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75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
.
.
안드레이 대장군이 탄 차는 근사하고 풍광 좋은 종가 부근을 빠져나와 외곽의 빈민가를 지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그는 지난 2, 3년 새 변해버린 현실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플라칼 가의 철권통치로 악명이 높은 비엔 6번 행성도 그간은 최소한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주린 일은 거의 없었다. 황제가 바뀐 후로도 가문은 여전히 철저한 폭압적인 독재를 유지했고, ‘적당히 하향 평준화된 대다수의 무식한 시민들’을 유지하는 정책으로 불평을 억눌러왔었다. 너 죽고 나 죽자며 들고 일어날 만큼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권이나 정의 따위’를 생각할 여유까지는 없는 속물 시민들이야말로 기득권과 체제를 유지하고픈 가문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그런데 지난 2, 3년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술도 발달했고, 수확도 늘었고, 수치로 보이는 총생산도 분명 올라가고 있지만 부자들의 몫으로만 몰릴 뿐 배급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빈민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마을 외곽 배급소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이런 빈민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렇게 영근 풍요로운 밀밭과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이는 굶주린 민간인들의 모습이 뭔가 괴상해 보였다.
“결국은 이렇게 한 번 뒤집어지는구나.”
그는 황제와 싸우러 떠난 원정군단의 목록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도 황제령의 경제 재건과 노예제 문제로 귀족, 제후들과 충돌하는 것만으로도 그간 진이 빠질 지경이었고, 제후지역의 복지까지 손댈 여유는 없었다. 근본적으로 정치 신념이 다른 황실과 플라칼 가가 무려 33년이나 공존할 수 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하긴, 언젠가는 부딪칠 문제였지.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정치에 알러지가 심한 안드레이 경은 복잡한 생각 따위는 머리에서 의도적으로 지워버렸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더러운 문제를 외면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꺼지지 못해!”
차창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안드레이 경은 밖으로 시선을 살짝 내놓았다. 그의 차량을 호위하고 가던 근위기병이 도로에 몸을 반쯤 걸치고 구걸을 하던 노인을 밖으로 쫓아내는 소리였다.
“적당히 해 둬.”
평소 말수가 적던 안드레이 경의 목소리에 근위기병도 일단 한 발 물러나 다시 말에 올랐다. 창밖을 내다보던 그는 더러운 판잣집 사이로 비쩍 마른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구걸을 하는 불편한 광경에서 시선을 떼고 짐짓 자는 척했다.
더러운 길가에 어슬렁거리는 아이들 사이에선 어른들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부는 인근 농장에서 품삯을 받으며 일하는 것도 있지만 농장에서 이전만큼 많은 사람은 고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 가문에서 신병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한 곳이 바로 이런 곳이었다.
“대장군님, 요즘 이런 곳은 이전 계셨을 때만큼 안전하지 않습니다. 노예들의 분위기도 조심해야 하고요. 근위병들을 너무 질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근위기병대장이 말을 몰아 그의 차 옆에 달라붙으며 작은 소리로 조언을 했지만 안드레이 경은 못 들은 척 꺼지라며 손짓했다.
이런 상황이 안드레이 경 같은, 누가 봐도 지배계급이 분명한 사람 모두에게 편안한 건 아니었다. 그간 노예폭동 시기를 빼면 남부에서 치안을 걱정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이젠 부자들을 노린 범죄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전엔 밤중에 도보로 다녀도 별 문제가 없던 지역도 이젠 무장을 하거나 차를 타지 않으면 지나기 불안해졌고, 이런 외곽은 더했다.
이번에 제후가가 황제와 벽을 치면서 노예들은 이전보다 더 큰 위험세력이 되었다. 이전 황제들은 최소한 노예폭도라는 공동의 적에 대해서는 제후들과 한편이었지만 요즘의 노예들은 ‘자신들도 황제령 노예만큼의 권리를 달라’며 점점 불만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가 익숙한 말 대신 차를 타고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야 하는 것도 ‘칼데아 제국 선언’으로 분명 흔들릴 노예들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카나르의 선언문에는 ‘모든 제도를 카렐 황제 이전으로 환원한다.’고 선언했고, 그 말 속에는 노예제도 또한 포함되었으리라는 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록 카나르는 후방에서의 분규를 의식해 명시적으로 노예에 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노예 2세로 시민이 되었던 자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최소한의 권익도 모두 빼앗기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부는 노예가 많은 만큼 노예들의 동향에도 예민했다. 3천만이 넘는 플라칼 가 영지민 중 1천만 이상이 노예였지만 그들 중 황제가 만들어 준 이런저런 ‘구멍’을 통해 노예를 벗어난 자들이 이미 150만이 넘었다.
