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47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
.
.
“시설은 괜찮네요. 군인들도 괜찮아 보이고요.”
라스가 널찍한 숙소 침대에 큰대자로 몸을 뻗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기지의 시설과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바로 얼마 전 새로 지은 것 같았다. 웬만한 비품들에는 사용한 흔적도 없고 하다못해 문고리와 수도꼭지까지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였다.
분견대장 세하 비장은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에 흉터 가득한 사나운 얼굴로 겁 많은 라스를 기겁하게 했지만 보기와는 달리 친절했다. 그는 기지의 군부대 건너편에 따로 있는 민간 발굴단 숙소에서 깨끗한 독채를 내주었고, 기지에서 사용하는 지도도 한 장 복사해 주었고 지리를 잘 아는 산토스 상등병을 가이드로 내주었다.
“뭐니뭐니해도 이 침대가 제일 반갑지만요.”
라스가 침대 위를 한 바퀴 데구르르 굴렀다. 숙소엔 공기필터가 달려 있어 숨 쉴 때 걱정할 필요도 없고, 튼튼한 창문은 몰아치는 강풍을 완벽하게 막아주었다. 내부는 냉난방과 수도 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3일이나 그 좁은 쿠셋에 큰 몸을 우겨넣으며 버티느라 녹초가 되어버린 베흔은 모처럼 발끝까지 다 실을 수 있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이미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안 피곤해요?”
라스가 고개를 빠끔히 들었다. 자이납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염탐 온 사람마냥 유리창의 블라인드 틈새로 연병장 너머 군인들의 생활관만 감시하고 있었다. 검은 먼지가 워낙 강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는 망원경을 눈에 대고 강한 먼지 중간중간 가끔씩 보이는 생활관의 모습만 눈이 빠지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우베가 그런 자이납에게 빈정거렸다.
“그러고 있는다고 프레소인가 그 자알~생긴 남자 안 나와요.”
“이씨.”
속내를 들킨 자이납이 대뜸 입을 삐죽거렸다.
“그나저나 이상하지 않아요?”
자이납이 코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
“교대 1조가 돌아왔으니 교대 2조가 나갈 차례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나갈 생각을 안 해요. 아까 식당 앞 잠깐 지날 때 보셨잖아요, 저라면 당장 나가고 싶어서 짐 싸들고 방방 뛰고 있었을 텐데 70명 대원들이 몽땅 다 무슨 제사상 앞에 앉은 사람들처럼 죄다 엄숙한 분위기인 거 못 보셨어요?”
“다 카메네이 중랑장님 같지는 않잖아요.”
라스의 나름 진지한 대답에 자이납이 대뜸 눈을 흘겼다.
“이거 그럼 조사는 언제 나가는 거예요?”
기계 점검을 대충 마무리한 우베가 퍽퍽해진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분께서 하루라도 빨리 찾으라고 닦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잖아요. 검은 철성인지 철덩어리인지하고 황금탑인지 뭐시긴지하고…….”
“이젠 워프루트 통제소까지 찾으라지.”
“우릴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신 게 분명해요.”
라스가 침대에 누운 채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때, 블라인드 틈새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자이납이 갑자기 손가락을 딱 쳐서 소리를 냈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지만 소리에 놀란 베흔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는 통에 더 시끄러워졌다.
“그 남자 나와요?”
우베의 능청맞은 물음에 자이납이 다시 눈을 흘겼다. 코나가 자이납 반대편에서 블라인드를 들추고 중얼거렸다.
“그 남자 맞네.”
이젠 코나까지 딴소리를 하자 자이납이 버럭 역정을 냈다.
“저놈들 떼거지로 어디 가는 것 같잖아요.”
“알아. 군인들이 기지 밖으로 나가는 게 뭐가 이상해서?”
코나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생활관의 창 너머로 세하 비장을 선두로 마르텔로와 기술사관 프레소, 산토스, 심지어 셔틀 조종사들까지 포함해 거의 50여 명이 마스크와 고글, 방풍 망토까지 모두 갖추는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들 뭐 챙겨갖고 가는지 좀 봐요.”
