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82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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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미친 새끼! 뭐야!”
사령선 함장은 애꿎은 다른 수송선을 들이받아 버린 수송선의 선장을 불러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방금 지나간 ‘괴비행체’가 다시 되돌아와 선단 사이를 다시 가로질렀다. 방금 충돌한 2척의 수송선을 피해 급히 거리를 벌리던 제3의 수송선이 또다시 진로가 막히면서 머뭇거렸고, 두 번째 충돌이 벌어졌다.
“뒤에 또 와! 멈춰! 멈추라니까!”
워프루트를 막 빠져나와 아직 영문을 모르는 또 다른 수송선이 급정지한 선단의 다른 수송선 꽁무니를 들이받았다. 많은 수송선 파편이 스페이스로 둥둥 날아올랐고 깨진 선창에서 진공상태의 스페이스로 군수품 컨테이너가 마구 튕겨나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충돌 파편과 컨테이너들로 수송선 충돌 지점 부근은 또 다른 위험지대가 되었다.
“피해 상황 보고해!”
함장의 고함에 몇 척의 선장들에게서 욕설과 분노가 절반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290편입니다! 젠장! 우리 배 선창이 다 깨졌다고요! 옆의 놈하고 걸려서 움직이지도 못 하는데 어떡하냐고요!”
“1001편인데 뒷 새끼가 받아서 엔진이 1개만 빼고 다 나갔다고요!”
“719편입니다! 컨테이너하고 파편에 충돌해서 우현이 완전히 나갔어요!”
그때, 부서진 수송선에서 튀어나간 컨테이너에 애꿎은 후미의 수송선이 충돌하면서 또다시 비명 섞인 보고가 들어왔다. 그 중 가장 상태가 심각한 건 처음에 충돌한 3척의 수송선이었다. 떼어낼 수도 없게 뒤엉켜버린 3척의 수송선은 안에 실려 있던 화물을 사방으로 뿌려놓으며 민간 선단 사이를 미친개처럼 마구 휘저었다.
“야, 이 멍청이들아! 최대한 떨어지라고 했잖아!”
사령선 함장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한 번 벌어진 충돌의 효과는 최악의 효과로 이어졌다. 미처 거리를 벌리지 못한 주변 수송선들이 사방에서 컨테이너나 화물에 충돌하면서 중량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얇게 만든 외피에 치명타를 입었다.
그 사이, 민간 선단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은 괴 비행체는 혼란에 빠진 선단 옆을 스쳐 고향행성 쪽으로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비행체의 정체를 제일 먼저 파악한 건 도선사와 함께 탄 야투 박사였다.
“맙소사, 저거 혹시 불릿 아냐?”
야투 박사는 자신을 이곳까지 태우고 온 네코의 불릿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당장 저거 따라잡아! 어떤 놈이 탔는지 몰라도 따라잡아서 장애파를 쏴서 떨어뜨려버려!”
야투의 명령을 받은 금빛 불릿이 바로 사령선을 박차고 날아올라 앞서 달아나는 주페의 초록색 불릿을 뒤쫓기 시작했다.
“적 수송선단에 우리 편이 있었나보죠?”
눈치 빠른 아샤드 경이 조종간을 잡은 주페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지만 그는 스로틀만 올릴 뿐 그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주페가 다가가고 있을 때 민간 수송선단은 정리가 안 되어 엉망진창의 상태였고, 주페는 그 중간에 폭탄을 던졌을 뿐이었다.
“뒤에 다른 불릿이 쫓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페의 말에 실내에 일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민간 선단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일단 성공했지만 그 결과를 느긋하게 지켜볼 여유조차 없었다. 속도가 더해지면서 조종석 계기판에 다시 붉은 빛이 군데군데 켜지기 시작했고, 완충장치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중력가속도에 탑승자들의 목은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다.
“마리안, 괜찮니!”
“엉, 더 달려도 돼, 오빠. 나 괜찮아.”
주페가 돌아보았을 때, 마리안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전히 바깥 구경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아직 여리고 작은 몸으로 중력가속도를 어떻게 버틸까 걱정이 들었지만 동생은 보통 사람은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괴로워할 상황에서도 목과 어깨가 움츠러든 것을 빼면 멀쩡해 보였다. 도리어 그보다는 시시각각 변하는 눈앞 풍경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우와아~. 신기하다.”
