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37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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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표적으로 한 기병들의 돌격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던 엘룬은 엄마에게서 배운 것을 떠올렸다. 베아트릭스는 ‘전장에서는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등을 보이고 혼자 도망가느니 뭉쳐 맞서는 게 낫다.’고 강조하곤 했다. 무기 하나 없는 엘룬은 더듬더듬 방패를 집어 앞을 가리고 기병들의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가 움직이자 빨간 배너가 달린 깃발을 든 기병이 성가실 만큼 옆을 쫓아와 바싹 붙어 섰다. 엘룬을 호위하는 기병들 중 몇이 죽음을 각오하고 맞받아 나갔지만 결과는 빤했다.
“저년이구나!”
반격해오는 호위 기병들을 순식간에 돌파한 세미온은 창을 똑바로 세우고 빨간 깃발을 든 기병 옆에서 방패를 들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흰 머플러와 망토 차림의 녀석을 겨누었다. 흰 머플러는 비전투원이라는 의미였지만 눈보라 때문에 분간 못 했다고 대충 둘러댈 참이었다.
“네년이 감히 종장 자리를 노려!”
무섭게 돌진해 온 세미온의 창이 엘룬의 방패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으익!”
아직 창을 흘려내는 데 서툰 엘룬은 되는 대로 힘으로 막아내려 했지만 안장 끈과 방패가 버티어 내지를 못했다. 방패가 쾅 소리를 내고 부서지면서 말 위에서 튕겨난 엘룬이 얼음바닥에 붕 날아가 꼬꾸라졌다.
“이게 뭐야?”
그 사이, 지휘관의 명령에 일단 후방으로 물러나던 2개 제대의 병사들도 자신들이 싸움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사이 옆 부대는 악을 쓰고 달려들고 있는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며 동료의 얼굴을 보았다.
“가만, 지는 싸움도 아닌데 왜 우리가 물러나고 있는 거야?”
몇몇 베테랑 사관들이 멈칫거리며 부하들을 멈춰 세웠다. 그들의 할룩스로는 빨리 뒤로 물러나라는 대대장의 악다구니가 들어오고 있지만 눈앞의 상황은 적에게 등을 보일 모양새가 아니었다. 100기의 적 기병이 대오 중간을 파고들어왔고, 그들에 휩쓸려버린 엘룬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고, 이웃 부대는 옹주를 구하겠다며 기병대에 거의 맨몸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상명하복에 익숙한 보병들은 퇴각하라는 상관의 지시와, 당장 싸워야 한다는 눈앞의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빨리 안 따라오고 뭐 하나!”
지휘관의 닦달에도 머뭇거리던 그들은 눈앞에서 잠시 눈보라가 잦아진 새, 쾅 소리가 나며 얼음바닥에 나뒹구는 엘룬의 모습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제기랄! 이게 아냐! 되돌아가!”
소대장 한 명이 대대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앞장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를 시작으로 의아해하고 있던 보병들이 우르르 대오에서 이탈하며 되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말리려는 사관과 장교들 사이에서 다시 몸싸움이 벌어졌지만 그 틈새를 빠져나온 수십 명이 말에서 떨어져 신음하는 엘룬을 향해 악을 쓰고 달려갔다.
“옹주께서 저 안에 계시다!”
엘룬의 옆을 휙 스쳐갔던 세미온은 낙마한 상대를 확인사살하려 급히 말을 돌렸지만 수십의 보병들이 엘룬을 향해 사방에서 달려들어오고 있었다.
“이거 또 왜 이래!”
막 속도를 붙이려던 세미온은 옆에서 웬 보병이 집어던진 투창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을 뻔했다. 그가 움찔거리는 새 보병 두 명이 말에서 떨어져 반쯤 얼이 빠진 엘룬을 겨드랑이에 끼고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이씨! 저년이!”
뒤늦게 속은 것을 알아챈 후스가 몇 안 되는 기병을 데리고 엘룬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되돌아왔을 때 그곳은 이미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세미온과 100기의 중장기병들이 엘룬의 호위기병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고, 남부보병들은 대오를 생명으로 하는 인간병기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사방팔방 흩어져 세미온의 기병들과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보병이 바닥에 쓰러져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엘룬을 끌고 전장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제기랄! 뭐 하는 거냐! 다들 옹주 마마를 지키지 않고!”
후스가 보병들에게 목이 터져라 외치며 엘룬을 향해 달려갔다. 맞은편에서 엘룬을 향해 창을 세우고 막 돌격하려던 플라칼 가 문장의 무장이 후스를 휙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후스는 그가 진짜 세미온임을 직감했다.
