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86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
.
.
“일어나요, 일어나.”
검은 철성의 서쪽, 다리가 끊긴 협곡을 사이에 두고 칼데아군과 마주하고 있던 네피는 자이납의 손짓에 눈을 떴다. 눈을 일단 배시시 뜨긴 했지만 근 며칠 삽질 아니면 잠만 잤더니 시간관념도 무너졌고 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였다.
“저놈들 이제 시작하려나 봐요. 빨리 정신 좀 차려요.”
“벌써?”
네피가 헐레벌떡 도끼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자이납의 개량 망원경을 눈에 대고 협곡 건너편 서쪽을 살폈다. 교단이 만들었다는 이 망원경은 그레이오팔인 카렐이 직접 보고 알려주는 것과는 딴판이라 희미한 실루엣이 꿈틀거리는 정도밖에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발리스타 같은데? 새끼들 생각보다 빠르네? 놈들 아무리 머릿수가 남아돌아도 장난이 아니네.”
네피가 협곡 서쪽의 희미한 실루엣 영상에서 가까스로 표적을 구분해냈다. 병사들이 쓰러지건 말건 계속 새 교체인력을 들이부으며 다짜고짜 공사를 강행한 적들이 결국 성과를 이뤄낸 모양이었다. 건너편엔 이미 완성된 굵은 교량 지지대 2개가 떡하니 서 있었다.
“근데 제가 제대로 본 건지 모르겠는데, 아까 황상께서 보셨던 이렌느인지 머시긴지가 방금 또 온 것 같아요.”
“허어, 여기가 뭐 그리 좋다고 출근부를 찍지?”
이렌느가 왜 계속 사령부를 비우고 이곳에 지겹게 발도장을 찍는지 알 리 없는 둘은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며 임시로 만든 참호에 몸을 숨겼다. 아마 저들도 지난번 카렐이 그랬듯 일단 멀리까지 날릴 수 있는 가벼운 줄부터 발리스타로 쏘아 암벽에 박고, 진짜 다리를 받칠 굵은 와이어를 몸에 맨 특수부대원이나 헤네티를 보내어 양쪽으로 줄을 연결한 후에 상판을 하나하나 설치할 듯 보였다. 지난 33년간 남부 이그나토 가 보병대 사령관으로 있었던 네피는 이미 저들의 부교 설치법 따위는 머리에 줄줄이 꿰고 있다.
“가벼운 줄 걸 때는 가만히 놔둬. 몸에 줄 맨 놈이 똥 빠지게 건너왔을 때 마우저로 날려버리는 게 직빵이야.”
네피와 자이납은 낭떠러지 건너편에서 적이 발리스타를 바싹 당기는 모습을 지켜보며 참호 안으로 몸을 바싹 숨겼다. 그런데 그때, 미처 예상 못 했던 광경이 다시 보였다. 부실한 망원경 때문에 정확한 적의 규모를 확인 못 한 탓이었다.
“어? 발리스타가 또 있었네?”
네피의 말이 딱 끝나기가 무섭게, 그쪽에서 2개의 발리스타가 동시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어어 하는 새 200척(60m) 정도 좁은 폭의 협곡을 휙 넘어왔다. 네피는 순간, 발리스타가 날아오는 각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엎드려!!!”
거리가 너무 가깝다보니 네피의 고함은 별 의미가 없었다. 건너편에서 날린 발리스타는 절벽에 가벼운 줄을 박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열량의 연료를 머리에 잔뜩 실은 2발의 발리스타는 황실군의 참호 주변에 꽝 소리를 내고 꽂히며 사방으로 불꽃과 인화물질을 날렸다.
“으익!”
자이납과 네피가 비명을 지르며 참호 안에 머리를 처박았다. 발리스타는 그 두 발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들의 머리 위에 불덩이를 쏘아댔다. 네피가 참호 밖으로 잠시 머리를 내밀었다가 기겁을 하고 다시 움츠렸다.
“저 새끼들 언제 여기까지 발리스타 포탄까지 다 챙겨왔지?”
“그 양반이 말한 물량공세가 이거였나 봐요!”
“아니,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쏘는 거야, 무조건 쏘고 보는 거야?”
“우릴 봤을 리가 있나요! 되는대로 일단 쏘고 시작하는 거겠지! 남는 게 인력하고 무기뿐인데! 엄마야!”
