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38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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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꼴이 왜 그래?”
자다 말고 이불에서 엉금엉금 기어나간 페로가 자신에게 뜬금없이 연락을 해 온 카렐에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할룩스 건너편의 카렐은 웬 창고 비슷한 주기장에서 몸 곳곳에 기름때를 묻힌 채 뭔가 작업을 하고 있는 듯했다. 카렐은 눈에 잠이 잔뜩 든 페로의 모습에 머쓱해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 미안해, 벌써 자고 있을 줄은 몰랐어.”
“아냐, 아냐, 내가 일이 있어서 평소보다 좀 일찍 잤어.”
페로는 얼른 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도 안 되었으니 자정 가까워서야 잠자리에 드는 평소 습관을 생각하면 초저녁이나 마찬가지였다.
페로는 자신이 빠져나온 이불 속에서 하얀 등을 드러낸 채 깊이 잠들어 있는 알리야 부인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일찍 잠자리에 든 건 부인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 때부터 노골적으로 비치던 부인의 뜨거운 눈빛을 그로서는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둘은 몇 번이나 격한 사랑을 나눈 후, 초저녁부터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던 참이었다.
알리야 부인은 이제 ‘의붓아들의 부양을 받는 할일 없는 미망인’ 신분이 아니었다. 그와 페로의 관계가 급격히 가까워지고, 페로의 가문 운영을 돕는 능력이 생각 외로 탁월한 것을 확인한 동부최고제후 다히르는 자신의 의붓어머니를 공식적인 가문 대사로 임명해 페로와의 관계를 확실히 다지려 하고 있었다. 이젠 ‘슈트란 가 대사 겸 동부 총괄대사’가 된 알리야는 공식 직함까지 가지고 그의 곁에 당당히 머물 자격을 얻었다.
“근데 거긴 한밤중일 텐데, 정말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때, 자이납이 카렐의 할룩스 화면 밑에서 슬그머니 나타나서는 웃통을 벗고 있는 페로에게 능글맞게 손을 흔들다가 카렐에게 바로 쫓겨났다.
“그나저나 넌 왜 잠옷도 안 입…….”
페로에게 웃으며 말하려던 카렐이 말끝을 더듬었다. 페로의 가슴에 나 있는 키스마크에 잠시 얼굴이 붉어졌던 카렐이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 미안해, 내가 타이밍을 잘못 잡았구나.”
“뭘, 아냐, 말해. 아무 것도 아냐.”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시력 때문에 자신에게 키스마크가 있다는 것도, 카렐의 표정이 잠시 굳었던 것도 모르고 있던 페로가 빤한 변명을 하며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겼다.
“아냐, 나중에 물어볼게.”
“기왕 깼는데 지금 말하라니까. 궁금해서 더 못 자.”
아직 잠이 덜 깬 페로가 버럭 짜증을 냈다. 무심결에 목소리를 높였던 페로는 다시 알리야 부인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살짝 뒤척였던 부인은 페로의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다시 쌔근거리고 잠이 들었다.
카렐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오르마즈 경 남편이었던 네포프 칼리 경 말이야, 너 동부 슈트란 가에 있을 때 혹시 만난 적 있어?”
카렐의 생뚱맞은 물음에 페로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내가 그 옛날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냐? 그런데 그 남자가 왜?”
“아니……지난번 네가 건네 준 문서 꾸러미 말이야. 거기서 이상한 사건 문서가 하나 나왔거든.”
“꾸러미라니?”
머리를 긁적거리던 페로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잠이 깨면서 페로의 기억도 점점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아, 그거? 왜? 이상한 사건이라니?”
