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48화 (1,043/1,132)

< -- 1048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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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물으려 고개를 들었던 헤즈비는 대신관의 곁에 있는 또 다른 ‘타르서스인’을 발견하고는 순간 당황했다. 남자의 얼굴을 본 헤즈비는 교단의 편을 들고 있는 타르서스인이 자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한편으로 경쟁자가 생긴 것을 걱정해야 했다.

“세닌, 오랜만이요.”

한때 볼토의 가신이고 충복이었던 세닌은 헤즈비가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 별로 맘에 들지는 않는지 입가를 씰룩거렸다.

볼토의 반역사건 직후, 페로의 비서로 일하고 있던 볼토의 측근 세닌에게도 긴급 체포령이 내려졌었다. 하지만 그 사건 직전, 측근에 대한 미행과 감찰로 보안국과 충돌이 있었던 페로는 보안국 명의로 날아온 자신의 최측근 체포령에 그 저의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페로가 체포령의 배후를 의심하며 이것저것 확인하는 동안, 다행히 누군가가 ‘빨리 달아나라’는 메시지를 보내준 덕분에 세닌은 주인인 볼토가 황제의 전용함에서 자살을 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까스로 페로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익숙한 고향 타르서스에 잠적했고, 이제 그가 의탁할 곳은 교단밖에 없었다.

대신관이 자기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헤즈비의 마음이 급해졌다.

“제게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그러시면 저도 제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헤즈비의 물음에 대신관을 대신해 세닌이 입을 열었다.

“황제가 곧 죽을 것이라는 건 당신도 알 거요.”

“그런 소문이야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지.”

마치 윗사람처럼 구는 세닌의 모습에 신경질적이 된 헤즈비가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대신관이 자신 앞에서 충성경쟁을 시키려 일부러 둘의 대화를 연출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어차피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세닌이 여전히 그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페로 대공까지도 길어야 서너 달 이내로 보고 있다면 말이 다르지요.”

헤즈비가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페로의 측근이었던 세닌의 말이 사실이라면 곧 어마어마한 혼란과 파국이 온다는 뜻이니 일개 용병대장 겸 자칭 독립운동단체 수장을 자처하는 그에겐 일생일대 기회가 오는 셈이었다.

세닌이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테번과 베흔 놈도 샤미르 지도자의 죽음에 맞춰 손잡고 일을 터뜨려 제국을 장악하지 않았소? 그때 당신 아버지가 죽은 건 유감이오만.”

“당신 말은 내가 테번이고 당신이 베흔이라는 뜻?”

헤즈비는 이디나가 베일 안쪽에서 그의 과대망상에 얼마나 황당해하고 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남부는 이미 북부와 동부, 서부까지 모두 공격할 비밀 루트를 뚫어놓고 황제의 장례식 날만 기다리고 있지. 굶주린 제후지역은 어차피 톡 건드리면 쓰러질 거요. 이번 제국회의에서 남부가 너무 쉽게 물러난 걸 이상하다고 생각은 안 해 봤소?”

“그러니까, 제후지역은 남부가 후질르게 하고 날보고 황제령을 후질러 달라?”

“황제가 죽고 제후지역까지 동시에 공격을 받으면 황실에 남은 쫄따구들은 정신을 못 차릴 테니까. 황실군은 제후지역으로 우르르 몰려나갈 테고 당신이, 아니 호족들이 폭동과 테러를 사주해서 황실 관료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여길 장악하긴 충분하지요. 어차피 경비군은 황실 관료만 빠져나가면 바로 당신네 병력이 될 거요.”

세닌의 대답에 헤즈비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타르서스는 이미 호족들이 장악하고 있소. 황제는 어차피 이름뿐이고 경비군은 옛날 직할군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호족들의 절반 사병이요. 지금 그걸 조건이라 내놓은 거요?”

