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64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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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와 황자들 일행이 탄 배의 실종 소식에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와중에 장태자의 약혼식은 강행되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듣지 못한 사람은 약혼식의 주인공인 장태자 본인뿐이었다.
막 ‘결혼식’을 끝낸 페로는 신랑이 맞나 싶을 만큼 이 일에 열심이었다. 그는 선창에서 막 올라온 킵에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황실 일행들은?”
“부속선에 태워 사고 현장으로 보냈습니다.”
“그럼 이 배엔 부속선은 하나도 안 남았군.”
페로가 엷게 웃었다. 하심, 카이와 황후를 따라온 황실 시종, 시녀들, 수행원들은 모조리 ‘비빈들을 수색하라’는 핑계로 이 배에 실린 부속 보트에 태워 내보내버렸다. 이제 그의 계획에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끼어들어 귀찮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빨리! 빨리 끝내야 돼!”
결혼식이 끝나기가 번갯불에 콩 볶듯 서둘러 단상을 정리한 페로의 사람들은 미리 준비한 약혼식 축하 화환과 현수막을 걸었고, 장태자와 약혼할 처자들에겐 하녀들이 달라붙어 최대한 빨리 몸단장을 하느라 소동이 벌어졌다.
상갑판의 연회장에서 약혼식 준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특등 선실에서 어머니 아메스와 마주앉은 카이는 내내 말이 없었다. 금빛 머플러, 벨벳 케이프에 사파이어 서클렛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는 길길이 날뛰지도, 화를 내지도 않은 채 이런 조용한 침묵으로 어머니와 외조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입장하십시오.”
압둘 모투바 대신이 모자간의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는 선실에 고개를 디밀었다. 아메스가 먼저 일어나며 아들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카이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요?”
아메스가 아들을 힐끔 돌아보고는 별 대답 없이 앞장서 나아갔다.
카이와 아메스는 여전히 소란스러운 상갑판의 연회장으로 나왔다. 이곳의 내빈들 대부분을 차지하는 타르서스 호족들에겐 장태자의 약혼 따위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누가 약혼을 하건 말건 못 본 척 자기들끼리 시장의 이권 분배 문제로 사방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열대의 밤은 거친 호족들과 싸움과 소년 장태자의 강제 약혼식 사이에서 삐거덕거리며 심각한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단상의 상석에 앉은 카이는 앞에 선 4명의 처자들을 한 번씩 돌아보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의 처자들 셋과 타르서스 호족의 딸까지 네 명 모두는 그보다는 세상을 2배 이상 더 산 ‘까마득한 누님들’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멀찍이 단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며 긴장된 표정을 가다듬고 있었다.
카이는 아메스의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나 ‘정실’로 예정되어 있는 슈트란 가 막내딸에게 다가가 섰다. 그는 아버지 다히르에게 배우고 온 대로 장태자에게 살짝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카이는 그 옆의 모투바 대신 딸과 서부 알리 경의 딸에게서 모두 한 번씩 인사를 받고 지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에도 부르카로 머리끝부터 허리 아래까지 온통 가린 바드 종장의 딸 아이샤의 앞에 섰다. 이 여자는 며칠 전, 한 번 만난 게 전부였다. 어찌된 일인지 이 여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카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샤의 부르카에서 눈을 가리는 촘촘한 그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카이의 암갈색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앞으로 내 앞에선 이 따위 흉물을 입지 마시오.”
카이가 갑자기 단호해진 말투로 딱 잘라 경고했다. 돌연 격해진 장태자의 말투에 아이샤의 뒤에 서 있던 바드 종장의 얼굴이 확 굳어버렸다. 카이는 아이샤가 머리에 쓴 부르카를 덥석 잡더니 사정없이 확 잡아당겨 벗겨버렸다.
“대체 누구냐!”
“아앗!”
놀란 처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부르카 안에 있는 건 바드의 딸 아이샤가 아니고 다부진 체구에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웬 여자였다. 정체가 드러난 순간, 여자 암살수가 반사적으로 휙 휘두른 단검이 카이의 가슴을 찌익 소리를 내며 베고 지나갔지만 안에 입은 방검복과 상대를 이미 읽고 있던 소년의 빠른 몸놀림에 치명상까지 입히지는 못했다.