“네 이년, 잘 걸렸다! 내게 오지 못해!”
후스가 엘룬에게서 관심을 돌리려 세미온을 도발했지만 후스를 힐끔 노려보던 그는 본척만척 엘룬을 향해 예리한 창끝을 겨누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막아보시지!”
그새 정신을 조금 차린 엘룬이 풀린 다리로 일어나 자신의 말로 허우적거리며 피하기 시작했다. 그를 부축해 도망치던 보병들이 돌격해오는 세미온을 향해 휙 돌아서며 창을 겨누었지만 보병 둘으로는 어려서부터 엄한 기병 훈련을 받고 자란 뼛속까지 무장 혈통인 세미온을 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보병들이 세미온의 사나운 군마에 받혀 얼음바닥에 맥없이 나뒹굴었다. 그 사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간 엘룬이 바닥을 뒹굴던 큼직한 보병용 사각방패를 허겁지겁 집어 휙 돌아누우며 얼굴 위를 가렸다. 그 위를 세미온의 육중한 말이 덮쳤다.
“안 돼!”
후스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세미온의 육중한 말은 엘룬의 몸 위를 가린 방패를 두 번이나 사정없이 짓밟고 지나갔다. 방패가 부서지며 짧은 비명이 울린 후, 방패 밑의 엘룬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옹주 마마!”
순간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 후스가 세미온이고 뭐고 까맣게 잊고 엘룬에게로 무작정 달려갔다. 그 순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환호성과 함께 기세를 올리며 말을 돌리고 있는 세미온이 있었지만 후스에겐 방패 밑에서 움직이지 않는 엘룬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엘룬에게 거의 달려간 그는 다시 옆에서 맹렬히 달려오는 기척을 뒤늦게야 눈치챘다. 평소라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우욱!”
아무런 대비도 없이 측면 돌격을 당한 후스는 그대로 옆으로 휙 밀리며 넘어지는 말과 함께 옆으로 붕 날아가 떨어졌다. 후스를 말에서 떨어뜨린 세미온이 기세등등하게 고함을 지르며 말에 박차를 가해 이번엔 후스를 짓밟으려 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후스를 막 덮치려던 세미온은 바닥에 있던 방패가 저절로 벌떡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에 기겁을 했다. 부서진 방패 밑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엘룬이 벌떡 일어나며 후스를 향해 덤벼드는 말을 향해 마치 원반을 던지듯 방패를 힘껏 날렸다. 황제에게서 물려받은 괴력을 받아 휙휙 돌며 날아간 방패는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오던 말의 방한포와 마갑을 순식간에 찢어내고 목의 살점에 푹 꽂혔다. 목이 찢기며 즉사한 말은 앞다리가 꺾이며 바닥에 푹 쓰러졌고 그 위에 올라있던 세미온도 그대로 공중을 붕 날아 바닥에 내리꽂혔다.
“우아악!”
이번엔 세미온이 말에서 떨어져 단단한 빙판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후스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을 빼들고 달려가 정신을 못 차리고 흐느적거리며 억지로 일어나려는 세미온의 가슴을 사정없이 걷어차 쓰러뜨리고는 가슴을 꽉 내리누르고 투구를 벗겨냈다. 그는 귀가 떨어져나가는 맹추위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투구도 확 벗어 보이며 잡아먹을 듯 얼굴을 들이댔다.
“내 얼굴을 봐! 처자식을 모조리 잃은 아비의 얼굴을 보란 말이다!”
죽은 아내와 아들 생각에 감정이 확 솟구친 후스는 세미온의 목에 칼을 겨누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세미온과 눈이 딱 마주친 순간, 여자의 목을 바로 뚫어 주려던 그의 복수심까지도 일순간 얼어붙었다. 비록 사랑하는 감정은 전혀 없었지만 한때 그의 약혼자였고, 몸까지 나누었던 여자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세미온이 중얼거렸다.
“내, 내 뱃속엔 당신 아이가…….”
“닥쳐! 내 새끼도 아니니까!”
후스가 억지로 악담을 하며 자신에게 잔혹한 힘을 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계속 나오는 짠 눈물이 얼굴에 얼어 엉겨 붙었다.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임신한 몸으로 자신의 품에서 죽어간 미노아의 얼굴이 떠올라 죄 없는 생명을 품고 있는 이 여자를 도저히 찌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그저 어쩌다 자신과 엮인 가문 종손에 불과할 뿐, 아내와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건 종장 카나르와 헤즈였다.
