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89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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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입니다. 놓친 것 같습니다.”
카토 일행을 얼마간 추격한 헤네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돌아왔다.
“제 이야기대로 매복했다가 근거리에서 공격했어야…….”
베테랑 헤네티는 지휘관 자끄를 슬쩍 흘겨보았다. 그는 자리에 숨어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쏘자고 제안했었지만 계급만 높지 실전경험이라고는 전무한 자끄는 무장한 적군, 그것도 가디언으로 추정되는 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에 지레 놀라 다짜고짜 공격 명령부터 내렸었다.
“부상만 입힌 것 같습니다.”
“……됐어, 다음 전투에 못 나오게 했으면 된 거야.”
뒤늦게야 자신의 오판을 깨달은 자끄는 민망함을 감추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그는 남부의 평야에 맞춘 기본 전술훈련 정도나 받았을 뿐 이런 산악에서 어떻게 싸울지는 제대로 훈련받은 일도 없었다.
“그나저나 저놈들이 이런 데는 뭣 하러 오고 있었지?”
그는 망원경까지 눈에 대고 주변을 살폈지만 그냥 줄줄이 이어진 능선줄기의 흔한 바위 언덕배기의 하나일 뿐 특별할 것이 없었다. 경험 많은 헤네티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대병력이면 기습하려고 오던 길이었다고나 하지만…….”
“여기 부근에 적이 대병력을 감춰놓은 건 아닐까?”
자끄는 즉시 할룩스를 켜고 어머니의 코드를 눌렀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접한 실전이지만 적과 마주쳐서 사격까지 주고받았고, 적을 쫓아냈기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참에 여길 싹 다 확인해야겠어.”
자끄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자신의 이 ‘작은 승전’이 황실군을 물리치는 단초가 된다면 잘만 하면 이 기회에 누나도 물리치고 종장 어머니의 눈에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화면에 어머니 이렌느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빠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대로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 5백 명만 보내주십시오.”
“손 안 아프세요?”
헨지는 마리안이 파놓은 석회암 부스러기 소쿠리를 절벽 밑으로 우르르 쏟아 부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지금까지 버린 양을 생각하면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의 머리가 하나같이 눈사람 꼴이 되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났다. 마땅히 피할 곳도 없으니 언제 돌덩이가 쏟아질지 모르는 하늘에 대고 마냥 방패만 든 채 온갖 불평을 늘어놓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잔뜩 골이 난 다룬의 목소리가 할룩스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직 멀었냐.”
“기다려요. 옹주마마 손 아파요.”
“돌아가서 닭튀김 10마리 사드린다고 해.”
“쳇, 50마리!”
언제 들었는지, 돌가루로 얼굴이 하얘진 마리안이 구멍 밖에 머리를 쏙 내밀었다. 아이는 셔틀 수리 공구에 드릴을 꽂아 무른 석회암을 깨고 구멍을 넓히는 중이었다. 처음엔 힘도 없고 서툴러 몇 번이나 다칠 뻔했지만 몇 분 만에 요령을 터득하더니 이젠 웬만한 기술자 못지않게 기계를 다루어 고작 1시간 만에 3척(90㎝)이나 되는 구멍을 파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팠는데.”
마리안의 불평에 할룩스에서 다룬의 난처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너편 동굴까지 찾으시면 100마리 사드릴게요.”
“약속하기!”
마리안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다룬이 ‘실수했나?’ 생각한 순간, 황제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빼닮은 꼬마는 바로 마수를 드러냈다.
“안쪽에서 무슨 소리 나요. 안에 넓은 동굴 있는 게 확실해요.”
불평 한 마디로 닭튀김 100마리를 확보한 마리안이 능글하게 웃었다.
“정말요?”
헨지도 잔뜩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명색이 특등급 가디언이라는 그의 청각으로도 소리 같은 건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마리안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까짓 거 닭튀김 저도 사 드릴게요. 조금만 더 파내시면 제가 들어가 팔 수 있을 것 같으니 힘내세요.”
“헤헤, 나 아무래도 공사장 기술자 할까봐.”
