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45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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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이 호기심에 얼굴이 해사해진 세네피스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지금 찾는 곳은 이렇게 예쁜 곳이 아니고 끔찍한 표본들이 모여 있는 방입니다. 그러니 여기만 구경하시고 처소로…….”
“함께 있어주신다면 어디는 무섭겠습니까?”
세네피스는 못 들은 척 딴청을 피며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렐은 6시가 되기를 기다리며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신전을 돌아보던 세네피스는 6시 방향의 출입문 위에 서 있는 거대한 입상(立像)을 가리켰다. 모두 부조만 있는 가운데 유일한 석상이었다.
“저건 누구죠? 왠지 익숙한데…….”
“초대 대신관 아프라시아입니다. 콜로니를 통일한 영웅이었고 다하카르 가문의 시조입니다. 아케메니아를 개척한 주역이기도 하죠. 하긴, 그 정도는 잘 아시겠지만……그런데 저걸 언제 보셨습니까?”
“오르 언니가 교단에 관한 것도 좀 알아두라고 자주 보여주곤 했는데……사교에 관련된 걸 보여준다고 화만 냈었죠. 괜히 그랬나봅니다.”
세네피스의 얼굴에 짧게 슬픔이 흘렀다.
그는 옛날에 공부하지 못한 호기심을 이제라도 충족시키려는 듯 입상을 거의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참……애매하게 생겼군요.”
세네피스의 ‘아주 정확한’ 평가에 카렐이 픽 웃었다. 그의 말대로, 아프라시아의 외모를 그대로 본땄다고 주장하는 저 외모는 한 마디로 뭔가 애매했다.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얼굴은 여자 같기도, 남자 같기도 하고, 이목구비는 선명하지도, 약하지도 않고, 근육질도, 그렇다고 마른 몸도 아니었다. 심지어 머리 모양도 목 뒤까지 내려온 애매한 길이였다. 마치 석상을 조각한 이가 모든 개성을 말소하고 ‘전 인류의 평균치를 대충 내어’ 만든 외모 같았다.
사실 아프라시아는 많은 면에서 베일에 가려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콜로니 연대기에는 그의 행적이 남아있지만 말 그대로 ‘지극히 공식적인 서술’만 되어 있어 개인적인 사항에 관해선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당시에는 남자만 군인이었으니 남자였을 것이라 짐작될 뿐 정확히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는 누구인지, ―남자였다면― 부인은 누구였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덕분에 일부에서는 마구스들이 철저히 베일 뒤에 숨어서 살게 된 시작점이 아마도 그였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을 화장해서 우주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지만 2대 대신관인 그의 아들딸과 충복들은 콜로니의 영웅이 그렇게 먼지로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듯했다. 덕분에 ―남자라고 보면― 곱상한 얼굴의 데드마스크, 사상 최초로 완벽 보존 처리된 시신과 ‘인간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절대 열지 말 것’이라는 경고가 붙은 금속제 관이 남았고, 그의 유전자 역시 순혈로만 이어진 30여 명의 대신관들을 거쳐 이젠 카렐 자신의 핏줄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존재 자체가 애매한 인물이니까요. 일설엔 [아프라시아]도 원래 이름은 아니라더군요. 그런 인물이 생김새가 애매한 정도가 문제인가요?”
카렐이 웃으며 입상 밑으로 다가갔다. 세네피스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애매하다’는 것을 실감한 카렐은 언제든 시간이 나면 한 번 그의 묘를 다시 확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교단에서 안다면 뒤집어질 일이겠지만.
때마침 벽 너머에서 무언가 묵직하게 그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6시, [다하카르 신의 휴식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 카렐로서는 세네피스를 붙들고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레이오팔 둘이 다 달라붙어도 지름이 100척이 넘는 이 어마어마한 신전의 벽을 다 조사하려면 한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조사하고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시간 싸움이었다.
카렐은 자잘한 랜턴들까지 다 끄라고 지시했다. 이곳에서 빛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이제 앞을 볼 수 있는 건 카렐과 밀리타, 세네피스뿐이었다.
“자네가 남쪽을 보게, 내 북쪽을 볼 테니.”
