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90화 (1,085/1,132)

< -- 1090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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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길로 가는 팀에 합류한 자끄는 어머니 이렌느의 조언대로 제일 뒤에서 일행을 따라갔다.

“뭔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꼭 흡음재를 댄 것 같은…….”

선두에 나아가던 헤네티가 굴을 들어가다 말고 멈칫거렸다. 그는 무심결에 할룩스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불통이었다. 이 베테랑 헤네티는 어딘지 익숙한 느낌에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교위님, 이 굴은 아무래도 황궁 지하와 느낌이 비슷…….”

“빨리 들어가기나 해.”

뒤에 선 자끄는 뚱딴지같은 황궁 지하 타령에 랜턴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재촉했다. 하지만 병사들도 주변 진동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슬슬 불안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큰 랜턴을 켜든 헤네티를 선두로, 십여 명의 병사들은 왠지 오싹한 이 동굴 안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갔다.

“흐익!”

소리를 낸 건 선두의 헤네티가 아니고 그 바로 뒤를 따라가던 경보병이었다. 손발을 앞으로 오그린 시커먼 사람 모양이 이 불청객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뒤에서 랜턴을 비추었던 자끄도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뭐야, 인형이야?”

“아뇨, 오래된 진짜 사람 시체입니다. 그런데……누군가 골반 뼈를 빼내간 것 같습니다. 일단 그냥 들어가는 게 낫겠습니다.”

10명의 병사들과 자끄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마치 자신들을 비웃고 있는 것 같은 소년의 시체 옆을 괜스레 까치발로 조심조심 지나갔다.

막 모퉁이를 돈 순간, 헤네티가 얼른 손을 들어 정지를 알렸다. 그는 뒤따르는 병사들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벽에 손자국이 있다. 누군가 휘청거리다 짚은 것 같다. 체온으로 잡아낼 테니 잡고 따라와.”

동굴이지만 소리가 거의 울리지 않는 덕분에 소근거림은 말 그대로 소근거림으로 끝났다. 헤네티가 랜턴을 끄자 경보병들이 기겁을 했지만 열을 감지하는 X가 앞선다면 아주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 앞사람의 어깨를 짚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른쪽 길을 택한 아샤드는 방패를 앞세우고 10여분 가까이 걸음을 옮겼지만 아직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마리안이 함께 간다면 훨씬 마음이 든든했겠지만 동굴 양 방향 중 어느 쪽이 출구와 가까운지 알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둘로 갈라져야 했다.

“다룬의 팀도 아직 출구에 못 닿았답니다.”

아샤드는 케이블에서 송화기를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2분마다 한 번씩 왼쪽으로 간 팀과 송화기를 연결해 통화를 했지만 그쪽도 별반 다를 건 없는 듯했다.

“계속 가죠.”

그의 바로 뒤에는 주페가 있고 두 명의 엔지니어들, 그리고 후미에서 페다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황실군 케이블이 설치되어있어 일단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며 나갈 수도 없었다. 그는 랜턴을 켜들었지만 언제든 의심스런 자들이 나타나면 경계태세로 바꿀 참이었다.

그는 굴이 꺾이는 모퉁이에서 랜턴의 강도를 최대한 높이고 확 돌아서며 정면을 겨누었다. 불빛 때문에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맞은편에 혹시라도 적이 있는 최악의 경우 상대의 눈을 잠시 멀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엇.”

멈칫거리는 아샤드의 모습에 뒤쪽에 있던 페다이도 재빨리 방패를 꺼내들고 옆에 합류했다. 무언가 아른거리는 형체를 본 것도 같은데 아군인지 적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몇 발의 강력한 볼트가 날아와 이들의 방패를 때렸다. 마우저에 대비해 개조한 그들의 방패가 펑펑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어딘가 찌그러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우잇!”

놀란 아샤드와 페다이가 얼른 몸을 낮추고 강화석궁을 빼들었다. 페다이가 반사적으로 응사를 하려는 것을 노련한 아샤드가 재빨리 말렸다.

“가만, 황실군 볼트다.”

아샤드는 석궁 대신, 손수건을 꺼내 높이 흔들었다.

“친위군 검은 사신 여단이다!!! 소속을 밝혀라!!!”

