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88화 (1,083/1,132)

< -- 1088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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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 마마? 들어가셨습니까?”

헨지가 절벽 위에 대고 큰 소리로 물었다. 할룩스에서 잠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이의 대답이 들려왔다.

“안에 큰 바위 홈이 있어서 캠 박았어요. 올라오세요.”

마리안의 대답에 헨지가 줄을 탁탁 당겨보았다. 분명 어딘가 고정된 느낌이 전해졌지만 헨지로서는 내심 불안했다. 열 살도 안 된 저 꼬마가 캠을 제대로 박았는지도 확인할 수 없고, 아이의 솜씨를 눈으로 본 일이 없었다. 마리안이 조금이라도 실수했다면 이 줄에 체중을 싣는 건 헨지 스스로는 물론이고 위에 있는 마리안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혹시 모르니 줄에서 떨어져 계세요. 빠지기라도 하면 옆에 있다간 크게 다치십니다.”

“너무 좁아서 피할 데가 없어요. 인형집만해서 웅크리고 있거든요. 전 괜찮아요.”

마리안이 말하는 ‘인형집’이 대체 얼마만한 건지는 모르지만 헨지는 하는 수 없이 일단 줄에 체중을 싣고 조심조심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이가 건 줄은 시작부터 흔들리거나 덜커덩거리지는 않았다. 처음에 조심조심했던 헨지는 용기를 내어 속도를 붙여서 줄을 힘차게 타고 올랐다.

잠시 후, 절벽 중간의 작은 구멍이 눈에도 들어왔다. 어른 가디언의 몸통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이었다.

“휴우.”

마리안의 로프에 의지해 구멍까지 오른 헨지는 일단 문제의 구멍에 머리만 쑥 밀어 넣었다. 제일 바깥쪽의 단단한 암석이 안에서 흘러나온 물에 깨어져 난 구멍이었다.

“거 봐요, 내가 잘 했죠?”

좁은 구멍 안에서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마리안이 헨지에게 앞니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헨지가 억지로 몸을 밀어 넣고 랜턴으로 안을 비춰보려 했지만 조금 전 마리안 말처럼 아이 하나로 구멍이 이미 꽉 차서 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마리안이 몸을 잔뜩 웅크려 제일 안쪽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물이 나와요. 근데 정말로 사람 냄새 나요.”

마리안이 말했던 ‘사람 냄새 나는 물’은 구멍에서 10척 남짓 안쪽으로 보이는 세로로 긴 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좁은 구멍에 웅크린 마리안의 옷이 잔뜩 젖어있었다. 구멍 안으로 어딘가 큰 공간이 있지 않을까 했던 헨지로서는 크게 낙담한 순간이었다.

그때, 밑에 있는 주페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나요? 마리안은 무사해요?”

“예, 씩씩하게 잘 올라오셨습니다.”

“물 나오는 구멍 있다며 그리로는 못 들어가요? 어디 안쪽으로 연결되는 곳은 없고요?”

“구멍이 너무 좁아서 쥐 한 마리도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헨지의 연락에 밑에서도 일제히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와중에도 아직 희망을 잃지 않은 주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넓힐 수는 없고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헨지가 손을 넣어 주변을 더듬어보니 구멍 안쪽은 바깥쪽 표면보다는 훨씬 무른 돌로 되어 있는 듯했다.

“안쪽은 석회암입니다. 그래서 물에 녹아 구멍이 났나봅니다.”

그때, 그의 손끝에 긴 홈으로 흘러들어가는 공기가 느껴졌다.

“안으로 공기가 흘러들어갑니다. 이 안에 빈 공간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이번엔 아샤드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회암이면 무르니까 파낼 수 있지 않겠나? 약간만 파 들어가면 잘하면 반대편으로 나갈 길이 나올지도 몰라. 바람이 들어간다면 어디론가 나가는 곳이 있겠지.”

“공간이 너무 좁아서 몸만 겨우 밀어 넣을 정도입니다. 제 몸 하나 움직이기도 버거운데 들어가서 파내는 건…….”

헨지는 구멍 안에 웅크리고 앉아 크고 맑은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마리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저랑 두더지 놀이 하실 생각 없으세요?”

