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68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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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르 공이 말을 이었다.
“제일 숫자가 많은 20만의 중장보병은 마누엘 경께서 맡아주시오. 중장보병대는 숫자가 숫자니 셋으로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1보병단은 헬리노스 호지 경이, 2보병단은 내 아들 헤즈가, 3보병단은 클리멘트 경이 맡아주시오.”
헤즈와 마누엘이 살짝 서로를 마주보았다. 둘 다 전형적인 보병 무장이고 내로라하는 베테랑들이었다. 카나르가 둘의 묘한 신경전을 중간에서 끊으며 말을 이었다.
“기병대는 전통적으로 세닉 가가 맡아왔으나 이번엔 일이 좀 꼬이게 되었으니…….”
카나르 공이 이렌느 경을 살짝 곁눈질했다. 항상 기병대를 맡아왔던 예르마크 경이 빠지면서 기병사령관을 맡을 사람이 애매해진 상황이었다. 그가 어렵사리 네코를 영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병대는 사령관인 내가 직접 이끌 참이요. 지휘관이 한 명쯤 더 필요하니 마구스 네코가 도와주기로 했소.”
“웬일로 기병대가 주인공이 됐군요.”
마누엘이 툴툴거렸다. 전통적으로 남부제후군은 보병이 주역이었고 기병은 항상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보병의 숫자가 그렇게 어마어마한데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기병을 맡겠다고 나선 상황이었다.
“어중이떠중이는 우리한테 다 떠넘기고.”
이번엔 3보병단장 클리멘트가 구시렁거렸다. 지금 이 시각에도 창밖에선 새로 모집한 신병들 훈련시키는 교관과 사관들의 고함이 시끄러웠다. 보병대의 절반 가까이가 [하임달 지분]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번갯불에 콩 볶듯 서둘러 모아들인 신병들이었다. 헤즈가 질세라 대꾸했다.
“허어, 그건 델루지 가에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소.”
“거기나 거기나.”
듣다 못한 참모장 이렌느 경이 다시 화를 냈다.
“신병들 꼴을 보니 말이 아니더만.”
이렌느 경의 신경질에 다른 제후들은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남부는 워낙 병력자원이 풍부해 여유만 주어진다면 학력이나 경력 등에 여러 조건을 붙여 질 좋은 신병을 모병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이번엔 단기간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머릿수만 늘리느라 각 지역 공무원들에 할당량을 주어 강제로 모아들였다보니 상당수는 기근을 피해 그저 먹을 것을 찾으러 모인 하층민 어중이떠중이들이었고,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잠들었다가 깨 보니 병영에 있었다는 주정뱅이들도, 혹은 형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끌고 온 범죄자들까지 뒤섞여 군대의 질이 말이 아니었다.
“어쨌든 사흘 후면 하임달로 출발할 테니 다들 준비하고 계시오. 놈들이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선 초전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투입해 적의 기세를 꺾어야 합니다. 하임달의 황금탑인지 뭐시긴지를 이틀 안에 장악하고 나면 삼각루트의 중간 출구를 열 수 있습니다. 그곳을 통해 서부와 북부, 동부를 동시에 무너뜨리면 황제는 바로 고립될 거란 말입니다!”
분위기가 흐트러지자 카나르가 탁자를 탁 내려치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보병들의 질이 떨어지는 건 압니다. 그러니 처음의 총공세로 저들을 심적으로 위축시키고 시작하면 절반은 먹고 들어갑니다. 질 낮은 보병들도 훈련 1년보다 전장에서 열흘 굴리는 게 더 빨리 향상되고요. 전투가 곧 훈련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카나르에 비해 훨씬 침착한 이렌느가 자료들을 확인했다.
“지금 우리 수송선으로 한 번에 수송 가능한 병력은 최대한 잡아도 23만입니다. 물자까지 합치면 말할 것도 없고요. 어차피 두 번 이상으로 나눠야 합니다. 일반 수송선으로 병력을 옮기는 것도 쉽지 않고 군수품 수송도 함께 하려면 어차피 역부족입니다.”
