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83화 (1,078/1,132)

< -- 1083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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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달 도착부터 날벼락을 맞은 칼데아군은 여전히 고향행성 대기권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스페이스에서 충돌한 3척의 대형 수송선은 승무원과 공병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수습이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부서진 선창에서 어마어마한 화물이 스페이스로 쓸려나갔고, 쓸려나간 컨테이너에 충돌한 9척의 수송선이 다시 파손되었다. 선체에 큰 구멍이 난 상태에서 수송선이 대기권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여기에 앞뒤로 부딪친 수송선 3척도 역시 스페이스에 둥둥 뜬 멍텅구리배가 되었다.

“손상된 수송선을 고치는 데 얼마나 걸리겠냐?”

제일 바빠진 참모장 이렌느가 애꿎은 수송선단장을 붙들고 억지로 분노를 삭이며 물었다. 선단장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본토에서 당장 수리선이 와서 손보아도 최소 3일은 소요됩니다.”

“미치겠네.”

이렌느는 고함을 버럭 지르고픈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이마를 싸쥐었다. 하지만 지휘부가 있는 브리지에 그처럼 자제력이 강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씨발, 처음 사고 친 게 누구야? 멍청한 첫 번째 수송선 선장 놈 당장 잡아들여!”

칼데아군 총사령관이고 자칭 황제인 카나르가 언성을 높였다. 수송선단 60척 중 15척, 그것도 가장 덩치가 커서 움직임이 둔했던 수송선들이 마치 골라낸 듯 날벼락을 맞았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사망자는? 잃은 화물이 얼마나 되냐?”

“선창을 관리하던 사역병 1천 1백 명이 순직했습니다. 대부분은 시체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스페이스로 날아간 화물은 중장비와 야전막사용 장비의 절반 정도, 예비 군마 5천 필, 군량의 2할 정도입니다.”

선단장의 대답에 카나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향행성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1천이 넘는 사람과 그 5배나 되는 군마가 공중으로 날아간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수송선이 빨리 착륙하지 못하면 아직 살아있는 나머지 예비 군마들도 살리기 힘듭니다. 군마 수송용 컨테이너는 하루를 버티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선창의 다른 화물들도 극저온의 진공에 오래 노출되면 못 쓰게 되는 게 많습니다.”

“다 버리게 된다고?”

선단장이 차마 ‘그렇다’고 대답은 못 하고 다시 카나르의 눈치만 보았다. 카나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손으로 고향행성을 가리켰다.

“됐다, 다 집어치고 계속 묶여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상륙부터 한다. 수리 전엔 성한 수송선이 왔다갔다하면서 옮겨 실으라고 해.”

모양새는 조금 우스꽝스러워졌지만, 칼데아군의 대선단은 착륙이 불가능해진 15척의 대형 수송선을 뒤에 남겨놓은 채 고향행성에 천천히 접어들었다. 도선사가 키를 잡은 사령선이 선두에 서서 검은 소용돌이 구름으로 뒤덮인 판지셰르 분지를 향해 천천히 고도를 낮추었다.

“선단 전체에 알린다. 모두 자리에 앉거나 벨트를 매고 몸을 고정해라. 떨어질 만한 물건은 미리 치워놓도록.”

도선사의 조언을 받은 사령선 선장이 선단 전체에 알렸지만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장 사령선의 함교에서도 장교들이 시시덕거리며 경고를 들은 척 만 척 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고, 심지어 카나르조차도 벨트를 매라는 야투 박사의 권고에 짜증스레 손만 젓고 있었다.

이들의 여유로움은 채 10분을 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 흔들리기 시작한 수송선 바닥은 어어 하는 새 사람을 쓰러뜨릴 만큼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가 이래?”

상석에 앉은 카나르가 무심결에 의자의 팔걸이를 꽉 붙들었다. 선단에서 가장 큰 군용 수송선이라 해서 이곳의 검은 폭풍이 봐 주는 건 아니었다. 사령선 전체가 대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란하게 앞뒤사방으로 흔들렸다. 이런 험악한 항해를 한 번도 해 본 일 없는 함교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며 사방에서 소음이 귀를 찢었고, 중심을 잃은 병사들이 자빠지는 소리와 격한 진동에 익숙지 못한 장교들이 멀미가 난다며 봉투를 찾고 화장실로 달려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우읍.”

