내 딸 세미온이 지휘할 거요.”

기병대 지휘를 준다는 말에 얼굴이 붉게 상기된 세미온은 즉시 경례를 올리고는 의욕이 넘쳐 기병대 쪽으로 달려갔다. 기병들은 트레일러에 실었던 말을 끌어내리고 마갑과 두꺼운 보온포를 씌웠다.

“저 꼴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장군님이 데려오신 1군 2만은…….”

클리멘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예르마크가 데려온 4만과 기병대는 상태가 나은 편이지만 그제 밤 보급품을 홀랑 날리고 거의 거지꼴이 되어 막 도착한 1군 2만군은 싸울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내일이면 저보다 더할 거요.”

헤즈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세닉 가의 상황이 험악해지고 예르마크가 상황을 알기 전에 빨리 이곳의 진압을 완결해야 했다. 블리자드가 몰아치고 혹한이 살을 파고드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6만의 남부보병대는 급히 대오를 꾸리고 전투 준비를 마쳤다.

“전진해, 막는 놈들이 있으면 그냥 힘으로 밀어붙인다. 생각할 것도 없어.”

헤즈는 제일 먼저 준비를 마친 3만의 플라칼 가 보병대에 전진을 명령했다. 양측 모두 기병도 얼마 없고, 빙하 위에서 지형지물도 없고, 목표지점이 빤하다보니 쓸 수 있는 전술이라는 것도 별반 없었다. 빙하 위에서 헬홀로 내려가는 유일한 길은 지난번 무너진 빙하 자리밖에 없고, 반란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나마 추위에 제일 강한 선봉의 플라칼 가 보병대 3만과 기병 1천5백에 이어 델루지 가 보병대 2만이 2선을 이루었고 세닉 가 보병 1만과 몇 안 되는 기병이 후미에서 예비대로 전진해 나아갔다. 헤즈가 탄 빙하차도 후미의 세닉 가 보병대와 함께 전진하기 시작했다.

“전방 5스타디아에 적군 전위대 같습니다. 보병들이 띄엄띄엄 있는 게 보입니다. 기병들도 있습니다.”

전방에 보내놓은 정찰대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지난번 반란군의 허수아비 부대에 제대로 골탕을 먹었던 헤즈는 이번엔 정찰대에 통신까지 가능한 빙하차를 배치해 ‘적에게 잡히는 한이 있어도 눈으로 근거리에서 반드시 확인하고 물러나라’라고 엄명을 내려놓았다. 그랬으니 이번에도 허수아비를 보고 하는 헛소리는 분명 아닐 터였다.

“들었나! 머지않은 곳에 따뜻한 홀이 있다! 거기에 가면 몸도 녹일 수 있고 식량도 넘쳐난다! 저 앞에 수증기가 안 보이냐!”

헤즈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쪽으로는 그리 소질이 없지만 이번만은 안 하던 짓을 하기로 했다. 추위에 얼어붙은 병사들은 말 그대로 ‘앞에 따뜻한 곳이 있다.’는 말에 정신력 하나만으로 블리자드를 뚫고 나아가고 있었다. 몰아치는 블리자드 속에서도 멀리 따뜻한 헬홀의 온천호수에서 무럭무럭 오르는 거대한 수증기의 기둥이 보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의 눈이 확 뜨이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빙하가 무너진 자리로 홀 아래의 따뜻한 공기가 타고 올라오면서 빙하 한중간에 있을 때보다는 한결 덜 추웠다. 그것만으로도 진압군의 사기는 2배로 올랐다.

“3스타디아 전방!”

1선의 플라칼 가 보병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맞은편엔 반란군인 델루지 가 6군단과 플라칼 가 2군단 병력이 총출동해 지평선을 따라 긴 대오를 이루고 헬홀로 내려가는 길목을 막고 있었다. 그들의 좌측에는 1천 남짓 되는 반란군 기병들도 두툼한 보온포를 두르고 서서 거칠게 김을 내뿜고 있었다. 개전 이래 처음으로 직접 조우하는 반란군 정규 병력이었다.

“우아아아!”