자이납이 그에게 망원경을 불쑥 내밀었다. 별 생각 없이 망원경에 눈을 댄 코나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대뜸 달력부터 보았다. 어리둥절해진 우베와 라스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왜 그래요?”
자이납은 막 잠에서 깬 베흔을 손짓해 불렀다. 재빨리 창으로 다가온 베흔에게 코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짐작 가십니까?”
순간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베흔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준비를 갖춘 분견대원 50여명은 건물을 나와 잿빛 폭풍 속을 가로질러 기지 주출입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흔도 급히 무기와 장비를 챙겨들며 자이납에 따라 나오라고 손짓했다.
“따라가 보자.”
얼떨결에 베흔과 함께 기지 철조망을 몰래 빠져나온 자이납은 할룩스부터 확인했다. 지직거리는 할룩스 화면을 본 순간, 자이납은 자신이 어떤 곳에 와 있는지를 비로소 실감했다. 기지에서 채 1스타디아도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통신 감도는 절반으로 떨어져 있었고 야전에서 쓰던 스캐너는 눈이 아플 정도로 지직거렸다.
“어후, 모래폭풍이 심하긴 심한가보네.”
자이납이 주변을 둘러보며 치를 떨었다. 서부에서 자라고 군인으로 근무하며 나름 모래바람 같은 건 많이 겪어본 그였지만 이곳처럼 오감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기계까지 먹통을 만드는 이런 시커먼 폭풍은 난생 처음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빠져나온 분견대 기지의 실루엣이 모래폭풍 너머 희미하게 보였다. 지금 뒤쫓고 있는 저들 분견대 일행을 놓쳤다가는 제대로 되돌아오기도 힘들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방향감각을 잃기 십상인 이런 곳에서 지리도 모르면서 덥석 나온 것부터가 사실상 미친 짓에 가까웠다.
“괜히 가져왔네.”
자이납은 스캐너를 허리띠 속에 쑤셔 넣고 그냥 X의 직감에 의존해 움직이기로 했다.
“뭐, 우리 X 조상님들이 여기서 오셨다지요. 알아서 다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자이납은 애써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멀리 50여명의 분견대원들은 속삭임 한 번 없이 산자락의 기지를 떠나 남쪽의 저지대 분지로 계속 내려갔다.
안에 있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막상 나와서 보니 기지는 전술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입지에 위치해 있었다. 기지는 분지 북쪽의 웅장한 산맥 아랫자락에 불쑥 솟아오른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기지를 나가려면 바위 꼭대기에서 흘러내린 머리 만 한 돌들이 가득 널려 있는 경사진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야 했다.
“기지 입지만 봐선 탐험꾼들 잡는 초소가 아니고 무슨 전쟁터 한복판에 세운 것 같지 않냐?”
베흔이 기지의 이상한 입지를 바로 읽어냈다. 이 부대의 공식적인 존재 목적인 ‘민간인 단속’ 대로라면 언제든 바깥으로 쉽게 나가고, 민간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사방으로 트인 공터에 세웠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기지의 위치는 마치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세운 폐쇄적인 전방 요새 같은 인상이었다. 게다가 멀리서 보니 온통 철조망까지 둘러놓은 것이 수베르에 있는 시라즈 부대 기지에 못지않게 주변을 의식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등화관제는 왜 할까요?”
자이납은 모래먼지 너머로 형체가 사라져 이젠 보이지도 않는 기지 터를 올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들이 받은 숙소의 창들에는 모두 고정식 루버가 쳐 있어 밖으로 빛이 나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모래먼지로 몇 발짝 앞도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철조망에 달린 조명도 모두 꺼져 있었다. 심지어 부대장 세하 비장은 일행에게 ‘랜턴을 쓰거나 불을 켜고 문을 여닫지 말 것’을 당부하기까지 했다.
개척지의 경비기지 치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일단 저놈들이나 따라가 봐야지.”
