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60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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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은 석판을 자리에 놓아둔 채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철성의 형상이 또렷해질 즈음, 바닥에서 다시 철물의 흔적이 밟혔다. 자세히 보니 먼 옛날, 내외부를 가르던 철조망과 문설주가 쓰러진 흔적이었다. 타리프의 일지에 남아있던 더 먼 옛날, R사제들이 피실험자들을 이끌고 [감독관]에 대항해 일으켰던 저항의 흔적은 세월에 흐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굵은 기둥과 사람 키의 몇 배는 될 높이, 중간 중간 밟히는 뾰족한 꼬챙이의 흔적 에서 양쪽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밟지 말고 지나와라.”
카렐은 뒤따르는 일행들에 주의를 주고는 계속 걸어 들어왔다. 백여 명 가까운 사람들과 15대의 차량은 황제의 걸음과 천천히 속도를 맞추어 뒤를 따라갔다. 병사들은 쓰러진 철조망을 피해 바닥을 밟았고, 차량은 문설주 사이 빈 자리를 통해 줄을 맞춰 안에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마치 죽어가는 야수 같은 철성의 크고 위압적인 실루엣이 점점 커져갔다. 헝클어진 갈기처럼 꺾여 축 늘어진 파이프들, 벗겨진 각질처럼 검게 녹이 슬어 수명을 다한 강판, 물어뜯긴 상처처럼 무너져 흔적만 남은 굴뚝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철조망 내부는 바깥에 비해서는 상태가 훨씬 나았다. 비록 바람과 모래에 닳아 이젠 형체를 거의 잃었지만 검은 철성으로 이어지는 경계석도, 보도블록도 여전히 남아 옛 조경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옛날에 있었다는 죽은 나무, 옛 벤치와 테이블은 오랜 바람과 세월에 모두 날아가 보이지 않았다. 일지가 쓰인 후 지나간 550년의 흔적은 선명했다.
카렐은 철성에 접근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에 밟히는 길의 흔적과 육중한 화학 공장을 연상케 하는 철성 그 자체 외엔 지상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아.”
검은 철성 바로 앞에 도착한 카렐이 고개를 들고 위를 찬찬히 올려보았다. 거대한 철성은 15척 남짓(4.5m) 땅을 다져 높이 쌓아올린 가파른 토판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타리프의 일지에 적힌 카히나 일행과 코메트의 마지막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었던 석조 계단은 거친 바람 속에서도 여전히 그 모습 거의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타리프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카히나는 저 높은 계단 위에서 코메트 일행을 굽어보고 있었을 터였다.
그 위에 육중하게 자리한 ‘검은 철성’은 그 이름 그대로, 이젠 동력과 호흡이 끊긴 거대한 강철의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타리프 신관이 철성 앞 어딘가에 카히나의 시신을 묻었다고 되어 있던데?”
카렐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하지만 일지가 적히고 5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봉분의 흔적 같은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 시체는 왜요?”
카렐을 따라온 베흔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오르마즈의 원형인 자의 시신을 꺼낸다는 것이 그의 죄책감을 긁고 있는 듯했다.
“순수한 고향행성 원주민 중 유일하게 시신 처리 기록이 남은 사람이야. 수명개조를 되살릴 55호 공생 바이러스를 찾는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신이지.”
“여기 묻은 게 사실이라 해도 봉분은 다 날아갔을 것 같습니다.”
코리온이 강풍에 손바닥을 대어 보며 대답했다. 이런 강풍 속에서 어설프게 흙으로 쌓은 봉분이 그 오랜 세월을 버텼을 리가 없었다.
카렐이 이쪽으로는 전문가인 발굴단장 살람을 힐끔 돌아보았다.
“550년 전에 백에 담아 암매장해놓은 시체가 그 자리에 남아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어른 한 명이 팠으니 깊이 묻기는 어려웠을 게야.”
“여기에 말씀이십니까?”
살람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환경이라면 봉분 자체는 550년은 고사하고 5년도 버티기 어려웠을 겁니다.”
“땅 밑은?”
살람은 바람을 타고 날아온 고운 흙에 끊임없이 얻어맞고 있는 지면을 발로 살살 긁어보였다.