기세가 오른 플라칼 가 보병대가 긴 함성으로 마지막 기세를 올렸다. 적진이 가까워지자 반란군 진영 뒤편에서 눈에 확 띄는 검은 깃발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황실군이다.”

경험 많은 사관이나 고참병들이 기겁을 했다. 황실의 깃발을 든 에키트 보병 2천과 황실기병 1천이 반란군의 양 측면에서 한 발 물러선 채 이 광경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황실군이 적의 양익에 있습니다! 어쩌죠?”

일선 대대장들이 걱정이 어린 목소리로 헤즈에게 물어왔다.

“공격 태세냐?”

“아닙니다. 그냥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그럼 위협만 하러 나온 거야, 그냥 놔둬.”

헤즈는 황실군은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6만의 진압군 보병은 일단 명령에 따라 계속 전진했지만 빤히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적 아닌 적’을 옆구리에 낀 채 전진하다보니 신발 속에 돌 하나씩을 넣고 걷는 듯 하나같이 뭔가 찜찜한 얼굴들이었다.

“보십시오, 이게 회전입니다.”

진영 우측의 작은 얼음언덕 위에서 1천의 반란군 기병대를 이끌고 선 후스는 옆에 말을 타고 선 엘룬을 돌아보며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곳에 올라오기 전, 그와 함께 플라칼 가 2군단 앞에서 사열까지 했던 엘룬은 난생 처음 마주한 대규모의 회전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엘룬은 원래 엄마 베아트릭스와 함께 황실군 기병대에 있어야 했지만 그가 플라칼 가와 함께 있어주면 좋겠다는 참모들의 강력한 요구에 이렇게 혼자서 남부기병 사이에 와 있었다.

엘룬의 망토에는 멀리에서도 확 보일 만큼 큼직한 플라칼 가의 사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대신 그의 어깨에는 [공식 참관인]을 뜻하는 흰색의 긴 머플러가 걸려 있었다. 전투 당사자가 아닌 제3지역에서 온 방문객을 뜻하는 이 표식은 제국 내의 신사협약에 따라 양쪽 당사자 모두 공격이 금지되는 한편 본인도 비무장이어야만 했다.

“적이 6만이라고 그랬죠?”

“원래 10만이 될 뻔한 것을 산악 경보병대가 많이 줄여 놓은 겁니다.”

엘룬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소녀도 호드르 산에서 이미 전투를 한 번 치르긴 했었지만 고작 백 명 남짓이 맞붙는 작은 언덕 사수전이었을 뿐 규모에서 지금 이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아직 ‘6만의 적군’은 보이지도 않지만 그들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발소리와 스텝을 맞추기 위한 북소리, 나팔과 함성소리가 짙은 블리자드의 장막을 뚫고 이미 귀를 울리고 있었다. 말이 쉬워 6만이지 빈틈없이 10열로 세워도 무려 40스타디아(6km) 가까이를 꽉 채울 숫자였다.

“제위전쟁 당시에 황상께선 앞도 잘 못 보시는 상황에서 수십만을 지휘하셨죠.”

엘룬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었다. 헬홀로 내려가는 경사로를 막아선 반란군 병력은 12열 두께로 두껍게 선 보병 2만과 기병 1천이었다. 그에 비하면 맞은편 진압군은 오랜 행군으로 지치긴 했어도 무려 3배에 달하는 6만과 기병 1천5백이었다. 이쪽이 유리한 건 병사들이 오래 쉬었다는 것과 통신장비, 방한복, 갑주 같은 것들이 이곳 빙하의 혹한에 맞게 설계된 것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기습전이나 게릴라전이라면 몰라도 이런 정면 힘 대결에선 큰 이점이 되어주지 못했다.

“저들인가요?”

적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엘룬이 억지로 태연한 척 물었다. 눈보라 때문에 흐릿하긴 해도 적군의 1선을 이룬 3만의 보병이 하얀 지평선 위를 온통 갈색으로 뒤덮고 몰려드는 광경만도 장관이었다. 홀 주변의 고온으로 블리자드가 약해지면서 그들이 광경이 점점 또렷해졌다.

“어마어마하네요.”

이런 대군을 난생 처음 본 엘룬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후스가 겁먹은 기색이 역력한 엘룬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섰다.