원주민들이 살던 굴에서 하룻밤을 지낸 산토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황제는 등에 박힌 사제의 키를 빼낼 궁리만 하는 세네피스를 아예 이곳에 가둬두고 가 버리는 초강수를 놓았지만 그게 과연 맞는 선택인지는 그도 확신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잘 하고 있는 걸까요?”

굴 한쪽에서 작은 난로를 놓고 산토스와 마주앉아 있던 병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산토스와 함께 남은 두 병사들은 첫날 분견대 기지에서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산토스까지 셋 다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지만 최고의 상태로 싸울 수는 없어 이곳에서 5일간 황태후를 지키는 임무를 대신 받아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바깥의 상황이 점점 긴장감이 높아가는 이틀 동안 이 밀폐된 굴에서 이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군바리가 명령받은 대로 하는 거지, 뭐.”

산토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난로에 펌프질을 해 온도를 올렸다.

“그분께서 원하셨던 것이고.”

산토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르마즈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죽은 오르마즈의 유지가 어떤 일이 있어도 세네피스만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르마즈에게 있어 카렐은 자신의 뒤를 이어 세네피스를 지킬 사명을 물려준 존재일 뿐, 절대 그보다 우선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앞뒤 안 가리고 사제의 키부터 빼내려 하던 세네피스를 황제가 여기 가둬놓고 간 건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분의 뜻이 꼭 옳은 것일까요?”

병사는 말을 뱉어놓고도 내심 찔리는지 산토스와 동료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산토스가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닥쳐.”

화는 냈지만 산토스의 목소리에도 별로 자신은 없었다. 황제의 그 결정이 오르마즈의 뜻을 일찌감치 알아서인지, 아니면 그저 자식으로서의 책임감 혹은 그 이상의 어떤 것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수술을 위해 세네피스의 목숨을 거는 선택은 애당초 고려도 하지 않은 듯했다.

“그분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돌아가실 때까지 모르셨잖아요. 그런데도 기계적으로 지시만 따르는 건…….”

“황태후께선 뭐 하셔?”

산토스는 대답 대신 엉뚱한 물음으로 주제를 돌렸다.

“식사도 안 받으시고 멍하니 앉아만 계십니다.”

그때, 한쪽에 놓은 송화기가 갑자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출구에 있는 안테나와 유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 송화기는 만일의 일이 생길 경우 긴급 통신을 위한 것이지만 황제가 떠난 이후로 한 번도 울린 일이 없었다. 산토스는 내심 불안해하며 조심스레 송화기를 켰다. 황제 경호대장인 카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후께선 거기 무사히 계신가?”

“물론입니다.”

“황태후를 모시러 지금 가는 중이다. 동굴 입구를 뚫어 놔라.”

“예? 황상께서 여기서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황상께서 쓰러지셨단 말이다! 지금이라도 수술을 강행하라는 코리온 대군의 명이다!”

순간 충격을 받은 산토스가 할 말을 잃었지만 곧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황상께서 어떤 일이 생겨도 수술은 절대 안 된다고 명령을 내리고 떠나셨습니다. 이건 분명 잘못된…….”

“뭐가 어쩌고 어째?”

장군인 카토의 격한 목소리에 고작 상등병 신분의 산토스가 잠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황제보다는 세네피스를 우선 지켜야 한다는 오르마즈의 유지를 따라야 했다.

“황상께선 스스로에게 일이 생겨도 절대 황태후를 보내드리지 말라 엄명을 내리고 가셨습니다. 전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이 새끼가 지금……. 닥치고 30분쯤 후에 도착할 테니 떠날 준비나 하고 있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카토는 그대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앞에서 지켜보던 병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떡하죠?”

“황상의 심복들이야 수술을 강행하려고 하겠지만……그럼 황태후의 목숨이 위험해지십니다. 그분께서 이런 걸 원하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때, 송화기 옆에 있던 작은 경보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동굴 입구 주변에 설치한 십여 개의 동작 감지기 중 하나가 전하는 소리였다.

“엉? 이게 어디 있는 거지?”

“여기 굴 입구 언덕 바로 밑에 있는 겁니다. 벌써 왔을까요?”

“설마, 30분 후에 온댔는데?”

