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94화 (1,089/1,132)

< -- 1094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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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던 정원의 동쪽 구석에 갑자기 소개령이 내려졌고 분견대 병사들은 서둘러 사방에 가림막을 쳤다. 이 자리에는 원래 분수대였다가 닳고 닳아 탑 모양이 되어버린 화강암 덩어리가 서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칼데아군의 포격에 탑과 그 주변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이젠 거대한 돌덩이와 포격 구멍만 남아있었다.

잠시 후, 철성 안에서 검은 모포로 잘 감싼 들것 하나가 코리온을 따라 가디언들의 손에 들려나왔다. 들것은 시체 냄새와 포격의 흔적, 부상 포로들의 아우성이 가득한 정원을 재빨리 지나와 가림막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가디언들은 잘 다듬어놓은 바닥에 들것을 조심조심 내려놓았다. 앞에서 들것을 지고 온 힐러가 담요를 풀자 그 안에는 입과 코에 보조호흡장치를 꽂은 황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있었다. 그의 목에는 폐에 고인 피와 체액을 빼내기 위한 작은 파이프가 꽂혀 있었다. 포격으로 무너진 분수대 크레이터 주변에 모여 있던 십여 명의 분견대 장병들과 발굴단 사람들은 황제의 모습에 일제히 옆으로 비켜섰다.

“수고들 많았다.”

지난 하룻밤 새 뺨이 홀쭉해진 카렐이 눈동자를 힐끔 움직여 옆을 돌아보았다.

“급하게 움직이지 마세요, 파이프가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니사가 함께 온 가디언들에게 황제를 들라고 손짓해 보였다. 2명의 가디언이 양쪽에서 팔을 엮어 황제를 조심조심 들어 올려 급조한 의자에 앉혀주었다. 코리온이 행여 그가 옆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뒤에서 어깨를 잡아주었다.

지난밤 토혈을 하며 쓰러진 황제는 옆에 의사가 없었더라면, 쓰러진 곳이 바깥이었다면 폐에 가득 찬 피로 숨이 막혀 그대로 즉사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니사가 목을 째고 파이프를 넣어 급히 피를 빼낸 덕분에 첫 죽음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이게 뭐냐?”

카렐이 걸걸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포격으로 무너진 돌덩이 밑에는 오래된 합성수지 팻말이 찌그러진 채 깔려있었다. 팻말 자체는 원래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을 만큼 색이 변했지만 칼로 긁어낸 글씨는 어렵사리 읽을 수 있었다. 먼저 와 있던 라스가 팻말을 대신 읽어주었다.

- 마지막 카히나의 사제가 여기에 누워있다.

언젠가 이 땅에도 다시 햇볕이 들고 푸르러질 날을 기다리면서. -

“이전 오르마즈 경이 왔을 때 풍화되지 않도록 위에 일부러 돌을 덮어 분수대처럼 감춰놓았던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계실 때 파야 할 것 같아 아직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살람이 얼어붙은 지면을 가리켰다. 카렐은 가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그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부디 날 용서하시오. 내 영원히 쉴 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니 잠시만 여길 피해 있으시오.”

흙 한 줌을 집어 입을 맞춘 카렐은 비로소 살람을 손짓해 불렀다.

“어쩌면……45호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르니 시신이 최대한 훼손되지 않게 꺼내라. 우리 말고 놈들도 분명 노리고 있을 테니 꺼내 보관하는 게 낫다.”

카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발굴단의 작업자들이 얼어 단단해진 땅을 조심조심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곡괭이질은 필요치 않았다. 땅 밑으로 얼마 내려가지 않아 발굴단원 한 명이 무언가 걸린다며 손짓했다. 맨손으로 흙을 파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썩어서 거의 흙이 된 섬유 부스러기들이 나왔고, 그 밑에 지퍼가 잠긴 오래된 시신보관용 냉동백이 나타났다.

“미생물은 여전히 살아있군요.”

살람이 팩에서 썩은 흙을 털어냈다. 그 오랜 세월에도 합성수지 백은 탈색만 되었을 뿐 썩지 않고 여전했고 안에서 만져지는 사람의 형태도 온전했다. 백을 확인한 살람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유골이나 미라 상태가 아닙니다. 누군가 온전히 보존처리를 한 느낌입니다.”