세닌이 옆에 앉은 대신관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이디나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세닌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남반구 전체 정도면 되겠지요? 수에니와 남극, ㅤㅋㅞㄹ크 포함해서. 거기로 당신네 사병들을 보낼 수 있는 수송선 10척과 셔틀 50대, 3만 명의 민간인을 지금의 경비군 수준으로 무장시킬 무기, 군사교관은 우리가 제공하겠소.”

헤즈비가 비로소 눈을 빛냈다. 이 말은 지금의 황량한 사막뿐인 타르서스 외에도 황실 자치지역인 ㅤㅋㅞㄹ크와 남극, 수에니까지 포함된다는 의미였다. 모두 농사가 가능하고 자원이 풍부한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헤즈비도 파격적인 조건에 마냥 좋아라 하며 현실적인 문제를 잊을 만큼 서툴지는 않았다.

“그런데 황제 수하들도 만만치 않고 이미 쓰잘데기 없는 자식들을 5명이나 싸질러놨다죠.”

헤즈비의 험악한 말에 베일 속 이디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 역시 주변 사람들은 알 리가 없었다. 헤즈비가 계속 빈정거렸다.

“다른 제후지역에서 다른 황자들에게 각기 딴 맘을 품고 있다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건 제후지역 얘기고 여긴 황제령이란 말이요. 황제령. 황제 사후에 장태자, 그것도 중앙귀족 대표의 손자인 적장자가 제위를 물려받는다는데 황제령의 황실 관료 중에 누가 감히 딴죽을 걸겠소? 부잣집은 망해도 3대는 가는 법이요. 황실이 아무리 핫바지가 된다고 해도 하루 이틀에 자기 뒷마당까지 내주겠소? 혹시 남부가 맘 놓고 제후지역들을 후지를 동안 우릴 방패막이로 쓰려는 건 아니고요?”

헤즈비가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몇 번이나 찍어 과장을 섞어가며 씩씩거렸다. 나름 예리한 반박에 세닌의 표정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도 상대를 그저 사막의 용병무리 대장 정도로 여겼던 태도를 진지하게 고쳐야 했다.

“당신이 카이 장태자를 죽여주기만 하면 되지.”

세닌의 태연자약한 대꾸에 헤즈비는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최대한 빈정거리는 투로 계속 쏘아붙였다.

“이제야 본심이 나오는구려. 내가 장태자를 죽인다 칩시다. 나머지 황자들은요? 듣자하니 나이들이 어리긴 해도 누굴 후계자로 세워도 무리가 없을 똘똘한 꼬마들이라던데 그놈들은 또 어쩔 거요?”

“뭐가 그리 급하시오? 내 말 듣기 싫다는 거요?”

세닌이 짜증을 내자 헤즈비도 그제야 일단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세닌이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황제가 죽으면 어차피 다른 황자들은 다 죽을 거요. 우리 손 더럽힐 필요도 없이.”

“무슨 말이요?”

헤즈비가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세닌을 노려보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옆의 대신관의 동태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관은 세닌과 헤즈비의 논쟁을 붙여놓고 옆에서 물끄러미 구경만 하는 중이었다.

“페로 대공과 그 수하들이 황제가 죽는 즉시 장태자를 뺀 다른 황자와 비빈들을 장례 준비 명목으로 불러들여 다 죽이도록 시나리오를 짜놨단 말이요. 좀 더 정확히는 내가 짰었지. 황제만 죽으면 어차피 둘째 주페부터 막내 마리안까지 모조리 끝이요.”

세닌이 히죽거리며 손가락으로 목을 그어보였다.

“허. 페로 그 양반도 참 대단하네.”

헤즈비는 페로의 용의주도함에 혀를 찼다. 세닌이 양손을 깍지끼며 악마처럼 웃었다.

“우린 마지막에 장태자를 치워서 총리 뒤통수를 치고 마무리를 하는 것뿐이고. 간단하지 않소?”

곰곰이 생각을 한 헤즈비가 다시 물었다.

