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79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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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뒤를 쫓고 있는 게 누군지 전혀 모르는 테나스와 하디, 알리야 부인은 지하통로를 막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았다. 밤 시간이라 바깥도 마찬가지로 깜깜했지만 좁고 갑갑한 통로를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한결 맘이 가라앉았다.
“엉?”
방금 지나 온 지하 통로에 귀를 기울였던 테나스가 기겁을 했다. 정확히 누구의 소리인지는 몰라도 찢어지는 비명 몇 번과 무언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 알아듣기 힘든 외침이 지하를 타고 웅웅거리며 전해져왔다.
갑자기 안쪽에서 전해진 열기에 놀란 테나스는 자신들을 경호하고 있는 3명의 코런덤 헤네티들을 휙 돌아보았다.
“당한 것 같습니다.”
“대체 누가 들어왔길래 슈라 그 녀석이 다 당해?”
테나스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슈라 정도면 가디언으로 치면 특등급 이상이고, 황제 편 가디언 중에도 베흔이나 네피, 잘해야 시로 정도를 빼면 상대할 자가 없었다. 그런 슈라가 당했다는 건 분명 보통 이상의 거물 가디언이 들어왔다는 의미로 보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남쪽의 1군단으로 가셔서 반격을 지휘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헤네티들은 창백해진 그들을 급히 배로 떠밀었다. 종가 동쪽을 흐르는 크지 않은 개천에는 그들의 탈출을 위한 작은 쾌속선 3척이 떠 있었지만 아직 미련이 남은 일행은 언덕 위의 본채를 연신 돌아보았다. 200명의 황제 친위군 가디언들이 휩쓴 본채 부근 곳곳에선 검은 불꽃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종가의 뜰 주변에 숨겨놓은 방공망과 에너지장벽 시설을 집중적으로 치고 있는 듯했다.
“세상에.”
테나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외침에 무너진 일이 없던 비엔이, 그것도 그 중심지인 종가가 거의 자살공격에 가까운 기습 한 번에 무너져버린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다.
선착장에는 지휘부가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눈치 빠르게 본가를 빠져나온 경비병들이 이미 백여 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슈라를 따라온 헤네티들은 가문 보물이나 기밀서류를 옮기는 근위사관, 장교들만을 골라 태우고는 남은 장병들을 거칠게 본가 쪽으로 떠밀었다.
“너흰 돌아가서 싸워! 빨리!”
하디와 알리야를 이곳까지 데려온 테나스는 그런 광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낯을 찡그렸다. 테나스는 함께 빠져나온 하디와 알리야 부인에게 먼저 배에 타라고 손짓하고는 헤네티들을 대신해 그들 앞에 나서며 손에 칼을 빼들었다.
“적은 고작 1, 2백이다! 우린 달아나려고 나온 게 아니란 말이다! 이 따위로 흩어져 도망가면 다 무너져! 나도 여기 남아 있을 테니 경비부대에 지휘부가 물러나지 않았다고 알리고…….”
막 떠나려는 배 옆에 선 테나스는 한 손에 칼을 빼들고는 선착장에서 우물쭈물하는 병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악을 썼다.
“난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너희도 당장 돌아가지 못해!”
막 호통을 치던 테나스의 귀에 방금 나온 지하 비밀통로 입구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쪽을 무심코 돌아본 테나스는 가디언 2명과 함께 칼을 쥐고 튀어나온 세데스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그 뒤로 누군가 더 나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순간, 테나스보다 더 놀란 건 세데스였다. 선착장에 몰려 있는 백여 명 가까운 경비병들이 고작 가디언 둘 거느린 그를 노리고 달려든다면 그 역시 끝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 배 옆에 있던 테나스가 칼끝으로 그를 겨누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저기 황실의 종이 되어 비엔을 팔아먹으려는 자가 있다!”
당황한 세데스도 질세라 고함을 질렀다.
“종권을 빼앗은 도둑놈을 응징하기 위해 진짜 종장이 돌아왔다!”
