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41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
.
.
황제의 특명을 받아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인 하임달 9번 행성으로 향하는 베흔과 코나, 자이납, 우베와 라스는 옆으로 3일 동안 타고가야 할 셔틀을 보며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황제령에서 하임달 5번 행성까지 오는 길은 베흔의 전용셔틀 덕분에 금세였지만 그곳에서 9번까지 가는 길은 첩첩산중이었다.
“무슨 셔틀이 이 모양이래?”
족히 50년은 넘게 쓴 듯한 낡아빠진 수송셔틀에는 대체 어느 시절 붙인 건지 알 수 없는 [근위대 북부파견군]이라는 딱지 위에 사역병들이 [황실군 본부 하임달 분견대]라는 새 딱지를 열심히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셔틀의 원형은 최대 200명 가까이 태울 수 있는 비교적 큰 수송셔틀이지만 그 먼 곳까지의 왕복 연료에 오가는 동안의 식량, 현지로 가져갈 보급품까지 실을 수 있도록 개조했다보니 실제 탈 수 있는 인원은 2, 30명이 최대였다.
“출발 30분 전이다! 6일이나 놀고도 부족했던 놈 있냐!”
선임사관으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셔틀 주변에 모인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치 160년 전 하임달 전장에서 잡아온 듯한 거친 인상의 오늘자 교대 2조 병사들 20여명은 사관의 목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큼직한 휴가용 백 위에 앉고, 기대고, 몇몇은 베고 누운 채 몇몇은 쿨쿨 자고 있고, 몇몇은 자기들끼리 잡담에 열중하고 있었다.
민간의 [유골 발굴단]으로 위장해 이번 교대 팀에 합류한 베흔 일행도 큼직한 여행용 가방을 옆에 던져놓고 다시 셔틀을 빙 둘러보았다. 조종사와 부조종사, 정비요원들이 낡은 셔틀에 혹시라도 문제가 없는지 여기저기 몇 번이나 점검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오늘 태우고 가는 2조를 하임달 9번에 내려놓은 후, 3조를 태우고 왕복 6일 후 이곳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저거 날아가다가 스페이스에서 펑 하고 터지는 거 아니겠죠?”
부조종사가 엔진실에서 뭔가 시커먼 부품을 휙 내던지는 모습에 자이납이 몸서리를 치며 물었다.
“허어, 걱정들 잡아매시구려, 저 조종사 친구들 일하는 건 좀 거칠어도 솜씨들은 황실군 최고니까. 우리 부대처럼 말이요.”
그때, 방금 전까지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러대던 덩치 큰 사관이 라스의 옆에 몸뚱이만한 가방을 쿵 하고 내려놓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남자의 덩치에 지레 놀란 라스가 얼른 자이납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저 고물만 30년 넘게 한 번도 사고 없이 몰았으니 뭐 말할 것도 없지.”
“안녕하세요, 여기 오래 계셨나봐요.”
아버지 닮아 넉살 좋은 우베가 친한 척을 하며 아직 입을 안 댄 뜨거운 차 한 잔을 그 사관에게 불쑥 내밀며 물었다.
“이번에 황제령에 편입되어서 분견대도 연대 규모로 확장된다니까 저 셔틀도 이제 빠이빠이 아닌가요? 듣자하니 쿠트라스에서 프리깃 2척 개조 설계에 들어갔다던데.”
“거 시원섭섭하구려.”
덩치 큰 사관은 우베가 내민 차를 냉큼 받아 한 모금 홀짝거리고는 솥뚜껑만한 큰 손을 불쑥 내밀었다.
“선임사관 마르텔로요. 제국에서 몇 안 되는 하임달 9번 토박이 중 하나지.”
그 덩치가 킬킬거렸다.
이번엔 호기심이 동한 자이납이 슬그머니 그자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몇 년이나 있었길래 자칭 토박이요?”
“글쎄, 정확한 연도는 가물가물한데, 원래 종친회 사병부대에 있었다가 230년에 근위대에 입대해서 291년까지 한 40년쯤 있었고……, 하임달 전투 끝난 직후에 베흔 그 빌어먹을 새끼가 분견대 출신들을 다 강제 전역시켜서 한동안 막일하고 대충 살다가 360년에 제한이 풀리길래 재입대해서 또 여기 지원했소.”