“여기서 한 시간은 버텨야 합니다.”

“왜 한 시간이죠?”

“그 시간 후엔 이판사판 결판이 날 테니까요.”

후스가 엘룬의 까맣고 맑은 눈을 내려다보며 엷게 웃었다. 엘룬은 이 와중에서 겁내는 티를 내지 않으려 억지로 웃었지만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양군의 악을 쓰는 함성이 충돌하면서 이제 작은 소리는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괜찮아요, 다 잘 되겠죠.”

엘룬의 말이 막 끝나기가 무섭게, 블리자드 너머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연이어 부딪치는 굉음과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후스가 귀에 꽂은 할룩스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중앙입니다. 플라칼 가 보병대와 첫 조우입니다.”

후스가 보병대 중앙인 동쪽을 손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눈보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어딘가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뒤이어 엘룬이 있는 반란군의 우익 쪽에도 적군이 가까워지면서 어느새 적병들 하나하나의 실루엣까지 구분될 지경이 되었다. 반란군 쪽에서 엘룬이 있는 우익 쪽을 지키는 건 플라칼 가 2군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진압군은 같은 플라칼 가의 11군단이었다.

2군단 선봉의 사관들이 일제히 칼을 공중으로 쳐들었다. 평소라면 ‘가문을 위해’를 외쳤어야 할 때였다.

“옹주 마마를 종장님으로!”

사관들의 찢어지는 외침이 대오를 타고 병사들 사이로 번져나갔다. 이왕 가문과는 돌아섰고, ‘가문’을 외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기둥은 지난 수십 일간 자신들과 돈독한 정을 쌓아 온 엘룬 하나뿐이었다. 옹주마마를 외치는 이들의 고함과, 맞은편 진압군이 외치는 ‘가문을 위해’라는 고함이 블리자드 속에서 알아듣기도 힘들게 뒤섞였다. 뒤이어 거대한 굉음이 눈보라보다 더 위력적으로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거의 15스타디아(2.25km)에 달하는 긴 대오 전체에서 사활을 건 대결이 시작되었다.

플라칼 종가 일가를 무너뜨리려는 반란군과, 황실을 무너뜨리기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진압군의 가문의 사활을 건 전면전의 시작이었다.

진압군 사령부를 떠나온 예르마크 경은 빙하차를 타고 111번 홀이 있는 남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가 탄 차에는 40여명의 중무장한 플라칼 가 헌병들이 타고 있었다. 이미 왔던 길이고, 걸어서 행군하는 보병이 없으니 밤새 전진하면 내일 정도엔 111번 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그가 탄 빙하차의 스캐너에 웬 작은 점 하나가 나타났다.

“뭐지?”

예르마크가 빙하차를 모는 운전병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부마가 외부인과 절대 접촉하지 못하게 하라’는 헤즈의 지시를 받았던 플라칼 가 헌병대 사관은 바로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확인 후에 늦추겠습니다.”

“점이 하나뿐이잖나!”

“그래도 곤란합니다.”

예르마크의 부아가 확 치밀었다. 하지만 그 ‘점’은 느려터진 빙하차보다 족히 두세 배는 빠른 속도로 무섭게 뒤를 따라붙어왔다.

“대체 뭐 하는 놈이야!”

헌병사관이 빙하차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눈보라를 뚫고 쫓아오고 있는 건 어처구니없이도 썰매가 달린 작은 트라이크였다. 긴 망토를 펄럭이는 웬 여자 한 명이  트라이크에 속도를 바싹 붙여 빙하차 옆에 순식간에 달라붙었다.

“뭐야, 무슨 저런 놈이 다 있어?”

헌병들이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었다. 두꺼운 방한복을 몇 겹 입어도 버티기 힘든 혹한의 블리자드 속에서 여자는 검은 비단망토와 황실 보안국 제복인 겨울 코트 한 벌만 입고 트라이크를 몰고 있었다. 마르고 매서운 눈매의 그 여자는 얼굴을 가린 후드를 슬쩍 들추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트라이크는 순식간에 속도를 붙여 앞으로 치고 나아가더니 느릿느릿 전진하는 빙하차의 앞을 딱 막아섰다. 당황한 빙하차 운전병이 방향을 돌려 트라이크를 피해가려 했지만 속도 빠른 트라이크는 둔해 터진 빙하차를 놀리듯 앞을 날파리처럼 이리저리 오가며 도무지 방향을 못 잡게 했다. 짜증이 난 헌병장교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젠장! 깔아 뭉개버려!”