당황한 셋은 헐레벌떡 무기를 챙겨들고 동굴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어제 아침, 황제가 떠난 이후, 굴 입구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머리만한 창구멍 하나만을 남기고 돌과 흙을 쌓아 완전히 막아놓은 상태였다.

산토스는 발소리를 죽이고 창구멍으로 다가가 개량 망원경에 눈을 댔다. 동굴 입구 아래의 비탈진 자갈밭 아래에 무언가 형상이 아른거렸다.

- 4명에서 6명. 3스타디아. 피아는 구분이 안 돼. -

산토스는 뒤에서 보고 있는 병사들에게 수화로 경계를 알렸다. 그들은 일제히 석궁을 장전하고 잠시 벗어놓았던 갑옷도 허겁지겁 챙겨 입었다. 산토스가 발견한 형상은 점점 선명해지더니 5개 정도의 사람 형상으로 바뀌어갔다. 산토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헤네티가 포함된 6명. -

갑옷을 챙겨 입던 병사들의 손끝이 딱 멈추었다. 헤네티 6명이라면 부상을 입어 몸도 둔한 정규군 3명 정도는 간식거리도 되지 못했다.

- 놈들이 서쪽 협곡을 벌써 넘어왔다고요? -

네피와 자이납이 지키는 협곡이 지난밤 뚫렸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이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산토스가 그들을 진정시켰다.

- 정찰병 같다. 아직 여길 모르고 있을 테니 조용히 있어. -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죽였다. 이 동굴 안에 칠해진 검은 재 때문에 X들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안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집어내지 못했다. 저들이 동굴이 있는 것을 알고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설픈 공격보다는 차라리 숨을 죽이고 있는 편이 나았다.

- 그런데 여긴 협곡에서 철성 올라가는 길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는데 왜 여기까지 올라온 걸까요? -

병사의 물음에 산토스도 덜컥 불안감이 들었다. 저들이 알고 오는 건지, 아니면 그저 어쩌다가 지나는 정찰병인지에 이들의 운명이 걸려있었다.

“아차.”

산토스가 얼른 입을 가렸다. 그는 망원경을 병사에게 휙 넘기고 굴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그리고는 여전히 난로 옆에 있는 송화기를 얼른 켜고 방금 연락을 해 온 카토를 불러냈다.

“또 뭐냐,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니까!”

연결이 되자마자 카토의 격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쓰러진 황제보다 황태후의 목숨을 더 따지는 분견대원의 반응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여기 오지 마십시오, 장군님. 적 헤네티가 오고 있습니다. 바로 언덕 밑에 와 있습니다. 10분 이내로 올 것 같습니다.”

순간 씩씩대던 카토의 목소리가 딱 멈추었다. 하지만 몇 초 가지 않아 더 격분한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허, 그러면 안 갈 줄 알았냐? 진격로도 아닌 외진 곳에 적 헤네티가 미쳤다고 가? 이 새끼가 어디 허위보고까지 하고! 당장 군법회의 갈 각오나 하고 있어!”

“정말입니다! 군법회의가 아니고 즉결 처형하셔도 됩니다! 정말로 6명의 헤네티가 올라오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오시면 여기 무언가 있다는 게 들통 나게 됩니다!”

“시끄러!”

카토는 그대로 연락을 다시 끊어버렸다.

“이 염병할 가디언 새끼가 진짜!”

발끈한 산토스는 하마터면 송화기를 집어던질 뻔했다. 이젠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세네피스가 있는 방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황태후 폐하! 폐하!”

산토스가 문을 쾅쾅 두들기자 안에서 퀭해진 얼굴의 세네피스가 힘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밤 한숨도 이루지 못한 그의 눈은 움푹했고 제대로 먹지 않아 핏기도 없었다. 그는 황태후의 고운 옷도, 장식도 모두 벗어던지고 계급장 없는 황실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산토스는 입술 끝에 맴돌던 ‘황상께서 쓰러지셨답니다.’라는 말을 목구멍 뒤로 꿀꺽 삼켰다. 그는 대신 세네피스의 방 안에 있던 필수품들을 허겁지겁 자루에 쏟아 넣고 황태후의 등에 다짜고짜 얹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네피스는 짐의 무게에 휘청거렸다.

“뭐냐?”