“돌을 덮었거나 단단한 관을 사용했다면 몰라도 위치에 따라선 아예 백이 노출되어 물리적으로 풍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썩지 않았다고 해도 시체는 남아나지 않았겠죠.”
옆에 있던 코리온이 거들었다.
“야푸르 대신관대의 삼각루트 공사를 할 당시에도 이곳에 기술자들이 방문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시 기록에도 카히나의 묘에 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이미 묘가 사라진 후였을지도 모릅니다.”
카렐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았다. 카렐은 살람과 발굴단원들에게 철성 주변을 가리켜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도록 하게. 자네 전문분야 아닌가.”
살람과 발굴단에 바깥을 맡겨놓은 카렐은 카히나와 코메트의 혈전이 있었던 계단을 조심조심 올랐다. 그곳도 오랜 모래폭풍에 마모되어 이젠 계단이라기보다 울퉁불퉁 물결 모양의 가파른 오르막 같은 모양이 되어 있었다.
계단을 오른 카렐은 마치 자기 집에 들듯 성큼성큼 나아가 사람 키의 서너 배가 넘는 철성의 거대한 정문을 양 손으로 짚었다. 세하 비장이 그 한쪽에 있는 쪽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카렐이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제가 어찌 개구멍 따위로 드나들 것이냐.”
카렐이 힘을 주어 오래된 철문을 힘껏 밀었다. 끼이익 하는 귀청을 찢는 마찰음에 청력이 예민한 가디언들이 몸서리를 치며 귀를 막았다. 문을 연 카렐의 앞에는 온통 기계로 둘러싸인 거대한 회랑과 어둠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안쪽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공기가 등 뒤에서 몰아쳐 들어오려 하는 혹한을 다시 밖으로 쫓아냈다.
“들어가자.”
몰아치는 거센 바람소리가 끊기면서 갑자기 주변에 침묵에 잠긴 것 같았다. 카렐이 내딛는 걸음걸음이 웅웅거리며 주변을 한 번씩 메아리치고 맴돌았다. 온통 파란 물결에 적응했던 카렐의 눈도 다시 평소와 같은 X의 적외선 시야로 되돌아갔다.
“제국에도 이 정도 규모의 단일 플랜트는 찾기 힘들 텐데.”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까마득한 천장에도, 벽에도 온통 거대한 파이프와 갖은 색깔의 기계들이 마치 야수의 몸 속 신경과 혈관, 근육처럼 뒤엉킨 채 낮은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살아있구나.”
카렐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검은 철성의 굵은 숨소리, 온기가 발끝과 피부의 희미한 진동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이 강철 생명체는 500년 이상,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긴 세월을 이 저주받은 땅의 마지막 희망을 실어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카렐은 회랑의 안쪽으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낯선 풍경에 긴장한 아랫사람들의 걸음이 조심스러웠지만 황제의 걸음은 들어갈수록 점점 힘이 실렸다. 카렐은 수많은 신경과 근육, 혈관들 사이로 난 거대한 회랑 사이를 중간을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가로질러 걸었다. 그리고 그 막다른 끝엔 까마득히 천장까지 뻗어 있는 직경 30척(9m) 남짓 육중한 탑 하나가 있었다.
“황금탑은 이제 옛말이구나.”
카렐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까만 먼지와 세월의 때를 뒤집어쓴 탑은 겉보기엔 더 이상 황금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렐이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짚자 검은 때 한 무더기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 안쪽에선 희미한 황금빛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카렐이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탑을 죽 훑어 켜켜이 쌓인 먼지를 떨어냈다. 두껍게 쌓인 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려 바닥에 쌓였지만 오직 한 곳에 붙은 썩은 천 조각 하나만은 떨어지지 않았다. 카렐은 별 생각 없이 천을 떼어내려 했지만 천은 마치 쇠 속에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렐은 그제야 그 천을 따라 빙 둘러 난 희미하고 둥근 홈을 볼 수 있었다. 먼 엣날, 젊은 시절의 아프라스 야투 박사가 이 안에 들어가려 타리프 신관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팔이 끼어 잘린 흔적이었고, 탑의 안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카렐이 코리온을 돌아보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일지에 따르면 당시 야투 박사와의 몸싸움으로 중상을 입은 타리프 신관은 바로 이 탑 안에 몇 개의 잔딕과 자료를 봉인해 둔 채 이곳을 도망쳤어야 했다. 그 중에는 아들 주페의 머리에 박힌 16번 잔딕을 빼낼 수 있는 1번 잔딕도 있었다.
