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66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
.
.
“총리 쪽은 그럭저럭 해결되고 있다는 것 같다.”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은 가디언 시로가 할룩스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그와 이번 작전의 지휘부는 문제의 바지선이 보이는 예인선에서 표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데리고 나온 건 친위군 가디언여단의 가디언 1천과 자칭 ‘시라즈 여단’이라는 낯선 가디언들 5백 명이었다. 사실 그는 이 정체불명의 병력이 대체 뭘 하는 놈들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7년 전의 출혈열 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후배 가디언 타크마를 힐끔 돌아보았다. 원래부터 마르고 호리호리한 몸이었지만 그새 더 까맣게 그을리고 몸이 단단해진 것 같았다.
“저놈들 30살도 안 되었다며 제대로 싸울 줄이나 아는 거냐?”
“황상께서 신뢰하시는 이유를 알게 되실 겁니다.”
타크마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시로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가 크테시폰을 직격하는 이 중요한 작전에서 휘하의 가디언부대와 함께 이 낯선 부대를 데려온 것도 황제에게서 ‘교단 수뇌부를 상대할 때는 이놈들을 투입해라.’라는, 하임달에서 막 도착한 황제의 특명 때문이었다.
“그래, 신뢰도 좋은데 꼭 느낌이 우리같이 우직한 가디언들이 아니고 교단 광신도 헤네티 놈들 같아.”
“정확히 보셨군요.”
타크마의 대답에 지레 놀란 시로가 다시 눈을 흘겼다. 뭐라 대꾸하려던 그는 예인선 쪽에서 들려온 보고에 얼른 망원경을 눈에 가져갔다. ‘시라즈 병사’들을 가득 태운 예인선 십여 척이 인화물질을 가득 실은 폐선을 바지선 쪽으로 끌고가는 중이었다.
“저게 크테시폰이라고?”
시로는 눈앞에서 크테시폰을 빤히 보면서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배나 기계 쪽에는 문외한인 그가 언뜻 보기에 앞에 보이는 육중한 금속제 구조물은 그저 약간 특이한 모양의 해양 플랜트에 불과했다. 저것이 어떻게 크테시폰 궁인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나저나…….”
시로는 타크마가 끌고 온 이동의자에 말없이 앉아 망원경을 줄곧 눈에 대고 있는 한 사람을 힐끔 쳐다보았지만 담요와 망토로 얼굴 위를 온통 가리고 있어 여자라는 것 외엔 누군지 제대로 보이지를 않았다. 그저 이자에게서 느껴지는 약냄새와 피 냄새에서 무언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뿐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타크마의 뜬금없는 대답에 시로가 화들짝 놀라 다시 이 후배를 돌아보았다.
“뭘 알아?”
시로의 물음에 타크마가 대답 대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분 말씀이 저들이 눈치를 챈 것 같답니다. 예인선에 최대한 서두르라고 하십시오.”
“아직은 속도가 덜 붙어 너무 느릴 텐데?”
시로는 정확히 어찌된 건지 아직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일단은 그의 말대로 할룩스에 대고 지시를 수정했다.
“들통 난 것 같다. 괜히 주변 돌지 말고 그냥 들입다 갖다 붙여.”
시로의 새 지시를 받은 십여 척의 예인선은 엔진에 최대한 속도를 붙여 그 미심쩍은 바지선의 측면으로 바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바지선, 아니, 정확히는 바지선 위에 실린 정체불명의 거대한 기계장치에서 일순간 번쩍거리며 불이 확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허어, 저거였어?”
시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테시폰의 메인블록을 감싸던 금속제 비계와 작업대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그 안에 교묘하게 감춰져있던 수송선, 혹은 여객선 같기도 한 거대한 기체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저들도 돌진해오는 폐선을 피해 긴급 이륙을 시도하는 듯했다. 구조물이 무너지자 안에서 작업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크테시폰과 바지선을 연결하는 거대한 철제 조인트를 풀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망 못 가게 해!”
마음이 급해진 시로가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엔진을 최대로 돌리며 가속하고 있는 예인선이나 엔진도 죽어 멍텅구리가 된 폐선의 속도가 빨라지는 건 아니었다. 시로는 옆의 이동의자에 앉은 여자의 손등에 핏줄이 확 곤두서는 것을 보았다. 이자도 무언가 크게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젠장 너무 느려.”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줄을 풉니다!”