헤즈가 가까스로 찾은 봉투에 입을 대고 토하는 모습에 클리멘트가 들으란 듯 빈정거렸다.

“덩치 값도 못 하고.”

덩치값 못 하는 건 헤즈뿐만이 아니었다. 클리멘트의 아버지인 마누엘도 사색이 다 되어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함교 정면의 창은 어느새 검은 폭풍이 뒤덮어 코앞조차 보이지 않았고 바닥엔 넘어져서 일어나려 버둥거리고 있는 장병들이 족히 10명은 넘었다.

“선체는 멀쩡한 거겠지?”

카나르가 차마 무섭다는 티는 못 내고 괜히 목청만 잔뜩 높였다. 교단 소속의 도선사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칼데아군 지도부에 엿 먹으라는 듯 아무 대답도 않고 더 속도를 붙였다. 성층권 경계의 가장 격한 검은 폭풍 권역에 접어들면서 카나르도 하마터면 상석에서 볼썽사납게 뒹굴며 떨어질 뻔했다.

“멀쩡한 거냐고!”

참다못한 카나르가 막 비명을 내려는 찰나. 돌연 진동이 절반으로 잦아들며 눈앞이 탁 트였다. 물론 트였다는 것도 가장 격렬한 폭풍 권역을 벗어나 대기권의 흑갈색 뿌연 대기로 ‘조금 나아졌다’는 의미이지 맑은 날씨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숨 막힐 듯 짙은 대기 너머로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웅장한 산의 자태와 그 양옆으로 길게 날개를 펴고 있는 분지 북쪽 산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제플린 산입니다. 저 꼭대기의 고원에 검은 철성과 황금탑이 있습니다.”

야투 박사는 검은 소용돌이 구름을 머리에 털모자처럼 이고 있는 가장 높은 산을 가리켰다.

“허, 무슨 상어 지느러미 같네.”

카나르 황제가 다시 억지로 태연한 척했다. 이전 황실 일행의 비유대로, 줄곧 바람을 맞은 산의 서쪽 사면은 움푹 패고, 동쪽엔 모래가 쌓여 둥그스름해진 것이 마치 상어 지느러미 같았다. 수송선은 그 제플린 산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한때 판지셰르 낙원으로 불렸던 분지에 낮은 고도로 천천히 접근해갔다.

“291년에 꼴이 이런 지경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임달 결전에도 참전했던 마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오르마즈와 싸웠던 당시만 해도 해와 하늘도 보였고, 이런 거센 바람은 없었다.

“설마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는 행성에 우리가 뒷북치고 들어와 있는 건 아니겠지?”

항상 의심 많은 클리멘트가 이번에도 잔뜩 의심에 찬 시선으로 야투 박사를 노려보았다. 야투 박사가 정색을 하며 그에게 두툼한 지도 자료를 내보였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놈들이 검은 철성을 껐기 때문이고요, 행성의 나머지 지역은 점점 살 만한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때 열풍으로 사막이 되었던 곳에 원시 바다도 생겨났고 기온도 매년 무섭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런 곳들 지하에 과거 살던 원시 바이러스나 미생물이 여전히 살아남아 있어서 언제든 환경만 갖춰지면 부활할 거라는 사실이죠. 약간의 투자만 이루어지면 비엔 정도는 댈 바도 아닐 겁니다.”

클리멘트는 야투 박사의 큰소리에 반신반의하며 그가 내민 지도를 뚫어지게 살폈다. 하지만 그가 보는 부분은 결국 그가 황제와 대결을 펼쳐야 할 판지셰르 분지 일대였다.

사령선은 하임달 전장이었던 누런 분지 위를 스치듯이 날아 한때 분견대 기지가 있던 널찍한 평지에 조심스레 착륙했다. 하지만 조심스럽다고 해 봤자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는 미세 돌풍에 거대한 선체가 쿵 소리를 내고 주저앉는 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수송선이 바닥을 디디는 순간, 함교 전체에서 ―아마도 수송선 전체에서― 승무원과 군인들의 비명이 실내를 울렸다.

“고향행성 하임달 9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야투 박사가 특유의 짓궂고 연극적인 자세로 카나르와 일행들에게 두 팔을 벌렸다가 두 손을 가슴에 모아보였다.