사방에서 소용돌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샛누렇고 두꺼운 대기를 본 마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페의 불릿은 고향행성의 대기권에 점점 가까워졌고, 하지만 뒤를 따라붙는 교단의 불릿과는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다.
“우리 꺼가 왜 더 느린 거죠! 내장재까지 다 뜯어냈는데!!!”
캐빈에서 초조해진 다룬이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주페가 재차 스캐너를 확인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실린 짐이 훨씬 많으니까요.”
주페의 말대로, 같은 불릿끼리의 대결에선 장정들을 가득 태우고, 그것도 모자라 짐까지 가득 실은 이 초록색 불릿이 조종사 2명만 탄 네코의 금빛 불릿을 당할 수가 없었다. 하나 둘 켜진 경고등으로도 모자라 이젠 경고음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고도가 낮아지고, 불릿이 모래폭풍 영역 안에 들어가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앞을 거의 볼 수 없어 스캐너에 의존해서만 날아야 하는 주페는 이곳 지리와 지형에 이미 익숙한 네코 불릿에 점점 따라잡히고 있었다. 기세등등하게 칼데아 선단에 돌진했던 주페 태자는 이제 식은땀까지 흘리며 조종간을 꽉 붙들고 있었다.
“50스타디아 안에 들어가면 뒤따라오는 셔틀의 장애파 영역에 잡힐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요!”
아샤드의 조언에 주페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아샤드는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침착하던 소년이 조금씩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아이였다.
“미안합니다, 내 아직 마음의 공부가 부족한가봅니다.”
주페가 얼른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때, 조종석 할룩스가 울리기 시작했다.
“주페? 어디쯤 왔느냐?”
황제의 목소리에 잔뜩 굳어있던 소년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이 위험천만한 대기권에 접어들어 상황이 나아진 건 철성과 거리가 가까워져 할룩스를 이용한 통신이 가능해졌다는 정도였다.
“폐하? 지금 판지셰르 분지 남쪽으로……, 이익.”
주페가 비명을 지르며 방향을 돌렸다. 어딘가에 불쑥 솟아오른 산의 정상에 자칫 부딪칠 뻔했던 초록 불릿은 아슬아슬하게 산사면을 타고 피해 다시 북쪽으로 기수를 잡았다.
“불릿의 좌표와 계기판 상황을 내 할룩스와 링크시켜 다오.”
황제의 침착한 목소리에 주페도 곧 안정을 되찾고 옆에 있는 부조종석의 아샤드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때, 불릿의 스캐너에 낯선 비행체 하나가 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비행체는 뒤를 쫓아오는 교단의 금색 불릿보다도 더 빨랐고, 콜사인도 없었다.
“맙소사, 저건 또 뭡니까!!! 2대나 쫓아와요???”
방정맞은 다룬의 목소리가 확 커졌고, 주페의 표정도 다시 얼어붙었다. 하지만 황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방금 따라붙은 건 신경 쓰지 마라. 내 지시에만 따라 움직여. 계속 북서로 올라와라.”
“예.”
주페가 손에 나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뒤를 쫓는 네코의 금색 불릿과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역시 불릿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비행체는 측면에서 둘 사이로 끼어들려는 듯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지금 공중에선 3대의 불릿이 뒤엉켜 있었다.
“저게 계속 가까워집니다.”
주페가 측면에서 가까워지는 또 다른 불릿을 가리키며 초조하게 물었지만 황제의 반응은 단호했다.
“조종에나 신경 쓰라니까!!!”
카렐의 엄한 지시에 주페가 화들짝 놀랐다. 거리는 어느새 점점 좁아져 장애파의 범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비행체는 주페 불릿의 거의 꼬리까지 달라붙어 있었다.
“교차하는 즉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짧은 한 마디와 함께 그 비행체가 주페가 탄 불릿 바로 뒤, 거의 눈에 보일 정도의 거리를 무서운 속도로 근거리를 스쳐 날아갔다. 그 아주 짧은 순간, 주페가 본 건 뒤를 스쳐 지나는 비행체의 눈부신 은빛이었다.
