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54화 (1,049/1,132)

< -- 1054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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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로 보낸 쿠마르가 돌아오지 않자 당황한 네코는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렸지만 그가 돌아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모래폭풍에 혹 쿠마르가 추락하거나 길을 잃은 게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적군이 자신의 권고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엿 먹어라’라며 발리스타라도 한 방 날리거나 아예 쿠마르의 잘린 머리를 보내는―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도 아니었다. 쿠마르는 모래폭풍 속에서 말 그대로 ‘그냥 사라져.’버렸고, 적진에서는 쥐죽은 듯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도 할룩스도 되지 않고, 시야도 보이지 않으니 속이 바싹바싹 타는 것 같았다.

“혹시 올라가다가 바람에 날려 떨어진 거 아닐까? 그놈 덩치도 작잖아?”

네코는 위력적인 모래폭풍 속에서 보이다 말다 하는 가파른 절벽길을 올려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가 미리 알아본 절벽길 양옆으로는 떨어지면 끝장이 날 100척이 넘는 절벽이 삐죽삐죽한 바위 이빨을 내밀고 버티고 있었다. 네코는 하는 수 없이 기지 남쪽을 공격하려 한창 준비 중이던 80여 명의 헤네티들을 불러 길 주변을 가리켰다.

“이봐, 저기 주변을 좀 정찰해 봐. 쿠마르 그놈이 사고를 당한 것 같으니까.”

네코의 지시를 받은 헤네티 병사들은 ‘쿠마르가 굴러 떨어졌을지 모르는’ 길과 그 좌우의 가파른 절벽 아래에 흩어져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엔 언덕 꼭대기 기지에 있을 황실군 분견대는 애당초 들어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길 위와 양옆을 수색하던 헤네티들이 머리 위에서 이상한 소음을 들은 건 그들이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절반 정도 올라왔을 때였다. 워낙 강한 바람 때문에 소리와 진동에 둔감해져 있던 그들은 무언가 거대하고 시커먼 것이 갑자기 눈앞을 확 덮쳤을 때에야 위험을 직감했다.

“맙소사, 피해!”

기지를 공격하던 것도 아니었고, 전혀 준비태세조차 없이 날벼락을 맞은 병사들은 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검은 물체가 무언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도망치기 시작했다. 서둘러 도망치던 병사들은 가파른 돌에 걸려 넘어지고 몇은 중심을 잃고 길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쿠!”

‘거대한 물체’에 깔린 병사들이 사방에서 비명을 질렀고, 도망치다가 뒤에서 받힌 병사들이 그대로 깔리며 비명을 지르고, 중심을 잃고 자빠지거나 길 옆 절벽에 동댕이쳐졌다. 절벽 밑을 뒤지던 병사들도 위에서 들려온 비명에 놀라 도우려 달려오려다가 자신들의 머리 위로도 바위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에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다.

“넘어진 놈들을 다 죽여!”

30명의 기습부대를 이끌고 나온 베흔과 코나, 자이납은 돌을 가득 채운 드럼통에 깔리거나 넘어져 못 움직이고 있는 50명이 넘는 무기력한 교단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놈들 지원병이 오기 전에 끝내고 돌아가야 된다!”

분견대 병사들은 칼로, 도끼와 창으로 쓰러진 병사들의 목과 얼굴, 가슴에 치명상을 입히고 길 위를 한바탕 휩쓸었다. 마우저를 쥔 자이납과 우베는 양쪽 절벽 아래에서 못 움직이고 꼼짝없이 쓰러지거나 매달려 있는 무력한 적들을 게임하듯 한 발, 한 발 그대로 쏘아 바닥에 떨어뜨렸다.

쿠마르를 잡아놓아 적이 혼란에 빠지게 한 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덮친 말 그대로 번개 같은 선제기습이었다.

“염병할.”

길 위의 상황을 보고받은 네코는 기분이 확 상한 듯 푸른빛 눈가를 찡그렸지만 철이 덜 든 무장들처럼 당황하거나 미쳐 날뛰지는 않았다. 그는 동쪽 절벽을 맡고 있는 사카에게 물었다.

“몇 명이나 당했냐?”

“아직 분명치 않습니다만 50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역시나 밋밋하고 감정 없는 사카의 답변이 돌아왔다.

“역습하시겠습니까?”

네코가 다시 눈가를 찡그렸다. 그가 분견대 기지를 공격하며 잃을 것을 추산한 병력을 미처 공격 시작도 해 보지 못한 채로 어처구니없이 잃은 꼴이었다.