사령선을 어렵사리 쫓아온 선단의 수송선들도 하나 둘씩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몇몇 수송선은 제대로 착륙하지 못하고 갑작스런 하강기류를 맞아 엉뚱한 곳에 머리나 옆구리부터 처박았고, 또 다른 몇 척은 난기류에 랜딩보드가 주저앉아 동체착륙을 하는 바람에 장병들이 밑으로 못 나오고 위에서 줄사다리를 내리는 꼴사나운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곳에 익숙한 도선사가 탄 사령선을 빼면, 무탈하게 제 위치에 착륙한 수송선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크고 작은 손상을 입거나 엉뚱한 곳을 디디고 서서 본대가 어디 있냐며 찾는 유치한 소동을 벌였다.

“개판이 따로 없군.”

매사 냉소적인 이렌느가 벨트를 풀고 일어나며 한 말이야말로 위풍당당과는 거리가 먼 칼데아군의 개선을 가장 정확히 묘사한 것이었다. 착륙이야 어쨌든, 카나르 황제를 선두로 한 지휘부 일행은 선창에서 대기 중인 근위부대 장병들의 사열을 받으며 출구 앞에 섰다.

“이걸 쓰시는 게 좋을 텐데요.”

함께 내려온 야투 박사가 카나르에게 마스크를 내밀었지만 옆에서 촬영 장비를 들고 있는 기록병(兵)을 힐끔 돌아본 그는 괜찮다며 호기롭게 손을 저었다.

“됐어. 개선장에서까지 얼굴에 무얼 가리는 건 모양새가 나쁘지.”

명색이 황제가 마스크를 쓰지 않았으니 아랫사람들이 눈치 없이 마스크를 쓸 수는 없었다. 마스크를 쓰려 했던 장병들이 눈치를 보며 도로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럼 원하시는 대로.”

야투 박사가 히죽거리며 혼자 마스크를 썼다. 이 자리에서 마스크를 쓴 건 그와, 함께 탔던 도선사 둘뿐이었다. 그리고 수송선의 출입문이 천천히 열렸다.

“우욱.”

카나르가 방금 전의 선택을 후회하는 데는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해치 안쪽으로 무섭게 몰아친 강풍에 뚱뚱하고 둔한 헤즈가 제일 먼저 주저앉았고 제대로 긴장하지 않았던 장병들이 우수수 중심을 잃고 넘어지거나 휘청거렸다.

“염병할, 이런 데서 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카나르 황제는 입가에 맴도는 이런 욕을 속으로 꾹 삼키며 바람을 헤치고 씩씩하게 밖으로 나섰다. 그는 이곳의 땅을 디디며 칼데아의 땅이라고 멋들어진 사자후로 선언할 참이었지만 눈도 뜨기 힘든데다가 탁한 공기가 콧구멍을 간질였고 입이라도 열었다가는 먼지로 목구멍이 바로 막힐 것 같았다.

“이크.”

눈을 감았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던 그는 옆에 있는 근위장교가 붙들어준 덕분에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다행히 하급 장병들은 투구의 스코프 덕분에 일단 눈이라도 뜨고 있어서 순전히 폼 때문에 맨얼굴로 나섰던 고위 무장들보다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스코프 위에 고글 안 쓰시면 한 시간이면 렌즈 다 나갑니다.”

뒤따르던 야투 박사가 슬쩍 조언을 주었다. 그 말에 당황한 몇몇 장병들이 스코프를 확인해 보니 이미 자잘한 흠집이 나 있었다.

“왜 이런 곳이라고 미리 얘기 안 했어?”

견디다 못한 카나르가 폼이건 뭐건 다 포기하고 고글과 마스크를 허둥지둥 챙겨 썼다. 이미 골백번 넘게 언질을 주었던 내용에 뜬금없이 핀잔을 당한 야투 박사가 슬쩍 눈을 흘겼다. 카나르가 계속 성질을 냈다.

“그나저나, 너희 현신은 어디에 있고 날 마중도 안 나온 거냐?”

순간 야투 박사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내내 가볍던 그는 이번만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어느 쪽이 도움을 받고 있는지를 상기하시고 지킬 것은 지켜 주시옵소서.”

내심 네코와의 기 싸움을 이기고 들어가려 했던 카나르는 이곳의 험악한 환경과 이들의 단호한 태도에 일단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곳의 분위기로 보아 처음 얼마간이라도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이곳에서 죽지 않고 사는 것도 쉽지 않을 듯했다.

