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50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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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따라오던 베흔이 퉁명스레 물었다.
“그래서, 놈들 병력이 얼마나 되는데?”
“잘 모르겠지만 한 5백 명은 되는 것 같아요. 전투병이 4백쯤인 것 같고 나머지는 공병대인가 봐요. 한 100명 정도가 산 동쪽의 수로가 있던 자리에서 화산재를 파내는 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50명도 아니고 500명이요?”
자이납이 기겁을 했다. 분견대 병력이 정규군 70명 남짓이니 방금처럼 마우저로 중무장한 정예병력 5백이라면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을 규모였다. 뒤따라오던 베흔이 대뜸 욕을 내뱉었다.
“염병할, 카히나 성 빠져나와서 살았다 했더니. 그 빌어먹을 양반은 아주 생지옥만 골라서 보내시네.”
‘그 빌어먹을 양반’이라는 말에 세하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황상께서 직접 보내신 건가요?”
“그럼 누가 보냈겠냐?”
“보내면서 뭐라고 얘기 안 하시고요? 황태후께선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얘기라니? 우린 검은 철성인지 지랄인지 찾으라고 해서 왔어. 또 뭐가 있는데? 황태후는 또 왜?”
사나운 눈길로 돌아보는 세하에게 베흔이 다시 기름을 부었다.
“그런데 그런 걸 왜 지금껏 우리한테 감춘 거냐? 오르마즈 그놈의 뜻을 받든다면…….”
“허, ‘그놈’이요? 말씀 좀 곱게 하시죠. 댁이 우리 처지라면 그분을 죽인 살인자한테, 아니, 아직까지 그분을 ‘그놈’이라고 하는 작자한테 뭘 말할까요? 그분께서 전달해 주라고 하신 물건에 관해서요? 아니면 황금탑에 관해서요? 내가 미쳤어요? 내가 당신을 왜 믿어야 하는데요?”
“물건?”
“허, 궁금은 한가 봐요?”
고글 속 세하 비장의 분노한 눈길이 보였다. 중간에서 답답해진 건 자이납이었다. 베흔이 함께 있는 것이 계속 일을 망치고 있었다. 자이납은 세하 이 남자가 무언가 더 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르마즈를 죽인 베흔을 크게 불신하고 있다는, 아니 어쩌면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알고 그런 건 아니겠지만, 황제가 이번 일행에 베흔을 보낸 건 결과적으로 큰 실수가 되었다.
자이납이 베흔의 옆구리를 확 꼬집었다.
“‘그 양반’이 사람 잘못 보낸 것 같다고 낙담하시기 전에 제발 입단속 좀 해요.”
그때, 뒤따라오던 산토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사정이 궁금하면 직접 오라고 전하세요. 꼭 세네피스 황태후님과 함께 말씀입니다. 황실에서 보낸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지켜줬지만 그분을 해친 당신과는 더 할 얘기 없어요.”
“이 새끼가 지금 고작 쫄병 주제에 누굴 오라 말라 하고 있어?”
베흔이 산토스의 멱살을 덥석 붙들었다. 산토스가 질세라 목소리를 높였다.
“댁이야말로 우리한테 이러라 저러라 하지 말아요! 우린 여기서 그분께서 부활해 돌아오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요!”
“그놈이 살아 돌아와? 내 미치겠네. 니네가 무슨 도사라도 됐냐?”
세하가 둘 사이에 끼어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여기 판지셰르 산에 다 죽어서 뼈를 묻는 한이 있어도 그분과의 약속을 지킬 거요. 그분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우리에게 말씀하셨죠! 우리 임무는 여기서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고, 그분이 오셔서 몸소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당신한텐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허, 니네가 뭘 지키고 있는지 몰라도 아마 저기 저지대에 와 있는 교단 도둑놈들이 그 전에 빼앗아갈 것 같군.”
“걱정 말아요, 여기 날씨가 이 꼴이 된 것도 우리가 검은 철성을 거꾸로 돌려서 이렇게 만든 거니까. 놈들 먼지 때문에 바깥도 제대로 못 다니고 있죠.”
놀란 베흔이 산토스의 멱살을 쥔 손을 스르르 놓았다.
“너희가……이미 거길 움직여서 날씨를 바꾸고 있다고?”
세하가 베흔을 놀리듯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왜요? 고작 그 정도가 신기하신가요? 허, 그분의 계획을 알면 까무러치겠군요. 미안하지만 그분께선 돌아가시고 수백 년 후까지 미리 보시고 여길 고쳐놓으셨죠.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에게 여길 계속 운영하라고 맡겨놓고 떠나셨죠. 댁 같은 좀팽이하곤 생각하시는 스케일부터 다르니까.”