며칠 전, 카렐은 오르마즈 경이 죽은 291년 전후 몇 년간 동부에서 있었던 살인 및 실종사건, 혹은 신원미상 사망자의 목록을 찾아달라고 페로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카렐은 당시 사라진 네포프 경이 정말로 행방불명이 된 건지, 아니면 혹시 어딘가에서 죽어 없어진 후 잊힌 것인지를 알기 위해 제국 전역의 자료를 다 뒤지는 중이었다. 황제령과 북부, 서부는 자신과 비빈들을 동원하면 되는 것이고, 동부의 경우는 페로의 손을 빌리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페로는 동부 총괄대사가 된 알리야 부인에게 부탁해 네포프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수백 건의 사건파일을 1차로 걸러내어 보안국에 보내주었었다.
카렐이 복사본 자료 한 장을 들어보였다.
“요동에서 나온 자료인데, 하임달의 결전이 있고 2년 후에 ‘슈트란 종가에서 갓 나온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주작대로에서 납치를 당해서 며칠 후에 죽은 채로 발견된 사건이 있었어. 남자는 소지품을 모두 털리고 알몸으로 발견되었는데 치안군이 나중에 범인을 잡고 봤더니 슈트란 종가 근위병이라서 가문에 시체와 함께 사건을 넘겼어. 그런데 슈트란 종가 자료엔 그 사건이 없다고 보안국에서 궁금해 하고 있어.”
“살짝 구린내가 나는데?”
페로가 다시금 알리야 부인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눈을 제대로 못 보는 페로를 대신해 카렐에게 넘긴 동부의 사건 자료를 직접 정리한 것이 바로 알리야 부인이었다. 부인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카렐이 흐릿한 복사본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치안군 자료에 따르면 죽은 남자는……지문을 없애고 난도질을 해서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파란 눈에 6척1촌(183cm) 호리호리한 몸매의 코카서스 인이야.”
“요동 사람은 아니네?”
“그러게. 들어 봐봐. 소지품 중에 유학 서적이 있었고 근육이나 골격 상태를 보아도 육체노동자는 아니고 귀 밑을 무언가로 지진 흔적이 있는 게 처음엔 그네들도 상급귀족문이나 황족문을 지운 게 아닐까 추정했던 것 같아. 유전자 검사에까지 기밀이라고 나오니 부담을 느끼고 사건을 가문에 넘겼을 수도 있지.”
“갈수록 구린데? 제국에 상급귀족이나 황족이 몇이나 된다고? 상급귀족 납치살인이라면 난리가 났어야 하는데 기록이 없을 리가 있나?”
잠이 확 깬 페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알리야 부인 쪽을 힐끔거렸다. 앞에 있는 사람이 카렐이 아니라면 당시 슈트란 가 종부였던 알리야 부인을 깨워서 그 일을 묻고 싶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눈치를 챈 카렐도 대충 모른 척 해 주는 선에서 넘어가기로 했다.
“난 또 그 인간이 하임달에 숨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쪽을 뒤지고 있었는데 괜히 헛다리짚은 건지도 모르겠네. 여기 피살자가 혹시라도 이게 네포프 경이라면 슈트란 가가 사제의 키를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잖아.”
“그럼, 당연히 알아봐야지. 최대한 빨리 알아보고 알려줄게.”
카렐과의 연결을 끊은 페로는 다시 물 한 잔을 마시고 알리야 부인의 곁으로 조심조심 들어갔다. 모로 누워 있던 부인이 낮은 신음을 내며 그의 우람한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부인의 고운 손이 그의 몸을 더듬는 느낌과 탐스런 젖가슴이 가슴과 배를 스치는 느낌은 항상 그를 화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막 카렐의 얼굴을 보고 온 괜한 죄책감 때문인지, 최소한 지금은 부인의 관능적인 애무가 왠지 부담스러웠다.
그는 잠든 부인의 보드라운 몸을 몇 번 쓰다듬어주고는 똑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초저녁에 너무 기운을 많이 썼는지, 얼마 못 가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페로와의 통신을 끊은 카렐은 씁쓸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황궁 뒤편 프리깃 주기장 가건물 안에는 지난번 아라무트의 카히나 성에서 마우저에 맞아 한쪽 엔진이 고장이 난 불릿이 엔진 내장을 드러낸 채 흉한 몰골로 세워져 있었다. 평소 고상한 차림새를 고수하던 코리온도 오늘은 긴 머리도 질끈 묶고 기름때 묻은 셔츠 차림새로 부서진 엔진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중이었고 이 일을 돕겠다고 나온 주페도 날개 밑에 쭈그려 앉아 매뉴얼과 서류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망가진 부품 하나를 빼내온 코리온이 고개를 저으며 카렐에게 다가왔다.