“현신께선 공사장 아래의 숙영지에 계시니 폐하께서 먼저 문안을 가시는 것이 예의일 것입니다.”

야투 박사의 제안에도 카나르는 못 들은 척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네코가 마중을 안 나온 건 참을 수 있지만 먼저 문안을 가라는 건 명색이 황제를 선언한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기서도 정치 놀음을 하고 있는 카나르와는 달리, 이 자리에서 제일 바쁜 건 참모장을 맡은 이렌느였다. 서둘러 고글과 마스크를 챙겨 쓴 그는 한때 분견대 기지가 있던 불쑥 솟은 높은 바위 언덕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계획대로 막사를 설치해! 랜드마크는 저 언덕이다! 저 위에 사령부를 설치할 테니 공병대 엔지니어들은 당장 측량해서 경계선 그리고 부대별로 위치를 배정해! 빨리! 빨리!”

이렌느가 톤 높은 여자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워낙 바람이 강해 제대로 소리가 전달되지도 않았다. 답답해진 그는 할룩스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통신 상태도 썩 좋지는 않았다.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대충 참모장의 지시를 확인한 공병대 엔지니어들이 몰아치는 모래폭풍 속에서 측량장비를 들고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숙영지 건설만도 장난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이렌느가 카나르에게 바싹 붙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정지에서 너무 멀리에 잘못 착륙한 수송선들에서 거기까지 어떻게 가냐며 불평하는 소리가 벌써 귀찮을 만큼 할룩스를 울리고 있었고, 중장비가 실린 수송선이 사고로 착륙을 못 해 인력으로 보급품을 내리라는 장교들의 외침에 사병들이 투덜대는 모습이 사방에서 보였다.

“당장 이 분지부터 고소증세가 보이는데요. 당장 저부터도 약을 먹어야겠습니다.”

이렌느는 부관이 내민 알약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가진 고도계는 해발 24스타디아(3,600m) 조금 못 되는 고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여기서 나름 저지대라는 분지가 이 정도라면 철성이 있는 고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쯤이면 장병들 고소적응훈련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하기 싫어 안 했소?”

카나르가 투덜거렸다.

“마땅히 할 만한 곳도 없고, 그 기간엔 훈련도 쉬고 있어야 한다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 탈이지. 이 정도 고도는 금세 적응할 거요.”

“송풍로하고 산 위의 철성은요? 거기 고도는 46스타디아(6,900m)나 된다면서요?”

“이놈의 폭풍만 아니면 상관없소. 어차피 거기야 많은 병력이 가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

카나르가 정신 못 차리게 몰아치는 검은 폭풍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플라칼 가와 델루지 가 사역병 2천명 준비시켜서 송풍로로 보내. 차량도 없고 어차피 고소적응을 해야 하니 걸어서 가라고 해. 장비는 교단에서 쓰던 것 대충 쓰고 인력 위주로 한다.”

인력 위주로 2천이나 동원한다는 말에 이것저것 재기 좋아하는 이렌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뒤이어진 지시는 더 쇼킹했다.

“당초 계획대로 실시한다! 플라칼 가와 델루지 가, 호지 가는 내일까지 송풍로를 뚫고 내일 저녁엔 철성인지 뭐시긴지에서 저녁을 먹는다. 세닉 가는 반대편 서쪽에 다리 끊긴 협곡을 다시 잇는다! 거기도 내일 저녁까지 대군이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완성해!”

카나르의 황당무계한 명령에 참모장 이렌느는 물론이고 단순우직하기로 소문난 마누엘까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곳의 지도를 대충 눈으로 확인한 마누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송풍로 공사장까지 가려면 80스타디아나 걸어가야 합니다. 공사장의 해발고도는 37스타디아(5,500m)가 넘고 정상까지 고도차도 22스타디아(3,300m)나 됩니다. 지금 여기도 고산병을 느낄 정도인데 그런 강행군 작업은 불가능합니다. 바닥에 삽 한 번 못 꽂아보고 절반 넘게 나동그라질 겁니다.”

“그래서요!”

카나르가 버럭 화를 냈다.