거구가 킬킬거리며 뜨거운 차를 한 번에 훌쩍 들이켰다. 우베는 바로 뒤에 ‘빌어먹을 새끼’ 베흔이 도끼눈을 뜨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계속 물었다.
“강제 전역이요? 왜요?”
“뭐긴 뭐겠소. 하임달에서 오르마즈 그 양반한테 엉덩이 차이고 개망신당하더니 괜히 애꿎은 우리 분견대만 마녀사냥한 거지.”
‘하임달에서의 개망신’ 이야기에 결국 씰룩거리는 입을 참지 못한 베흔이 툭 끼어들었다.
“내 알기로 오르마즈가 처음 하임달에 진주할 때 중앙에 보고도 못 한 채로 기지 버리고 줄행랑을 쳐서 그런 거 아니었소?”
베흔의 참견에 마르텔로가 발끈하며 당장 덤벼들 태세로 목청을 높였다.
“여봐요, 우린 고작 120명이었다고요! 수만의 대군이 갑자기 나타나서 우르르 내려오는데 뭘 어쩌라고요? 황궁에 떡하니 앉아서 그 대군이 움직이는 것도 못 잡아낸 놈이 병신이지 변방에서 철없는 탐험꾼들이나 잡다가 날벼락 맞은 우리가 뭔 죄요? 빌어먹을 검은 폭풍 때문에 통신이나 제대로 되는 줄 알아요?”
“워, 워, 그만요, 저 사람도 그냥 서류에 있는 대로만 아는 걸 테니까 이해해요.”
자이납이 능청맞게 웃으며 자기가 먹던 코코아를 절반 뚝 나눠주었다. 베흔도 뭔가 할 말이 입에서 넘쳤지만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마스크로 신분을 위장한 상황에서 분견대 간부와 쓸데없이 충돌을 빚어 신분을 노출할 필요는 없었다.
그제야 좀 누그러진 마르텔로에게 우베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계속 물었다.
“그나저나, 다 합치면 130년이나요? 하임달에 무슨 꿀단지라도 숨겨놨어요?”
우베의 물음에 마르텔로는 격납고가 떠나가라 웃어대기 시작했다.
“바깥세상 놈들은 힘들겠네 외롭겠네 맘대로 넘겨짚고 지원들을 안 해서 항상 인원 채우느라 애먹기는 하는데, 처음 적응하는 게 좀 힘들어서 탈이지 일단 적응만 하면 하임달 9번 근무만큼 만사 속편한 게 없다오. 오죽하면 부대원 절반이 50년이 넘게 안 나가고 궁둥이 붙이고 있겠수. 우리 부대가 비번까지 합쳐 70명쯤 되는데, 나처럼 하임달 직후에 짤렸다가 되돌아온 놈들만 20명이 넘어요.”
“정말이요?”
자이납이 호기심을 보이자 마르텔로가 신이 나서 계속 떠들었다.
“봐요, 18일 근무하고, 왔다갔다 6일에 휴가 6일 주니까 화끈하게 일하고 진탕 놀면 땡이지. 일 년에 네댓 번 본부에 정기 훈련이라도 나가면 다음 교대셔틀 출발일까지 보름 가까이 탱자탱자 놀 때도 있다오. 큰 전투 나갈 걱정도 없이 오지수당 위험수당까지 두둑하니 챙길 수 있는 보직 봤소? 눈 딱 감고 한 10년 근무하면 황제령에 근사한 큰 집 한 채 살 돈 마련해 나갈 수도 있는데.”
“10년이면 집 사는데 뭣 하러 절반이 50년이나 안 나가고 있어요?”
우베가 슬쩍 딴죽을 걸었지만 마르텔로는 들은 척 만 척 자기 말만 이었다.
“의무기간 2년만 채우고 도망치는 놈이 반이고, 나처럼 토박이가 된 놈들 반이요. 저기 셔틀 꽁무니 밑에 디비자고 있는 까만 타르서스 여자는 산토스 상등병인데 딱 10년 근무해서 집 사 나가겠다고 들어왔다가 휴가 때마다 실없는 남자만 만나서 돈만 날리고 50년째 저러고 있고……저기 기둥 옆에서 책 보고 있는 놈은 기술사관 프레소인데 광산에 있다가 90년 전에 나하고 같이 들어와서 말뚝박아버린 놈이요.”