“새로 만들어야 할 부품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리용 부품이 없어 옆 엔진을 뜯어 참고해서 모두 새로 만드는 중입니다. 몇 개는 다행히 기성품이 있어 주문이 들어갔지만 몇 개는 아직 부품의 정체도 파악을 못 해 제작이 쉽지 않습니다.”
“미치겠군.”
카렐이 공구를 옆에 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삼각루트가 개통되지 않은 상황에서 하임달 9번 행성에 선발대라도 파견하고 싶지만 보통 일이 아니었다. 5번 행성에서 출발해 며칠이나 되는 장거리 운항을 하거나, 아니면 그나마 가장 빠른 이 불릿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카히나 성 전투의 하필 마지막 순간 자이납과 라스를 구하다가 엔진 하나가 부서져 두 번째 방법도 막힌 상태였다.
카렐은 최고의 항공기술자들 몇을 급히 수습해 코리온을 도와 수리를 하는 중이지만 애당초 제국의 기술수준을 뛰어넘는 이 발명품을 고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리온은 불릿 옆에 수북이 쌓여 있는 불에 그슬린 잔해와 상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난번 트라에타오나 궁전을 공격하셨을 때 타고 남은 잔해 속에서 발견한 부품과 당시 추락한 불릿에서 수거한 엔진 잔해들입니다. 잘하면 여기서 몇 개를 건져 재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모두 가져오게 했습니다.”
“잘 했습니다, 학장. 학장께서 만사 제쳐놓고 짐을 이리 도와주시니 세상에 이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군요.”
카렐은 코리온의 가슴에 달린 상장을 힐끔 보았다. 막내동생 에우테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가 며칠간 두문불출하느라 수리가 늦어졌지만 카렐도 차마 그를 재촉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해쓱해진 얼굴로 다시 나타나 이렇게 셔틀을 손보고 있었다.
“맘도 편치 않을 텐데 무리할 필요는…….”
“아닙니다. 뭔가 할 일이 있는 편이 낫습니다.”
코리온은 살짝 눈물이 밴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카렐이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이런 대답은 제 스타일이 아니지만……솔직히 전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들어간 주문제작 부품은 한 달이면 나올 것 같습니다만 아직 용도도 파악 못 한 부품들이 몇 있어 그걸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속 편하게 두 달로 생각하고 있겠소.”
카렐은 누군가 격납고 한쪽에 걸어놓은 제국 지도를 힐끔 보았다. 이전에는 제국 공식 지도에 들어있지도 않았던 하임달 9번 행성이 구석에 누군가 펜으로 동그랗게 그려 표시를 해 놓은 상태였다.
“이번에 전향한 그대 아버지 예르마크 경이 정보를 줬는데 남부는 이미 한 달 가까이 전에 삼각루트 작업을 시작했다 합니다. 염병할, 출입기록을 조사해 보니 트라카 교단에 맡겼던 수나 마구스의 팔찌를 빼돌린 게 아무래도 수우 그자였던 것 같소. 지금 보안국에서 체포해 압송하는 중이요. 응당 그대가 갖고 있어야 마땅한 것인데…….”
순간 죄인이 되어버린 코리온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를 힐끔 보았던 카렐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사에나 경이 칼릴의 헬홀에서 오는 중이니 돌아오는 대로 우리도 하임달로 가는 삼각루트 오픈 작업을 시작해야지. 서부 아켐의 삼각루트 기지는 찾아내 보니 먼 옛날에 홀랑 다 타버려서 다시 설비를 갖추려면 한 달은 걸릴 것 같답니다. 일단은 황제령에서 출발하는 루트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쉐너 국장이 하필 이런 때 칼릴에 가 있군요.”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이리 될 줄 알았나. 블리자드 지역을 벗어나서 셔틀을 타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소. 워프루트가 먼저 닿을지, 불릿을 먼저 고칠지 둘이서 내기라도 거시구려.”