발굴단 작업자들은 냉동백에 든 시신이 행여 상하지 않도록 능숙하게 밖으로 들어내 들것에 올렸다.

“내가 열지.”

카렐은 지퍼를 조심스레 당겨 내렸다.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보존처리가 된 채 맹추위 속에서 5백년을 넘게 버틴 시신은 온전했다. 아니, 최소한 시신으로는 놀랄 만큼 완벽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아니었다.

“지독하게 다루었군.”

카렐은 텅 비어있는 카히나의 안구 자리를 조심스레 닫았다. 먼 옛날, 지독한 고문의 흔적은 뭉개지고 함몰되고 어디 하나 성한 곳 없는 그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모습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을 게야. 재 매장 전에 복원할 수 있겠나?”

황제의 물음에 해부학자 살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클론인 오르마즈 경의 얼굴이 남아있으니 가능합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요.”

“라말라 박사 시켜 척추에서 골수를 채취하고, 이제라도 제대로 묘를 꾸며줘야지.”

코리온의 가슴에 몸을 기댄 카렐은 X후예들의 손에 들려 철성으로 돌아가고 있는 카히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들어가시죠, 춥습니다.”

코리온의 말에 카렐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기서 45호 바이러스가 나오겠지요?”

코리온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카렐은 쩍쩍 갈라진 입술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움푹 팬 눈을 힘겹게 뜨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럼 이제 할 만큼 했습니다. 사제의 키도 찾았고, 바이러스도 찾았으니 가장으로서도, 황제로서도 모두……“

카렐이 모처럼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저기서 45호 바이러스가 나온다면 수명개조가 풀려 죽어가고 있는 수백만, 아니 그 이상의 제국민들도 다시 삶을 되찾을 터였다. 세네피스도 황궁으로 돌아가면 안전하게 키를 뽑을 테고, 그러면 황금탑 안에 있는 1번 잔딕과 아이들의 영구적인 치료법도 찾아내어 아이들의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제 남은 건 스스로의 목숨 하나뿐이었다.

“이제 홀가분하군요.”

“살아남지 못하시면 할 만큼 하는 것이 절대 아니십니다.”

코리온이 딱 잘라 대답했지만 카렐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삶이 며칠, 아니 어쩌면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트가 열리고 황실군이 상륙하는 것까지는 봐야 하는데…….”

“루트는 내일에나 열립니다. 당장이라도 수술을…….”

“이미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요.”

“황태후께선 강한 분입니다. 130년의 감옥 생활을 버틴 것도 인간으로서는 기적이었고, 사오시안트에서도 손목이 잘리고 명치 왼쪽에 볼트가 박히고도 살아났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갖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 수술은 쉽게 이겨내실 겁니다.”

“그분의 의지가 강할 뿐이지 특별한 몸을 가진 분은 아니오. 그땐 코앞에서 내가 죽어가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엄마들이 초인적인 능력을 보이는 경우는 흔하오.”

코리온의 속이 확 타올랐다.

“본인의 목숨보다 죽은 자와의 그깟 의리가 그리 중요하십니까?”

“그거 학장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 거요?”

카렐이 키득거리며 웃는 모습에 코리온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학장이라면 자신이 살려고 어머니 대공주에게 목숨을 거는 수술을 하게 하시겠소?”

코리온은 이번에도 대답을 못 했다. 학자로서의 그는 여기서 세네피스의 척추수술을 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는 것을, 카렐에게 자신의 머릿속 잔딕을 물려준 오르마즈를 믿음을 배신하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 코리온의 기준으로는 그것을 말리는 황제가 야속해 미칠 지경이었다.

“서쪽 동굴 뒤쪽으로 나갈 길이 생겼다 했소?”

카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삼각루트가 열리는 즉시 어머니를 불릿 편에 황제령으로 보내드릴 참이요. 지금 출발하나 워프루트 열린 후에 출발하나 도착시간은 거기서 거길 테니 그편이 낫지. 그럼 황궁에서 안전하게 제거수술한 후에 다시 가져와 내게 수술할 수 있을 거요.”

황제의 나름 타협안에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방법이라면 세네피스는 분명 살겠지만 왕복 시간을 고려하면 카렐이 지금부터 최소한 2일은 살아서 버텨 주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왜 하필 지금 아버님을 닮아 가십니까?”

