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67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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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니에서 도망친 이디나는 때마침 타르서스를 떠나는 초대형 벌크선에 편승해 어렵사리 황제령을 빠져나왔다. 온화한 태양과 초목이 있는 황제령을 뒤로하고 떠나며 그는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춥고 지독한 날씨와 빛도 없는 인공의 공간들, 비릿한 쇠 냄새로 가득한 고향 북부가 어딘지 그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앞으로 살 곳은 북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최소한 뱃속의 아이는 그런 곳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간 돌아가야지요.”
이디나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마구스들에게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아케메니아는 원래 우리 다하카르의 땅이니까.”
난생 처음 ‘진짜 적’의 공격을 겪어냈지만 그는 그리 놀라거나 패닉에 빠지기는 고사하고 얼굴에 더 오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크테시폰이 워프루트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 그는 공격받기 직전까지 있었던 상갑판에 부득불 다시 올라 다과상까지 차려놓고 마구스들을 불러 모았다.
“오랫동안 숨어만 다니시더니 옛 기상들까지 잊으신 겁니까?”
이디나는 다과상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놀란 가슴만 쓸어내리고 있는 나이 많은 마구스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 자리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건 바에자 하나뿐이었다.
“2시간 후면 하임달 워프루트를 나갑니다. 하임달 5번 행성은 다시 반나절을 더 가야 합니다.”
쿠마르가 들어와 알렸다. 시동도 아니고, 비서관이라기도 너무 어린 그는 조금 전 폐선의 충돌로 복도에서 한바탕 굴러 그새 눈이 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외진 곳이라는 뜻이잖아.”
이디나가 아끼던 불릿을 잃고 죽상이 되어 있는 아트위야에게 억지웃음을 보였다.
“그대가 떠났던 땅으로 돌아가는 거요. 얼굴 좀 펴시오. 아직 시제품 여분이 좀 있잖소. 내부는 다 태워서 이젠 못쓰게 됐다면서요?”
“거기서 기다리다가 루트가 뚫리면 하임달 9번으로 가시겠죠?”
아트위야가 마지못해 말을 돌렸다.
“물론, 가서 황금탑을 내 눈으로 봐야 하지 않겠소?”
“황제의 몰락도 봐야 하고요.”
항상 분위기 메이커였던 바에자가 잔을 치켜들었다. 이디나도 마지못해 잔을 들긴 했지만 어딘지 속이 편치는 않았다. 뒤따라 잔을 든 아트위야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남부 놈들이 밥값을 해 줘야 하는데……, 능력 있어 보이는 놈들이 지난 제위전쟁 때보다 적은 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그깟 놈들 어차피 쓰고 버릴 거 능력 있어 뭐 하겠소. 딱 제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을 정도면 된 거지. 덕택에 우리가 직접 나설 수 있게 되었지 않소.”
땅딸보 가르시바 마구스가 분위기라도 맞춰주려 냉큼 대답했다. 그리고는 옆에 앉아있는 살름에게 잔을 들어보였다.
“듣자하니 딸 하페즈가 남부제후군에서 한 자리 맡았다고요?”
“카나르 그놈이 애원을 해서 5만의 경보병대를 맡기로 했지요. 워낙 오래 전장을 떠나 있다보니 칼 쓰는 법까지 다 잊어버렸다고 그 애가 먼저 하고 싶다고 나서더군요. 보아하니 포로였을 때 황제에게 뭔가 한 소리 들은 것 같던데.”
“네코 그 친구도 중장기병대에서 한 자리 맡았다던데, 인간의 지휘를 받는 게 속이 팍팍 탈지도 모르겠군요.”
“예르마크 놈이 저쪽으로 가 버렸으니 누구라도 맡긴 해야지.”
“아참, 알리야 그 여자는 남부 마누엘에게 보냈고요?”
아트위야가 벽에 걸린 지도를 힐끔 쳐다보며 끼어들었다. 그에겐 불릿을 잃었다는 아쉬움과 페로와 알리야의 결혼식이 쇼였다는 소식 사이에서 혼자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 사이를 오가는 중이었다. 이디나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원래 마누엘에게 줄 여자였으니.”
“하, 마구스와 제후군의 연합군이라, 거 참 모양새 한 번 재밌네.”
빈정거리는 가르시바에게 이디나가 웃으며 말했다.
“워낙 못나게 구니 우리가 직접 능력발휘 좀 해 줘야지요. 기왕이면 가르시바께서도 전장에 나가셔서 한동안 못 쓴 능력발휘 좀 해 주시면 좋겠네요.”