“저, 어, 보안국 요원 같습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운전병은 하는 수 없이 속도를 높여 트라이크에 정면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트라이크는 다시 방향을 휙 돌려 이번엔 꽁지 빠지게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트라이크에 온 신경을 집중한 운전병이 빙하차의 스로틀을 막 올린 순간, 차가 덜커덩 하더니 앞부분이 푹 주저앉았다.

“으익!”

예르마크의 빙하차에 타고 있던 20여명이 그 충격에 앞으로 벌렁 넘어지면서 차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염병할, 크레바스잖아!”

헌병들에게 붙들려 뒤로 밀려나 있던 예르마크는 그새 병사들을 뿌리치고 운전석 쪽으로 기어나왔다. 그는 헌병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새 급히 방한복을 집어 들고 나가려 했지만 헌병대 사관이 그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나가시면 안 됩니다!”

그다지 눈치가 빠르지 못한 예르마크였지만 이들이 무언가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감추려 들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함께 온 세닉 가 참모들에게 이들을 저지하라며 눈짓했지만 그들도 무슨 이유인지 예르마크의 말을 듣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뒤이어 또다시 수십 개의 ‘점’이 이 빙하차를 노리고 북쪽에서 벌떼처럼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저놈들은 대체 또 뭐야!”

헌병장교가 소리를 꽥 질렀다. 이미 북쪽에선 본대가 대군으로 헬홀을 봉쇄한 상태이니 지금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이 빙하 위에서 이들이 지나가기를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크레바스에 빠져 꼼짝도 못 하게 된 상황에서 도망칠 길도 없었다.

그때, 창밖에서 트라이크가 멈추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마님! 황상께서 위로 전문을 보내오셨습니다! 황상의 칙서를 받으십시오!”

예르마크가 등 뒤를 붙든 헌병들을 억지로 떨쳐내고 차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코트와 망토 한 벌만으로 이 끔찍한 빙하 위를 질주해 온 괴물 아닌 괴물은 보안국장 사에나였다. 그의 뒤로도 큼직한 도끼를 멘 20여명의 에키트 족들이 트라이크를 몰고 벌떼처럼 나타나 빙하차 주변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포위된 플라칼 가 헌병들은 ‘하고많은 적들 중’ 하필 저 야만족들이 떼로 나타나자 파랗게 얼어붙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빙하차를 둘러싼 채 키득거리며 실실 쪼개고만 있을 뿐 최소한 아직까지는 공격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부마께 전문을 전하려 상선 루스탐을 보냈는데 이미 떠나셨다 하여 제가 따라왔습니다.”

사에나가 트라이크에서 내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예르마크도 비로소 헌병장교를 떨치고 일어나 차 문을 열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섰다. 사에나의 차림새만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나왔지만 몰아치는 찬바람에 일순간 코와 입술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그는 허겁지겁 방한복을 뒤집어쓰며 물었다.

“위로 전문이라니, 무슨 소리냐?”

“모르셨습니까? 1군과 함께 가던……앉으십시오!”

사에나의 고함에 예르마크는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몸을 날렸다. 순간 사에나가 쏜 볼트 한 발이 예르마크 경의 뒤에서 석궁을 쏘려던 헌병장교의 손을 단번에 꿰뚫었다.

“아익!”

장교는 무기를 떨어뜨리며 부하들이 있는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란 40여명의 플라칼 가 헌병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크레바스에 빠진 차를 에워쌌다. 플라칼 가 헌병들과 사에나의 중간에 어정쩡하게 엎드린 예르마크는 대체 뭐가 어찌된 것인지 아직 어리둥절해 있었다. 사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막내 아드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아직 모르십니까?”

“뭐, 뭐라고?”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예르마크는 순간 들은 것을 믿지 못하고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에우테르 세닉 리쿠 대군은 사흘 전 헤즈 경의 딸 세미온에게 채찍으로 수십 대를 맞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말 모르셨습니까?”