조금 전, 본채의 경비병들에게처럼, 이번에도 세데스의 기세는 잠시 병사들을 머뭇거리게 했을 뿐이었다. 세데스와 테나스 사이에 우글우글 몰려 서 있던 백여 명의 경비병들은 일제히 와아 소리를 지르며 지하통로 앞에 선 세데스에게 몰려들어왔다.
“으익!”
당황한 세데스가 주춤거리며 통로로 물려나려던 그 때, 몰려드는 보병들 후미에서 누군가가 휙 튀어나와서는 선착장에 서 있는 테나스를 향해 돌진했다. 군인들 누구도 짐작조차 못 했던. 왜소한 체구의 노예였다. 최소한 겉보기는 그랬다.
“어엇!”
테나스를 지키던 헤네티들이 재빨리 앞을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일격에 그의 목이 달아났을 타이밍이었다.
“설마……?”
순간 테나스는 지난 몇 달간 그의 악몽을 수놓으며 밤마다 패닉에 빠뜨렸던, 카히나 성에서 사이르의 시체를 토막토막 난도질해 걸어놓았다는 그 괴물을 바로 떠올렸다. 너무 빨라 제대로 분간은 되지 않지만 그자가 분명했다. 순간 패닉에 빠진 그는 이곳에 남아 경비병들을 지휘하겠다는 방금 전의 호언장담을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버렸다.
“멈춰!! 멈추라고!!!”
테나스는 하디와 알리야를 태우고 막 떠나려는 탈출선으로 헐레벌떡 도망치기 시작했다. 테나스를 지키던 코런덤 둘을 순식간에 난도질해 쓰러뜨린 데이는 손과 얼굴에 악귀처럼 피를 뒤집어쓴 채 그의 뒤를 눈 깜짝할 새 따라붙었다.
“가지 말라니까!”
선착장에서 펄쩍 뛰어오른 테나스는 막 속도를 붙이려는 배의 옆구리에 찰싹 매달렸다. 선착장 끝까지 테나스를 쫓아간 데이는 테나스를 매단 채 달아나는 배를 노리고 서슴없이 물 속에 풍덩 뛰어들었다.
“피다이가 쫓아오잖아! 더 빨리 가!”
피다이라는 말에 놀란 탈출선 선장은 배에 더 속도를 붙여 물살을 가르며 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선박의 엔진 굉음이 선착장 주변의 피아 모두의 귀를 울렸다.
“뭐야, 도망간 거야?”
남아서 싸우겠다는 테나스의 약속을 믿고 세데스에게 돌진했던 보병들은 ‘테나스 경이 도망간다!’는 후미의 외침에 혼비백산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기회를 잡은 세데스가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사관을 힘껏 걷어차며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씨발 새끼들아! 지금이라도 당장 무기 내려놓지 않으면 나중에 사지를 찢어죽일 테다!”
세데스의 호통에 바로 무기를 내려놓는 병사들은 없었지만 우물쭈물거리며 물러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그 사이, 다른 지하통로를 지나 선착장에 도착한 가디언 팀이 도착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협박이 효과는 있었다. 서류와 보물을 가지고 다른 통로로 도망가던 근위장교들을 붙잡은 십여 명의 친위군 가디언이 우르르 도착하면서 그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거 싸워, 말아?”
경비병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100여명이 한 번에 마음을 맞춰 세데스 일행에게 덤빈다면 압도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상대가 모두 가디언이라면 어차피 선봉에 서는 자들은 무조건 죽음일 테고, 그 자리를 원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앞쪽에 섰던 장병들이 눈치를 보며 뒤의 동료들 등 뒤로 몸을 감추려 몸싸움을 벌였다.
“당장 꿇어!!!”
세데스가 눈을 부라리며 경비병들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때, 본채 쪽에서 승전을 알리는 폭죽과 함께 다시 불길이 크게 솟는 모습이 보였다. 본채가 빼앗겼다는 건 이들 100여명만으로 이곳에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무기 버리라니까!”
세데스의 마지막 호통과 동시에 제일 후미에 있던 몇몇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강물에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안되겠어! 퇴각해!”