칼을 쥔 채 바들바들 떨던 후스는 천천히 칼을 떨어뜨렸다.
“밧줄 가져와!”
후스가 주변에 외쳤지만 온통 난전에 빠진 와중에 그의 말을 들을 사람이 없었다. 그가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밑에 있던 세미온이 벗겨졌던 투구로 후스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윽!”
머리에 충격을 입은 후스가 비틀거리자 세미온이 그를 발로 힘껏 차내고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년 잡아!”
잠시의 방심으로 세미온을 놓친 후스가 허겁지겁 투구를 쓰고 뒤를 쫓았지만 세미온은 그새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창을 주워들고 빈 말에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후스도 얼른 말에 뛰어올라 그를 쫓으려 했지만 세미온은 급히 말을 돌려 일단 전장 밖으로 서둘러 도망을 쳤다.
“염병, 뒈질 뻔했네!”
후스의 추격에서 일단 빠져나온 세미온은 잠시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골랐다. 명색이 플라칼 가 종손이 하마터면 전투다운 첫 전투에서 포로가 되는 볼썽사나운 꼴이 될 뻔했었다.
그때, 그는 멀리 남쪽에서 웬 빙하차 한 대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빙하차는 장애파에 막혀 곧 멈추었지만 뒤쪽의 큰 문이 열리더니 손에 창을 쥐고 말에 탄 한 사람이 뚜벅거리며 내려서서 세미온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창에 달린 배너의 실루엣으로는 진압군 기병인 것 같아 일단 맘을 놓았지만 눈보라 때문에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이야??”
그자가 점점 가까워지며 진압군 기병대의 장군용 방한복 차림새가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가까워지자 남자의 크고 다부진 체구와 어깨의 세닉 가 문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이런.”
그제야 상대를 직감한 세미온이 급히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고, 동시에 상대도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예르마크 경의 말은 세미온의 말보다 훨씬 빨랐다. 상대가 갑옷과 마갑을 걸치지 않아 떨굴 수가 없다는 것을 눈치챈 세미온이 하는 수 없이 창을 쥐고 돌아섰다. 정말로 예르마크는 평상시 군복 위에 창 하나만 달랑 쥐고는 그를 쫓고 있었다.
“예르마크 세닉 장군님! 대체 어떻게…….”
이미 이성을 잃은 예르마크의 귀에는 아들을 때려죽인 살인자의 말 따위는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그는 세미온에게 변명 따위는 할 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창을 휘둘렀다. 놀란 세미온이 얼른 창을 들어 막았지만 젊은 후스라면 몰라도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가 감히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단 일격에 힘과 속도에서 밀린 세미온의 얼굴과 어깨 위로 예르마크의 창끝이 큰 원을 그리며 휙 날았다.
“아아악!!”
치명상을 입은 세미온이 부러진 창을 들고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어깨가 찢겨 무기를 들 수도 없었고 창 자루에 얻어맞은 턱이 투구와 함께 부서져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예르마크가 그에게 창끝을 겨눈 채 낮게 말했다.
“네 아비에게 돌아가라, 이 풋내기야.”
자신을 살려준다는 것으로 생각한 세미온이 예르마크를 올려보며 놀란 눈을 껌벅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 예르마크의 창이 세미온의 목젖을 사정없이 푹 관통해 버렸다. 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즉사한 세미온이 말 위에 축 늘어졌다.
“지금 그 꼴로 말이다.”
예르마크는 세미온의 목에 꽂힌 자신 이름의 창을 놓아둔 채 한 발 물러났다. 목이 관통당한 세미온의 시체를 태운 군마는 평소 훈련받은 대로 진압군의 본부가 있는 남쪽으로 터벅터벅 내려가기 시작했다.
플라칼 가의 첫 번째 종손이며 제2서열 후계자였던 이 젊은 무장은 결국 한 번의 섣부른 행동의 대가로 첫 전투의 고비를 살아 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무너져가는 보병대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헤즈는 부장들로부터 적장자인 딸의 죽음을 전해들은 순간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딸을 죽인 것이 예르마크라는 말을 들은 그는 반쯤 미쳐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까지 마구 질러댔다.
