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42화 (1,037/1,132)

< -- 1042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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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6시가 되기 직전, 황궁 지하의 에아 신전, 아니 며칠 전까지도 [황실 대강당]으로 바뀌기 위한 공사를 벌이던 곳에서는 평소의 망치질이 멈추고 대신 무장한 친위군 병사들과 보안국 소속 엔지니어들의 모습만 곳곳에 보였다.

오늘 같은 비밀스런 모임은 황궁 컴플렉스가 문을 닫고 일반인들 출입이 없는 밤중에 하는 것이 제격이지만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저녁까지 기다리는 건 카렐도 원치 않았고, 굳이 6시로 한 건 또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 오늘은 황궁정원에 [해충 방제작업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차단해놓고 특별한 사람들만 모아 중요한 행사를 열 예정이었다.

거대한 공연장 모양의 에아 신전은 이전처럼 욱리하에 연결된 수로가 관객석 부분과 무대인 제단 부분을 나누는 특이한 구조 그대로였다. 수로를 건너는 구름다리도 이전 형태 그대로 복원되었고, 황궁 정원의 캐노피를 통해 들어오는 주 출입문은 관객석 쪽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전 제단이었던 무대 쪽 높은 위치에는 옛 마구스들의 전용석이 있던 감실과 12개의 옥좌가 ‘문화재’라는 핑계로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전용석 바로 밑의 동굴처럼 움푹 팬 ‘돌벽’은 카타콤베로 들어가는 입구다보니 이번에 신전을 공개적인 대강당으로 바꾸면서 아예 육중한 금속제 문을 달아 폐쇄할 요량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앞에는 아예 아무도 접근 자체를 못 하도록 블록벽을 따로 쌓아 방을 만들어버렸다.

“보내주신 셔틀 타고 최대한 빨리 달려왔습니다.”

사에나가 헐레벌떡 에아 신전에 뛰어들어 황제에게 꿇어앉아 경례를 올렸다.

평상시라면 일개 보안국장이 감히 황제와 귀빈들을 기다리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만은 에아의 팔찌를 지닌 그의 도착시간에 모든 일정을 맞췄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칼릴의 헬홀에 있던 그는 블리자드 때문에 고속의 트라이크를 타고 육로로 셔틀 출입이 가능한 지역까지 최대한 빨리 달려나와 황제가 보내 준 셔틀을 타고 허둥지둥 달려와 가까스로 예정시간인 오후 6시에 맞출 수 있었다.

막 무릎을 펴고 주변을 둘러본 사에나는 에아 신전에 생각 외로 많은 사람이 와 있는 데 적잖이 당황했다. 페로와 코리온은 물론이고 각부 대신들과 황실군 수장 제네르, 주치의 니사, 거기에 비빈과 황자들, 두 태후들과 심지어 생각지도 않은 알리야 부인까지 와 있었다. 그들을 따라온 수행원까지 합치면 거의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구름다리 주변에 와글거리는 중이었다.

당황한 사에나가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왜 이리 사람이 많습니까? 비밀리에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나도 이렇게 모일 줄은 몰랐다.”

카렐도 당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초 그는 엔지니어들을 빼면 자신과 사에나, 페로와 코리온, 제네르 정도만 모인 상태에서 비밀리에 작업을 개시하고 싶었지만 기왕 하임달 9번을 황제령으로 선포한 김에 워프 개통작업도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냐는 페로와 제네르의 설득에 ‘그럼 적당히 알아서 모이게 해’라고 지시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워프 개통하는 건 다 아는 사실이고, 작업 자체는 저 방 안에서 할 테니 상관없겠지.”

“그런데 보안 때문에 일부러 6시로 하신 겁니까?”

카렐이 대답 대신 그저 키득거렸다. 이곳 12개 신전의 복원을 진행하면서, 문제는 중앙의 회전하는 카타콤베에 아무나 드나들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상시 경비가 가능한 에아 신전을 제외한 나머지 11개 신전은 아예 카타콤베와 이어진 구멍을 안에서 잠그는 육중한 돌문으로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리고 에아 신전의 일반 공개도 항상 이곳이 [휴식의 시간]에 접어들어 카타콤베와 단절되는 12시 혹은 6시에만 실시했다.