헨지의 말에 마리안이 갑자기 기운이 나는 듯 얼른 귀마개를 쓰고 다시 돌을 뚫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돌이 많이 쏟아지면서 안에 있는 마리안의 얼굴이 회칠이라도 한 것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 여전히 밖에 로프로 매달려있던 헨지가 소쿠리에 돌을 절벽 밑으로 쏟아 부었다.
“제가 들어갈 수 있나 볼게요.”
헨지는 마리안이 낸 구멍으로 큰 몸뚱이를 끙끙대며 밀어 넣었다. 움직이기 버거울 만큼 좁기는 해도 덩치 큰 가디언과 콩알만 한 소녀가 동시에 몸을 우겨넣는 건 대충 가능했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헨지가 자신에 밀려 벽에 찰싹 붙어있는 마리안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이제부터는 어른 가디언인 그가 팔 수 있으니 일사천리였다. 마리안에게서 드릴을 건네받은 헨지가 화들짝 놀랐다. 이제 보니 아이의 작고 고운 손바닥이 거친 기계와 돌덩이를 다루느라 온통 벗겨져 피투성이였다. 헨지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어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황상께서 대견해하실 겁니다.”
헨지는 황자에 대한 예의도 잊고 아이를 한 번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굴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른 가디언인 그의 손이 닿으면서 무른 석회암이 머리통만한 크기로 뚝뚝 떨어져 나왔다.
“다 된 것 같습니다!”
속도가 빨라지자 신이 난 헨지는 앞뒤 안 가리고 드릴을 최고로 돌리며 계속 안으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이 깊고 넓어지면서 안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도 점점 강해졌다. 헨지는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물이 흘러나오는 틈새 옆의 큰 바위를 힘껏 비틀어 떼어냈다. 순간 안쪽에서 폭포처럼 물이 확 쏟아져 나왔다.
“우익!”
엄청난 수압에 획 밀려난 헨지와 마리안은 벽에 박아놓은 로프가 아니었으면 구멍 밖으로 그대로 튕겨 날아갈 뻔했다. 헨지는 함께 밀려난 마리안을 품에 와락 껴안았다.
“푸하!”
한바탕 물줄기가 휩쓴 후, 헨지가 더듬더듬 벽을 짚고 정신을 차렸다. 그의 할룩스가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뭐야! 웬 물이 갑자기 쏟아진 거야! 무슨 일 있어?”
놀란 다룬의 물음에 헨지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거긴 괜찮아요?”
“물벼락 맞은 것 빼곤 괜찮아. 옹주께선?”
“괜찮으세요.”
헨지가 놀란 토끼모양 눈이 휘둥그레진 마리안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잠시 창백해졌던 마리안은 그의 가슴에서 엉금엉금 기어 방금 뚫린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고는 랜턴으로 안을 비춰보았다. 이젠 더 이상 작은 ‘구멍’이 아닌, 말 그대로 큰 동굴이 그 너머에 있었다. 바람도, 모래폭풍도 없는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우와아아.”
마리안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헨지가 구멍을 낸 곳은 물이 고여 있던 작은 웅덩이의 한쪽 구석이었다.
“저것 봐요.”
헨지는 마리안이 랜턴으로 가리킨 웅덩이 모서리를 보고는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그곳엔 놀랍게도 새 세숫대야와 물바가지가 놓여있었다. 하지만 아군의 것인지, 적군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동굴이네. 누가 있던 곳이지?”
헨지는 물을 따라 올라온 일행의 결정에 내심 뿌듯함을 느끼며 처음으로 웃었다. 일상용품이 있다면 그냥 지하의 빈 공간은 아니라는, 적인지 아군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드나드는 출구가 있다는 의미였다.
“혹시 적군이 있는지도 모르니 조용히 계세요, 옹주 마마.”
헨지는 할룩스를 켰다. 이젠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주페와 다른 가디언들을 불러올리는 일만 남아있었다.
“어?”
할룩스를 켠 헨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방금 전 구멍에서도 ―지직거리긴 해도―그럭저럭 의사소통이 되었던 할룩스가 동굴 안에 들어오니 완전히 먹통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구멍 밖으로 몸을 빼고 다시 할룩스를 켰다.