“죄송합니다. 밖에서 적군이 옵니다. 그냥 지나가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들통 나면 동굴에서 피해 다녀야 합니다. 지금부터 저희와 떨어지지 마십시오. 폐하의 시력이 필요합니다.”

세네피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 동굴이, 한때 수백의 생존자들이 화염 속에 몰살당했던 이 굴에 어쩌면 학살자의 후예들이 다시 발을 디딜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알았다.”

세네피스는 군말 한 마디 없이 무거운 배낭끈을 꽉 조였다. 산토스는 랜턴을 끄고 세네피스의 배낭을 손으로 짚었다.

“지금부터 랜턴은 쓰지 않겠습니다. 입구로 인도해 주십시오.”

세네피스는 동굴을 타고 흐르는 파란 빛을 따라 산토스를 두 병사들이 있는 입구로 인도해 나아갔다.

- 1스타디아 앞에 있습니다. -

산토스 대신 창구멍을 감시하고 있던 병사가 초조하게 수화로 알렸다. 세네피스가 병사에게 비키라고 손짓하고는 대신 창구멍 밖으로 눈을 내놓았다.

- 헤네티 2명에 정규군 3명, 장교 1명이 있는 것 같다. -

세네피스가 그동안 배운 서툰 수화로 이들에게 알렸다. 확실히 개량 망원경 따위는 그의 그레이오팔로 보는 정확도에 댈 바가 아니었다.

- 여길 알고 오는 것 같습니까? -

- 그건 아닌 것 같다. 밑에서 두리번거리며 어딘가와 연락하는 중이다. 거리는 400척(120m)쯤? -

산토스는 황태후에게 카토 일행이 자신을 데리러 오고 있는 것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세네피스가 카토에게 ‘적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말 한 마디만 한다면 카토도 발길을 돌리겠지만 그와 동시에 황제가 쓰러졌다는 것도 알게 된다는 뜻이었다. 세네피스라면 적과 교전이 벌어지건 말건 무조건 당장 돌아가겠다고 생떼를 쓸 가능성이 더 높았다. 결국 그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그런데 여길 어떻게 알고 오는 거지? -

세네피스도 방금 병사들과 똑같은 물음을 꺼냈다.

헤네티들에게 철성 진격로 북쪽의 이름 없는 언덕을 정찰하라고 명한 건 바로 이렌느였다. 지난 저녁, 상식을 벗어난 물량공세로 협곡을 돌파한 그는 협곡의 다리가 완성되어 본대를 전진시키기 전, 고산 적응이 조금이라도 더 된 정찰병들을 동원해 진격로 일대를 먼저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렌느는 정오까지 차량용 다리를 완성시키라며 엔지니어를 쥐 잡듯 했지만, 결국은 뜻대로 되지 못했다. 협곡을 지키던 동맹군의 응사로 차량용 교량 자재 상당수가 파손된 데다가, 이렌느가 12시 다리 완성과 오후 공격을 못박아버린 덕분에 가뜩이나 형편없는 도로 위로 철성 공격을 준비하는 군수품 수송과 교량 자재 수송이 뒤엉켜버렸다. 덕분에 다리는 빨라야 늦은 오후에야 완성될 듯 보였다.

“아직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찰대를 이끌고 나온 자끄 세닉 교위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어머니이고 종장인 이렌느에게 알렸다.

“여긴 그냥 야산이라니까요. 전술적으로 적이 매복할만한 곳도 아니고 그냥 빤한 언덕이요. 왜 여기에 그리 신경을 쓰시는데요?”

아들의 물음에 이렌느도 말이 딱 막혔다. 사실 정찰대를 보낸 딱히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돌밭으로 덮인 그 언덕에 ‘생뚱맞게 눈이 가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치 그 언덕 꼭대기 어딘가에 잃어버린 보물단지라도 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다. 그는 R이 같은 R의 존재를 감지했을 때의 느낌을 분간해낼 능력까지는 아직 없었다.

“그냥 느낌이다.”

어머니의 솔직한, 아니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자끄가 할 말을 잃었다. 아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읽은 이렌느는 버럭 짜증을 냈다.

“군말 말고 닥치고 정찰이나 해! 없으면 돌아와서 별거 없다고 보고하면 될 것 아니냐!”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린 자끄는 할룩스를 끄고는 고산병으로 어질어질해진 머리를 연신 흔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마 근거리라 할룩스나 통하는 것이 다행이지 이나마도 없다면 완전히 천애고아가 된 느낌일 것 같았다.

