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51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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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카타콤베에서의 발작 직후, 카렐은 잠을 자거나 오래 눕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오늘도 초저녁부터 150층의 침실에 누워 몇 번의 쪽잠과 이런저런 복잡한 고민 사이를 오가는 중이었다.
이곳에 올라오기 직전, 그는 막 의식을 찾은 바에자 혹은 그 복제를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만나고 돌아왔지만 병실을 나온 직후, 일리안에 있는 네피에게 무어라 연락을 했을 뿐 결과에 관해선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카렐은 멍하니 누운 채 천장에 있는 제국 지도만 쳐다보고 있었다. 베흔이 하임달로 떠난 지 20일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아무 연락도 없었다. 이전 예르마크 경의 말대로라면, 남부의 루트가 그곳에 닿기까지는 이제 한 달 남짓 남은 반면 황제령에서 그곳으로 가는 루트는 아직 절반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늦어도 너무 늦어 있었다. 베흔이 하루라도 빨리 통제소를 찾아내 알려줘야 사에나와 함께 달려가 개통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테지만 이리 연락이 없으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니사는 아직 몸조리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생각을 하고 있다니 여기 누워있어도 도저히 맘이 놓이지를 않았다.
“염병할.”
카렐은 이불을 치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윽.”
카렐이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또 시작이네.”
카렐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이전엔 없던 통증이 이번 발작 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작은 2, 3일 후면 대충 버틸만해졌지만 이상하게 이번 통증은 아무리 기다려도 완전히 몸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몸이 몰라보도록 좋아지는 때는 단 한 순간뿐이었다.
“황상?”
문이 열리고 잠옷 바람으로 뛰어든 건 세네피스였다. 그와 밀리타는 지난 며칠간 150층의 황제 침실 하나를 구해 아예 교대로 머물고 있었다. 평소라면 도끼눈을 떴을 비빈들도 이번만은 이 두 그레이오팔들이 황제 처소에 세를 들고 있는 것에 뭐라고 참견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황제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빠진 것을 귀신같이 알아 먼저 아랫사람들에게 알렸고, 급한 때는 더한 역할도 해 주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세네피스가 달려와 침대에 걸터앉은 카렐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순간, 손목을 저리던 지독한 아픔도 마약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그의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것을 확인한 세네피스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의 손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또 여기가 아프셨군요.”
세네피스는 다시 눕혀주려 했지만 카렐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더는 누워있어선 안될 것 같습니다.”
“황상께선 아직 환자십니다. 이 몸으로 뭘 어쩌시려고요? 빨리 기력을 회복하셔야 수술도 하지요?”
세네피스가 다시 그를 눕히려 했지만 카렐이 다시 싫다며 억지로 일어났다.
“지금은 아닙니다.”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침대맡에 선 세네피스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세네피스는 그의 이상한 시선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압니다만…….”
카렐의 이 첫말에서 세네피스는 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잠시 표정이 굳었던 세네피스는 억지로 웃으며 카렐의 뺨을 쓰다듬었다.
“황상께서 꼭 알아야 하신다면요.”
카렐이 먼저 세네피스를 바싹 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평상시 볼 수 없던 이런 스킨쉽에 도리어 당황한 세네피스가 카렐의 얼굴을 닿을 듯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의 허리를 안고 어깨에 얼굴을 슬며시 기댔다.
“정말 묻기 힘든 질문인가 보군요.”
“콜 수용소 지하 감방에 계셨을 때 혹시 네포프 칼리 그자가 다녀가지 않았었나요?”
카렐의 등을 짚은 세네피스의 손끝에 힘이 꽉 들어갔다. 카렐은 놀란 그의 등을 얼른 토닥여주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맘때 기억을 연상하는 무언가를 접할 때마다 극심한 트라우마로 떨곤 했고, 어두운 곳을 두려워했고, 혼자서는 잠자리에 못 드는 것도 여전했다. 카렐이 아직까지 차마 이 일을 묻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건 왜요?”
카렐의 다정한 손길에 비로소 안정이 된 세네피스가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을 살며시 피하며 그의 어깨에 다시 기댔다.
“이미 시신도 발견했고 키도 찾지 않았나요?”