“총리가 다른 황자들을 죽인다는 건 장태자에게 모든 걸 건다는 건데, 설마 쉽사리 죽일 수 있겠소? 계획도 없이 내게 그걸 요구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 내가 페로관에 있던 걸 잊지 마시오.”

세닌이 으스대며 헤즈비, 그리고 대신관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냈다.

“장태자가 황제가 되기 위해선 즉위 전 4명의 비빈을 들여야 합니다. 대공이 비상시를 대비해 내심 몇몇 처자들을 목록에 올려놨는데 그동안은 장태자가 언제 죽을지 모르게 골골거려서 그쪽 집안들에서 죄다 빼기에 바빴죠. 그런데 지난달에 약을 찾아냈다는 소문이 돌면서 순식간에 몸값이 상한가를 치더이다.”

“14살 꼬맹이한테 벌써 마누라가 넷이요? 거 부럽네.”

헤즈비가 기가 막혀 픽 웃었다. 세닌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 황제는 너무 이르다고 펄쩍 뛰는 것 같던데……대공은 급합디다. 대공 계획에서 황후 자리는 동부최고제후 다히르 공의 막내딸이 예약했고, 황비는 압둘 모투바 내무대신의 딸이 될 것 같소. 황빈 한 자리는 서부 4제후 알리 경 손녀딸이 내정되어 있고요, 문제는 마지막 황빈 한 자리가 아주 웃기게 되었다는 거지.”

“설마…….”

헤즈비가 말끝을 끌었다. 세닌이 킥킥거리며 답을 내놓았다.

“원래 타르서스를 배려하는 의미에서 볼토 트라우제의 딸이 예정되어 있었소. 그런데 이젠 빈자리가 됐지요. 아마 총리는 그 대신 다른 타르서스 유력가의 딸 중 하나를 고르려 할 거요.”

“아하.”

비로소 세닌의 계획을 이해한 헤즈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타르서스의 원수 핏줄을 기꺼이 찔러죽이고 산화할 희생물 딸 하나쯤 바칠 가문은 충분할 줄로 아오. 죽을 맘으로 덤비는 놈은 아무도 못 막는 법이지.”

“장태자빈이 되려다가……끔찍하게 찢겨 죽겠군. 아무렴, 뭔 상관이람.”

“곧 개척일 축제가 있으니 장태자와 상견례를 갖게 할 핑계거리로는 더할 나위가 없지요.”

헤즈비도, 세닌도 이 조건에 이의는 없었다.

헤즈비는 대신관이 인물 하나는 제때 제대로 건졌다고 생각했다. 비록 충성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는 맘에 들지 않지만 황실 정보에 훤한 저런 자가 하나쯤 있는 것도 도움이 될 듯했다

내내 조용하던 이디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넌 호족들의 사자 자격으로 왔으니 돌아가서 딸을 바칠 가문을 찾아내라. 딸을 바친 가문에 수에니 반도를 준다고 하면 앞 다투어 내놓겠지.”

헤즈비는 ‘그 값이면 딸 열 명이라도 내놓을걸요.’라고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황실의 경제특구이고 황제령에서도 가장 부유한 휴양지인 수에니 반도는 타르서스라는 돌덩이에 박힌 보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을 차지한다는 건 남반구에서 제일 알짜배기를 먹는 셈이었다. 딸을 천시하는 타르서스 호족들에게 그 조건이라면 앞 다투어 나설 것이 빤했다.

“기꺼이 전합지요.”

용무를 끝낸 이디나는 헤즈비를 놔둔 채 이 허름한 집을 성큼성큼 나섰다. 황제의 혈통을 모조리―자신의 뱃속에 있는 한 명만 빼고―제거하려는 이디나의 계획은 점점 구체화되어가고 있었다.