이번엔 카렐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눈을 껌벅거리며 하늘만 올려보고 있었다.

이렌느와 세닉 가가 검은 철성 앞에서 대패를 기록하고 서쪽 협곡의 다리마저 끊기기 직전, 운 좋게 다리를 통해 탈출한 패잔병들은 느릿느릿 짐마차를 타고 몇 시간에 걸쳐 분지로 내려왔다.

“여기만 와도 살만하네.”

부상자들과 마차에 탄 3명의 ‘정체불명 사역병’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해발고도가 절반밖에 되지 않는 제플린 산 아래 판지셰르 분지에 도착한 건 출발하고 4시간 가까이 지나 자정 가까운 한밤중이었다. 검은 하늘은 누런 모래폭풍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다.

마차는 이전 분견대 기지가 있던 언덕에 점점 가까워졌다. 그 언덕을 중심으로 새하얀 야전 천막으로 온통 뒤덮인 너른 평지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그들의 시야가 닿는 곳의 끝까지 온통 막사의 불빛들뿐이었다. 35만의 대군이 한 곳에 머물고 있으니 사실상 도시 하나가 모래폭풍으로 뒤덮인 황무지에 생겨난 셈이었다.

“우와우, 어마어마한데.”

별 생각 없이 중얼거리던 꺽다리는 마주앉은 다른 부상병이 어리둥절한 눈길로 쳐다보자 뻔뻔스레 짜증을 냈다.

“뭘 봐, 도착하자마자 꼭대기 끌려가서 이 장관도 못 보고 사흘이나 뺑이 친 것도 억울한데.”

자칫 말실수를 들통 날 뻔했던 친위군 특등급 가디언 타크마는 옆에 앉은 바에자를 힐끔 돌아보았다. 아직 몸이 완전치 않은 바에자는 고지대에서 힘들게 움직이느라 피곤했는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오는 동안 부상병 행세를 하며 얼굴에 붕대와 반창고까지 덕지덕지 붙여 누가 봐도 마구스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 또 한 번 헛소리하면 그땐 머리통을 날려 줄 테다. -

머릿속으로 들어온 바에자의 한 마디에 타크마가 무안하게 고개를 숙였다.

바에자의 옆에는 판지셰르 지리에 훤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지원해 온 산토스가 뭣 씹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타르서스 출신의 이 열혈 땅콩사이즈 아가씨는 이 길을 출발할 때만 해도 황제가 분견대원들 전원에게 1계급 특진을 주었다는 소식에 ‘이제 소대장 사관님이네’라며 싱글벙글 기분이 좋았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이후, 한때 자신과 부대원들에게 고향 같았던 기지 주변을 온통 적군이 뒤덮은 모습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마차는 간단한 확인을 거치고 심야의 병영에 접어들었다. 하얀 야전천막들이 모래폭풍에 요란스레 펄럭거리는 소리를 빼면 숙영지는 기분 나쁘게 조용했다.

“고도가 높으니 다들 팔자 좋게 곯아떨어졌네.”

산토스가 혼잣말로 일갈을 했다. 막사들 앞엔 무기 대신 더러워진 삽과 곡괭이, 수레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곯아떨어져 있는 듯했다. 지금의 칼데아군 보병대엔 송풍로를 파내고, 막사를 짓고 참호를 파는 삽질과 곡괭이질이 전투나 마찬가지였다.

“윗분들도 여기서 훈련까지 시킬 만큼 똥별들은 아닌가봐.”

산토스의 계속된 입담에 한 마차에 탄 다른 부상병들이 그의 정체도 모르고 덩달아 키득거렸다. 칼데아군 보병대의 거의 절반이 신병이다 보니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병영이 거의 신병훈련소나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마차 양옆을 스치는 칼데아군의 병영은 초대형 공사장의 작업자 숙소 같았다.

이들이 탄 차는 숙영지 남쪽의 세닉 가 구역에 천천히 접근해갔다. 그런데 이들이 도착했을 때, 야전병원 앞은 당장 죽을 놈이 아니면 대기표를 받고 기다려야 할 만큼 인산인해였다.

“아니, 뭐가 이래?”