“그럴까요?”
가르시바가 킬킬거리며 막 마구스들의 다과상을 정리하고는 ‘왜 이런 일만 시키냐’며 툴툴대고 나가는 애꿎은 쿠마르를 힐끔 돌아보았다.
“아쿠!”
아무 생각 없이 나가던 쿠마르는 문도 없는 벽에 그대로 머리를 들이받고 바닥에 큰대자로 쭉 뻗어버렸다.
이런저런 분란 속에서도, 원정을 코앞에 둔 남부제후군은 비엔에 ‘보란 듯’ 집결하는 중이었다. 이제 다른 지역에서도 남부가 조만간 어딘가 침공하리라는 것은 다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과연 어디를 치려고 60만 대군을 모으고 있느냐였다.
몇몇은 기근으로 기진맥진해진 동부와 서부를 치려는 것이라고 넘겨짚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은 동맹제후의 도움을 받기 힘들게 된 황제령을 치려한다고도 생각했지만 정작 이들의 진짜 관심사인 하임달은 후보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남부의 삼각루트 개통에 관해선 아직 알려진 것이 없었고, 안다 해도 표면적으론 ‘먹을 것 하나도 없는’ 쓰레기 개척지인 하임달 9번을 침공할 이유도 없어보였다.
남부의 탈라스 침략의 이면에는 비엔-하임달 삼각루트 중간에 수베르-탈라스라는 중간 기착지가 있다는 전략적인 계산이 숨어있었다. 일단 하임달을 장악하고 그곳의 통제소―지금은 황제가 차지하고 있는―까지 차지하면 그곳을 열어 남부 단독으로 서부와 북부, 동부 모두를 한 번에 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남부의 하임달 침공계획은 철저히 위장된 듯 보이는 가운데 이렇게 차근차근 진행되어갔다.
그런데 출정이 3, 4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한 가지가 속을 썩이는 중이었다.
“이보세요, 실리페 태후 자료는 우리도 봤단 말입니다.”
플라칼, 델루지, 호지, 세닉 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마누엘이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이런 반응에 카나르 공이 낯을 찡그렸다. 마누엘이 말하는 ‘실리페 태후 파일’은 [향후 100년간 하임달의 경제가치 분석]이라는 제목이 붙은 보안국의 기밀문서였다. 이틀 전, 실리페 태후가 몇몇 남부제후들에게 300만 다리크라는 거액을 받고 못 이기는 척 팔아넘긴 그 자료에는 10년 이내로 하임달에 본격적인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전제로, 100년 후면 남부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억 이상의 인구를 정착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장밋빛 청사진이 제시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하임달 지분에 광분하던 남부제후들은 그곳에서도 알짜배기 땅을 선점하겠다는 생각에 하임달의 과거 자료를 모으고 이번 원정군에도 최대한 힘 있는 사람을 많이 넣으려 눈이 벌개져 있었다.
“듣자하니 이번 지휘부에 마구스들까지 영입하셨다고요?”
마누엘이 카나르를 노려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카나르 공이 밥그릇 싸움을 염려하고 있는 제후들에게 서둘러 둘러댔다.
“알고 보니 네코 마구스는 2차 혼란기 때 우리 가문 중장기병대에서 전사한 줄로 알았단 군단장이더군요. 하페즈라는 여자도 코메트에서 바에자 마구스의 참모 출신이었고. 모두 어느 한 쪽에 편향된 인물들은 아니니 걱정들 접어두시오.”
이번에 카나르가 원정군 지휘부에 마구스를 영입한 건 트라카 교단에서 자라며 마구스들과도 나름 친분을 두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십분 활용한 것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마구스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공을 돌봐줬던 건 하마피타가 아니고 하마타가 아니었던가요?”
마누엘의 빈정거림에 카나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굳이 따지자면 카나르, 아니 플라칼 가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일족을 보호하고 키워 준 수나와 트라카 교단을 배신하는 셈이었다. 마누엘이 속이 편치 못한 카나르를 계속 긁어댔다.
“우리 가문이야 전통적으로 하마피타의 수호자였고……그자들을 죽이지 않고 풀어줬던 것도 제 형님인 테번이셨죠. 혹 그자들을 통해 하임달에서 무슨 득을 보려 하신다면……일찌감치 접으시는 게 현명하실 겁니다.”
속내를 들킨 카나르의 표정이 더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고향행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구스들을 이용해 하임달 공략 동안 알짜배기 지역들에 플라칼 가의 깃발을 미리 꽂아놓을 참이었다. 그가 현역 무장들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네코와 하페즈를 중장기병대와 보병대의 요직으로 등용한 이유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교단 마구스들, 특히나 하마피타들을 잘 아는 마누엘에겐 나름 비장의 수가 있었다.