카렐이 밀리타와 반반씩을 나눠 벽 곳곳을 눈과 손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밀리타도 미리 준비해 온 작은 확대경을 눈에 대고 벽 구석구석을 꼼꼼히 눈으로 보고 손으로 더듬었다. ‘들어갈 곳이 못 된다’는 말에 뚱해진 세네피스는 고개를 쳐들고는 넓디넓은 둥근 돔 천장의 용 문양과 화려한 부조를 별 생각 없이 빙 둘러보았다.
“황상, 벽 쪽은 손을 많이 타서 그런가 푸른 빛이 얼룩덜룩하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벽을 뒤지던 카렐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다른 신전들도 다 그런가요?”
“예에에.”
“신전들을 연결하는 카타콤베라는 곳도 있다면서요? 거기도 데려가주실 건가요?”
“원하신다면요…….”
벽을 보느라 정신이 팔린 카렐은 일부러 바쁜 시간에 성가시게 말을 걸며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는 세네피스의 페이스에 자기도 모르게 말려들고 있었다.
“기왕이면 단둘이 오면 좋겠습니다. 약속하깁니다?”
“알았습니다. 그러니…….”
“천장의 푸른빛은 손을 안 타서 정말 예쁘군요. 그런데……쯧쯧, 저기 한 군데만 얼룩이…….”
세네피스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카렐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지금껏 니사의 증언에 기대어 벽만 신경썼었지 돔 모양의 천장은 단 한 번도 관심을 둔 일이 없었다.
“천장에요? 어디요?”
세네피스가 갑자기 눈에서 빛을 내는 카렐의 앞을 확 막아섰다.
“같이 들어가 주실 거죠?”
“아, 알았으니까 어디냐고요?”
맘이 급한 카렐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야 비로소 원하는 것을 얻어낸 세네피스는 2시 방향의 트라에타오나 교단 구역 꼭대기 부근, 부조 기둥의 주두 쇠사슬 하나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세네피스의 말대로, 그곳의 푸른 물결 위에 마치 누군가 물감 위를 손으로 한 번 확 문지른 것처럼 자국이 나 있었다.
“밧줄 가져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렐은 보안국 헌병들이 밧줄을 가져오기도 전에 이미 그 옆의 기둥에 달라붙어 있었다. 시간에 쫓기는 카렐은 긴 팔과 다리로 순식간에 주두까지 매달려 그 위에 기어올랐다. 그리고는 손자국이 있는 문제의 돌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미세하게 덜크덩거리던 돌덩이는 어느 순간 안으로 쑥 밀려들어갔다.
“여기 맞다!”
사람들이 그제야 불을 켜고 그곳에 서둘러 사다리를 걸었다. 밑에 있던 사에나와 니사가 카렐을 올려보며 말했다.
“저희가 들어가겠습니다. 아직 어떤 곳인지 모르니 폐하께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됐어, 이런 곳을 처음 들어가는 걸 양보할 수는 없지.”
카렐은 아랫사람들이 채 말리기도 전에 그 어두운 구멍에 몸을 쑥 밀어 넣었다. 밀리타가 그 뒤를 바로 따라가려는 모습에 기겁을 한 세네피스가 사람들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겁도 없이 마구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화, 황태후 폐하!”
이 대책 없는 두 그레이오팔들에 기겁을 한 카토와 니사, 사람들이 허겁지겁 사다리를 쫓아올라갔다. 카렐은 그새 이미 굴을 기어 반대편 돌무더기 부근까지 도착해 있었다.
흙투성이가 되어 몸을 가까스로 빼고 나온 카렐은 바로 자신을 뒤따라온 세네피스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아니, 이렇게 무턱대고 따라오시면……. 여긴 인체표본실이라니까요.”
“약속은 지키셔야죠.”
세네피스는 아랑곳없이 다가와 카렐의 손을 꼭 잡았다. 뒤이어 들것을 짊어진 가디언들과 니사, 사에나, 밀리타까지 좁은 구멍에 차례차례 들어섰다.
“제게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카렐은 하는 수 없이 세네피스를 바로 뒤에 세우고는 거미줄과 전선을 걷어내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누군가 지나갔다. 얼마 되지 않았어.”
카렐이 바닥에 난 희미한 발자국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걸음걸이로 봐서 세 명 정도다.”
다시 허리를 편 카렐이 막 마지막 거미줄을 걷어내자 이번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직선으로 뻥 뚫린 복도가 나타났다.
“맞습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곳이에요.”