“이틀 후에 2진이 들어오면 그때 훨씬 압도적인 병력으로 실시한다. 그편이 손실을 줄일 것 같다.”

“알겠습니다.”

“대신 숙영지를 이곳으로 옮기고 한 놈도 못 빠져나가게 계속 지키고 있도록 해. 어차피 놈들은 못 달아난다.”

네코는 고작 70명의 분견대가 지원군이 온다는 보장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포위당한 채 버티고 있는 기지 쪽을 올려보고는 돌아섰다. 황제는 저들이 계속 버텨주기를 바라겠지만 그들에겐 어차피 이곳까지 들키지 않고 올 수단은 몇 달 전, 그가 카렐에게 빼앗겼고 지금은 고장이 나 못 쓸 불릿 한 대를 제외하면 애당초 없었다.

어차피 황제의 군대가 오기 전에 남부의 동맹군 수십만이 먼저 도착할 테고, 요충지를 선점당한 황제는 뒤늦게 도착해 어마어마한 남부제후군에게 박살이 날 것이 뻔했다.

블리자드 시즌 동안 냉각기를 맞으며 잠시 황실의 관심 밖으로 빠져나가 있던 남부 칼릴에도 짧은 평화가 지나고 다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눈 폭풍에 파묻혔던 칼릴이 맑은 하늘과 ‘그럭저럭’ 온화한 날씨를 되찾은 건 비엔-하임달의 삼각루트 완전개통을 한 달 남짓 앞둔 무렵이었다.

블리자드 시즌 동안 반란군은 2번의 큰 승전을 통해 2만이 넘는 포로를 얻어냈고, 그들 중 전향에 동의한 1만 5천을 부대에 재편성했다.

한편 진압군의 민간인 학살과 그간의 핍박에 불만을 품은 칼릴 주민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숫자의 지원병을 받아 반란군 전체의 규모도 6만이 넘게 늘릴 수 있었다. 칼릴 자체가 워낙에 그간 전쟁이 잦았던 변방이다 보니 주민 중 상당수가 제후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예비역들이었다. 덕분에 그들을 훈련하고 재편성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반면 포로들의 대부분은 블리자드 2차 전투 후, 적 참모장 클리멘트의 지휘 하에 퇴각하던 보병대에서 낙오한 동상 환자들이었다. 사실 세데스와 후스는 교활한 클리멘트가 그들 가운데 거짓 투항자들을 상당수 섞어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모두 받아들여 따로 2만이나 되는 [30군단]을 편성했다. 그리고는 반란군 내부 움직임을 알아내보려던 클리멘트의 뒤통수를 보기 좋게 쳐 버렸다.

“것 봐요, 멀리 가면 결국은 우리한테 충성하는 부대라니까요.”

원정을 떠나는 [30군단]을 배웅하러 나온 엘룬이 엄마 베아트릭스를 향해 넉살좋게 웃으며 그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멀리 간다’는 말에 당황한 베아트릭스가 화난 얼굴로 후스에게 물었다.

“자네가 말해 줬나?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게 하기로 했잖아!”

당황했기는 30군단을 맡아 떠나는 세데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리둥절해진 그들에게 후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실은 이거 옹주 마마의 제안에서 힌트를 얻은 겁니다.”

“엘룬이?”

베아트릭스는 30군단에게 해해거리며 넉살좋게 손을 흔들고 있는 딸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후스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포로부대 100명에 한 명은 첩자인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적 첩자보다 우리 편이 백 배 더 많은 것 아니냐고요.”

엘룬 식의 극단적인 낙관론에 베아트릭스는 풉 하고 웃고 말았다.

소수의 지휘부를 뺀 30군단 장병들은 자신들이 얼마 전 진압군에 빼앗긴 이곳 주변의 군소 홀들을 탈환하러 가는 것으로 알고 있고, 아무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반란군엔 황실군이 타고 온 소형 수송선을 빼면 2만이나 되는 대규모 병력을 옮길 병력수송선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데스가 그들에게 다량의 식량을 지참하고 ‘행군 준비’를 명했으니 바보가 아니라면 멀지 않은 어딘가를 치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생각해 보니 옹주마마 말씀대로 놈들이 뿌리고 간 가짜 투항자들은 대부분 사병이나 하급 장교들이니 상관없겠더군요.”