“암살수다!”
수하들의 고함이 사방에서 울렸다. 시장의 지분 문제로 그때까지도 옥신각신하던 호족들도 이 난데없는 상황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방향도 못 찾고 우왕좌왕 도망을 쳤다. 암살수의 정체가 너무 일찍 드러나면서 당황한 바드 종장은 페로의 가디언들이 미처 달려들기 전에 동료 호족들이 바글거리고 있는 사이로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라! 물라 어딨어!”
킵이 암살수를 때려눕히는 모습을 확인한 바드 종장은 사람들을 거칠게 떠밀며 배의 탈출정이 있는 후미로 달려갔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배는 익숙한 그의 소유이고, 승무원들도 그의 사람인 이상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탈출은 어렵지 않았다.
“이봐! 무슨 일이야!!!”
그는 단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 파악을 못 한 채 ‘무슨 일이냐’며 자신을 붙들고 묻는 동료 타르서스인 호족들을 거칠게 떠밀고 계속 달려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수하들이 있는 브리지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구명보트 내려! 빨리!”
바로 그때, 조용한 망망대해를 움직이던 유람선이 갑자기 굉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귀청을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소음이 배 왼쪽에서 울리더니 그대로 바다 한중간에 멈춰서고 말았다. 덕분에 상갑판에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뱃머리 쪽으로 쏠리며 몇몇은 넘어지고 깔려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망을 치던 바드 종장이 브리지에 다시 화를 버럭 냈다.
“염병! 내가 언제 배 세우랬어!”
막 고함을 지르던 그는 배가 갑자기 옆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기겁을 했다.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던 그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배 왼쪽을 내려다보았지만 어두운 밤중에 반짝거리는 수면만 보일 뿐 뭐가 어찌된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배가 좌초했음을 깨달은 탑승객들이 공포에 질려 앞을 다투어 구명정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멀리 하늘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형체가 나타났다. 황실 셔틀이거나, 혹은 자신들을 구하러 온 구조 셔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하지만 다가오고 있는 셔틀은 승용이나 군용셔틀이 아니었다.
“저게 뭐지?”
육중한 화물셔틀은 어리둥절해진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는 무언가에 좌초해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유람선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자살셔틀이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물에 몸을 던지고, 구명정을 흔들며 빨리 내리라며 울부짖었다. 이 호화유람선 전체가 통째로 거대한 학살장이 될 참이었다.
“바드 저놈이 미쳤구나!”
단상의 페로가 찢어지는 고함을 질렀다. 시장 지분 문제로 호족들과 물의를 빚었고, 거기에 이번엔 장태자를 죽이려는 시도까지 실패한 바드가 자신 소유의 배를 이용해 차라리 탑승객 전체를 몰살시키려 시도한다는 정도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드는 자신의 값비싼 배를 이런 일에 희생시킬 생각도, 이곳에서 수장되는 것도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었다.
“뒤로 도망가!”
하늘에서 내리꽂힌 셔틀은 백 명이 넘는 타르서스 호족들과 수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는 유람선의 상갑판 중앙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망망대해 중간에 좌초되어 오도가도 못 하고 있던 이 최고급 중형 유람선은 중앙이 그대로 박살이 나며 V자로 단숨에 꺾여버렸다. 상갑판에서 미처 도망치지 못한 호족들, 승무원들이 파편이 되어 불꽃 속에서 사방으로 날아오르거나 물 속으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중간이 꺾인 배는 그대로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라와 함께 기우는 배의 꼬리에 달라붙어 있던 바드 종장은 구명정에 헐레벌떡 기어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구명정에 기어들려는 수많은 손들을 악을 쓰고 쳐내며 브리지에 대고 악을 썼다.
“9번 구명정 풀어! 빨리!”
다행히 이 와중에도 브리지에 누군가 있는지, 구명정이 자동으로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올라탄 물라가 구명정의 레버를 잡아당기려 하자 바드 종장이 기겁을 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내 딸! 딸이 아직 저 안에 있다고!”
