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43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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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자와 [8번]이 나란히 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신전을 밝히는 조명이 갑자기 꺼져버렸다.
따로 빛이 들어오는 곳도 없는 공간에서 갑자기 빛이 사라지자 일순간 장님이 된 사람들이 놀라 웅성대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에도 유생들이 비슷한 일을 몇 번 저지른 일이 있다 보니 가이드들은 비교적 침착하게 사방에서 ‘안심하세요, 별 일 아닙니다.’를 외쳐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센지에서 온 단체관광객들을 선두로 사람들이 출구가 있던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과민반응을 보이자 조용히 기다리던 다른 엉뚱한 사람들까지도 지레 놀라 그들을 따라 허우적거리며 출구를 찾기 시작하면서 암흑에 빠진 신전 안에 짧은 난장판이 연출되었다.
그 혼란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바에자와 [8번], 그리고 엔지니어는 트라에타오나 부조 벽 앞에 놓인 기둥에 재빨리 줄을 걸고 번개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8번]이 가장 걱정했던 이 단계만 성공하면 모든 작전이 절반 이상 성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에자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기둥 위에서 몸을 날려 돔 모양 천장의 앞으로 기운 벽에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쇠사슬 문장의 고리 모양 하나를 안으로 힘껏 밀었다. 타원형 조각이 안쪽으로 깊숙이 밀리면서 퀴퀴한 흙냄새를 풍기는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사람 한 명 기어들어가면 딱 적당할 크기의 구멍이었다. 이곳이 지하 표본실과 연결되는 건 하루 딱 두 번 뿐이었다.
“빨리.”
바에자가 먼저 그 안에 재빨리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엔지니어가, 마지막으로 [8번]이 몸을 우겨놓으면서 그들이 그리도 걱정했던 첫 테이프는 깨끗이 잘렸다. 타원형 조각이 곧 제 위치로 되돌아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되돌아오기까지 겨우 30초 남짓이었다.
“진정하세요! 기계고장으로 잠시 동력이 끊겼을 뿐입니다.”
출입문 쪽에 있던 경비병들이 랜턴으로 안을 밝히면서 혼란은 1분도 되지 않아 바로 수습되었고 꺼졌던 조명도 다시 들어왔다. 극렬분자의 장난이 아니었을까 잠시 놀랐던 순례객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로 평상시로 되돌아갔다. 물론 그들 중 3명이 그 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에 랜턴을 문 바에자는 폐소공포증 환자는 까무러치고도 남을 2척 남짓 되는 높이의 아주 좁은 바위 틈새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먼지로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갑갑했지만 그 지긋지긋한 구멍은 몇 분 후 끝을 드러냈다. 아스탈이 일부러 붕괴시켜 막아버린 이전 통로의 안쪽 폐허 위였다.
먼지투성이가 된 바에자는 무너진 돌무더기를 밟고 재빨리 밑으로 내려왔다. 이제 그의 앞에는 부서져 끊어진 전선, 먼지와 오래된 거미줄이 뒤엉켜 커튼처럼 늘어져 있는 수백 년 된 길고 긴 복도가 암흑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 반대편 끝은 에아 신전이 있는 12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바에자는 틈새를 지나오는 동안 먼지투성이가 된 거추장스런 망토를 툭툭 털어 어깨에 대충 걸쳤다.
“그래, 여기로군.”
바에자는 바닥에 뒹굴던 쇠파이프를 하나 집어서는 앞을 커튼처럼 가로막은 거미줄과 부서져 축 늘어진 전선, 조명기기를 툭툭 쳐서 헤치며 앞장서서 나아갔다. 그를 따라 복도를 걷던 엔지니어가 랜턴으로 사방을 비추며 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벽에서 스위치를 발견한 그는 한 번 시험 삼아 작동해 보았다.
“으익.”
드문드문 켜지는 퍼렇고 희미한 불빛에 지레 놀란 엔지니어가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으, 으…….”