카렐은 감실 밑에 새로 만들어진 밀실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대충 모인 것을 확인한 카렐은 참석자들에게 비로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거추장스런 연설이니 포고문 발표니 따위는 모두 생략되었다. 페로와 코리온, 각부대신과 니사, 제네르와 비빈들 정도가 황제를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 계시지 말고 함께 들어가시죠.”

페로 뒤에 남겨질 뻔했던 알리야의 팔을 붙든 건 페로가 아니고 엉뚱한 네페티였다. 알리야 부인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같은 것이 감히…….”

“‘감히’라니요, 부인께선 당연히 함께 들어가실 자격이 있지요.”

네페티의 권유에 알리야는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 밀실로 걸음을 옮겼다. 명실상부 제국 2대 미녀가 나란히 팔짱을 끼고 들어서는 모습에 밀실 문을 지키는 보안국의 남자 요원들이 얼굴까지 빨개져가며 시선을 돌렸다.

“이젠 황실의 구원자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네페티가 잔뜩 추켜세워주자 알리야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실 하임달과는 별반 관계도 없는 동부 총괄대사인 알리야 부인이 애당초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공사구분이 확실한 페로는 카렐도 있는 이 자리에 알리야 부인이 갑자기 나타난 데 도리어 당황한 눈치였다.

그를 이곳에 오게 한 건 바로 네페티였다. 지난밤, 황궁으로 네페티를 불쑥 찾아온 알리야 부인의 용건은 수우 때문이었다. 지난번 손자 테번이 일으킨 불상사로 황제 앞에서 면목이 없어진 네페티는 그 원인을 제공하고 팔찌를 넘긴 것이 아들 수우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말 그대로 이도저도 못 하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그로서는 차마 황제에게 아들의 구명까지 요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네페티에게 알리야 부인은 말 그대로 구세주였다. 그는 페로와 약혼을 했고, 이번에 [사제의 키]를 구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을 준 주역이었다. 황제가 이번 일로 목숨을 건진다면 알리야 부인에게도 분명 답례가 필요할 터였다. 그리고 수우는 네페티의 아들이면서 한편 알리야의 사위이기도 했다. 네페티로서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황제에게 받을 빚이 있는 이 ‘사돈’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것을 잘 아는 알리야 부인이 지난밤 불쑥 네페티를 찾아와 ‘사위 걱정’을 말하며 한편으로 동부 총괄대사인 자신이 이런 큰 행사에 초대받지 않았다는 불평을 슬쩍 드러냈으니 네페티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밀실 안, 에아 신전과 지하의 시계 모양 카타콤베가 연결되는 출입문 부근은 33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엔 훤히 드러나 있는 카타콤베의 돌문과 그 옆의 ‘정체불명’ 제어판이 동력도 꺼진 채 휑뎅그레하게 붙어 있는, 마치 유령 우주선의 조종실 같은 풍경이었다면 지금은 세 명의 보안국 소속 엔지니어들과 최신의 제어판이 연이어 불을 반짝이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산 공간이었다.

판넬이 있던 자리에서 뜯겨져 나온 수많은 케이블이 지난 몇 년간 최신의 기계에 연결되어 이 카타콤베와 주변 12개 신전 잔체를 통제하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이제 이곳은 거대한 지하 카타콤베의 중앙 제어실로 운영되고 있었다.

실내에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던 보안국 소속 워프 엔지니어가 이전 이곳에 원래 달려 있던 제어판넬을 들어보였다.

“명을 받자옵고 뜯어냈던 이전 제어판넬을 다시 이어 붙였습니다. 예르마크 경의 증언을 참고해서 확인해 보니 아무래도 이 두 곳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는 판넬의 양쪽 끝에 있는 거울 모양의 손바닥만한 센서를 가리켰다. 한 곳 밑에는 [시작]이라는 단어가, 반대편에는 [목표]라는 단어가 각각 바람어로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최초 설계 도면에 있는 대로 좌표도 입력했고 충전도 시켰지만, 오픈 프로세스를 명령하면 계속 암호코드를 입력하라고만 나옵니다. 두 분의 팔찌를 대야만 시작될 것 같습니다.”

