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91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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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전진! 5시까지는 도착한다!”
평소보다 훨씬 느슨한 대오로 긴 종대를 이룬 세닉 가 보병대가 언덕을 느릿느릿 올라갔다. 늦은 오후의 전투는 조금만 잘못 꼬이면 야간전투로 바뀌는 만큼 이런 악천후에선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한 시간이라도 빨리 철성을 차지해야 떡고물도 많아지는 이렌느에겐 병사들 몇 더 죽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철성에 얼마의 병력이 있는지는 파악했나?”
“주변에 온통 인계선이 쳐 있어서 정찰병이 제대로 접근은 못 했지만 이전 분견대 병력과 지난 협곡의 피해를 고려하면 1백에서 2백 사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교단에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베흔을 비롯한 특등급 가디언이 상당수 섞여있어서 실제 전력은 그 이상일 겁니다.
“그래도 고작 그거 잡으려고 5천이 넘게 출동하다니.”
이렌느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칼데아군의 5천 공격군은 철성으로 이어진 오르막을 꾸역꾸역 계속 올랐다. 평상시 컨디션이라면 길어야 2, 30분에 주파할 거리지만 이번은 병사들도 발을 질질 끌며 가까스로 걷는 상황이었다. 뒤따라오는 포병대와 공병대는 짐이 많아 상황이 더 심각했다. 병사들의 개인 군장을 진 마차는 제일 꽁무니에서 느릿느릿 올라오는 중이었다.
보병대 한쪽에서 길을 재촉하던 이렌느는 문득 망원경을 들고 아들 자끄가 가 있는 언덕 쪽을 돌아보았다.
“자끄 그놈한테는 왜 연락이 없지?”
제후의 갑작스런 물음에 보병대 연대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그게……30분쯤 전에 연락을 받았는데 자끄 경이 나오지도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아 추가 병력을 들여보낸다고 했습니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는 거냐?”
이렌느가 노기 띤 얼굴로 대뜸 연대장을 윽박질렀다. 연대장이 당황한 얼굴로 둘러댔다.
“그게……막 보병대를 정렬시키느라 바빠 보이셔서……나중에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이렌느는 굳은 얼굴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제후에게까지 모두 미주알고주알 보고를 올리기는 상황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쨌든 자끄는 공식적으로는 일개 교위에 불과했다.
가파른 오르막을 한 시간 가까이 올라간 5천의 칼데아군은 천신만고 끝에 해발 고도 40스타디아가 넘는 고원에 발을 디뎠다. 나름 상태가 좋은 병사들은 추린 것인데도 올라오는 길에 5백 가까운 장병들이 또다시 낙오를 했고. 내내 속을 썩이던 차량은 여기서도 달라진 게 없었다. 30문의 발리스타 중 9문은 차가 고장이 나 올라오지 못했고, 2문은 가파른 언덕에서 바닥 지반이 꺼지면서 싣고 오던 차량이 전복해 4명의 운전병과 함께 절벽 밑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공격의 첫 사망자는 보병대가 아니고 포병대에서 나온 셈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 손해는 예상했어.”
고원에 막 올라 가쁜 숨을 고르던 이렌느는 사고 차량과 시신을 찾았다는 보고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의 앞에는 몰아치는 모래폭풍 너머 검은 철성의 육중한 형상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나름 흐뭇하게 미소를 짓던 그에게 통신병이 허겁지겁 달려와 무거운 수화기를 내밀었다. 분지의 사령부에 있는 클리멘트의 목소리였다.
“제후님, 외계에서 정체불명의 중형 수송선 한 척이 대기권에 들어온 것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이렌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체불명이라니? 우리 루트로 누가 들어왔다고?”
“그건 아니고요, 하임달 5번에서 며칠 걸려 달려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말은……황실에서 보낸 지원군이라고? 중형 수송선이?”
이렌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클리멘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주 크지는 않습니다. 많아야 몇 백쯤 들어왔을 겁니다. 불릿으로 추격하려 했는데 우리 스캐너 영역 밖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분지에는 착륙하지 않았고 외곽 산맥 바깥 어딘가에 착륙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 분지 안에 착륙했어야 확 쓸어버리지, 놓쳐 놓고 딴소리는.”