눈치를 보던 다른 병사들까지 뒤부터 우르르 무너지며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강물만 따라가면 남쪽에 있는 1군단에 합류할 수 있으니 아주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세데스는 도망치는 경비병들을 쫓아가며 계속 고함을 쳤지만 시키는 대로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는 자들은 채 절반이 되지 않았다.
“에이, 씨! 지금 도망친 개새끼들 나중에 죄다 잡아 죽일 줄 알아라!”
또다시 체면을 구긴 세데스가 물에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악을 썼다. 그의 거듭된 협박, 혹은 설득에도 그에게 바로 복종하는 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선 당장 목숨을 건지려 세데스 편을 들었다가 불과 몇 시간 후, 다시 이곳이 탈환된 후 반역죄로 처형당하는 것보다는 물에 몸을 던지는 모험을 택하는 편이 나았다. 세데스의 이번 승리는 누가 봐도 길게 갈 수가 없었다.
“사격!!!”
세데스를 쫓아온 친위군 가디언들이 물에 떠내려가는 경비병들을 향해 개량석궁으로 일제 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강 건너편으로 기어오르거나 하류로 둥둥 떠내려가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경비병들은 ‘석궁 따위’에 그리 놀리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막상 그쪽에서 날아온 볼트에 동료들의 머리가 부서지고 갑옷의 약한 부분이 찢겨나가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헤엄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젠장! 뭐야! 빨리 달아나!!!”
이들도 황실군이 보유한 ‘황상의 장난감’ 석궁이 알던 것보다 훨씬 위력적이라는 말은 들었겠지만 막상 눈앞에서 시체가 되어 둥둥 떠내려가는 동료를 본 순간 그냥 들었던 말은 순식간에 생사가 걸린 현실이 되었다. 세데스 일행을 따돌리고 무사히 도망친 줄로 알았던 70여명의 병사들은 크지 않은 강물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시체가 되어서, 혹은 중상을 입고 죽어가며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내려갔다. 멀쩡한 몸으로 떠내려가는 자들은 채 20명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세데스는 113대대 전체에 알리는 메시지로 [승리의 함성을 최대한 크게 울려라.]라는 내용을 보냈다. 이젠 주변을 둘러싼 수만의 대군이 반격을 퍼붓기 전에, 제네르가 이끄는 황실군 본대가 이곳으로 들어와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세데스가 델루지 종가를 초토화시키며 축포를 울린 그 때, 대기권 밖의 제네르는 20여척의 수송선, 13만의 대군을 이끌고 막 비엔의 대기권을 돌파하고 있었다.
비엔에 깔린 수백 개의 행성 에너지장벽은 계속 위치를 바꾸어 빈 자리를 채우며 상공을 지키려 했지만 황실군의 계속된 자살셔틀 물량공세를 결국 이기지 못하고 한 발 물러나 종가에서 가장 먼 적도 부근에 큰 구멍을 남겼다. 하지만 1시간 넘게 황실군의 진을 빼 놓았고, 가장 핵심지역인 종가의 머리 위에 여전히 ‘우산’을 드리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 가치는 충분히 다한 셈이었다.
“세데스 경이 종가를 장악했다는 소식입니다.”
선봉대인 남부파견군 부대가 대기권에 들어선 것과 거의 동시에 들어온 희소식에 사령관 제네르는 즉시 전 군단에 소식을 알리고 최대한 속도를 내어 접근해가기 시작했다. 델루지 종가가 있는 대륙의 고(高)고도에는 아직 행성 에너지장벽이 살아있으니 선단은 이제부터 중간 고도를 타고 지면 가까이를 날아가 그곳에 병력을 상륙시켜야 했다.
“1만의 파견군은 북쪽의 파견군 사령부를 돕고! 2군단은 남쪽의 파견군 휴양소에 착륙해라! 나머지 10만군은 델루지 종가에 바로 진입한다!”
하늘을 뒤덮은 20척의 거대한 수송선단이 하늘에서 일제히 세 갈래로 쪼개졌다. 이곳에 주둔하는 델루지 가 제후군, 아니 칼데아군은 처음엔 황실 대군의 상륙에, 그러다가 다시 113대대의 갑작스런 종가 기습에 대응하며 오락가락하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었다.