베흔이 기가 막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모든 게……놈이 짜 놓고 간 시나리오였다고?”
베흔은 이번엔 뒤에서 별 말 없이 따라오고 있는 기술사관 프레소를 돌아보았다. 오르마즈의 심복 출신이 아니고 과학자이기도 한 저자라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합리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을 듯했다.
“날씨를 바꾼다니 무슨 말이냐!”
낮게 한숨을 내쉬며 서 있던 프레소가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 날씨는 대부분 인간이 살 수 없는 고온의 열풍지역이고 사람이 보호장비 없이 머물 수 있는 건 이 분지가 있는 극지방뿐입니다. 아마도 이전 대멸망 과정에서 극저온과 극고온의 극단을 오가는 단계에서 바다가 증발하거나 지각 아래로 스며들면서 수증기가 대기권을 덮은 것 같습니다. 온실효과로 기온이 너무 높아 대부분 지역에서 비가 아예 내리지 않게 되면서 악순환으로 기온이 계속 올랐고요. 설상가상으로 식량 증산을 위해 땅에 뿌린 생장촉진제가 열풍에 풍화되어 날아올라 자외선에 변성되어서 사람을 죽이는 검은 재가 되기까지 했고요.”
“그런데?”
“생존자 누군가가 수증기층에 입자를 뿌려 기온상승을 최대한 막아서 비를 내리려는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저위도의 화산대와 열점에 화산 폭발을 유도하는 장치 수십 곳을 설치하고 여기 판지셰르에 그 통제소 격인 [검은 철성]을 만들었습니다. 아마 당시는 어차피 끝장이라는 심정으로 설치했을 겁니다. 계획대로 초대형 화산이 다 폭발하려면 그들 세대에는 불가능했으니까요. 실제로도 수백 년이 걸렸고요.”
“그럼 오르마즈 놈이 그 계획을 이어받은 거라고?”
‘오르마즈 놈’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프레소가 눈가를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자이납이 못된 입버릇을 못 버리는 베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정확히는 야푸르 대신관이 이어받은 프로젝트를 그분이 완성한 겁니다.”
프레소가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하임달 전투가 있고 10년쯤 후부터 화산활동이 시작되어서 지금은 기온이 많이 내려갔습니다. 평균 기온으로 치면 20도 이상 내려갔고 비도 제법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적도 일부에만 내렸지 여기 고위도까지 폭우라고 할 만큼의 큰 비는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비가 시동만 걸리면 기온이 아주 급격히 떨어지면서 환경이 갑자기 바뀔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보면 큰 기후 변화는 장기간 누적된 효과가 몇 년, 혹은 몇십 년에 폭발적으로 일어나곤 했죠.”
“얼마나 더 기다려야 비가 오는데?”
베흔의 물음에 프레소가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무도 모르죠.”
살짝 눈살을 찌푸렸던 베흔이 다시 물었다.
“그럼 여기 모래폭풍이 갑자기 짙어진 건 어떻게 한 거냐?”
“이 판지셰르 분지는 외부의 지옥 같은 환경에서 피하기 위한 방주입니다. 극지에, 고봉이 둘러싼 분지에, 땅을 파면 지하수도 제법 나오고 토양도 덜 오염되었죠. 산 위의 검은 철성은 분지로 흘러드는 공기를 계속 정화하고 저지대가 양압(陽壓)을 유지하게 해서 외부의 돌풍이나 오염물질이 못 들어오게 하고요. 하지만 지금은 적에게 안 들키게 하려고 그 기능을 반대로 돌려서 일부러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정화도 좋지만 일단 본토에서 알고 지원군이 와 줄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요.”
프레소는 순순히 의도를 시인했다.
“본토에도 30명이 탈 셔틀밖에 없는데 지원군을 보낸다고?”
베흔의 물음에 산토스도, 프레소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하가 낮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여기엔 만일을 대비해 3달치 식량과 물자를 갖고 있습니다. 황상께서 그 안에만 와 주시면 됩니다.”
“내 생각엔 3달이 오기 전에 저놈들이 먼저 검은 철성을 빼앗아갈 것 같은데? 놈들 수송선 있다고 하니 그걸로 정찰 좀 하면 바로 알아낼 것 아냐?”
“산 7부 능선 위는 폭풍이 너무 심해서 아무리 큰 수송선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육로는?”
베흔의 물음에 세 사람은 별 대답이 없었다. 베흔이 성질을 죽이고 입을 열었다.