요즘 보기 힘든 동그란 골동품 안경을 쓴 갈색머리 남자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마르텔로를 힐끔 보며 형식적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와아, 미남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이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큼직한 백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남자는 6척이 훌쩍 넘는 큰 키에 팔다리가 쭉쭉 뻗은 호리호리한 몸매, 크고 푸른 빛 그윽한 눈매에 오뚝한 코와 광대뼈가 도드라진 전형적인 코카서스 미남이었다. 지적인 인상에 안경까지 쓰니 군복만 벗겨놓으면 당장 아카데미 강단에 세워놔도 어울릴 학자처럼 보였다.
마르텔로가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저놈만 해도 원래 광산 엔지니어였다가 나하고 우리 소대장이 꼬셔서 기술병으로 들어왔는데 전투병들처럼 군 경력이 없어서 처음엔 완전 고문관이더니 이젠 토박이가 다 됐지 뭐요. 군대 다니면서 통신과정 위탁생으로 화학공학하고 기계공학 박사까지 딴 걸 보니 머리도 굉장히 좋은 놈이요. 뭐, 하기야 우리 부대가 노는 시간이 좀 많긴 하지만 그거 활용하는 놈은 저놈뿐인 것 같소. 맘만 먹으면 사회에서 어디 간부로도 들어갈 텐데 나처럼 여기가 만빵 편한가 봅니다. 큭큭.”
“그래서 이렇게 상등병이 많은 거예요?”
우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옛 근위대, 현재 황실군은 같은 계급에서도 제후군에 비해 직급이 높고 대우도 훨씬 좋은 만큼 입대하는 것도, 승진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황실군 정식 보병을 뜻하는 왼쪽 어깨의 세로줄을 달려면 제후군이나 치안군에서 10년 이상 근무했거나, 5년 이상을 견습 사병인 무급(無給) 사역병으로 허드렛일을 돌며 훈련만 받아야 했다.
정식 보병이 된 후 다시 수십 년의 경력을 쌓은 상등병은 제후군의 사관에 해당하고 통솔권도 가지는 만큼 10명 중 많아야 두셋 정도가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 희한한 부대는 병사들의 거의 절반이 어깨에 세로줄 2개씩을 달고 있었다.
그때 점검을 끝낸 조종사가 문짝을 손으로 탕탕 치자 셔틀 주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병사들이 묵직한 백을 짊어지고 하나 둘 문가로 모여들었다. 베흔 일행도 이런저런 관측장비와 기계류가 가득 든 어마어마하게 큰 수레를 밀고 셔틀에 다가갔다.
“어휴, 이걸 어디다가 다 싣는대?”
큰 짐을 옮겨 싣던 부조종사가 베흔 일행의 장비 상자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상자를 열어 본 그는 정체모를 기계들이 가득 든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장거리 금속 탐지기요?”
옆에서 코나에게 불쑥 물은 건 조금 전 마르텔로가 가리켰던 기술사관 프레소였다. 셔틀에 타러 가던 그는 일행의 짐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미남이 말을 걸자 얼굴이 해사해진 자이납이 냉큼 끼어들어 대신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우린 발굴단이라…….”
“제가 알기로 이건 지하 탐색용이 아니고 지상 구조물을 찾아내는 모델 아닌가요?”
당황한 자이납이 대답을 못 하고 더듬거리자 코나가 냉큼 끼어들었다.
“황상께서 옛날 병영 터를 복원할 계획을 갖고 계신 것 같소.”
둥근 안경 속에서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기계를 지켜보던 남자가 냉담하게 말했다.
“검은 폭풍 때문에 먹통이 된다는 데 10골드 걸겠소.”
프레소의 지적에 기계들의 작동을 맡은 우베의 얼굴이 붉어졌다. 안 그래도 코리온도 이들이 챙겨 갈 탐색 장비 목록을 보며 얼마나 제대로 작동할지 염려를 했던 터였다.
프레소가 다른 기계들을 꺼내 확인하며 말했다.
“이대로는 미세먼지 때문에 날씨 안 좋은 날에 썼다간 며칠 못 가 다 고장이 날 거요.”
“안 그래도 먼지 때문에 틈새마다 다 필터를 붙이라고 했는데요?”