엔지니어가 벌벌 떨며 잠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복도 양쪽의 선반을 따라 놓인 수백 개의 유리병과 그 안에 들어있는 섬뜩한 사람의 신체가 아주 희미한 파란색 불빛 아래 그로테스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체가 사람 잡지는 않는다.”
바에자는 무언가에 움푹 찌부러져 눈 하나와 콧구멍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람의 머리가 든 병을 엔지니어의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현신의 장난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던 엔지니어는 그가 병을 다시 선반에 올려놓자 그제야 엉금엉금 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이것들은 어릴 때 노상 봤던 것처럼 썩은 내는 안 나니까.”
바에자가 마치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듯 쇠파이프로 벽을 탕탕 치며 복도를 무심하게 걸어 나아갔다. 그의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 [8번]뿐이었다. 빈민가 무덤지기의 딸로 태어난 바에자는 어머니와 함께 제대로 염도 되지 않은 갖은 흉측한 시체를 만지고 파묻고, 때로는 파내어가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끔찍한 복도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중간중간 옆쪽으로는 과거 해부실험을 했던 해부실이나 자료실, 회의실과 숙소, 그리고 때로는 실험용 산 죄수들을 가두었던 감옥도 모습을 나타냈다. 복도는 음산했고, 파란 불빛은 아주 코앞에 있는 물건 정도나 가까스로 비출 정도였다. 일행은 랜턴으로 계속 앞을 밝히며 나아가야 했다.
“여긴 대체 무슨 동력으로 움직이는 거죠?”
이곳이 아직 낯선 워프루트 엔지니어가 벌벌 떨며 바에자에게 물었다.
“욱리하의 조류(潮流)를 이용한 제너레이터에서 들어오는 거다. 거긴 예나 지금이나 아주 일정하게 흐르니까. 오르마즈 그놈이 이 위에 황궁을 지으면서 거기도 함께 손봤겠지.”
안으로 계속 들어가는 도중, [8번]은 바에자가 자꾸 자신을 어딘지 경계하며 흘끔거리며 돌아본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바에자의 기억뿐만이 아닌, 심지어 습관과 예리한 눈치까지도 고스란히 복제된 사람이었다. 그는 만약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라면 바에자가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또다시 시나리오로 짜 보았다.
‘젠장, 이래서야 어떻게 살지?’
불길함을 느낀 [8번]은 작전 때문이 아니고 바에자 때문에 무섭고 가슴이 떨려 터질 것 같았다. 심지어 그가 손에 계속 파이프를 쥐고 있는 것도 왠지 맘에 안 들었다.
살 떨리는 복도는 정말로 끝도 없었다. 10분이 넘게, 아마도 20분 가까이를 걸어온 바에자는 한 철문 앞에 랜턴을 들이댔다. 문에는 [기계실]이라는 녹슨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는 옷섶에 감춰놓았던 목걸이를 꺼냈다. 그곳엔 그가 이번 작전을 위해 미리 준비해 온 이곳 연구소의 마스터키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신전 출입문에서 혹 검문에 걸릴까 잠시 빼놓은 그의 마구스 팔찌도 함께 걸려있었다.
“여기다.”
“으익.”
철문 안을 랜턴으로 비춰 본 엔지니어가 기겁을 했다. 안에는 과거 이곳이 연구소로 운영되던 시기 쓰였던 오래된 냉동기에 압축기, 각종 펌프와 별의별 기계들이 고철이 되어 꽉 들어차 있고 그 위로는 늘어진 전선과 부서진 설비들, 녹슬어 끊어진 파이프들이 거미줄과 먼지의 피막을 가득 뒤집어쓰고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중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안쪽에서 무언가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자네가 해 본 중에 제일로 어처구니없이 쉬운 작전일 게야. 이 안에 워프루트 데이터를 처리하는 중앙제어장치와 제너레이터가 있을 걸세. 들어가서 그걸 못 쓰게 만들고 나오면 돼.”
