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93화 (1,088/1,132)

< -- 1093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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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됐다! 몰아붙여!”

지금까지 정규군 차림으로 보병들 사이에 섞여 있던 네피, 힐러와 코나가 각자의 무기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분견대의 정규군 보병들을 순식간에 앞장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부글거리며 끓던 모래는 황실군의 역습과 함께 눈 깜짝할 새 가라앉으며 다시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단단한 모래땅이 되었다. 그 밑에 묻혀있을 운 없는 자들의 운명은 사람들이 상상하고픈 모양새는 아니었다.

“쫓아가!”

분견대를 이끄는 세하 비장과 마르텔로도 그에 질세라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철성으로 밀려난 이래, 처음으로 적을 ‘몰아붙이는’ 순간이 그들의 코앞에 와 있었다.

보병들까지 모두 달려 나간 후, 제일 후미에서 누런 망토를 두른 웬 깡마른 여자 하나가 노새 한 마리를 몰고 또각거리며 느긋하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

“누굴 잡지?”

한 손에 마우저를, 나머지 손에 개량 망원경을 쥔 사에나는 폼 안 나는 노새 위에서 여기저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적의 대대장과 기수, 선임 제대장을 저격해 죽인 그이지만 그 정도로 그의 욕심을 채우기는 어림도 없었다.

“궁금하면 저 위에 계신 양반한테 묻던지.”

사에나의 옆으로는 큰 덩치에 안 어울리는 왜소한 당나귀에 탄 거구의 사내가 플람베르주를 삐딱하게 둘러메고 분견대의 뒤를 건들거리며 따라가는 중이었다. 당나귀 목에 단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사에나가 눈을 흘겼다. 그때, 어딘가에서 연락을 들은 사에나는 노새에 속도를 붙여 모래바람 속으로 휙 사라졌다.

뒤이어 베흔의 귀에 꽂은 할룩스로도 옥상에서 이곳을 보고 있을 누군가의 잔뜩 쉬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어왔다.

“네 부대가 도착했는데 그리 널럴해도 되겠느냐?”

화들짝 놀란 베흔이 얼른 철성 옥상을 뒤돌아보았다. 지난 저녁 온몸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진 황제는 저곳에서 모래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병상에 누워 전장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이전처럼 칼과 창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빌 수도 없지만 그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견대에는 큰 힘이었다.

“싸울 힘을 조금이라도 아껴두려고 그러는 것뿐입니다.”

베흔이 구차한 변명을 둘러대며 애꿎은 당나귀의 배를 툭 걷어찼다. 깜짝 놀란 당나귀는 이 무거운 사내를 싣고 쓰러질 듯 힘겹게 또각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앞에 펼쳐진 전장에서는 크바르나의 X전사들과 그 반대편의 분견대에 샌드위치처럼 끼어버린 세닉 가 보병대가 점점 궁지에 몰려가고 있었다.

“크바르나들의 움직임이 좋구나.”

“말씀하신대로 오는 내내 선내를 저산소 저압으로 유지하게 했습니다. 지금쯤 완벽하게 적응을 했을 겁니다. 저 녀석들이 와 준 덕분에 마지막 수 하나를 감춰둘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생색을 내는 베흔에게 황제가 또다시 일침을 박았다.

“네 전장에 나가기 싫어 그러는 건 알지만 애꿎은 당나귀는 언제까지 고생시킬 거냐? 앞으로 친위대장이 되려면 크바르나 병사들 가슴에 네 이름 정도는 새겨놔야지?”

‘친위대장’이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든 베흔은 그제야 당나귀에서 후다닥 내려 자신의 시라즈 여단, 아니 곧 크바르나의 일원이 될 전사들이 세닉 가를 몰아붙이고 있는 서쪽으로 헐레벌떡 멀어져갔다. 짐을 덜은 당나귀는 알아서 철성으로 또각또각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렌느가 자신의 ‘이도저도 아닌 결정’을 후회하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후방에서 몰려온 4백이 넘는 크바르나는 전방에 있던 보병대가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세닉 가의 후방을 사실상 궤멸시켜버렸다. 그들은 등 뒤에 방치되다시피 했던 세닉 가의 후방 보급선과 포병대를 휩쓸었고, 협곡과 이어진 통신선마저 끊어버렸다. 장거리 무선통신은 짙은 모래폭풍으로 상태가 워낙 나빠 협곡도 공격을 받고 있다는 내용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니콜! 니콜!”