“아니, 한 번에 가능합니다.”
카나르가 딱 잘라 대답했다.
“교단의 살름 마구스가 운송업자를 하나 소개해 줬소. 지난 전후에 황제에게서 불하받은 군용 수송선을 10척 넘게 갖고 있답니다. 그때 황제를 낭패에 몰아넣었던 수송선들 있잖소.”
“황실에서 그걸 불하받았다면 아마도…….”
이렌느가 찜찜한 듯 낯을 찡그렸지만 카나르 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벌써 33년 전이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교단에서도 처음에 꺼렸는데 이젠 10년 넘게 해 온 단골이랍니다. 비용이 좀 세다지만 그게 문제겠소? 당장 우리만 해도 그땐 황제 편이 아니었소?”
“후음.”
의심 많고 신중한 이렌느도 그럭저럭 납득이 되는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교단에서 병력을 정확히 얼마나 보낼지는 알려줬소?”
사람들이 바싹 귀를 세우고 총사령관을 맡을 카나르와 ‘교단과 부쩍 친해진’ 마누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실 이들이 다른 제후군에 비하면 우수하지만 황실군에 비하면 분명 질이 떨어지는 병력을 갖고도 황실에 덤빌 맘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교단이 약속한 최정예병력 때문이었다.
“아까 말한 좀비 전사 5만은 근위대의 몸뚱이에 페스트 폭도들의 의식을 심은 것 같던데 그네들 말로는 적응 훈련을 충분히 해서 이젠 옛 근위대 못지않은 전투력을 낼 거라고 합니다.”
“3달 전에 황제가 사고만 안 쳤어도 몇 만은 더 되었을 텐데.”
마누엘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몇 달 전 페스트의 폭동 직후, 폭도로 죽었다가 막 깨어난 좀비 전사들과 그들의 몸뚱이를 싣고 가던 수송선이 황제의 손에 걸리면서 교단의 병력은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당시 황제가 스페이스에서 컨테이너의 동력을 끊어 순식간에 진공 냉동고로 만든 덕분에 교단이 수십 년간 준비해 온 좀비 수만의 몸뚱이가 고깃덩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었다.
“그 5만은 비엔을 지킨다고 치고요, 나머지는요?”
이렌느가 따져묻자 카나르가 냉큼 대답했다.
“코런덤 3천과 3만의 옛 근위대는 우리와 함께 하임달에 갑니다. 그쪽은 바에자 장군이 이끌 테고요. 그놈들은 3번까지 죽어도 되살릴 수 있을 만큼의 여분 육체를 가져간다고 했으니 사실상 무적일 겁니다.
“휴우~, 바에자라는 이름만으로도 든든하군요.”
마누엘이 휘파람을 불었다. 교단 말기 군인으로 있었던 그는 마지막까지 ‘무적의 장군’으로 역사에 남은 바에자의 용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쯤이면 하임달은 이제 우리 것이나 마찬가지네.”
중요한 문제를 대충 마무리한 제후들은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엔의 임시 입결지에선 여전히 신병들의 훈련과 고함, 보병과 기병들을 가득 싣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수송선들의 엔진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럼 이젠 정말로 갈 때인가,”
비엔의 남부연합군이 출발을 서두르고 있을 무렵, 하임달의 카렐과 가디언 일행, 분견대원들의 검은 철성 생활은 열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검은 철성에서의 생활은 이전 [카히나의 사제 집단]이 둥지를 틀고 살던 곳이었던 만큼, 생각처럼 나쁜 건 아니었다. 황금탑 주변 2, 3층을 빙 둘러 그들이 쓰던 침실이 남아있고, 500년 가까이, 아니 그 이전을 생각나면 얼마나 오래 버틴 건지 짐작도 되지 않는 합성수지제 침대와 매트리스, 일부 소소한 생활용품까지도 남아있었다. 이전 코메트가 철수할 때 워낙 급히 떠나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제법 많았다.