그의 외침에 맞은편의 사격이 뚝 멈추었다.

자끄를 인도하고 있는 헤네티는 적의 체온 흔적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옆에 방입니다.”

그는 문을 휙 열고 랜턴을 비추었다. 하지만 안에는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듯 흐트러진 잠자리와 일상용품이 뒹굴고 있을 뿐 텅 비어있었다.

“계속 전진합니다.”

헤네티는 잠시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뒤따르는 10명의 병사들도 숨을 죽이고 그 뒤를 따랐다. 얼마 가지 않아 방향이 꺾이는 지점이 나타났다. 이곳에도 여지없이 손자국이 나 있었다.

“거의 따라잡은 것 같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랜턴을 끈 채 손으로 방향을 짚으며 돌아섰다. 이번 위치는 굴의 각도가 꽤 급하게 꺾이는 것 같았다. 뒤를 따르는 10명의 병사들과 제일 후미의 자끄도 그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이번 굴은 제법 넓고 곧게 이어지는 듯했다. 헤네티는 살짝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방패를 들고는 있지만 온기를 정확히 보기 위해 머리는 완전히 드러낸 상태였다.

“거의 잡은 것 같은데…….”

막 중얼거리는 헤네티의 코앞, 고작해야 40척(12m) 남짓 정면에서 무언가 철크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는 않았다. 마지막 순간, 헤네티가 본 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두 개의 무지개빛뿐이었다. 뒤이어 강력한 충격이 그의 눈 사이를 갈가리 찢어냈다. 채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으웁!”

선두에 가던 헤네티의 머리가 깨지며 털썩 쓰러지는 소리에 이어 뒤를 바싹 따르던 경보병과 자끄의 비명이 동굴을 흔들었다. 헤네티의 몸에 바로 불이라도 붙였다면 그의 어깨를 짚고 따라가던 병사들 몇까지 모조리 통구이가 되었을 판이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쉿쉿 하며 어마어마한 강화볼트 세례가 남은 11명에게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좁은 직선 굴에서, 그것도 앞을 볼 수 있는 상대 앞에서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무력한 표적일 뿐이었다.

“아아아악!!!”

앞쪽에 나아가던 4명이 손도 못 쓴 채 즉사하거나 팔다리가 찢겨 자리에 주저앉았고 후미에서 운 좋게 볼트 세례를 피한 6명과 자끄가 패닉에 빠져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적이 누군지, 숫자가 몇인지도 보지 못했지만 최소한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벌집이 되어 죽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어떤 놈들이야!!!”

제일 뒤에 있던 덕분에 달아나는 길에서는 선두가 된 자끄가 울부짖으며 무작정 랜턴부터 켰다. 불빛 때문에 적의 표적이 되리라는 것도 알지만 앞을 못 본 채 길을 잃고 넘어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예상대로 더 많은 볼트가 우수수 쏟아져왔고, 자끄를 따르던 병사들은 픽픽 쓰러져 동굴 중간중간 흔적을 남겼다.

“이걸 어떡해!”

자끄가 뒤를 돌아본 순간, 제일 먼저 쓰러졌던 헤네티의 몸에서 푸른 불꽃이 확 일어 그의 시야를, 그리고 동굴을 막아버렸다. 그에겐 구사일생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그는 랜턴 빛에 의존해 동굴 모퉁이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중간 중간 돌에 걸리고 다리가 엉켜 넘어졌지만 몇 번을 넘어졌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옆엔 아직 몇 명의 병사가 있고, 뒤에선 숨이 붙은 부하들의 신음이 들려오고 있지만 응전은 고사하고 쓰러진 병사들을 추스를 생각도,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불길 너머로 계속 볼트가 날아왔고, 3명의 병사가 또 쓰러졌다.

“다 왔어! 다 왔다고!”

그 사이, 모퉁이에 도달한 자끄가 그 너머로 몸을 날렸다. 바닥에 무릎과 팔꿈치를 부딪치며 굴렀지만 아픔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가 옆을 보았을 때 이곳까지 따라온 건 고작 1명뿐이었다. 경보병 9명, 헤네티 1명이 모퉁이 너머에서 시체 혹은 부상자가 되어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되돌아가 구할 수도 없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우적거리며 동굴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밖에는 이런 동굴 따위는 발바닥으로 꽉 채우고 남을 많은 숫자의 우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놈의 불!”