“그자의 이전 행적에 이상한 게 많아서요. 실종 직전에 어머니에게 들렀었다는 것도 뭔가 이상하고 말이죠.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 나시겠지만…….”
“아뇨, 기억납니다.”
세네피스가 살짝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며 카렐의 가슴을 더 꼭 안았다. 카렐은 세네피스에게 최대한 듬직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제가 이렇게 지켜드리고 있으니 안심하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카렐은 세네피스가 옛 기억으로 더 괴로워지지 않게 최대한 안심시켜주려 애썼다. 지독한 강간과 고문을 당한 후 성치도 못한 몸으로 타르서스의 수용소 지하에 안에 갇혔던 것까지는 알지만 그 이후는 알지 못했다.
“당시 어떻게 지내셨는데 한 번도 구체적으로 말씀을 안 하셨죠.”
카렐의 가슴을 안은 채 잠시 말이 없던 세네피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 방은 고문실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 비명을 듣는 게 일이었죠. 바깥과의 연결은 벽돌 틈새로 음식을 넣는 구멍 하나가 전부였고요. 하지만 음식을 받아먹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타르서스인 간수들은 절 벌레만도 못하게 대했거든요. 온전한 식사를 주는 날은 거의 없었고요.”
“그랬군요.”
카렐은 떨고 있는 세네피스의 머리에 뺨을 대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프라임 지역도 아니고 타르서스인들에게 전 황후 세네피스가 어찌 보였을지는 말하나마나였다.
세네피스가 카렐의 든든한 팔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가끔은 구멍에 음식을 올려놨다가 제가 다가가면 몇 번이나 도로 빼앗아 놀리곤 했죠. 그 정도는 괜찮았습니다. 간수 2조 반장 년은 제일 악질이었죠. 어느 날은 구멍에 사과를 올려놓고는 제가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더니 염산을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밖에서 웃음과 박수소리가 나더군요. 제가 염산에 맞을지 안 맞을지 간수들끼리 내기를 걸었답니다. 그날 이후로 이 손가락을 제대로 못 쓰게 되었죠.”
세네피스는 오른손 엄지 끝으로 카렐의 입술을 더듬으며 엷게 웃었다. 카렐이 큰 손으로 그의 작은 손을 감싸 쥐고 엄지 끝에 살짝 입을 맞춰주자 세네피스의 웃음이 한결 밝아졌다.
“네포프 형부가 왔을 때는……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 사흘 전에 그 반장 년이 죽 그릇을 가지고 막 돌아서는 제 뒤에서 등과 엉덩이에 대고 볼트를 쐈거든요.”
세네피스의 등을 어루만져주는 카렐의 손이 딱 멎었다. 세네피스가 그의 빨라진 심장박동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직접 살을 찢고 뽑기는 했지만 상처가 곪고 염증이 나서 사흘을 거의 못 움직였어요. 등의 상처는 벌어져서 계속 피가 났고, 엉덩이는 살이 썩고 있었죠. 열이 펄펄 끓어서 그때가 끝이라고 생각했었죠. 네포프 형부가 온 건 그때였습니다.”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제가 알기론 그자가 어머니를 욕보이려…….”
세네피스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간수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놈들이 걷지도 못하는 절 구멍에서 끌어내 놓고는 이걸 누가 먹고 싶어 하겠냐고 비웃는 걸 들었거든요. 그리고 고문실을 대강 청소하고는 새 침대 하나를 가져다놓고 나가버렸죠. 그리고 네포프 형부가 들어오더군요. 하지만 전 이미 고열로 절반 혼수상태였고, 내 몸에 손을 대려는 남자가 대체 누군지 처음엔 알아보지도 못했죠.”
카렐은 한숨을 내쉬며 세네피스를 더 꼭 안아주었다. 세네피스가 자신의 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납니다. 제게 주사를 놔 주고, 등과 엉덩이의 썩어가는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제 귀에 미안하다고 속삭인 것밖엔……. 그 뒤에 뭐라 말을 많이 해준 것 같긴 한데 나중에 기억이 거의 나지 않더군요. 약통 같은 것도 건네준 것 같은데 나중에 보니 찾을 수가 없더군요. 아마 받았어도 간수들이 나중에 신체검사를 할 때 다 압수해갔을 겁니다.”