‘아버지?’
주페는 그제야 저것이 코리온이 원격으로 조종하는 은빛 불릿이라는 것을, 그가 적의 불릿을 교란하기 위해 멀리 숨겨놓았던 불릿을 불러와 일부러 자신의 옆을 스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대의 불릿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공중에서 교차하면서 가벼운 진동이 불릿을 흔들었다. 캐빈에 있던 가디언들의 비명이 주페가 탄 불릿을 흔들었고, 카렐의 지시가 이어졌다.
“방향 돌려서 속도 내라! 산에 가까워지면 스캐너가 먹통이 될 테니 거리만 벌리면 빠져나갈 수 있다.”
주페가 탄 불릿은 서쪽으로 즉시 방향을 돌렸고, 그와 스친 코리온의 불릿은 돌연 속도를 늦추며 마치 추락하듯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던 네코의 금색 불릿은 일순간 표적을 잃고 속도를 늦추었다.
“어, 어느 쪽이지?”
지금껏 주페의 뒤를 쫓던 네코의 직속 조종사가 일순간 당황했다. 모래폭풍으로 계기와 시야 모두 엉망이 되면서 그들 역시 스캐너에 의존해 [그저 빠른 비행체] 만을 노리고 뒤를 쫓는 중이었고, 불릿 둘을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쫓던 것이 추락하듯 내리꽂히고 있는 물체인지, 아니면 속도를 내며 서쪽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젠장, 잡을 수 있는 걸 먼저 잡아!”
머뭇거리던 네코의 불릿은 [이미 반쯤 잡은 먹이]를 쫓아 추락할 듯 바닥에 힘없이 떨어지고 있는 물체를 쫓기 시작했다. 힘없이 떨어지던 코리온의 불릿은 지면 바로 위에서 방향을 틀어 저고도에서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 꼬리를 문 네코의 불릿은 잡힐 듯 말 듯 도망치는 셔틀에 속을 태우며 필사적으로 따라붙었다.
그 사이, 적의 스캐너 범위를 벗어나 추격을 떨친 주페는 자신이 목적지인 검은 철성이 있는 제플린 산 방향이 아닌, 엉뚱한 서쪽으로 움직이며 검은 재의 소용돌이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할룩스가 연결되어 있는 황제에게 다시 물었다.
“철성 쪽으로는 언제 방향을 틉니까?”
“그대로 가라. 10분쯤 더 가면 우리 화물셔틀이 숨겨져 있는 곳이 있으니 거기서 이후 명령을 기다려라.”
그 말에 주페의 표정이 굳었다. 황제는 위험천만한 제플린 산에 아이들이 오지 못하도록 아예 멀리 보내버리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지금 가디언, 엔지니어들과 중요한 화물을 싣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나중에 가져와도 돼.”
“에스더 귀인께서도 오셨다고요!”
자신의 배우자가 왔다는 말에 카렐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곧 약간 목멘 대답이 돌아왔다.
“상관없다. 오지 마라.”
“안 됩니다! 지금 전해드려야 합니다! 철성을 고칠 핵심 부품과 수술 자료입니다!”
“닥쳐라. 네 실력으로 여길 어떻게 온다는 거냐!”
아들의 항명에 황제가 살짝 화가 났는지 숨을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페는 지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받지 않으시면 제가 며칠이나 밤을 새어 가져온 의미가 없습니다! 고작 구석에 처박혀 숨어있을 바엔 제가 미친 듯이 올 이유가 뭐가 있었겠습니까!!!”
“추락해 못 받는 것보다는 나중에 받는 게 낫다.”
“지금 드리겠습니다! 공중 투하하면 됩니다.”
주페는 황제의 명령을 무릅쓰고 다시 기수를 검은 소용돌이의 중심인 제플린 산을 향해 돌렸다. 멀리 제플린 산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막상 다가가면 조종하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았다. 황제의 호통이 할룩스를 울렸다.
“당장 돌리지 못하겠느냐!”
“죄송합니다. 나중에 엄히 벌해 주십시오.”
주페는 황제의 호통을 무시하고 검은 폭풍의 중심을 향해 계속 속도를 올렸다. 대신관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내심 불편해진 아샤드 경이 무어라 입을 열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며 못 본 척했다.