병원에만 오면 따뜻한 잠자리와 간호를 받을 줄로 기대했던 협곡의 부상병들은 병동에도 못 들어가고 허름한 천막 안에서 번호표가 붙은 모포만 두르고 떨고 있는 다른 부상병들의 모습에 경악을 했다. 의무병이 이들에게 대기표를 나눠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당장 죽을 상태 아니면 기다려. 송풍로 쪽으로 부상병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져서 난리도 아냐. 제후님도 중상을 입고 후송되셨어. 그쪽 비탈이 부상병들로 다 뒤덮인 모양이야. 당장 치료할 놈들만 1천 명이 훨씬 넘는데 지금 수색대가 비탈을 뒤지고 있어서 밤새 어디까지 늘어날지도 몰라.”

산토스가 포로에게 빼앗은 가짜 군번줄을 내밀었지만 의무병은 대기표만 건네주고는 나중에 보여달라며 확인도 않고 가버렸다. 부상자가 워낙 많아 이들도 하나하나 다 챙길 여유가 없어보였다. 이 셋에겐 이제 할 일의 시작이었다.

세닉 가 병원을 슬그머니 빠져나온 그들은 세닉 가 숙영지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향했다. 세닉 가와 플라칼 가 숙영지의 경계 부근엔 군인과 군무원들이 드나드는 클럽이 보였다. 칼데아 군 수뇌부는 고지대와 극단적인 기후를 생각해 전군의 음주를 원칙적으로 금지했지만 이런 최악의 환경에 처한 장병들에게 비번일 때 즐기는 최소한의 오락거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환자면 병원에나 처박혀있을 것이지.”

클럽 앞을 지키는 헌병이 부상병 대기표를 내보이며 클럽에 들어오는 이 셋에게 눈을 흘겼을 뿐 저지하지는 않았다.

“댁도 한 번 저 지옥에서 다쳐 돌아와 보쇼.”

산토스가 넉살좋게 떠들고는 클럽 안에 들어섰다. 안에는 비번인 군인들과 군무원들, 수송선 승무원들이 자정이 넘어간 지금까지도 북적거리며 뒤섞여 있었다. 이곳은 숙영지 내에서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여기 맞느냐?”

바에자의 물음에 타크마가 암호 송신기를 재차 확인했다.

“예. 남쪽 8호 클럽이랬으니 여기 맞습니다.”

셋은 클럽 안쪽 깊숙이까지 계속 들어갔다. 하지만 이 더러운 부상병들의 나들이는 장교와 VIP들이 따로 모여 있는 방 앞에서 딱 막히고 말았다. VIP구역 한쪽에선 마치 상복 같은 검은 원피스에 짙은 눈화장을 하고 머리를 틀어올린 미녀 한 명이 황금 고리로 된 오른손으로 술잔을 집어드는 중이었다. 전투가 끝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붕대를 둘둘 만 부상병까지 클럽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웅성대며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에이, 씨, 뭘 봐. 전쟁터 처음 와 보냐.”

산토스가 경박한 타르서스 사투리가 잔뜩 섞인 말투로 짜증을 버럭 냈다. 가난한 타르서스 출신들은 여기저기 제후군에 용병으로 많이 일하고 있지만 사나운 사고뭉치들이 많다보니 웬만해선 지역 출신들이 질색을 하며 꺼리곤 했다.

“박살나고 온 것도 미치겠는데 그만 쳐다봐.”

VIP구역의 케스난은 비로소 세 부상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앞에서는 까만 머리칼, 까만 눈동자를 한 아들 발렌틴이 주먹만 한 빨간 사과를 두 손에 꼭 쥐고 맛있게 깨물어먹는 중이었다. 언뜻 보기 좋은 광경이지만 이 모자의 앞뒤 테이블에는 코런덤으로 보이는 차가운 표정의 헤네티 2명이 각각 앉아 살벌한 눈빛을 뿌리는 중이었다. 칼데아 원정군에 민간 수송선을 20척이나 지원해 주었고, 황실의 공격으로 고장이 난 크테시폰을 초대형 수송선 일란 호에 실어 이곳까지 옮겨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교단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안주도 드세요. 엄마, 술만 드시면 몸에 나빠요.”

발렌틴은 케스난의 입에 아몬드 한 알을 쑥 내밀었다. 케스난은 아들이 내민 아몬드 알을 붉은 입술 사이에 깨물며 엷게 웃었다.