예인선의 선원들이 폐선을 끌고 오던 굵은 와이어로프를 풀고 옆으로 방향을 급격히 돌렸다. 십여 척의 예인선이 크테시폰의 바지선 코앞에서 일제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물 위에 길고 흰 물보라 자국을 길게 남겼다.
“충돌합니다!”
예인선을 모는 선장이 외쳤다. 예인선과 떨어진 후, 관성으로 물살을 가르며 돌진한 폐선이 육중한 진동음을 사방으로 내며 크테시폰을 받치고 있던 바지선의 오른쪽 측면을 거세게 들이받았다. 그때까지도 조인트를 풀고 있던 작업자들 중 몇이 충격에 물에 빠져 나동그라졌고, 폐선에 받친 바지선 측면이 우그러지며 거대한 불꽃이 공중으로 확 치솟아 올랐다.
“어떻게 된 거냐!”
짙은 연기 때문에 현장을 확인하기 어려워진 시로가 급히 물었지만 폐선은 바지선 옆면을 약간 먹어 들어간 상태에서 더 이상의 손상을 입히지 못했다. 예인선으로 가속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보니 방금 이 여자의 말대로 폐선의 충돌 속도가 너무 느렸다.
“젠장, 크테시폰인지 뭐시긴지는 멀쩡하잖아!”
시로가 분통을 터뜨렸다. 바지선의 폭이 크테시폰보다 조금 넓어 폐선은 크테시폰까지는 닿지 못했고, 불꽃은 바지선 측면과 물 위에서만 맹렬히 타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불꽃은 크테시폰에 직접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도리어 예인선에 탄 시라즈의 병력이 크테시폰에 접근하는 것만 가로막고 있었다.
“놈들 배가 가라앉는 거냐?”
시로의 이번 물음도 별 의미가 없었다. 오른쪽이 부서진 바지선이 기우뚱하며 한쪽이 침몰하기 시작했지만 격벽 덕분에 일부만 주저앉은 상태에서 한 번 출렁 했을 뿐이었다.
“다른 쪽으로 돌아서라도 최대한 빨리 놈들이 못 달아나게 해!”
시로가 핏대를 높였다. 시라즈의 X 전사들을 가득 실은 예인선은 불타고 있는 바지선의 우현을 빙 돌아 주변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각 예인선에는 자기와이어 장치가 실려 있지만 거대한 엔진을 단 대형수송선이나 보안장치가 잘 된 대형선박에는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았다.
“안되겠다, 자폭셔틀 동원해!”
시로의 말이 막 떨어진 순간, 크테시폰은 블록 중 하나를 침몰하는 바지선에 남겨둔 채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적의 수뇌부를 코앞에 두고 그대로 놓칠 판이었다. 서둘러 달려온 5백 명의 시라즈 X 전사들이 우습게 된 상황이었다. 이제 저것을 잡는 방법은 마지막 수단으로 준비해 놓은 친위군 포병대의 자폭셔틀 뿐이었다.
“조준! 조준해!
항구의 등대 주변에서 대기하던 수십 대의 포병대 자폭셔틀이 막 공중을 겨눈 순간, 크테시폰의 육중한 선체는 바다나 사막이 아닌, 수에니 시가지를 향해 선수를 돌리고 가속하기 시작했다.
“자폭셔틀 조준 완료했습니다!”
포병대 지휘관의 고함에 시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크테시폰은 수백만의 인구가 삶의 둥지를 틀고 있는 수에니 해안의 다닥다닥 밀집한 주택가와 상업지구에 막 접어들고 있었다.
“잠깐! 잠깐! 발사 중지!”
시로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순간, 타크마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휙 돌아보았다.
“지금 쏘아야 합니다!”
“미쳤냐! 지금 저게 추락하면 수에니 시가지가 불바다가 돼!”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당연히 문제지! 잘못되면 수천 수만이 죽는다고!”
시로가 타크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항상 정 많고 인명을 중시하는 시로에겐 이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항구를 떠난 크테시폰은 수에니 북쪽 해안선을 따라 길게 난 인구 밀집지를 정확히 따라서 공중으로 가속하기 시작했다. 예인선에 실린 대공 자기와이어 장치가 최대한의 출력을 냈지만 수송선은 그를 비웃듯 고도와 속도를 높여갔다.