베흔과 자이납은 반 스타디아 정도 앞서가고 있는 분견대 병사들을 따라 단단한 바위를 조심조심 짚어가며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죄다 똑같은 마스크에 고글, 망토를 쓰고 있어 이렇게 멀리서는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지만 무언가 대단히 엄숙한 분위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출발하고 30분 가까이 지나자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내리막이 끝나고 자잘한 돌멩이들이 널린 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자이납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젠 기지 불빛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오는 길목에 가끔 돌을 놓아 표시는 했지만 솔직히 혼자 돌아갈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평소 그리 진중한 편이 아닌 베흔이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가는 걸까요?”
자이납이 조심조심 물었지만 베흔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자이납은 그가 이미 뭔가 짐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자이납은 잠시 멈춰 서서 지도를 확인해 보았다. 모래폭풍 때문에 방향감각을 잃어 정확히는 읽을 수 없지만 대충 감으로 방향을 찍어보니 저들은 옛 하임달의 전장을 향하고 있었다.
“맙소사. 오늘이 9월 11일이잖아?”
자이납은 그제야 베흔이 왜 저리 죽상을 하고 따라가고 있는 건지를 깨달았다. 50여명의 분견대원들은 오르마즈와 근위대 우군의 마지막 사투가 있었던 분지 동쪽을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과일과 술, 포, 제사 음식들을 가득 짊어지고.
분견대원들의 침묵의 행진은 1시간 남짓 지나 멈췄다. 자이납과 베흔은 오는 중간 중간 발밑에 밟히는 오래된 무기와 아직 미처 수습되지 못한 누군가의 유골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었다. 둘은 바람에 닳아 맨들맨들해진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50여 분견대원들이 뭘 하는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들이 멈춰선 곳에는 마치 고인돌처럼 2개의 긴 돌과 거의 침대만한 크기의 넓적한 돌판을 놓아서 만든 단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각자 가져온 과일과 포를 놓기 시작했다. 제사상을 다 차린 후, 50여 명의 분견대원들이 줄을 맞춰 그 앞에 나란히 꿇어앉았다. 몰아치는 모래폭풍 속에서 꿇어앉은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또다시 엄숙한 침묵 속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을 지켜보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베흔이 갑자기 이마를 탁 쳤다.
“여기 놈들을 왜 짤랐었는지 이제야 기억이 난다.”
“예? 뭔데요?”
“그게 이놈들이…….”
그때, 갑자기 등 뒤의 높은 산 쪽에서 사람 한두 명은 날려버릴 만큼 어마어마하게 강한 돌풍이 확 불어와 베흔, 자이납과 분견대원들 사이의 짙은 모래폭풍을 순식간에 휙 날려버렸다.
“으익.”
깜짝 놀란 베흔과 자이납이 얼른 옷자락을 여미고 바위 뒤로 몸을 움츠렸다. 이번 바람은 놀랍게도 모래가 거의 안 섞인, 깨끗한 바람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바람 한 번에 마치 마술처럼 모래폭풍이 멀리 쓸려가면서 돌연 시야가 확 트였다.
“이게 어디지?”
짧게나마 시야가 확보되자 베흔이 재빨리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이전 풍경은 물론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이 만들어놓은 제사상 주변에 수북이 흩어져 있는 녹슨 무기들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근위대 보병들이 한 지점에서 저렇게 많이 죽은 곳은, 그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맙소사, 그놈이 죽은 곳이다. 바로 오늘.”
하늘이 깨끗해지자 분견대원들의 제일 앞줄에 있던 큰 키의 누군가가 대표로 일어나 유리로 뚜껑을 씌운 초를 양쪽에 켜고 절을 올렸다.
“사람이 제주(祭主)인가 봐요. 세하 비장이겠죠?”
모래폭풍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자이납이 속삭였다. 초에는 뚜껑을 씌웠어도 워낙 강한 바람에 촛불은 당장 꺼질 듯 힘겹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디 이 죄인을 용서하고 영면하소서.”
남자의 흐느낌이 베흔과 자이납이 있는 곳까지 그대로 들려왔다. 그 남자와 나머지 분견대원들이 모처럼 드러난 희뿌연 하늘을 올려보며 일제히 고글과 마스크를 벗었다.
“어?”