카렐이 더러워진 장갑을 벗어 옆에 던져놓으며 억지로 웃었다. 그의 왼쪽 손목에는 지난번 깨어져 부서진 가디언 팔찌 대신 이번에 코리온이 가져온 대신관 팔찌가 안쪽의 머리 셋 달린 용을 볼 수 없도록 다른 금제 장식을 위에 살짝 덧대어진 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코리온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저 팔찌를 사용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맘에 안 드는 팔찌를 애써 외면하며 말을 돌렸다.
“남부가 그렇게 일찍 시작했다면 우리가 많이 늦습니다. 그 정도면 남부가 하임달에 대군을 배치하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카렐이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요. 남부 놈들보다 우리가 많이 처지면 곤란하지요. 맘 같아선 남부의 통제기지를 박살내고 싶은데 알아보니 이미 대군을 배치해서 우리로선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하임달을 최대한 빨리 선점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지요. 그런데 예르마크 경 말이 놈들이 그 작업을 할 때 ‘양쪽에서 함께 출발하면 기간이 절반으로 짧아진다.’는 말을 했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임달 9번 행성에서도 황제령으로 함께 워프루트 작업을 시작하면 기간이 훨씬 짧아진다는…….”
“문제는 하임달의 옛 삼각루트 기지를 찾을 수가 없다는 거요. 지금까지 인터뷰한 사람들 모두 자기가 작업을 한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일을 했었다는 것 같습니다. 옛날 공사자료를 아무리 뒤져도 남부와 황제령, 서부의 자료는 있어도 하임달의 자료는 깨끗이 지워졌더군요. 당시 대신관이고……내 할아버지였던 야푸르가 무슨 이유엔지 의도적으로 숨긴 듯하오. 그렇게 감출 곳이라면 아무래도 내 생각엔…….”
“검은 철성과 황금탑, 판지셰르 낙원 부근 어딘가겠군요.”
타리프의 일지를 떠올린 코리온이 살짝 앞서나가자 카렐이 피익 웃었다.
“역시 학장의 생각이 내 생각이요. 내 그래서 황금탑을 찾아낼 팀을 좀 보낼 참입니다.”
카렐의 시선은 불릿을 고치느라 고생하고 있는 엔지니어들 옆에서 야참을 먹고 있는 네 사람을 향했다. 먹성 좋은 자이납과 코나, 우베 옆에 코리온의 몸종 라스가 끼어들어 함께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그들 한쪽엔 딴에는 코리온과 주페 오빠를 돕겠다며 따라 나온 마리안이 항상 그렇듯 오늘도 제사보다 젯밥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야참으로 찐빵을 먹고 있던 어른들은 등 뒤에서 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쪼그려 앉아있는 콩알만한 소녀의 시선에 소화불량이 걸릴 판이었다. 어른들은 ‘아이가 이미 저녁을 먹었으니 먹을 것 주지 마라’는 황제의 지시 때문에 이도저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먹고 싶다느니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않은 채 그냥 뒤에 조용히 쪼그려 앉아 찐빵에 구멍이라도 낼 듯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우베가 카렐 몰래 아이 얼굴 만 한 찐빵 두 개를 내밀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드세요.”
그제야 얼굴이 환해진 마리안이 양손에 찐빵 한 개씩을 들고는 불릿 밑에 있는 오빠 주페에게 쪼르르 달려와서는 옆에 웅크리고 앉아 한 개를 쑥 내밀었다.
“하여간, 누구 손녀라고 안 할 까봐.”
결국 그 모양을 본 카렐이 막내딸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코리온이 불 옆에서 열심히 고기를 뜯고 있는 청년을 가리켰다.