“이런 젠장! 다 놓치겠습니다!!!”
허탕을 친 타크마가 분통을 터뜨리며 자리에 꿇어앉았지만 결정권을 쥔 시로는 끝내 자폭셔틀을 출격시키지 않았다. 교단의 마구스들과 고위 신관, 코런덤의 본부와 재산을 실은 거대한 크테시폰 궁은 지켜보는 황제의 친위군들을 놀리며 그대로 공중으로 멀어져갔다.
바다에서 구조된 페로가 이번 작전 지휘본부였던 항구의 한 버려진 창고의 도착했을 때, 크테시폰을 놓치고 허탕을 친 친위군은 이미 현장에서 깨끗이 철수하고 난 후였다. 선박시험장에서 있은 폐선과 바지선과의 충돌은 ‘예인선의 실수’로 인한 사고로 발표되었고, 친위군이 다녀간 흔적은 채 10여 분이 지나지 않아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런 깔끔한 마무리가 페로의 분노를 덜어준 건 아니었다. 그는 코앞에서 크테시폰을 놓친 시로를 앞에 놓고 분을 참지 못해 벌벌 떨고 있었다. 불릿에서 떨어지며 다친 어깨와 목에 보조대를 댄 페로는 몸만 성했다면 당장 달려들어 주먹이라도 휘둘렀을 기세였다.
“고작 타르서스의 저 쥐새끼들 살리려고 놈들 본거지를 코앞에서 놔 줬다고?”
페로의 추궁에도 시로는 고개를 꼿꼿이 든 채 담담히 대답했다.
“타르서스의 쥐새끼들이 아니고 우리가 보호해야 할 제국 시민들입니다.”
“네가 놓친 적군이 얼마나 많은 다른 선량한 제국 시민을 죽일지는 생각도 안 했는가! 군인이라는 것도 잊었나!”
“군인이기에 선량한 시민들을 지킵니다. 친위군 대장군으로서 제 행위에 대한 평가는 황상께서 내리실 겁니다. 총리 각하가 아니시고요.”
시로가 페로에게 그의 한계를 상기시키며 딱 잘라 말했다. 그의 저항에 페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실제 페로에겐 황제의 직속군인 친위군의 무장을 처벌할 권리가 없었다.
‘저러니 전에도 베흔의 눈 밖에 났었지.’
할 말이 막혀버린 페로가 벌떡 일어나 창고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이번 작전은 그간 사이가 좋지 못했던 보안국과 첫 번째 공동작전이었다. 보안국에선 얼마 전 그에게서 도망친 세닌이 교단의 대신관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과, 아마도 타르서스 호족들과의 다리를 놓았으리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아마도 수에니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는 사실도 전해주었다. 물론 그 정보가 생포한 마구스 바에자에게서 나왔다는 것까지는 아직 그도 알지 못했다.
세닌이 자신의 비밀 프로젝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그는 자신의 결혼식과 카이의 약혼식, 비빈과 황자들의 실종사건을 연출해 교단에 미끼를 던졌다. 예상대로 교단은 호족들을 이용해 장태자를 죽이려 했고, 페로는 모든 것을 길자이 가에 뒤집어씌우고 그들을 청소해버렸다.
그 일에 비하면 보안국과 친위군이 맡기로 한 크테시폰 궁 공략은 페로의 생각에 식은 죽 먹기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민간인 피해’ 때문에 놓쳐버렸으니 그에겐 이만저만 실망스런 결과가 아니었다.
“니미럴.”
어두운 한밤의 창고 건물 앞에 선 페로는 흠뻑 젖어버린 옷과 더럽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혼자 짜증을 냈다.
습관처럼 마구 욕을 뱉으려던 그는 항구에서 차를 타고 막 도착한 다른 일행의 모습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곳엔 딸 아메스 황후와 장태자 카이, 그리고 다른 차에서 내려선 네페티와 비빈들, 주페와 마하, 마리안이 서 있었다.
카렐을 인형처럼 쏙 빼닮은 마리안의 얼굴을 본 페로의 가슴이 갑자기 울컥해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냉담하게 말했다.