아샤드는 도망치는 적을 쫓으려 했지만 불타고 있는 헤네티의 시체 때문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임시발판이라도 놓으면 어찌저찌 넘어갈 테지만 이 휑한 동굴엔 그럴만한 물건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도망친 자끄를 붙잡을 수 있는 황금 같은 몇 분을 놓치고 말았다.

“젠장!”

그는 헤네티의 몸에서 불이 꺼지기를 몇 분이나 기다려 그 위를 훌쩍 넘어갔다. 하얗게 탄 헤네티의 재 너머에는 9명이나 되는 세닉 가 경보병들이 이미 죽었거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페다이 넌 날 따라와! 저놈이 바깥의 한편에게 도착하기 전에 잡아야 한다!”

두 가디언들이 서둘러 멀어진 후, 뒤에 남은 산토스는 병사들을 툭툭 걷어차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불타는 헤네티와 너무 가까이 있다가 질식사한 운 없는 병사도 있고, 급소에 맞아 즉사한 자들도 보였다.

“여섯은 죽었고, 셋은 아직 숨이 붙었습니다.”

산토스가 뒤따라온 세네피스에게 입을 열었다. 산토스는 척추에 볼트를 맞은 채 두 팔만으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던 경보병의 고개를 억지로 뒤로 끌어올리고는 다급히 물었다.

“너희 대장이 여기서 누구냐!”

“도, 도망갔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전 그냥 대장 따라 도망가다가 맞았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숨을 애원하던 부상병의 시선이 막 헤네티의 시체를 넘어오던 황태후 세네피스와 딱 마주쳤다.

“돌봐줄 상황도 아니다. 사살해라.”

산토스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황태후의 지시에 움찔했지만 결국 칼을 빼들고는 신음하는 적 부상병의 목에 가져갔다. 병사의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제발, 제발, 전 여기 와서 볼트 한 발 안 쐈습니다.”

그때, 주페가 후다닥 뛰어나가 죽어가는 부상병의 앞을 막아섰다.

“폐하, 중상자들입니다. 어차피 못 움직이니 저항할 수 없습니다.”

“저들을 누가 돌본다는 말인가! 태자는 아직 배울 게 많구나.”

감히 자신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태자의 모습에 발끈한 세네피스가 이를 드러냈다.

“차라리 죽여주는 게 자비다. 카파키 가를 이을 종손이 이리 나약하다니! 태자는 어른들 일에 끼지 말고 당장 물러나지 못할까.”

잠시 생각을 한 주페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밖엔 수십 수백 배는 많은 적이 더 있을 겁니다! 안에 우군 포로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 놈들도 함부로 공격을 해 오지 못할 겁니다!”

포로의 목을 베려 이미 칼날을 들이대고 있던 산토스도 슬쩍 양쪽 눈치를 보았다. 둘 모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카파키 가의 현 종장 세네피스의 분노와, 태자이며 가문 후계자인 주페의 차가운 이성이 처음으로 부딪친 순간이었다.

“네가 포로를 책임질 것이라면 그리 해 봐라.”

손자를 보며 살짝 눈가를 찡그렸던 세네피스는 죽은 적병의 시체를 짜증스레 뒤로 차내며 먼저 간 아샤드와 페다이의 뒤를 따라 서둘러 멀어져갔다. 말다툼을 할 시간이 없어서일 뿐 일부러 뜻을 꺾은 건 아니었다. 주페가 여기 붙잡혀있는 동안 도망간 적 대장을 붙잡아 정말로 쓴맛을 보여줘야 했다.

