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84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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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플린 산의 북쪽에 불릿을 세운 아샤드 경과 주페, 가디언들은 이전 호드르 산의 폭동 당시 교단군에게서 탈취한 [개량 망원경]을 눈에 대고 몇 시간째 산의 북벽을 여기저기 살피는 중이었다.
“이거야 원, 뭐가 제대로 보여야 말이지.”
아샤드 경이 눈에서 망원경을 떼며 짜증을 냈다. 이 망원경은 교단이 쓰는 것과 같은 물건은 아니었다. 코리온은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했던 교단의 특수 망원경에 몇 개의 필터를 더해 화질을 ‘약간’ 개선했지만 그래도 가까스로 실루엣만 구분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는 않았다.
“아무 것도 안 보입니까?”
주페가 옷자락을 툭툭 당기며 물었지만 아샤드로서는 고개를 젓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손끝으로 멀리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체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입니다. 높이만 20스타디아(3,000m)가 넘는 이런 통짜 절벽은 저도 처음입니다. 짚을만한 곳도 없고 말 그대로 거울 같습니다. 처음 왔던 코메트들이 헛말을 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휴우.”
주페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정말로 산의 북벽은 일부러 칼로 뚝 썰어낸 것처럼 매끈한 절벽이었다. 꼭대기 부근은 몰아치는 폭풍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리프팅케이블을 쏠 수는 없고요?”
“폭풍이 워낙 심해서 리프팅 케이블도 제대로 날릴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워낙 단단해서 박힐 것 같지도 않고요.”
“그렇군요……. 우리가 먼저 등반해서 로프라도 걸어놓으면 크바르나가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주페가 아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감히 북벽을 오를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건 이곳과 하임달 5번 행성을 오가던 분견대의 장거리 셔틀 덕분이었다. 황제가 분견대와 함께 검은 철성에 올라간 후, 셔틀은 그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예비 보급품을 가득 실은 채로 열흘이 넘게 남쪽의 대양저에서 손가락만 빨며 출동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셔틀의 잡다한 화물 중에는 분견대에 비치되어 있던 여분 등반장비도 있었다.
“근데 나 언제 내려줄 거야?”
주페는 동생의 징징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안은 헨지가 등에 멘 커다란 바구니 안에 타고 있었다. 모양새는 편해 보이지만 사실 마리안은 오빠에게서 벌을 받는 중이었다. 불릿이 어렵사리 착륙하기가 무섭게 후다닥 뛰어내려 모래폭풍 속으로 사라지면서 안 그래도 바쁜 가디언들이 10분이 넘게 귀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대가였다. 워낙 체구도 작은데다가 잠시만 한눈을 팔면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꼬마를 이런 정신없는 모래폭풍 속에 내놓을 수 없는 주페의 극약처방이었다.
“이제 안 뛰어다닐게, 오빠.”
“안 돼. 거기서 꼼짝 말고 이상한 거 들리면 얘기나 해.”
주페가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동생의 애교를 외면해버렸다.
“네가 뭐 특별한 거 발견하면 그때 풀어줄지 생각해 볼게.”
“쳇.”
셋은 계속 절벽을 옆에 끼고 서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검은 폭풍은 여전했고, 산의 형상은 실루엣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상 부근으로 올라가려면 바위가 갈라진 골짜기라도 나타나거나, 아니면 최소한 사람이 매달려 암벽등반이라도 할 만한 크랙이 있어야 하지만 이 절벽은 어디 가서 일부러 찾기도 힘들 만큼 가도가도 매끈했다. 헨지의 뒤에 있던 마리안이 다시 구시렁거렸다.
“나 내려 줘, 오빠야, 갑갑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주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 나는데 안 알려준다.”
주페와 아샤드 경, 가디언들이 그제야 이 꼬마에게 시선을 주었다.
“얘기해 봐. 쓸 만한 내용이면 내려줄게.”
“싫어, 먼저 내려 줘.”
“그럼 관 둬.”
동생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난 주페는 이 꼬마의 수작에 쉽사리 넘어가주지 않았다. 오빠가 성큼성큼 앞장서가자 마리안이 기겁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물소리하고 물냄새 나. 정말이야.”
“물? 여기에 말입니까?”
아샤드 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살을 베어내는 듯 차가운 날씨에 건조한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곳에서 뜬금없이 물소리라니 언뜻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렸다. 주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물소리가 어디서 나는데?”
“조오~기. 길게 울려서 들리는 게 좀 먼 것 같아. 내가 앞장서서 알려줄게.”