카렐이 뒤에서 혼자 흐느끼고 있는 니사를 돌아보았다. 그 말에 밀리타까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카렐이 다가가 위로하며 토닥여줄 때까지, 그는 바닥을 짚은 채 멍하니 주저앉아있기만 했다.
“아버지…….”
아직 이곳의 정체를 모르는 세네피스는 이들이 왜 갑자기 이렇게 슬픔에 빠졌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별 생각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무심코 선반 위를 올려보았다. 앞장서가던 카토가 때마침 스위치를 발견하고 불을 켰다.
“으익!”
희미한 푸른 불빛 아래서 기절할 듯이 놀란 세네피스가 카렐의 팔을 덥석 끌어안았다. 카렐은 반사적으로 그를 와락 껴안고 몸으로 감쌌다. 세네피스를 놀라게 한 건 표본병 안에 든, 반 토막 난 사람 머리였다.
“이래서 오시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카렐이 식은땀까지 흘리는 세네피스를 토닥여주며 억지로 웃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시는 게…….”
“아뇨, 계속 갑니다.”
그제야 안정을 찾은 세네피스가 애써 야무진 표정을 하고는 카렐에게 빨리 가자며 도리어 손을 잡아끌었다. 십여 명의 일행들은 카렐과 사에나, 카토를 선두로 계속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세네피스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끔찍한 표본병들에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머뭇거리거나 비명 한 마디 내지 않고 묵묵히 카렐의 뒤를 따랐다.
“방들 모두 확인해라. 내게 신호를 보낸 자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워프루트 제어시설도 여기 있을지 모르고.”
명령을 받은 가디언들은 복도를 따라서 난 방들에 하나하나 들어가 확인했지만 수백 년이 지나 골동품이 된 의료용구들과 장비, 표본, 빈 사무집기들을 빼면 방들은 모두 텅 비어있었다.
복도는 끝도 없이 길게 이어졌다. 어느덧 들어온 지 10분이 넘어갈 무렵, 카렐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일행들에게 랜턴을 끄라고 손짓하고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옆에 함께 가는 카토와 가디언들에게 흩어져 전진하라며 수화를 보냈다. 가디언들만을 동반한 카렐은 다른 일행들을 뒤에 놔둔 채 한 손에 와키자시를 움켜쥐고 빠른 걸음으로 소리 하나 없이 복도를 후다닥 가로질러 달려갔다.
- 여기다. -
희미한 생명반응을 느낀 카렐이 손가락으로 [기계실]을 가리켰다. 그 앞에는 피 웅덩이 주변으로 피 묻은 쇠파이프가 뒹굴고 있었다. 피 웅덩이에서 재빨리 냄새를 맡아 본 카토가 ‘10시간 내외’라고 다시 수화를 보냈다. 피 웅덩이에서 시작된 혈흔이 바닥을 질질 끌어 기계실 안까지 이어져 있었다.
- 제가 가겠습니다. -
대책 없는 황제가 또 먼저 뛰어들기 전에, 카토가 단검을 빼들고 기계실 안에 뛰어들었다. 뒤이어 무언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카토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인데 상태가 매우 안 좋습니다!”
“라말라 박사! 빨리 따라와!”
니사를 급히 불러들인 카렐이 입구 부근을 막고 있는 선반과 합판들을 헤치고 서둘러 길을 냈다.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카렐은 그제야 자신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던 여자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배에 칼이 박히고 머리에 큰 외상을 입은 채 의식을 잃고 죽어가고 있는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제법 몸도 탄탄하고 좋아 보였지만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단발머리는 완전히 헝클어져 피와 먼지로 뒤엉킨 얼굴을 덮고 있고 배에는 한 뼘 가까운 단검이 박혀 있었다. 얼굴 한쪽이 호박만 하게 퉁퉁 부어 누군지 안다 해도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맙소사, 이 꼴로 10시간을 넘게 버텼다고?”
카렐이 혀를 찼다. 이쯤이면 과다출혈로 죽었어도 몇 번은 죽었을 모양새였다. 지난밤 이후로 연락을 안 한 것이 아니고 못 한 듯 보였다. 구급함을 등에 짊어진 니사도 카렐을 따라 쓰러진 철판과 부품들을 어렵게 기어 넘어서 제어장치 앞까지 다가갔다.
“상태가 정말 안 좋은데요.”