지하 표본실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하루 종일 의식과 무의식을 오갔던 카렐은 희미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멍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천장의 제국 지도가 보였고 몸에 느껴지는 감촉은 어딘지 익숙했다. 150층의 익숙한 침실이었다. 눈동자를 굴려 보니 창밖으로 어두운 한밤중의 하늘이 보였다.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들것 옆의 세네피스 손을 꼭 쥐고 지하 카타콤베에서 실려 나오던 때가 어렴풋이 떠올랐고, 150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서 그의 병상을 지켜보고 있던 페로의 눈물어린 눈동자가 기억을 스쳤다.

중간중간 몇 번 의식을 찾기는 했지만 기억은 완전치 않았다. 한 번은 침대 옆에서 그의 손바닥에 뺨을 대고 품위 없이 침을 흘리며 졸고 있는 아메스가 있었고, 몸조리를 더 하라는 만류에도 부득불 둘째 아이를 다시 가진 에스더가 시녀가 주는 간식을 억지로 먹으며 이러다 살찌겠다며 투덜대던 때도 있었고, 네페티와 솔이 보송보송한 새 이불로 갈아주고 있던 때도 기억났다. 그들 모두의 모습을 떠올리니 갑자기 입에서 웃음이 났다. 발작에 슬퍼야 했지만 이상하게 행복했다.

이번에도 카렐은 옆에서 누군가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느꼈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이 없는 동안 숨이 막히지 않도록 누군가 일부러 입마개를 씌우고 고개를 뒤로 젖혀 고정시켜 놓은 것 같았다. 팔다리도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둔한 감각을 억지로 동원해 느껴보니 누군가가 그의 왼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작고 따뜻한 손 하나가 옷자락을 파고들어와 배에 얹혀 있고 한쪽 다리를 카렐의 허벅지 위에 턱하니 걸쳐놓고 있었다. 147층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사프란 향기가 코끝을 살짝 감돌았다. 그렇다면 후보는 하나뿐이었다.

“황비…….”

카렐이 입마개를 뱉어내고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옆 사람도 그 소리에 깼는지 숨소리가 일순간 딱 멎었다.

“날보고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양쪽 모두 침묵을 지키면서 짧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꿈속에서 생각해 보니 역시 놀 수 있을 때 노는 게 남는 거겠더군요. 언제 마하는 떼어놓고 둘이서 뒷골목 가면놀이 성인클럽에라도 몰래 가 봅시다.”

옆에서는 여전히 조용했다. 목을 죄는 틀을 빠져나온 카렐은 배를 더듬고 있는 작은 손목을 덥석 붙들고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더 색다른 게 좋으면 수에니에 있는 페……, 으익.”

카렐이 기겁을 하며 손을 놓았다. 그의 손에 얻어맞은 협탁의 물컵이 와장창 소리를 내고 바닥에 쏟아지자 침실 바깥에 있던 시종장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폐하, 깨셨습니까?”

카렐은 자신과 눈이 딱 마주쳐버린 푸른 눈의 소녀가 돌연 능글맞게 씩 웃는 모습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발작 직후 지독한 고통까지 일순간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었다. 눈치 없는 시종장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폐하, 이틀이나 못 깨어나셔서 황실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대, 대군이 왜 여기 들어와 있는 거냐?”

“아, 두 시간 전까지 황후께서 곁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래층에 회의가 있어 잠시 내려가셨고……마하 대군께서 한 시간 전 문병을 오셨는데 폐하의 손을 잡아드릴 때마다 앓는 소리도 작아지시고 상태가 좋아지시는 것 같아……계속 머무르셨으면 하고 소인이 간청을 드렸습니다. 심려가 되었다면 부디 용서하소서.”

“아, 아니다.”

그제야 온몸의 고통을 느낀 카렐이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시종장은 어쨌든 살아서 깬 황제의 모습에 안도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아래층에 깨셨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고 오겠습니다. 내의원의 라말라 박사도 오라고 하겠습니다.”

시종장이 사라진 후, 기운이 쭉 빠진 카렐이 천장을 올려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내 헛말을 했구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발 못 들은 걸로 해 다오.”