파견군 부대에 상륙할 4척의 수송선은 별 문제가 없지만 이제 문제는 종가에 바로 들어갈 16척의 본대 선단이었다. 세데스는 중심에 있는 종가 한 곳을 차지했을 뿐 그 주변의 칼데아군과 교단의 대군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본대에 약간 앞서 미끼로 보낸 200여대의 셔틀은 종가 서쪽의 밀밭 상공을 넘어가려 했지만 채 10분도 못 가 절반 이상이 불덩이가 되어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일부러 사람을 안 태운 구형의 폐기 직전 셔틀들이었지만 구름 위에서 지면까지 굴뚝처럼 길게 꼬리를 내린 검은 연기와 무시무시한 불꽃들은 그것만으로도 공격하는 황실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최소 2할은 잃을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제네르는 함께 온 보병사령관 조페의 긴장된 보고를 들은 척 만 척 스크린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때마침 자폭셔틀에 한 대의 셔틀이 방향을 잃고 힘없이 나선을 그리며 종가 옆 숲에 곤두박질치는 모습이 보였다. 비었기를 망정이지 병사들이 탔었다면 모두 저세상이었다. 저들이 방공부대의 관심을 끌며 자원을 소진시키고 있는 동안, 본대의 수송선과 상륙셔틀이 단 몇 발짝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수백 대의 고물 셔틀 값은 뽑는 셈이었다.
“듣기로는 페스트의 좀비군단도 여기 와 있답니다.”
생각 없이 입을 열었던 조페는 아차 싶은 맘에 제네르의 눈치를 보았다. 페스트에서 일가족의 몰살을 경험한 제네르에게 그들 ‘좀비군단’은 사실상 그 전체가 가족의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그는 눈가에 엷게 주름이 잡혔을 뿐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세데스 경 덕에 종가의 방공부대가 괴멸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커.”
굳어있는 제네르의 표정을 힐끔 본 시로가 참견을 했다. 세데스의 113대대가 종가를 휩쓸고 그곳에 주둔하던 방공부대를 쫓아낸 덕분에 본가가 있는 중심의 방공망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방공망은 중간이 빈 ‘도넛 모양’이 되어 위력이 떨어졌을 뿐 외곽의 방공망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종가 부근까지만 접근하면 되지만 그곳까지 접근하는 것이 문제였다.
“종가를 먼저 치지 않았다면 절반은 죽어나갔을걸요.”
발리가 남 일처럼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부서진 셔틀이 비처럼 쏟아져 푸른 초원을 물들이고 있었다.
“1진.”
제네르가 무표정하게 손을 쳐들었다. 1진은 지원자로 이루어진 1만의 선봉대가 탄 3백여 대의 병력 수송셔틀과 또 그만큼의 미끼 셔틀이었다. 이번 선봉대에는 미리 위험을 경고했음에도 남부의 ‘노예제 회귀’에 분노, 혹은 공포를 느낀 노예 2세들, 남부에 노예로 있는 가족 친지를 둔 자들이 무더기로 지원해 제비뽑기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는 이제 목숨을 건 도박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때였다.
“1진 출발.”
최대한 감정을 자제한 조페의 목소리와 함께 6백여 대의 셔틀이 비엔의 검푸른 밤하늘을 새카맣게 뒤덮고 이번엔 남쪽의 숲과 북쪽의 산악을 빙 돌아 돌진하기 시작했다. 조금 앞서 출발한 가짜 셔틀 무리가 적의 방공부대를 서쪽으로 유인하며 휘저어놓고 있지만 여전히 비엔 종가 주변의 방공망은 위력적이었다. 제일 앞서 날아가던 가짜 셔틀이 힘을 잃고 떨어지는 모습에 선봉대 장병들은 바싹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자폭셔틀이다!”