게다가 손재주 좋은 코리온은 가장 큰 재산이었다. 그는 발굴단 엔지니어들을 동원해 이전에 쓰였던 지하관정도 복구해 물도 쓸 수 있게 했고, 얼마 되지 않는 장비와 철성의 안 쓰는 기계들만으로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 온 1번과 2번 터빈을 다시 돌게 만드는 데 온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는 파예드 아카데미의 강연장에서보다 이곳에서 ‘천재의 재능’을 더 창조적이고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실제로 항상 경직되어 있던 그도 이곳에 온 이후로 어딘지 기분이 붕 뜬 듯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예상보다 훨씬 아늑한 근거지를 마련한 카렐 일행은 낮에는 종일 삽, 곡괭이와 씨름하고 있는 중이었다. 철성의 안 쓰는 부품을 뜯어낸 그들은 주변을 빙 둘러 철제 바리케이드와 참호도 설치했다. 교단의 공병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산의 동쪽 사면의 송풍로에 쌓인 화산재와 흙을 거둬내며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을 내고 있을 것이 분명했고, 문제는 언제 그들이 이곳까지 닿느냐였다.
몇몇 예민한 이들은 적을 맞을 준비를 하는 며칠 새 황제가 조금씩 여위어가고 있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손 하나가 부족한 상황에서 황제는 조금씩 약해져가는 몸에도 불구하고 매일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았고 낮에는 분견대원들과 함께 얼어붙은 땅에 곡괭이와 삽을 꽂으며 땀을 흘렸다.
세네피스 황태후가 차라리 자신에게 삽을 잡게 해 달라며 애원하기까지 했지만 카렐은 자신이 곡괭이 한 번 휘두르는 것이 황태후의 어설픈 삽질 백 번보다 낫다며 웃어 보이기만 했다.
황제는 작업을 하는 팀에 [카히나의 시신]을 함께 찾을 것을 명령했지만 분견대는 타리프 신관이 검은 철성 앞에 묻었다는 시신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그 와중에도 매일 밤, 세상에서 그 자신만이 온전히 시야를 갖고 돌아다닐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에 어디론가 나가 2, 3시간을 돌아다닌 후 돌아오곤 했다. 가디언들은 황제 혼자 나가 돌아다니는 것이 당연히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이곳에서 어차피 따라나가 봤자 다른 이들은 짐덩이만 될 뿐이었다.
그리고는 또 남는 시간엔 코리온과 함께 철성 제일 안쪽의 터빈실에 자주 들락거리곤 했다. 그는 그곳에 설치된 5대의 초대형 터빈과 그곳에서 연결된 수많은 파이프들 안에 들어가 몇 시간을 안 나오곤 했고, 터빈을 앞에 놓고 코리온과 이것저것 상의를 하고는 무언가 종이에 열심히 적어 본토의 시라즈 여단에 계속 보냈다.
이들은 황제가 곧 이곳으로 올 시라즈 여단의 수송선에 무언가 ‘가져올 물건’을 지시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황제는 자신이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열 하루째 되는 날 오후 무렵, [시라즈 여단 400명이 하임달 5번 행성을 출발했다.]는 전문을 받은 카렐은 가디언과 사에나, 십여 명의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산을 타야 할 테니 단단히 준비해라. 와이어로프를 여유 있게 준비해. 방패 하나씩 잊지 말고.”
황제의 경고에 베흔, 네피, 카토, 힐러와 자이납의 표정이 굳었다. 이 지독한 산에서 산을 탄다는 건 가파른 절벽 아니면 푹푹 빠지는 무른 화산재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와 밧줄, 간단한 등반도구를 챙겼다. 하지만 카렐은 와이어로프를 한 무더기씩 진 그들을 데리고는 바깥이 아닌, 검은 철성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적군이랑 싸우러 가는 거 아니에요?”