그들 중 가장 큰 문제는 군대에 소속된 해방노예들이었다. 지난 33년간 황제와 사사건건 부딪쳐왔던 델루지 가는 황제의 노예정책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해방노예나 노예 2세들을 군인을 포함한 일체의 공직에 등용하지 않았지만, 황제에 기대어 최고제후의 권한을 근근이 유지해 온 플라칼 가는 황실의 압박에 상당수의 해방노예와 2세들을 군대에 사병으로 받아들였다.
딱히 고학력이나 인맥이 없어도 건강한 몸과 최소한의 학력만 있다면 비교적 쉽게 독립 밑천을 마련할 수 있고, 차별과 차가운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으로 군인은 해방노예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들은 제위전쟁으로 수많은 베테랑 군인들이 죽은 빈자리를 빠르게 채워나갔다. 이제 플라칼 가의 군인 5명 중 한 명 꼴로, 특히나 야전 전투보병만 놓고 보면 거의 3명에 한 명 꼴로 해방노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에 [칼데아 제국]을 선언하면서 카나르는 군에 소속된 해방노예와 직계가족들은 이전 주인에게 다시 예속되지 않도록 가문 소속 공노예로 현재의 계급과 지위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내부 방침을 정했지만 그것이 청천벽력을 맞은 노예출신 군인들에게 얼마나 먹혀들지는 의문이었다.
실제로 카나르의 속셈은 이미 사회에 나와 시민 행세를 하고 있는 해방노예나 노예2세, 그 후손으로 노예를 면한 자들은 황실과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가는 즉시 보안군을 풀어 보호 명목으로 ‘모조리’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한 후 극지방의 대규모 수용소에서 재교육해 노예로 되돌릴 참이었다. ‘자격 없는 시민들’을 노예로 되돌려 평생 삽만 잡게 하는 강력한 정책은 남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보수적인 농민과 지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내려는 카나르의 회심의 수였다.
“예쁜 주머니 사세요! 손으로 만들었어요!”
안드레이의 차가 길목 모퉁이를 지나는 순간, 꼬질꼬질한 꼬마들 거의 20여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행렬을 덮쳤다. 대장군의 행차를 호위하는 근위병들도 아이들의 갑작스런 등장에 차마 공격도 못 하고 어쩔 줄을 몰라 멈칫거렸다. 근위병들 몇이 뛰어가는 아이들을 붙잡는 동안 소녀 하나가 안드레이 경의 차에 달라붙어 손으로 기워 만든 주머니를 불쑥 내밀었다.
“1골드에요! 싸요!”
멈칫거리던 안드레이 장군은 소녀가 내민 주머니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든 것을 눈치챘다. 장군은 주머니에서 10골드를 꺼내 소녀에게 쥐어주었다.
“친구들하고 나눠가져라.”
대장군의 행렬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꼬마들은 몰려나올 때처럼 또다시 우르르 몰려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주머니를 받아든 장군은 차창과 운전석과의 창을 닫았다. 안에는 수십 년은 쓴 듯한 낡은 구형 할룩스가 들어있었다. 장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할룩스를 켰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곳으로 발신자 불명의 연락이 들어왔다.
“그대일 줄 알았네. 내 관심 없다 했건만 왜 또 연락한 건가?”
안드레이 경의 앞에는 군복 차림새의 황빈 베아트릭스가 까무잡잡한 피부색의 소녀와 함께 자리에 앉아있었다. 베아트릭스는 대답 대신 아이를 가리켜보였다.
“아직 본 적 없으시죠? 제 딸 엘룬입니다.”
베아트릭스가 옆에 앉은 딸의 넓은 어깨에 손을 얹으며 웃어보였다.
“장군님의 종증손녀이기도 하고요.”
안드레이 경은 흰 수염이 북슬북슬한 턱을 씰룩거렸을 뿐 대놓고 안 좋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눈은 소녀의 쭉 뻗은 팔다리와 무골의 당당한 체구를 훑고 있었다. 황제를 닮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황자들과 비교해도 분명 플라칼 가의 혈통이 녹아있었다.
“그래, 우리 가문 아이가 맞긴 맞군.”
그도 저 어린 황자가 칼릴 진압군과 반란군이 처음 벌인 회전이었던 헬홀 전투에서 어른 무장 못지않은 당당한 태도로 반란군의 사기를 북돋웠다는 놀라운 소식은 들은 일이 있었다. 비록 편은 다르지만, 군인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유난히 큰 안드레이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짧은 미소가 번졌다.