“라스 저 녀석도 함께 보내시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라스가요?”
“그간 제가 과거에 쓰였던 몇 가지 언어를 가르쳤습니다. 고향행성에서 쓰였던 언어도 있으니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카렐은 한때 까막눈 노예였던 그 자그만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렇군요. 저 친구도 하임달 9번에 보내야겠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이납 저놈은 며칠이나 셔틀을 타면 답답해 까무러져죽지나 않을까 모르겠네.”
카렐이 피곤이 그득한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기름냄새 가득한 격납고에서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마리안이 찐빵을 들고 황제를 쪼르르 따라 나가려 했지만 코리온을 힐끔 본 주페가 얼른 동생을 옆에 억지로 앉혔다.
코리온이 부르지도 않은 카렐의 뒤를 바싹 따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제가 아라무트에 다녀온 며칠 새 더 마르신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아직은 버틸만하니까 염려 마시오.”
누가 보기에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억지로 강한 척을 하려 하는 카렐의 모습에 코리온은 낯을 살짝 찌푸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렐이 격납고를 나서서 황궁 서쪽 정원으로 나서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정이 넘어간 황궁 정원은 인적도 끊겨 적막하기까지 했다.
“저곳 경비를 강화하셨군요?”
코리온은 정원 한쪽에 지어지다 만 거대한 캐노피를 가리켰다. 정원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넓은 계단과 램프 위에 투명한 덮개까지 씌워져 있는 것이 큰 작업은 마무리된 단계였다. 검은 제복 차림의 무장한 보안국 헌병 서너 명이 사뭇 차가운 표정으로 그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에아 신전 지하에 있던 정체불명의 제어 판넬이 지금까지는 그저 지하 카타콤베를 제어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었지.”
“그런데 몇 가지 기능을 아직 알 수가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 옛날 삼각루트 공사자료를 입수했는데, 그걸 보고 몰랐던 기능을 찾았지 뭐요. 삼각루트의 황제령 쪽 출구를 제어하는 기능이 바로 거기에 있던 거 같소.”
“스위치 몇 개밖에 없던데 워프루트 제어 판넬이라고 보긴 너무 간단한 것 아닙니까? 아시겠지만 워프루트의 지상시설엔 어마어마한 제어시설과 장비가 필요합니다. 제너레이터와 송신기와…….”
“뭐, 거긴 켜고 끄는 장치만 있고 다른 중요한 장치는 아마 황궁이나 지하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 그 회선이 어디에 연결되었는지 아직은 못 찾았소. 그놈의 지하공간은 교단 때 꺼라 도면도 당최 안 남아있어서 말이지. 그제부터 경비를 강화하고 엔지니어들 투입해서 기능만 확인했는데 그 오래된 게 신기하게도 아직 작동이 되는 것 같더군.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이미 옛날에 하임달을 개척했을 텐데……어쨌든 신전 개보수 공사가 급한 게 아니니 일단 모든 공사를 중단시켰소.”
코리온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신전이 아니고 황실 대강당입니다.”
“아, 알았소. 이거 한 번 더 실수하면 한 대 칠 기세로구먼.”
카렐이 껄껄대며 대답했다. 그가 코리온과 원리주의 유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궁 지하의 에아 신전 개보수를 강행한 건 황실의 빠듯한 재정문제 절반, 사심 절반이었다. 지난 제위전쟁 마지막 날 무너져버린 황궁의 대연회장 아스트라이아 홀을 새로운 황제령인 수베르에 옮겨서 재건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그러고 나니 정작 아케메니아의 황궁에서 큰 행사에 쓸 대강당이 없었다.