카렐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자이납이 여지없이 가벼운 입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카렐이 황금탑 옆을 스치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적과 싸우러 가는 거 맞아.”
“여기에도 적이 있어요?”
카렐은 아무 말 없이 계단과 몇 개의 문을 지나 마지막으로 육중한 철문 하나를 열었다. 순간 청각이 예민한 가디언들이 얼른 귀를 막았다. 그들이 들어온 곳은 검은 철성의 심장인 터빈이 있는 거대한 방이었다. 그곳에선 6개의 육중한 터빈―비록 그 중 절반만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과 그곳에 각각 연결된 거대한 파이프가 바닥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한쪽에서는 귀마개를 한 코리온이 몇몇 작업자들과 함께 터빈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코리온이 카렐에게 다가와 지금은 꺼져 있는 1번 터빈과 그곳에서 연결된 12개의 육중한 파이프 다발 중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카렐은 가디언, 병사들과 함께 파이프로 다가가 그 한쪽의 정비구를 열었다. 정비구 안쪽으로는 사람 한 명이 충분히 지나감직한 파이프 내부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이게 어디로 연결되는데?]
터빈의 소음 때문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상황에서 네피가 황실군 수화로 물었다. 카렐이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적에게로.]
카렐이 작은 정비구 안으로 몸을 쑥 집어넣었다. 뒤이어 사에나, 베흔과 네피, 나머지 가디언들이 안에 들어왔고 병사들도 차례대로 안에 들어왔다. 파이프 내부는 녹내와 흙 냄새가 뒤섞여 탁하고 갑갑했다. 하지만 카렐이나 베흔 같은 거구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서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직경은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파이프 안쪽에는 허벅지만한 굵기의 또 다른 파이프 십여 개까지도 주변을 빙 둘러 지나고 있었다.
“이거 대체 용도가 뭐죠?”
눈치빠른 베흔이 초록색 눈을 빛내며 물었지만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뒤따르는 보병들을 위해 랜턴을 켜고 파이프를 걸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금속제 파이프를 얼마간 지나고 나니 이번엔 금속이 아닌, 강화 인조석으로 만들어진 파이프로 재질이 바뀌었다.
파이프는 가파른 내리막을 그리며 끝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빛도 하나 없는 깜깜한 파이프를 타고 거의 30분 가까이를 내려가니 발밑으로 흙이 밟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더 가지 않아 꽉 막힌 구멍이 나타났다.
“작업자들이 50척 정도는 파 놨는데 여기부터는 일부러 뚫지 말라고 했다.”
카렐은 곡괭이 자국이 남아있는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파이프 끝을 막은 벽은 손으로 긁어도 미세한 입자가 우수수 떨어질 만큼 무른 퇴적층이었다. 베흔이 결국 입을 열었다.
“이 바깥이 송풍로 아닙니까?”
카렐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이 바깥은 화산재와 검은 재가 메워버렸지.”
카렐을 뒤따라온 가디언들은 자신들이 송풍로의 꼭대기에 있다는 [12개의 구멍]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일지에 따르자면 바로 이 파이프의 바깥으로는 분지로 이어지는 칼자국처럼 깊은 송풍로―지금 네코가 죽을 힘을 내어 파 올라오고 있는―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젠 완전히 메워져 이곳에서 나가는 것도,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바깥에서 여길 찾는 것보다는 우리가 위로 나가는 게 훨씬 편해. 이게 12개 구멍 중에서 그나마 제일 위쪽에 나 있는 놈이야. 계산해 보니 이 위로 30척(9m)만 올라가면 지상이다. 이 바깥은 가파른 내리막이니까 수직으로 파지 말고 45도 오르막으로 파면 돼.”