달랑 병사 한 명만 거느린 자끄는 뒤쫓아 오고 있을 가디언들을 피해 어두운 굴을 필사적으로 달렸다. 고산병도, 현기증도 지금은 뇌 한구석 어디론가로 쏙 숨은 것 같았다. 그는 ‘무조건 뒤에 따라가라’는 어머니 이렌느의 조언도 까맣게 잊은 채 이번엔 병사보다 몇 발짝은 앞장서서 헐레벌떡 뛰었다. 출구가 왜 이리 먼지 알 수가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모퉁이를 휙 돌아선 자끄는 갑자기 확 넓어진 굴과, 그곳에 서 있는 3명의 사람들에 지레 화들짝 놀랐다. 방향감각을 잃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바로 자신이 병력을 둘로 나누었던 그곳 같았다. 그들은 동굴 출구로 이어진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누구냐? 관등성명을 밝혀!”

움츠러들었던 자끄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적은 지금 뒤에서 쫓아오고 있으니 출구 쪽에 있는 자들은 우군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대답 대신 무언가가 번쩍 하며 날아왔다.

“으익!”

자끄의 고개가 날아오는 돌멩이에라도 맞은 듯 뒤로 휙 꺾여 넘어갔다. 그는 멍한 정신으로 바닥에 쭉 뻗고 말았다. 그가 본 건 그 셋 중 둘의 체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팔뚝에서 새파란 가디언 팔찌가 반짝거리고 있다는 정도였다. 그들이 비추는 랜턴 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함께 도망을 나온 병사가 가디언에 놀라 얼른 자리에 주저앉아 두 팔을 번쩍 들고 항복하는 모습도 보였다.

“염병할, 교위였잖아? 이걸 어쩌지?”

덩치 큰 가디언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보다 조금 작은 또 한 명이 뒤따라오며 말을 이었다.

“누가 알았나요. 무슨 놈의 장교 새끼가 꽁지 불 붙은 것처럼 그렇게 뛰어옵니까?”

자끄는 적의 랜턴 불빛을 향해 눈동자를 움직이려 했다. 이마 사이에 무언가가 박혀 있고, 붉고 끈적한 것이 얼굴을 덮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가 쯧쯧거리며 고개를 젓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기랄, 틀렸네.”

세닉 가 종장 이렌느의 둘째아들 자끄 세닉이 생애 마지막으로 보고 들은 광경이었다.

“뭐냐, 사살했어?”

몇 분 뒤, 자끄를 쫓아 도착한 아샤드 경은 이마에 도끼가 박힌 채 쭉 뻗어있는 적장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헨지와 함께 있던 다룬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남부 군복 차림으로 그쪽 굴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잘못한 거 없네.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그런데……교위? 교위가 고작 십여 명을 데리고 여길 들어왔다고?”

“십여 명은 아닙니다.”

헨지가 뒤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자끄와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포로로 잡힌 칼데아군 경보병 4명이 손을 뒤로 한 채 줄줄이 묶여있었다. 그들도 머리가 깨지고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이미 저항불능의 상태들이었다.

“헤네티 한 명은 다룬 형님이 목을 베었고 5명은 사살했습니다. 마리안 옹주께서 적과의 거리를 정확히 잡아주셔서요.”

헨지는 에스더의 곁에 서서 눈을 왜 가렸냐며 구시렁대고 있는 마리안을 가리켰다.

아이의 눈앞에서 끔찍한 시체를 치우려 했던 아샤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이 친구……왠지 눈에 좀 익은데?”

아샤드는 방금 항복한 세닉 가 병사들을 슬쩍 흘겨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이 대답하기도 전,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끄 세닉. 이렌느 그년의 둘째아들이다. 동굴 밖에서부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다 봤지. 배신자 R의 핏줄을 내 손으로 처리해주려 했는데 아깝군.”

세네피스가 도끼에 일그러진 자끄의 얼굴을 지그시 밟으며 눈가를 씰룩거렸다. 아샤드는 자끄의 이마에서 도끼를 뽑아 다룬에게 돌려주고는 시체를 구석에 대충 밀어놓았다.

“그럼 달아난 놈은 없는 거지?”

“다 잡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새끼들 심문해보니 밖에 지금 적이 100명이 넘게 있답니다. 아니, 그놈들뿐이면 좋은데 바로 언덕 아래에선 이렌느 경이 5시부터 검은 철성을 공격하려고 보병 5천과 헤네티 50명이 집결시키는 중이랍니다. 나가긴 힘듭니다.”