이렌느는 연락이 끊긴 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두 자녀들의 참사는 그의 정상적인 판단력을 완전히 빼앗아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있었다.

“후읍!”

이렌느는 어디선가 날아온 발사물에 놀라 말에서 뒤로 굴러 떨어졌다. 헤네티 대장이 그 순간 달려들어 말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더라면 이마 한중간에 큰 구멍이 났을 판국이었다.

“마우저입니다! 적군의 어떤 놈이 마우저를 쏘고 있습니다!”

낙마한 제후의 모습에 놀라 달려온 연대장이 그를 일으켜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후님, 이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 하신다는 건 압니다만……이대로는 어렵습니다. 제후님 목숨도 장담하기 힘듭니다. 빨리 퇴각하셔야…….”

“어딜!!! 감히…….”

격분하는 이렌느에게 고집스레 말을 이으려던 연대장은 돌연 무언가에 확 떠밀리며 이렌느의 가슴을 머리로 쿵 들이받았다. 그에 밀려 바닥에 쭉 뻗어버린 이렌느는 속살이 너덜거리는 연대장의 어깨를 보고 파랗게 질려 입을 열지 못했다. 연대장은 바들바들 떨며 그의 품에서 점점 숨이 희미해져갔다.

“군의관!! 군의관!!!”

품 안에서 죽어가는 휘하 무장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이렌느가 울부짖었다. 그의 실전다운 첫 실전, 아니 진짜 전쟁의 경험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아니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혼자 머릿속으로 착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무섭고 참혹했다. 그때, 협곡에 남겨두고 온 공병대에서 지직거리는 잡음투성이 무전이 들어왔다.

“제후님, 정체불명의 적…… 협곡 다리가 불에 타…… 실패…….”

이렌느는 당장 엎드려 울고라도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악을 썼다.

“물러나! 당장 퇴각해!”

그에겐 이제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결정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이미 보병대는 붕괴되었고, 산산이 흩어진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X들에게 무참히 사냥당하고 있었다.

“협곡으로 가는 서쪽 길은 막혔습니다! 퇴로가 없습니다!”

다른 연대장이 고함을 질렀다. 이렌느는 죽어가는 연대장 밑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와 교단에서 받은 지도를 꺼냈다. 고원의 북쪽은 검은 철성과 더 높은 정상부로 이어져 있고, 동쪽은 수십 스타디아의 가파른 낭떠러지였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남쪽으로 퇴각해라.”

남쪽은 다른 세 가문이 죽어라 송풍로를 파며 올라오고 있는 곳이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가는 모래가 뒤덮여있어 ‘두 발로 걸어서’ 내려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중간에 우군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렌느가 고래고래 악을 썼다.

“살아남은 놈들은 다 남쪽으로 물러나라고!!!”

마지막까지 남은 2천여의 세닉 가 보병들은 앞을 다투어 남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몇 시간 전, 서쪽 협곡에서 의기양양하게 출발했던 5천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해진 모습이지만 이만큼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었다. 50배라는 압도적인 병력을 믿고 출발했던 그때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 현실로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놓치지 마라!”

황실군과 친위군은 여전히 이들을 놓아줄 맘이 없었다. 크바르나 4백이 서쪽을, 분견대가 동쪽을 맡아 도주하는 세닉 가 보병대의 후방을 바싹 뒤쫓았다. 움직일 기운도 잃고 낙오한 자들은 항복을 했고 그나마 움직일 기운이라도 있는 자들은 허우적거리며 남쪽으로 도망쳤다.

“더 갈 곳이 없습니다!”

막판까지 몰린 장병들이 울부짖었다. 이제 그들 뒤에 남은 건 고운 모래가 가득 쌓인 가파른 비탈뿐이었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어디까지 떨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그냥 꺼져!!!”