카렐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세네피스의 등을 계속 어루만졌다. 네포프가 이전의 행동을 뒤늦게 뉘우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악질 간수는 어찌되었습니까? 지금이라도 잡아내어 물고를…….”
“아뇨, 이젠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세네피스가 카렐의 뺨에 얼굴을 대며 얼음장 같은 미소를 품었다. 세네피스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카렐에게 짧게 대답했다.
“이미 그 값을 치렀으니까요. 부족한 감은 있지만.”
“설마…….”
카렐의 의심어린 시선에 세네피스가 정색을 하며 다시 웃었다.
“네포프 형부가 다녀가고 얼마 후에 간수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습니다. 그 반장하고 똘마니 놈이 산 채로 나무에 매달려 타죽었답니다. 누구 소행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간수들은 북부 게릴라들의 짓일지 모른다고 벌벌 떨고 있더군요.”
“실제로 거길 몇 번 공격한 일도 있었으니까요.”
“지금이라도 누군지 알면 상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그 뒤로 간수들도 저나 북부 죄수들에게 못된 짓을 하지 못했거든요. 한번 악독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얼마 못가 끔찍하게 죽어나갔으니까요.”
카렐은 그대로 세네피스를 안고 있었다. 세네피스의 설명대로라면 네포프가 감방을 다녀간 후 실종되었다는 것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후에 왜 뜬금없이 세네피스나 오르마즈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동부로 갔는지, 왜 슈트란 가 종가 앞에서 근위병의 손에 그리 끔찍하게 살해당한 것인지 연결이 되지는 않았다.
카렐은 주머니에서 다시 ‘사제의 키’를 꺼내보았다. 키를 찾으면서 주변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밀리타에게 실험을 하라며 성화였다. 심지어 이번 후유증으로 누워있는 동안에도 거의 서너 시간마다 한 번씩 비빈들이 번갈아 찾아와 제발 밀리타의 수술을 승인해 달라며 졸라댔다. 거기에 페로와 코리온까지 웬일로 의기투합해 함께 이곳을 찾아와 카렐을 설득하려 들었다. 심지어 코리온은 실험을 하지 않으면 불릿을 고치지 않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려 했지만 카렐은 그런다고 그가 정말로 그 일에서 손을 놓지는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압박에도 불구하고 카렐은 이 모든 의문이 풀리기 전까지는 이 정체불명의 쇳조각에 자신의 생명, 아니 밀리타의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카렐이 사제의 키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빨리 하임달 9번에 가 봐야겠습니다.”
“수술부터 먼저 하시고요.”
“아뇨, 거길 먼저 다녀온 후에 할 겁니다.”
카렐은 세네피스를 무릎 위에서 놓아주고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리고는 걱정에 찬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세네피스의 앞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불릿 고치는 곳에라도 가 봐야겠습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군요.”
자정 가까운 시간에 격납고를 찾아온 카렐의 모습에 놀란 건 코리온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엔진을 만지고 있던 주페와 그 옆에서 매뉴얼을 보고 전선 번호를 불러주고 있던 마하, 구석에 쪼그려 앉아 전선들을 확인하고 있던 장태자 카이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이런, 다 완성한 다음에 놀래드리려고 했는데, 틀렸네요.”
눈가에 졸음이 살짝 든 카이가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카렐에게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놀래주다니?”
카렐은 이 시간에 격납고에 바글거리며 모여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때마침 마리안이 뜨끈한 김이 솟는 만두가 산더미처럼 담긴 바구니를 가슴에 꼭 안고 뒤뚱거리며 나타났다. 아이는 카렐을 보자마자 바구니를 내려놓고 후다닥 달려와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히이이.”
“에이, 뭐야, 귀한 만두를 바닥에 놓으면 어떡해.”