“공께서 마구스와 마구스 후계자를 저희와 상의도 없이 둘이나 넣으셨으니 제게도 한 자리 내 주시죠.”
카나르 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핵심 요직은 아닙니다. 아트위야 마구스가 그곳을 잘 아시니 제 고문으로 모셔갈까 합니다.”
“점입가경이군.”
두 가문의 신경질적인 대결에 세닉 가의 이렌느 경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는 마누엘이 마구스들 중에서도 하임달 사정에 제일 밝은 아트위야에게 갖은 뇌물과 선물, 심지어 잘생긴 소년들까지 바쳐가며 자기 편으로 만들려 광분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마타 마구스 수나의 딸인 이렌느는 하마피타의 마구스들을 이 싸움에 끼워주는 것에 처음부터 반대를 했었지만 아들에 이어 이번엔 친동생까지 가문에 등을 돌린 면목 없는 상황에서 차마 상위제후들 앞에서 함부로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었다.
“마구스들 끼워주고 말고는 가문 내에서 알아서들 결정하시고, 원정군 구성부터 좀 끝냅시다. 대체 누가 가실 겁니까?”
이렌느 경이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는 두 가문들에게 버럭 짜증을 냈다. 카나르 공과 마누엘은 그제야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각자 가문 사람들과 무언가 귀엣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임달 진주를 5일 남짓 앞두고 남부연합군은 ‘누가 남고 누가 갈지’를 놓고 여전히 홍역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남부제후들이 [하임달 지분]을 놓고 안 보이는 경쟁이 붙어있는 와중에 남부에 남아 ‘때깔 안 나는’ 집안단속이나 하거나, 아니면 ‘이미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린’ 칼릴에 가려고 드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30여년 전 제위전쟁 때만 해도 최고제후 제롬의 아내였고 행정전문가였던 팔방미인 오르테가 남부에 남아 집안단속을 맡았었지만 이번엔 그런 역할을 맡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델루지 가의 경제전문가 하디가 그나마 적임자지만 플라칼 가는 2제후에게 그 역할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델루지 가에서는 하디 파벌에 대한 경계를 바싹 세우고 있는 마누엘 부녀의 반대로 양쪽 모두에서 뭇매를 맞아 성사되지 못했다.
게다가 칼릴 역시 골칫거리였다. 전황을 최대한 ‘더럽고 짜증나게’ 만들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은 반란군들은 전장을 마구잡이로 늘리고, 때로는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삼는, 누가 봐도 떳떳치 못한 짓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며 후방을 최대한 정리하고 떠나야 하는 남부의 속을 팍팍 긁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칼릴의 진압군을 지휘했던 헤즈와 클리멘트 모두 하임달 공략군에 참여하길 원했고, 플라칼 가에서도 종장 카나르 공과 헤즈 모두 하임달에 가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원대로 다 해주었다가는 칼릴의 사태도 엉망이 되고, 정작 남부 본토는 완전히 빈집이 되어버릴 판이었다.
“어쨌든 누군가는 본토를 지키고 칼릴 문제도 맡아야 합니다.”
이렌느의 재촉에 카나르 공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에서는 종장인 저와 후계자인 헤즈가 둘 다 가는 대신 무게감 있는 가문 원로께서 남으실 예정입니다.”
결국 둘 다 가겠다는 고집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허어, 헤즈 후계자의 빈 자리를 맞춘다니 정말 무거운 분이신가 보군요.”
마누엘의 농담에 몇몇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고도비만 헤즈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우리 가문에선 안드레이 플라칼 경께서 여기 남아 군사 문제를 처리하실 겁니다. 사소한 행정 문제는 어차피 가문 행정관들이 처리할 것이고요.”
델루지 가 사람들 사이에서 ‘그럼 그렇지’ 하는 비웃음이 군데군데 새어나왔다. 종장 카나르의 숙부인 노장 안드레이 경은 평생을 일선 군단장만 쳇바퀴처럼 돌고 돌아 온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칼릴의 반란 무렵까지 칼릴지역 사령관으로 나름 정치경력도 있었지만 반란과 동시에 본토로 소환된 것에서 보이듯 정치 감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럼 델루지 가는 어찌할 겁니까? 델루지 가도 우리 남부의 경제 중심지인 5번 행성을 지켜야 할 것 아니요?”
