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44화 (1,039/1,132)

< -- 1044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

.

.

바에자와 엔지니어가 떠난 얼마 후, 표본실 안에 남겨진 ‘또 다른 바에자’는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느낌에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고 가늘게 눈을 떴다. 의식이 온전치 못한 그는 눈앞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 지독한 가위눌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온몸이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무심결에 숨을 들이쉬려던 그는 찢어지는 고통에 호흡을 딱 멎었다.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무언가 끈적끈적했다. 피를 많이 흘린 게 분명했다. 이만큼 피를 많이 흘린 상태에서 쓸데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목숨을 재촉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흐, 읍.”

그는 칼이 꽂힌 배가 찢어지도록 고통스럽지 않을 만큼만 작게 숨을 쉬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정신을 잃던 순간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까지 완벽한 암흑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는 혹시 자신이 머리의 충격으로 시력을 잃은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7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는 팔뚝의 시계를 볼 수가 있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당장 일어서고 싶지만 칼에 찔린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누운 채로 양 팔을 휘저어 주변을 더듬었다. 끈적거리는 자신의 피가 만져졌고 오래된 타일이 깔린 단단하고 차가운 바닥이 뒤이어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무언가 단단한 쇠막대기 같은 것이 만져졌다. 묵직한 쇠파이프는 지금 그의 기운으로는 다루기 쉽지 않았지만 그는 일단 쥐고 무작정 주변에 휘둘러보았다. 왼쪽에서 무언가 쇠막대 끝에 부딪치며 또르르 하고 구르는 소리가 났다. 무언지는 몰라도 그는 파이프 끝을 움직여 자신 쪽으로 물건을 끌어당겼다.

“이, 익.”

그는 손을 힘껏 뻗어 그 ‘무언가’를 집었다. 랜턴임을 느낀 순간 그의 입가에 짧지만 미소가 번졌다. 물론 기쁨은 길지 않았다. 앞부분이 깨진 랜턴으로 벽을 비춘 그는 벽의 선반 위의 표본병에서 자신을 딱한 듯 내려다보고 있는 기형의 머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허, 내가 놀랄 줄 알고.”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깨달은 바에자는 괜히 만용을 부려보았다. 그는 겁쟁이였다면 방금 전의 광경만으로도 심장마비에 걸려 죽었을 것이라며 이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혼자만의 만용은 그저 짧은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제 움직일 수 없음을, 아니, 설사 몸이 멀쩡하다 해도 이곳을 살아 나갈 수는 없음을 뼈아프게 인정해야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한때 콜로니를 떨게 한 최고의 명장이었던 자의 입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한 마디가 무심결에 흘러나왔다.

“엄마…….”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었으련만, 엄마는 그가 전장에 나갈 때마다 항상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번엔 별 것 아니라는 딸의 말에도 유독 걱정이 심했다.

이렇게 무력하게 누워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엄마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성직자와 학자로서의 명망을 버리고 딸 하나를 위해 수십 년간 무덤이나 파헤치며 끔찍한 가난을 이겨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희미해져가는 의식으로 다시 되짚어 보니 그 ‘엄마의 기억’이 진짜인지, 아니면 심어진 것인지도 혼돈스러웠다.

“마구스들의 무덤인가.”

바에자는 이곳이 과거에 자하크와 10명의 마구스들의 목숨을 앗아간 곳임을, 그리고 자하크의 아들 야푸르까지도 죽음을 맞았던 곳임을 새삼 떠올렸다.

그는 아무 의미 없이 랜턴을 주변 곳곳에 움직여 보았다. 그때, 아직 열려 있는 기계실 문이 보였다. 엔지니어가 급한 나머지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떠난 모양이었다. 갖은 폐허와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차 걷기조차 고약한 그곳을 멍하니 쳐다보던 바에자는 갑자기 몸을 돌려 머리를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누운 채로 등을 질질 끌어 양 팔꿈치로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삼각루트 개통 프로세스를 시작한 카렐은 코리온이 불릿을 고치고 있는 격납고에 잠시 들른 후, 집무실이 있는 133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모든 건 일사천리로 잘 풀려가는 듯 보였다. 이제 사제의 키도 찾아내어 이제 자신을 괴롭혀 온 병도 떨쳐낼 준비가 되었고, 칼릴에서는 세데스와 후스의 반란군이 갈 길 바쁜 남부연합군의 발목을 붙들고 카나르의 혈압을 팍팍 올려놓는 중이었다.