“무사히들 돌아왔군.”
“히이, 대공 아저씨도 수영하셨어요?”
마리안은 냉기가 줄줄 흐르는 이 사나이에게 쪼르르 달려와 다리에 와락 매달렸다.
“어, 다쳤어요? 내가 호오~ 해줄게요.”
마리안이 페로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페로가 성한 한 팔로 아이를 번쩍 안아들자 마리안이 작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꾹꾹 눌러주기 시작했다.
“우리도 수영하고 놀았는데. 배 많이 탔더니 배고파요. 맛있는 거 사줘요. 닭튀김 먹고 싶어요.”
어린 마리안의 애교에 페로는 방금 전 시로 때문에 화난 것도 일순간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운 채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즐거움은 길지 못했다.
“에비.”
페로에게 안긴 딸의 모습에 파랗게 질린 솔이 딸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솔은 딸이 무시무시한 페로의 곁에 다가갈 때마다 이렇게 매번 놀라고 두려워 경기를 하곤 했다.
“후우.”
페로는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내려놓았다. 내심 카렐을 꼭 닮은 이 인형같은 소녀와 놀아주고 싶은 맘이 간절했지만 항상 바람으로 끝나곤 했다. 이번에도 닭튀김이 아니고 닭농장이라도 통째로 사주고 싶었지만 결국 마리안은 페로에게서 떨어져 엄마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많이 다치셨나요?”
카이와 주페가 다가와 페로의 목과 어깨에 댄 보호대를 살폈다.
“별 것 아니다.”
페로가 태연한 척 어깨를 일부러 움직여 보였다. 살가운 마리안과는 비교할 것도 없는 무뚝뚝한 사내아이들이지만 어쨌든 그에겐 든든한 혈육들이었다. 물론 주페는 자신의 핏줄이 아닌 게 분명했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이전과 마찬가지로 페로에게 깍듯이 예절로 대하고 있었다.
“위험해서 불안불안했는데 다행입니다.”
카이가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를 페로에게 덮어주며 엷게 웃었다. 그때, 주페는 창고 한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건 뭐죠?”
주페가 가리킨 곳엔 검은 거적으로 싸여진 거대한 물건이 4명의 가디언들의 철통같은 감시를 받으며 놓여있었다. 하지만 안에 있는 것이 워낙 크다보니 제대로 가려지지 않은 초록색의 꼬리 부분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저건…….”
페로는 발현자의 총명한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이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무언가 생각을 한 그는 주페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네가 필요할 것 같다.”
주페는 이 엉뚱한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페로는 둘째인 그에게는 지금껏 무심하다 못해 차가운 편이었다. 거적을 빤히 쳐다보던 주페가 돌연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도움이 되어드려야죠.”
“…….”
페로는 거적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부르지도 않은 카이는 물론이고 마하와 마리안까지 졸졸 그 뒤를 따라왔다. 개코 마리안은 벌써부터 ‘우와아, 새 불릿이다~~’를 연발하며 강아지처럼 깡충깡충 앞서가고 있었다.
“거둬 봐라.”
페로의 명령에 가디언들이 큼직한 거적을 거둬냈다. 안에 있는 물건을 본 주페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거렸다.
“이건 어디서 나신 거죠?”
주페가 초록색 광택을 내뿜는 이 첨단기계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아래쪽이 물에 젖고 외부 에어백이 터져 있긴 해도 기체 자체는 놀랄 만큼 멀쩡했다.
“아트위야 마구스의 전용 불릿인 것 같다. 운 좋게 탈취했지.”
뒤따라온 네페티의 눈이 확 커졌다.
“아트위야 마구스는 현역 생리학자에 잔딕과 사제의 키를 책임지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자의 불릿이라면 뭔가 중요한 정보가 있지 않았습니까? 대공?”
페로는 무안한 얼굴로 불릿의 문을 열었다. 안쪽을 들여다본 순간, 일행의 입에서 일제히 탄식이 터져 나왔다. 멀쩡한 겉모양과는 달리 캐빈 내부는 온통 잿더미였다.
주페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빌어먹을 승무원 놈들이 뺏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더군. 부하들을 시켜 다 뒤졌는데 캐비넷이나 선반은 다 타버려서 이 따위 재밖에 안 남았어.”