“세상에, 지엄한 제국 황제가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셔도 되는 거예요?”

마하가 카렐의 옆에 나란히 누워서는 무심한 척 덩달아 천장을 올려보며 킥킥거렸다.

“코리온 당숙한테 얘기하면 아마…….”

카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갖고 싶다던 자개 벨트 사 주마.”

“됐어요, 그건 엄마한테 사 달래도 돼요.”

“그럼 전에 키우고 싶다던 은회색 고양이는 어떠냐?”

“싫어요. 생각해보니 털 날릴 것 같아요.”

마하가 야무지고 단호하게 거절하며 다시 킥킥 웃었다.

카렐은 아이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했다.

“새해 되면 따뜻한 적도로 네 엄마랑 셋이서 여행 가자꾸나.”

“쳇, 엄마랑만 놀고 난 호텔 독방에 넣어놓을 거면서. 이제 안 속아.”

“무인도에 셋이서 가서 천막 치고 같이 자면 되지. 고기 잡고 과일 따서 먹고.”

“정말로요?”

마하가 카렐의 배 위로 훌쩍 기어올라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지난번처럼 나 구석에 처박아놓고 엄마만 보고 있을 거 아니죠?”

뜨끔한 카렐이 억지로 웃었다.

“설마. 너 잘 때까지 팔베개 해 주마.”

카렐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하가 그제야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약속 안 지키면 내명부에 죄다 소문낼 거예요.”

“알았다, 약속.”

카렐이 아직 고통이 서린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마하가 좋아라하며 가슴 위에서 카렐의 목을 와락 껴안고 얼굴을 부벼댔다.

수영복을 뭐 입을지 벌써부터 고민하는 아이의 혼잣말을 들으며 카렐이 픽 웃었다. 사실 몸이 부쩍 안 좋아진 마하를 데리고 사람 없는 조용한 곳에 여행가는 건 이미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기지로 14번 잔딕을 구한 기특한 행동도 칭찬해 주어야 했다.

‘웬일이지.’

생각해 보니 발작 직후, 막 깨었을 때 몇 시간씩 지속되던 지독한 오한과 고통이 이번엔 훨씬 약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이 때문에 너무 놀라 고통스러워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저 죽음을 향한 고개 하나를 더 넘은 것일 뿐,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잔딕이 박혀 있는 왼쪽 손목을 다시 더듬었다. 불안하더라도, 이젠 이것과 이별을 고해야만 했다.

황제가 쓰러져있는 동안, 대전에 딸린 소회의실에서는 사뭇 심각한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그곳엔 비빈들과 두 명의 태후, 장태자 카이 같은 황제 일가는 물론이고 페로와 주치의 니사, 5대신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문제는 왜 황상께서 수술을 아직도 안 하고 계시냐는 거지. 이미 필요한 건 다 구했다면서! 자네가 집도할 것 아닌가! 빨리 진행 안 하고 뭐 하는 거냐고!”

카렐이 또 발작을 했다는 소식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페로는 애꿎은 니사에게 괜히 분통을 터뜨렸다. 궁지에 몰린 니사가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설치는 어렵지 않지만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제거수술은 아직 선례가 없습니다. 그저 이론적으로만 그 세 개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발작을 하셨으니 문제지! 이번은 어떻게 넘기셨지만 다음엔 그러지 못하신다면 그대가 책임질 것인가!!!”

“그만 하십시오, 총리.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페로가 카렐의 죽음 가능성을 언급하자 이번엔 세네피스가 발끈했다.

“감히 신하가 되어 주군의 붕어를 입에 담다니!”

“지금 입에 안 담게 생겼습니까! 남은 시간이 몇 달 안 됩니다. 지금 수술해서 문제가 생길 위험보다 안 해서 생길 위험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감정이 격해진 페로도 이번엔 세네피스의 기세에 물러나지 않고 맞받아 언성을 높였다. 세네피스가 밀릴 리가 없었다.