사에나와 카렐은 각각 왼손에 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사에나의 손등에 있는 에아의 팔찌에서도 보통 사람은 어두워야 가까스로 구분할 듯한 아주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었다.

“자네가 출발점이고 마스터키인 내가 도착점이군.”

“알겠습니다.”

사에나가 먼저 왼쪽 거울에 자신의 팔찌를 들이댔다. 순간 오래된 제어판 중앙의 스크린에 노란 색의 큰 삼각형 하나가 확 나타나자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삼각형의 중앙에 있는 점에서 꼭지점 중 하나를 향해 파란 줄이 깜박거리고 있고 그 옆에서 10,000이라는 숫자가 함께 빛을 내고 있었다.

“폐하 차례입니다.”

이번엔 대신관 팔찌를 낀 카렐이 반대편 거울 센서에 손등을 천천히 가져갔다. 손등이 센서에 닿은 순간, 잠시 숨을 멎었던 카렐은 [인증 완료]라는 문장이 스크린에 나타난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날카로운 부저음이 밀실 안을 흔들었고, 참석자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오픈 프로세스 개시합니다.”

엔지니어의 목소리와 동시에 10,000의 숫자가 9,999로 바뀌었다. 엔지니어가 함께 나타나는 수치들을 바삐 확인하며 말했다.

“수치로 보아선……편도 작업으로는 최소 2개월 20일 이상 소요될 것 같습니다.”

카렐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 말은 이미 남부에 한 달 가까이 뒤처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임달 통제소를 찾아내면 절반으로 줄겠지?”

“물론 그럴 겁니다만 그곳의 환경을 생각하면 찾아낸다 해도 이전에 지은 시설이 온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찾아보고 확인할 문제고.”

카렐은 낡은 스크린을 다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케메니아에서 고향행성, 하임달 9번까지 이어진 선이 드디어 깜박거리며 조금씩 길이를 늘려가고 있었다.

아마도 남부의 것은 이미 절반 가까이 완성되었겠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삼각루트의 개통 작업을 환영하며 환호성을 올리는 그 시각, 삼각루트와 전혀 무관한 ―여기 있는 누구나 손댈 수 있을 만큼 보안과는 무관한―한 장치의 개폐기가 [정전]을 알리며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군가가 살며시 치맛자락을 끌며 자리를 뜨는 것을 의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북쪽 12시 방향의 에아 신전이 [휴식의 시간]에 접어든 6시는 정남쪽의 다하카르 신전 역시도 마찬가지로 카타콤베와 격리되는 때였다. 황궁 지하 카타콤베의 12개 신전들 중 공사 중인 에아 신전을 뺀 나머지 11개 신전들은 십여 년 전부터 관광지로 일반에 개방되어 있었다. 물론 계속 여는 것은 아니고 하루 딱 두 번,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각 신전별 휴식의 시간에 앞뒤 10분씩을 뺀 40분간의 방문만 허용하고 있었다.

오늘의 방문자들은 북부 센지에서 단체로 찾아온 50여명과 개인 자격으로 신청한 또 다른 방문객 60여명까지 150명이 넘었다.

황제가 이곳을 개방한 건 [문화재 차원] 명목이었지만 실제 방문객 대부분은 북부나 서부에서 찾아온 돈 많은 교단 순례객이었다. 이들은 성지순례처럼 이곳을 찾아와 각각의 신전을 방문하고 자기들끼리 간단한 예배를 올리기도 했다.