깔끔쟁이 마하가 얼른 달려가 마리안이 바닥에 내려놓은 만두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고기 냄새를 맡은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만두를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카렐이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가만, 내가 9시 이후엔 뭐 먹지 말랬잖냐. 너희가 돈이 어딨어서 만두를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카렐은 자신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하고 있는 코리온에게 따가운 눈총을 주었다. 아마도 코리온이 누군가의 눈초리를 피하는 건 카렐이 유일할 터였다.
“아니, 내가 분명히…….”
그때, 자기 손바닥만한 만두를 입에 문 마리안이 막 뭐라 꾸짖으려는 카렐의 손에 제일 큰 만두 하나를 다짜고짜 쥐어주고는 한쪽에서 밤샘작업을 하고 있는 용접공에게도 또 하나를 들고 후다닥 달려갔다.
“휴우.”
자신의 피를 받은 아이들의 식탐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카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들이 돌아서면 배가 고픈 것도 결국 자신의 탓이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누구 말대로, 다섯 황자들 먹는 것만 봐도 유전자 검사 따위는 애당초 필요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배도 한참 전부터 먹을 것을 달라며 울어대고 있었다.
카렐은 하는 수 없이 만두 한 입을 베어 물고 코리온에게 다가갔다.
“놀래주다니, 뭐 큰 진전이라도 있는 거요?”
카렐의 물음에 코리온은 불릿 너머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무안한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조심 나타난 건 수우의 아내인 구르베스였다. 순간 카렐의 표정이 확 굳었다.
“절 보기 불편하시리라는 건 압니다.”
구르베스는 초췌한 모습에 눈도 움푹 들어가고 전보다 많이 말라 있었다. 그의 아들 테번의 손에 세상 빛도 못 본 아들 메네스를 잃은 카렐로서는 분명 불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구르베스 역시 하나뿐인 다 큰 아들을 끔찍하게 잃고, 이젠 남편까지 사형수가 되어버린 처량한 처지였다. 감옥에서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절망한 수우는 아내를 속여 팔찌를 훔쳐 넘긴 것도 자백했고, 참수를 할지, 아니면 더 끔찍한 처형을 할지가 문제일 뿐 어차피 사형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대가 여기에 무슨 일인가?”
카렐의 쌀쌀맞은 물음에 구르베스가 코리온 쪽을 한 번 힐끔 돌아보았다.
“소인 아시다시피 트라카 교단의 성직자로 신께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현……이분의 명을 받아 저희 성직자들과 함께 수나 현신께서 육신을 떠나신 트라에타오나 궁전 내부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이 기계가 만들어진 곳이니까요.”
“거긴 이미 우리 보안국 요원들이 다 수색했을 텐데.”
카렐은 겉으로는 쌀쌀맞게 되물으면서도 눈동자는 코리온 쪽을 향하고 있었다. 사실 겉으로는 차갑게 보이려 애쓰고 있지만 속으로는 크게 놀란 상태였다. 그가 놀란 건 트라카 교단 성직자들이 그곳을 뒤졌다는 것이 아니고 코리온이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뭘 찾았나?”
카렐이 여전히 차가운 눈길로 물었다.
“당시 보안국이 복원을 포기한 불탄 재를 뒤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역사를 공부했고……다른 건 몰라도 훼손된 자료 복원의 경력은 많습니다. 그래서 문서 몇 개를 복원해냈습니다.”
“한 무더기의 재 속에서 이 다섯 장을 찾아 핀셋과 약품으로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복원하느라 한 달간 잠도 못 잤다고 합니다. 폐하께 바치고 싶다고 가져왔습니다.”
코리온이 웬일로 구르베스 편을 들며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그곳엔 트라에타오나 교단에서 불릿의 엔진을 만들기 위해 부품을 납품받은 제조처의 목록이 모두 적혀있었다. 불릿의 수리 기간을 순식간에 줄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카렐이 바싹 여윈 구르베스를 돌아보았다. 갇혀 있는 남편 수우를 구하려 거의 필사적으로 이 일 하나에 매달린 모양이었다. 그는 서류와 남편을 놓고 황실과 흥정을 시도하려 하지도 않았고, 일단 먼저 자신의 패를 모두 까 보이고 황제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그와 같은 성을 지닌 사촌이 비슷한 흥정을 유평황제와 했던 때처럼.