“그래, 이 엄마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그분 빼면 너밖에 없구나. 발렌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케스난은 은화를 내주며 바텐더 앞에 있는 세 명의 부상병들을 가리켰다.

“저기 전장에서 다치고 돌아온 용감한 군인들한테 엄마 선물이라고 럼 한 잔씩 사드리고 오렴.”

발렌틴은 VIP 구역에서 쪼르르 뛰어나와 바텐더에게 돈을 내밀었다.

“우리 엄마가 저 용감한 군인들한테 럼 한 잔씩 드리래요.”

돈을 받은 바텐더는 고급 럼을 담은 잔 세 개를 바에자와 타크마, 산토스에게 내놓았다. 바에자도 픽 웃으며 이 까만 머리의 잘생긴 소년에게 손가락만한 볼트 촉을 내밀었다.

“고맙구나, 아까 전장에서 내 갑옷에 꽂혔던 건데 기념품으로 가지렴.”

“우와, 정말이요?”

소년은 진짜 전쟁터에서 가져왔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볼트 촉을 꼭 쥐고 엄마에게로 후다닥 돌아왔다.

- 뒤쪽을 돌리면 안에서 송신기가 나올 거다. -

바에자의 소리 없는 음성을 들은 케스난은 붕대투성이의 군인이 바에자라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지만 모른 척 술 한 모금을 삼켰다. 바에자는 방금 받은 술잔의 받침 밑에 붙어있던 쪽지를 슬며시 꺼내어 주머니에 챙겼다.

그 사이, 케스난은 아들이 가져온 볼트를 만지작거리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뒤쪽에 붙어있던 손톱만한 조각을 슬며시 턱 밑에 붙였다.

- 통신 거리가 어느 정도죠? -

케스난이 입 안에서 혀와 성대를 움직이는 진동이 그대로 음성으로 번역되어 바에자의 수신기로 전달되었다. 보안국에서 사용하는 비밀 대화장치였다. 바에자는 장치 따위 없이 바로 케스난에게 답을 전했다.

- 3스타디아 내에선 추적과 통신이 될 거다. 그런데 크테시폰 내에선 외부 통신기기는 쓸 수 없다. -

- 알겠습니다. 저녁 9시부터 새벽4시까지 메인 동력케이블 수리작업으로 데이터실과 보관고 직원들이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그 시간 내에 끝내야 합니다. -

바에자는 막 새벽 1시를 찍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여유 시간은 3시간 뿐이었다.

잠시 후, 케스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헤네티 감시원 2명과 함께 클럽을 나섰다. 사역병의 짐을 짊어진 바에자 일행도 케스난을 따라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바깥으로 나섰다.

감시원을 단 케스난은 플라칼 가 병영이 있는 동쪽으로 돌아섰다. 세닉 가 군복을 입은 바에자 일행에겐 막다른 방향이었다. 케스난은 그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클럽 앞에 세워져 있는 작은 유개 차량에 올랐다. 원래는 엔진으로 움직이는 차량이었지만 모래폭풍 때문에 절반 이상의 동력이 망가져 이젠 앞에 말이나 노새를 묶어 마차로 이용하고 있는 우스꽝스런 몰골이었다.

케스난이 탄 차도 노새 2마리에 이끌려 숙영지 동쪽으로 뚜벅뚜벅 움직였다. 덕분에 셋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기엔 아무 무리가 없었다. 출발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플라칼 가 숙영지와의 경계가 눈에 들어오자 동시에 케스난의 목소리도 전해져왔다.

- 왼쪽으로 들어가십시오. 제 수하들이 뒤처리는 할 겁니다. -

뒤따라가던 셋은 케스난이 그 말을 한 곳 바로 왼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아직 부대가 배정되지 않은 빈 막사 한 개가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웬 꾸러미 3개가 놓여있었다. 꾸러미를 풀자 크테시폰을 싣고 있는 일란 호의 승무원 제복 3벌과 통행증이 나왔다. 셋은 피 묻은 세닉 가 사역병 군복을 벗어놓고 일란 호 승무원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산 위에서부터 지고 온 사역병 배낭 속에서 고농도 인화물질 통을 꺼내 함선 부품 상자에 옮겨 담았다.