하지만 칼릴에서의 반란군의 분전은 남부의 급작스런 팽창정책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루트 개통을 앞둔 남부는 그들의 가장 큰 강점인 어마어마한 동원력을 살려 순식간에 군비증강을 몰아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20만의 대군을 지닌 플라칼 가는 10만의 전역병을 다시 소집했고, 제후 지위를 놓고 내분에 휩싸인 델루지 가도 8만을, 세닉 가와 호지 가도 각각 5만과 2만을 다시 소집해 남부제후군은 순식간에 25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늘려놓았다.

지금까지 군비증강은 황실의 용인과 인접한 지역의 사전 묵인을 받은 후 실시해 온 것이 관례였지만 그들은 황실의 경고조차 ‘영내 평화 수호를 위한 것’이라며 속이 빤히 보이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기근으로 영지민 먹여 살리기도 벅찬 다른 제후지역의 항의 따위는 일관되게 무시하는 중이었다.

고작 두 달 사이, 남부는 황실 편을 든 이그나토 가를 빼도 무려 60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린 공룡으로 급성장해 기근을 막는 데 급급한 다른 지역 제후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렌느 그년을 어찌해야 할까.”

카렐은 고향 루게에 억류되어 있는 어머니 대공주 걱정에 해쓱해진 코리온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남부 4제후 이렌느 경은 진압군에서 철수하고 대공주 일가를 석방해 이전처럼 황실을 따르자는 영지민들의 시위와 요구에 귀를 닫고 [생각 중이다.]라는 말로 시간만 질질 끄는 중이었다. 그는 대중의 분노는 대부분 시간으로 해결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민감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귀를 막고 입을 닫는 방법으로 살아남았고, 이번에도 그의 침묵은 보답을 받았다. 대공주의 집을 둘러싸고 시위를 벌이던 수천의 군중도 수백으로, 수십으로, 결국 몇 명이 든 피켓으로 바뀌었다.

상황이 유리해지자 이렌느 경은 즉시 반격을 시작해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했고, 반란군에 가담한 맏아들 요아킴을 후계자에서 파문했다. 동시에 황제의 도움으로 하루하루 병에서 나아가고 있는 요아킴의 외동딸은 ‘우리 가문엔 그런 병자는 없다.’며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보안국의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하임달에 진주할 군대에서도 2할이라는 제법 많은 지분을 차지할 듯했다. 그 말은 ‘시간만 투자한다면 황제령 못지않은 낙원이 될’ 하임달의 땅에서 5분의 1을 갖게 된다는 의미였다.

카렐은 코리온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내게 박살날 일도 5배로 늘어났다는 뜻이지.’라며 그저 웃기만 했다.

‘어차피 위기는 몰아서 오는 법이니까.’

카렐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삼각루트는 남부에 한 달 가까이 뒤처져서야 시작했고, 오염된 곡물은 여전히 퍼지고 있고, 제국민의 수명개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깨어지고 있고, 그들의 수명을 붙들어줄 55호 바이러스는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다. 북부와 동부, 서부의 기근은 ‘훔쳐낸’ 곡물로 고작 몇 달치 땜질만 했을 뿐 오염 안 된 곡창을 가진 남부가 계속 곳간 문을 걸어 잠근 상태에서는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카렐은 오늘도 몇 번을 꺼내보았던 [사제의 키]를 다시 꺼내어 만져보았다. 그런데 이것만 구한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스러울 것 같았지만 아직 쌓인 난제가 많아서인지 그렇게 큰 감동은 없었다. 이젠 발작과 고통에 너무 익숙해져 도리어 ‘그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잔딕을 꺼낸다는 것이 어딘지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133층에 도착했다는 신호가 울렸다. 막 문이 열리고 나가려는 순간, 굳어진 얼굴의 사에나가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한참 찾았습니다, 폐하.”