“색깔을 보니 공업용 2급 필터인데 이걸로는 안 됩니다. 가는 동안 시간도 많으니 방사능 오염지역에서 쓰는 1급 필터로 다 바꾸시오. 우리 공조기용으로 가져가는 게 있으니 잘라주겠소.”
“어머나, 똑똑하고 친절하기도 하셔라.”
자이납이 킬킬거리며 이 미남자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남자가 기겁을 하며 자이납에게서 한 발 떨어져서 섰다. 그는 자이납의 끈적한 시선을 못 본 척 허둥지둥 셔틀 안으로 사라졌다.
짐을 다 싣고 비로소 셔틀의 트랩을 오르는 코나와 일행에게 베흔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 부대 놈들 뭔가 이상하다.”
코나가 평소 감정이라고는 거의 드러내지 않는 까만 눈동자를 힐끔 움직여 이 거구를 돌아보았다. 우베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하임달 일로 안 좋은 소리 좀 들었다고 너무 그러지 마세요, 큭큭.”
우베를 사납게 한 번 째려보았던 베흔이 다시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몇 놈들이……이상하게 낯이 익어. 방금 선임사관이라는 그놈도 그렇고.”
“하임달 후에 짜르셨다더니 그때 보신 게 아니고요? 그때 짤린 놈들이 되돌아왔다잖아요.”
자이납이 작은 소리로 물었지만 베흔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천하의 근위대장이 사병 몇 놈 짜르는데 직접 면담이라도 했을 것 같냐? 그냥 명령하고 서류에 서명만 하면 끝이지.”
“하긴 그렇네.”
“내 오래되어 기억이 잘 안 나는데……하임달 직후에 그 부대 놈들을 다 짜른 게 그때 공개적으로 말 못 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거든.”
베흔은 자신의 기억력을 탓하듯 괜히 머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을 탁탁 쳤지만 그런다고 160년이 지난 그 오랜 기억이 되돌아올 리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답답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베흔 자신은 더 답답했다.
셔틀 안은 3일이나 되는 비행을 위해 좌석 대신 2층 혹은 3층의 침대가 양쪽으로 놓인 쿠셋 6개가 복도 양쪽으로 설치된 모양이었다. 대부분이 ‘근무지 복귀 전 마지막 날’ 거나하게 놀고 돌아온 병사들은 마치 지정석처럼 자신의 쿠셋과 침대를 찾아가 짐을 던져놓고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5명의 베흔 일행도 지정된 쿠셋에 들어가 짐을 풀어놓고는 얼른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미리 조사해 온 이 분견대의 자료를 꺼내들었다.
“보름 전까지는 북부파견군 예하에 있었지만 이번에 황실군 본부 직속으로 바뀌었고……, 지휘관인 세하 비장 휘하에 사관 8명, 상등병 29명, 보병 30명, 3명의 기술지원팀과 의무병 2명까지 총원 73명. 3조 2교대로 운용중이라 실제 주둔인원은 40명에서 50명 사이. 절반 이상이 장기 지원 근무 중.”
베흔은 서류까지 구석구석 살폈지만 그런다고 없는 기억이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때, 조종사의 방송이 들려왔다.
“지금 출발한다. 9월 11일 13시경에 도착 예정이다.”
이 방송을 유심히 듣고 있는 건 베흔의 일행들뿐이었다. 나머지 병사들은 각자의 쿠셋에서 널브러져 잠들어 있거나 담요를 펼쳐 카드놀이에 열중해 있었다. 늙고 육중한 셔틀은 힘겨운 엔진음을 내며 ‘문명지역의 끝’인 하임달 5번 행성을 박차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291년 9월 11일…….”
베흔은 사뭇 굳은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160년 전, 하임달의 결전이 있었던 그 날이 바로 9월 11일이었다.
차마 외부에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황실 수뇌부와 내명부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카렐은 사제의 키를 찾아낸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아직은 비밀을 지켜 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결국 페로가 아메스에게 귀띔을 하고, 아메스가 다른 비빈들에게 그 사실을 자랑하면서 사방팔방 다 흘러나가고 말았다. 어쨌든 황제의 병을 낫게 할 마지막 방법까지 찾아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연히 가장 기뻐한 이도 세네피스와 비빈들이었다.