카렐은 가디언들에게 구멍을 파라고 손짓했다. 눈치 빠른 자이납이 그새 뒤로 슬그머니 도망치면서 제일 짬밥이 딸리는 힐러가 결국 삽을 쥐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흙이 워낙 무르다보니 한 삽 긁어낼 때마다 계속 흙이 무너졌다. 하지만 뒤에 대기하던 엔지니어가 긁어낸 벽에 접착제를 섞은 물을 계속 뿌리고, 병사들이 긁어낸 흙을 뒤로 줄줄이 밀어내면서 구멍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위로 길어져갔다. 뒤이어 힘 좋은 네피가 교대했고, 다시 카토, 베흔까지 계속 손을 바꿔가며 2시간이 넘게 계속 땅을 파 나아갔다.
“아푸!”
베흔이 갑자기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흙무더기에 깔려 주저앉았다. 바로 뒤에 있던 네피가 그의 발목을 덥석 잡아당겨 흙더미에서 꺼내주었다.
“것 봐, 줄을 잘 서야지, 잔대가리 굴리고 마지막에 있다가 이 꼴 났잖아.”
네피가 흙에 깔린 베흔을 깔아뭉개고 킬킬거리며 제일 먼저 밖으로 기어나갔다. 그새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바깥은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여전히 모래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바로 이 산의 악명 높은 동쪽 사면이었다.
“우와우, 발밑에 수로인지 송풍로인지 잡놈인지 있는지 감도 못 잡겠네.”
네피가 뒤따라 나오는 베흔의 손을 잡아당겨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풍로가 있던 자리는 거의 60도 가까운 가파른 경사가 져 있고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아주 고운 흙으로 뒤덮여 한 발짝 내디디기도 쉽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별 생각 없이 발을 내디뎠던 네피가 기겁을 하며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마터면 쓸려 내려갈 뻔했던 네피가 베흔의 발목을 덥석 붙들었다.
“자알 한다, 그 덩치에 한 번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저 밑의 분지까지 그냥 한 방이겠네.”
베흔이 그의 손목을 툭 쳐내며 쏘아붙였다.
“염병할, 난 처자식에 인형 같은 손녀까지 있는데 몸조심해야지.”
네피가 몸서리를 쳤다. 그가 미끄러지면서 흘러내린 유사(流砂)가 줄줄 흘러 밑으로 멀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거의 60도 각도의 이 산의 동쪽 사면 전체가 이런 모양새이니 교단 헤네티들도 올라올 엄두를 못 내는 것이 당연했다.
“여기부턴 사에나 경하고 가디언들만 간다.”
마지막으로 나온 카렐은 내부에 고정시킨 와이어로프를 손에 쥐고 있었다.
“방패는 내려갈 땐 썰매 대용이고 올라올 땐 등에 져. 알겠지?”
카렐이 정규군들이 쓰는 큼직한 원형 방패를 엉덩이 밑에 깔고 앞장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곳을 그냥 걸어 내려가려 든다면 1스타디아도 못 가 허리까지 빠져 구조를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사에나와 나머지 가디언들도 카렐을 따라 방패를 깔고 앉아 와이어를 붙들고 유사로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는 길을 살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디언들은 카렐이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우리 6명만으로 되겠습니까? 저 밑에서 공사를 벌이고 있는 헤네티들은…….”
“어제까지 정찰한 바로는 작업자만 600명이 넘더군.”
카렐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로프를 잡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가디언들은 그제야 황제가 지난 며칠간 검은 철성을 향해 길을 내고 있는 적 공병대를 염탐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똘똘이 힐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저희에게 이야기 안 하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분견대원들이 흔들릴까봐 그랬다.”
카렐이 솔직히 이유를 털어놓았다.
“설마 그럼…….”
“네코 마구스가 네포프 칼리를 데리고 공사장에 와 있는 걸 확인했거든.”
카렐은 다시 방패를 타고 유사 밑으로 죽 내려갔다.
“그자를 구해서 진짜 사제의 키가 어딨는지 이번에야말로 꼭 알아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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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드디어 컴백입니다.
자이납은 여전히 뺀질이이고 베흔과 네피는 어쩌다보니 만담 콤비가 됐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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