선두에서 달려온 네피가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와 비탈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십여 명의 남부 보병들을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이 거한의 괴력에 밀린 보병들은 뒤로 우르르 밀려가 비탈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 사라져갔다.

“카나르인지 뭔지 개새끼한테 가서 안부나 전해라!”

가디언, 보병들이 악 소리를 지르며 수천의 세닉 가 장병들을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비탈은 비명과 함께 밀려난 2천의 세닉 가 장병들과 고운 화산모래, 검은 재가 뒤엉켜 우르르 쏟아지면서 눈사태가 아닌 인(人)사태로 지옥이 되었다. 동료들과 엉키고, 흙에 처박혀 굴러가는 병사들의 비명이 몰아치는 모래폭풍을 배경으로 산자락을 흔들었다.

“으이익!”

제후 이렌느 역시 그런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도끼를 피하려 몸을 움츠렸던 그는 말과 함께 중심을 잃고 비탈 밑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바닥을 짚어보려 팔을 휘두르고 다리도 휘저어 보았지만 워낙 비탈이 가팔라 별 소용이 없었다.

“제후님! 제후님!”

함께 쓸려 내려가던 헤네티 대장이 그의 손을 어렵사리 잡았지만 모래에 미끄러져 다시 놓치고 말았다. 이렌느는 완전히 중심을 잃고 모래 위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방향감을 잃고 말았다. 눈앞이 계속 바뀌고 무언가―아마도 함께 구르던 병사 중 하나―가 그의 가슴 위를 짓뭉개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얼마나 내려왔는지도,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야!”

느낌으로는 몇 분, 아니, 몇 십분 이상을 계속 내려만 가는 것 같았다. 얼마나 빨리 내려가고 있는지 몰라도 잠깐잠깐 보이는 주변 풍경이 계속 바뀌었다. 바닥에 엎드렸던 그의 등 위를 또다시 무언가 육중한 것이 퍽 치고 지나갔다. 뒤이어 그 역시 모래에 파묻혀 있던 무언가에 충돌하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아아아아악!”

비탈 중간의 바위에 부딪쳤던 그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흙바닥에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그 순간 어깨와 목, 다리를 삐었는지 전혀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비탈이 조금 완만해지며 속도가 점점 느려졌지만 여전히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주변 풍경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그는 그대로 모래 위에 쭉 뻗어있었다.

“아버지…….”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며 참이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 이름을 불러보았다.

후계자 수업을 받던 시절, 아버지 요아킴은 델루지 가에 인질로 끌려가 그곳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모략가로 돌변해 돌아온 장녀와 사사건건 충돌을 빚곤 했었다. 그는 ‘네가 이렇게 된 건 내 탓이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 앞에서도 제후가 자식 앞에서 뭐 하는 짓이냐며 화를 내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남자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사랑했지만 그의 기준에서 한 지역의 제후로는 너무 무르고 정이 많았다. 그의 눈엔 아버지가 암살도, 음모도, 무자비한 개발도 없이 루게를 남부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 것이 정말로 신기해 보였었다. 그리고 그때의 의문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모래바람을 올려보는 그의 눈가에서 아버지의 환영(幻影)이 점점 멀어져갔다.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서 ‘제후님’을 외치는 고함이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적어도 절반은 내려가다가 끝장이 났겠네.”

베흔이 가파른 비탈 밑을 내려다보며 손을 툭툭 털었다. 2천이 넘는 사람을 이렇게 한 번에 ‘날려’보기는 그의 오랜 경력에서도 처음이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밀어낸 2천이 넘는 적병들은 모래바람 밑으로 사라져 이젠 보이지도 않았다.

“저놈들에게 목소리로라도 황실의 기상을 알려줘라!”

베흔이 사나운 눈을 부릅뜨고 있는 5백의 장병들을 돌아보며 플람베르주를 번쩍 쳐들었다. 이들의 어마어마한 고함이 모래폭풍을 뚫고 제플린 산 정상을 쩌렁쩌렁 흔들었다. 협곡에서의 패배를 깨끗하게 설욕한, 황실의 첫 번째 공식적인 대 승리였다.