각 셔틀의 사관들이 같은 셔틀에 탄 보병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보병들은 훈련받은 대로 몸을 바싹 움츠리고 비상용 낙하장치 끈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부터는 그저 행운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순간이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한 대, 두 대, 그 이상의 셔틀이 엔진에 자폭셔틀을 얻어맞고 숲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빈 셔틀이 아니었다.
“내려! 내려!”
불붙어 추락하는 셔틀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땅으로 뛰어내렸다. 상륙 도중 추락한 셔틀에서 떨어진 병사들의 역할은 따로 있었다.
“무조건 살아서 집결해!”
사관들의 명령은 간단했다. 명령은 ‘집결’이지만 적군이 우글거리는 숲에 떨어진 장병들을 기다리고 있는 역할은 사실상 적을 혼란시키기 위한 희생 제물이었다. 그들 중 몇은 나무에 걸려 제대로 땅을 디딜 수도 없었고, 무사히 땅을 디딘 병사들 주변엔 수많은 칼데아군 병사들의 칼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운이 좋은 자들은 동료들과 함께 숲을 돌파하려 시도하거나, 포위당한 채 작은 교두보를 세우고 동료들이 구출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추락한 자들 중 몇이나 집결할 수 있을까요?”
조페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1만 명을 실은 3백 대의 셔틀 중 외곽 경계를 넘는 동안 거의 절반이 땅에 떨어졌고, 그곳에 타고 있던 장병의 또다시 절반 가까이가 그 자리에서, 혹은 떨어지던 중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나머지 수천은 이제 종가를 둘러싼 거대한 숲과 산악, 목초지, 밀밭 곳곳에 흩어져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투는 뒤따르는 본대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무대를 연출해 주었다.
“본대 들어간다.”
제네르의 손짓에 16척으로 이루어진 본대의 거대한 병력수송선이 남북방향 양쪽으로 갈라지며 드디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은 사령선에 탄 지휘부조차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수송선이 안에 실은 크고 작은 셔틀, 착륙선을 새끼 낳듯 사방으로 뿌리면서 비엔의 아름다운 별빛과 달빛이 하늘에서 사라졌다.
“몰아붙여.”
제네르의 지시는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항상 신중하고 인명을 중시하던 그가 오늘은 어딘가 달랐다. 자기 와이어와 장애파에 작은 셔틀들이 방향을 잃고 휘청거렸지만 덩어리가 워낙 큰 수송선은 아주 근거리가 아니라면 그 정도에 쉽사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수송선의 천적이 숲 곳곳에서 날아올랐다.
“다시 자폭셔틀입니다!”
“더 속도나 붙여.”
제네르가 입가에 힘을 주었다. 사방에 워낙 많은 위장셔틀과 소형셔틀을 뿌려놨다 보니 자폭셔틀이 수송선까지 닿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절반 이상의 자폭셔틀이 표적인 수송선까지 닿지 못한 채 불덩이가 되어 도로 숲으로 쏟아졌고, 또 그만큼의 셔틀과 병사들이 재가 되어, 혹은 산 채로 숲으로 쏟아져 내렸다.
“피해상황은…….”
조페가 뭐라 입을 열려는 것을 제네르가 손을 뻗어 막았다.
“모르는 게 낫다.”
그 순간, 사령선의 꼬리를 무언가 엄청난 충격이 후려쳤다. 무장과 시민병들이 자리에 주저앉았고, 가디언들이 휘청거리며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넘어지려는 제네르를 와락 끌어안은 시로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뭐야! 어디 맞은 거냐!”
“엔진 2개가 나갔습니다! 아직은 날 수 있습니다!”
선장의 대답에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든 제네르는 오른쪽에서 전진하던 207수송선이 힘을 잃고 천천히 내려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후미에 큰 불이 붙은 207수송선은 울창한 숲과 나무들을 차례대로 스치며 굉음을 내고 땅을 스쳤다. 길이만 2스타디아(300m)가 훌쩍 넘는 거대한 수송선이 땅을 거세게 긁고 지나며 어마어마한 불꽃이 주변을 일순간 뒤덮었다. 황실군에서 추락한 첫 수송선이었다.
“7군단 2개 연대, 7천 명이 타고 있습니다!”