참호 안까지 굴러드는 불타는 파편에 기겁을 한 자이납이 얼른 발로 밟아 불을 껐다. 카렐이 지시하고 간 깊은 참호와 가림막이 없었다면 쏟아붓는 발리스타 파편과 불꽃에 인명 손실이 제법 났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십여 명의 분대 중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듯했다.
“응사할까요?”
보병대의 발리스타 팀장이 다급히 물었지만 자이납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기다려! 우리가 있는지 간을 보려는 건지도 모르니까!”
그 사이, 참호 틈새로 머리를 내민 네피가 고함을 꽥 질렀다. 지금 포탄을 쏟아 붓고 있는 2문의 발리스타 너머로 또 2문의 발리스타가 보였다.
“뭐야, 저놈들, 대체 몇 문을 끌고 온 거야?”
네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발의 긴 발리스타가 동시에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이번 발리스타는 포탄을 실은 게 아니었다.
“어어?”
네피의 입이 쩍 벌어졌다. 2발의 발리스타 뒷부분에는 강선 두 줄 사이로 U자 모양으로 늘어진 주머니 모양 발판이 이미 달려있었다. 200척의 거리를 순식간에 건너온 발리스타가 쾅 소리를 내며 이쪽 절벽 거의 꼭대기 부근에 자로 잰 듯이 박히면서, 단 한 발 만에 사람 한 명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완성되었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야, 저 흉물은 또?”
할 말은 잃은 네피의 턱이 뚝 떨어졌다. 남부제후군 사령관으로 있던 그도 생전 처음 보는, 심지어 첩보로도 접한 일 없는 낯선 임시교량이었다.
“교단 놈들이 지원했나?”
해괴한 부교의 등장과 함께 포격도 잠시 중단되었다. 나름 똘똘한 자이납이 숨을 죽이고 속삭였다.
“저 새끼들 건너편에 우리가 있나 간도 보면서 시험사격으로 거리하고 지형을 파악하려는 거였나 봐요.”
이들이 머뭇거리는 새, 건너편에서 어깨에 묵직한 짐을 진 누군가가 방금 만들어진 다리에 휙 뛰어들었다. 당황한 네피와 자이납이 일단 튀어나갔다. 이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저대로 놔둔다면 이 일회용 다리가 차량까지 건널 수 있는 큰 다리로 변신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당장 끊어!”
마우저를 쥔 자이납은 낭떠러지 약간 밑에 박혀 있는 케이블을 향해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으익!”
자이납이 기겁을 했다. 사람 손목만한 굵은 케이블 머리 부분은 위력적인 마우저에도 약간 흠집만 나고 휘어졌을 뿐 거의 멀쩡했다. 그는 두 발, 세 발을 쏘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순간 꾀를 낸 자이납은 대담하게 절벽 밑으로 몸을 기울여 앵커가 박혀 있는 바위에 대고 한 발을 쏘았다. 불안하게 박혀 있던 앵커는 바위가 깨지면서 한쪽이 쑥 빠져버렸다. 덕분이 U자 주머니 모양 다리의 한쪽이 확 기울었다.
“으악!”
주머니의 위아래가 뒤집히면서 건너편에서 비명이 들려왔지만 그 주인공이 추락해 죽었는지,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상대방이 ‘누군가 건너편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엔 충분했다.
“또 포탄이야!”
둘은 다시 참호 안으로 몸을 날렸다. 바로 뒤이어 적진에서 날아온 발리스타의 불꽃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자이납은 참호 위로 손만 내밀고는 후방에 있는 황실군 발리스타 팀에 손짓했다.
“염병할! 우리도 쏴!”
자이납의 손짓에 미리 대기 중이던 분견대의 경량 발리스타도 포탄을 날렸다. 표적은 건너편에 있는 적의 발리스타였다. 잘 보이지도 않는 모래폭풍을 뚫고 날아간 포탄에 건너편 낭떠러지 끝을 지키고 있던 발리스타가 명중하며 불꽃을 뿜었다. 이 포탄 한 발로 황제령을 침공한 남부제후군, 아니 칼데아 제국군과의 첫 번째 공식 교전이 성립되었다.