“대, 대체 그게, 무슨…….”

놀라고 당황한 예르마크가 채 정신을 차리고 진위를 묻기도 전, 플라칼 가 헌병장교가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젠장! 다 죽여!”

결국 이번 전쟁에서 황실군에 대한 선제공격은 플라칼 가의 차지가 되었다. 40명의 헌병들은 고작 절반에 불과한 에키트 족들에게 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달려온 헌병 사관이 막 고개를 들려는 예르마크의 머리 위로 장검을 번쩍 쳐들었다.

“조심하십시오!”

사에나의 볼트가 사관의 고글을 뚫고 눈에 푹 박혔다.

“아, 아아악!”

칼을 떨어뜨리고 밀려난 사관은 피범벅이 된 눈을 감싸쥐고 얼음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빙하차를 둘러싼 20명의 에키트 족들은 자신들에게 먼저 덤벼오는 2배나 되는 남부 헌병들의 모습에 기가 죽기는 고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황제의 친필이 남은 도끼를 뽑아들었다.

“이제야 죽을 기회가 왔구나!”

한 손에 도끼를, 한 손에 둥근 방패를 든 이 괴물 같은 거한들은 등에 두른 짐승털을 휘날리며 그대로 돌진해 앞장서 달려오는 겁 없는 적의 턱을 한 방에 으깨어 공중에 붕 날렸다. 뒤따라오던 헌병들은 앞서가던 동료들이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머리가 으깨어져 나뒹구는 모습에 발끝이 확 굳어버렸다.

“제발 우리 좀 죽여 봐라!”

곰 머리를 뒤집어쓴 추장 한 명이 다리가 굳어 멈칫거리던 헌병의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머리를 얼음바닥에 내리꽂았다. 지금껏 말로만 들었던 그들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그저 칼싸움 정도만 알았던 헌병들이 겁에 질려 방패 뒤로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 야만족들은 방패 위로 그대로 몸을 날려 체중과 도끼로 내리눌러버렸다. 그들의 힘에 밀려 넘어진 헌병들은 짓밟고 깔아뭉개지며 비명을 질렀다.

“이 개새끼들! 날 속여!”

비틀거리며 얼음 위에서 일어난 예르마크는 자신에게 칼을 내지르는 헌병의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들의 죽음과, 그 사실을 아직까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은 그는 넘어진 헌병을 걷어차고는 손을 다친 플라칼 가 헌병 장교에게 달려가 미친 듯이 주먹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네 종장 새끼가 그러라고 시켰냐! 그 미친 새끼가 지 딸 죽은 건 미쳐 날뛰더니 남의 아들 죽여 놓고 감히 날 속여!”

얼굴 절반이 눈물로 뒤덮인 그는 뭐라 변명하려는 장교의 얼굴을 뭉개질 때까지 두들겨대고는 손에 박혀 있는 사에나의 볼트까지 사정없이 비틀었다.

“아, 아아아악!”

“말해! 대체 뭘 또 숨긴 거야!”

헌병 장교의 멱살을 쥐고 날뛰던 예르마크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얼어붙은 빙하 위를 더듬으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바보같이 이 따위 원정에……이 멍청한 놈. 이러고 마누라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

자책감에 거칠게 고개를 젓던 예르마크는 갑자기 단검을 꺼내 목에 가져갔다. 기겁을 한 에키트 족 추장이 급히 달려들어 그의 팔을 비틀고 바닥에 쓰러뜨렸다. 예르마크가 그를 힘으로라도 밀어내고 다시 자결하려 했지만 뒤이어 다른 에키트 족들까지 달려들어 미쳐 날뛰는 그를 겨우겨우 뜯어말렸다. 그는 병사들에게 팔다리가 붙들린 채로 계속 울부짖었다.

낙담한 예르마크 경이 주저앉아 눈물을 삼키고 있는 동안, 에키트 족들이 트라이크를 줄줄이 연결해 크레바스에 빠진 빙하차를 끌어냈다. 사에나에게서 아들의 죽음과 본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해 자세히 전해들은 예르마크 경은 추위도 잊은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을 아무 말도 없었다.