“너흰 어딜 다녀오는 길인데? 그 검은 철성인가 거기?”
베흔의 물음에 세하가 움찔하며 프레소의 눈치를 잠시 보았다. 베흔은 이들의 지휘관이 세하가 아니고 프레소라는 저놈이 혹시 아닐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잠시 했다.
이번에도 프레소가 대신 대답했다.
“한동안 안 불던 돌풍이 갑자기 불어서 정상 쪽의 바위지반이 약해진 것 같습니다. 서쪽에 산사태가 크게 나서 둘러보고 오는 길입니다.”
“염병할, 산사태면 그 새끼들 기지나 확 쓸어버리지.”
베흔의 이 의견에는 모두 동의하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이렇게 적이 언제 덮칠지 모르는데 지휘관이 고작 산사태 하나 보자고 나돌아다녀도 되는 거냐?”
근위대장 시절 기질이 발동한 베흔이 버럭 화를 냈다.
세하가 다시 험악한 눈길로 대꾸했다.
“검은 철성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산길이 끊겼다면 당연히 돌아봐야죠.”
“뭐어?”
베흔이 자리에 멈춰서서 이마를 싸쥐었다.
“어우, 씨발. 이 빌어먹을 곳은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네! 무슨 고생 종합선물세트냐?”
베흔이 애꿎은 세하 일행에게 화를 버럭 냈다. 시작부터 통신은 끊겼고, 어마어마한 적이 이미 들어와 있고, 부대는 도망쳐 숨어있는 처지에 모래폭풍은 눈앞을 막고, 이젠 산사태까지 오지에서 쓸 수 있는 고생은 다 뒤집어쓴 듯했다.
“여기 옛날에 지은 워프루트 통제소가 있을 거라고 하던데.”
베흔의 물음에 셋의 눈이 동시에 그를 향해 휙 움직였다. 세하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것까진 저흰 잘…….”
“철성에 함께 있습니다.”
이번에도 대답한 이는 세하가 아니고 프레소였다. 베흔의 목소리가 비로소 커졌다.
“시설이 멀쩡하냐?”
“모르겠습니다. 그건 제가 관리하는 시설이 아니라서. 어차피 제가 손댈 수도 없는 것이고요. 어쨌든 밀봉은 잘 되어있습니다.”
베흔은 죄수부대 시절부터 빤히 알던 세하나 산토스보다 이 프레소라는 남자에게 더 호기심이 가기 시작했다. 오르마즈의 수하도 아니고 그저 광산 엔지니어 출신이라면서 이상하게 아는 것도 너무 많았고, 지난번 제사에서 제주 역할을 하던 것도 어딘지 찜찜했다.
“그럼 셔틀은 나가다가 잘못하면 잡힐 수 있어서 못 나가고, 본토에 연락할 다른 길은 아예 없는 거냐?”
“최악의 경우에 하임달 5번 행성에 보낼 수 있는 수동 로켓이 있습니다. 원래 천재지변으로 몰살의 위험에 있을 때 유품을 보내는 목적이라 속력은 좀 느립니다. 워낙 작아서 잘하면 수송선의 스캐너를 피해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셔틀보다 많이 느려서 도착까지 5일이 넘게 걸립니다.”
“결론만 말해, 쏜 거야? 아직 안 쏜 거야?”
프레소가 힘없이 대답했다.
“메시지를 넣어서 언제든 쏠 수 있게 대기 중입니다. 놈들 수송선이 바로 우리 위에 죽치고 있어서 아직 못 쏘고 있습니다. 놈들이 다른 궤도로 움직일 때만 노리고 있고요.”
잠시 생각하던 베흔의 걸음이 빨라졌다.
“기왕 보낼 거면 나도 편지 좀 집어넣자. 황궁에 보낼 내용이 꼭 있으니.”
5명의 앞에 기지가 있는 뾰족한 언덕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짙은 모래폭풍과 기지의 높은 고도가 언덕 위의 기지를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바로 밑에서도 위에 기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입지이지만 5백이나 되는 적의 눈에서 언제까지 막아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세하 비장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고는 방향을 돌려 언덕 아래쪽의 큰 바위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봐, 기지로 안 돌아가?”
“돌아가는 중입니다. 이제 조용히 하세요.”
베흔을 조용히 시킨 세하 비장은 바위 밑으로 다가가더니 방금 전처럼 바닥에 놓인 넓적한 돌덩이를 들어올렸다. 그 밑에는 조금 전 몸을 숨겼던 벙커처럼 시커먼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게 뭐냐?”
