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70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
.
.
“발사!”
네코를 지키는 4명의 헤네티들이 방패를 든 카렐을 향해 일제히 마우저를 쏘았다. 그들에게 막 돌진하려던 카렐은 마우저의 위력에 밀려 뒤로 주춤거리고 물러났다. 근거리에서 4발의 마우저를 맞은 방패는 안쪽에 붙인 보강재까지 순식간에 누더기가 되어있었다. 순간 아찔해진 카렐은 몸을 낮추고는 방패를 가로로 돌리고 번개처럼 적에게 돌진했다.
“우악!!!”
카렐의 위력적인 태클에 한 명이 카렐의 머리 위 공중으로 한 바퀴를 빙 돌아 바닥에 턱부터 내리꽂혔고 또 한 명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비키지 못해!”
카렐은 뒤에 떨어진 한 명의 척추를 뒷굽으로 찍어 박살을 내면서 앞에 넘어진 적의 머리를 방패 모서리로 내리찍었다. 머리가 부서진 적의 몸에서 불꽃이 확 솟구쳐오르는 모습에 카렐이 기겁을 하고 펄쩍 뛰어올라 뒤로 물러났다.
이 다음부터는 행운이 카렐의 편이 아니었다. 동료들이 목숨으로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제일 상급자로 보이는 나머지 헤네티는 네코를 데리고 이미 몇 발짝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마우저를 주워 쏘려던 카렐이 멈칫하며 무기를 거두었다. 마지막 헤네티는 기진맥진한 네포프를 등에 업고 있었다.
“썩을 놈들!”
카렐이 다시 그들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머리 위에 불이 켜져 있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몰려 내려오는 작업자들 때문에 밑에서 못 올라가고 있던 거의 백여 명 가까운 경비병들까지 보였다. 더 이상 쫓아내려가기는 위험했다.
“저기! 저놈 쏴!”
훤한 조명 밑에서 카렐을 발견한 경비병들이 일제히 석궁을 쏘아대기 시작했지만 카렐은 자신과 아이들, 제국의 목숨이 걸린 ‘사제의 키’ 목표를 코앞에 두고 물러날 수가 없었다.
“우읍!”
카렐은 허벅지에 맞은 볼트를 꺾어 내던지고 휘청거리며 앞으로 계속 달렸다. 다리를 다친 카렐이 속도를 늦춘 그 짧은 순간, 네코와 네포프를 데리고 도망가는 헤네티와의 거리가 확 벌어졌다. 다행히 때마침 사에나가 쏜 마우저가 그의 위에서 비추고 있던 조명을 산산조각 부수어놓았다. 하지만 카렐은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베흔이 불도저에 시동을 걸고 이들의 굴착용 펌프를 짓밟아 뭉개고 있었다.
초조해진 카렐은 네포프를 업고 달려가는 헤네티의 다리를 겨누고 다시 마우저 한 발을 쏘았다.
“으이익!”
마우저에 종아리가 관통당하면서 뼈가 부러지고 다리가 꺾인 헤네티가 중심을 잃고 바로 옆의 송풍로 쪽으로 휘청거렸다. 도망치던 네코는 마지막 경호원의 비명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는 몸을 낮추고 맹렬히 돌진해오는 카렐의 모습에서 적이 진짜 노리고 있는 게 누군지를 바로 깨달았다.
“젠장! 뺏기느니 그냥 없애버려!”
네코의 명령을 받은 헤네티는 어깨에 짊어지고 도망치던 네포프를 까마득히 깊은 송풍로 밑으로 휙 집어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몸을 낮춘 카렐이 그자의 가슴을 들이받는 것이 좀 더 빨랐다. 네포프와 그를 짊어진 헤네티, 헤네티의 가슴을 끌어안은 카렐이 한 덩어리가 되어 공중에 붕 날아올랐다.
“아악!”
헤네티의 등에서 떨어진 네포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하마터면 송풍로 밑으로 도로 떨어질 뻔했지만 카렐의 큰 손이 그의 어깨를 덥석 붙들어 끌어당겼다. 네포프를 붙잡느라 카렐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순간, 그의 밑에 깔려 있던 헤네티가 한 팔을 빼내 카렐의 얼굴 옆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흡!”