아샤드와 다룬은 동굴 출구가 있는 방향을 향해 서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밖에선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전혀 모르는 이렌느가 철성을 빼앗아 큰 공을 세울 기대에 들떠있을 터였다.

아샤드가 일행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크바르나를 태운 수송선이 언제 온댔지?”

협곡을 건너는 정식 다리가 완공되면서 1보병단에서 차출된 5천의 세닉 가 중장보병대와 포병대가 속속 다리를 건너 도착했다. 원칙대로라면 1보병단장 헬리노스 호지 경이 이 공격을 지휘해야 했지만 협곡을 돌파한 주역에게서 막판에 공훈을 빼앗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세닉 가의 반발에 그는 눈물을 머금고 병력만 내준 채 물러서야 했다.

“보병 2개 연대 4천과 포병대 5백, 공병대 5백과 헤네티 50명 집결 완료했습니다.”

보병대 연대장인 세닉 가 중랑장이 말 한 마리를 끌고 와 다리 너머에 집결한 보병들을 가리켰다. 이렌느는 어딘지 힘이 없어 보이는 말에 올라 상태가 괜찮은지 한 번 몸을 흔들어 보았다.

이번 공격은 고산지대라는 상황 때문에 기병을 거의 쓸 수 없었다. 사람은 윽박지르고 억지로 몰아붙이거니, 쓰러지면 후송이라도 할 수 있지만 산소가 부족해 쓰러진 말은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세닉 가는 지휘관과 근위기병을 위해 나름 잘 적응한 것들을 골라내 보았지만 상당수의 군마들은 사람을 태우고 질주할 만큼 힘을 내지 못했고, 몇몇은 쓰러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런 곳에서 덩치 크고 근육이 많아 산소 소모도 많은 군마는 황실군 분견대가 부리는 작고 탄탄한 노새나 조랑말만도 못했다.

“불안한데 중간에 굴러 떨어지느니 차라리 그냥 걷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이렌느는 기운 없이 터벅터벅 걷는 말에 차마 박차를 가하지 못했다. 지휘부 모두가 불안한 얼굴로 말에 올라 보병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좋지 않지만 지휘부가 ‘체통 없이’ 두 다리로 뛰어다니는 광경도 지휘부나 병사들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이놈들만으로 될까요?”

이렌느의 옆에 함께 가던 딸 니콜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동생 자끄가 적병을 물리치고 동굴을 수색 섬멸하는 임무까지 맡으면서 그는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지난 협곡 돌파를 주도한 포병대 소속이기는 하지만 지휘관도 아닌, 일개 참모 신분이라 드러나게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에게 돌아올 몫은 군복 가슴에 붙을 전투기장 하나밖에 없었다.

그동안 니콜에게 적장자인 오빠 요아킴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할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요아킴은 행정과 군사 모두에 유능했고, 냉혹한 어머니와는 달리 온화하고 가정적인 성격에 수려한 용모까지 갖춰 영지민 사이에서도 인기가 무척 좋았다. 맏이의 확실한 위치에 비하면 나머지 남매들의 위치는 말 그대로 ‘고만고만한’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렸다.

“기병도 거의 없고……, 보병 질도 낮은데 상대가 가디언들이면…….”

니콜이 말꼬리를 흐리며 슬쩍 어머니의 눈치를 보았다. 정치 10단 이렌느가 맏딸의 이런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었다.

“글쎄, 포병대는 보급품이 너무 많이 필요해서. 난감한 상황에선 땅개들 머릿수만한 게 또 있나?”

이렌느는 남동생에게 행여 밀릴까 초조해하는 누나의 과욕을 일단 이쯤에서 끊었다.

“이번엔 포병대를 모두 네게 맡길 테니까 그럼 잘 해 봐라.”

이번에 다리를 건너온 5천의 중장보병은 가문 보병들 중 나름 적응을 잘 한 자들로 추려 뽑았지만 그들 역시 혈색은 좋지 못했다. 약을 복용하고, 약간의 적응기를 가지기는 했지만 고작 2, 3일의 여유는 이런 살인적인 고산지역에 적응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세닉 가도 소위 ‘하임달 지분’을 위해 보병대를 순식간에 2배 가까이 뻥튀기했기는 마찬가지라 질이 떨어지는 신병이 너무 많았고, 경력보다는 고소 적응능력 하나만으로 뽑은 이번 공격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지휘부는 이번엔 남부보병대의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당장 전투에 써먹을 물건이 아닌 것들은 모조리 빼고 아무 것도 들지 않게 했다. 대신 그들의 짐은 모두 뒤따라오는 마차와 차량에 실려 있었다.