목소리를 높일 뻔했던 베흔이 얼른 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세하의 손짓에 하는 수 없이 산토스를 뒤따라 자이납과 함께 안에 뛰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세하가 다시 바위를 제 위치에 얹어놓자 이번에도 조금 전 벙커처럼 밖을 훔쳐볼 수 있는 작은 구멍 하나만 남았다. 하지만 이번엔 등 뒤로 사람 한 명 겨우 기어갈만한 작은 굴이 모습을 나타냈다.
“언덕 위에 있는 기지를 노출시키기 않으려고 만든 비밀 출입구입니다. 댁들이 눈치 없이 드나들 때 본 놈들이 없었어야 할 텐데 말이죠.”
세하가 랜턴을 켜며 심술을 부렸지만 베흔은 이번엔 못 들은 척 굴을 기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굴은 가파른 오르막을 그리며 안쪽으로 계속 이어졌다. 좁은 굴에 답답해하며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할 무렵, 굴의 방향이 바뀌며 위쪽으로 뚫린 수직의 굴이 나타났다. 위로 어마어마하게 긴지 랜턴 불빛만으로는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수직굴에 달린 줄사다리를 붙들고 한참을 올라간 산토스가 머리 위 뚜껑을 밀어 열었다. 갑작스런 인공조명에 자이납과 베흔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굴이 연결된 곳은 조용한 지휘관 사무실 의자 뒤였다.
“궁할 때 도망치긴 제격이겠네.”
또 악담을 하는 베흔의 옆구리를 자이납이 확 꼬집었다. 몸을 털고 기어나온 일행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들이 굴에 들어섰던 먼 언덕 아래는 모래폭풍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만일의 사태에 역습을 하기는 좋겠죠.”
세하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베흔은 더러워진 몸을 털며 세하의 방을 나섰다. 나름 의욕에 차서 나섰던 ‘산 탐험’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는 꼴로 끝났지만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을 황제에게 알릴 수 없다는 것이지만.
“재무대신에게 실험을 한다고요?”
발작에서 깨어 침대에 누운 채로 비빈들의 방문을 받은 카렐은 밀리타가 자신에 대한 실험을 자처했다는 말에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절대로 용납 못 합니다.”
“하지만 재무대신이 스스로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아메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전에 귀인 후보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비빈들은 황제의 이런 태도가 내심 못마땅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 제일 앞장서서 황제를 다그쳤을 세네피스는 반대편에서 말없이 황제의 손만 잡고 있었다.
“지금 관련된 자료를 찾기 위해 팀을 파견해 놓았습니다. 그네들이 성공하면 수술에 관련된 자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죽기 직전의 상태도 아닌데 재무대신의 목숨을 걸게 할 수는 없습니다.”
카렐이 더 이상 언급도 하기 싫다는 듯 거칠게 손을 저었다. 비빈들의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잔딕과 사제의 키를 가진 당사자가 저렇게 펄쩍 뛰니 그들로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 니사가 행여 비빈들이 듣지 않도록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폐하, 솔직히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대로는……길어야 두세 달입니다.”
“…….”
“황금탑에서 설사 자료를 찾는다 해도 그걸 번역하고 확인하는 데만 몇 달은 걸릴 겁니다. 모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험도 찾고 나서 한다. 불릿만 고쳐지면 내 바로 하임달로 직접 갈 것이야.”
카렐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죽든 살든, 내 거기서 사생결단을 할 것이니 애꿎은 희생양을 만들지 마라.”
“희생양이 아닙니다, 황상께선 혼자만의 목숨이 아니십니다. 황상만 바라보는 마하는 어쩌시고요?”
“제 뱃속의 새 생명이 기댈 곳 없이 자라게 된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이번엔 네페티와 에스더가 아이까지 팔며 공격해오자 난처해진 카렐이 할 말을 잃었다. 한참 궁지에 몰린 카렐을 사에나가 살려주었다.
“폐하, 북부에서 급전입니다. 깨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렐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사에나에게 들라고 손짓했다.
비빈들을 ‘몰아내고’ 들어온 사에나가 내민 건 손으로 대충 쓴 케스난의 메모와 갓 구입한 듯한 싸구려 할룩스였다. 아직 얼얼한 정신과 흐트러진 모양새를 대충 추스르고 침대에서 일어난 카렐은 비로소 메모를 살폈다.
“흐음.”
메모를 확인한 카렐은 바로 할룩스를 켰다. 이 싸구려 기계가 연결될 수 있는 곳은 하나뿐이었다. 잠시 후, 건너편에서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감시하고 있어 오래 연락하기 어렵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물론이다. 그나저나 ‘프레소’라고? 무슨 이름이 그 모양이냐?”