헤네티의 주먹에 깨진 카렐의 고글이 박살이 나 흩어졌다. 부서진 고글 안쪽으로 휘둥그레진 카렐의 그레이오팔과 헤네티의 눈이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헤네티는 그의 눈 색깔을 순식간에 읽어냈다.
“여기 적 황…….”
카렐은 헤네티가 말을 미처 끝맺기 전에 목을 단숨에 비틀어 찢어냈다. 하지만 훤한 조명 밑에서 헤네티에 깔려 쓰러진 채 부상까지 입은 카렐은 이미 적에겐 훌륭한 표적이 되어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던 네코와 그의 헤네티가 혼비백산해 몸을 낮추는 모습이 보였고 조금 전 그에게 집중사격을 날렸던 경비병들이 일제히 자리에 꿇어앉으며 다시 석궁을 겨누었다. 이젠 목숨을 걸고 달아나는 일만 남아있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카렐은 네포프의 손을 잡고 도망치려 했지만 고문으로 탈진한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카렐은 하는 수 없이 네포프를 한 팔에 번쩍 안아들고는 방패로 옆을 감싸고 다시 언덕 위로 되돌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 거나 움직이는 건 다 쏴! 작업자들은 뒈지기 싫으면 엎드려!”
상대가 다쳤다는 것을 파악한 적 경비병들과 헤네티들도 이제 가릴 것이 없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건 말건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는 것은 무작정 쏘아대기 시작했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공병이나 작업자들도 얼떨결에 곳곳에서 석궁에 맞아 쓰러졌고 카렐이 든 방패도 순식간에 몇 개의 볼트가 박혀 고슴도치가 되었다. 마우저를 쏘며 반격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의 팔은 두 개뿐이고 한 팔에는 방패를, 한 팔에는 네포프를 안고 있어야 했다.
“젠장! 이놈의 다리!”
카렐이 휘청거렸다. 이미 볼트를 맞은 허벅지가 찢어지는 느낌이었지만 카렐은 아랑곳없이 60도 가까운 가파른 언덕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필사적으로 뛰어올랐다. 다친 다리와 팔에 안고 있는 네포프까지 더해지면서 이젠 내려올 때처럼 재빨리 피할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다친 채로 달아나는 것을 본 네코까지 합세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저기! 4번 조명 밑에!!!”
작업자들 사이에 파묻혀 오고가도 못 하고 있던 헤네티 한 명이 어둠 속을 느리게 달리고 있던 카렐을 발견하고는 마우저를 겨누고 소리를 꽥 질렀다. 순간 그자의 마우저를 맞은 카렐의 방패 한쪽에 통째로 뚝 떨어져나가며 카렐도 중심을 잃고 그 충격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익!”
바닥에 쓰러진 카렐이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머리로 날아오는 마우저를 막기 위해 방패를 움직이는 새, 다른 경비병들이 쏜 볼트가 그의 종아리와 허벅지 안쪽에 박혀 있었다. 카렐은 넘어진 충격과 다리의 고통에 잠시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네포프를 안은 팔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누구…….”
자신을 구출해 도망치던 이 낯선 사람의 얼굴을 더듬던 네포프의 시선과 카렐의 눈동자가 딱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도 네포프의 눈이 확 커지는 모습이 보였다.
“오, 오르……?”
“이쪽으로 오십시오!”
멀리 어딘가에서 베흔, 자이납의 고함과 함께 부르릉거리는 불도저의 큰 엔진소리가 희미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렐은 네포프를 안은 채 다친 다리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불도저 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무언가 철크덕 하며 장전되는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카렐의 머리털이 순간 바싹 곤두섰다. 바닥을 기어가던 카렐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데려갈 수 있을 줄 알았지?”