기쁨은 잠깐이었다. 나머지 3문의 발리스타가 날린 포탄이 참호에 웅크린 가디언과 병사들 머리 위를 덮쳤고, 방금 한 발을 명중시키며 나름 환호성을 올렸던 황실군의 경량 발리스타는 그들의 응사를 피해 허겁지겁 후방으로 더 물러났다. 이곳에서 오래 머문 만큼 경험도 많은 상등병 발리스타 팀장은 위치를 옮기기가 무섭게 또 한 발을 쏘아 건너편 적치장에 쌓여 있는 한 무더기의 정체불명 상자를 공중에 날렸다. 물론 원래 노렸던 것이 그건 아니었다.
좁은 협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가 봐도 일방적이지만 헛방이 난무하며 별반 실속은 없는 포격전이 계속 이어졌다. 양쪽 모두 앞을 제대로 못 보는 좁은 공간에선 숫자가 적은 황실군 쪽이 차라리 유리했다. 칼데아군은 정신을 쏙 뺄 만큼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지만 작고 깊은 참호에 분산되어 있는 10명 조금 넘는 황실군 병사들에겐 낭비에 불과했다. 가는 모래로 덮여 있던 땅바닥이 온통 곰보가 되어갔다.
“놈들 발리스타를 좀 잡아 봐!”
네피가 고함을 질렀다. 이쪽 발리스타는 경량급 한 문뿐이지만 협곡 건너 상대방도 좁은 곳에 발리스타를 억지로 쑤셔 넣었다는 약점이 있어 당장은 크게 불리해 보이지 않았다. 황실군 발리스타가 다시 각도를 교정하고 한 발을 날려 또 한 문의 발리스타 림을 공중에 흩어놓았다. 그런데 가까스로 실루엣만 보이는 부실한 자칭 개량 망원경으로는 사람이 죽었는지, 다른 부수적인 피해가 있는지 따위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적의 포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자이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놈들 발리스타가 저 4문뿐일까요?”
자이납의 의문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확인되었다. 협곡 건너편의 칼데아군은 부서진 2문의 발리스타를 협곡 밑으로 밀어 떨어뜨려버리고는 뒷줄에 있던 다른 발리스타를 다시 1선에 내놓았다. 당혹스러운 건 그 뒤에 또 다른 발리스타의 실루엣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앞의 발리스타를 떨어뜨리고 전면에 나선 발리스타는 방금 무너뜨린 U자 임시교량 발사대를 또 달고 있었다.
“또야!”
자이납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이쪽의 발리스타가 응사를 하기 전에 두 번째 U자 다리를 날렸다. 이번에도 다리는 쾅 소리를 내며 낭떠러지 다른 위치에 박혔다. 이번에도 달려 나가 다리를 끊으려는 자이납의 뒷덜미를 네피가 덥석 붙들었다. 순간 참호 앞에 다른 발리스타에서 날린 포탄이 떨어지며 사방으로 파편과 불꽃을 날렸다.
“죽을 뻔 했잖아! 이 바보야!”
고함을 지르며 자이납을 일으킨 네피가 피투성이가 된 그의 얼굴에 기겁을 했다. 얼굴과 팔에 파편을 2개나 맞은 자이납이 피를 뚝뚝 흘리며 엉금엉금 기어나가 한쪽이 깨진 개량 망원경으로 다시 건너편을 살폈다. 포격으로 이쪽이 대응을 못 하는 사이, 줄을 멘 적병들이 방금 설치한 두 번째 U자 다리를 통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격! 대충 되는 대로 쏴! 발리스타도 쉬지 말고!”
두 번째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의 참호에서 분견대의 황실군들이 일단 마구 석궁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차피 모래폭풍 때문에 적이 정확히 보이지 않다보니 그저 대충 다리가 있을만한 곳에 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분견대의 경량 발리스타는 적의 발리스타가 있을만한 곳을 향해 계속 포탄을 날렸지만 이미 상대를 파악한 적군도 처음처럼 쉽게 잡혀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네피가 도끼를 들고 혼자 뛰어나갔다.
“내가 나갈 테니 부를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있어!!!”
네피는 쏟아지는 포탄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가 적이 막 설치한 두 번째 다리에 대담하게 훌쩍 뛰어내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적이 협곡 동쪽 땅을 밟게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체중에 케이블로 만든 좁은 다리가 출렁 하고 흔들렸다.
“이 새끼들!”
네피는 다리를 타고 건너편에서 달려오는 그림자를 향해 다짜고짜 도끼를 휘둘렀다. 몰아치는 모래바람 때문에 앞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오던 그 남부 엔지니어는 어깨에 멘 육중한 케이블 때문에 제대로 피해보지도 못한 채 목을 바쳐야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쫓아오던 동료 엔지니어도 마찬가지였다.