지난 이틀간 콧대가 하늘까지 높아진 이렌느의 독설에 클리멘트도 대놓고 빈정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렌느가 제플린 산 정상부의 하늘을 덮은 모래폭풍을 올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분명한 건 여긴 수송선은 고사하고 수송선 할아비도 착륙 못 해. 이놈의 모래폭풍이 고마워보기도 처음이네.”
“산맥 서쪽이나 북쪽으론 험해서 어차피 분지로 넘어올 수 없으니 남쪽이나 동쪽을 수색중입니다. 적군이 거기에 병력을 상륙시켰다면 산맥을 넘어서 분지에 도보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봤자 한 십여 일 걸리겠지만요.”
“그럼 그쪽은 알아서 뒤지고 있어. 난 여기서 철성을 끝장낼 테니까.”
통신을 끊은 이렌느는 정체불명의 수송선 이야기는 일단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철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조금 전 자끄의 이야기를 전했던 연대장이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고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모습을 힐끔 돌아보았다.
“늦은 건 한 번은 용서해도 더는 용서 못 한다.”
연대장이 마지못해 이렌느에게 바싹 다가와 조심스레 보고를 올렸다.
“북쪽 동굴에 추가로 들어간 10명의 병력이 안에서 기습을 받고 거의 전멸해서 돌아왔답니다. 병사 3명이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생환했다고 합니다.”
검은 철성을 쳐다보던 이렌느의 얼굴이 순간 얼음장처럼 굳었다. 그는 화를 내지도, 울지도, 그렇다고 웃지도 않은 채 입술만 가까스로 움직여 다시 물었다.
“그럼 먼저…… 들어간 자끄는?”
“생환한 병사들 보고로는……안에 가디언과 황실군이 적어도 10명 이상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8명이 포로로 잡혀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그 중에 자끄 경은……없었답니다.”
연대장은 자끄가 살아있기 힘들다는 내용을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 이렌느가 그제야 연대장을 휙 돌아보았다.
“확인? 놈들이 일부러 놓아줬다는 거냐?”
“그런 것 같습니다. ……가디언으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포로들을 보여준 후에 돌아가라고 했답니다. 다시 공격해 들어오면 포로들을 먼저 죽이겠다는 말을 전하라 했답니다.”
이렌느의 표정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껏 동생 예르마크의 자식들은 숱하게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았지만 정작 자신의 자식들은 단 한 번도 전장에서 죽도록 내놓은 일이 없었다. 이렌느는 눈물을 감추려 서둘러 스코프를 쓰고 고개를 전장으로 돌렸다.
“현장에 헤네티가 몇이나 있느냐?”
연대장은 제후의 물음에 움찔했다. 헤네티의 머릿수를 묻는다는 건 포로들이 있건 말건 공격을 강행하겠다는 뜻이었다. 인질로 잡혀 있는 병사들도 그의 연대원들이었다.
“아군 포로가 8명이나 잡혀있습니다. 여기 공격을 승전으로 이끌면 놈들도 고립된 처지에서 어차피 항복할 테니…….”
“닥치고 대답해라. 헤네티가 몇이나 있느냐? X는 몇이고?”
연대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5명 중 셋이 당했으니 2명 있을 겁니다. X는 하나쯤 있을 겁니다.”
이렌느는 함께 와 있는 헤네티 대장에게 손짓했다.
“여기서 헤네티 열 명과 보병 1개 제대를 보내라. 화염방사기도 들려 보내. 사로잡는 필요도 없다. 싹 다 태워 죽여라.”
“화염방사기요? 그럼 우리 포로…….”
옆에서 참견을 하려던 연대장은 제후의 독기어린 시선에 다음 말을 꿀꺽 삼키고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헤네티 대장은 이번 공격진에 있는 50여 명의 헤네티들 중 분대 하나를 손짓해 불러들였다. 교단에서 칼데아군에 지원해 준 헤네티 분대는 돌격을 맡은 4명의 코런덤 X헤네티와 6명의 고도로 훈련된 시민 광신도 헤네티로 구성되어있고, 그들 중 둘은 육중한 화염방사기를 메고 있었다.
“당장 서쪽 동굴로 가라. 가서 동굴에 있는 놈들을 싹 쓸어버려.”