그런데 야투 박사의 옷자락 조각이 아직 남아있다는 건 그 이후 단 한 번도 열린 일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오르마즈 경은 왜 안 열어봤던 걸까?”
탑을 올려보며 의문에 잠긴 황제 주변으로 측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열어 보십시오. ……진짜인지 아닌지.”
코리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렐은 자신만큼이나 아들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을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어렵게 구한 희망을 잃고 싶지 않다면 어쩔 텐가?”
카렐은 사제의 키, 아니 지금껏 [사제의 키]라고 믿고 있던 쇳덩이가 든 주머니를 꽉 잡은 채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 한쪽에서 세네피스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이던 카렐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혼자 믿는다고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지.”
카렐은 주머니에서 문제의 쇳조각을 꺼내 둥근 문 앞에 대 보았다.
긴 침묵에 뒤이어 낮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카렐의 입술 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문은 역시나 그대로였다. 지금껏 모두가 사제의 키라고 믿고 있던 쇳조각이 파랗게 변한 카렐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또르르 굴러갔다. 그 쇳조각은 가짜였다.
“이보게.”
이상한 느낌을 직감한 코리온은 니사에게 얼른 카렐의 뒤를 지키라고 눈짓을 보냈다. 니사의 손은 응급 진통제가 든 진료가방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순간, 손끝을 부들부들 떨며 비틀거리는 카렐의 가슴을 세네피스가 와락 달려들어 껴안았다.
“황상, 제발! 놀라지 마세요! 이까짓 돌이 문제입니까!”
세네피스의 외침도 이번엔 소용이 없었다. 세네피스는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휘청거리는 카렐을 기를 쓰고 버티려 했지만 그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코리온까지 달려들어 쓰러지는 황제의 어깨를 부축하려 했지만 결국 그는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악!”
세네피스는 그 와중에도 황제의 옷깃을 움켜잡은 손을 죽어라고 놓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발작을 할 듯 씩씩대며 가늘게 눈가를 떠는 카렐의 얼굴을 와락 껴안았다.
“제발! 제발요! 또 발작하시면 이젠 안 된다고요!”
세네피스의 찢어지는 외침이 검은 철성 안을 메아리쳤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괜찮습니다.”
카렐은 코리온과 세네피스에게 괜찮다며 손을 저어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입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사에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짜 사제의 키를 주워들고 돌아왔다.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도 한편으론 큰 정보를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거의 흔들리지 않는 사에나의 모습에 카렐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자네 생각이 내 생각이네.”
카렐은 그대로 선 채 황금탑의 원망스런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옆에서 네피가 문을 손으로 탁탁 두들겨 보았지만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와, 이거 쌩으로 부수려면 강적이겠는데. 혹시 진짜 금 아닐까?”
이 상황에서 탑 위를 손톱으로 긁고 있는 네피의 모습에 몇몇 사람들이 실소를 터뜨렸다가 얼른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죄인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건 세네피스였다.
“다른 방법이 또 나오겠죠. 염려 마세요, 어머니.”
카렐은 황금탑 주변의 웅장한 공간을 빙 둘러보았다. 막다른 끝에 자리한 황금탑을 빙 둘러 십여 층의 회랑이 있고 회랑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긴 계단이 보였다. 이 철성의 살아있는 ‘진동’은 이 회랑 너머 어딘가에서 나오고 있었다.
카렐은 조용히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카렐의 걸음에 오래된 계단이 약간씩 삐거덕거리며 소리를 냈지만 무너질 만큼 망가진 상태는 아니었다. 회랑은 복잡한 기계와 함께 한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복잡한 기계들 사이로 줄줄이 있는 방들이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카렐은 방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녹슬고 오래된 철제 침대와 삭은 매트리스, 허름한 책상과 선반 등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카렐이 뒤따라온 세하에게 물었다.