“우웁!”
“가디언이야! 가디언이야!”
그들 뒤에서 쫓아오던 검은 그림자는 네피를 실제로는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와! 당장 오라고! 다 죽여줄 테니까!”
좁은 다리를 혼자서 막고 선 네피가 우람한 가슴을 드러내고 맹수처럼 거세게 포효를 내질렀다. 그런데 도망친 엔지니어 뒤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그림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의 적은 그에게 바로 달려드는 대신, 무언가를 쳐드는 듯했다.
“어엇!”
네피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치켜들었다. 뒤이어 날아든 마우저 탄이 강화방패 한쪽을 쩍 소리를 내며 가르는 충격에 그의 왼팔이 부르르 떨렸다. 적은 케이블을 진 전투 엔지니어와 마우저로 무장한 헤네티들을 섞어서 계속 다리에 들여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거센 바람에 다리가 계속 흔들려 마우저든, 무엇이든 발사무기를 제대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걸렸다!”
네피도 질세라 손도끼를 빼어 그쪽으로 집어던졌다. 모래폭풍 너머에서 짧은 비명과 무언가가 털썩 쓰러지는 진동이 발끝으로 전해졌지만 헤네티가 죽을 때 내는 불꽃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런 때는 불도 안 지르는 거냐!”
네피가 적이 쓰러진 곳으로 들입다 돌진했다. 내심 헤네티를 한 놈 쓰러뜨려 그놈 몸에 불을 지르게 해 다리를 통째로 녹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던 차였다. 그는 다리 위에서 자신의 도끼에 가슴을 맞은 채 기어서 물러나고 있는 헤네티를 발견하고는 온 힘을 다해 도끼로 내리찍었다. 그때, 옆으로 웬 큰 것이 또다시 쌕 소리를 내고 스치더니 절벽에 꽝 하며 박혔다. 조금 전, 두 개의 U자 다리를 설치할 때와 같은 소리였다.
“또?”
고작해야 다리 한두 개 실패하면 적이 당연히 포기하리라 생각했던 네피는 적이 세 번째 다리까지 걸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했다. 그때, 절벽 건너편에서 자이납의 고함이 들려왔다.
“빨리 돌아와요! 적이 다른 다리로 또 건너와요!”
뒤돌아가려던 네피는 이대로 물러나면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다리가 두 개가 되리라는 사실에 멈칫했다. 이곳 어딘가에 와 있을 손녀 마리안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젠장, 불이라도 붙이고 다시 뒈져!!!”
화가 머리끝까지 난 네피는 이미 죽어 있는 헤네티의 몸에서 발화기가 있는 목 뒤를 도끼자루로 악을 쓰고 두들겨댔다. 거의 홧김에 마구 몽둥이질을 하던 그는 어느 순간 그들의 몸에서 불꽃이 확 일자 지레 놀라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정말 붙네?”
네피가 어마어마한 열기에 기겁을 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뒷걸음쳤다. 불 붙은 헤네티의 몸과 함께 이들의 두 번째 다리가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과정이야 어쨌든 또다시 다리를 막은 네피는 헐레벌떡 아군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타들어가는 헤네티 시체의 열기에 바닥판을 잇는 가는 케이블이 퉁퉁 하며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도 끊었어!”
자신만만하게 개선한 네피가 불에 타 끊기기 직전의 다리에서 땅으로 기어올랐다. 이젠 다리 하나만 남아있었다. 무언가 또 재주를 부리면 그것도 어찌저찌 끊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네피가 막 땅을 디딘 순간, 방금 걸린 세 번째 다리에서 적병 역시 땅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도와줘요!”
자이납의 고함에 네피가 도끼를 앞세우고 세 번째 다리 쪽으로 내달렸다. 등 뒤에서는 불이 붙은 두 번째 다리가 붕괴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기뻐할 겨를도 없었다. 몰려오는 적을 상대로 세 번째 다리 앞을 지키고 있던 자이납이 장검을 휘두르는 헤네티 두 명에 협공을 당해 밀려나고 있었다.
“더 못 오게 좀 쏘라고!!!”
참호에 숨은 황실군들이 쏜 강화석궁에 네댓 명의 적군과 엔지니어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만 일단 손바닥만한 땅을 확보한 적군은 아랑곳없이 다리를 건너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네피가 둘째 다리를 끊는 동안 이미 땅을 디딘 적은 10명이 넘었다.