불꽃 속에서 수송선의 전면과 사방의 비상구가 열리며 장병들이 우르르 탈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내부는 아직 무사한 것 같았다. 각자의 장비를 짊어진 수천의 장병들이 빽빽한 줄을 이루고 델루지 종가가 있는 언덕 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저들을 엄호해!”
제네르는 먼저 상륙한 선봉대 5천여 명에 고함을 질렀다. 이제 막 전열을 정비한 그들은 추락한 수송선을 탈출해 도망쳐오는 우군을 맞기 위해 몰려나갔다. 추락한 207수송선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내린 승무원들이 무어라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며 군인들을 쫓아 달려갔다.
“황실 놈들 수송선을 확보해!”
뒤쫓아 온 칼데아군 수비병 수백이 아직 그럭저럭 온전히 남아있는 207수송선을 탈취하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수송선 한 척을 제대로 빼앗는다면 그곳에 실렸을 각종 기밀자료나 함께 실린 군수품까지 탈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인을 잃은 수송선에 막 들어선 순간, 수송선 전체가 추락했을 당시보다 몇 배는 큰 어마어마한 폭음에 휩싸였다. 그 일대 수 스타디아의 나무와 흙이 거대한 폭발에 휩쓸려 순식간에 재가 되거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자폭처리했습니다.”
207함장의 짧은 보고기 뒤늦게야 제네르에게 전달되었다. 그때, 반대편인 북쪽에서 접근해오던 다른 수송선 두 척에서도 추락 보고가 들어왔다. 그 무렵, 지휘부가 탄 사령선은 엔진 2개가 고장 난 채 델루지 종가 마당에 불안불안하게 접근하는 중이었다.
“16척 중 3척 잃었습니다. 207의 7군단, 005의 5군단, 109의 4군단입니다.”
조페의 보고에 이번에도 발리가 대신 대답했다.
“5분의 1도 안 되니 나쁘지 않군요.”
제네르는 주변을 보여주는 스캐너를 켰다. 무사히 도착한 13척의 수송선들은 넓디넓은 종가의 앞마당, 뒷마당에 적당한 간격으로 천천히 착륙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온전한 상태로 착륙하고 있는 수송선은 거의 없었다. 가까스로 종가까지 돌파한 13척의 수송선들이 서너 군데 이상씩은 다 손상을 입고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제대로 도착은 했지만 코부터 처박거나, 좌우가 기울어 꼴사나운 몰골이 된 수송선이 절반이었다. 그곳에라도 탔던 장병들은 자신들의 행운을 기뻐하며 수송선에서 우르르 내려서고 있었다.
추락한 3척의 수송선에 탔던 운 없는 황실군 장병들은 10만의 적군이 도사리고 있는 숲, 밀밭과 초지를 가로질러 목숨을 걸고 도망쳐오는 중이었다. 그들만 해도 2만이 훨씬 넘었다.
“자네 기사단은 운이 좋아. 다행히 한 척도 안 떨어졌군 그래.”
제네르는 발리를 손짓해 불렀다. 슈로 기사단이 비엔과 하임달 양쪽으로 갈리게 되면서, 비엔으로 오는 기사단의 지휘는 하임달 공략군 사령관이 된 릴라크를 대신해 발리의 몫이었다.
“그러니 자네에게 첫 임무를 주겠네. 선봉대와 함께 당장 나아가서 저들을 최대한 구해내 데려오게.”
“첫 임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휘하 기병장교들과 서둘러 밑으로 내려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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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르가 좀 변했죠? 제 글을 통틀어 가장 무식한(?) 상륙전입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밉고요~~~( ̄∇ ̄)ブ~~★
전자책 3부 5,6권을 이번달 안에 업뎃하도록 하겠습니다.
출판본 완결인 7, 8권은 8권이 2권에 담기 부담스러울 만큼 내용이 길어져서 고민중입니다;;; 작업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고요, 자칫 연내에 내기 힘들지도;;;
2권으로 나온다면 책이 심각한 고도비만으로 출판될 것 같군요;;; (7, 8권은 종이책과 전자책을 동시에 낼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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