“우리가 남는 건 인력뿐입니다. 비효율적인 걸 모를 것 같아요? 지금 시간이 문제인데 효율 따위 따지게 됐습니까? 나도 압니다! 잘해야 절반쯤 현장에 도착하겠죠! 삽질 한 번만 하고 주저앉아도 상관없고 몇 놈 숨 막혀 심장마비로 뒈져도 됩니다. 어차피 여기서 막사나 짓고 뭉갤 놈들 아닙니까! 버티는 놈들은 부려먹는 거고, 못 하는 놈은 거둬서 병원에 넣으면 돼요!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최대의 자원이 인력이니 그걸 최대한 활용하다는 게 뭐가 어때서요!”

신경이 곤두선 카나르의 대꾸에 말문이 막힌 마누엘도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모여! 모여! 맘대로 흩어지면 너희 손해다! 길 잃고 죽어도 아무도 못 찾아!”

사역병단에서 엔지니어와 사관들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카나르의 말대로, 선봉대에서 차출된 2천여 명의 사역병들이 삽과 등에 짊어질 버킷, 손수레와 이틀간 먹을 것과 침낭, 아주 기초적인 장비들만 챙겨 한쪽에 와글와글 모였다. 중장비 따위는 없었고, 그들에게 따로 지급된 건 고산병을 완화하는 알약 한 알이 전부였다.

“부교 자재 다 내렸어? 빨리! 빠진 거 없나 확인해! 빠뜨린 놈은 내려와서 등에 지고 올라가게 할 테다!”

그 옆에서는 산 서쪽의 바위협곡으로 올라가 다리를 새로 지을 세닉 가 엔지니어와 사역병 5백 명이 허겁지겁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고소 적응이고, 오리엔테이션이고 뭐고 없었다. 그들 한쪽에선 이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뒤로 다시 투입될 수천의 사역병들이 이미 장비를 지급받는 중이었다. 카나르의 말대로, 이들에게 넘쳐나는 건 인력뿐이었다.

“출발! 설명은 가면서 한다! 줄 놓치지 말고! 줄 놓쳐 길 잃어도 못 찾으니까 각자가 알아서 해!”

아직 영문도 모르는 사역병들은 먼저 온 교단 헤네티의 길안내를 받으며 일단 줄을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혹시라도 폭풍 속에서 길을 잃을까 하는 맘에 야광 처리를 한 십여 개의 긴 밧줄을 드리워 한 손에 쥐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그들 뒤로 공사에 쓸 접착용제를 가득 실은 차량이 덜덜 거리며 따랐다.

송풍로 공사를 할 사역병들의 강행군은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남부 비엔에서 10시간을 꼬박 비행해 바로 이런 고지대에 내려진 것만도 힘들게 했지만 그 정도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호흡도 힘든 마스크와 갑갑한 고글을 쓰고 무거운 짐까지 맨 채 오르막길을 행군한다는 건 건장한 장병들에게도 버티기 괴로웠다. 남부 보병대의 엄한 군기 속에서 훈련받은 이들은 낯빛이 창백해지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기를 쓰고 걸음을 옮겼지만 고도가 높아지며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의무병! 의무병!”

곳곳에서 쓰러지는 병사들이 생겨나면서 군의관과 의무병을 찾는 고함이 울렸지만 의무병이 할 수 있는 건 뒤따르는 후발대가 후송할 수 있도록 발신기를 달고 물통 하나를 쥐어준 채 그 자리에 눕혀놓는 것뿐이었다. 2천의 사역부대는 지쳐 나동그라진 병사들을 마치 파편처럼 뒤에 줄줄이 남겨놓은 채 송풍로 공사장으로 꾸준히 전진했다.

2천으로 출발한 칼데아군 사역병 부대가 해발 37스타디아(5,500m)의 송풍로 공사장에 도착한 건 점심때가 다 된 시각이었다. 오는 도중 거의 7백 가까운 병사들을 잃은 그들은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녹초가 다 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본토에서 쓰던 차량은 거의 절반이 중간에서 멈추고 서고를 반복해야 했다. 도착 후,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칼데아군은 차량과 장비 사정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교단의 권고에 따라 모든 기계장비에 필터도 달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인식 못 한 본토의 정비공들은 대충 중요부분에만 필터를 대어 시늉 정도만 했고, 마무리도 깔끔치 못했다. 결국 2천의 사역병들은 자신들의 지친 몸뚱이에 더해 멈춰버린 차도 밀어야 했고, 고장이 난 차를 고치기 위해 몇 번이나 허리와 하체에 온 힘을 다 써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흐늘흐늘 지친 몸보다도 더 그들을 실망시켰다. 원래 7부 능선 가까이까지 전진했던 공사 현장은 지난번 카렐과 가디언들의 기습으로 다시 붕괴되어 다시 5, 6부 능선 부근까지 후퇴한 상태였다.