“썅, 뭐 이리 많아!”
자이납이 상대의 칼자루에 맞아 주저앉는 모습을 본 네피가 무지막지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그의 괴력에 헤네티의 머리가 뎅강 잘려 멀리 협곡 어딘가로 사라졌다. 넘어져 있던 자이납이 네피를 보고 뒷걸음치는 두 번째 헤네티의 머리를 향해 마우저를 쏘아 눈 한쪽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그 사이, 또 다시 적 2명이 다리에서 후다닥 뛰어올라왔다.
“우리 발리스타는 뭐 해!”
넘어진 자이납이 머리에 흐르는 피를 털어내고 엉금엉금 일어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황실군 발리스타가 적의 다리를 노리고 계속 포탄을 쏟아 부었지만 사람 한 명 가까스로 지나갈 좁은 폭의 다리를, 그것도 바람에 계속 흔들리는 다리를 멀리서 발리스타로 맞추는 건 벽을 지나가는 벌레를 화살로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악!”
막 다리에 뛰어오르려는 적 엔지니어를 막아서려던 황실군 병사가 적의 마우저에 팔을 명중당해 뒤로 벌렁 쓰러졌다.
“이봐!”
신음하는 동료를 구하려던 다른 병사까지 헤네티가 날린 도끼에 머리 한쪽을 얻어맞고 피를 흘리며 동료의 몸 위에 쓰러졌다. 자이납이 그들 앞을 급히 막아서자 뒤의 참호에서 석궁으로 사격을 퍼붓던 황실군 병사 셋이 뛰어나와 쓰러진 동료들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허겁지겁 물러났다.
“발리스타! 이놈의 다리 좀 끊어 봐!”
네피의 다급한 외침을 놀리듯, 아군이 아니고 협곡 서쪽의 적군 쪽에서 쿠쿵 하고 발리스타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 다리를 걸 때와 같은 소리였다. 네피는 설마하니 네 번째 다리일까 하며 멈칫거렸고, 믿고 싶지 않은 예상은 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게 몇 번째야!!!”
황당하게도, 정말로 네 번째 다리가 암벽에 박혔다.
“염병! 저 새끼들 여기 앵커 박을 자리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 쏴댈 건가봐!”
막 연결한 네 번째 다리로 또다시 적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네피로서는 세 번째 다리를 자이납에게 남겨두고 네 번째 다리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번째 다리를 끊을 때처럼 다리에 뛰어들어 막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선두에서 달려온 적 헤네티가 먼저 땅을 밟았다.
자이납과 네피가 다리를 몸으로 막고, 8명의 황실군들이 정신없이 석궁 사격을 퍼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적은 다리 중간에 쓰러진 동료들을 넘어 계속 몰려들었고, 다리를 끊지 않는 이상 상황을 되돌리긴 힘들었다.
“발리스타!”
때마침 황실군 발리스타가 날린 포탄에 세 번째 다리의 중간 바닥판이 푹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만 이미 다리에 뛰어든 헤네티들은 어깨에 줄을 짊어지고는 주저앉은 바닥판을 훌쩍 뛰어넘어 계속 달려왔다. 네피와 자이납의 마지막 기대마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우압!”
네피의 곁에서 다리를 향해 사격을 퍼붓던 황실군 병사가 배에 마우저를 맞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쓰러진 동료를 구하려 뒤쪽 참호에서 뛰어나오던 병사는 머리 위를 스치는 마우저에 놀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못했다.
“안되겠다.”
네피도 이젠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막대기 올려!!!”
네피의 찢어지는 고함이 협곡 동쪽을 울렸다. 퇴각하라는 신호였다. 제일 뒤에 있던 발리스타가 방열을 해제하고 차량에 부품을 싣는 동안, 나머지 병사들이 하나 둘 물러나기 시작했다. 헤네티 한 명의 목을 베고 한 명의 다리에 부상을 입힌 네피도 옆에 쓰러진 병사를 들쳐 업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씨이, 그 양반한테 뭐라고 말해야 돼요!”
자이납이 당장 울 듯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발리스타 파편과 헤네티의 칼에 얼굴이 피로 흠뻑 젖은 자이납도 무려 3명이나 되는 부상자들을 혼자 엄호하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분견대 병사들은 피를 뚝뚝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동료를 부축하고, 혹은 짊어지고 악을 쓰며 걸음을 옮겼다.