명령을 받은 분대는 즉시 방향을 돌려 황실군들이 포로들을 잡아두고 있는 서북쪽의 동굴로 번개처럼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렌느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함부로 눈물을 보일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부하들에게 손짓으로 포진을 명했다. 드넓은 고원에 도착한 4천여 중장보병대가 100명 단위로 사각의 견고한 방진을 이루며 고원 초입에 넓게 포진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시체가 있을 언덕을 야속한 시선으로 노려보던 이렌느는 보병대의 포진이 대충 끝난 것을 확인하고는 망원경으로 북쪽의 검은 철성을 확인했다. 짙은 모래폭풍에 100척(30m)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곳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검고 큰 실루엣이 망원경으로 보일 정도였다. 물론 육안으로는 누런 모래폭풍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가 20스타디아(3㎞)나 되는데도 여기서도 보일 정도니 이 망원경이 값은 하는구나. 하기야, 워낙 덩치가 크니까. 저길 고작 1백 남짓이 방어한다고?”
이렌느가 포병대 교위로 있는 딸 니콜을 손짓해 불렀다.
“보병대와 함께 전진해라. 어차피 선제공격도 못 할 테니 발리스타로 먼저 쑥대밭을 만들어놓고 들어가라.”
사령부의 진격나팔에 칼데아군이 대오를 맞춰 철성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왼쪽에서만 계속 바람이 붑니다.”
몇몇 무장들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산꼭대기를 상어 지느러미 모양으로 깎아놓은 강력한 바람은 어디 한 군데 피할 곳도 없는 정상의 고원에 오른 칼데아군에게 단단히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병사들도 몸을 낮추고 기우뚱한 자세로 걸었고, 몇몇은, 혹은 몇몇 부대는 정면이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전진하다가 옆 부대와 부딪치기도 했다.
얼마간 전진을 하자 맨들맨들 닳은 검은 포석이 깔린 바닥이 밟히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한 보병들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들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오래되고 삭은 간판 따위는 아랑곳없이 짓밟으며 철성을 향해 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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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포병대 사정권입니다!”
기세등등하게 전진하던 5천의 병력이 자리에 일단 멈췄다. 발리스타의 사정권에 들어왔지만 적진에선 아직 반응이 없었다. 헤네티 대장이 입을 열었다.
“놈들은 아마 철성 앞에 있는 정원과 계단에서 참호를 파고 1차로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거기에 먼저 포격을 퍼붓지 않으면 전진 도중에 피해가 많이 날 겁니다.”
니콜이 살짝 흥분한 어조로 어머니에게 설명했다.
“적은 소형발리스타 뿐이라 여기까지는 닿지 못합니다. 우리 대형 발리스타로는 여기부터 철성까지 쏠 수 있습니다. 정원 정도는 지금부터 쑥대밭을 낼 수 있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당장 방열이나 해.”
아들의 죽음으로 신경이 곤두선 이렌느가 이를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였다. 19문의 포병대가 발리스타를 방열하는 동안, 모래폭풍 너머 철성의 실루엣 쪽에서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발사!”
칼데아군의 첫발이 모래폭풍 속 철성의 앞에 있을 계단과 정원을 향해 떨어졌다. 치명적인 파편을 가득 실은 거대한 포탄이 연이어 공중을 가르고 날아가는 모습에 보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한편으로 자신들의 차례가 오기를 피가 마르게 기다렸다.
거의 20여 분에 걸쳐 포병대는 가져온 포탄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인정사정 보이지 않았다. 지난 협곡 돌파 때도 무차별 포격으로 재미를 보았던 포병대는 이번에도 물량공세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도록 사정없이 포탄을 쏟아 부었다.
“이쯤이면 철성 앞은 거의 곰보가 되었겠습니다. 너무 엉망을 해 놓으면 보병들이 어디 밟고 지나가기나 하겠습니까?”
생각 없이 가볍게 입을 열었던 연대장은 여전히 복수심에 이글거리고 있는 제후의 분노에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포격을 지휘했던 니콜이 달려와 알렸다.
“가져온 포탄의 8할을 썼습니다. 나머지는 예비용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렌느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기세로 서 있는 보병대를 빙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옆에 있는 기수의 깃발을 확 빼앗아들고 보병대의 앞으로 말을 몰아 나아갔다.
“제후님?”