당연히 유학자들이 신전 개방에 반대하며 펄쩍 뛰었지만 굳이 황제가 직접 나서서 그들과 맞설 필요는 없었다. 돈 많은 관광객들이 늘면서 수입이 두둑해진 아케메니아의 주민들이 유학자들의 반대에 발끈하며 황제에게 관광산업 보호를 호소했고, 황제는 중간에서 적당히 난처한 척 하여 이편 저편 줏대 없이 오락가락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덕분에 지난 몇 년간 일부 극렬 유생들이 순례객들에게 오물을 뿌리거나 조명을 끊는 등의 사소한 난동을 부린 일은 자주 있었지만 말 그대로 심술 수준을 넘지는 않았다. 종교라기보다 철학에 가까운 유학은 답답하기는 해도 애당초 폭력적인 종교는 아니었고, 다신교인 교단 신도들 역시 다른 믿음에 그렇게까지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8번]은 고개를 들고 다하카르 신전의 돔을 둘러보았다. 직경 100척(30m)의 웅장한 돔을 이루는 12면의 벽과 돌기둥에는 12교단 신의 섬세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부조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난간을 쳐 놓았지만 자신의 신을 어떡해서든 느끼고 싶어 하는 순례객들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체로 찾아온 신도들은 난간이 있건 없건 각자의 신이 새겨진 부조 앞에서 그 손과 발을 쓰다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경전을 외웠다. 함께 들어온 가이드들도 이젠 그러려니 하며 훼손만 하지 않으면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에도 처음 얼마간은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신전에 무장한 군인들이 서 있는 모양새가 종교탄압의 냄새를 풍긴다는 아케메니아 상인조합의 탄원에 이제 군인들은 입구에서 출입자를 통제하면서 ‘불상사가 있을 때만’ 들어오는 역할을 맡고 있고, 내부에는 황궁 직원인 관리인이 순례객들의 질서단속을 맡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도 [8번]은 오늘 치러야 할 작전에 집중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집중은 고사하고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 눈앞이 막막한 느낌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직전, 자신이 왜 루토에게 안겼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친 짓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루토를 기계에 넣고 그 부분 기억만 싹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와의 섹스는 정말로 환상적이었고,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바에자가 왜 그 남자를 그토록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거의 본능에 휩쓸려 루토와 짜릿한 첫 관계를 가진 후, 그는 ‘이 일을 되새기면 괜히 집중력이 떨어지니 앞으로 내 앞에서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라.’는, 뭔가 궁색하게 들리는 명령을 내려놓긴 했지만 루토가 이후 진짜 바에자에게 이 일을 무심결에라도 말한다면 그는 끝장이었다. 불안해 전전긍긍하던 그는 내내 바에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작은 행동의 변화라도 없는지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바에자가 되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행동할지를 이미 몇 번이나 곰곰이 생각했었다.

‘나중에 생각하지, 뭐.’

그는 생각을 억지로 작전 쪽으로 돌리고는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타콤베로 들어가는 길은 33년 전에 비해 훨씬 까다로워졌다. 33년 전 황제는 지하공간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이젠 이곳을 ‘대부분’ 파악한 상태이고, 신전에서 카타콤베로 들어가는 문은 카타콤베 안쪽에서만 열 수 있는 대형 철문으로 완전히 폐쇄해 이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황제가 아직도 모르는 공간은 이제 딱 하나뿐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 황제가 ‘찾지 못한’ 곳이었다. 그는 에아 신을 상징하는 초대 마구스 석상과 활, 화살이 새겨진 부조 앞에 잠시 멈추었다. 원래는 이곳 뒤에 지하 표본실과 통하는 통로가 있었다.

이마 530년, 아니 기원 41년, 이 다하카르 신전은 새 후계자 오르마즈를 세우려는 야푸르 대신관과 후계자 지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들 아스탈의 마지막 싸움이 있었던 곳이었다. 당시 표본실을 통해 이곳으로 들어온 야푸르가 이 벽을 부수고 들어와 궁지에 몰렸던 오르마즈를 구했지만 결국 스스로는 아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비극의 장소였다.

당시 그 사건이 벌어졌던 시각이 오후 6시, 바로 지금 이때였다. 다하카르 신전과 에아 신전이 [휴식의 시간]에 접어드는 이때가 바로 두 곳 사이를 길게 연결하는 표본실이 하루 두 번, 문을 여는 때였다.