“정말 별 것 아니군요.……넘어 들어가는 게 더 힘들겠습니다.”
엔지니어는 오래된 시체처럼 바닥을 꽉 채우고 누워 있는 기계와 넘어져 있는 자재, 공구들 사이를 어렵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들어가야 하나?”
“아닙니다. 너무 어둡고 공간도 좁아서 혼자 하는 게 낫겠습니다.”
엔지니어는 녹슬고 주저앉은 컴프레서 밑을 엉금엉금 지나가 제일 안쪽에 있는 한 기계 앞에 섰다. 엉망진창인 다른 기계들에 비하면 비교적 새것으로 보이는 침대만한 크기의 큰 제어장치가 투명한 진공 보호필름을 쓰고 설치되어 있었다.
엔지니어는 바에자가 있는 문 쪽을 돌아보았지만 다른 기계와 파이프에 막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서 외쳤다.
“찾았습니다. 구형 워프루트 제어장치입니다. 이거 골동품점에서도 못 보는 기계인데 아직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주요 부품이 부식되지 않게 누군가 일부러 진공캡슐을 씌워놓은 것 같습니다.”
“부수긴 쉽지?”
“부술 것까지도 없습니다.”
엔지니어가 픽 웃으며 굵은 동력선을 휙 뽑아버렸다. 동시에 제어장치의 불도 그대로 꺼져버렸다.
“그냥 껐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렇게 허망하게 쉬운 작전이 또 있나 싶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계 핵심 부품이라도 부수고 나와.”
바에자와 [8번]은 기계실 앞의 희미한 파란 불빛 밑에 말없이 서서 엔지니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서는 엔지니어가 도구도 없이 혼자 낑낑대며 진공캡슐을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8번]은 약간 뒤에 서서 내내 바에자의 동태만 살피는 중이었다.
‘왜 이리 말이 없지?’
답답해서 그의 몸이 꼬일 것 같았다. 바에자는 ‘딱 경박하지 않을 정도로만’ 유머감각이 넘치고 가볍고 말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기분만 좋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대신관이건, 동냥하는 거지건 스스럼없이 붙들고 수다를 떨며 자리를 웃음바다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평소 이렇게 기다리는 중이라면, 그것도 이 어려운 임무를 식은 죽 먹듯 끝내고 한참 기분이 들뜬 때라면 무슨 건수든 들고 나와 열심히 수다를 떨어야 정상이었다.
‘뭔가 이상해.’
바에자 옆이 있기가 괜히 불편해진 [8번]은 슬금슬금 그의 옆을 물러나와 깜깜한 복도 주변을 혼자 어슬렁거렸다. 그때, 그의 랜턴에 복도 구석을 뒹구는 야푸르 시절 크바르나 문장이 있는 단검과 석궁이 보였다. 먼 옛날 오르마즈를 구하려 이곳을 지났던 크바르나들의 흔적인 듯했다. 석궁은 많이 삭아 쓸모가 없어보였다.
[8번]은 별 생각 없이 단검을 집었다. 고급 병력인 크바르나들에게 주어졌던 무기답게 검은 코팅이 되어 있어 오랜 시간 속에서도 날은 여전히 번득이며 살아있었다. 칼날을 만지작거리던 [8번]은 뒤를 돌아보았다. 기계실 안에서는 여전히 엔지니어가 뭔가 끙끙대며 작업 중이고, 바에자의 희미한 실루엣이 문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8번]은 또다시 불안해졌다.
‘여긴 통신이 안 되지? 아마?’
[8번]은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만져지지는 않지만, 이 안에 아마도 자신을 언제든 불사를 수 있는 발화장치가 들어있을 터였다. 그 발화장치의 키는 지금 바에자의 왼손에 쥐여 있는 마구스 팔찌에 달려있었다.
‘그래, 이대로는 살 수 없지.’
[8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루토에 대한 욕심,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그는 검을 슬며시 뒤춤에 감추고는 묶은 머리를 풀었다. 이제 누군가의 분신으로 쓰이다가 죽는 것이 아닌, 다른 선택이 이제 그의 앞에 있었다.