“허! 내가 언제 딸 대신 암살수 년을 집어넣으라고 했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바드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물라가 그를 거칠게 밀어냈다. 원래 약속대로라면 바드는 딸 아이샤에게 치명적인 독약 캡슐을 물려 약혼식 마지막 입맞춤을 할 때 깨뜨리도록 되어있었다. 하지만 바드는 친딸을 희생시키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전문 암살수에게 부르카를 입혀 그 자리에 넣어놓은 것이었다.
“내 딸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니까!”
물라는 바드가 말리건 말건 구명정의 레버를 힘껏 잡아당겼다. 붉은 공기주머니 구명정은 가라앉는 배에서 펑 날아올라 바닷물 위로 몇 번을 퉁퉁 튀기고는 무사히 물 위에 내려앉았다. 그 와중에 잠시 얼이 빠졌던 바드 종장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바드 종장이 머리를 싸쥐고 악을 썼다. 반 토막이 난 배는 수많은 타르서스 호족, 황실과 제후가 손님들을 실은 채 한밤중의 바닷물 속으로 순식간에 가라앉고 있었다. 그냥 좌초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버텼을 테지만 배가 조각난 상태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무사히 튕겨 나온 구명정은 그가 탄 것 하나뿐이었다.
“아이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있었다. 그가 배에서 탈출하며 들은 건 같은 타르서스 호족들이 자신에게 퍼붓는 저주의 말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본가에 연락을 하며 살려달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구명정은 자신의 것만 빠져나왔고,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막 사람들인 타르서스 호족들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거나 제대로 물장구조차 못 해 본 채 뱃속으로 하나 둘 사라져갔다. 아마 자신의 딸 아이샤도 비슷한 운명이 되었을 터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그는 이대로 돌아가도 자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옆에 있는 물라까지도 자신을 의심에 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당신이 저런 게 아니요? 왜 구명정이 하나도 작동을 안 하는 거야! 저게 말이 되냐고!”
“내가 미쳤소! 혹시 당신이 우리 호족들하고 황실을 다 함정에 끌어들여 몰살시키려고 그런 건 아니고?”
바드가 펄쩍 뛰며 물라의 멱살을 붙들었다. 둘 사이에 잠시 몸싸움이 오갔지만 이미 전장에서 익숙한 물라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몇 분 안 가 바드를 제압해 바닥에 쓰러뜨린 물라가 이를 빠득 갈았다. 벌벌 떨고 있는 바드의 얼굴을 보니 혹시 자신이 교단에 속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28개 타르서스 호족가가 몰살당했고, 총리와 장태자, 황실 일행까지 몰살당했다면 이득을 볼 건 결국 교단뿐이었다.
“어쨌든 황실은 망했어…….”
물라가 바드의 목을 놓아주었다. 둘이 탄 구명정은 이미 물 속으로 거의 가라앉은 배와 물고기밥이 된 수백 구의 시체를 뒤로하고 북쪽으로 하염없이 둥둥 떠갔다. 그때, 둘은 공중에서 다가오는 또 다른 셔틀 소리를 들었다.
둘은 혹시나 자신들을 구하러 온 교단이나 길자이 가의 셔틀이 아닌지 목을 길게 빼고 공중을 올려보았다. 하지만 이번 소형 화물 셔틀엔 아무 표시도 없었다. 셔틀은 이들의 구명정을 발견한 듯 공중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냥 화물셔틀인가보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둘은 구명정에서 몸을 일으켜 손을 크게 저었다. [구해주겠다.]는 의사로 날개를 양쪽으로 흔들어 보이고는 줄을 내리기 시작했다. 물라와 바드 종장 둘 다 내륙 사막 출신이라 수영은 못 하지만 구명정에 있는 조끼를 걸치고 물에 뛰어들어 줄이 있는 곳으로 허우적거리며 움직였다.
“내가 먼저야!”