“딸내미를 방패로 내세워도 마찬가지야.”
긴장이 풀린 것을 뒤늦게 깨달은 장군은 억지로 냉담한 표정의 가면을 썼다. 베아트릭스가 그런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만큼 플라칼 가의 이름에 어울리는 재목을 보셨나요?”
장군은 이번엔 고개를 돌린 채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내가 이 길로 가리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황상께선 생각하시는 것보다 많은 걸 알고, 보고 계십니다.”
“내가 꺾이지 않으리라는 걸 모르는 걸 보니 생각만큼 많이 알지는 못하는구나.”
“플라칼 가가 잘못 나가고 있다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가문 정책에 불만이 있을 때마다 딴생각을 했다면 죽은 히르직스 놈 꼴 났겠지.”
“이번은 불만 정도가 아닐 듯합니다만.”
“종장은 카나르야! 난 군인이다!”
안드레이 경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는 놀란 종증손녀의 얼굴을 보고는 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내게 딴생각을 품게 하고 싶다면 집어 쳐라. 난 군인이고, 옳건 그르건 명령에 따른다.”
“3군단 장병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베아트릭스의 설득에 안드레이는 입만 씰룩거리고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래서 3군단에 가고 계신 것 아닌가요?”
“할 말 다 했으면 끊겠다.”
말문이 막힌 안드레이는 짜증을 내며 할룩스에 손을 가져갔다. 베아트릭스의 말대로, 그의 휘하부대였던 칼릴 출신 3군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가 본가의 일을 마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날 배신자로 만들 생각은 접어라. 나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그건 종조부님께 한정된 이야기겠지요?”
베아트릭스의 물음에 안드레이 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할룩스를 탁 꺼버렸다. 그리고는 풍요로운 밀밭과 여윈 아이들이 묘한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는 바깥 풍경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가 가고 있는 멀리 3군단 병영 쪽에 수송선이 착륙하는 광경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의 조용한 사색의 시간은 채 몇 분도 가지 못했다. 그의 할룩스에서 [긴급]과 함께 새 메시지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메시지를 본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3군단 수송선 편에 칼릴 주둔 황실군이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황빈이…… -
메시지는 여기서 끝이었다. 멀리 지평선 가까이에 보이는 3군단 병영 쪽에서 와아 하는 함성이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안드레이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고대로라면, 베아트릭스는 이곳에 착륙하며 천연덕스럽게 그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황제에게 당한 거냐?’
안드레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비엔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외침을 받은 일이 없던 비엔에 황실이 침략을 한 셈이었다. 아니,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 출병한 건 칼데아 제국을 선언한 이쪽이니 침략이라고 할 상황도 아니었다.
안드레이는 방금 연락을 보낸 곳 쪽으로 답신을 보냈다. 뒤이어 어딘가 황급히 뛰어가고 있는 듯 헐떡대는 소리와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수송선에 슬레이프니르 기병대가 타고 있었습니다! 간부들이 막아보려 했지만 노예 출신들이 수신호로 착륙시키고는 수송선을 에워쌌습니다! 지금 부대가 아수라장입니다!”
막 고개를 넘어간 안드레이 경의 눈에 이미 3군단 주둔지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넓은 밀밭 휴경지를 꽉 차지하고 있던, 어제까지도 조용했던 2만의 병영은 주기장 쪽으로 달려가는 장병들, 반대로 주기장 쪽에서 도망쳐오는 몇몇 간부들로 이미 벌집 쑤신 꼴이었다.
“차 세워!”
안드레이 경이 기사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는 차에서 내려 언덕 위에 섰다.
“이건 뭐 무혈입성이잖아.”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전투도, 저항도 없었던 듯했다. 수송선은 주변을 새카맣게 에워싼 플라칼 가 보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황실군 기병들을 토해놓고 있었다. 도리어 싸움이 난 곳은 그 외곽이었다. 황실군을 환영하는 ―아마도 칼릴 출신들이거나 노예출신인―장병들의 외곽에서 또 다른 무리의 장병들이 우격다짐으로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그보다는 어찌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며 그냥 어물거리고 있는 자들이 더 많았다.
“정말로 다 알고 있었어…….”
안드레이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황제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이 정도는 절대 즉석에서 나올 수 있는 대응이 아니었다.