얼굴의 마스크를 벗고 랜턴을 끈 그는 바에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움?”
그가 표적에 거의 몇 걸음 간격으로 다가간 순간, 바에자가 그의 유난히 조심스런 접근을 느낀 듯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순간, [8번]은 머뭇거리지 않고 단검을 빼들고 바에자에게 돌진했다. 바에자도 순간 휙 돌아서며 그의 눈에 대고 랜턴 불빛을 확 쏘며 단검을 쥔 그의 손을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기계실 안에서 낑낑대며 캡슐을 벗겨내던 엔지니어는 밖에서 들려온 바에자의 비명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머리 위의 파이프에 이마를 찧을 뻔했다.
“현신님!”
바에자가 적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생각한 그는 바닥을 뒹굴던 녹슨 파이프를 무작정 집어 들고 기계들을 엉금엉금 기어 넘어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 사이에도 밖에서는 격한 외침 소리와 누군가 쓰러지고 쇠붙이가 요란하게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짧은 비명과 거친 기합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싸움은 꽤 길었다.
“현신님 기다리십시오!”
엔지니어가 고함을 질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교단 현신을 지켜야만 했다. 그는 삭아 쏟아진 컴프레서의 부품을 헤치고 기계실 문 밖으로 확 뛰어나갔다.
“어, 엇.”
적에게 파이프를 휘두르려던 엔지니어가 멈칫했다.
“혀, 현신님?”
당황한 엔지니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두컴컴한 문 앞에선 시커먼 형체의 두 사람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바닥엔 부서진 랜턴이 꺼진 채 뒹굴고 있고 엔지니어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자세히 보니 뒤의 한 명이 나머지 한 명의 목을 뒤에서 파이프로 엮어 조르고 있었다. 앞에 있는 자는 손에 단검은 쥐고 있지만 뒤에 있는 적에게 이미 목이 졸려 위험한 상황이었다.
“멍청히 있지 말고 당장 이놈 죽여!”
바에자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지만 어둠 때문에 앞뒤 누가 누군지 분간 못한 엔지니어는 얼른 랜턴부터 들이댔다. 순간 제한된 랜턴 불빛에 목이 졸려 버둥거리고 있는 ‘앞 사람’의 얼굴이 바로 그의 눈에 스쳤다. 앞에서 목이 졸려 열세에 밀리고 있는 사람은 머리를 무언가에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였지만 틀림없는 바에자였다.
“내 뒤의 이 망할 놈을 치지 않고 뭐 해!”
적을 구분한 엔지니어는 앞뒤 볼 것도 없이 바로 달려들어 감히 마구스의 목을 뒤에서 조르고 있는 또 한 명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후려쳤다. 하지만 상대가 움직이는 통에 머리 옆을 약간 스쳐 빗맞았다.
“으읍!”
쇠파이프에 빗맞은 뒤쪽 한명이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그 사이 사지에서 벗어난 앞쪽의 바에자가 휙 돌아섰다.
“이 가짜 놈이 어딜 감히!”
바에자는 휘청거리는 상대의 목을 노리고 칼을 내질렀지만 그대로 빗나가며 팔만 깊이 베고 지나갔다.
머리를 다치고 단검에 팔을 벤 자가 엔지니어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감히 누굴 치냐! 난 네 현신이란 말이다!”
무심결에 그쪽에도 랜턴을 비춘 엔지니어는 소스라치게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방금 자신이 쇠파이프로 후려친 자 역시도 바에자였다.
“맙소사, 이게 뭐야?”
당황해 패닉 상태가 된 엔지니어가 쇠파이프를 내버리고 주춤거리며 물러나다가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 단검을 쥔 또 한 명의 바에자가 쇠파이프에 맞아 휘청거리는 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씨발! 누가 감히 현신을 사칭해!”