멀지 않은 곳에서 마우저를 겨누고 있는 네코의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카렐이 방패로 앞을 가렸지만 이미 몇 발의 마우저에 누더기가 다 되어 갈 곳까지 간 상태였다. 네코가 쏜 마우저가 이미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쩍 소리를 내고 가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잇!”
카렐이 움찔했지만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위에서 그의 머리와 가슴을 꽉 껴안은 네포프가 자리에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방패를 부수고 카렐에게 날아들던 마우저 탄을 몸으로 막아낸 네포프가 그의 눈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폐하! 폐하!”
자이납의 찢어지는 고함과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강력한 석궁의 볼트 한 발이 네코의 목 옆을 북 찢고 지나갔다. 치명상을 입은 네코는 목에서 피보라를 공중으로 확 뿜으며 뒤로 벌렁 날아가 쓰러졌다.
“젠장! 잘생겼다고 봐 줄 줄 아냐!”
자이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지으며 불도저 엔진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프레소, 아니 네포프에 깔린 채 쓰러져 있는 카렐을 본 자이납은 거의 사색이 다 되어 카렐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가 든 방패에도 여지없이 볼트와 마우저가 날아들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의 결사적인 응사 속에서도 자이납은 네코에게 한 발을 더 쏘려 했지만 결국 마우저를 맞고 옆으로 벌렁 자빠졌다.
“아우, 씨이! 저 새끼들!”
넘어진 자이납은 바닥에 납작 몸을 낮추고 엉금엉금 기어와 카렐의 옷자락을 덥석 붙들고는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베흔이 모는 불도저가 옆으로 방향을 돌리며 버킷을 들어올려 옆에서 날아오는 볼트와 마우저를 막아섰다. 육중한 버킷에 볼트와 마우저가 명중하며 쾅쾅 하는 귀를 찢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조금만 참으세요! 다 왔어요!”
그 사이, 자이납은 다리를 다친 황제와 그의 품에 축 늘어진 네포프를 불도저 엔진 위로 질질 끌어올렸다. 끙끙대며 기어오른 카렐은 다리에 박힌 2개의 볼트를 꺾어 내던졌다.
“출발! 출발!”
자이납이 목이 찢어져라 외치며 방금 네코가 쓰러졌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마지막 확인사살을 하려 다시 한 발을 쏘았지만 네코를 구하려 달려온 경비병 한 명의 등에 명중하며 바닥에 쓰러뜨린 것이 고작이었다.
“흔들릴 테니 꽉 붙들고 있어!”
베흔이 불도저의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 언덕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 헤네티와 경비병들을 붙들고 있던 네피와 가디언들도 헐레벌떡 언덕 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베흔이 모는 육중한 불도저는 공사장의 교단 장비들을 차례대로 짓밟고 박살내며 언덕 위로 꾸역꾸역 올라갔다. 그렇지만 어차피 오래 달릴 수는 없었다. 공사장의 소동과 함께 줄줄이 흘러내리는 유사(流砂)를 만난 불도저는 위로 못 올라가고 다시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젠장!”
베흔이 엔진을 최대한 올렸지만 트랙은 유사 위에서 계속 헛돌기만 했다. 불도저는 못 올라갔지만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도망치는 카렐 일행과 불도저를 따라잡으려 뒤쫓던 경비병들도 불도저가 뒤로 내뿜는 어마어마한 유사에 밀려 주르륵 뒤로 밀려나갔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이들이 붙들고 내려왔던 와이어로프가 보였다.
“더 못 올라갑니다! 내려서 걸어서 더 올라가요!”
베흔이 엔진을 최대한 켠 채로 앞쪽 운전석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자이납도 먼저 뛰어내려 카렐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렐은 그에게 네포프를 내려주려 했지만 그는 가슴에 꽉 안긴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 움직이지 못했다. 그를 떼어내려 등을 짚었던 카렐은 축축하고 끈적한 느낌에 멈칫했다. 그는 카렐을 대신해 등에 마우저 유탄을 맞은 상태였다.
“빨리 내리세요! 시간 없어요!”
어디선가 날아온 마우저에 방패를 맞고 털썩 주저앉았던 자이납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카렐은 다리의 고통을 기를 쓰고 견디며 네포프를 안고 밑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뒤에서 막아다오.”