“왜?”

“워프루트 프로세스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

카렐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갔다. 카렐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에게 안에 타라고 손짓했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가는 동안, 카렐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유는 밝혀졌나?”

“아직 우리가 발견 못 한 지상시설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데이터 처리가 갑자기 중단되어서 어찌된 것인지 파악도 불가능합니다.”

“미치겠군.”

카렐이 이마를 짚었다.

카렐과 사에나는 바로 한 시간 전까지도 환호에 휩싸여 있던 에아 신전으로 되돌아왔다. 그때까지 이곳을 채우고 있던 그 많은 방문객들도 다 자리를 떠나 이젠 썰렁한 공사장과 경비를 맡은 친위군 장병들만 남아있었다.

제어실 안은 갑작스런 프로세스 중단에 날벼락을 맞은 보안국 엔지니어들이 이젠 맞지도 않는 황도 지하의 설계도를 갖다놓고는 기계와 배선을 점검하느라 난리였다.

카렐이 그런 모습을 보며 버럭 화를 냈다.

“이건 유평대제 때 이 황성을 지을 때 만든 도면 아냐? 여긴 그보다 수백 년 전에  지은 부분인데 이걸 가져다놓고 뭘 하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당시 도면이 남은 것이 없어서 혹시 여기에 남긴 힌트라도 없나 확인하는 중입니다.”

카렐은 한 시간 전까지도 선명하게 켜 있던 삼각형이 사라진 제어판 스크린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엔지니어가 더듬거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워프 데이터가 들어있는 옛 장비의 위치만 찾을 수 있다면 기계만 수리하거나 교체하면 되니 쉽습니다만 아직 그 장비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한 상황이라…….”

“못 찾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새 장비를 설치하고 코드를 입력하려면 적어도 서너 달은 잡아야 합니다.”

낙담에 빠진 카렐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실망감이 너무 커서인지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아랫사람들 앞이 아니라면 울음이라도 터뜨렸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머리털을 싸쥐었던 카렐은 야속한 제어판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엉?”

카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꺼졌던 제어판의 삼각형이 다시 빛을 내고 있었다. 카렐은 헛것을 본 듯한 느낌에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불빛은 다시 꺼져 있었다.

‘내가 정말 죽을 때가 다 된 건가.’

어처구니없는 환각에 기가 막혀하던 즈음, 다시 제어판의 불이 한 번 짧게 켜졌다가 다시 꺼졌다. 분명 환각이 아니었다.

“이봐.”

카렐이 엔지니어를 손짓해 불렀다.

“저거 아까부터 저렇게 깜박거렸나?”

제어판을 돌아본 엔지니어는 다시 켜져 있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몇 초 후, 또 꺼져버렸다.

“내부에서 어딘가에서 합선되었거나 접속불량인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의 당연한 대답에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그곳에서 시선을 떼었다. 정말로 그곳에서는 한동안 다시 불이 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카렐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그곳에서 불이 깜박거렸다.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다시 짧게 세 번이 들어오고는 잠시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카렐이 굳어진 얼굴로 제어판에 다가갔다.

“합선이 일정한 패턴으로 되는 걸 보았나?”

“설마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던 엔지니어는 정말로 같은 패턴으로 ‘합선’이 반복되자 순간 당황했다.

카렐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옛날 함선의 비상 구조 신호다.”

함선 조종사이기도 한 카렐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비로소 제대로 웃었다.

“이 선이 끊긴 곳에 누군가 있는지도 모르지.”

그는 여전히 의아해하고 있는 엔지니어들을 헤치고 다가가 제어판을 보았다. 그 패턴이 한 번 지난 후, 다시 스크린이 꺼져 있었다. 카렐이 엔지니어에게 물었다.