줄을 먼저 잡은 물라를 바드 종장이 버럭 화를 내며 물 속으로 쑤셔 넣고 줄을 붙들었다. 하지만 물라도 지지 않고 그를 확 밀어내고 다시 줄을 잡았다. 마구 몸싸움을 벌이던 둘 중 결국 바드 종장이 먼저 줄을 잡고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 그때, 막 줄을 붙들고 잡아당긴 이들의 머리 위에 갑자기 악취와 비린내가 풍기는 끈적한 액체가 확 쏟아져 내렸다.
“뭐야, 피 아냐?”
당황한 바드 종장이 손에서 냄새를 맡아보고는 기겁을 했다. 셔틀은 늘어뜨렸던 줄을 도로 물에 내동댕이치고는 이들을 놓아둔 채 방향을 돌려 도로 멀어져갔다.
“뭐야, 저놈, 우리 놀린 거야?”
물에 둥둥 뜬 물라와 바드 종장이 멀어지는 셔틀을 보며 울부짖었다. 셔틀은 캐빈 문을 열고는 물 위를 스치듯이 날며 무언가 큰 덩어리 두세 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고도를 높여 멀리 사라져버렸다.
유일한 살 길이던 구명정을 버리고 나온 그들은 이제 망망대해에 그냥 떠 있을 뿐이었다. 구명정은 이미 멀리 떠내려가 어둠 속에서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악취를 내는 핏물과 정체모를 썩은 내장이 온통 둥둥 떠다녀 숨도 쉬기 힘들었다.
“염병할! 어떤 셔틀인지 돌아가서 찾기만 하면……!!!”
멀어지는 셔틀을 향해 고함을 지르던 바드 종장은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리를 툭 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가 찼냐?”
바드는 물라에게 버럭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다시 보니 물라는 거의 5척 가까이 떨어져 있어 그를 찰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무언지는 몰라도, 둘은 본능적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그때 이번엔 물라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물 속에서 버둥거렸다.
“뭐가 날 쳤어! 젠장!! 이게 뭐야!”
물라의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로 코앞에 있던 바드가 짧은 웁 소리만 남긴 채 물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 버렸다.
“으익!”
공포에 질린 물라는 그대로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거친 물보라 소리가 나더니 바드의 찢어지는 비명이 어두운 밤바다를 끔찍하게 울렸다. 대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겐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가는 것 외엔 다른 길이 없었다. 뒤이어 다시 큰 물보라 소리가 들리더니 바드의 마지막 절규도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난 안 죽어! 난 안 죽어! 씨발, 저게 뭔지는 몰라도!!!”
물라가 마구 헤엄을 치며 절반 울음, 절반 비명을 질렀다. 언젠가 아버지 헤크마를 죽이려 했다가 실패하고 바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을 때처럼, 이번에도 도망이 유일한 살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번은 자신의 운이 그때만큼 좋지 않음을 몇 초 이내에 깨달았다.
“우읍!”
누군가 다리를 붙드는 것 같은 느낌에 그는 헤엄을 멈추고 물에서 몸부림을 쳤다. 고통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심코 그곳을 짚었을 때, 그는 자신의 허벅지 아래가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버둥대는 그의 몸통을 이번엔 무언가가 엄청나게 육중한 힘으로 들이받았다. 물 밖으로 확 밀려났다가 그대로 곤두박질친 그는 크고 시커먼 그림자가 자신의 눈앞으로 덮쳐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살아서 보는 마지막 세상 풍경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카이! 아메스! 어디 있느냐!”
물에 빠진 페로가 사방을 둘러보며 고함을 질렀다. 물 위는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 침몰하는 배에서 나온 수많은 파편과 쓰레기들로 아수라장이었다. 킵에게 안긴 카이가 멀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다룬이 맡은 아메스가 할룩스를 켜서 흔들고 있었다.
“다히르 공! 모투바 경! 알리 경은!”
페로가 크게 소리를 질러 그들 하나하나의 안전을 확인했다. 도망친 세닌을 역이용하고 자신의 결혼식을 빙자한 이번 계략은 침몰하는 길자이 가의 유람선과 함께 절정을 맞고 있었다.