거칠게 돌진한 한 명과, 주춤거리며 태클을 받은 둘의 몸에 퍼억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아아아악!”
둘이 바닥에 동시에 떨어지는 굉음과 함께 길고 소름끼치는 비명이 표본실의 차가운 복도를 흔들었다. 두 사람이 뒤엉켜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혀, 현신님? 괜찮으십니까?”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엔지니어가 잠시 떨어뜨렸던 랜턴을 더듬더듬 주워들었다. 하지만 굳이 랜턴을 비출 것도 없었다. 바닥에 뒤엉켜 있던 두 사람 중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난 건 한 명이었다. 쓰러져 있는 나머지 한 명의 시커먼 실루엣 위로 삐죽이 나와 있는 단검의 자루가 보였다. 하지만 일어난 이도 온전한 상태는 아닌 듯 앞뒤로 휘청거리다가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헉, 헉.”
일어난 이는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도 반쯤 넋이 나간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바닥에 뒹굴고 있던 마구스 팔찌와 마스터키를 급히 주워 목에 걸었다. 그리고는 몸에 칼이 꽂힌 채 쓰러져 있는 상대 쪽을 돌아보았다.
“현신님? 현신님 맞으시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엔지니어가 랜턴을 주워들고 허겁지겁 그에게 다가갔다. 바에자가 이겼다는 것을 확인한 엔지니어가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상태는 최악이었다. 눈 옆쪽이 무언가로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피가 줄줄 흘러 옷까지 온통 젖어 있고 한쪽 팔도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단단한 바닥 위로 뒤엉켜 뒹굴던 와중에 어깨가 빠진 듯 한쪽이 축 처져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 눈에선 여전히 살기가 번득거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금 정신이 나가 헛것을 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도움이 못 되어드린 것을 용서하소서.”
엔지니어가 당황한 나머지 둘의 싸움을 멍하니 구경만 했던 자신에게 행여 불벼락이 떨어질까 벌벌 떨며 바에자에게 빌기 시작했다. 워낙 싸움이 격렬했었다보니 그는 자신이 엉겁결에 쇠파이프로 친 사람이 지금 이 현신인지, 아니면 저기 쓰러진 적인지도 아직 혼돈스러웠다.
“괜찮아, 괜찮아. 놀라면 그럴 수도 있지.”
바에자는 괜찮다며 도리어 그의 등을 탁탁 쳐 주었다.
“그나저나 저놈은 완전히 죽었는지…….”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안 돼!”
바에자가 쓰러져 있는 ‘또 다른 바에자’에게 다가가려는 엔지니어를 덥석 붙들었다. 부상이 너무 심해 이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괜히 ‘가짜’의 얼굴을 보게 해 혼란을 주는 건 현명치 않았다. 바에자는 엔지니어의 랜턴을 빼앗아 비춰보았다. ‘가짜 바에자’는 배에 칼이 꽂힌 채 차가운 돌바닥에 큰대자로 쭉 뻗어 있었다. 바닥은 이미 저자가 흘린 피로 웅덩이가 져 있었다.
“저놈을…….”
마지막으로 다가가 보려던 바에자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시체를 치워야 하는데.’
바에자가 고민에 잠겼다. 지금까지 죽은 복제들은 모두 즉시 시체를 거두어 소각해서 증거를 없앨 수 있었지만 지금 저 시체를 가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곳은 황제도 모르는 밀실이고, 앞으로도 이곳에 누군가 올 일은 ‘영원히’ 없을 터였다.
“지금 몇 시냐?”
“6시 41분입니다. 7시까지 나가지 못하면 12시간 동안 갇힙니다.”
“일단 나가자.”
얼굴의 피를 대강 닦아낸 바에자는 엔지니어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닥에 뒹굴고 있던 망토를 집어 피투성이가 된 몸을 얼른 가리고는 여전히 깜깜한 복도를 따라 처음 온 방향의 반대편, 에아 신전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희미한 청색 빛 너머 쓰러져 있는 ‘가짜 바에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래, 어차피 죽을 놈이었어.”