황제의 경고대로, 산에 가까울수록 맞바람은 점점 강해졌고, 시커먼 폭풍이 정면으로 몰아치면서 사실상 시계는 제로가 되어갔다. 계속 고도를 유지하는데도 불릿이 당장 부서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검은 폭풍이 점점 짙어지면서 어느 순간 산의 실루엣과 지형 자체가 아예 시계에서 사라져버렸다.
“맙소사, 검은 철성이 어딘지, 아니 철성이 있다는 고원도 이젠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룬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착륙은 말할 것도 없고, 주페 스스로도 내심 ‘잘못 판단했던 건가’ 싶은 맘에 짧게나마 후회를 했을 정도였다.
“상관없습니다. 좌표에 맞춰 투하할 테니 준비시키십시오.”
주페의 지시에 가디언들이 불릿의 캐빈에 실은 거대한 꾸러미에 달라붙었다. 엄청난 무게의 이 꾸러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가디언 두셋은 더 데려올 수 있었을 터였다.
“폭풍이 이렇게 강한데 투하가 가능하겠습니까?”
주페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서 있기도 힘든 정도의 강풍에 수많은 난기류들, 예측할 수 없는 지형에서 이 물건을 철성에, 아니 최소한 철성 부근에라도 떨어뜨리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좀 더 근본적으론 정확히 철성 위를 날아서 지나가는 것만도 가능할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강풍에, 시야는 막혔고, 먹통이 된 스캐너는 대충의 지형도 읽지 못했다.
“가능합니다.”
주페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지직거리는 스캐너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쾅쾅 두들겼다. 그때, 눈앞에 또다시 나타난 육중한 산의 실루엣에 그가 기겁을 하며 조종간을 꺾었다.
“산이군요, 잘 됐습니다.”
그는 이곳 분견대 조종사에게서 전송받은 대충의 지형도에서 방금 마주친 산의 위치를 재빨리 찾아냈다. 그는 속도를 늦추며 캐빈의 가디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내가 말하면 문 열고 떨어뜨릴 준비 하세요!”
무릎 위에 지도를 펼쳐놓은 주페는 순전히 지도와 계기판, 머릿속의 복잡한 유체역학 계산에 의존해 지금의 위치와 낙하지점을 바쁘게 암산하기 시작했다. 강풍 속에서 속도까지 느려진 불릿은 당장이라도 실속을 할 듯 이리저리 요란하게 흔들렸고, 캐빈에서 계속 비명이 터져나왔다. 엔지니어 한 명이 흔들리는 화물에 부딪쳐 손목을 삐었다며 호소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대충 여기쯤 어디인 것 같은데.”
주페가 짜증을 냈다. 그의 계산은 이곳이 철성이 있는 고원 위 어딘가에 접근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눈에는 그저 몰아치는 검은 폭풍이 전부였다. 주페가 머뭇거리던 그때, 다룬의 품에 있던 마리안이 갑자기 창 쪽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우와, 황상하고 학장님이 요 밑에 계셔!”
주페로서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는 동생의 직감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소리를 질렀다.
“내려요!”
가디언들이 불릿의 문을 열자마자 어마어마한 광풍이 셔틀 안에 몰아치면서 기체가 출렁 하고 흔들거렸다. 가디언과 에스더, 엔지니어까지 화물에 달라붙어 발신 장치를 켜고 힘껏 문 밖으로 밀었다.
“낙하!!!”
형광빛 줄을 맨 화물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멀어져갔다. 정확히 어디로 떨어질지는 가디언들도, 주페의 천재적인 머리로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젠 그저 확률과 무질서의 물리학에 의존할 뿐이었다.
“문 닫아!”
다룬이 문을 맡은 엔지니어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가까스로 짐을 떨어뜨린 불릿은 다시 속도를 붙이고 이 지옥 같은 제플린 산 정상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맙소사, 저런 곳에 계시다니.”
주페는 에스더의 속삭임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껏 내내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에스더가 불릿 창에 달라붙어 혼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주페는 억지로 웃으며 고도를 높였지만 무거운 맘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곳에 방금 본 칼데아군의 대군이 몰아닥칠 것이라고 생각하니 황제가 있는 철성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마음이 더더욱 무거웠다.