니사는 거의 기계적으로 환자의 옷을 모두 찢고 상처를 드러내어 유심히 살폈다. 근육이 선명하게 잡힌 그의 배에는 이번 상처 말고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또 다른 상처가 갈비뼈 아래에 나 있었다. 서둘러 혈액과 약물주사를 팔에 꽂은 그는 환자의 부은 머리를 확인하려 피떡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어……엉?”
멈칫거리던 니사가 얼른 손을 떼었다. 당혹스런 얼굴로 카렐을 한 번 돌아보았던 그는 이곳으로 뒤따라 들어오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돌연 고함을 꽥 질렀다.
“여기 오지 말아요!”
니사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환자의 훤히 드러난 상체를 허둥지둥 덮어 가렸다. 니사의 이 반응에 다른 사람들이 더 놀랐다.
“왜 그러는데?”
카렐의 물음에 니사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바, 바에자 현신이신 것 같습니다.”
순간 얼굴이 확 굳어버린 카렐은 사에나를 얼른 손짓해 불렀다. 들것을 짊어진 사에나가 평소처럼 날랜 몸놀림으로 복잡한 기계더미를 후다닥 뛰어넘어 제어장치 앞에 막 도착했다. 그제야 바에자의 모습을 확인한 사에나는 평소 거의 놀라는 법이라고는 없던 사람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으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그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황제에게 귀엣말로 전했다.
“진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알아, 나도 베흔 그자에게 들었었네.”
니사가 얼른 바에자의 손목을 확인했지만 당연히 마구스 팔찌는 없었다. 하지만 외모와 심지어 몸에 난 흉터들까지 확인한 바로는 분명한 바에자였다.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으니 일단 최대한 빨리 후송해라. 어떤 일이 있어도 살려내도록 해. 어느 쪽이든……구할 가치는 충분하다.”
황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단호한 명령을 받은 니사는 의식이 없는 바에자를 서둘러 들것에 태워 가디언들의 도움을 받으며 기계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니사와 바에자를 내보낸 카렐은 꺼져 있는 제어장치의 동력을 다시 꽂았다. 제대로 움직일까 싶은 장치지만 어쨌든 불이 켜지며 작동이 된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기계는 분명 다시 작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일단은 시간이 없으니 이 기계를 계속 운용하는 수밖에 없겠다. 엔지니어 한 팀을 여기 들여보내서 상태 확인하고 상주시키도록 해. 별로 머물고 싶어 하지는 않겠지만.”
카렐은 기계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서둘러 기계실을 나섰다. 바에자인지, 혹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여자를 실은 들것이 니사가 보살피는 가운데 서둘러 의료진이 있을 다하카르 신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렐은 소름끼치는 표본들로 가득한 이 복도를 빙 둘러보았다. 희미한 파란 불빛이 비치는 아래에서 수많은 표본들이 이 오랜만의 손님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교단 유물을 찾아낸 것이었다.
“여기가 야푸르 대신관이 죽은 곳이라고……?”
“제 어머니와 자하크 대신관과 10명의 마구스들께서 돌아가신 곳도 여기였고요.”
어느새 카렐에게 다가온 밀리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 항상 재앙을 불러오는 죄인이었죠. 언니 오빠들이 저 때문에 그분들이 다 돌아가셨다고 절 원망했어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카렐의 눈에 기계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웬 이상한 문이 들어왔다. 복도를 따라 있는 대부분의 실험실이나 표본실들은 그냥 보통의 문짝이지만 그 하나만은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카렐은 이젠 잔뜩 녹이 슬어 있는 그 문 앞으로 다가가 그 위에 붙은 황동제 팻말을 보았다.
- R 원본 -
팻말 하나만으로도 카렐의 가슴을 쿵쾅거리기는 충분했다. 카렐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쥐고 비틀어 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는 문을 손가락으로 탁탁 쳐 보았다.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마치 금고문 같았다. 자세히 보니 문고리 밑에 구형 열쇠를 꽂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사에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전문가를 불러 부술까요?”
“아니. 뭔지 알 것 같다.”