실전 경험도 없고, 전방에 나설 이유도 없는 그의 이런 돌발행동에 휘하 무장들이 크게 당황하며 헐레벌떡 뒤를 쫓았다. 5천 가까운 장병들 앞에 나선 이렌느는 검은 철성을 가리키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공격해라!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몰아붙여서 모조리 죽이고 약탈해라!”
이전 협곡의 돌파 당시 그랬듯, 이번에도 복잡한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아니,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그들에겐 고산증과 보급이 문제일 뿐 철성에 있는 많지 않은 적은 애당초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희박한 산소에서 버티기 위해 이들은 방패와 기본적인 무기 외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최대한 가벼운 맨몸이었다.
“저긴 오늘 너희 차지다! 먼저 차지하는 부대가 먼저 먹는다!”
황실군의 무려 50배나 되는 대군에 진격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는 부대 차지’라는 말에 경쟁심이 발동한 각 제대에서 일제히 진격나팔이 울렸다.
“진격! 진격! 우리 제대가 제일 먼저 저곳을 밟는다!”
그동안 느리지만 견고한 밀집 공격에만 익숙했던 남부 무장들은 말 그대로 중구난방으로 전진하는 보병대의 모습에 아연실색을 했다. 하지만 적과의 전력 차이가 워낙 크다보니 ‘이러다 피해가 너무 커지면 어쩌지?’정도를 염려할 뿐, 그 이상의 걱정은 없었다. 멀리서 거대한 실루엣으로 보였던 검은 철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들의 기세에 찬 돌격은 어느 순간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친 몸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눈앞의 괴이한 광경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그들 눈에 육중한 건물로 보였던 거대한 형체가 어느 순간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더니 무기력하게 쓰러지기 시작했다.
“건물이 무너진다!!! 정지! 정지!”
검은 철성이 포격에 붕괴되는 것으로 생각한 장병들이 후미의 부대원들을 정지시켰지만 무너지는 모양새가 어딘지 이상했다. 검은 형체는 누가 봐도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강풍에 쓸려가는 것이었다. 형체는 중간이 갑자기 뚝 꺾이더니 바람 방향을 따라 거세게 펄럭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나마 얼마 가지 못하고 땅으로 축 처지며 사라져버렸다. 지금껏 그들의 시야를 가렸던 ‘검은 형체’는 허깨비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이게 뭐야?”
건물이 무너지는 줄로 알고 바닥에 엎드렸던 장병들이 무안한 얼굴로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그들 앞에는 거의 20여분동안 포병대가 온통 곰보로 만들어놓은 넓은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원래 잘 다듬어져 있던 바닥은 움푹움푹 팬 구덩이들 주변으로 박살이 난 벽돌 포석, 검은 포장재가 흩어져 걷기도 힘들었다. 장병들은 구덩이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지나 방금 ‘검은 형체’가 있던 것으로 다가갔다.
“이런, 염병할.”
바람에 밀려 바닥에서 펄럭거리고 있는 무언가를 본 장병들의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동안 이곳에 걸려있던 건 엉성한 군용 그물막이었다. 지난 몇 분간 칼데아군의 포격을 모조리 엉뚱한 곳에 쏟아 붓게 만든 건 얼기설기 꿰매어 붙인 얇고 거대한 가는 코의 그물 한 겹이었다. 그물엔 무언가 정체모를 검은 칠이 잔뜩 되어있었다. 그물에 칠해진 건 이곳에서 땅만 파면 한도 끝도 없이 나오는 ‘검은 재’였다.
“뭐야, 이게 다야?”
장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철성의 정확한 규모도, 형태도, 위치도 모르는 칼데아군을 완전히 갖고 논 셈이었다. 검은 재를 칠해 산란을 일으킨 그물막은 칼데아군의 ‘개량 망원경’에는 마치 벽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철성에서 뜯어낸 녹슨 파이프와 구조물, 케이블에 의지해 강풍 속에서 한두 시간 남짓 버티던 그물이 쓰러진 것이었다. 그물 위엔 누군가 큰 붓으로 힘차게 쓴 듯 미려한 고대어와 공용어의 큰 글씨가 보였다.
- 황제의 땅에서 당장 꺼질 것을 명한다. -
“저기 좀 봐!”
장병들 선두에 있는 누군가의 고함에 일제히 전방을 주시했다. 이번엔 ‘아마도 진짜로’ 육중한 형태가 모래폭풍 너머로 보였다. 이들이 포격을 쏟아 부은 곳에서 철성까지는 5스타디아 넘게 더 가야만 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날아온 피익 하는 소리가 이들의 머리 위를 울렸다.