카나르는 차마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최고제후가 된지 30년이 더 지났어도 여전히 비엔의 사실상 중심지는 델루지 가가 차지하고 있는 5번 행성이었다. 그의 가문이 가지고 있는 6번 행성에선 예리반 주와 타이마르 주 정도를 빼면 내놓을만한 비옥한 지역을 찾기 어려웠다.
마누엘은 대답 대신, 품에서 봉투에 든 문서 한 무더기를 꺼내 자리에 모인 손님들 사이에 하나씩 돌렸다. 문서의 제목을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갑자기 뭔 바람이…….”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곳엔 [결혼식 초청장]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특히나 마누엘과 클리멘트 부녀의 바로 뒷줄에 있던 하디 델루지의 표정이 제일 심각해졌다.
“가문 원로회의 승인도 없이 웬 결혼입니까?”
“원로회장이 나인데 웬 승인?”
마누엘이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홱 저었다.
계속 목소리를 높이려던 하디는 초청장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초청장을 열어 본 사람들 대부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카나르 공은 흥분했는지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대체 이건…….”
“허, 이 여자는 요즘 결혼복이 터졌군요. 지난번 결혼이 며칠 전이죠?”
이렌느 경까지도 빈정거렸다.
“내 남의 가문 결혼에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알리야 이 여자에게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수배령을 내렸다는 건 알고 하신 것이고요?”
“어차피 황실이나 우리나 서로서로 속내를 다 아는데 이 결혼식으로 황실에 개망신 한 번 먹여주는 것도 재밌지 않겠소. 어차피 이제 며칠 후면 하임달에 진주하며 자동 선전포고가 될 텐데. 오늘 밤이니 어디 가지들 마시고 와서 얼굴 한 번씩 비춰 주시구려.”
마누엘이 자신과 알리야 아야톨라 부인의 이름이 적힌 초청장을 흔들며 여유만만하게, 특히나 카나르 공에게 능글맞게 웃었다.
황제령 주재 동부대사로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했던 알리야 부인은 결국 교단 첩자라는 정체가 들통 나면서 수에니에서 도망쳐 이번엔 남부로 거처를 옮겨 마누엘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덕분에 남부 제후들, 심지어 카나르까지도 내심 교단이 남부의 누구에게 그 절세미녀를 ‘선물로 줄까’ 내심 눈독을 들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마누엘이 이렇게까지 서둘러 혼례를 올리는 이유는 굳이 다른 자들에게 미녀를 빼앗길까 하는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결혼 후에 알리야가 내 정실부인 자격으로 비엔에 남아 가문의 행정 문제를 총괄할 겁니다. 조카 하디가 성심껏 도울 테고요.”
고민거리 하나를 해결한 마누엘이 낄낄거리는 모습을 뒷줄의 하디가 슬쩍 노려보고 있었다. 서자로 태어나 항상 남 뒤치다꺼리만 했던 그 사내는 이 기회에 내심 가문의 종권을 노리고 있을 테지만 이번 결혼으로 마누엘은 나름 회심의 일격을 날린 셈이었다.
“그리고……알리야 부인은 이미 내 아이를 뱃속에 갖고 있다오.”
마누엘의 갑작스런 선언에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서로 마주보았다. 호지 가의 종장 헬리노스 경이 이렌느 경에게 ‘저 남자 자식이 맞긴 한 거 같소?’라고 물었다가 그의 사나운 눈짓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마누엘의 선언에 입가를 살짝 찡그렸던 하디는 별 말 없이 초청장을 접어 품에 감추었다.
“그리고 우리 가문도 저와 딸 클리멘트가 다 갑니다.”
마누엘이 카나르 들으라는 듯 히죽거렸다.
“내 그 여자가 똑똑하다는 건 압니다만 언제부터 지역 사령관을 할 만큼 군대에도 능통했소?”
심통이 난 카나르 공이 괜히 마누엘에게 딴죽을 걸었다.
“놈들이 설마하니 비엔에 눈독을 들이는 바보짓이야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비엔 5번 행성은 단단히 지켜야 하지 않겠소? 가문 운영하는 건 여기 있는 하디 델루지 경으로도 충분하니 무장을 좀 찾아내란 말이요. 우리 가문의 안드레이 경 정도는 내놔야 우리가 안심하고 떠날 것 아니요?”
“아아, 그건 걱정 마시오, 그 문제는 내 똑똑한 약혼녀의 제안으로 다 해결됐으니까.”
마누엘이 낄낄거리며 재차 초청장을 흔들어댔다.