철성 사수의 주역이었던 세하 비장이 부하 분견대원들에게 기쁜 표정으로 돌아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방금 황상께서 우리 분견대 전원에게 1계급 특진과 공신 책봉을 내리셨다! 전사한 전우들도 마찬가지다!”

승전으로 이미 달아올라 있던 분견대원들의 사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흔이 플람베르주에 묻은 먼지와 피를 툭툭 털며 피익 웃었다.

“이제 하루 이틀만 기다리면 우리 대군이 상륙할 테니 돌아가 발 닦고 잠이나 자야겠네.”

모두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던, 베흔 자신조차도 가능할까 의심했던 첫 3일을 결국 이렇게 버텨낸 셈이었다.

서쪽 동굴에서 쏟아져 나온 크바르나들이 세닉 가 공격군을 막 휩쓸기 시작했을 때, 그들을 피해 도망치는 세닉 가 보병대 무리 속에는 그들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들이 셋 섞여있었다. 무기 대신 큼직한 작업가방을 짊어진 3명의 사역병들은 첫 폭발 직후, 아수라장 속에 도망치는 세닉 가 보병들 사이에 섞여 협곡 쪽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포로들에게서 빼앗아 입은 세닉 가 보병들의 피 묻은 갑주 위에 검댕까지 뒤집어쓴 상태라 누구도 이들의 정체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의심한다 해도 수백의 X들에게서 기습을 당한 지금은 시시콜콜 따질 경황도 없었다.

그들 셋이 동굴 밑의 너덜지대를 헐떡이며 뛰어내려왔을 때, 지난 오후 이렌느가 무차별 포격으로 황실군에서 빼앗았던 협곡 주변은 혼란에 빠진 사역병들로 이미 난장판이었다. 그곳엔 철성으로 보낼 칼데아군의 보급품이 막 다리를 건너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임시 진료소와 예비병력을 둘 막사도 세워지고 있던 참이었다. 대부분 이번이 첫 참전인 사역병들은 적이 내려온다는 말에 어찌할지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여길 내주면 안 되는데!!!”

사역병단 지휘관은 전방에 나가 있는 이렌느에게 상황을 보고했지만 스스로의 목숨이 경각에 몰려있던 이렌느에게 돌아온 명령은 ‘무조건 사수하라’가 전부였다. 그는 실전경험도 거의 없는 사역병 3백과 몇 안 되는 보병대를 동원해 다리 입구에 사람으로 벽을 쌓았지만 특등급 가디언 헨지가 앞장서는 60명의 크바르나들 앞에서 그들의 저항은 별 의미가 없었다.

방어하는 사역병들을 순식간에 돌파한 크바르나는 적이 힘겹게 이곳까지 싣고 올라온 보급품을 탈취하고 협곡 건너편을 하루 만에 탈환해냈다. 그들이 힘겹게 놓은 3개의 다리도 모조리 불타 없어지면서 철성을 공격하러 올라간 병력은 고스란히 산꼭대기에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많이 다쳤어?”

다리가 불타 없어지기 직전, 세닉 가 보병들의 응원을 받으며 그곳을 뛰어 건너온 3명은 발만 동동 구르며 보고 있던 세닉 가 보병들 사이에 쓰러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셋 다 부상을 입었지만 그들 중 한 명은 상태가 심한지 키가 껑충하니 큰 동료의 등에 내내 업혀있었다. 다리가 끊기기 전에 살아서 건너온 건 이들을 포함해 상태가 좋지 않아 후방에 처져있던 1백여 명이 전부였다.

“이봐, 말 좀 해 봐! 어떻게 된 거야!”

협곡 서쪽의 수송 사역부대 지휘관이 그들을 거칠게 흔들며 물었다. 모래바람 때문에 이들은 협곡 건너편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200척(60m) 건너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고함에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통신상태도 좋지 않았고, 다리가 타기 시작하면서 유선통신도 끊겨 어찌할지 우왕좌왕하던 차였다.