“기뻐하십시오. 동굴을 찾았습니다. 일상용품이 있는 걸 보아 누군가 다녀가는 곳 같습니다.”
할룩스 건너편에서 일행들이 얼싸안고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너머에서 에스더의 ‘수고했어요’라는 기쁨에 찬 소리가 제일 크게 달려왔다. 살짝 격앙된 주페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다행입니다. 헨지, 황상께서 분명 큰 포상을 내리실 겁니다. 방금 연락이 왔는데 5백의 크바르나 군단도 2시간 후에 도착한답니다.”
아샤드 경의 사무적이고 딱딱한 목소리가 뒤이어졌다.
“적군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판지셰르 분지에 착륙하지 말고 이 구멍 밑으로 오라 하겠네. 수송선이 작고 착륙 유도를 할 우리편 조종사도 밑에 남아있으니 적에게 들키기 않고 착륙할 수 있을 게야.”
“로프 고정했으니 빨리 올라오시…….”
바삐 상황을 전하던 헨지는 등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잠시만 한눈팔면 사라지는 그 말썽꾼 옹주가 또 어딘가로 뛰어가려다가 헨지에게 바지자락을 붙들려 물 위에 텀벙 소리를 내고 자빠졌다.
“너무해요.”
물에 흠뻑 젖은 마리안이 구시렁거렸다.
“안쪽에서 황태후 할머니 냄새가 났어요.”
“엥?”
헨지는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이 천방지축 꼬마를 동굴에 놓아줄 수는 없었다. 그는 방금 건 케이블을 쑥 내밀었다.
“자요, 이거 잡고 있어야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안 흔들려요. 다들 올라오면 그때 그분 찾으러 가요.”
할 일을 얻은 마리안은 그제야 히이 웃으며 작은 손으로 줄을 꼭 쥐었다. 물론 이 줄은 이미 잘 고정되었고 위에서 잡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지만 매번 호기심이 자제심을 추월하는 꼬마를 자리에 붙들어주는 데는 이만한 묘약이 없었다. 헨지는 주머니에서 큼직한 군용 사탕을 꺼내 아이의 작은 입에 쏙 넣어주었다.
“힘드니까 이거 빨아 드시고요.”
구시렁대는 아이의 입까지 막아버린 헨지는 랜턴을 들고 웅덩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웅덩이 좌우로 각각 굴이 뚫려있지만 어느 쪽이 안쪽이고 어느 쪽이 나가는 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바닥을 더듬거리던 그는 머리카락보다 조금 굵은 통신용 케이블을 찾아낼 수 있었다.
“황실 군납품인데……새 거네?”
그는 이곳에 케이블이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이곳에 들른 사람이 황실군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금 마리안의 말이 사실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통신 케이블까지 설치했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장소라는 의미였다.
헨지는 비로소 용기를 내어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 없어요!!! 황실 일행입니다!”
헨지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웅웅거리며 사방으로 진동이 전달되는 보통의 동굴과는 달리 마치 흡음재라도 된 것처럼 울림이 전혀 없었다.
“대체 뭐 하는 동굴이지?”
긴장되는 몇 분이 지나고, 절벽을 기어올라 제일 먼저 구멍에 도착한 건 아샤드 경이었다. 첫 번째로 올라온 사람이 아샤드라는 건 헨지에겐 퍽이나 다행이었다. 아샤드는 구멍을 지나 동굴에 접어들자마자 바닥에 밟히는 물소리의 진동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직감했다.
“혹시 벽에……뭔가 바른 것 아닌가?”
“그런 것 같습니다. 옹주께선 황태후의 체취가 느껴진다고 하셨고요.”
“그럼 어딘지 대충 알겠군.”
아샤드 경은 이 굴의 정체를 바로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곳을 밟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웅덩이 양쪽으로 난 굴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일지엔 여기 웅덩이가 있다는 말은 없었지만……내가 생각한 그곳이 맞는다면 이 굴은 닫힌 평면이라 어느 쪽으로 가든 출구로 이어질 거야. 한쪽은 불탄 시체가 쌓인 구덩이로 이어질 테고, 한쪽은 출구로 바로 이어지겠지.”