하지만 원래 에아 신의 부조 뒤에 있던 통로는 이후, 아케메니안 궁을 차지한 아스탈이 자신의 악행을 감추려 일부러 붕괴시켜 이젠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황제도 표본실 통로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8번]은 에아 신의 부조 앞을 무표정하게 지나 두 칸 너머 트라에타오나 신을 상징하는 쇠사슬 문장의 부조 앞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 말없이 서 있던 [8번]은 옆에 슬쩍 다가와 선 ‘진짜 바에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마구스답게 야무지고 수려한 그의 외모를 보니 항상 얼굴에 쓰고 있어야 하는 가짜 마스크가 평소보다 더 거슬렸다.

항상 그랬듯 급한 경우 바에자의 대역을 하기 위해 망토 속에 같은 차림새를 하긴 했어도 특별히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딱히 위험을 감수할 일은 없을 듯 보였다.

- 임무는 알겠지? -

- 물론입니다. 현신이시여. -

- 전임자들처럼 날 실망시키지 마라. -

[8번]은 ‘별것도 아닌 임무를 줘 놓고.’라는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오늘 임무는 자신이 아닌 진짜 바에자가 들어갈 참이었다. 이전 실패의 불명예를 떨치는 작전에까지 자신 같은 대역을 투입하기에는 바에자의 콧대와 자존심이 너무 높았다.

이번 작전에 헤네티 부대의 엔지니어를 데려오기는 했지만 딱히 대단한 기술이 필요해서는 아니었다. ‘문화재 훼손’을 예방하기 위해 무기나 공구 같은 것은 반입 금지된 상황에서 장비 따위를 갖고 오는 것도 바보짓이었다. 아마도 이번 작전은 ‘단검은커녕 바늘 하나 안 갖고 들어온’ 해괴한 특수작전으로 교단 역사에 남을 터였다. 이 작전이 어려운 건 목적 자체가 아니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이번에 [8번] 자신의 역할은 바에자와 기술자가 표본실에 들어간 동안 다른 헤네티 한 명과 함께 망을 보며 한편 그들이 중간에 사라진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시간 후, 샤마시 신전이 오픈되는 시간에 그들이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미리 대기하는,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6시 25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확인한 바에자는 할룩스를 켜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 지상 통제장비의 상태는 완전함. 곧 개통 프로세스 시작 예정. -

바에자가 낯을 찡그렸다. 황제령의 삼각루트 통제소가 너무 오래되어 제대로 작동 안 하기를 바랐건만 지난번 가르시바 마구스의 말대로 오르마즈가 미리 손을 보아 생각 외로 상태가 온전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을 막을 방법은 자신이 들어가 장치를 파괴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는 그 이전에 들어온 또 다른 메시지가 있는 것을 보았다. 발신자의 이름을 본 바에자의 입술에 빙그레 웃음이 감돌았다. 하지만 내용을 본 순간, 그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 이번에도 꼭 무사히 돌아오시옵소서. 제 병실에서 운우의 정을 느끼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제 품에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

바에자는 바들바들 떨리는 턱과 아랫입술을 애써 감추며 할룩스를 품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트라에타오나 부조 앞에 서 있는 [8번]과 나란히 섰다.

“생각해 보니 망 보는 건 한 명이면 충분할 것 같다.”

“예?”

[8번]이 당혹스런 얼굴로 물었다.

“네 훈련을 제대로 계속할 겸 같이 들어가는 게 낫겠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8번]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바에자는 자신을 이미 한 번 배신한,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배신한 복제에게 바깥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중요한 임무를 맡길 만큼 섣부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화를 내며 바로 죽이려 들 만큼 바보도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나름 쿨한(?) 바에자가 다음회에 중요한 결정을 내릴 예정입니다. ㅎㅎ

아, 그동안 노블레스에 연재되던 출판본이 오늘부로 프리미엄으로 이전되었습니다. (프리미엄 이전과 동시에 축하선물로 평점 1점 받았습니다~~ =_=;;)

프리미엄은 기간제한 없이 작품당 결제방식이고요, 10회까지 무료이니 관심있는 분들 가서 구경하시고요. 그 이후로는 편장 딱지 0.5장(50원)이고요. (막 옮겨서 그런가 조회수가 쌩 바닥이네요, 하하;;;;)

최대한 빨리 업데이트해서 연재본 따라잡도록 하겠습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지는 않겠죠?? ~~~(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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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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