“550년이나 된 방 같지는 않은걸?”
“하임달의 결전 직전에 오르마즈 경이 고용한 작업자들도 여기에 머물렀습니다. 저희도 가끔 작업을 하며 머물곤 했고요.”
“잘됐다. 우리도 청소 좀 하고 여기 머물면 되겠군.”
카렐은 위층 회랑으로 계속 올랐다. 몇 층을 계속 올라가고 올라가니 어느새 천장이 가까워졌다. 그렇게 계단이 끝나는 곳에 옥상으로 나가는 문과 함께 제법 새것으로 보이는 철문 하나가 보였다. 문은 온통 먼지투성이인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깨끗했다. 엷게 앉은 먼지 안쪽엔 누군가 닦은 듯한 걸레질 흔적까지 있었다.
[제어실]이라는 팻말을 본 카렐은 사에나에게 바싹 따라오라며 손짓하고는 문을 열었다.
“여기로군.”
카렐의 입가에 비로소 웃음다운 웃음이 번졌다. 가로세로 20척(6m) 남짓 작은 방 전면은 유리로 탁 트여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간 일행은 유리 너머, 건물 몇 채를 들어앉힐 만한 거대한 공간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육중한 강철 심장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철성의 메인 터빈입니다.”
카렐을 뒤따라온 세하 비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향에 남아있던 마지막 생존자들이 몰살당하기 직전에 건물을 헐고, 그릇과 무기를 녹여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만든 것이라 들었습니다. 주변의 공기를 뿜어내고 강제로 순환시키는 장치입니다.”
일행들은 웬만한 건물 크기를 능가하는 거대한 터빈 5대와 그곳에서 뻗어나가는 마치 대동맥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파이프들을 지켜보며 할 말을 잊고 있었다. 검은 철성의 거대한 규모는 바로 이 어마어마한 터빈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괴물들 중 살아서 돌아가고 있는 건 2개뿐이었다.
“꺼져 있는 것들은 왜?”
“가장 큰 1번 터빈은 판지셰르 분지를 정화하는 메인 장치라 송풍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작동장치가 황금탑 안에 있다 보니 오랫동안 꺼져 있었습니다. 2번은 1번의 보조 장치인데, 화산재로 송풍로가 막혀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5번은 이곳 주변을 정화하고 유지하는 장치인데 적에게 들키기 않기 위해 역시 꺼 놓았습니다. 이 산 주변이 이 꼴이 된 것이 그 때문이죠.”
“지금 돌아가는 두 개는?”
이번에 물은 건 코리온이었다.
“그 둘은 언젠가 비가 올 때를 기다리며 다른 봉의 정상을 통해 수증기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도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낮춰놓은 상태입니다.”
“이 5개 모두를 최대 출력으로 돌리면 어떻게 되나?”
“아직 그래 본 일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송풍로는 내내 막혀 있었고, 그분께선 성능실험을 미처 다 못 끝내고 돌아가셨으니까요.”
오르마즈 이야기를 하는 세하의 눈꼬리에 살짝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카렐이 옆으로 돌아서니 그곳엔 에아 신전 벽에 있던 삼각루트의 스크린이 있었고 황궁 지하 카타콤베의 표본실에서 보았던 워프루트 제어장치와 똑같은 기계가 놓여있었다. 하임달의 스크린은 남부 비엔에서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루트의 진척상황과, 황제령에서 역시 이곳을 향해 열리고 있는 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남부는 고작 15일 남았구나.”
카렐이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스크린의 큰 삼각형엔 각각 이곳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두 개의 불빛이 나란히 보였다. 오늘을 위해 워프루트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코리온이 계기판 앞에 섰다.
“우리 쪽은 39일 남았고요.”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다. 남부 비엔에서 다가오고 있는 불빛은 3/4 넘게 완성되어 있고, 황제령에서 다가오는 불빛은 그보다 한참 처져 아직 채 절반도 진척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따라잡으려면 하임달 쪽에서도 함께 길을 뚫는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그가 사에나와 함께 굳이 무리를 해 가며 달려온 이유였다.