베흔과 자이납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제주 신분으로 앉아있는 건 이 부대의 지휘관인 세하 비장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고운 갈색 머리칼과 아름다운 푸른 눈을 한 기술사관 프레소가 거센 바람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꿇어앉아 있었다.
타르서스 수도 마잔다란은 항상 그렇듯 여전히 시끄럽고, 지저분했다. 그리고 지난달부터는 어딘지 분위기도 그리 좋지 않았다. 타르서스 별궁에는 2번이나 방화 사건이 벌어졌고,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군 사무소에도 몇 번이나 화염병이 날아들어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몇몇 곳에서는 [타르서스의 정의로운 아들 볼토 트라우제]를 기리는 사진이나 플랭카드가 나붙고 황제와 그 일가를 저주하는 부적과 글이 걸리는 일도 있었다.
볼토가 이곳 지방장관이나 황실 이부대신으로 있었을 때만 해도 배신자 취급을 했던 것을 기억하는 외지인이라면 헛웃음이 나올 광경이지만 어쨌든 볼토 트라우제는 황제에 대한 반역모의와 자살을 계기로 한때 자신을 배척했던 동족들 사이에서 얼떨결에 순교자 영웅이 되어 있었다.
볼토의 죽음으로 황실 고관 중 타르서스인은 또다시 사라졌고, 이제 황제 곁에 남은 타르서스 혈통은 절반 피가 섞인 귀인 에스더 정도였다. 황제가 그간 화합 차원에서 등용했던 타르서스인 셋 중 하나 꼴로 이번 대숙청에서 반역에 연루된 것이 밝혀져 죽임을 당했거나 유배에 처해졌다.
그들 모두가 억울하게 죽었고, 자신들은 차별받는다고 생각한 타르서스인들은 볼토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황실에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황실 보안국에서 아무리 도끼눈을 뜨고 있어도 호족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문맹의 타르서스인들을 완벽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위전쟁 당시, 카렐은 코리온을 시켜 타르서스의 부패한 호족가문 십여 개를 한 번 확 쓸어내고 그들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던 타르서스 직할군을 해체해 버렸지만 효과는 채 10년이 가지 못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파악하기도 어려운 작은 군소 가문들이 사방에서 더 들끓는 결과로 돌아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나름 온건하기도, 일부는 비적과 종이 한 장 차이였지만 탐욕스럽다는 것만은 공통적이었다.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타르서스는 여전히 황제에게 두통거리였다. 이곳에선 의무교육령도 통하지 않았고, 계급과 성별에 따른 쿼터 배분도 소용이 없었다. 호족과 그 수하들, 배운 것,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자신들의 황실의 침략으로 못 산다고 세뇌되어버린 빈민들은 황실이 지어 준 학교에 나가는 어린아이들의 얼굴에 염산을 붓고,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려는 여자들을 납치해 코와 귀를 자르고, 쿼터로 공무원이 된 자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기습해 칼을 휘둘러댔다. 하루에도 수십 건의 살인사건이 나는 가운데 타르서스인들은 그들을 무서워하면서도 또 한편 정서적으로는 지지하는 이중적인 면을 보였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부족 간에, 받드는 호족 세력을 놓고 구제불능으로 싸워대면서 또 한편 외세에 대해서는 도움의 손길이건, 침략이건 무관하게 히스테리에 가까울 만큼 일관되게 적대를 드러내오고 있었다.
“물라 씨?”
모래먼지가 풀풀 날리는 마잔다란의 시장 한편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텁수룩한 수염의 깡마른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힐끔 돌렸다. 그는 마시다 만 차를 그대로 놔둔 채 묵묵히 차로 다가가 올라탔다. 그가 차를 타기가 무섭게 눈이 가려지고 소지품 수색이 시작되었지만 그는 익숙한 듯 두 팔을 벌리고 그대로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닌데 적당히 좀 하자고.”
남자는 터번 속까지 확인하는 그들에게 살짝 짜증을 냈지만 그런다고 봐주는 법은 없었다. 샅샅이 몸 수색을 끝낸 후에야 차는 당나귀 수레와 최신식 승용차가 뒤섞인 괴상한 대로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보안국장 그 여자가 무섭긴 무서운가봐?”