어느새 초승달 모양이 된 동생의 음흉한 눈을 보며 주페가 눈을 흘겼다. 그는 마지못해 동생을 내려주고는 허리띠에 줄을 단단히 묶었다.
“또 멀어지면 아까 그 셔틀에 처박아놓고 못 나오게 할 거다.”
동생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주페는 신이 나서 앞장서는 꼬마를 따라 절벽을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폭풍 속에서 행여 길을 잃지 않을까 한 발 한 발 신경을 쓰며 디뎠지만 이 꼬마에게 그런 조심성 따위는 애당초 없었다. 마리안은 오르막 내리막에 크고 작은 바위, 푹 팬 구덩이 같은 것들을 귀신같이 요리조리 피하며 후다닥 앞장서서 달려갔다. 웬만해서는 당황하는 일 없는 주페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어렵사리 걸음을 디뎠다. 셋은 거의 정신을 못 차리고 10스타디아 가까이를 달렸다. 저 꼬마는 지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천천히 가, 다쳐!”
참다못한 주페가 고함을 지른 순간, 마리안이 우뚝 멈춰 섰다. 자기의 말 때문에 선 곳으로 알았던 주페는 멀지 않은 곳에서 ‘정말로’ 들려오는 물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여기야.”
마리안이 수직 절벽 틈새에 한 뼘 남짓 좁게 갈라진 틈 안쪽을 가리켰다.
“어?”
주페는 정말로 물소리가 나고 있는 바위 틈새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절벽 위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바닥에 무릎 깊이 정도로 고여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고인 물은 다시 땅속 어딘가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듯했다. 아샤드 경은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손을 넣고 살짝 떠서 맛을 보았다.
“깨끗합니다. 꼭대기 어딘가의 수맥에서 절벽 틈새를 타고 내려온 물인가 봅니다.”
“틈새를 타고 내려온 게 아니고 지난 수백 년 동안 물이 바위를 뚫고 길을 낸 것 아닐까요? 코메트들이 물을 발견했다면 분명 기록에 남겼었겠죠.”
주페가 맨들맨들한 바위틈새를 만지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크지 않은 물줄기는 그 오랜 세월 수직의 단단한 절벽 중간을 조금씩 깎아내며 결국 이 절벽 아래까지 닿아 있었다.
“어쨌든 바위가 갈라진 곳이 나왔으니 타고 올라갈 수 있지 않나요?”
주페가 아샤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물이 있는 곳을 따라가면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죠.”
다룬이 히죽거리며 끼어들었지만 평소 누구보다 단순무식한 가디언이 나름 아는 척 한다고 꺼낸 말은 그다지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건 사람이 사는 곳 이야기고. 여긴 사실상 무인행성이요.”
아샤드 경의 참견에 다룬이 무안하게 머리를 긁었다.
“혹시 아나요, 이렇게 물이 귀한 곳인데 정말로 사람이 있을지.”
“나 갈 수 있어, 나 올라갈래. 내가 갈게.”
주페는 옆에서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동생에게 조용히 하라며 손짓했다. 바위타기의 명수 헨지가 마리안이 탔던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고는 히죽거리며 손을 툭툭 털었다.
“어쨌든 여긴 딱 내 몫이네.”
“그래, 니가 못 타면 황상 빼곤 아무도 못 탄다는 뜻이지.”
다룬이 킬킬거리며 그에게 로프와 등반장비를 내밀었다. 헨지는 물이 내려온 바위 틈새에 손을 넣어보았다. 가디언의 두툼한 손과 굵은 손목이 쑥 들어갈 정도의 폭이었다. 다행히 물은 안쪽으로만 흐르고 있고, 바깥쪽 바위는 건조했다.
“이번에야말로 특등급 이름값 해야지.”
헨지가 하네스를 몸에 두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제위전쟁 당시, 이암댐 전투에서 근위대 가디언 아리엘의 손에 중상을 입었던 그는 결국 남은 전쟁 기간 동료들이 공훈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는 것을 무기력하게 병상에서 구경만 하고 있어야 했다. 결국 그는 ‘절벽타기 같은 잡기(雜技)나 잘 하지 실전에서 무슨 도움이 되었나?’라는 사람들의 얼토당토않은 눈초리를 벗어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가 주인 페로를 조르고 졸라 이곳에 온 것도 그런 기회를 잡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캠을 설치하면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비가 부족한 것 같은데. 날씨도 이 모양인데 이걸로 될까?”