카렐은 두 팔에 네포프를 안고 푹푹 빠지는 유사 위를 허우적거리며 올라가려 했지만 지친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빨리 올라오지 않고 뭐 해! 잡아!”
네피가 되돌아와 다리를 다친 카렐의 팔을 붙들고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네피의 도움을 받은 카렐은 여전히 팔에 네포프를 안은 채 휘청거리며 네피를 따라 올라갔다.
그 사이, 베흔이 버리고 떠나 온 거대한 불도저는 결국 중심을 잃고 유사에 줄줄이 떠내려가 뒤를 쫓아오던 경비병과 헤네티, 작업자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쏟아지는 모래의 규모가 점점 커져 사태(沙汰)가 되는 것을 본 현장 반장이 비로소 위기를 직감하고 작업자들에게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피해! 옆으로 도망가!”
굴러가는 불도저와 그곳에서 밀려난 유사는 거대한 사태로 커지며 이들이 송풍로 옆에 조심조심 쌓아놓았던 산더미 같은 모래까지 덮쳤다. 가파른 언덕에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던 모래더미는 불도저의 무게와 유사에 휩쓸리며 균형을 잃고 옆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불안정하게 쌓여 있던 가는 모래는 이들이 힘겹게 걷어낸 자리를 다시 되메우며 순식간에 땅을 뒤덮었다.
“무너지잖아! 내려가! 빨리빨리!!!”
어마어마한 양의 유사가 비명을 지르는 사람을 실은 채 경사 밑으로 쓸려 내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정말 운 없는 작업자나 경비병들은 유사와 함께 10층 깊이의 송풍로 안으로 그대로 쓸려내려가며 말 그대로 순식간에 파묻혀버렸다. 이들이 수십 일간 힘겹게 파 올라온 공사장은 굴러 내려가는 불도저 한 대에 비명과 혼란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등 뒤가 유사와 사태로 전쟁터가 된 동안, 위로 도망친 카렐 일행 역시 쏟아지는 모래와 거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려올 때는 방패를 타고 올 수 있었지만 올라가는 건 이제 중력, 모래와의 힘 싸움이었다. 와이어로프에 줄줄이 매달린 일행은 사에나를 선두로 줄줄 쏟아지는 모래를 어렵게 디디며 위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갔다.
“제발 힘 좀 내시오. 이제 빠져나왔으니.”
와이어로프를 붙들고 카렐은 자신의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있는 와중에도 가슴에 안겨 있는 이 ‘낯선’ 남자에게 힘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헉, 헉.”
억지로 숨을 몰아쉬려던 네포프가 카렐의 가슴에 한 뭉텅이의 피를 토해냈다. 마우저에 맞은 건 그의 폐가 있는 오른쪽 등이었다. 강화 방패를 뚫고 들어오며 힘이 약해진 마우저 탄이 여전히 폐에 박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바로 카렐의 심장에 구멍을 냈을 위치였다. 카렐이 구멍이 난 네포프의 등을 손으로 꽉 쥐어 누르며 속삭였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의사들이 있소. 제발 조금만 버티시오.”
피를 많이 흘리고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네포프가 카렐의 그레이오팔을 올려보며 혼자 엷게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오르.”
카렐은 자신은 황제라며 버럭 화를 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카렐은 아무 대답도 않은 채 기를 쓰고 언덕을 기어올랐다. 피를 많이 흘린 네포프는 억지로 의식을 버티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는 쉭쉭 빠지는 바람소리를 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세네피스 처제는 곧 구출해 준다고 약속해놨는데……수나 그 여자가 약속을 안 지켰어요. 정말 미안해요.”
네포프가 카렐의 옷깃을 꽉 움켜쥐고 다시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의 등 뒤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고, 손으로는 더 이상 지혈이 되지 않았다.
“오팔은 처제가 갖고 있겠다고 우겨서 주고 나왔어요. 잘 한 것 같아요……내가 갖고 있었으면 뺏겼을 거예요.”