원래 마차는 군이 현대화된 후 사라진 과거 유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채 1, 2시간도 달리지 못하고 길에서 퍼지는 차량을 보다 못한 이렌느는 기왕 못 써먹을 기병들에게서 말을 차출하고 차량용 차축과 공병대의 건설용 자재를 대충 용접해 붙여 하룻밤 만에 100대가 넘는 수송용 마차를 만들 수 있었다. 최소한 잡일에라도 부려먹을 손이 많다는 건 칼데아군에 확실한 이득이었다.

최소한 무게에서는 한결 가벼워진 5천의 병사들은 전투를 지휘할 종장 이렌느에게 큰 함성과 함께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어제 우리는 칼데아군 첫 승전의 기록을 올렸다! 이젠 두 번째 승리로 우리가 칼데아의 진정한 주역임을 알릴 때다!”

“예!!!”

병사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4제후로서, 칼데아 제국에선 가장 약한 세력으로 출발한 그들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의 전투에선 송풍로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3개의 상위가문을 물리치고 유일하게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저 위엔 거대한 황금탑이 있다! 우린 이제 그곳을 차지하러 간다! 다시 말한다! 승전을 거두면 너희 모두에게 하루 동안 철성과 포로를 마음껏 약탈할 기회를 주겠다!”

약탈할 기회라는 말에 장병들의 축 처진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에 맘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따라온 헤네티 대장이 이렌느의 말에 성큼 다가섰다.

“제후님, 황금탑과 철성은 우리 교단의 것입니다. 누가 어디를 약탈한단 말입니까?”

“황금탑과 철성을 너희 주기로 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내용물하고 포로들까지 안 건드린다는 약속은 없었을 텐데?”

헤네티 대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렌느는 그에게 짜증스레 손을 저으며 언덕 위쪽으로 말을 돌렸다.

“철성 자체하고 황금탑은 손끝 하나 안 대고 돌려줄 테니 염려 마라. 내 약속하지, 그럼 됐나?”

이렌느는 손끝을 꼭대기 쪽으로 힘차게 향했다.

“출발!!! 이젠 철성이다!”

약탈이라는 말에 분기탱천한 보병들은 씩씩하게 함성을 지르며 철성으로 이어진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보병들 옆을 걷던 이렌느는 굳은 얼굴로 마지못해 앞서가는 헤네티 대장을 흘끔 흘겨보았다.

‘멍청한 놈.’

정치적인 수사가 몸에 익은 이렌느에게 철성 자체는 손대지 않겠다는 말도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철성과 황금탑에 ‘합법적으로’ 손을 못 댈 바엔 약탈이라는 이름을 빌려 떡고물이라도 차지하는 것도 한 선택이었다. 그는 일단 약탈에 들어가면 장병들을 통제하기 불가능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물욕에 눈먼 그들은 불을 지르건, 아니면 망치와 도끼질로 부수어 파편을 가져오건 돈이 될 것은 알아서 건져올 터였다. 어차피 아예 못 가졌을 물건이라면 가치가 떨어질지언정 훼손시켜 얻는 것도 그에겐 손해가 아니었다.

그는 광란의 시간 동안 대충 말리는 시늉만 하며 한 발 물러서 있을 참이었다. 그렇게 무지렁이 병사들의 손을 거친 빌려 최대한 건질 것을 건진 후, 교단에서 반발하면 그때 가서 몇 놈쯤 꼬리 자르기로 처형하고 자신은 쏙 빠져나오는 시나리오까지 다 세워놓은 후였다.

물론 그것도 철성을 점령한다는 전제 하에서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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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도 일본인보다 한국인 순사가 더 악질이었다고....같은 R인 이렌느가 최고의 악질로 등극했습니다. ㅎㅎㅎ

다음편엔 드디어 칼데아군과 검은 철성 수비군(?)의 첫 대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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