남부는 하임달 침략과 함께 전격적으로 독립선언을 하기 위해 ‘잠재적인 불순분자’들을 손보는 중요한 작업을 아직 시작도 못 한 상태고, 황실은 그 허를 제대로 찔렀다. 황실은 칼데아 제국의 독립선언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비엔에서 고작 두 시간 거리인 칼릴에 있던 황실군을 독립선언과 거의 동시에 출병시켜 남부의 심장인 비엔에 저항 한 번 없이 한 발을 쓱 들여놓은 꼴이었다. 저들은 이쪽의 비밀주의로 준비가 덜 된 틈을 타 순식간에 근거지를 구축했고, 플라칼 가 쪽에선 침공이라고 비난하기도 민망해진 정도였다.
“대장군님! 빨리 응전 명령을 내리십시오!”
안드레이를 따라온 친 가문파 참모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에게 고함을 질렀다. 반면 칼릴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참모들은 그 뒤에서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그들은 어차피 가문 손에 이미 숙청을 코앞에 두고 있는 처지들이었다. 안드레이 경은 대답을 잠시 미뤄둔 채 눈에 망원경을 댔다.
그때, 수송선에서 검은 용 문장의 황실 깃발과 함께 큰 함성이 솟구쳤다. 그리고 조금 전 그와 만났던 바로 그 차림새의 베아트릭스가 딸 엘룬과 함께 말을 타고 수송선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대장군님! 빨리 명령을 주십시오!”
안드레이는 계속 망설였다. 지금 저곳은 흥분한 벌집이고, 건드리면 당장 벌이 쏟아져 나올 판이었다. 그렇지만 망원경을 든 그의 시선은 베아트릭스를 뒤따라 나오고 있는 엘룬을 향하고 있었다. 그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녀는 자신을 맞아주는 장병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며 자신에 찬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황빈과 플라칼 가의 옹주께서 오셨다!”
몰려드는 병사들로 주기장은 순식간에 발 디딜 틈도 없어졌다. 안드레이 경은 여전히 망원경을 눈에 댄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대장군님! 지금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안드레이는 마음이 급해진 참모들의 목소리가 꼭대기까지 높아진 후에야 마지못해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평상시보다 2배는 느린 어조로 말했다.
“종가의 2개 군단 출동시켜 주변 봉쇄하고…….”
막 지시를 내리던 안드레이 경에게 이번엔 다른 참모가 헐레벌떡 달려와 알렸다.
“대장군님! 지금 시내에 정체불명의 삐라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삐라라니?”
대답을 듣기도 전부터 안드레이의 머릿속이 수염 색깔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는 그저 전쟁터에 익숙한 군인일 뿐, 대민 선무공작 같은 건 아예 생각하기조차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참모는 긴급 전문으로 받은 삐라의 사본을 그에게 내보였다.
“으익.”
안드레이의 하얀 눈썹 주변이 가늘게 떨렸다. 그곳엔 고작 3시간 전 있었던 칼데아 제국 선언문과 함께 해방노예, 노예를 포함한 노예들은 영원히 노예라는 사슬에 묶이고 싶지 않으면 가능한 빨리 황제령이나 황제가 장악중인 3군단으로 도망치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표현은 무척이나 인간적이지만, 사실상 노예폭동을 부추기는 내용이었다.
“당장 보안군을 풀어 노예들 단속을 강화하라고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안드레이 경은 이 질문에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 어지간해선 보이지 않는 웃음을 씁쓸하게 내보였을 뿐이었다.
“역시 최고제후가 자리는 공짜가 아니었다.”
안드레이 경의 말에 몇몇 눈치빠른 참모들이 눈을 흘겼다. 황제는 정통성 논란을 무릅쓰고 플라칼 가의 최고제후 자리를 33년간 공짜로 지켜 줄 만큼 무른 인물이 아니었다. 황제에 의존해 최고제후자리를 유지해 온 동안 플라칼 가 영지엔 보안국에서 뿌린 수많은 황제의 프락치들이 알게 모르게 자리를 잡았다. 플라칼 가에선 황제의 암조직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젠 그간의 보호를 저버리고 감히 반기를 든 플라칼 가에 황제가 칼도 없이 복수극을 시작할 차례였다.
“대장군님! 빨리 보안군에 명령을…….”
“그렇습니다! 당장 보안군에 명령해서 전국의 노예 주인들에게 경고령을 발동하고 노예2세와 해방노예들을 모조리 임시 수용소에 잡아넣어야 합니다!”
안드레이 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난 정치인이 아니야.”
안드레이 경의 뚱딴지같은 대답에 참모들의 혈압이 확 치솟았다. 하지만 안드레이 경은 태평한 것인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인지, 이런 긴급한 결정을 슬그머니 미뤄버렸다.
“난 정치 따위는 몰라. 하임달로 가고 있는 카나르 종장에게 연락해서 답을 받아와라.”