“남부에서 오는 걸 우리가 막을 수는 없나?”
카렐이 중앙에 있는 [마스터 센서]에 자신의 대신관 마구스 팔찌를 대 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당시 자료를 보니 프로세스를 차단하려면 이곳 주인인 트라에타오나 마구스의 팔찌가 필요한 듯합니다.”
“아트위야?”
카렐의 찡그린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 말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군.”
코리온이 제어판을 바삐 손보며 개통 작업을 서둘렀다. 잠시 후, 황제령에서 개통 행사를 할 때 보았던 [대기] 화면이 켜졌다.
“양쪽에서 대십시오. 하임달에서 황제령 쪽으로 동시에 개통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마주본 카렐과 사에나가 익숙하게 양쪽 끝의 센서에 손을 가져갔다. 이번엔 지난번 같은 환호성도, 박수도 없었다. 그저 신중한 침묵 속에서 하임달을 표시하는 점이 깜박거리는 작은 비프음이 났을 뿐이었다.
“프로세스 개시합니다.”
잠시 후, 황제령-하임달을 표시하는 숫자가 4304에서 갑자기 2단계가 뛰어올랐다. 그리고 하임달 쪽에서 황제령을 향해 이어지는 선에서도 빛이 나기 시작했다. 뒤에 둘러선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숨이 새어나왔다. 코리온이 계기판에 나온 숫자로 바쁘게 계산을 시작했다.
“황제령에서 이곳까지의 직통로 개통 예정일은……18일 14시간 후입니다. 남부의 개통 예정일은 15일 01시간 후입니다.”
“남부와 여기와 루트가 개통되고 나면…….”
“제가 가진 자료가 맞다면 이곳과 비엔의 통제소를 모두 장악하고 나면 루트의 중간기착지인 탈라스와의 통로를 열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여기 하임달에 앉아 제국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죠.”
카렐이 입술에 힘을 주었다. 코리온이 무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양측 워프성능 최고의 수송선으로 모두 개통과 동시에 출발한다고 치면……황실군 수송선이 조금 우세하니 3일 하고 12시간이 늦게 도착하게 됩니다. 남부는 우리가 그렇게까지 빨리 길을 내고 있다는 걸 모를 테니 우리가 유리한 면도 있습니다.”
카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제어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옥상으로 이어진 철문을 힘껏 열고 밖으로 나섰다.
옥상에는 여전히 흑갈색 먼지가 온통 뒤섞인 강풍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카렐은 이 거대한 야수의 어깨를 밟고 모서리로 향했다. 난간이 삭아 떨어져나간 모서리에 다가간 카렐은 모래폭풍 너머로 희미하게 내려다보이는 판지셰르 분지를 한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곳을 사수할 백여 명의 용사들도 그의 뒤에 집결했다.
“중계시설을 여기 설치하겠습니다.”
사에나의 손짓에 분견대의 공병들이 이번에 카렐이 가져온 초 고출력의 통신 중계시설을 옥상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케스난이 약속했던 비밀 비컨 설치를 끝내는 몇 시간 후면 이곳에서 황제령까지 단순한 코드나마 통신이 가능해질 예정이었다.
“송풍로는 어느 쪽이냐?”
카렐의 물음에 세하가 정남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움푹한 골짜기에는 정말로 푸른빛이 유독 진한 고운 흙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교단의 공병대가 지금쯤 저 밑에서 흙을 헤치며 길을 뚫고 올라오고 있을 터였다.
“딱 18일이다.”
카렐이 단호하게 말했다.
“18일만 지키면 된다. 그 뒤엔……이곳은 다시 우리 것이 된다.”
카렐은 이곳을 최후까지 사수했던 카히나도 자신을 따르던 마지막 생존자들에게 같은 말을 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어느새 옆에 와 있는 세네피스와 코리온을 의식하며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 설사 죽는다 해도……여길 되살려 물려주고 갈 수 있다면 저승에서 만족할 테니…….”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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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 시작부분의 첫 폭풍이 한 번 지났습니다.
이제 다음 회엔 황제령으로 돌아가 잠시 잊고있던(?) 페로와 예쁜 황자들이 컴백합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도 잊지 마시고~~~(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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