바에자는 절룩거리며 걸음을 계속 옮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다. 그는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며 힘겨운 걸음을 내디뎠다.
“당연히 받을 벌을 받은 거지.”
몇 분 후, 끔찍한 연구실 공간 끝이 나타났다. 엔지니어는 들어올 때처럼 불을 꺼 버렸다. 이 끔찍한 복도를 희미하게나마 밝히던 청색 빛마저 사라지면서 내부는 완전한 암흑에 휩싸였다. 단단히 잠긴 돌문과 마주한 바에자는 목에 건 마스터키로 빗장을 열었다. 그 너머는 그에게도 익숙한 황궁 지하의 시계 모양 카타콤베였다.
둘은 돌문을 빠져나와 다시 문을 밀어 닫았다. 문이 닫히며 안쪽의 빗장도 자동으로 다시 잠겼다. 일단 닫힌 문은 겉보기로는 다른 곳과 전혀 다르지 않은 그저 우둘두둘한 지하 동굴 벽으로만 보였다.
잠긴 문을 쳐다보는 바에자의 입가에 다시 피식 웃음이 번졌다. 이제 저 안의 ‘가짜 바에자’는 이제 이곳에서 소름끼치는 표본들을 벗한 채 말라비틀어진 미이라나 유골이 되어버릴 터였다.
“몇 시냐?”
“저녁 6시 50분입니다.”
“7시 바유 신전이든 8시 샤마시 신전이든 빨리 나가자. 외곽 회랑을 타고 반시계로 돌아가면 될 거다.”
조금씩 힘을 찾은 바에자는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혼돈스러워하는 시계 모양 카타콤베에서 내 집인 양 익숙하게 방향을 잡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신전에서 바로 카타콤베로 들어가는 문은 신전 공개를 위해 안쪽에서 폐쇄되었지만 카타콤베에서 신전으로 나오는 건 여전히 가능했다. 그러니 신전에 관광객이 오기 직전 미리 나가 숨어 있다가 이후 관광객들과 어울려 빠져나가면 될 일이었다.
“다 끝났어.”
홀가분해진 바에자가 피 묻은 몸을 망토 밑에 꽁꽁 감추며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 작품 후기 ============================
쓰러진 건 누구고 도망친 건 누굴까요? 심술궂은 작가가 제시하는 수수께끼입니다~ ^^
(지금 개인적으로는 대단원 부분과 차기작을 동시에 작업하고 있는 중인데 괜히 맘속이 먹먹하네요.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지는 않겠죠?? ~~~( ̄∇ ̄)ブ~~★
아참, 그리고 몇 분께서 신청하신대로, 교보문고에도 전자책 판매신청이 들어갔습니다.
교보 전자책은 ePub파일 외에 PDF도 함께 서비스해야 합니다.그래서 1차로 PDF제작이 끝난 1부 1권~4권과 무료 미리보기 파일까지 5개만 신청했습니다. 나머지 책들도 월말까지 모두 판매신청을 끝낼 예정입니다.
PDF는 종이책을 스캐닝한 것이라 전자책 자체의 품질은 Epub보다 훨씬 좋아서 PC나 태블릿, 전용단말기에서 보기는 좋습니다. 다만 화면이 고정되어 있어서 스마트폰처럼 화면이 작은 단말기에선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보의 경우 ePub와 PDF를 선택하게 되어 있고요.
예스24도 이번달 혹은 다음달부터 PDF를 동시에 제공한다고 해서 예스24에서 구매한 분들도 곧 PDF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PDF전자책을 찍은 스크린샷이 팬카페에 있으니 확인하시고요...^^
인터파크 전자책은 판매 시작되었는데 제 실수로 체험본 미리보기 전자책이 빠져서;; 지금은 1~10권만 판매하고 있습니다. (열흘 전 전송한 2부는 아직도 업데이트가 안 되었네요;; 언제나 올려줄려고 저러나;;)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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