“이제 어쩌죠? 황상께서 말씀하신 보급셔틀 주변에서 일단 명령을 기다릴까요? 철성에는 접근 못 합니다.”
주페가 기수를 북쪽으로 꺾으며 주변 지도를 살폈다. 이번에 도착한 칼데아군은 이미 교단이 장악하고 있는 산 남쪽의 분지를 통해 올라갈 터였다. 이때, 아샤드 경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제플린 산 북쪽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
주페가 그제야 아무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곳, 제플린 산 북쪽의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교단 시절 만들어지고 분견대에서 이후 보강한 지도지만 산 북쪽은 몇 개의 깎아지른 거친 산을 빼면 사실상 공백에 가까웠다. 언뜻 봐도 제대로 확인하고 만든 지도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주페가 제플린 산의 북벽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았다.
“제가 듣기로 타리프의 일지에도 ‘철성이 있는 산의 북쪽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못 올라갈 길’이라고 묘사되어 있답니다. 코메트들도 답사단을 보내고 별 수단을 다 찾아봤지만 불가능했다죠. 분견대도 그쪽은 포기했답니다.”
주페의 언급처럼, 제플린 산의 북쪽은 아예 등고선 자체가 의미 없을 만큼 깎아지른 수직의 절벽이었다.
뒤에서 듣고만 있던 다룬이 불쑥 끼어들었다.
“날씨가 이 상황이라면 어차피 크바르나 군단이 와도 황상께서 계신 철성에는 접근도 못 합니다. 칼데아군은 보나마나 서쪽으로는 다리를 복구할 테고, 남쪽으로는 송풍로를 뚫어서 양쪽으로 철성을 공략할 겁니다. 알려진 길은 이 둘뿐이니까요. 황상을 도우려면 놈들이 모르는 새 길이 필요합니다!”
아샤드 경도 옆에서 다룬을 거들었다.
“수직 절벽이라 해도 소수 정예병이 시도한다면 시도 못 할 법도 없죠. 가디언이나 X인 크바르나처럼.”
아샤드가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으며 주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하루 반이나 먼저 온 우리가 철성으로 올라가는 다른 길을 개척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요?”
지금껏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던 에스더까지 불쑥 끼어들었다.
“황상께서 저런 험악한 곳에 계신데 떠나고 싶으십니까?”
지도를 지켜보던 주페는 대답 대신, 바로 기수를 북쪽으로 꺾었다.
“철성으로 올라가는 제3의 길을 우리가 뚫어보죠. 마리안, 네가 도움이 되면 정말 좋겠다.”
검은 철성의 옥상에 서 있던 카렐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맙소사, 아이들이 우리 머리 위에 있어.”
“이 위에서 뭘 한다고!”
카렐의 뒤에 있던 네피가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하며 제자리를 맴돌았다. 불릿이 지나가고 있지만 워낙 강력한 모래폭풍 때문에 보이지도, 특유의 엔진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공중에서 떨어지는지 그의 시야에 번쩍거리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카렐은 즉시 할룩스를 들고 밑에 있는 세하에게 알렸다.
“방금 지나간 불릿이 철성 정남쪽 비탈에 무언가 투하한 것 같다. 폭풍이 워낙 심해서 정확히 어디 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3스타디아 이상 떨어진 것 같다. 발신 장치를 달았을 테니 당장 병사들을 풀어서 확인해라.”
카렐의 고개는 여전히 공중에 고정되어 있었다. 불릿을 느낄 수는 없지만 ‘최소한 거리상으로는 놀랄 만큼 가까이 있는’ 두 아이들의 느낌만은 여전히 그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북쪽으로 갔어. 왜 저리로 갔지?”
카렐이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정확히는 몰라도, 아이들의 느낌은 검은 구름으로 덮인 먼 북쪽 산지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어쩌면 시킨 대로 자신을 떠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네피가 여전히 안절부절 못 하며 물었다.
“어쨌든 사고는 안 난 거지?”
“그런가봐.”
카렐이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며 네피를 달래주었다.
손녀가 무사하다는 말에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은 네피가 히죽거리며 카렐을 새삼 돌아보았다.
