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95화 (1,090/1,132)

< -- 1095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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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가 아닙니다.”

바에자는 타크마의 재촉에 마지못해 다시 방향을 돌려 크테시폰으로 향했다.

“일란 호는 눈에 띄지도 않네요.”

타크마가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제국에서 제일 큰 수송선인 일란 호는 상갑판 위에 적재물을 얹을 수 있도록 넓적한 책 모양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바지선이었다. 그 자체의 크기도 분명 어마어마하지만 지금은 그 위에 크테시폰을 얹은 상태다보니 언뜻 크테시폰의 일부처럼 보였다.

“어떻게 들어가지?”

바에서 케스난이 술잔과 함께 넘겨준 쪽지를 펼쳐보니 그 안에는 웬만한 도시에 육박하는 크테시폰의 구조가 비교적 꼼꼼하게 표시되어있었다. 그때, 이들의 귀로 먼저 크테시폰에 다가간 케스난의 연락이 들어왔다.

- 착륙 도중 선체 곳곳이 손상되어 대대적인 수리중입니다. 좌현에 큰 크랙이 생겼으니 그리로 가십시오. 우리 편이 있습니다. 모래폭풍에 내부가 손상되기 전에 끝내려고 철야작업 중이니 거길 통해 잠입할 수 있을 겁니다. -

크테시폰의 좌현에 바싹 다가선 일행은 비로소 이 거대한 괴물의 외모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언뜻 오래된 수송선처럼 위장되어있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어디 한 군데 낡은 곳이 없는 깔끔한 최상의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 일란 호와 크테시폰을 연결하는 굵은 지지대 하나가 볼썽사납게 꺾여서 크테시폰의 6층에서 14층 정도에 걸쳐 선체를 북 찢어놓은 게 흠이었다.

“저기로군요.”

“다하카르 교단의 연구소 블록은 코런덤 X를 합성하고 보관하는 곳이라 다른 교단 사람들은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지. 설사 마구스라도.”

바에자는 쪽지 도면을 다시 열어보았다. 도면에는 찢긴 선체 부분에서 연구소 블록의 냉동 보관고에 접근하기 위한 통로가 붉은 선으로 따로 표시되어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딱 맞춰 구멍을 냈나 봅니다.”

문제의 구멍을 자세히 보니 굵은 지지대가 착륙 중 뒤틀리면서 크테시폰의 메인 블록과 연구소 블록 사이를 긁어 손상을 입힌 듯했다. 저곳 말고도 선체 안팎 곳곳이 손상되어 양 우주선의 선원들이 수리를 위해 뛰어다니라 분주한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모래폭풍 덕분에 이곳에 착륙하는 수송선들 중 온전하게 땅을 디디는 것들이 워낙 드물다보니 저 정도는 심각한 축에도 들지 못했다.

“그 친구 머리를 잘 썼군.”

바에자가 픽 웃으며 보수작업 중인 크테시폰에 다가갔다.

“몸뚱이 수만 개를 못 쓰게 만드는 느낌이 어떤가 볼까.”

3벌씩 가져왔다는 코런덤의 예비 육체를 모두 날려버린다면 지금의 몸을 죽인 후엔 그 끔찍한 자들과 더 마주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남부 비엔에 가 있는 [좀비군단]의 기억을 조종하는 장치 역시 이곳에 있으니 여기를 차단한다면 그들도 재생 불능 상태가 될 테고, 비엔의 공략군 또한 숨통을 트게 될 터였다.

문제의 흠이 난 곳에는 외부에서 작업용 비계를 걸어놓은 상태였다. 구멍 난 선체를 고치려는 크테시폰의 선원들과, 지지대를 수리하는 일란 호의 선원들이 한곳에 뒤엉켜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 밑에선 열댓 명의 ‘일란 호 선원들’이 바에자 일행과 비슷한 상자를 메고 비계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아마르나에 가 봤나?”

바에자의 뜬금없는 물음에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길쭉한 얼굴의 남자가 냉큼 대답했다.

“마라케시보다 낫지요.”

신분을 확인한 바에자는 남자의 손을 탁 잡아주었다. 황제가 일란 호의 선원으로 위장해 태운 황실의 비밀요원들이었다.

“호드르 산에서 저와 적으로 만나셨죠. 기억은 못 하시겠지만.”

바에자가 눈을 흘겼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의 인상이 어딘지 익숙했다.

“자말 하크로딘이라고 합니다. 분견대원을 빼면 이 시커먼 재하고 폭풍에 저만큼 익숙한 사람도 없을 것 같아 지원했죠.”