“황상께서 안 하시려는 것에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번에 구한 무슨 키인지도 어떻게 쓰는 것인지 파악이 안 된다면서요!”

“상관없습니다! 당장이라도 사형수 몇 놈 잡아다가 실험해보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 가진 잔딕이나 사제의 키는 딱 하나씩입니다. 죄수가 있어도 실험할 여분도 없고, 실험 도중 훼손되거나 지난번처럼 키에 걸려 안 빠지는 문제가 생기면 그땐 정말 되돌릴 수가 없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작동 원리나 사용법을 아직 정확히 모른단 말입니다.”

이번엔 모렌 대신까지 끼어들면서 싸움이 더 커졌다. 갑자기 회의장이 내각 파벌과 가족 측, 윗사람들의 말다툼으로 번지자 어느 쪽에도 눈치 볼 일 없는 유쾌한 한량 실리페 태후가 얼른 끼어들었다.

“자, 자, 그만들 하시고.”

세네피스 바로 다음의 윗사람인 실리페가 끼어들자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도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특별한 부탁’을 받고 남부를 팔자 좋게 유람 중이던 그도 황제에게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말에 서둘러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까 총리께선 수술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하자는 것이고, 황태후께선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신지요?”

실리페의 직설적인 물음에 세네피스도 말문이 막혔다. 카렐에게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감정이 앞서 일단 안 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한쪽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던 밀리타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죄수실험은 어차피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제게 실험하십시오.”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확 쏠렸다. 그에게도 잔딕이 박혔다는 것을 처음 안 몇몇 사람들도 놀랐지만 겁 많은 그가 황제를 위해 목숨을 건 위험을 자처하고 나섰다는 데 놀란 니사와 자그룰라 모렌 대신의 놀라움이 가장 컸다.

당황한 자그룰라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봐, 꼭 그럴 필요까지는…….”

밀리타는 그의 걱정 어린 말을 못 들은 턱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이번에 구한 잔딕과 사제의 키로 제게 해 보시고, 성공하면 그대로 황상께도 하십시오. 실패하면…….”

지금껏 밀리타를 쥐 잡듯 했던 세네피스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항상 카렐의 안부라면 물불 안 가리던 그였지만 이복언니인 밀리타에게 ‘그럼 네가 실험물이 돼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잘됐네, 그럼 당장 재무대신 수술 준비하도록 해.”

페로가 행여 사람들이 말리고 나설까 얼른 선제공격을 했다. 니사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맘대로 급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잔딕과 사제의 키 모두 황상께서 갖고 계시고, 재무대신의 수술도 황상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황상께서 깨시는 대로 내가 설득할 테니까 염려 말고.”

“글쎄, 황상께서 재무대신을 실험물로 삼는 걸 쉽게 허락하실지…….”

카렐을 잘 아는 세네피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황제보다 밀리타를 먼저 수술대에 올린다는 데 딱히 거부를 하고 나설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연락을 들은 황후 아메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는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 무사히 깨셨다 합니다.”

이틀째 가슴을 졸이고 있던 사람들은 기뻐하며 손뼉도 치고 웃었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건 모두들 알고 있었다. 아메스가 비빈들에게 일어나라며 손짓했다.

“아직은 안정이 필요하실 테니 일단 주치의와 비빈만 올라가서 그분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시 회의는 쉬도록 하고요, 내의원에 당장 수술 준비를 명하겠습니다.”

아메스는 ‘비빈들’이라고 했지만 제일 먼저 후다닥 나간 건 세네피스였다. 회의실에 남은 사람들은 절반 공포에, 절반 기대에 찬 밀리타를 보며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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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도 은근히 어릴 때 카렐 많이 닮았습니다....(쿨럭)

그나저나 졸지에 미운오리가 된 페로가 전화위복으로 명예회복을 할까요?? ㅎㅎㅎ

(참고로, 작가는 코리온과 페로 모두 많이 예뻐합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밉습니다~~~(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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