엘룬에게서 힌트를 얻었는지 몰라도, 후스는 ‘차라리 30군단을 본대와 떼어 중요한 임무를 주어 독립시켜버리면 도리어 첩자들이 설 곳이 없어질 거다.’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들고 나왔고, 이제 칼릴에서 3번째로 큰 홀인 남반구의 10번 홀과 그 주변을 공략하러 떠나는 길이었다.

“일단 마구잡이로 전선을 늘리기는 하는데…….”

베아트릭스가 살짝 걱정을 드러냈다. 황제는 ‘크든 작든 최대한 많은 홀을 확보해서 진압군의 얼을 빼 놔라.’라며 지시를 내렸지만 전술엔 밝지만 전략엔 상대적으로 약한 베아트릭스에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황제는 이곳 반란군과 주민들을 어느 정도 희생시키는 것을 각오하고 이곳을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어서 진압군의 발목을 잡아놓은 후 하임달에서 최종 승리를 노리는 듯했다.

그렇지만 플라칼 가 출신인 베아트릭스에겐 같은 가문과 맞서면서 희생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때, 홀 북쪽에서 들려오는 큰 소음에 행군 준비를 마치고 한참 전의를 다지고 있던 30군단 장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엔진 소음의 출처는 몇 달 전 이곳에 곡물을 싣고 왔던 거대한 벌크선이었다. 장병들은 벌크선이 어디 멀리 떠나나 하고 시선을 집중시켰지만 뜻밖에도 그 육중한 화물선은 행군 준비를 하고 있던 30군단 장병들의 한쪽에 내려섰다.

“이건 또 뭐야? 이게 왜 여기로 와?”

병사들, 심지어 장교와 사관들까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벌크선은 높이도 높이인데다가 내부와의 통로도 곡물을 싣는 위쪽의 큰 문과 컨베이어를 연결하는 측면의 구멍 수십 개밖에 없어 타고내리는 것도 어려웠다. 내부도 실내 체육관처럼 큼직하기만 할뿐 전혀 구획이 되어 있지 않아 사람이나 군수품처럼 포장된 짐을 나르기는 애당초 적당하지를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들의 앞에 수십 개의 사다리가 주르륵 내려졌다. 바닥에서 타는 병력 수송선에만 익숙한 장병들에겐 전혀 익숙지 않은 광경이었다.

“제대별로 올라가!”

세데스의 고함에 장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제히 사다리에 매달렸다. 해 본 일도 없지만 일단 시키면 하는 것이 군인이었다. 곡물을 싣는 컨베이어 구멍까지 기어 올라간 병사들은 곡물을 내려보내던 큰 썰매를 타고 미끄러져 줄줄이 안에 들어섰다.

“이게 다 뭐야?”

벌크선 안에 들어선 병사들은 내부에 나무판자로 대충 얼기설기 짜 놓은 3층의 칸막이에 기겁을 했다. 엉성하기는 해도 병력을 실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위로 올라가! 먼저 탄 놈들은 위층으로 가!”

그 와중에 군데군데 혼란이 벌어지고 썰매에서 앞뒤로 부딪쳐 자잘한 사고가 났지만 구멍이 많다보니 탑승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컨테이너에 담아 차량으로 옮기던 보급품도 헬 호수에서 공사를 할 때 쓰던 크레인으로 번쩍 들어 올려 곡물을 싣는 구멍으로 내렸다. 아주 단순하고 원시적인,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그저 지금까지의 방법이 너무 익숙해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행군 준비로 부산하던 2만의 병력을 실은 화물선은 그대로 공중을 박차고 올라 남쪽으로 기수를 틀었다. 병력수송선처럼 빠른 탑승은 아니지만, 진압군이 혼비백산하기는 충분한 타이밍이었다.

지긋지긋한 블리자드 시즌이 지나고 진압군 사령부가 있는 111번 홀에 간만에 도착한 대규모 수송선단에는 클리멘트에게 정말로 반가운 얼굴이 함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

우람한 체구의 클리멘트가 늘씬하게 잘생긴 아버지 마누엘을 와락 껴안았다. 마치 같은 메이커의 가발을 쓴 듯한 백금발만 아니라면 부녀 사이가 맞나 싶을 만큼 대조적인 외모에 델루지 가 장교들 몇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참았다. 마누엘은 이 든든한 장녀의 어깨에 팔을 걸고 함께 막사로 향했다.

“헤즈 그 새끼는?”

“죽은 딸내미 시체 보낸다고 아마 울고짜고 있을걸요.”