페로 수하들의 손에 안전장치가 잘리면서 구명정 한 번 내려 보지 못한 채 반토막이 난 배는 잠시 전의 화려한 자태는 온데간데없이 흉물이 되어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물살에 몇 명이 함께 휩쓸려 들어갔다가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고, 배의 선창이나 고립된 선실에 있던 길자이 가의 선원들도 배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많이 죽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30여년 전 코리온이 수행했던 숙청과는 달리, 페로는 황실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타르서스 호족들을 성공적으로 분열시켰고, 물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 온 수백의 타르서스 호족들을 망망대해 먼 바닷물 속에 ‘깔끔하게’ 수장시켜버렸다. 이제 저들, 아니 정확히는 저들의 유족들은 이번 일의 책임을 놓고 자기들끼리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며 싸우게 될 터였다.
페로는 이번에 꼭 살려야 할 사람들에게서, 혹은 그들을 맡은 가디언들에게서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카이! 추워도 그대로 있어라! 내가 갈 테니!”
페로는 차가운 물 속을 가로질러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미리 옷 속에 구명복을 입고 준비를 하고 있던 페로와 황실 일행은 연회장에 있던 호족들이 구명정을 찾아 몰린 배의 후미 대신 뱃머리 쪽으로 도망을 쳐서 물에 뛰어들었다. 하심을 비롯한 황실 일행들은 ‘실종된 비빈과 황자들 수색’을 핑계로 배에 태워 미리 내보내 놓았고, 배에서 그가 꼭 살려야 할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페로의 가디언들은 중요 인물 하나씩을 맡았고, 혼란의 와중에 혹 몇 명이 ‘운 없이’ 고기밥이 되었다고 해도 이젠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제일 걱정한 건 카이와 아메스의 안전,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맘에 이 계획을 끝까지 알리지 않은 다히르 공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붕어 후, 황자들을 죽이고 페로를 황제로 세우는 계략에 앞장섰던 자들에겐 황제가 하임달로의 출발 직전, 개척일 행사장에서 페로에게 넘겨주었던 문서가 남겨져 있었다. 그 문서를 본 순간 페로의 수하들은 파랗게 질려 흉계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내 너희의 흉계를 이미 알고 있으니, 이번에 출정해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 반성하는지를 지켜보며 너희를 어찌 처리할지 고려할 것이다. -
카이에게 헤엄쳐가는 페로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로! 페로!”
페로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가 ‘제일 먼저 챙겨야 했을’ 여자가 그곳에서 물통을 껴안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페로는 가디언 중 한 명에게 알리야를 맡겨놓았지만 가디언이 사고 와중에 놓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던 것인지 그는 혼자 물살에 흔들리며 페로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페로는 얼른 방향을 돌려 이제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아내가 된 그 여자에게 향했다.
“죽는 줄 알았어요!”
물통을 껴안은 채 거의 탈진해가던 알리야가 페로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물에 빠져죽는다는 공포 속에서 아무 생각도 못 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던 그는 페로의 가슴에 기대어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 초 후, 그는 페로가 옷 안에 미리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더듬으며 천천히 눈을 치켜떴다.
“설마 알고……있었나요?”
물에 흠뻑 젖은 페로는 거친 물 속에서 알리야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알리야가 버둥거리려는 것을 페로가 다시 덥석 붙들었다.
“당신은 길자이 가 딸이 카이를 죽이려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 피장파장이요.”
그 한 마디에 알리야의 거친 저항이 딱 멈추었다. 정체가 드러난 것을 그제야 알게 된 알리야가 이번엔 그의 손을 떨쳐내려 했지만 이 덩치 큰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황제에게 가짜 사제의 키를 넘긴 것이 먼저니 당신 쪽의 빚이 조금 더 많겠군.”
페로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악마처럼 웃었다.
“당신이 첩자라는 걸 알면서도 결혼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소? 이 거창한 연극을 연출하려는 것 말고.”
페로는 벌벌 떨고 있는 알리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반역을 저지른 배우자는 황실에 넘기지 않고 종장인 내 손으로 직접 죽여버릴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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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드 종장, 물라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는 부운~~~ 한손 들고 두발도 다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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