내내 조용하던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헬홀 입구에서 전투 중이지?”

“그럴 겁니다.”

“선봉이 누구냐?”

“제가 듣기로는 3만의 플라칼 가 보병대입니다. 2열에는 델루지 가, 3열에 세닉 가입니다.”

사에나는 살짝 속내를 드러내려다 말았다. 원래 루스탐을 보내어 적 사령부에서 내분을 일으키려 했었지만 눈치빠른 헤즈가 이미 예르마크를 빼돌린 후였고, 그 사실을 전해들은 사에나는 루스탐에게 ‘최대한 시간을 끌 것’을 지시하고는 직접 목숨을 걸다시피 이곳까지 쫓아온 길이었다. 예르마크 경도 바보가 아니니 저렇게까지 분노했다면 최소한 세닉 가에 소속된 진압군 이탈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자네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네.”

“…….”

“내게 원했던 게 진압군에 있는 세닉 가 병력을 이탈시켜 달라는 것 아니었나?”

자신의 할룩스를 꺼내들었던 예르마크는 순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의 할룩스가 이미 폐쇄되었다는 메시지가 나오고 있었다. 헤즈가 자신의 이반을 철저히 대비했다는 것을 깨달은 예르마크는 조금 전 자신이 두들겨 팼던 플라칼 가 장교를 노려보았다.

“저 새끼가!”

격분한 예르마크가 막 일어나려던 그때, 이미 사에나가 그자의 얼굴을 밟고 있었다. 아드득 소리가 나며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그자의 목뼈가 푹 주저앉으며 으스러졌다.

“이러시려 했던 것 압니다.”

사에나가 더러워진 장화를 죽은 장교의 옷에 쓰윽 닦고는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헛힘만 썼군.’

낙담한 사에나가 고개를 저었다. 계획은 성공했고, 예르마크 경도 구해냈지만 얻은 건 없었다. 세닉 가 병력은 이미 예르마크의 손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그 빌어먹을, 플라칼 가 새끼들을 혼내줘야 하는데.”

예르마크는 할룩스를 쥐며 부르르 떨었다. 제위전쟁 당시, 딸의 죽음에 분노한 카나르 공은 딸을 죽인 연합군의 배후를 쳐서 처절히 복수를 한 일이 있었지만 그에겐 그런 복수의 길마저 막혀 있었다. 세닉 가의 부하들까지 자신에게 그 사실을 숨긴 것을 보아 종장인 누나 이렌느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아들의 죽음을 알았지만 그에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 그의 머리에 딱 하나가 스쳤다.

“물을 뿌리게.”

“네?”

“플라칼 가 놈들의 새 방한복이 방수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머리 위에 물을 뿌리라고!”

예르마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금 에키트 족들이 끌어내놓은 빙하차로 가더니 자신의 갑옷과 무장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전장으로 돌아가야겠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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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좋은 예르마크 경이 드디어 밟히다 못해 꿈틀했습니다. (그래도 마누라부터 걱정부터 하는 착한 남편입니다.)

윗사람 잘못 둔 플라칼 가 장병들만 고생입니다.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노블레스 연재속도는 연재분 빨리 따라잡기 위해 2배로 올렸고요. (그런데 조회수는 쩝...연재본 지우라고 권하는 걸 안 지우고 놔뒀더니.ㅠ.ㅜ;;....확실히 글로 돈버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봅니다;;)

전자책은 대형서점들에도 1부 9, 10권까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파일 완성해서 대형서점 통과 절차만 20일이나 걸렸네요...-_-;; (연재본 재밌게 보신 분들 기부 차원으로 구매해 주시면 감사입니다. ㅋㅋ 전자책 쪽이 노블레스보다 작가 몫이 훨씬 큰지라;;..쿨럭;;)

2부 1~4권은 예상보다 작업이 빨라 다음달초에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늘부로 출판본 3부 7권 원고 1차 작업을 끝냈습니다. (지금 연재분에서 20회쯤 더 나간 분량입니다.) 올초는 이상하게(?) 작업들이 다 빠르네요. 겨울 이전까지 대단원인 8권 출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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