사다리를 걸고 엉망에 된 실내에 오른 페로는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좌석을 괜히 뻥 걷어찼다. 뒤따라 오른 주페는 도리어 차분한 모습으로 손상된 부분들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가 실내를 차분히 뒤지는 모습에 개코 마리안도 오빠 흉내를 내어 여기저기 구석구석의 잿더미를 뒤지고 돌아다녔다.
페로는 10대 소년답지 않은 주페의 모습에 괜히 화가 치밀었지만 기분을 최대한 감추고 물었다.
“자료는 못 구했지만 이걸 고치기만 해도 나름 쓸모가…….”
“하임달까지 가실 거죠?”
주페가 능청맞게 물었다. 의표를 먼저 찌르는 소년의 당돌한 물음에 페로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가 서둘러 불릿을 고치려는 건 하임달까지의 워프루트가 완성되기 전에라도 그곳에 있는 황제에게 보급품과 정예 가디언을 몇 명이라도 더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페가 다시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조종은 당연히 제가 해야겠네요?”
살짝 웃음이 서린 소년의 눈빛에서 페로는 걸핏하면 자신을 놀리곤 하는 코리온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
“……그래……, 그래야겠지.”
페로는 이번에도 ‘져 줄’ 수밖에 없었다. 코리온의 곁에서 이 괴상망측한 셔틀의 수리를 함께 진행했던 것이 이 천재 소년이었고, 지금 상황에선 수리 경험이 있는 유일한 녀석이었다. 주페가 없이 이 물건을 수리한다면 보나마나 몇 달,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걸려도 불가능할지 모를 일이었다.
“가능하겠느냐?”
“오늘 밤중으로 손상된 부품을 파악해서 주문 들어가고 지난 불릿 수리에 들어갔던 기술자들 다시 수배해 보겠습니다.”
“기간은 어느 정도…….”
“15일 이내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종석의 손상을 확인하던 주페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15일’이라는 말에 페로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지금 황제령에서 하임달과의 삼각루트 완성은 13일 남았고, 남부와 하임달의 연결은 고작 열흘 남은 상태였다. 15일 후 완성이라면 애써 서둘러 봐야 별로 메리트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어쨌든 혹시 모르니 최선을 다해 봐라.”
페로의 말에 주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작 13살 소년의 단호하고 자신에 찬 태도에 페로는 저 소년이 정말로 자신의 핏줄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페로의 눈을 빤히 쳐다보던 주페가 갑자기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기뻐하신다면 손자로서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주페는 ‘손자’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었다. 순간 페로는 저 소년이 혹시 코리온처럼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소년의 표정은 코리온처럼 짓궂다기보다는 진지하고 선량했다.
“고맙다.”
페로는 카이에게 종종 그랬듯 주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해도, 이 소년이 자신을 저버릴 것 같지는 않다는 묘한 믿음이 들었다.
그때, 셔틀 뒤쪽에서 마리안이 재가 된 붙박이 선반 안에서 무언가 퉁퉁거리는 소리를 냈다. 워낙 몸이 작은 덕분이 어른은 못 들어가는 공간 안에서 혼자 재를 뒤지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탔다고 다 부수지는 마라.”
낙담한 페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때, 마리안이 선반 안쪽에서 반쯤 탄 합판을 휙 내던졌다.
“이 안에 뭐 있는 것 같아서 그랬는데요?”
페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제의 선반은 페로의 사람들이 이미 확인을 했던 곳이었다. 꼬마는 선반 안쪽을 휙 떼어 내던지고는 사람이 들어갈까 싶은 작은 공간에 그 작고 유연한 몸을 허리까지 쑥 집어넣었다. 불릿의 벽에 붙은 선반 내부는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깊었다.
“헤헤헤. 이건 안 탔어요.”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온통 새까매진 마리안이 다시 몇 장의 서류를 껴안고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줘 봐라.”
서류를 받아든 페로가 입가를 찡그렸다. 대충 20여장쯤 되는 것 같았다. 문서는 대단히 오래된 듯 잘못 손대면 바스러질 것처럼 낡은데다가 한쪽엔 불에 탄 흔적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번 불릿 화재로 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
페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문서 한 장을 넘기니 누군가 손으로 하나하나 쓴 문자가 보였지만 공용어는 당연히 아니고 고대어도, 바람어도 아니었다. 문자 자체도 낯선데다가 마구 흘겨 그린 신경이나 혈관의 스케치와 도표가 절반이 넘는 것이 무언가 실험 혹은 해부 기록 같기도 했다.