“지금 보고 알았는데, 너 오늘 혈색이 되게 좋다?”
“내가?”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항상, 아니 평생 얼음장처럼 차던 뺨에서 온기인지 열기인지가 느껴지고 있었다.
“사제의 키를 찾아서 그런가봐. 마음이 편해지니 당연히 몸도 좋아지지.”
“찾긴 개뿔, 내 손에 쥐어야 찾은 거지.”
네피가 투덜거리며 잔딕이 박힌 카렐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카렐은 그냥 웃음으로 그의 악담을 넘겨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루하루 마르고 힘들어지기만 하던 몸은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가볍고 기운이 넘쳤다.
화물을 뒤지러 나간 세하 비장과 병사들이 돌아오는 데는 30분 가까이 걸렸다. 그들은 덜덜거리는 내연기관 트럭에 야광 줄을 둘려 묶어놓은 육중한 꾸러미를 싣고 의기양양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이것 같습니다. 신호를 내고 있어서 바로 찾았습니다.”
힘 좋은 네피가 훌쩍 뛰어올라 병사들과 함께 짐을 내렸다. 가디언과 병사 십여 명이 달라붙어 낑낑대며 짐을 철성 안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게 뭐야?”
옥상에서 내려온 카렐이 짐을 풀어내자 잘 포장해 놓은 원본 노트가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노트를 펼쳐보니 지난번 아트위야의 불릿에서 찾아냈다는 잔딕 수술기록이었다. 황제령에 남겨두고 온 이들 중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고향행성의 문자로 쓰여 있었다. 카렐은 의무실에서 달려온 니사와 라스에게 노트를 불쑥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 둘이서 이걸 공용어로 번역해 놓게나.”
노트 밑에는 아무 표시가 없는 제법 큰 완충상자 한 개가 짐을 다 싼 후 누군가 뒤늦게 추가했는지 줄로 서툴게 묶여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상자를 열어 본 카렐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그 안에 들은 건 정밀한 척추 수술을 할 때 쓰는 지지대와 전자 현미경이 붙은 수술용 확대경, 낯선 외과도구와 몇 가지 약품이었다.
“누가 이걸 보내라고 연락한 거냐?”
딱 봐도 분노한 황제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코리온이 뒤늦게 터벅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터빈실에서 막 나온 그는 허리에 공구 벨트를 찬데다가 온통 기름때와 먼지까지 뒤집어써서 학자라기보다는 현장에서 망치를 휘두르는 작업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운 얼굴과 질끈 묶은 긴 머리칼은 이 험악한 곳에서도 여전히 빛이 나고 있었다.
수술도구를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황제와 그 앞에서 눈치를 보며 떨고 있는 사람들을 빙 돌아본 코리온은 바로 상황을 눈치챘다. 특히나 니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제가 보내라 했습니다, 폐하.”
코리온이 불쑥 나서자 황제의 눈가에서 끓던 노기가 일단 꺾였다. 놀란 니사가 코리온을 힐끔 올려보았다가 얼른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카렐도 둘 사이에 오가는 눈빛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 상자를 신경질적으로 휙 치워버렸다.
“안 보이는 데다가 처박아 놔.”
수술기구 밑에는 강철제 부품 몇 무더기가 실려 있었다. 짐이 이렇게나 무거웠던 이유였다.
“이거면 되겠소? 학장?”
카렐이 재차 코리온을 힐끔 돌아보았다. 코리온은 꾸러미에 든 부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예, 이거면 대충 수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카렐은 묵묵히 일어나 병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것들을 터빈실로 옮겨라. 곧 남부연합군이 도착할 테니 환영이라도 해 줘야 되겠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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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온 혈통들은 이래저래 카렐 속을 팍팍 썩이고 있습니다....
분량이 애매해서 이번에 좀 긴 대신에 다음편이 약간 짧아질 것 같네요.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밉심다~~~( ̄∇ ̄)ブ~~★
그나저나 지금 분위기로 봐선......3부의 엔딩 출판본이 8권이 아니고 9권으로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재본에서 추가된 부분도 엄청 많은데 그걸 7, 8권에 다 넣으려니 분량이;;;;
끄응~ 마지막 출판공지가 좀 늦어져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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