“다 당했어요! 가디언이 수백이에요!!!”

먼저 건너온 부상병이 한쪽에서 울먹이며 대답했다. 그 말에 기겁을 한 사역병단 지휘관이 다리 쪽을 재차 돌아보았다. 이미 다리를 건너간 자들에겐 비극이지만 이들에겐 퍽이나 다행히도, 마지막 다리가 불꽃을 날리며 재와 불꽃으로 변해 모래폭풍에 날아가고 있었다.

“어쨌든 이놈들 사령부 야전병원으로 일단 후송해.”

사역병단 지휘관이 방금 다리를 살아서 건너온 병사들에게 후방의 차량과 마차를 가리켰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일행들은 5대의 차와 마차에 짐짝처럼 꾸역꾸역 실려 칼데아군 사령부가 있는 판지셰르 분지를 향해 다시 저지대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굴에서 내려온 정체불명의 사역병 3명도 세닉 가 패잔병 사이에 섞여 칼데아군과 교단의 사령부가 있는 분지로 함께 내려갔다.

전투가 끝난 철성 앞의 고원은 부상을 입었거나, 탈진해 못 움직이거나, 방향을 잃고 낙오한 세닉 가 포로들이 사방에서 황실군과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만큼이나 많은 세닉 가의 보급품 차량, 버려진 포대가 주인을 찾는 도시락처럼 널려있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황실군의 차지였다. 비탈에서 돌아온 베흔이 함께 온 아샤드 경을 돌아보았다.

“협곡의 다리는?”

“방금 불태워 끊어버렸소. 우리 크바르나가 그곳과 서쪽 동굴을 지킬 테니 그대의 시라즈 여단이 여기 고원을 지켜주시오. 하기야, 어차피 한 가족이 되겠지만.”

아샤드 경이 혼자 픽 웃는 모습에 베흔의 속이 확 끓었다. 베흔이야 언젠가 부대를 내주고 친위군 사령관으로 영전할 참이었지만 이런 앞뒤 꽉꽉 막한 사내에게 자신이 힘겹게 키운 부대를 내주려니 속이 쓰려왔다.

“황실 일행은 안 데리고 왔소?”

“황상께서 아이와 가족들에게 보일만한 광경이 아니라고 하셔서 황태후와 귀인과 두 황자 분께선 아직 동굴에 계시오.”

“황태후 그 여……, 그 분께서 당장 와서 등의 키 뽑아내겠다고 펄펄 뛰고 계실 텐데 빨리 모셔와 당장이라도 수술을 해야겠소.”

베흔이 서쪽을 돌아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이번엔 아샤드 경이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수술이라니? 황상께선 그분을 황궁으로 이송해 수술하실 것이라 들었소만?”

“지금 그럴 시간이 없으니 문제지. 황상의 목숨보다 중요한 게 또 있소?”

“황상의 목숨보다 의리와 신의가 더 중요하오. 함부로 굴에서 나오시지 못하게 우리 크바르나 둘을 붙여드렸소. 지금 키를 뽑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도리가 없었소.”

아샤드의 황당한 대답에 베흔이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의리와 신의? 황상께서 쓰러지셨는데 당장이라도 키를 빼내야지?”

이번엔 아샤드가 베흔을 사납게 흘겨보았다. 아샤드가 질세라 목소리를 높였다.

“미쳤소? 돌아가신 아르잔 대신관께서 당신의 목숨과 황상의 손목에 든 13번 잔딕을 포기하고 황상께 삶을 양보하신 건 뮤-세네피스를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였소! 그분의 목숨을 양보 받으신 황상께서 이제와 당신 목숨을 구하자고 황태후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건 그 뜻을 배신하는 거요. 황상께 충성을 바치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리 문제요!”

아샤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 그대로 대답했다.

‘뭐 이런 답답한 새끼가 의리 개뿔은…….’

발끈한 베흔은 이 앞뒤 꽉 막힌 헤네티의 턱에 그대로 주먹을 날릴 뻔했다. 이 남자는 오르마즈의 다른 심복들처럼 황제와 황태후의 목숨을 건 저울질에서 황태후 편이었다.