카렐이 죽은 아들 메네스의 기억을 일단 머릿속에서 지우고 코리온과 구르베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구스―비록 본인은 거부하고 있지만―와 성직자로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사이이긴 하지만 따져보면 코리온은 제위전쟁 막판 구르베스의 아버지 샤자한을 죽인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싸움을 피하려는 코리온에게 먼저 말을 타고 돌진해 죽이려 했던 건 샤자한 쪽이었지만 어쨌든 둘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구르베스가 아무리 무장 출신이고, 사리가 분명하다고 해도 카렐로서는 그가 진심으로 코리온을 받들고 있는 것인지 내심 걱정이 들었다.
그런 카렐의 우려를 읽은 듯, 코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절 믿으십시오.”
“구매처는 확인하셨습니까?”
카렐이 아직 큰 구멍이 나 있는 엔진과 그 옆에 쌓여 있는 몇 개의 부품 상자들을 들쳐보았다.
“상께서 누워계신 동안 39개의 부품을 구매했고 15개의 부품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2개의 부품은 지난번 추락한 불릿의 것을 재사용했습니다. 6일 후 개척일 무렵이면 수리가 다 끝날 것 같습니다.”
“개척일까지요?”
예상보다 훨씬 빠른 진척에 카렐이 사람들 보는 눈도 아랑곳없이 코리온을 와락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고맙소, 모두 학장 덕분입니다.”
카렐은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구르베스의 어깨도 한 번 두드려 주었다.
“그대의 공이 컸소. 내 수우의 처벌을 결정할 때……최대한 그대의 공도 고려하겠소.”
때마침 카렐은 누군가 또 들어오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주사기와 약병을 든 하심이 한참 만두를 먹고 있는 카이에게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다가가고 있었다.
“장태자 전하, 대군 마마, 말씀이나 하고 나가셔야죠. 두 분이 다 사라지셔서 한참 찾았습니다. 이 시간까지 이렇게 무리하셔도 되겠습니까? 대군마마께서도 함께 계시니 다행입니다.”
주사기를 본 소년의 얼굴이 순간 굳었지만 그에게 주사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약 덕분에 이전처럼 외출도 못 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소년 처지는 벗어났지만 궁극적인 치료약을 찾아내지 않는 한 만들기도 까다롭고, 맞을 때마다 붓고 아프기까지 한 이 약을 하루 두 번씩 빼놓지 않고 맞아야 한다는 족쇄는 벗어날 수 없었다.
“뭐라도 할 일이 있어야 살 의욕도 더 날 거라고 했지 않나.”
카이는 의연한 척 한 손으로 만두를 먹으며 나머지 한 팔을 쑥 내밀었다. 주사 맞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마하가 그새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가려다가 카렐에게 손목이 덥석 붙들렸다.
“미안하다.”
카렐은 딸아이를 꾸짖는 대신 뺨을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도리어 더 당황한 마하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만두 하나 더 가지러 가던 거였어요. 저까짓 주사 맞는 거 아무렇지 않아요. 얼마나 힘들게 구해 오셨는데요.”
“미안하다.”
카렐이 다시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아이의 얼굴을 안아주었다. 자신 때문에 이런 피를 물려받은 아이들 앞에서 그는 여전히 죄인이었다.
“대군 마마?”
주사기를 들고 온 하심이 황제에게 안겨 있는 마하의 옆에서 머뭇거렸다. 의연한 카이와는 달리 예민한 마하에게 이 아픈 주사를 놓은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약을 준비하는 동안 사라지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가끔은 주사 직후 부은 팔을 붙들고 엉엉 울며 황제를 찾아 내의원 의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안 아플 거다.”
카렐의 위로에 마하는 이번엔 군말 한 마디 없이 팔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는 주사를 놓고, 벌겋게 부어오른 자리를 주물러주는 동안 황제의 품 안에서 신음 한 번 없이 꼼짝도 않고 있었다.
“장하구나.”
카렐이 딸의 등을 토닥여주며 속삭였다.
“내 이번에 꼭 하임달에서 치료법을 찾아오마. 한 달만 기다려 다오. 그 안에 끝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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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간수는 차라리 그때 타죽은 게 다행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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