뒤이어 주페가, 그리고 다룬과 에스더, 2명의 엔지니어들이 오르고 마지막으로 페다이가 올라섰다. 구멍 밖으로는 여전히 모래바람이 불고 있지만 그래도 동굴 안은 그럭저럭 살만했다.
“이 통신선이 살아있는 거 맞나?”
아샤드 경은 유선 송화기를 연결하고 신호를 보내 보았다. 동굴 안에 수화기가 있고,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받을 터였다.
“안 받는데 신호는 가.”
아샤드 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송화기를 풀고 일어섰다.
“오른쪽 길은 나와 페다이가 태자 저하를 모시고 가겠다. 나도 초행이긴 해도 일지에서 본 건 있으니 낫겠지. 왼쪽 길은 다룬과 헨지가 귀인 마마와 함께 가고. 마리안 옹주께서 감각이 예민하시니 생소한 사람들과 가는 게 낫지. 중간에서 시체 같은 게 나올지 모르니 아이가 보지 않도록 해 주게. 지금부터 2분마다 한 번씩 송화기를 꽂아 서로 위치와 상황을 알리도록 하지.”
다시 둘로 갈라진 일행은 굴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팀에 특등급 수준의 X가 2명씩이나 있으니 웬만한 적은 만나도 문제가 없을 듯했다.
아샤드 일행이 구멍에 오르고 있는 동안, 동굴 입구 주변에는 수백의 헤네티와 칼데아군이 도착해 있었다. 아들의 보고를 받은 이렌느는 5백의 보병대를 데리고 올라와 문제의 바위산 주변에 샅샅이 조사를 명했다. 하지만 도착한지 겨우 하루 된 병사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래서야 오늘 저녁에 철성에 공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끄가 느릿느릿 주변을 대충 둘러보고 다니는 보병들을 보며 어머니에게 투덜거렸다. 정찰을 나서기 직전까지만 해도 시키는 임무도 하기 싫어 골이 나 있던 이 젊은 무장은 황실 일행을 한 번 물리친 이후로 사기가 충천해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고 괜히 병사들에게 고함도 질러가며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카나르 경……, 아니 공……황제의 연락입니다. 제후님.”
아직 호칭에 익숙지 않은 통신병이 묵직한 유선장비를 끙끙대며 메고 올라와 팔뚝만한 크기에 거의 벽돌 무게의 송화기를 이렌느에게 건넸다.
“이거 급할 땐 적군한테 던지라는 거냐?”
평소 농담이라고는 거의 없던 이렌느의 푸념에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얼토당토않은 크기의 송화기는 검은 재와 모래폭풍에도 작동하게 만들려다보니 나온 기괴한 돌연변이였다. 황실군이 서부 기술자들에게 의뢰한 같은 성능의 기계는 절반 크기도 안 되었지만 남부의 기술력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덕분에 덩치 좋은 통신병 하나씩을 뽑아 송화기와 돌돌 말린 케이블이 든 등짐을 항상 메고 지휘부를 따라다녀야 했다.
이렌느가 송화기를 켜자 잔뜩 골이 나 있는 카나르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거 참모장 누구 다른 사람 시켜야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카나르의 불평엔 참모장 본래의 업무를 내던지고 일선에 처박혀 있는 이렌느에 대한 책망과,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송풍로 공사에 비해 ‘너무 잘 나가고 있는’ 협곡 상황에 대한 질투가 섞여있었다.
“기왕 손댄 거라 이제와 누구 넘겨주기도 뭣해서요. 그놈의 송풍로 완성되길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이렌느가 사무적인 미소를 보였다. 그는 하마피타 교단 사람들이 버글거리는 사령부에 가느니 차라리 산소 희박한 이곳에서 고산병과 씨름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있는 중이었다.
치워도 치워도 계속 무너지는 송풍로의 모래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카나르가 마지못해 그의 말을 수긍했다.
“뭐, 기왕 협곡을 뚫었으니 그쪽으로라도 빨리 공격하는 게 좋긴 하겠지만……경께서 그러시면 실전경험 넘쳐나는 우리 플라칼 가나 델루지 가 무장들은 여기서 딱지나 치고 있으라고요?”