클리멘트가 사령관 막사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애지중지하던 맏딸을 잃고 이성을 잃었던 헤즈도 그새 어느 정도는 안정을 찾았고, 에우테르 대군의 죽음 직후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던 세닉 가 영지 루게의 반전 분위기도 교묘한 정치꾼 이렌느 경의 ‘무조건 침묵 작전’으로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젠 남부로서도 이곳을 빨리 정리하고 하임달에 전력을 집중해야 할 때였다.

“어쨌든 나한테는 니가 무사해서 제일 다행이구나.”

마누엘이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출혈열 때 정실부인이 죽고 홀아비로 몇 년을 사는 동안 사실상 안주인 역할을 대신해온 것이 이 듬직한 큰딸이었다. 그리고 걸핏하면 머리에서 깡통 소리를 내는 아버지의 부실한 뇌세포를 대신해주는 것도 딸의 몫이었다.

“군비 증강한답시고 한창 바쁘시죠? 한 달쯤 후면 이제 하임달로 가야 하는데.”

“네가 없으니 힘들어 죽겠다. 차라리 내가 여기 올걸 그랬어.”

아버지의 볼멘소리에 클리멘트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듣자하니 요즘 본가에 실리페 태후가 와 있다면서요? 그 여자하고 기분풀이라도 좀 하시지.”

딸의 엉큼한 농담에 마누엘이 눈을 흘겼다. 클리멘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지난번엔 재혼할 여자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실리페 태후 그 여자예요? 황제가 죽으면 그 여자도 금혼에서 풀리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누엘이 다시 버럭 화를 냈다.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딸에게 속삭였다.

“쏠쏠한 황실 정보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여자니까 적당히 친분을 유지하자는 거지.”

“네, 네, 알았으니까 친분만 잘 유지하세요. 그 이상이어도 뭐라고는 안 할게요. 그 여자 요즘 제후들마다 얼굴도장 찍고 다니는 꼴이 몸값 높이려고 안달인 것 같던데.”

클리멘트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선제의 둘째 아내였던 한량 실리페 태후는 황제의 미래를 놓고 흉흉한 소문이 퍼질 무렵부터 황궁을 떠나 남부를 떠돌고 있었다. 세간엔 지난 황제의 붕어 때도 ‘내빼기’로 살아남았던 그가 이번에도 일찌감치 카렐에게서 발을 빼고 도망친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마누엘은 자신의 여자관계에 쏠린 딸의 관심을 슬쩍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요즘 그보다는 가문에서 하디 놈 목소리가 너무 커지는 게 더 신경 쓰여. 그놈이 돈 타령하면서 병력 증강에도 자꾸 딴죽을 걸고 말이야. 플라칼 가 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더니 혹시 딴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웃고 있던 클리멘트의 표정도 ‘하디’라는 말에 함께 굳었다. 죽은 테번 공의 서자인 하디는 군인은 아니지만 세데스를 종권에서 몰아낸 실무자였고, 세데스가 쫓겨난 뒤 군인인 마누엘과 함께 가문의 내정을 사실상 이끌고 있었다. 클리멘트 입장에서도 깡통 소리 나는 아버지의 측근 역할을 계속 맡겨두기는 분명 신경이 쓰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자이긴 해도 죽은 테번 공의 장남이고, 가문 내의 헤게모니 싸움에선 클리멘트에게도 두려운 상대였다.

“그럼 그놈보고 플라칼 가 말로 꼬셔서 [하임달 지분] 늘려달라고 하세요.”

클리멘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금 남부제후들은 하임달에 진주할 병력 규모를 놓고 너도나도 규모 키우기 경쟁 중이었다. 처음 카나르가 [하임달 지분]이라는 것을 제안했던 건 소극적인 하급제후들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뭔가 상황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남부연합군을 구성하며 만든 양해사항 1번이 [하임달의 영토 배분 비율은 원정군에 참여한 규모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실리페 태후가 남부제후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황제가 하임달을 50년 이내로 황제령 수준으로 올려놓겠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몇 가지 중요한 자료들을 남부에 몰래 건네준 이후로 하임달 원정군에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는 남부제후들의 경쟁이 점입가경이었다.

이번에 남부제후들이 하임달 공략을 코앞에 두고 무려 25만의 어마어마한 병력, 그것도 돈 안 드는 보병만 순식간에 늘린 것도 원정군에 머릿수를 하나라도 더 얹어 지분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낳은 결과였다. 결국 놀란 최고제후 카나르 공이 직접 나서서 하임달이라는 미래의 식탁에 숟가락 하나라도 더 놓으려 광분하는 제후들을 뜯어말려야 할 정도였다. 남부보병대가 순식간에 2배 가까이 늘어난 것도 그 결과였다.