“염병, 숨 막혀 죽겠네.”

“돌밭도 장난이 아닙니다.”

자끄를 따라온 세닉 가 정규군 경보병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가파른 비탈을 따라 주먹만 한 돌멩이가 널린 언덕은 조금만 중심을 잃어도 밑으로 주르륵 밀려가기 십상이었다. 자끄도 이 언덕을 올라오다가 돌덩이 위로 몇 번을 미끄러져 종아리와 팔다리의 장갑이 온통 흠집투성이가 되어있었다.

“몰라, 어머니가 꼭대기까지 확인해 보라고 하니 일단 다녀온 시늉이라도 해야지.”

자끄는 무너지는 돌밭에서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다시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우저와 특수망원경을 지닌 2명의 헤네티가 앞장서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자끄를 따라오는 3명의 정규군 경보병들은 언제 길을 잃을지 모르는 이 생뚱맞은 곳에 온 것 자체가 불안한지 연신 불평만 늘어놓았다. 자끄나 이들이나 아직 고산병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도, 정신도 제 상태가 아니었다.

“여기도 별건 없는데.”

한참 만에 언덕 꼭대기에 오른 자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망원경을 눈에 댔다. 일행의 등 뒤로 30척(9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반쯤 무너진 동굴 입구가 있지만 이들은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그곳엔 카렐 일행이 쌓아놓고 간 돌덩이와 흙 반죽이 마치 진짜 바위벽처럼 교묘하게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동굴 안에 칠해진 검은 재가 밖으로 흘러나가는 소리나 빛, 열까지도 완벽하게 감추어 헤네티들조차도 동굴의 존재를 알 수가 없었다.

이 순간에도 동굴 입구의 작은 틈새에선 무지개빛 눈동자가 그들을 뚫어지게 살피고 있었다.

“슬슬 내려가자. 그놈의 어머니 ‘감’ 덕분에 헛고생했네.”

고산증을 견디기 힘들어진 자끄는 함께 온 4명에게 내려가자며 손짓했다. 그들은 동굴에 있는 세네피스 일행이 내쉬는 안도의 숨을 뒤로 하고 돌밭을 조심조심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엇.”

십여 발자국을 내려간 헤네티가 갑자기 한 손을 들어 ‘정지’를 알렸다. 그리고 동굴 안에서 지켜보고 있는 세네피스의 눈동자도 확 커졌다. 세네피스가 다급히 손짓으로 알렸다.

- 뭔가 알아챈 것 같다. -

당황한 산토스는 유선 통신장치를 켜고 다시 카토를 불러내려 했다. 하지만 그쪽에서 아예 연락을 끊었는지 송신이 되지 않았다.

‘이런 염병할 먹통 가디언 같으니.’

2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검은 철성에서 출발한 카토는 마음이 급했다. 지난 저녁 어마어마한 출혈과 함께 쓰러진 황제는 니사와 살람의 극진한 간호에도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며 제 상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에게 묻지 말고 수술을 강행하라 명한 건 코리온이었다. 아랫사람들은 황제의 의식이 불분명하다면 본토에 연락해 황후와 장태자의 승인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불평했지만 코리온은 내명부의 보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들어 자신이 모두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다. 가장 큰 위험을 짊어진 세네피스 본인이 수술을 거부할 리 없으니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카토로서는 그런 코리온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생각 외로 빨리 뚫린 서쪽 협곡의 상황도 철성에 있는 황제 심복들 마음을 급하게 했다. 수술을 안 한다면 모를까 기왕 할 것이라면 칼데아군의 다리가 완성되고 제플린 산 정상을 적군이 뒤덮어버리기 전에 1분이라도 빨리 황태후를 데려와 키를 빼내야 했다.

“미친 놈들. 지들이 황실군 군복을 입고 감히.”

방금 전 산토스와의 통화를 떠올린 카토의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분견대의 사관과 상등병들이 애당초 오르마즈의 유지를 받들고 있던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황제의 위기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누구보다 황제를 열렬히 받드는 그를 격분하게 했다. 출발 전, 세하 비장과 마르텔로도 ‘황상의 뜻이 황태후를 지키는 것인데 왜 키를 멋대로 빼내려 하냐’며 반발했었고, 산토스도 여지없이 그들과 똑같았다.