“이그나토 가에서 도망친 테나스 경이 얼마 전 아라무트에서 전투를 치르고 카 무슨 성 하나를 빼앗았다죠? 7제후 레즐린 가는 아예 제후 지위를 버리고 황제에게 영지를 바치겠다고 했고 말이죠.”
“아주 나쁜 선례가 됐지.”
제후들에겐 가장 듣기 괴로운 이야기에 분위기가 갑자기 푹 가라앉았다. 아라무트의 카히나 성에서 서부 7제후 역할을 하고 있던 아샤드 레즐린 경은 자신을 따르는 ‘검은 사신부대’ 크바르나와 함께 얼마 전 제후의 지위를 버리고 ―이미 빼앗긴 카히나 성을 포함한―자신의 영지 모두를 황제에게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황제는 아샤드에게 친위군의 대장군 지위를 내렸고, 이제 카히나 성을 포함한 그 일대는 공식적으로는 황제령이 되었다. 그로서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제후가 스스로 지위를 버리고 황제에게 영지 전부를 통째로 바친 사례가 되었으니 제후들이 길길이 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차피 서류상이나 황제 땅이지 이 상황에 어디 되찾을 엄두나 내겠소?”
“뭐 듣자하니 황실에서 반격하겠다고 계속 공갈포만 쏘고 있는 것 같던데 암살교단 영향권이라 실제 파병은…….”
“황제만 그런 게 아니고 그 간덩이 크다는 테나스도 밖에 고개도 못 내밀고 있는 처량한 신세라지 않소.”
몇몇 사람들이 킬킬거렸다. 근위대 3천을 동원해 아샤드를 꺾고 카히나 성을 차지하며 잠시 승승장구했던 테나스 이그나토는 피다이 데이가 성을 한바탕 휘젓고 떠난 이후로 무서워서 바깥출입도 못한 채 카히나 성의 굴 안에만 은거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게다가 카히나 성과 주변 아라무트 일대가 이제 공식적으론 황제령에 속하게 되었으니 그곳을 되찾으려는 황실의 견제도 더 강력해질 터였다.
“어차피 황실이 지금 거길 반격할 처지도 아니죠. 교단에선 카히나 성을 이스마엘 가에 완전히 넘겨주고 테나스 이그나토 그자하고 얼마 전 페스트의 폭동에서 폭도들을 죽이고 복사한 좀비 전사들 5만을 주기로 했지요. 어차피 남부제후군 출신이고 우리 가문에서 40년이나 인질 생활을 하면서 가문 무장으로 경력도 쌓았으니 그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교단이 5만의 병력을 델루지 가에 준다고 했다고요?”
카나르 공이 겉으로는 그냥 놀라는 척만 했지만 속으론 교단이 델루지 가를 편애하는 듯한 느낌에 화가 벌컥 치밀었다. 그간 발바닥에 불이 나게 교단을 드나들며 비위를 맞춰 온 마누엘이 한몫, 아니 미녀 알리야까지 합치면 아주 대박을 건졌다는 게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카나르는 일단은 태연한 척 서류에 손을 가져갔다.
“그럼 이제 하임달 공략군 구성도 대충 정리가 된 거요?”
카나르 공이 수첩을 깨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처음 얘기된 대로 총사령관은 내가 맡겠소. 그리고 전반적인 운영과 지원을 맡은 참모장은 운영능력이 탁월한 이렌느 경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 같소. 대충 따져보니 하임달 원정군은 지원조직을 포함한 중장보병 20만, 경보병 5만, 기병 5만, 지원부대 5만까지 총 35만이 될 것 같소.”
역사상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원정에 호지 가 종장 헬리노스 경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번에 남부가 대폭 병력을 증강하면서 보병과 사역병만 50만에 육박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 중 비엔을 남아서 지킬 20만을 남겨두고 보병 30만에 기병 5만, 교단에서 데려올 근위대와 헤네티까지 따진다면 옛 하임달의 결전 당시 근위대-남부연합군을 합친 것보다 2배에 육박하는 병력이 투입되는 셈이었다.
사실 원래 계획은 교단 병력을 감안해 원정군을 20만 정도로 잡는 것이었지만 하임달 지분을 늘리려는 제후들의 물량공세에 얼떨결에 2배 가까이 늘어나버린 결과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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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에 하임달의 카렐이 나올뻔(?)했는데 지금 보니 다음편이 되겠네요. ^^;; 이번 편부터 슬슬 본격적인 대결 준비입니다.
이번에 알리야에게 녹아내린 마누엘 부녀는 하는 짓이 살짝 덜 밉지 않으신가요?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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