“이걸 다 파내라고요? 밑으로 내려가서요?”

현장을 처음 눈앞에서 확인한 엔지니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때 바닥까지 드러냈던 송풍로는 도로 무너진 고운 화산재와 모래가 절반 가까이 다시 채워놓은 상태였고, 잘못 건드리면 우르르 무너질 판이었다. 지난 기습으로 밑에서 흙을 퍼 올리는 펌프의 절반이 땅에 파묻혀 이젠 2대밖에 안 남았고, 이젠 ‘최소한 갑자기 고장이 날 일은 없는’ 인력으로 모두 해결해야만 했다.

“자칫 잘못 건드려 붕괴되면…….”

“그러니 조심해야죠.”

먼저 와 있던 교단 엔지니어의 대답은 간단해도 너무 간단했다. 1천 3백의 사역병들은 삽 하나씩만을 든 채 줄사다리를 타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송풍로 밑으로 내려갔다.

“작업 시작!!”

복잡한 작업지시 같은 것도 없었다. 송풍로 전체를 발 디딜 틈도 없이 2줄로 꽉 채운 병사들은 사람 두 명 지나갈 폭의 좁은 송풍로 바닥에 서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흙을 구령에 맞춰 쉴 새 없이 파내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흙이 무너지지 않게 계속 용제를 뿌렸지만 그것이 완벽한 안전을 보장하는 건 아니었다. 까마득한 흙무더기 밑에 선 이들을 지켜주는 건 그저 행운과 위기를 느끼는 동물적인 직감 하나뿐이었다. 10층 깊이의 땅밑으로 내려와 그나마 좋은 건 지상의 모래폭풍이 여기까지 몰아치지는 않는다는 정도였다.

“펌프! 펌프 최대한으로!”

펌프에 연결된 굵은 주름관을 어깨에 지고 온 사역병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파낸 흙은 2대밖에 되지 않는 펌프가 일부 끌어올려 주변에 뿌렸고, 나머지는 사역병들의 튼튼한 어깨와 등이 해결해야 했다. 버킷을 짊어지고, 수레를 미는 병사들은 위에서 도르래에 걸어 내린 거대한 금속 상자에 계속 흙을 옮겨 담았다. 그나마 교단 작업자들이 이 정도 장치라도 설치해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들은 이런 것들을 일일이 만들어 설치하는 데만 꼬박 며칠은 걸렸을 터였다.

“4시간 작업한 후 2시간 휴식하고 다시 4시간 작업한다! 잠잘 시간 따위는 없다! 교대로 조를 나누어 철야로 작업해 내일 저녁까지 8부 능선의 정상에 도착한다! 알겠는가! 시간 맞춰 작업량을 소화 못하는 조는 배식을 반으로 줄인다!”

오랜 항해에 지치고, 행군에 녹초가 되고, 고산병에 발목이 붙들린 사역병들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삽질을 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판지셰르 분지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도 강풍과 씨름을 하며 야전 막사를 세우느라 생고생을 하고 있었다.

35만 칼데아군의 하임달에서의 첫 작전은 피 튀기는 전투도, 긴장되는 정찰도 아닌, 말단 사역병들의 삽질과 불평, 욕설로 물들었다.

제2차 하임달의 결전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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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르도 나름 똑똑한지라.....최소한 자신의 강점은 알고 그걸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드디어 새로운 하임달의 결전입니다. ㅎㅎㅎ

그리고 오늘 아침 전자책 3부 5,6권을 업데이트했습니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따라잡았네요. 유페이퍼엔 주말이나 주초면 판매시작되겠지만 서점들에 깔리기까진 며칠 걸릴 듯합니다.  마지막 7, 8권 출판에선 종이책과 전자책을 함께 낼 참입니다.

(그나저나 KT올레e북은 3달 전에 보낸 3부 1, 2권도 아직 업데이트를 안 해주고 있네요. 재촉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할 거라고만 하고.....누가 철밥통 기업이라고 안 할까봐;;...인터파크도 좀 늦어서 한달 반 전에 보낸 3,4권이 아직 안 올라있네요. 원고 파일은 모든 서점에 동시에 전송하고 있으니 그쪽에서 구매하시는 분들께선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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