“그놈 자꾸 우리 병력 너무 늘리지 말라고 이것저것 물고 늘어지는 게 혹시 카나르 그 새끼한테 조종당하는 건 아닐까?”

“설마 그것까지는 아니겠죠. 델루지 가의 자존심이 있는데.”

“제가 보기도 지금 쓸데없이 너무 많아진 건 맞아요. ……하임달 지분 문제만 없다면요.”

클리멘트가 고개를 저었다. 카나르 공도 늘어난 머릿수를 뒷받침할 만큼의 지원조직이 아직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숫자만 늘어나 남부제후군 보병대 특유의 견고함이 떨어질 수 있다며 경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 군대는 계속 늘렸으니 브레이크가 걸릴 리 만무했다.

“그것도 그거고 내가 지금 걱정하는 건…….”

마누엘이 말꼬리를 흐리며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실리페 태후하고 이야기하다가 언뜻 들었는데……교단에선 종권 상속에서 적서 구별을 불합리하다고 해서 반대하고 있다더구나. 그게 사실이냐?”

“그건 교단 시대에 살아보신 아버지가 더 잘 아시죠?”

클리멘트가 기가 막혀하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마누엘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때야 1부1처제였으니까 적서구별이 아니고 그냥 혼외자였지.”

클리멘트는 교단 편을 들어 제국 장악을 노린다는 아버지가 최근 교단의 방침도 모른다는 데 기가 막혀하며 대답했다.

“그놈들이 마구스 가문이 그랬듯이 지명으로 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건 맞아요. 하디 그놈이 앞장서고 있는 것도 그 속셈이 있겠죠. 생전에 테번 숙부가 걸핏하면 하디에게 가문 물려주고 싶다고 했었으니까.”

“넌 그걸 알면서도 날보고 하디 놈하고 손잡으라고 했던 거냐?”

발끈한 마누엘이 목소리를 높이자 당황한 클리멘트가 얼른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저도 신경은 쓰이지만 이미 테번 숙부는 죽었고 제롬이 이미 한 번 물려받았었잖아요. 아직은 그놈이 잠잠한 것 같으니 그냥 안심하시고…….”

“그렇게 보면 나도 명분이 없는 건 사실이잖아? 그럼 도리어 세데스 그년이 더 유리해지지.”

“당장은 걱정 마세요, 그놈이 나중엔 욕심낼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괜히 지금 나섰다가 더 중요한 일만 흐트러뜨릴 수도…….”

클리멘트가 놀란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실리페 태후의 바람몰이로 너무 똑똑한 서자 조카에게 겁을 먹은 소심한 마누엘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태후한테 물어보니까 황실에서도 그놈이 우리 부녀를 밀치고 종권을 노리고 있는 걸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아. 애당초 너하고 난 안중에도 없다고 말이야.”

살짝 기분이 상한 클리멘트도 이번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누엘이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아무래도 네가 비엔으로 돌아오는 게 낫겠다. 여긴 그냥 군단장에게 맡겨놓고 말이야. 솔직히 여기 칼릴은 플라칼 가 내부문제인데 왜 우리가 여기에 신경 쓰느라 우리 목을 걸어야 하냐?”

마누엘의 말이 막 끝나기가 무섭게 뚱뚱한 헤즈가 뒤뚱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웬만해선 걷는 일이 거의 없는 저 뚱보가 직접 달려오는 모양새에서 클리멘트는 뭔가 큰일이 난 것을 직감했다.

“웬일이십니까? 살이라도 빼시게요?”

클리멘트의 장난 섞인 물음에 헤즈는 마누엘에 대한 인사까지도 생략한 채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반란군이 2만의 병력으로 남반구의 3개 홀을 공격 중이야. 곡물용 화물선으로 병력을 옮겨서 미처 대응을 못 했어. 이미 전투가 끝나가는 모양인데 저 똥파리들 때문에 이거 미치겠네.”

클리멘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상식적으로 승전을 노린다면 병력을 집중시켜 막거나 치는 것이 원칙인데도 반란군은 거꾸로 전선을 계속 넓히며 최대한 빨리 여기를 정리하고 하임달로 가기 위해 몸이 달은 진압군의 부담을 키워가고 있었다.