안드레이 경은 다시 망원경을 눈에 댔다. 눈앞의 3군단에 착륙한 황실군은 사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이미 행진을 시작한 참이었다. 칼릴에 와 있던 황실군 중에는 에키트 족 부대도 있었지만 그들은 안에 숨었는지, 아니면 안 온 것인지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행진을 하고 있는 건 ―대부분이 플라칼 가 출신들로 보이는― 기병들뿐이었다.
황제가 일부러 이곳 출신들을 보냈다는 것을 눈치챈 안드레이 경의 표정이 더 굳었다. 황제는 플라칼 가 지역에서 내전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안드레이 경은 그제야 느릿느릿 할룩스를 들었다.
“군단장 안드레이 플라칼 대장군이다. 3군단에 명한다. 영내에 무단 침입한 외부 세력을 물리칠 것을 명한다. 반복한다. 영내에 무단 침입한 외부세력을 당장 몰아내라.”
안드레이 경의 무성의한 메시지가 전해졌지만 멀리서 보이는 영내 분위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반복해서 같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역시나였다.
“황제가 선무공작을 제대로 해 놓은 모양이다.”
고작 두 번 시도 만에 포기한 안드레이 경이 할룩스를 꺼버렸다.
“2개 군단으로 3군단 포위하고 노예들의 처리에 관한 안건은 종장에게서 답변이 돌아오면 그때 결정한다. 종가로 돌아가자.”
“예? 저대로 놔두고 말입니까?”
“그럼 놔둬야지 내가 홀몸으로 들어가서 저놈들하고 싸우기라도 하랴!!!”
안드레이 경이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며 다시 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 돌아 종가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선 낮은 혼잣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잘났는지 이겨서 한 번 증명해 봐라.”
칼데아 제국을 선언하고 당당히 비엔을 떠난 카나르 공, 아니 카나르 황제는 막 개통한 삼각루트를 처음 타고 하임달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남부의 수송선 성능이 조금 떨어지다 보니 하임달까지는 한 번에 가는 코스인데도 10시간 넘게 걸리는 먼 거리였다.
다른 여느 워프루트들이 다 그렇듯, 이 루트도 한 번 출발한 이상 반대편인 하임달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동안 40만 가까운 병력의 지휘부는 사령선의 회의실에 모여 제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남부가 단순히 침공을 넘어서서 아예 제국으로 독립까지 선언했으니 제국 각지가 아마도 지금쯤 벌집 쑤신 꼴이 되었으리라는 건 말하나마나였다.
참모장을 맡은 이렌느 경이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고는 그에게 서류를 넘겼다.
“기동훈련 중이던 황실군들이 황급히 어딘가로 떠났답니다. 아직 행선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서부와 북부, 동부제후군에도 총 집결령이 떨어졌군요.”
“불난 호떡집 꼴이 볼만하네.”
마누엘이 껄껄거렸다. 그들에게 전해지는 제국 다른 지역 분위기는 그의 표현 그대로, ‘불난 호떡집’이었다. 황실군은 훈련까지 집어치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중이고, 서부제후군과 북부제후군은 허둥지둥 ‘연합군’을 편성했다는 소식이었다. 먼 옛날 서로 원수 취급하던 곳이었지만 최고제후들이 각각 황비와 황태후가 된 지금은 황제라는 끈에 단단히 묶여있었다.
“어차피 그 정도는 각오했어. 그래 봤자 군량도 없는 허수아비 군대일 뿐이지.”
카나르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파악한 북부와 동부의 군량 확보량은 채 보름치가 되지 못했고, 서부는 그보다 아주 조금 나은 20일 정도였다. 이나마도 지난번 칼릴의 반란군이 무단으로 팔아먹은 때문이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아예 연합군 편성과 집결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을 터였다.
============================ 작품 후기 ============================
.
.
.
양쪽 모두 서로의 빈집털이중입니다. 황제에겐 동맹세력들이 굶어죽기 직전이라는 약점이, 남부는 내부 불안정이라는 가능성이라는 약점을 하나씩 안고있고요. ㅎㅎ 다음 회엔 아기다리고가다리던 첫 전투가....
그나저나 할아버지들은 대체로 아이들에게 약하(?)십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밉고요~~~( ̄∇ ̄)ブ~~★
전자책 3부 3,4권이 유페이퍼에서 판매 개시되었습니다. 대형 서점에서도 빠르면 주중으로 판매 개시되지 않을가 싶네요. 5, 6권도 10월중으로 올리겠습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올레eBook, 리디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