카나르는 이렌느의 실전경험 부재를 슬쩍 비꼬았지만 일천한 경력에도 워낙 승승장구하고를 있다 보니 결과에 관해 뭐라 꼬집을 상황은 되지 못했다. 당초 그는 플라칼 가와 델루지 가가 맡고 있는 동쪽의 송풍로 쪽이 협곡보다는 훨씬 빨리 철성에 닿으리라는 생각에 일부러 세닉 가를 따돌리려 협곡을 맡긴 것이었지만 뭔가 일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차마 말은 못 하지만, 그는 세닉 가가 먼저 철성을 점령해 혹 황금탑에 손이라도 대지 않을지 밤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이렌느가 자존심 상해하고 있는 이 백전노장의 가슴에 다시 쇠말뚝을 박았다.
“방금 전 제 아들 자끄가 정찰 중에 황실군과 짧은 교전을 벌였습니다. 가디언 합쳐 서너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아무 피해 없이 물리쳤고요, 놈들은 죽었거나 중상을 입고 도망갔습니다.”
이렌느는 바닥에 있는 큰 핏자국을 향해 보란 듯 카메라를 돌리며 으스댔다. 가뜩이나 할 말이 없었던 카나르는 이제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것 빼고는 다른 선택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렌느가 손으로 언덕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확인이 끝나는 대로 철성으로 본대를 진격시킬 예정입니다. 폐하께서도 빨리 철성을 차지하는 게 관건이라고 누차 이야기를 하셨으니 설마 발목은 잡지 않으시겠죠?”
카나르는 질투심을 가슴 속에 꽁꽁 억누르고 일단 총 사령관의 입장으로 되돌아갔다.
“철성을 단독으로 공격하겠다고요? 다리는 완성됐고요?”
카나르는 이렌느가 고작 서너 명의 전과를 가지고 더 으스대기 전에 얼른 말을 돌렸다.
“지금 난간 작업 중이고 한두 시간 후면 차량통행이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이면 철성 공격이 가능할 겁니다.”
“하긴, 인명손실이 나는 한이 있어도 하루라도 빨리 철성을 점령하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긴 하니까.”
말은 이리 하지만 카나르의 속은 팍팍 쓰라려 미칠 것 같았다.
“그럼 다리 완성되면 다시 연락 주시오.”
카나르와의 연락을 끊은 이렌느는 팔뚝만한 송화기를 통신병에게 돌려주고는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언덕 위를 힐끔 쳐다보았다.
“따라와 봐라.”
이렌느는 밟으면 무너지는 돌밭을 몇 번이나 미끄러지며 허우적거리고 기어오르더니 단층이 무지개처럼 쌓인 수직의 암반 앞에 섰다.
“왜요?”
뒤따라온 자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렌느가 아들에게 다시 물었다.
“적 매복은 아직 발견 못 했지?”
“예, 30분이나 뒤지고 있는데 아직입니다.”
이렌느의 가늘고 예리한 눈길이 암반을 죽 훑고는 이상한 바위 무더기에 멎었다. 그 바로 앞에서는 정찰을 나온 병사들 셋이 무기를 놓고 간식을 먹으며 쉬는 중이고 누가 봐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이렌느는 몇 번이나 거듭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 바위 무더기로 향했다.
“느낌이 이상해.”
“요즘 어머니 느낌이 별나게 잘 맞긴 하지만 이 벽이 뭐 어때서요?”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려던 자끄는 뒤따라온 헤네티가 갑자기 바닥에 쭈그려 앉는 모습에 바싹 긴장했다. 베테랑 헤네티는 바닥에 깔린 굵은 자갈을 손으로 박박 긁어내고는 그 밑에 있는 아주 가는 선을 집어냈다. 육안으로는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가늘다보니 수많은 정찰병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면서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황실군이 쓰는 인계선입니다.”
헤네티가 재빨리 이렌느 앞을 막아서고 경계 태세를 잡았고, 간식을 먹던 세닉 가 정찰병들도 일제히 일어나 무기를 빼들었다.
“제후님께선 물러나 계십시오.”