“놈들이 물러난다! 계속 몰아붙여! 놈들은 몇 안 된다! 도망 못 가게 해!”
폭발적인 물량공세로 결국 두 개의 다리 주변을 완전히 확보한 칼데아군과 헤네티들은 이제 정말로 벌떼처럼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들이 사수했던 협곡 동쪽에는 네피 일행의 분전을 나타내듯 30구 가까운 엔지니어와 헤네티들의 시체가 널려있지만 결과로는 실패였다.
사수에 실패한 네피와 자이납은 차량이 있는 곳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다. 이젠 모래 폭풍이 등을 보이고 물러나는 자신들을 조금이라도 가려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사격!”
먼저 물러나 차량 앞에 자리를 잡은 황실군들이 네피와 자이납 뒤를 쫓는 적을 향해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적 엔지니어 두 명이 몸에 석궁을 맞고 주저앉자 그들도 기겁을 하고 몸을 낮추었다.
“빨리 타! 빨리!”
그 사이, 네피와 자이납이 부상자와 병사들을 2대의 구식 내연기관 차량 화물칸에 허겁지겁 실었다. 적이 마우저를 쏟아 붓기 전에 여기를 빠져나가야 했다.
“출발! 출발!”
모래폭풍 너머로 적의 검은 형상이 가까워지자 네피가 문짝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모두 빠져나온 것만도 일단은 다행이었다. 발리스타 팀과 가디언들까지 12명을 태운 차는 부릉거리는 굉음을 내며 방향을 돌려 검은 철성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뒤쫓아 오는 헤네티들이 쏜 마우저 몇 발이 뒤에서 달리던 화물칸이 명중하면서 가림막이 떨어지고 한쪽에 주먹만 한 구멍이 뻥 뚫렸다. 화물칸에 탄 병사들 사이에 비명이 터졌다.
“모두 무사하냐!”
네피의 물음은 별로 적절치 못했다. 화물칸 뒤를 뚫고 들어온 마우저 탄에 쇄골을 명중당한 부상병이 바로 그의 코앞에서 피를 뿜으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수고했다.”
낙담한 네피는 더러워진 손으로 죽은 병사의 눈을 감겨주었다. 3명은 죽어가고 있고, 1명은 발리스타 파편에 흉갑과 한쪽 어깨가 부서져 날아가 가망이 없어보였다. 웬만해선 절망하는 일이 없던 자이납도 얼굴과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어떡해’를 연발하고 있는 중이었다.
“빨리 올라가! 부상병들 다 죽어!!!”
네피가 운전석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고함을 질렀다. 2대의 내연기관 차량은 요란한 소음을 내며 가파른 오르막을 계속 올랐다. 칼데아군의 차량처럼 정밀한 전자장비가 없는 이 원시적인 장비는 온통 검은 재가 날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고장 한 번 나지 않고 언덕을 달려 올랐다.
“졌어.”
네피는 아랫사람들이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문짝이 떨어진 화물칸 뒤에 주저앉았다.
“너희 잘못이 아냐.”
나름 분전했고, 큰 실수도 없었다. 황실군 장병들 모두 최선을 다해주었고, 3배나 되는 적을 사살했고, 적의 다리를 두 개나 끊었다. 하지만 황제가 정해 주었던 사수 시한조차 지키지 못했고, 피해도 컸다. 적의 무시무시한 물량공세는 당할 수가 없었고, 결과는 패배가 되었다. 힘에, 숫자에 밀린 꼴이었다.
“그저 놈들이 너무 강했을 뿐이야.”
털털거리는 차의 엔진음 뒤로 네피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 작품 후기 ============================
.
.
.
이렌느가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듯 결국 한 건 올렸습니다. ^^;; (네피와 자이납을 쥐라고 하면 안될 것 같긴 하지만;;;)
예고한대로....이번 편부터 본격적인 전투입니다. 앞으로 상당히 [정신없이] 전개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단 며칠 사이에 아주 밀도 높게 벌어지는 사건들이라서요. ^^
개인적으론 엔딩 부분을 마무리하고 있는 중인데...얼개를 정확히 맞추려니 이젠 제 머리가 다 아프네요. 두뇌의 한계에 부딪친 것 같습니다.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세요~~~( ̄∇ ̄)ブ~~★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인터파크, T스토어, 올레eBook, 리디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