다룬이 분견대 셔틀과 자신들의 불릿에서 박박 긁어 가져온 등반장비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애당초 전문적인 암벽등반을 하러 온 참이 아니다보니 가진 장비라고는 고산지역에 배치되는 군부대에 기본 지급되는 장비가 전부였다. 결국 다 뒤져도 아주 기본적인 로프와 하네스, 바위의 크랙에 박는 앵커와 캠 몇 개가 전부였다.
“이 정도 크랙이면 할 만합니다. 제가 맨손으로 올라가면서 로프 설치하면 뒤따라 타고들 올라오십시오.”
헨지가 개량 망원경으로 위를 올려 보며 말했다.
“그런데 하루에 이 절벽을 다 개척하긴 힘들 겁니다. 중간께에 절벽의 각도가 꺾이는 곳이 있습니다. 그 부근에 평평한 곳이 조금 보이는 것 같으니 오늘 저기까지 올라 하룻밤 쉬고 내일 정상까지 올라가면 될 겁니다.”
“성공하면 ‘헨지 루트’라고 이름 붙여드릴게요.”
주페가 웃으며 헨지의 하네스 벨트를 직접 조여 주었다. 태자의 격려에 기가 오른 헨지가 바위 틈새에 손을 넣고 힘차게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 나머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밑에서 지켜보며 헨지에게 운이 계속 따르기만 바라는 것뿐이었다.
남부 4제후이고 칼데아군 참모장인 이렌느는 사령부에서 나와 있는 지금이 도리어 맘이 편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곳에 함께 있는 하마피타 교단 사람들을 접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거북스러웠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만, 하마타 교단 수장이었던 수나의 딸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죽은 어머니의 먹구름은 칼데아군의 일원이 되어 이곳에 온 딸의 머리 위를 계속 맴돌고 있었다.
군대가 막 주둔을 시작하고 참모장이 가장 바빠야 할 이 시간에 그가 느닷없이 ‘현장 시찰’이라며 부교 자재 수송부대를 뒤따라 나온 것도 5명의 하마피타 마구스들이 탄 크테시폰이 방금 삼각루트를 빠져나와 곧 사령부에 도착한다는 연락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이렌느에게 대놓고 적대를 보인 일은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 수나를 죽인 아트위야도 마찬가지였다.
“왜 내가 두려워하고 피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이렌느는 차창 밖을 스치는 검은 모래폭풍을 보며 넋두리를 했지만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는 측근은 없었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가해자이고, 이렌느는 어머니를 잃은 유가족이지만 큰소리를 치는 쪽은 그들이었다. 이렌느는 그런 처지가 내심 억울했지만 정치가로 빚어진 그의 이성은 항상 현실에 무릎을 꿇곤 했다. 심지어 아버지 요아킴과 어머니 수나 모두를 사실상 죽인 아트위야 앞에서도 그는 사무적으로 웃어 보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만큼 단련된 사람이었다.
그가 탄 차가 오르고 있는 제플린 산 서쪽 협곡은 이미 1천 명이 넘는 세닉 가 사역병들이 달라붙어 길을 다듬고 있었다. 그의 가문이 맡은 이 협곡은 산 반대편인 동쪽의 송풍로처럼 모래가 쌓이지는 않은 대신 거친 바위와 기반암, 거친 바위들이 그대로 노출된 험악한 길이었다. 십여 일 전 카렐 일행이 털털거리는 내연기관 차를 몰고 교단 헤네티들을 피해 검은 철성으로 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보시다시피 그새 많이 치웠습니다.”
공사를 지휘하는 사역병단 중랑장이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바닥을 눈으로 확인했다. 황실군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어마어마한 인력이 순식간에 투입되면서 고작 몇 시간 새 이미 큰 돌들이 거의 치워지고 구덩이들은 절반 이상 메워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차가 멈춰서더니 노인 목구멍 끓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난처해하며 이것저것 만지던 기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차를 바꿔 타셔야겠습니다.”
“또?”
작업 때문에 차가 선 것으로 알고 있던 이렌느는 기사의 말에 눈을 흘겼다.
“이번엔 또 뭐냐?”
“동력계에 이물질이 든 것 같습니다.”
이렌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망토를 쓰고 차에서 내렸다. 사실 한 시간 이상을 고장 안 나고 움직이는 차가 없을 지경이니 기사를 나무랄 일도 아니었다. 도로 공사 차량도 달리는 시간보다 길에 퍼져서 다른 차에 짐을 옮겨 싣는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렸다.