“그렇다고 윗사람을 속이려고까지 들어?”

머릿속에 황제 생각밖에 안 남은 그는 동굴로 올라오는 헤네티들이 있다는 산토스의 말이 사실일 수 있다는 건 아예 생각도 않고 있었다. 그에겐 황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세네피스를 지키고픈 분견대원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시간을 끌려 자신을 속이려 든다고 혼자 단정하고 있었다.

“그 새끼 잡히기만 해 봐.”

그는 산토스에게서 오는 할룩스를 아예 끊어버린 채 씩씩대며 동굴이 있는 언덕으로 다가갔다. 그는 행여 적과 마주치지 않도록 남쪽의 길을 피해 철성이 있는 동쪽에서 거친 바위능선을 넘어 문제의 동굴에 다가가는 중이었다. 설사 적이 정찰병을 뿌려놓았다 해도 아직 여기까지는 왔을 리가 없어보였다.

그때, 개량망원경으로 정면을 확인한 병사가 손을 들어 정지를 알렸다.

- 굴 앞에 사람들이 서성대고 있습니다. 4명에서 6명 정도. 2스타디아. -

“벌써 나와 있어?”

동굴 앞에 있는 자들이 당연히 세네피스와 산토스 일행일 것이라 생각한 카토는 별 생각 없이 경계도 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그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건 그들의 숫자가 4명이 아니고 그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는 무심결에 허리에 찬 할룩스를 다시 보았다. 그곳엔 산토스가 방금 보낸 메시지가 그를 찾고 있었다.

-동굴 앞에 헤네티2, 정규군 보병3, 장교1. 제발 오지 마십시오. -

“이익.”

카토가 메시지를 본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동굴 앞에서 서성대던 6명’이 쏜 마우저와 석궁이 미처 예상도 못 하고 있던 카토 일행을 덮쳤다.

“아악!”

마우저에 팔을 맞은 병사가 덜렁거리를 팔꿈치 아래를 움켜쥐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가까스로 몸을 젖힌 카토는 다리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뿜으며 벌렁 주저앉았다. 나머지 병사가 방패를 쥐고 쓰러진 둘의 앞을 허겁지겁 막아섰다. 적이 너무 먼 거리에서 선제공격을 하지 않았더라면, 칼데아 정규군의 석궁이 있으나마나한 부실한 물건이 아니었다면 한 번의 사격에 3명이 모조리 쓸려나갔을 순간이었다.

“공격!”

마우저를 쥔 2명의 교단 헤네티들을 선두로 3명의 경보병과 자끄가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에 질질 끌려 바위 뒤로 옮겨진 카토는 벌떡 일어나 맞서려 했지만 다리에 맞은 마우저가 큰 혈관을 건드렸는지 피가 주체 못 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훈련받은 동작으로 응급 접착밴드를 꺼내어 다리에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조였다.

“안되겠습니다! 아직 거리가 멀 때 물러나야 합니다!”

전진해오는 적을 향해 응사를 퍼붓던 상등병이 고개를 저었다. 다리를 일단 조인 카토는 팔을 절반 잘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병사를 힘껏 부축했다. 이제와 자신의 오판을 후회했지만 더 이상은 나아갈 수가 없었다.

“물러나! 물러나!”

만신창이가 된 카토는 피눈물을 흘리며 능선을 헐레벌떡 내려갔다. 거리가 2스타디아나 되니 짙은 모래폭풍 너머에서 자신들을 추격하지는 못할 듯했지만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적 정찰병에게 ‘그곳에 뭔가 있다’는 힌트를 사실상 알려준 꼴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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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을 안 데려왔으면 저 일을 누가 했을지 궁금합니다. ㅋㅋㅋ

그리고....이렌느의 '감'이 이번에도 통했습니다. ㅎㅎㅎ

결과는 지금까지는 좋았는데......( '');;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씬이 조만간 나올 참이네요.)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노블레스에 연재중인 출판본 2부도 이제 곧 끝날 예정이고....끝나는대로 출판본 3부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출판본에도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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