카렐이 쪽지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스난도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거야 알 수 없지만 아마 지금쯤 놈들이 쫓고 있는 게 그자일 겁니다. 말씀하신대로 네포프 칼리가 살해당한 게 사실이라면 프레소라는 자는 정말 운 없이 걸려든 꼴이고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혹시라도 진짜라면 이번에 입수하신 사제의 키를 의심해 보셔야 할 겁니다. 어쨌든 놈들이 그자의 정보를 가져갔으니 일단 표적이 될 것 같습니다.”
카렐은 밀리타에 대한 수술을 펄쩍 뛰며 거부한 것에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내 네가 말한 대로 한 번 공식 자료 중에서 알아보마. 어쩌면 함정을 치기엔 좋은 수단이 될지도 모르니…….”
“그런데……세네피스 황태후께는 알아보셨습니까?”
케스난의 물음에 카렐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얼 말하는 건지 알지만 차마 카렐로서는 쉽사리 세네피스에게 물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자가 이미 죽었고, 이미 키도 손에 넣었으니…….”
카렐이 말꼬리를 흐렸다. 억지로 둘러대려 했지만 그냥 넘어가긴 뭔가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카렐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그곳에서만 지내긴 네겐 답답할 터인데 괜찮은 거냐? 얼굴색도 전만 못한 것 같고.”
그간 교단의 감시를 의식해 최대한 황제와의 접촉을 피해왔던 케스난은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살짝 입가 가득 미소를 품었다. 지난 발작으로 아직 병석에서 못 일어나고 있는 카렐이지만 케스난의 이런 노골적인 미소에는 바로 웃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야 황상의 뜨거운 손길과 입맞춤에 굶주려 그러한 것이지요.”
“네 언제는 안 굶주린 때도 있었더냐?”
황제의 대꾸에 케스난이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표정이 진지해진 카렐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내 물어볼 게 있는데, 지금 하임달 9번 행성과 며칠째 연락이 끊긴 걸 아느냐?”
“언뜻 들었습니다. 중계용 비컨이 소행성에 훼손된 듯해서 새 비컨을 보낼 준비 중이라더군요. 전에도 종종 있던 일이라 들었습니다만?”
“그렇긴 한데 지금쯤 거의 돌아와 하임달 5번에 접근하고 있어야 할 귀환셔틀도 연락이 없다더군. 뭔가 일이 있는 모양이야. 우리가 황제령으로 편입하기 전에 선점하려는 교단 놈들이 아닐까 걱정하고 있네.”
“그렇겠군요.”
“그곳에 지금 내 탐사단이 들어가 있어. 내 생명과 제국 전체의 미래가 걸렸을지도 모르는 곳이야. 내 조만간 그리로 떠날 참이지만 정규군의 움직임은 적의 눈에 띄기 쉬우니 자네가 사전작업을 좀 해 줘야겠네.”
“그런 일은 제 전문이지요.”
케스난이 엷게 웃었다.
“지난번 어머니를 쫓으러 가 보니 거긴 하임달 9번에 금덩이라도 있는 줄 아는 골칫거리 탐험꾼들이 제법 되더군. 군대의 비컨과 스캐너를 피해 접근하는 항로도 그놈들이 제일 잘 알아. 그놈들을 고용해 몰래 접근할 수 있는 항로를 알아내고 유사시 사용할 통신 비컨을 설치해 주게. 혹시라도 교단 놈들이 우리 군용 항로와 비컨을 일부러 부순 것이라면 지금 파견군이 새 비컨을 놓는 것도 얼마 가지 못할 테니까.”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케스난이 살짝 웃어보였다.
“들어가실 길을 소녀 미리 닦아놓고 기다리지요. 대신.”
카렐은 케스난의 어딘지 피냄새 나는 웃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신?”
“나중에 살름 마구스를 산 채로 제게 넘겨주십시오. 소녀를 능욕한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제 손으로 ‘제대로’ 처리하고 싶습니다.”
케스난이 붉게 칠한 입술에 살짝 혀끝을 문대며 오른손에 낀 갈고리 끝을 문질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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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의 혈압상승과 함께 출판본 7권의 끝이 가까워지는군요, ㅎㅎ
하임달의 결전(?)을 함께할 카렐의 전사들(?)이 이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합니다.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밉사와요~~~( ̄∇ ̄)ブ~~★
프리미엄과 노블레스에 연재중인 출판본에도 관심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교보문고 판매개시는 당최 언제나 되는 건지...-,.-;;
(요즘 전자책 판매개시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2부 5~8권은 6월 초에 판매신청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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