문제는 불량한 군수품이었다. 당초 북부, 서부에서 곡물 금수에 대한 보복조치로 중장비와 정밀 부품, 군수품 금수조치를 취했을 때, 제후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들은 핵심부품의 재고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고, 나머지 부품들도 영지 내의 공장에서 충분히 만들어 공급할 수 있다는 군부와 군수업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그렇지만 하임달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들의 호언장담은 바로 밑바닥을 드러냈다. 기술이 떨어지는 본토의 공장에서 조악하게 급조한 소위 ‘짝퉁’ 부품은 오자마자 고장을 일으켰고, 장비와 차량을 덩치만 큰 처치곤란의 쇳덩이로 만들었다. 그들은 칼릴로 보냈던 진압군이 불량 방한복 때문에 전멸당할 뻔했던 사건에서도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이렌느는 하는 수 없이 뒤따라오던 사역병들의 병력수송차로 옮겨 탔지만 고도가 높아지면서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산소가 희박해지면서 탈진한 병사들은 참모장이 지나가건 말건 널브러져 있기도 했고, 차가 올라오는 모습에 삽과 곡괭이를 드는 시늉을 하는 분대도 곳곳에 보였다. 길은 점점 좁아졌고, 나중엔 바로 옆 낭떠러지로 구르는 게 아닐까 싶은 위험천만하게 좁은 길도 나타났다.
이렌느는 그 뒤로도 차를 세 번이나 바꿔 타야 했다. 차가 멈추는 일은 재가 짙어지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잦아졌다. 필터를 갈고 몇 부분을 닦은 후 다시 시동을 걸면 몇 분은 움직였지만 임시처방에 불과했다. 길 옆에는 올라가다가 퍼져버린 차를 뜯어 고치고 있는 정비공과, 가뜩이나 고산병으로 신경이 곤두선 병사들의 욕을 한 몸에 먹고 있는 애꿎은 운전병들의 모습이 계속 보였다. 물론 퍼져버린 차에 못지않게 사람 역시도 사방팔방 길에 퍼져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넘게 꾸역꾸역 올라가 마지막에 다리가 끊긴 지점에 도착했을 땐 사실상 멀쩡히 움직이는 장병들을 보기 힘들어졌다. 차마 표현은 못 했지만 차 안에 앉아있는 이렌느 자신도 두통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꼴들이 이게 뭐냐?”
차에서 내린 이렌느 경이 주저앉아 있는 장병들의 모습에 버럭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저지대의 시민병들을 느닷없이 해발고도 34스타디아(5,100m)가 넘는 곳에 덜컥 올려놓고 삽만 덜렁 쥐어줬으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휘청거리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일부 정예 병력은 고지대 적응훈련도 시켰지만 막상 와 보니 고소에 제일 먼저 쓰러지는 건 전투병이 아니고 삽질을 하는 사역병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방진 마스크는 가뜩이나 힘든 호흡을 더 힘들게 했고, 견디다 못해 마스크를 벗었다가 그보다 더한 호흡곤란으로 쓰러진 이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몇몇 장교와 사관들은 부교 자재를 싣고 올라온 화물차량 운전병에게 쓰러진 병사들을 좀 후송해 달라며 부탁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곳에서 제일 멀쩡한 건 길안내를 했던 헤네티부대원들뿐이었다. 여기서 수십 일을 머물며 이미 고소에 충분히 적응한 그들은 병든 닭장 꼴이 된 남부 사역부대를 가리키고 뭐라 시시덕거리며 구석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빨리 자재나 내려!”
참모장의 호통에 장병들이 마지못해 일어나 이렌느가 가져온 부교 자재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남부와 교단 병력이 정상의 검은 철성을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선 송풍로와 함께 이곳의 다리도 복구해야만 했다.
“우리 가문이 다른 가문보다 늦어지면 안 된다!”
마음이 급해진 이렌느는 축 처진 병사들을 거칠게 떠밀었다.
“늦어지는 만큼 전리품도 없다는 걸 모르나! 우리 가문이 협곡을 먼저 통과하면 철성과 포로들을 하루 동안 약탈할 권리를 주겠다!”
이렌느의 재촉에 장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거 민병대 강경파가 장병들을 몰아붙이려 자주 써먹었던 ‘약탈권’은 제국과 군대의 체계가 잡힌 후로는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는 인정된 일이 없었다. 이렌느의 말은 철성에 남아있을 고향행성 골동품―본토에 가져가면 아마도 상당한 돈이 될―과 그곳에 주둔한 황실군 포로를 살해, 약탈, 강간할 권리까지 준다는 의미였다.
“정말이십니까?”