수송선 일란 호의 승무원으로 변신한 셋은 케스난이 간 방향을 쫓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모래폭풍으로 거리가 조금만 벌어져도 시야에서는 바로 사라졌지만 그에게 준 송신장치가 여전히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앞장서가던 산토스는 모래폭풍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낯선 산’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기에 저런 산이 있었나?”

산토스의 궁금증은 얼마 가지 않아 해결되었다. 마치 산처럼 거대해 보였던 실루엣은 점점 선명해지며 거대한 금속의 괴물로 변해갔다. 그리고 마지막엔 목을 꺾어 올려보아야 할 만큼 가까이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맙소사, 그때 그 배 맞아요? 그땐 뒷부분이 납작했던 것 같은데 이번엔 왜 이렇게 높습니까?”

수에니 반도에서 크테시폰을 놓쳤을 때를 기억에 떠올린 타크마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앞에 보이는 건 거의 30층 높이 가까이 되는 어마어마한 인공의 금속제 구조물이었다. 높이보다 더 사람을 압도하는 건 마천루를 옆으로 눕혀놓은 것 같은 엄청난 길이였다. 한쪽 끝부터 반대편까지 3스타디아(450m)가 넘어 보이는 것이 황실군의 웬만한 함선 몇 척은 그 안에 그냥 담아도 될 듯 보였다.

“이건 뭐 시시때때로 모양이 변하니 눈앞에서도 못 알아보겠네요.”

옆에 있던 바에자가 슬쩍 설명을 해 주었다.

“밑에 일란 호가 깔려있고 후미 상층부에 연구소 블록이 붙어 다른 배처럼 보이는 거다. 지난번 수에니에서 바지선에 얹혀있을 때는 연구소 블록이 없는 상태더군. 뒷부분이 13층까지밖에 없어서 배가 훨씬 낮아보였지. 어찌 보면 그때 안 떨어뜨리고 연구소가 붙어있는 지금 박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이게 다 붙은 게 아니라고요? 그럼 다른 것들은요?”

이미 절반 넋을 잃은 타크마와 산토스에게 바에자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빙 둘러보였다. 그제야 둘이 크테시폰 주변을 둘러보니 황실군 함선 크기의 ‘부속선’ 거의 십여 척이 점점이 시계 눈금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다 붙으면 크기가 얼마만해지는 거야?”

바에자는 그 중 큰 전갈 문장의 깃발을 앞에 세워놓은 한 함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바로 그의 에시마 교단 본부 함선이었다.

“내 저길…….”

바에자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함선에 천천히 다가갔다.

“너무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당황한 타크마가 바에자를 말리려 붙들었지만 어차피 그럴 필요는 없었다. 함선의 해치가 열리고 십여 명의 무리가 안에서 성큼 나오고 있었다. 그들 중 선두에 선 여자의 당당한 어깨에는 짙푸른 색에 화려한 구름 문양이 새겨진 망토가 몰아치는 모래폭풍 속에서도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 바로 뒤에는 단정한 헤네티 군복 차림의 가디언, 아니 이젠 그 신분마저 내버린 루토가 그 여자의 어깨를 뒤에서 품어 안듯 몸으로 감싸고 바람을 막아주는 중이었다. 그의 뒤를 매서운 눈빛의 헤네티들이 호위하며 뒤따르고 있었다.

“저 썩을 년.”

바에자의 두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의 자리에 있는 또 ‘다른 바에자’는 이 더러운 선원들 앞을 휙 지나 크테시폰의 뱃머리 쪽으로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물론 그들은 고글과 마스크로 얼굴을 감싼 이들을 제대로 알아볼 리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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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첫 연재입니다~ 바에자도 설욕전을 위해 돌아왔고 항상 칼날 끝에 서 있는 케스난과 사과를 좋아하는(???) 발렌틴 모자가 이번에도 위험의 선봉에 서 있습니다. ^^

참고로, 작중의 케스난이 쓰는 [구강 움직임으로 대화하는 기구]는 사실 이미 개발된 장치입니다. ^^

연초지만 마지막 출판작업과 차기작 작업을 함께 하려니 다른 일도 거의 못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전 봄에 시작할 차기작 [사XX시XX] 작업으로 올해도 굉장히 바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새해에 좋은 일만 있으시고요~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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