이 날의 오찬에선 견원지간인 세네피스와 아메스, 네페티까지도 한 자리에 앉아 함께 큰 웃음을 보였고, 솔은 말할 것도 없고 뱃속의 아들을 잃고 우울해하던 에스더까지도 모처럼 밝은 얼굴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칼릴에 가 있는 베아트릭스도 오찬 시작 전 잠시 통신을 통해 나타나 이들과 기쁨을 나누었다.
“그럼 수술은 대체 언제 하시려고요?”
카렐이 보여준 [사제의 키]를 만지작거리던 세네피스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불릿 격납고에서 바로 오느라 기름때 묻은 차림새로 늦게 도착한 카렐이 애써 둘러댔다.
“아직 구체적인 수술법을 확인 못 해서 확인 후에 하려고 합니다. 당장 제가 다 죽어가는 것도 아니고요. 라말라 박사가 자료를 열심히 찾아 수술 준비를 하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렐이 더러워진 손을 레몬 물에 급히 씻으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사실 이런 재촉을 들을 것 같아 비밀을 지켜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카렐은 오늘 저녁 페로를 다시 만나면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최대한 빨리 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황상께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기 싫습니다.”
세네피스가 사제의 키를 되돌려주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손을 대놓고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비빈들이 돌아가며 한 번씩 헛기침을 했다. 비빈들이 아니면 황제의 ‘맨손’에 감히 손을 대는 건 터부시되었지만 세네피스에겐 아무리 눈치를 주어도, 심지어 시종장이 맨손은 제발 만지지 마시라고 수십 번 귀띔을 주었어도 쇠귀에 경 읽기였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걱정 마시고 제게 맡겨두시면 됩니다.”
얼굴이 빨개진 카렐이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얼른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래저래 경사가 많은 날이군요.”
“왜요? 또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오늘 낮에야 도착한 세네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사에나 경이 오후에 도착할 예정이라 하임달까지 삼각루트 오픈작업을 개시하려 합니다.”
‘하임달’이라는 말에 세네피스의 얼굴이 돌연 붉어졌다. 세네피스는 지금껏 몇 번이나 오르마즈가 최후를 받은 하임달에 꼭 가보고 싶다며 카렐에게 졸랐지만 카렐은 왕복 6일이 넘게 걸리고, 들어간 탐험가들의 절반 이상이 악천후로 행방불명이 되어 시체도 못 찾는 그 험악한 곳에 절대 그를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사실 세네피스는 이미 두 번이나 그곳에 몰래 가려 했었지만 하임달 5번 행성에서 장거리 셔틀을 찾다가 한 번, 그리고 그곳에서 탐험가의 셔틀을 수배해 타고 반나절이나 갔다가 스페이스에서 또 한 번 잡혔었다. 카렐은 그때마다 ‘나중에 직접 모시고 가겠다’며 어렵사리 그를 달래야 했었다.
“그곳을 다시 밟는 첫 방문단에 당연히 저도 들어가겠지요?”
카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훈련받은 부하들이라면 몰라도 세네피스를 그 지옥같은 곳에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타리프의 일지에 따르면, 그곳은 대부분의 그레이오팔 일족이 불 속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은 곳이었다. 개척이 진행되고 환경이 나아진 후라면 몰라도 지금 세네피스를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카렐은 대답을 미룬 채 남은 양고기 조각을 입에 넣었다. 세네피스가 팔찌를 낀 그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시고요. 또 막으시면 이젠 저 혼자라도 갑니다.”
“……그럼요, 당연히 갈 기회를 드려야지요.”
카렐이 일단 둘러대기로 했다. 아직 몇 달이나 남았고, 은근슬쩍 말을 바꿀 기회는 아직 충분히 남아있었다.
============================ 작품 후기 ============================
.
.
.
자이납이 드디어 또 하나의 대어를 포착했습니다~ (하지만 여지껏 단 한 번도 못 건진 건 아시죠??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지는 않겠죠?? ~~~( ̄∇ ̄)ブ~~★
아참, 그리고 전자책 2부 1~4권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유페이퍼에선 그제부터 판매중이고요, 대형서점엔 빠르면 다음주, 늦으면 그 다음주 중에 판매개시될 것 같습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예정) 조아라 프리미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