“포격이다!!!”
가짜 철성을 확인하느라 난잡하게 흩어져있던 칼데아 보병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당황한 고참 사관과 장교들이 놀라 고함을 질렀다.
“뭐야, 이 거리까지 포격이 날아와?”
그들의 고함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사거리가 고작해야 3, 4스타디아밖에 되지 않는 황실군 분견대의 소형 발리스타가 그보다 훨씬 멀리 있는 이들의 머리 위에 포탄을 쏟아 붓고 있었다.
“우리 포병대는?”
보병들이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엉뚱한 곳을 곰보로 만드느라 대부분의 포탄을 써버린 그들의 포병대는 새로 확인한 ‘진짜 철성’에까지 포탄을 날리기는 턱없이 먼 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이제야 위치를 옮기려 허겁지겁 포를 걷는 중이었다.
“젠장! 일단 돌격해! 놈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진!”
장교들의 지시에 악 소리를 내며 모래폭풍 사이로 돌진하던 장병들은 돌연 눈앞에 나타난 철조망에 기겁을 하고 놀라 속도를 늦추었다. 하지만 몇몇은 방패와 갑주 자락이 걸리며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졌다.
“사격!”
세닉 가 보병대가 철조망에 다다른 때에 맞춰, 분견대 지휘관 세하의 명령이 참호에 몸을 숨긴 황실군 분견대원들에게 일제히 전달되었다. 철조망에 매달려 못 움직이고 있는 세닉 가 보병대의 코앞으로 황실군의 강화 석궁이 볼트를 쏟아 부었다. 볼트는 칼데아군의 방패까지는 뚫었지만 중장보병의 투구나 단단한 흉갑까지 바로 뚫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몇 운 없는 병사는 배나 팔다리에 볼트가 명중해 피를 쏟으며 축 늘어졌다.
“이놈들 언제 이런 걸 다 설치해 놓은 거야!”
피로 물든 첫 철조망을 보며 세닉 가 사관들이 울부짖었다. 이들이 들은 정보는 백여 명 조금 넘는 황실군이 20여 일 전 저지대 분지에서 도망쳐 철성에 숨어있다는 정도였고, 그새 이렇게까지 준비를 철저히 해 놓았으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최대한 무게를 덜기 위해 달랑 주무기만 들고 오느라 평소 전투보병의 필수품이던 삽이나 곡괭이, 절단기 같은 것도 없는 완전 빈손이었다.
“이거 보십시오!”
내장을 쏟으며 몸부림치는 동료를 철조망에서 떼어내던 병사가 소리를 꽥 질렀다. 이들이 걸린 철조망은 새것이 아니었다. 거의 삭아 형태만 가까스로 남아있는 철조망을 다시 세워놓기만 한 것이었다. 언뜻 봐도 수백 년은 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이들을 지레 놀라 넘어지게 하고, 몇 분간 묶어놓기는 충분했다.
“철조망을 밀어 넘어뜨리고 넘어가! 다 삭은 고물이다! 돌격!”
또다시 속았다는 것에 화가 치민 칼데아군은 자신들만의 강점인 머릿수를 살려 우수수 달려들어 순전이 완력으로 삽시간에 철조망을 무너뜨렸다. 사실 이것 외엔 별다른 방법도 없었다.
“전진! 전진!”
삭은 철조망 벽을 힘으로 무너뜨리고 돌파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4천여의 병력은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철성을 향해 맹렬히 전진했다.
“앞에 또 철조망입니다!”
“방패 앞세우고 밀어붙여!”
철조망을 돌파하고 자신감을 얻은 4천여의 보병들은 와아 고함을 지르며 눈앞의 두 번째 철조망에 쾅 소리를 내고 힘껏 충돌했다.
“우읍!”
두 번째 철조망도 마찬가지로 고물이리라 예상했던 제대들은 땅속에 단단히 포스트가 박힌 새 철조망에 충돌하며 뒤로 나동그라지거나 철조망에 엉켜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전진과 함께 참호에 숨은 황실군의 사격도 훨씬 정확하고 강력해졌다. 이번에는 그들의 방패를 조각내고 흉갑과 투구까지 쩍쩍 갈라놓았다. 한 발로 바로 죽을 만큼 치명타까지는 입히지 못했지만 피를 흘리며 숨이 붙어 죽어가는 부상병은 도리어 더 큰 부담이었다.