구멍을 멍하니 쳐다보던 카렐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 목걸이를 꺼냈다. 오르마즈에게서 물려받은 그 낡은 주머니엔 각 교단 마구스들이 바친 보석과 아직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구식 열쇠 하나가 들어있었다. 카렐은 열쇠를 그 구멍에 조심스레 끼워 옆으로 돌려보았다. 느낌이 뻑뻑했지만 몇 번 앞뒤로 움직이자 열쇠는 끼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어렵사리 반 바퀴를 돌았다. 뒤이어 안쪽에서 고리 풀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카렐은 어느새 뒤에 다가온 두 그레이오팔, 밀리타와 세네피스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밀리타는 이미 긴장하고 있지만 아직 영문을 제대로 모르는 세네피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카렐은 별 말 없이 묵직한 문을 힘껏 열었다. 뒤에 있던 카토가 조명을 비추자 가로세로 10척(3m) 남짓 좁은 방 안이 훤하게 밝아졌다. 방 안에 들어선 카렐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엔 어른 한 명을 온전히 담을 만큼 큰 병 4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앞의 두 개에는 ‘정말로’ 사람이 들어있었다.
R-1 베타 (Β, β) - 마샤나그
R-2 프사이 (Ψ, ψ) - 세네피스
R-3 시그마 (Σ, σ) - 오르마즈
R-4 세타 (Θ, θ) - 투르케스크
“엄마…….”
카렐을 따라 걸음을 들여놓은 밀리타는 마샤나그의 병 앞에 엎드리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를 뒤따라온 세네피스는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병 앞에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안에는 자신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한 여인이 이젠 흐릿해진 그레이오팔을 가늘게 뜬 채 수백 년 만에 찾아온 이 반가운 손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 황상……이게 뭡니까? 이 여자는 대체 누굽니까!”
세네피스가 벌벌 떨며 카렐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카렐은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그를 한 팔로 세워주고는 그 두 개의 병 앞으로 다가갔다. 병 안의 세네피스가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그에게 웃어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어머니이고……제 할머니이십니다.”
카렐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는 잔잔한 표정으로 안에서 병을 짚고 있는 프사이-세네피스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오른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그 옆에서 노기 띤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병을 향해 손톱을 세우고 있는 마샤나그의 손 위에도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는 병 안에 있는 이 두 그레이오팔들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겁고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무언가 엄숙한 분위기 때문인지, 전날부터 무겁던 머리가 갑자기 더 무거워졌다.
“고향 행성의 마지막 생존자들입니다.”
카렐이 울고 있는 밀리타와 멍하니 서 있는 세네피스를 번갈아 돌아보며 웃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이복언니 밀리타를 낳으신 분들입니다.”
“예에? 누가요?”
파랗게 질린 세네피스가 발밑에서 울고 있는 자신의 언니, 밀리타를 휙 돌아보았다.
그때, 카렐은 갑자기 양 손을 짚고 있는 병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휙 돌렸다. 무슨 이유인지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왜……이러지…….”
그가 중심을 잃으며 앞으로 기댄 순간, 유리병 안에 있던 마샤나그의 손이 갑자기 병을 깨고 나와 그의 왼쪽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그 큰 유리병이 순식간에 폭발하며 사방으로 파편이 흩어져 방 안의 병 4개를 모두 산산조각을 냈다. 작은 방 안은 날리는 유리파편과 끔찍한 보존액으로 전쟁터가 되었다.
“어, 억!”
그대로 주저앉은 카렐이 표본병 속의 마샤나그를 멍한 얼굴로 올려보았다. 보존액 속에서 핏기가 사라져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한 마샤나그가 물러나려는 카렐의 목을 나머지 한 손으로 덥석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죽음의 기운이 뒤덮은 소름끼치는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악취 나는 보존액을 온몸에 뒤집어쓴 카렐은 몸이 얼어붙은 채 계속 목과 손목이 잡혀 있었다.
“왜 이제야 왔느냐? 날 이렇게 외롭게 내버려두다니!!!”
마샤나그의 손에 잡힌 카렐의 목과 손목이 아드득 소리를 내며 뼈까지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뒤덮은 독한 보존액은 그의 온몸 살갗을 지글거리며 태워가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이 손목부터 시작해 몸통, 팔다리, 얼굴까지 뒤덮었다.
“아, 아악…….”
카렐이 버둥거리며 마샤나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마샤나그의 여윈 손아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카렐의 몸이 뭉개지며 뼈와 살점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삐어져나왔다. 그리고 손목 안에 심어져 있던 잔딕까지도 머리를 드러냈다.