넋이 나가 날뛰는 헤즈를 대신해 결국 클리멘트가 지휘를 맡았다. 참모장인 그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헤즈에게 맡겨둔 채 한 발 물러나 있었지만 이미 전황이 어렵다는 것은 깨닫고 있었다. 세미온의 죽음으로 기병대는 무너졌고, 기세가 오른 반란군 보병대는 플라칼 가 보병대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이젠 부실한 방한복으로 오래 버티기도 힘든 델루지 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참모들은 어떡해서든 이 전투에서 발을 빼야 한다는 것에 거의 만장일치였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이런 혹한의 빙하 위에서 부상자를 떠안고 큰 패전을 당한다는 건 보통의 야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참극이 될 것이 뻔했고, 반란군이 추격이라도 해 온다면 대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 클리멘트는 전투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책임을 떠맡은 셈이었다.
클리멘트는 아주 빨리 결단을 내렸다.
“베아트릭스 플라칼 황빈에게 다녀와라.”
클리멘트가 그 자리에서 재빨리 편지를 손으로 써 부관에게 넘기자 참모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준 편지엔 ‘황실의 중재에 따라 성실히 평화협상에 임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딸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은 헤즈가 무슨 협상이냐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종장 카나르 공이 아들 헤즈의 권한을 ‘일시 정지’ 시켜 클리멘트가 임시 사령관이 된 상태였다.
참모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적군이 아니고 황빈에게 말입니까?”
“명색이 중재단으로 온 황실 놈들에게 역할을 했다는 명분을 채워 주고 우리도 실속을 챙기자는 거지.”
설명을 제대로 이해 못 하는 참모들에게 클리멘트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황실 놈들도 싸움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중립의 중재단 명분으로 와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협상 의사를 보여도 반란군 놈들이 우릴 계속 공격하면 자기네가 중재단이 아니라는 자기부정을 하는 셈이니 그 명분을 거꾸로 물고 늘어지자는 거지.”
클리멘트의 교묘한 계산에 참모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멘트의 편지를 가진 부관은 흰 깃발을 세워들고 서둘러 베아트릭스가 있는 황실군 기병대 쪽으로 달려갔다.
“클리멘트 이년 보기보다 똑똑하군요.”
예르마크 경을 데리고 반란군 임시 사령부 막사로 돌아온 사에나는 클리멘트가 보내온 편지를 보며 싸늘한 웃음을 보였다.
“무사히 되돌려 보내주지 않으면 지금 당장 남부 전체와 한판 붙을 각오를 해라 이런 뜻이겠죠.”
“황실이 남부와 전면전을 벌일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걸 역이용한 건가요?”
전장에서 서둘러 돌아온 세데스가 베아트릭스의 결정을 기다리며 그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반란군의 사령관인 세데스뿐만이 아니고 아랫사람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중재단장인 베아트릭스의 이름으로 온 편지니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전투라면 몰라도 정치 문제에 유난히 약한 베아트릭스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많은 아랫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가운데서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일을 무작정 아랫사람에게 묻거나 황제에게 묻는 것도 명색이 특명대사이고 황빈인 자신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아직 눈보라가 몰아치는 창밖을 힐끔 내다보고는 파일들을 뒤적거렸다. 그의 결정이 늦어지자 답답해진 무장들이 어떡해야 하냐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보다 못한 세데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전투 중단하고 보내 주게.”
“예?”
예상보다 훨씬 간단명료한 베아트릭스의 대답에 사람들이 다시 놀라 서로를 마주보았다. 후스가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협상에 응한다는 건 일시 궁지를 빠져나가려는 술책에 불과합니다. 퇴각해서 재정비한 후엔 분명 우릴 재공격할 겁니다.”
“그건 나도 알아. 돌려보내면 저들과 다시 싸우게 되겠지. 그런데 지금 무리해서 무찌른다고 남부제후들이 ‘아이고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할 것 같나? 그네들이 사생결단을 하려고 보낸 더 큰 대군과 싸우게 될 거야.”
베아트릭스의 침착한 대답에 무장들이 일단 침묵을 지켰다.
베아트릭스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뒤는 어차피 끝도 없는 빙하네. 지금 밀어붙여 봤자 놈들도 너 죽고 나 죽자 독기만 오를 테고 우리 피해가 더 커져. 하지만 저 상태로 놓아주면 우리 손 더럽힐 것 없이 추위와 굶주림과 블리자드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네. 놈들은 어차피 절반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게야. 그러니 자네들은 직접 공격은 하지 말고 적당한 간격으로 따라만 가게. 수많은 낙오병들이 생길 테니 그놈들만 챙기면 돼.”
“아, 알겠습니다.”
“우린 이곳에서 저들이 제국을 무너뜨리는 큰 반역모의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붙들고 늘어지고 있으면 되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황상께서 큰 반격의 기회를 만들어주실 것이니.”