“철조망 끊어! 빨리! 빨리!”
세닉 가 보병들은 ‘머릿수와 물량으로 밀어붙이기’만 고집하는 지휘부의 준비 부족을 원망하며 두 번째 철조망 앞에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상당수가 첫 전투인 이들에겐 마치 지옥에서의 몇 시간 같았다. 절단기 하나 없이 내보내어진 이들에겐 별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임기응변으로 방패를 밀어 넣어 철조망 틈새를 벌리고, 칼로 땅을 파 포스트를 넘어뜨리려 기를 썼다.
“우리 포병대다!”
이들에겐 포병대가 그나마 유일한 구세주였다. 황실군의 볼트 세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보병대 무장들은 포병대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철조망에 포탄을 날려! 당장!”
위치를 옮기느라 한참이 걸렸던 칼데아군 포병대는 우군의 진로를 막고 있는 철조망 위로 발리스타를 겨누었다. 20문 가까운 발리스타가 쏟아 붓는 포탄이 황실군의 철조망 위로 쏟아져 조각조각 끊어놓았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던 보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미 거의 바닥을 드러낸 포병대의 포탄이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지만 당장은 중요치 않았다. 포격이 지나간 황실군 철조망 자리는 이제 숱한 곰보자국과 함께 쇳조각만 뒹굴고 있었다.
“됐다! 돌격! 돌격!”
보병대는 와아 하는 함성을 지르며 무너진 두 번째 철조망을 넘어갔다. 그들의 눈에 이전 먼 옛날 철성의 앞마당이었던 광장의 포석과 정원의 경계석, 이젠 황무지가 된 철성 앞 정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너머로는 철성으로 올라가는 기단과 계단도 보였다. 진짜 철성은 가파른 기암절벽을 등지고 선 거대한 공장 같은 모양이었다.
“저기가 철성이다!”
후방의 칼데아군 포병대도 몇 발 남지 않은 포탄을 이번엔 진짜 황실군이 있는 철성 앞마당과 정원에 내리꽂았다. 정원 곳곳의 땅이 움푹움푹 패면서 흙과 바윗덩어리가 공중으로 솟구쳤고, 몇 곳에서 황실군 장병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더는 안 됩니다!”
분견대원들과 함께 정원의 참호를 사수하던 세하 비장도 이제 막판에 몰려있었다. 두 번째 철조망까지 뚫고 오는 어마어마한 적의 숫자에 질려버린 그는 후방에 서둘러 급전을 보냈다. 대답이 돌아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황상께서 2차 방어선으로 물러나라 하셨다. -
참호의 황실군은 부상자와 전사자를 추슬러 철성의 기단 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를 쫓아오는 칼데아군의 머리 위에도 계속 포탄이 쏟아졌지만 무려 4천이나 되는 보병들의 무차별 전진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의 인해전술을 감당하지 못한 백여 명의 분견대원들은 참호를 버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세닉 가 보병대의 손아귀에 이제 승리가 다 들어온 듯 보였다. 다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가짜 철성에 낭비한 포탄과 소중한 시간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가 문제였다. 아들에 대한 복수심에 찬 얼굴로 전장을 노려보던 이렌느는, 서쪽 동굴이 있는 곳에서 갑자기 솟구치는 거대한 불꽃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저긴 또 뭐냐?”
이렌느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분명 화염방사기의 불꽃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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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느가 원조보다 더한 조선인 일본순사(?)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입니다.
어쨌든 지난 편부터 일본순사님의 운이 슬슬 다해갑니다. 저 행운이 어디까지 막장으로 빠질지....
.....그런데 이 얘기하며 생각하니....현실의 어제오늘이 좀 우울해지네요. 오늘은 추천해달라는 애교(?)는 적지 않겠습니다. (해 주시면 좋지만요....)
대신 다음편은 오늘보다 더 화끈하게(???) 올려드리겠습니다.
(아마 갈수록 화끈해질듯....)
아참 노블레스의 2부가 400회를 맞았습니다.
출판본 완결본은 아무래도 3권이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3권씩 해도 400쪽이 넘게 나오네요;;;)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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