뇌를 태워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열기에 이성을 잃은 카렐이 버둥거리며 마샤나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미쳐 몸부림을 쳤다.
“아아아악!!!!”
보존액에 살점이 녹아들어간 팔다리에서 이미 뼈가 보이기 시작했고 터진 배에서 내장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카렐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미쳐 날뛰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이 온통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불꽃 너머에서 부릅뜨고 있는 마샤나그의 증오에 찬 눈동자만이 보였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리 외롭게 되었는데!!!”
그때, 오른쪽 병에 있던 프사이-세네피스가 이미 뼈가 드러난 그의 반대편 손을 꽉 잡았다. 미쳐 날뛰던 카렐이 그마저 밀어내려 했지만 그 역시 소용이 없었다.
“가요! 가라고요!”
프사이-세네피스는 분노에 날뛰는 마샤나그를 밀어내고는 온몸이 타들어가며 울부짖고 있는 카렐을 다정히 품에 안았다. 그의 포옹에 지레 놀란 카렐이 고개를 저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제발, 외로운 날 안아다오.”
카렐의 눈이 확 커졌다. 그는 녹아내려가던 팔을 더듬거려 프사이-세네피스를 힘겹게 안았다. 그 순간, 카렐의 몸을 시뻘겋게 태워가던 불길이 순식간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황상? 황상! 제발요!”
눈물로 범벅이 된 세네피스가 유리병 앞에서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 카렐의 몸을 끌어안은 채 뺨을 몇 번이나 때리며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이번 발작은 카렐의 발작을 몇 번이나 다루어보았던 카토조차 전혀 예상도 못 한 순간에, 손 쓸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번엔 잠을 자던 것도 아니었고, 딱히 건강이 나빴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병을 짚고 멀쩡하게 서 있는 듯 보였던 황제가 어느 순간 갑자기 비명을 지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날뛰는 모습에 가디언들은 물론이고 밀리타까지도 당황해 패닉에 빠졌을 정도였다.
그 순간, 목숨까지도 생각하지 않고 제일 먼저 달려든 건 이번에도 세네피스였다.
“왜 또 이러십니까! 이러시면 전 어쩌라고요!”
발광하는 카렐을 끌어안고 있느라 옷이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된 세네피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울부짖었다.
그렇게 미친 듯 몸부림치던 카렐의 저항은 몇 분 후에야 비로소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세네피스의 가슴을 더듬거리며 부들부들 떨던 카렐은 어느 순간 고개를 뒤로 맥없이 툭 떨어뜨렸다. 밖에서는 빨리 황상을 후송하라는 카토와 사에나의 찢어지는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황상, 황상, 제가 보이십니까? 눈 좀 뜨세요!”
세네피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카렐의 가슴을 얼른 짚어보았다. 뒤집어졌던 눈이 제자리로 돌아온 카렐은 여전히 반쯤 넋이 빠진 눈길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세네피스는 그의 눈길이 마치 다른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렐이 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의 포근한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더듬었다. 그는 또 한 번의 무시무시한 발작을 힘겹게 살아 넘긴 카렐의 몸을 꼭 안아주었다. 하지만 이런 발작이 또 온다면, 그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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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회부터는 엔딩의 장이 될 하임달로 무대가 옮겨집니다....ㅎㅎㅎ
무서운 갈고리 케스난 누님과 여전히 악당인 베흔이 카렐이 없다고 갖은 악행(?)을 다 저지릅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밉사와요 ~~~( ̄∇ ̄)ブ~~★
그나저나 조아라 프리미엄은 조회수가 바닥을 기고 있네요...
이놈이 제 연재와 창작의욕을 팍팍 꺾고있네요;; 차기작 생각해서 힘은 내고 있지만;;;
아, 대형서점들에서도 2부 1권~4권판매가 지난 월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등록하고 판매개시까지 무려 20일이;;;) 공짜 미리보기까지 총 5권이 올라있습니다.
아참; 그리고 예스24나 알라딘 등 K전자책 계열사에서 전자책 구매하신 분들께선 새 통합뷰어 [크레마]를 다운받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뷰어땀시 욕을 좀 먹었는데 지금까지 나온 전자책 뷰어 중에서 제일 잘 만들어진 것 같네요.
출시기념으로 서점에 따라 eBook할인이나 쿠폰이벤트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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