매사 단순한 명령조밖에 모르던 베아트릭스의 차근차근한 설명에 무장들이 모두 수긍하며 돌아섰다. 베아트릭스는 [그대들이 당장 111번 홀로 회군하면 이곳의 혁명군도 일체의 공격행위를 중단하기로 했다.]라는 답신을 자신의 이름으로 적어 넘겨주었다.
전투를 마무리할 새 임무를 맡은 무장들이 ‘황빈이 웬일이야?’라고 쑥덕거리며 서둘러 무장을 챙겨들고 밖으로 사라졌다.
“아참, 후스 경.”
“예?”
후스가 휙 돌아섰다. 베아트릭스가 짧게 물었다.
“엘룬은 괜찮은가?”
“예, 계속 보병들과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기에 아까의 그 보병들과 함께 머무시게 했습니다. 무단이탈하려 한 대대장과 중대장은 체포했습니다.”
“그래.”
베아트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후스에게 가 보라고 손짓했다.
무장들을 다 내보낸 후, 베아트릭스는 품에 있던 쪽지를 살며시 꺼내보았다. 전투를 시작하기 직전, 황제가 그에게 깨알같이 적어 몰래 보내 준 내용이었다. 그곳엔 방금 그가 무장들 앞에서 했던 말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감돌았다.
“다 알고 계셨군요.”
클리멘트가 반란군 진영으로 보낸 부관이 돌아오기까지는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편지를 받아든 클리멘트는 순순히 현실을 인정했다.
“훗, 모양새는 휴전이로되 우리 패전이군.”
클리멘트가 고개를 저었다. 황실 중재 하에 무승부로 끝난 모양새가 되었지만 분명한 진압군의 패전이었다. 반란군에 박살이 난 진압군 보병대와 기병대는 교전을 중단하고 헬홀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따뜻했던 곳을 벗어난 진압군들은 또다시 끔찍한 빙하 위로 돌아온다는 현실에 절망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여기서 계속 머물 수는 없으니 111번 홀로 돌아간다.”
클리멘트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중장보병 지휘관에 어울리는 크고 다부진 체구의 그는 임시막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세미온의 시체를 안치해 놓은 옆 막사에서는 반란군들을 박살내라는 헤즈의 찢어지는 고함이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황실이 순순히 승인을 해 준 것도 이걸 노려서였겠지.”
클리멘트가 여전히 몰아치는 블리자드를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지금 병력이 5만 조금 넘지?”
“예.”
“절반이나 돌아가면 다행이지.”
클리멘트의 혼잣말에 참모들이 전율했다. 이제 남은 식량은 고작 하루나 이틀 치가 전부였다. 진압군은 이제 4일 걸려 걸어온 끔찍한 빙하 위를 쫄쫄 굶으며 되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진압을 빨리 끝내려던 우리 계획도 엉망이 되었고. 놈들도 그걸 알아. 그러니 놈들이 이긴 거지. 알면서 일부러 우릴 풀어준 거야. 궁지에 몰아서 사생결단하게 하느니 가다가 얼어 죽으라고 말이지.”
클리멘트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장장 4일에 걸쳐 블리자드를 뚫고 빙하를 가로질러 행군해 온 진압군의 대담했던 원정은 결국 1만이 넘는 전사자와 포로, 그리고 그보다 몇 배는 더 될 ―잠재적인― 동사자와 낙오병을 기록한 채 무참한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칼릴을 빨리 안정시키고 모든 병력을 하임달에 집중하려던 남부의 큰 전략이 꼬여버린 순간이었다. 무려 10만이 넘는 대군이 고작 2, 3만의 반란군에 발목이 잡혀 어쩌면 하임달의 큰 전투에 투입되지도 못할 판이었다.
남부의 운명이 걸린 하임달 공략을 앞두고 그의 표정에 불안감이 조금씩 드리웠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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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14, 우리의 생명, 그들의 무기] 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회부터는 후반 하일라이트로 접어드는 새 파트 [파트15. 고향으로 가는 길]이 시작됩니다. 무대는 황제령과 하임달로 바뀝니다. 카렐과 페로, 코리온과 베흔, 코나와 자이납 일행이 다시 총출동하고 새 인물(혹은 굉장히 헌 인물?)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마지막 편인데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오면 슬픕니다~~~( ̄∇ ̄)ブ~~★
노블레스나 전자책도 사랑해 주시고요. 전자책은 다음달 초에 2부 1~4권을 낼 예정입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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