“그분은 워프루트가 완성되는 대로 황궁에 모셔 안전하게 제거수술을 받으실 거요.”

‘네 생각대로 되나 어디 두고 보자.’

베흔이 속으로 이를 갈며 감정을 감추었다. 그는 세네피스가 황제의 상태를 안다면 순순히 황궁으로 돌아가 주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세네피스가 못 가겠다며 날뛰게 하거나, 안 되면 세네피스를 몰래 죽여서라도 황제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 같은 이런저런 사악한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항상 그래왔듯, 그에겐 의리고 뭐고 현실이 최우선이었다.

“허어, 저만 빼놓고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들 중이신지?”

노새 뒤로 웬 시체 한 구를 질질 끌고 온 사에나가 이 둘에게 아는 척을 했다. 베흔이 시체의 얼굴을 들쳐보았지만 무거운 것에 깔렸는지 얼굴부터 가슴까지가 우그러져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게 누구야?”

뭐라 대답하려던 사에나는 철성 쪽에서 나오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망토 안쪽으로 길고 검은 머리칼이 함께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코리온은 사에나가 끌고 온 시체에 다가가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익숙한 사촌 니콜의 얼굴이 완전히 망가진 채 그곳에 누워있었다.

코리온은 차마 사에나를 나무라지는 못하고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어쩌다 이리 되었는가?”

“저희가 죽인 게 아니고 도망치다가 자기네 수송차량에 깔린 것 같습니다. 이것 말고도 차량에 친 시체들이 군데군데 보이더군요.”

사에나는 고원에 흩어진 수십 대의 칼데아군 수송차량을 가리켰다. 저 차들도 마지막 혼란의 와중에 살 길을 찾다가 마찬가지로 방향을 잃은 우군 여럿을 짓밟아버린 모양이었다.

“전쟁이라는 게 이럴 수밖에 없는 건지.”

코리온은 피로 물든 고원을 빙 둘러보았다. 첫 전투를 치러낸 제플린 고원에선 검은 모래폭풍이 곳곳에 흩어진 시체 위를 피바람을 가득 싣고 스산하게 스치고 있었다. 코리온은 전장의 풍경을 눈에 담고는 철성으로 힘없이 되돌아섰다. 그때, 철성 앞 정원을 확인하던 살람이 그에게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군 마마! 대군 마마!”

코리온은 우뚝 멈춰 서서 이 옛 제자를 돌아보았다. 어느 면으로는 무척이나 불편한 사이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이곳에서 살람은 니사와 함께 ‘마구스’인 코리온에게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무슨 일로 이리 방정이냐?”

코리온의 물음에 살람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힘을 주어 대답했다.

“적의 포격구덩이에서 묘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내려오셔서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황상께서 몸소 내려오시면 좋겠습니다.”

격앙되어 빛나고 있는 살람의 눈빛에서 코리온은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내 모시고 내려올 테니 주변에서 보는 사람이 없게 해라.”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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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의 뺀질이+기회주의자...기타등등 못된 기질이 가끔은 밉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ㅎㅎㅎ 이제 스토리는 칼데아군 사령부로 내려간 정체불명(?)의 3명에게 옮겨갑니다.

그 다음에는 사이드 스토리인 제네르와 베아트릭스(+장태자)의 비엔 공방전으로 잠시 넘어가는 구성인데, 거의 10회 분량이 넘는지라 메인 스토리인 하임달의 단절이 거의 2달이나 될 것 같군요.... 맥을 끊지 않는 차원에서 연재분에는 담지 않을까 생각중입니다. 그러면 이제 정말로 얼마 안 남았네요.

1월 중에는 7, 8권 (어쩌면 9권까지?)의 출판공지가 있을 예정입니다. 마지막 출판인 만큼 이벤트도 함께 있을 예정입니다.

그나저나 또(?) 지구가 멸망한다던 2012년도 고작 하루 남았습니다. 다음번 종말론 비즈니스는 또 몇 년을 타겟으로 할지 모르겠군요. 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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