병사들이 야전삽과 곡괭이를 빼들고 문제의 돌더미를 파내기 시작했다. 돌 몇 개를 빼내자 안에서 습하고 따뜻한 공기가 확 몰려나왔다. 방금 헤네티가 찾은 인계선은 이 안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들이 재빨리 마우저를 겨누었지만 입구 부근은 텅 비어있었다.
헤네티는 바닥에 있는 황실군의 발자국을 곧 찾아냈다. 발자국은 동굴 안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굴 입구는 어른이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할 만큼 낮지만 내부는 꽤 넓어보였다.
“방금 전까지 여기 누가 있었나 봅니다. 3, 4명 정도입니다. 안으로 달아났습니다.”
“고작?”
자끄는 눈에 낀 스코프를 켜 보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스코프가 왜 안 듣지?”
“모래폭풍 때문일 겁니다.”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랜턴을 켜들고 동굴에 하나둘 들어섰다. 그들은 안의 공기가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는 갑갑한 마스크를 벗었다. 고산이라 호흡도 힘든 상황에서 마스크와 고글을 벗으니 그것만으로도 속이 확 트이고 살 것 같았다.
“뭐 하는 데인지 몰라도 놈들 위치 하나는 귀신같이 잘 잡았네.”
타리프의 일지를 본 일도 없고, 먼 옛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전혀 모르는 자끄는 굴을 빙 둘러보며 나름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황실군의 비트일까?”
“글쎄요, 여기선 우리 진격로도 보이지 않고 매복 공격할 위치도 아닙니다만…….”
경험 많은 헤네티도 이곳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밖에서 이 동굴을 지켜보는 이렌느에겐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것 봐. 내가 뭔가 있댔지.”
또 ‘한 건’을 올린 이렌느의 표정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다리가 열렸을 테니 난 내려가서 본대를 이끌고 네 누나와 철성을 쳐야겠다. 그 동안 자끄 네가 여길 맡아라. 보병 100명과 헤네티 5명을 주지. 가능한 포로로 잡아서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여기 정체를 알아내라.”
이렌느는 내친 김에 아들에게 제대로 공훈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남동생 예르마크 일가가 사실상 전멸한 상황에서 가문 사람들과 영지민들 앞에서 종장이라고 제대로 이름값을 드러내려면 이제 자신의 자식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어야 했다.
“그럼 수고해라. ……괜히 네가 앞장서지 말고.”
이렌느는 아들에게 주의를 주고는 홀가분하게 자갈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스스로도 놀랄 만큼 일사천리였다.
“예, 여기서도 꼭 좋은 소식 드리겠습니다.”
방금 전의 승전으로 의기양양해진 자끄는 본대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배웅한 후, 자신에게 맡겨진 1백 명 조금 넘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중에는 마우저로 무장한 코런덤의 X도 2명이나 있었다.
“동굴도 좁은데 우르르 들어가야 좋을 건 없지. 헤네티 둘이 앞장서고 2개 분대 20명만 들어간다. 황실군이 역습을 할지 모르니 나머지는 바깥을 지키고 있어.”
대충 머릿속을 정리한 자끄는 헤네티와 병사들에게 안에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그가 아는 건 고작 서넛의 ‘만만한’ 적이 놀라 도망친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심문할 것이 많으니 웬만하면 사로잡아야겠다.”
자끄는 20여의 병사들이 랜턴과 석궁, 방패를 챙겨들고 헤네티와 함께 동굴에 들어섰다. 그런데 몇 발짝 들어가지 않아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나타났다.
“어디로 갔냐?”
제일 뒤에서 따라가던 자끄가 선두의 헤네티에게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스코프도 듣지 않는 이곳에서 제일 믿을만한 건 열을 감지하는 적외선 시야를 지닌 X뿐이었다.
“여기부터는 바닥이 돌이라 흔적이 없습니다. 체온도 감지되지 않고요. 저희 같은 헤네티가 따라올 걸 예상하고 도망간 것 같습니다.”
자끄는 각각 10명씩으로 갈라져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20명의 일행은 둘로 갈라져 각각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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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은 닭들에게 공공의 적이 될 듯하고.....
자끄는.....똑 또르르르~ 나무 관세음보살~ 아멘~ 인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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