“맙소사, 여길 블랙홀로 만들려는 속셈이군요.”

“염병할, 이기는 건 포기하고 계속 우리 발목만 잡겠다는 꼼수야. 한 발 늦었어, 씨발.”

헤즈는 그제야 마누엘에게 아는 척을 하며 물었다.

“잘 오셨습니다. 놈들이 계속 전선을 넓히려 시도하고 있어서 우리도 난감합니다. 지금 가용병력이 7만이 채 안 되니 양쪽에서 전쟁을 수행하긴 어렵습니다. 여길 빨리 끝내고 하임달에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병력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여길 아예 버릴 수도 없고.”

마누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부와의 국경지대이고 군사요충지인 칼릴이 계속 친 황제파 반란군의 수중에 있다는 건 그들이 언제든 서부제후군, 혹은 서부를 통해 남부로 들어오는 황제의 병력에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하임달 공략을 생각하다가 지도에서 이곳을 볼 때면 목구멍에 큰 가시 하나가 박힌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머리가 좀 더 빠른 클리멘트가 끼어들었다.

“근데 여긴 플라칼 가 영지 아닌지요? 우린 이미 할 만큼 했습니다. 추가병력도 플라칼 가가 내놓는 게 맞는다고 보입니다만. 하임달 원정군에서 10만만 빼도 여길 다스리긴 충분합니다.”

클리멘트의 속셈을 눈치챈 헤즈의 얼굴이 빨개졌다. 결국 하임달의 지분을 좌우할 원정군을 축소하고 이곳에 병력을 더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그 문제는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 아버지와 상의하시죠.”

헤즈는 슬그머니 결정권을 아버지 종장에게 떠넘겨버렸다.

“어쨌든 아버지와 이렌느 경에게는 이미 말씀드렸으니 델루지 가 쪽에도 알려드리는 겁니다. 지금 비율 그대로만이라도 갹출해 주셨으면 합니다.”

용건을 다 말한 헤즈는 답변을 듣기도 전에 뒤뚱거리며 주기장 쪽으로 달려갔다. 반란군에 빼앗긴 남반구를 공략하러 갈 부대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중이었다.

“어차피 저놈들로 되찾긴 글른 것 같은데.”

마누엘과 클리멘트는 그 광경을 못 본 척 계속 걸음을 옮겼다.

“저놈 말에 휩쓸리지 마세요. 우리가 하임달 지분을 잃으면 안 돼요. 어차피 여기 문제가 생겨도 불똥이 제일 크게 떨어진 건 저놈들이니까.”

클리멘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하임달 지분에서 밀리면 남부최고제후를 되찾는 건 영영 요원해져요. 아직은 우리 땅이 플라칼 가보다는 생산력이 높다고요. 역전을 허용할 순 없죠.”

마누엘도 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클리멘트가 아버지에게 침착하게 조언했다.

“지금 하임달 지분이 30:35:18:17 이니까 두 가문 지분을 같게 해 주지 않으면 진압군 증강은 안 된다고 버티세요. 아셨죠? 안 되면 지네들 제후군이라도 더 파병하겠죠 뭐.”

마누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임달 지분]을 놓고 칼릴 진압군 증강이 표류할 판이지만 어차피 칼릴은 그들의 땅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분열 책동이라 할지 몰라도, 그들 입장에서는 플라칼 가와의 자존심 싸움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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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달 와서 밥값도 못 하고 천덕꾸러기가 된 베흔이 처음으로 밥값을....

마누엘도 은근 딸바보입니다. 마누엘 눈엔 네페티보다도 예쁘게 보일 겁니다.(좀 심했나...) ㅎㅎㅎ 실리페 태후는 재주도 좋습니다. ㅋㅋㅋ

그리고 전자책 2부 5권부터 2부 완결인 8권까지가 오늘부터 유페이퍼에서 판매시작되었습니다. 예스24등 서점들은 절차가 길어 며칠 더 기다리셔야 판매 시작될 겁니다.

전자책 3부는 7,8월중에 업데이트해서 종이책을 따라잡겠습니다. 대단원편은 종이책과 전자책이 동시에 판매 시작될 것 같군요. ㅎㅎㅎ

노블레스 연재중인 출판본 2부는 아무래도 프리미엄으로는 못 가고 노블레스에 남아있어야 할 것 같습니아. 아무래도 프리미엄 재입성은 차기작에서나 가능할 듯하네요.;;;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예정)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올레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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