“그쪽 기계를 아마 여기서도 껐다가 켤 수 있지?”

“물론입니다.”

바에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 누워있었다. 난장판에 가까운 기계실 잡동사니들을 넘어오느라 이미 난 상처가 더 커지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최대한 안 움직이는 것을 빼면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구형 워프루트 제어장치 밑에 누워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한 손에는 멀리 있는 제어판과 연결되어 있을 데이터 선이 잡혀 있었다.

그는 다시 선을 연결했다 끊었다를 반복하며 구조 신호를 보냈다. 처음엔 몇 번째인지를 셌지만 이젠 그것도 잊어버렸다. 그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 신호를 유심히 지켜볼, 그리고 내용을 이해할 이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바로 희망이라는 끈을 잃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신호를 끝내고 축 늘어졌다. 갑자기 회의감이 몰려와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이 그냥 한숨 푹 자고 싶었다. 그의 손에서 막 힘이 빠지려는 무렵, 눈앞의 기계가 깜박거리는 모습에 잠이 확 달아났다. 긴 신호가 한 번,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이어졌다. [수신했음]을 뜻하는 부호였다.

‘설마?’

그는 자신이 환각을 느낀 게 아닐까 싶은 맘에 자신도 똑같은 [수신했음] 신호를 보내보았다.

그는 몇 번이나 침을 삼키며 다시 답신을 기다렸다. 숨 막히는 몇 초가 지난 후,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라는 부호가 들어왔다.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 끔찍한 암흑 속에서 바깥세상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에 갑자기 가슴이 울컥해왔다. 부호 자체가 복잡하다보니 오갈 수 있는 내용도 짧은 단문이 고작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잠깐.’

무심결에 자신의 이름을 보낼 뻔했던 바에자는 멈칫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다시 같은 내용의 부호가 반복해서 들어왔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밝혀도 되는 것인지, 과연 이 부호를 받는 사람이 자신을 구해 줄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불명확했다. 그는 이번엔 자신이 같은 내용을 보냈다.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이번엔 답변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듯했다. 거의 1분 가까이 지난 후, 이번엔 아주 짧은 대답이 들어왔다.

[황제다.]

카렐에게 11시간이 이토록 길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함께 잠든 아메스가 이젠 불면증까지 왔냐며 걱정할 만큼 중간중간 몇 번을 깨고 시계를 보아가며 새벽 6시를 기다렸다.

사실 카렐은 자신이 황제라고 답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건너편에 있는 것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황제라는 말에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했거나, 혹은 부쩍 경계하는 느낌이 받았다. 그는 누구냐는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고 위치를 밝히라는 말에도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렐이 그에게서 억지로 들은 대답은 ‘암흑시간에 있다.’는 알쏭달쏭한 한 마디 정도였다.

하지만 카렐은 그 한 마디에서 지난번 자신이 찾다가 포기한 카타콤베의 비밀복도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당시 ‘다하카르 신전의 암흑시간에만 열리는 표본실 복도가 있다.’는 니사의 조언에 보안국 요원들을 풀어 카타콤베와 다하카르 신전을 다 뒤지고 심지어 몇 개의 벽을 뜯어내기도 했지만 제한된 시간과 전자장비를 먹통으로 만드는 카타콤베 특유의 구조 때문에 ‘아무래도 놈들이 폐쇄한 모양.’이라는 애매한 결론만 내린 채 손을 떼어야 했었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연결이 끊긴 것도 딱 암흑시간이었다.

“아직도 연락이 없나?”

새벽 6시가 되기 조금 전, 데데한 얼굴로 다하카르 신전을 찾아온 카렐은 사에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 10시 이후로는 한 번도 답신이 없었습니다.”

사에나의 대답에 카렐이 낯을 찡그렸다. 옛 발광신호를 아는 항해사를 불러와 제어판에서 밤새 신호를 보내게 했지만 답신은 없었다. 도망을 친 것인지, 아니면 구조요청을 하다 말고 죽어버린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카렐로서는 워프루트의 제어기가 문제의 ‘비밀복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해 낼 단초를 얻은 것만도 큰 수확이었다.