난감해진 페로는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카이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카이 역시 읽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카이는 머쓱한 얼굴로 서류를 천재 동생에게 다시 넘겼다. 하지만 주페 역시 눈만 휘둥그레졌다.
“이게 뭔지 혹시 알아?”
난감해진 주페는 옷이 더러워질까 조심조심하느라 제일 늦게 기어올라온 동생 마하를 돌아보았다. 깔끔쟁이 마하는 지난번 황제에게서 선물로 받은 빨간 구두에 재가 묻을까 까치발로 콩콩거리며 다가와 서류에 눈을 댔다.
“내가 이런 걸 어떻게 알아. 학장님께서 계시면 좋을 텐데.”
그때, 선반 안을 다 뒤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매진 마리안이 언니의 팔을 덥석 붙들고 작은 키로 발돋움을 해서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에익, 옷 더러워져.”
펄쩍 뛰는 마하에게 마리안이 능청맞게 웃어보였다.
“이거 코리온 당숙이랑 라스 아저씨가 해석하고 있던 글자 같은데.”
“움? 정말?”
동생을 밀어내려던 마하가 깜짝 놀랐다. 고향행성 문자를 해석하느라 잠도 못 자고 있다며 투덜대던 라스의 모습을 그도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마하와 마리안 주변에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럼 굉장히 중요한 문서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카이가 페로를 올려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럼 지금은 아무도 해석 못 한다는 말이잖나?”
페로가 버럭 짜증을 냈다. 코리온이 이곳에 없는 것이 이렇게 아쉬워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황제와 코리온이 있는 하임달과는 단문의 암호 통신밖에 못 하니 이 문서를 영상으로 전달하기도 불가능했다.
그때, 마하가 소리를 꽥 질렀다.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아졌다.
“이것 봐요.”
마하가 내보인 종이엔 막대 모양의 물체 스케치, 혹은 도면 비슷한 것과 부분부분 복잡한 설명이 사람의 신경망을 뜻하는 듯한 선과 함께 난잡하게 적혀 있었다. 비뚤비뚤 솜씨 없이 그린 그림이고 글씨를 못 읽기는 해도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보기는 충분했다.
창백해진 페로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염병할, 잔딕 수술기록이 왜 지금 나온 거야!”
페로는 온통 불에 타 재가 된 불릿 실내를 다시 돌아보았다.
“이걸 황상께 하루라도 빨리 전해야 할 것 같군요.”
처음 불릿에 들어왔을 때보다 표정이 훨씬 더 진지해진 주페가 부서진 의자를 힘으로 확 떼어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드린 말씀 수정하겠습니다. 남부보다 먼저 닿을 수 있게 고쳐보겠습니다. 당장 황궁 격납고로 보내주십시오.”
페로와 황실에게는 ―비록 고장은 났지만― 새 불릿과 뜻밖의 정보를 안긴 이 사건은 정치 9단 페로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작전이었다.
적도 수에니의 따뜻한 앞바다에서 있은 이번 침몰과 참사는 길자이 가의 종장 바드가 같은 타르서스 호족들을 몰살시키려 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황실은 의심에서 어렵지 않게 벗어났다. 33년 전 코리온의 손에 몰살당한 호족들과는 달리, 이번 사건에서 타르서스의 분노는 황실의 특혜를 따내기 위해 같은 타르서스 호족들의 목을 노린 야심찬 신흥 호족가 길자이 가문에 쏟아졌다.
이유야 어쨌든, 지도층인 보수 호족들이 또다시 몰살당하면서, 제국에서 가장 완고하고 폐쇄적인 호족체계를 유지하던 타르서스도 이제 진정한 제국의 일부가 되기 위한 개혁과 세대교체의 준비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
.
.
이쯤이면 이디나도, 페로도 장군멍군했습니다. ㅎㅎㅎ
다음 회부터는 다시 하임달로 컴백해 카렐 일행들이 아주 중요한 한판을 벌입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올레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