몇몇 양식 있는 장교들이 걱정 반 의심 반으로 물었다.
“내가 언제 헛말하는 것 봤냐?”
이렌느가 버럭 짜증을 내며 장병들을 째려보았다. 그는 실전 경험도, 군대를 지휘하는 데도 서툴지만 ‘사람을 다루는 것’만은 세상 그 누구보다 능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병사들을 재촉하는 데는 카나르처럼 무조건 윽박지르는 것보다 깜짝 놀랄 경제적인 이득을 주는 게 특효약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협곡을 먼저 뚫는다는 전제다.”
이렌느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 말에 군대밥 좀 먹었다는 지휘부의 무장들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각자의 자리에 되돌아갔다. 그들 모두, 사령관 카나르가 왜 서쪽 협곡을 세닉 가에게 맡겼는지 눈치를 채고 있었다. 플라칼 가와 델루지 가가 맡고 있는 동쪽의 송풍로는 딱히 방어선이랄 게 없는, 그저 끝없는 비탈이라 방어하는 황실군 입장에서는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말 그대로 인력과 장비를 많이 쏟아 붓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반면 이 협곡은 적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쪽에서 다리를 놓는 것을 손 놓고 보고 있을 리가 없고, 그들이 격렬히 저항해 다리 건설을 늦추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했다. 카나르는 세닉 가가 이 협곡이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느긋하게 철성을 점령하고 그곳의 전리품을 챙기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놈이 우릴 무시했으니 나도 대가를 돌려줘야지.”
이렌느가 피익 웃었다. 그는 카나르와는 생각이 달랐다. 무장들이 들으면 웃을지 몰라도, 그는 이곳을 오늘 내로 뚫을 자신이 있었다.
“여기냐?”
이렌느는 헤네티의 안내를 받아 다리가 끊겼다는 협곡으로 다가갔다. 십여 일 전, 카렐 일행이 고작 몇십 분 수명의 부교를 설치했던 자리엔 이제 시커멓게 녹아버린 이전 부교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오늘 밤까지 설치가 끝나겠나?”
이렌느가 뒤따라온 엔지니어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엔지니어들은 물 먹은 솜이 되어 있는 장병들을 힐끔 돌아보고는 자신 없이 대답했다.
“철야작업이라도 해서 완성하겠습니다.”
엔지니어는 등 뒤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는 부교 자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수가 많다고 꼭 좋은 것만도 아냐.”
이번 부교는 이전 분견대가 쓰던 구름다리나 카렐이 분견대원들을 이끌고 지나가기 위해 임시로 설치했던 엉터리 경량 교량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후 이 다리로 수만의 병력, 철성을 복구하기 위한 수많은 차량과 장비가 지나가야 했다. 규모가 훨씬 크다보니 자재도 하나같이 크고 할 일도 많았다. 이전에 쓰던 가벼운 구름다리의 지지대는 쓸 수 없어서 새로 지지대도 박아야 하고, 옮겨야 할 자재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당장 내일 낮부터 병력 이동이 있을 예정이다. 최대한 빨리 끝마치도록 해.”
이렌느는 깎아지를 듯한 낭떠러지 경계에 바싹 다가섰다. 짙은 모래폭풍이 그의 앞을 막고 있고, 그 동쪽 너머 다리가 이어질 곳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으음?”
그는 무언가 불안한 느낌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저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움직여 병사들이 쌓아놓은 부교 상판 더미 뒤로 몸을 숨겼다.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려가야겠다. 곧 다시 오마.”
“젠장.”
카렐은 협곡 건너편을 향해 겨누고 있던 마우저를 거두었다. 이렌느의 느낌처럼, 협곡의 동쪽 건너편은 비어있지 않았다. 카렐의 존재를 느끼는 이렌느를 빼면 그들은 이쪽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지만, 카렐은 그들의 움직임을 손바닥처럼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의 주변엔 네피와 자이납을 선두로 삽과 절단기를 든 십여 명의 장병들과 발리스타 팀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년도 R은 R이야.”
카렐이 자이납에게 마우저를 돌려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표적이 0.5초만 늦게 움직였다면 상륙 첫날 적군의 참모장을 부하들 코앞에서 제거해 상대를 경악하게 했겠지만 그런 엄청난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 혹은 적의를 느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이렌느는 카렐의 시선이 닿은 순간, 곧바로 자재더미 뒤로 피해버렸고, 카렐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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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카렐이 마하와 마리안을 안 낳았으면 나머지 황자들만으로는 참 재미없이 살지 않았을까....생각도 해 봅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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