“조사해 보니 어젯밤 이곳에서 약 40초간 정전이 있었습니다. 벽에 칠한 검은 재 때문에 워낙 기계결함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라 경비병들도 그런가보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새 누군가 침투한 게로군. 그럼 이 안 어딘가에 들어가는 문이 있다는 뜻이고.”

카렐은 피곤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익숙한 다하카르 신전을 빙 둘러보았다.

“불 꺼!”

카렐의 외침에 이 운동장만한 웅장한 신전을 밝히는 수백 개의 조명들이 일제히 꺼졌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암흑이 되었지만 카렐에게는 아니었다. 다른 잡다한 빛이 없을수록 그레이오팔인 그의 눈에는 파란 물결이 흐르는 이곳의 신기한 풍광이 더 아름답게 빛이 났다.

그때 신전 출구 쪽에서 랜턴 몇 개가 나타나 카렐만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로 망쳐놓았다.

“폐하, 부름 받자옵고 달려왔습니다.”

랜턴을 비추며 신전에 나타난 건 재무대신 밀리타와 주치의 니사였다. 그런데 그 뒤에서 느닷없이 어리둥절한 표정의 세네피스가 보안국 요원들을 헤치며 나타났다. 밀리타는 같은 그레이오팔이고, 니사는 이곳 지리를 가장 잘 아니 일부러 불렀던 것이지만 난데없는 세네피스의 등장에 카렐이 화들짝 놀랐다.

“어, 어머니께서 왜…….”

카렐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사실 대제학인 세네피스는 황궁 지하의 ‘대강당’ 에아 신전 정도나 가 봤을 뿐, 여전히 사교 성지로 남아있는 이곳에는 일부러 발을 들여놓지 않았었다.

이 운동장만한 웅장한 성소에 처음 와 본 그는 신전의 돔 벽을 온통 뒤덮은 새파란 물결에 눈이 휘둥그레져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거 설마……지난번 호드르 산에서 봤던…….”

“예, 이유는 모르지만 마지막 대신관이었던 야푸르가 이곳 전체에 고향행성의 검은 재를 바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새벽부터 왜…….”

“맙소사, 이런 아름답고 신기한 곳을 다른 사람에겐 다 보이시고 제게만 감추셨다뇨? 너무하십니다.”

세네피스가 원망을 퍼부으며 카렐의 가슴과 어깨를 몇 대나 찰싹찰싹 때렸다.

“아, 아니 제가 감춘 게 아니고 어머니께서 사교 신전이라 싫다고…….”

“이런 곳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제가 안 왔겠습니까?”

세네피스는 마구 억지까지 쓰며 마치 신기한 놀이공원에 처음 온 어린아이마냥 주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카렐은 니사에게 슬쩍 입놀림으로 ‘저 양반께서 왜 오셨나?’라고 물었다.

“어젯저녁부터 황상께서 안색이 안 좋으시다고 내내 폐하의 근황만 물으셨습니다. 이번에도 갑자기 나타나서 무작정 따라오시는데 저도…….”

니사는 세네피스가 다시 다가오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카렐은 세네피스의 귀신같은 눈썰미에 내심 몸서리를 쳤다. 사실 그는 고민거리가 많아진 어제 저녁부터 정말로 몸이 영 좋지를 않았다.

카렐이 호기심에 얼굴이 해사해진 세네피스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지금 찾는 곳은 이렇게 예쁜 곳이 아니고 끔찍한 표본들이 모여 있는 방입니다. 그러니 여기만 구경하시고 처소로…….”

“함께 있어주신다면 어디는 무섭겠습니까?”

세네피스는 못 들은 척 딴청을 피며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작품 후기 ============================

이쪽이나 저쪽이나 엄마의 예감(?)은 항상 무섭습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지 말고요 ~~~( ̄∇ ̄)ブ~~★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예정)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