사실 카렐은 처음부터 지하 신전들, 특히 에아 신전을 재활용할 맘이었다. 그곳은 애당초 큰 행사를 위해 만들어져 최대 3천 명을 수용하는 3층의 웅장한 좌석에 설계도 일품이었다. 카렐은 이미 ‘문화재 복원’을 핑계로 지하의 12신전에도 사교도 성직자 출신 관리인을 선임해 당장 예배에까지 쓸 수 있을 만큼 주기적으로 관리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코리온을 비롯한 유학자들의 극렬한 반대로 30년 넘게 별관에 딸린 작은 연회장을 왔다갔다 해가며 궁상맞게 행사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정작 가장 불편한 건 행사가 많고 격식을 따지는 상류층이나 유학자들 스스로였고, ‘그럼 너희가 신축할 돈을 내놓던지’라며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황제에게 유학자들이 또다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당초 그곳을 [황실 대강당]으로 쓰겠다고 했지만 사실 지상에서 그곳으로 통하는 램프를 내고 의자를 바꾸고 부서진 부분들을 보수한 것을 빼면 크게 공사도 없었다. 첫 번째로 든 이유는 예산부족이었지만 100% 진심이 아니라는 건 코리온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그곳에서 교단의 색깔을 지워내는 일보다는 복원에 더 열중하고 있었다.
카렐은 자신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쳐다보는 코리온의 모습을 못 본 척, 음산하고 더 깊은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깜깜해지면서 카렐의 마구스 팔찌에 달린 둥근 칩에서 나는 아주 희미한 빛도 점점 또렷해졌다.
“희한하지 뭐요, 특별히 동력원도 없는 것 같은데 내 피에 닿으니 이런 빛이 나지 뭐요. 사에나 경도 이 빛이 나고 말이지. 라말라 박사 말이 마구스 직계 혈통의 핏속에 다른 사람은 없는 이상한 물질이 있어서라고 하던데 또 마구스 혈통이라고 다 이런 것도 또 아니라더군.”
팔찌 이야기에 내내 불편한 표정을 짓던 코리온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방금 페로 경과는 무슨 통화를 하신 겁니까?”
카렐이 이번엔 정말로 진심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코리온을 돌아보았다.
“내가 총리와 연락할 때마다 항상 그리 궁금하시오?”
카렐을 바싹 뒤따라오던 코리온은 뾰로통해진 얼굴로 그와 한 발 거리를 벌렸다. 카렐이 낄낄거리며 앞장섰다.
“사제의 키의 행방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소. 내 지금껏 며칠간은 네포프 칼리 그자가 사제의 키를 가지고 북부 어딘가에 잠적했다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동부 어딘가에서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자료가 또 나왔다오.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구려. 어쩌면 둘 다 사실일지도 모르지. 아이들을 볼 때마다……나도 살고 싶소.”
카렐이 말을 멈추고 큰 소나무 아래에서 문득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코리온이 어느새 그의 허리를 뒤에서 말없이 안고 있었다.
“상상하시는 불상사는 절대 없을 것입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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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부터 [파트15, 고향으로 가는 길]이 시작됩니다.
아이들도 종종 양념처럼(?) 등장할 것 같습니다. ^^
원래 이번 회는 과거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르마즈의 말년 결과(?)는 아는 내용이고, 연재본에선 현재 위주로 빠른 진행을 선호하시는 분들이 많아 전개상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연재본에서는 과거편은 빼고 현재편 위주로 진행하려 합니다.
파트 첫편에서 마수걸이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지는 않겠죠?? ~~~( ̄∇ ̄)ブ~~★
아참, 노블레스 연재중인 출판본은 4월 16일부로 프리미엄으로 이전 예정입니다.
노블레스가 야동 분위기(???)가 있어서 제 글의 독자층과 맞지 않아 기간제로 모든 글을 다 보는 노블레스보다는 편당 결제하는 프리미엄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후 차기작 연재시 프리미엄에 통합해서 관리하려는 사전작업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바로 옮기면 저도 좋지만 이미 노블레스 결제하고 보시는 분들을 위해 조아라에 최대한 유예기간을 부탁해서 16일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혹 제 글만을 보려(그런 분이 계시다면요 ^^;;;) 노블레스 결제하시려면 그 날짜를 넘기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예정) 조아라 노블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