“세네피스에게 줬다고요?”
“그걸 보고 어찌나 좋아하던지……당신한테 보여주던가요?”
억지로 말을 잇던 네포프가 다시 욱 하고 피를 토해냈다. 그의 숨소리가 갑자기 약해지면서 다급해진 카렐이 좀 더 힘을 내어 언덕을 올라갔다. 멀리로 일행이 빠져나온 송풍로와 그 위에서 빨리 오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세하의 모습이 보였지만 아직은 한참의 거리가 남아있었다.
“다 왔으니 조금만, 조금만 버텨요. 네포프. 제발.”
카렐은 최대한 다정한 투로 이 낯선 남자에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네포프의 입가에 해사한 웃음이 번졌다.
“여기서 당신 마지막 전투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네포프의 지친 표정에 먼 옛날의 기억이 스치는 듯했다. 그는 카렐의 뺨에 얼굴을 부비고 입을 맞추며 끓는 소리로 물었다.
“고마워요……, 데리러 와 줘서, ……나 이제 용서하는 거죠?”
카렐은 빛을 잃어가는 네포프의 눈을 휙 내려다보았다. 무얼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럼요, 네포프.”
“당신하고 있어……참 좋아요.”
네포프는 비로소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카렐은 그의 지친 뺨에 얼굴을 부비고 입을 맞춰주었다. 그의 입맞춤을 받은 네포프가 갑자기 힘이 나는 듯 두 팔을 뻗어 카렐의 목과 가슴을 꽉 안았다. 카렐은 그런 네포프의 입가에 정말로 행복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나……노래 좀 불러 줘요. 그날 불러주었던…….”
“노, 노래요?”
네포프의 뜬금없는 ‘노래’이야기에 카렐은 대체 무슨 노래를 말하는 것인지 말문이 탁 막히고 말았다.
“여기요! 빨리 들어오십시오!”
네포프를 가슴에 꽉 안은 카렐은 세하와 네피의 도움을 받으며 병사들이 파 놓은 구멍으로 몸을 쑥 집어넣었다. 가는 흙이 끊임없이 무너지는 좁은 구멍을 엉금엉금 기어간 카렐은 처음 출발했던 인조석 터널에 발을 디디며 순간 긴장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폐하, 괜찮으신가요?”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니사가 응급함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지만 카렐의 관심사는 자신의 부상이 아니었다.
“빨리 이 친구부터 어떻게 해 봐!”
카렐은 가슴에 힘겹게 안고 온 네포프를 바닥에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목과 가슴을 부둥켜안은 네포프의 팔은 딱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으음?”
당황한 카렐이 품에 안긴 네포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옷깃 사이에 얼굴을 묻은 네포프는 여전히 행복하게 웃고 있었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팔뿐만이 아니고 표정도, 심장도, 웃고 있던 마지막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파랗게 질린 니사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맙소사. 이걸 어째.”
맨바닥에 꿇어앉은 카렐은 자신의 품에서 숨이 끊긴 이 남자의 행복한 마지막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지만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그 양반하고 이제야 진짜로 만났구려.”
카렐은 해사하게 웃고 있는 네포프의 피투성이 얼굴을 만져주며 자신도 억지로 따라 웃었다. 먼저 간 오르마즈를 위해 이곳에서 15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 온 이 외로운 남자는 마지막 숨이 끊긴 순간, 비로소 그립던 아내와의 상봉을 한 모양이었다.
지금 그는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 작품 후기 ============================
.
.
.
미남박명.....은 아니고 사실 네포프는 꽤 오래 살았고요;;; 저승에 간 네포프는 먼저 자리잡고 있는 많은 고참 경쟁자(?)들 밑에서 신참으로 한바탕 구르고 있을 듯. (쿨럭)
그러고보니 제 글의 미남들이 유독 많이 죽는군요;;;
세네피스만 이제 궁지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으시면 밉심다~~~( ̄∇ ̄)ブ~~★
아참, 전자책 3부 1,2권은 대형서점들에서도 판매 개시되었습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올레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