사내가 입술 한쪽을 살짝 치켜올리며 조롱하려 했지만 상대에겐 전혀 통하지도 않았다.
몇 분 후, 차는 마잔다란 외곽의 한 허름한 흙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남자는 괴한들의 손에 이끌려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날 보자고 한 녀석이 너냐?”
여자의 싸늘한 목소리에 ‘물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눈가리개가 풀리고,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검은 로브에 검은 베일을 쓰고 있어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타르서스의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습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벌리고 다가가려 했다.
“뭐냐.”
그의 앞을 딱 막아서며 눈을 똑바로 노려보는 헤네티의 눈빛에는 감정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이자와는 기세싸움 같은 것이 전혀 통할 성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쪽 예법에 서툴러서.”
‘물라’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타르서스 분리독립단체 ‘헥스터’의 대장으로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그는 물러날 때와 아닐 때는 확실히 구분할 줄 알았다. 사실 그가 상대방의 예법에 크게 어긋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부러 이런 짓을 시도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날 쓸데없이 불쾌하게 만들지 마라. 임신한 여자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든. 헤즈비. 네가 옛날 예법을 잊지 않았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아.”
기세 싸움으로 시작하려던 ‘물라’ 아니, 죽은 굴부딘 헤크마의 아들 헤즈비는 이번은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그는 애당초 교단 신도도 아니고, 고용주인 타르서스의 호족 세력들을 대표해 눈앞의 자칭 ‘위대한 현신’과 협상을 하러 온 것이지 항복하러 온 게 아니었다.
“나라고 아비까지 죽이려 했던 호로새끼를 믿어서 이 자리에 나온 건 아니다.”
이디나는 헤즈비와 가슴이 닿을 듯 맞서고 있던 코런덤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울컥한 헤즈비는 슬쩍 앞을 올려보았다. 처음부터 상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해 우위를 잡으려는 건 그의 작전이었지만 거꾸로 상대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모욕하며 자신의 열세를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베일 속 이디나는 그의 속을 읽은 듯 다시 빈정거렸다.
“왜? 내가 네 속을 먼저 긁는 것이 뜻밖이더냐?”
또다시 속을 읽힌 헤즈비는 재빨리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제 행적까지 다 아실 텐데 대가만 두둑하다면 그 정도는 못 넘기겠습니까?”
헤즈비는 차라리 대놓고 솔직해지기로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강경파 민병대의 수장으로 교단을 무너뜨리자며 앞장선 매파였건, 샤미르의 사후 민병대를 장악해 제국을 통째로 차지하려다가 베흔을 앞장세운 샤미르의 친위쿠데타에서 온몸이 찢겨 죽었건, 다 잊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이전에 아버지를 죽이고 가문을 장악하려다가 실패하고 쫓겨난 이후 ‘물라’라는 이름으로 타르서스 분리독립단체 ‘헥스터’의 수장 행세를 하며 이미 타르서스의 뒷골목에서 나름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는 호족들의 지긋지긋한 분쟁의 와중에서 지금 같은 뒷골목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뿐 타르서스의 독립 따위의 거창한 명분 같은 것에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다.
그의 대답이 맘에 드는지 대신관이 웃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대가야 네 그릇에 맞을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헤즈비는 대신관의 이 대답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 내심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그는 타르서스 물정에 어두운 이 대신관에게 대충 고개를 숙이는 척 해 가며 거둘 건 다 거둘 참이었다.
============================ 작품 후기 ============================
.
.
.
코리온이 평정에 사실상 실패한 타르서스 호족들을 한 발로 짓밟아줄 용자(?)가 과연 나올까요? ㅎㅎㅎ
그나저나 과거 편을 뺐더니 연재분이 너무 빨리 비축분을 쫓아와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벌써 7권 후반에 육박....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밉습니다~~~( ̄∇ ̄)ブ~~★
출판본 작업을 하다보니 3부 8권이 너무 뚱뚱(??)해질 것 같아 걱정이 큽니다. ㅎㅎㅎ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예정)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올레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