바에자는 살짝 눈꼬리를 움직여 자신의 놀라움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그가 놀란 건 이 젊은이가 지원했다는 게 아니고 자신의 양아들이 이런 위험천만한 임무에 나가는 것을 허락한 제네르의 대범함이었다.

자말이 말을 이었다.

“처음 알려드린 것에서 변한 건 없습니다. 여기 8명은 안으로 잠입할 예정이고, 전 4명을 이끌고 마스터 케스난을 구출할 예정입니다. 여기 2명은 선체 후미 쪽에서 외부를 감시할 겁니다. 트라이크도 10대 준비해뒀습니다. 산악을 오를 수 있게 개조한 것이니 모래폭풍을 이용해 동쪽 산으로 도주하면 못 쫓아올 겁니다. 그쪽은 적이 아직 간이 에너지장벽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알았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크테시폰의 동력 절반이 마비되었습니다. 연구소는 동력을 가장 많이 소모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당장 운영 안 한다고 큰 일이 생기는 곳도 아니니 냉동실 같은 필수시설을 빼면 한시적으로 운영을 중단했을 겁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바에자는 다시 쪽지를 열어보았다. 그곳엔 크테시폰의 선미 쪽, 11층에서 22층에 걸쳐 붙어있는 연구소 블록, [아프라시아 유전 연구소]가 표시되어있었다. 헤네티 보관고와 데이터 보관실은 13층과 14층에 있다고 표시되어있었다.

“여긴 나도 몇 번 못 가 봤는데.”

“부탁드리겠습니다.”

바에자는 별 말 없이 자말과 나머지 팀에게 가 보라며 손짓했다.

각각의 임무를 맡은 요원들은 즉시 곳곳으로 흩어졌다. 자말은 케스난을 구출할 4명을 이끌고 사라졌고, 산토스는 2명의 요원과 함께 감시, 탈출팀을 맡아 모래폭풍 너머로 멀어져갔다. 크테시폰 내부에 들어갈 8명의 요원들과 남은 바에자는 10층 높이의 비계를 올려보았다.

바에자에게 타크마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 몸이 완전치는 않으신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바에자는 타크마를 한 번 흘겨보고는 별 말도 없이 비계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때 무패 전적을 자랑했던 이 전쟁영웅은 아랫사람들에게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기보다는 항상 자기가 앞장서는 타입이었다. 사실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호드르 산에서는 페로와의 대결 중에 창에 찔렸고, 지난 황궁 지하의 카타콤베에서는 ‘또 다른 바에자’에게 배를 찔렸던 상처가 여전히 완전치 못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군말 한 마디 없이 12층까지 꾸역꾸역 기어올랐다. 이 10명은 12층에 만들어진 용접용 발판에 잠시 멈추었다.

“뻥 뚫렸군.”

찢어진 동체 안쪽의 공동구에는 크테시폰의 곳곳으로 이어진 파이프와 덕트들이 갈가리 찢겨 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이들이 철통 보안의 크테시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클럽에서 만난 셋을 크테시폰까지 인도한 케스난은 안에 들어가는 시늉만 하고는 탑승구 앞에서 다시 돌아섰다. 손상된 동체를 수리하는 퉁탕거리는 소리는 2층의 선창도 마찬가지였다.

“저놈의 공사 때문에 밤새 시끄럽겠다. 바깥 구경이나 좀 더 하고 들어가자.”

케스난의 손짓에 2명의 X 헤네티들도 기계처럼 무표정하게 방향을 돌렸다. 이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케스난이 무얼 하든 최소한 겉으로는 단 한 마디 참견도 하지 않았지만 24시간 내내 절대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케스난의 혼자 힘으로 이들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의 아들 발렌틴이 옆에서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 때문에라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케스난이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한테서 떨어지지 마.”

케스난은 허벅지에 묶어놓은 비상용 스코프와 전기독침을 한 손으로 슬그머니 확인했다. 오늘 그는 아들을 지키는 전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석궁은 감출 수가 없고, 칼싸움은 할 줄 모르는 그에겐 쓸 수 있는 무기가 얼마 없었다. 길드 암살수들이 쓰는 펜 모양의 전기독침은 갑옷을 입은 상대에겐 소용도 없고, 근거리에서 3발까지밖에 쏠 수 없지만 치마 속에 감추기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평소 걷기도 힘들 만큼 꽉 붙는 치마를 즐겨 입던 그가 오늘은 발목까지 감싸는 폭 넓은 주름치마를 입은 것도 모두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우리 아들, 춥겠다.”

다시 밖에 나가기 직전, 케스난은 어깨에 두르고 있던 모피 숄을 풀어 아들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저 장식품으로만 보이는 이 숄에는 발사무기와 열기를 막는 질긴 특수섬유가 안에 들어있었다.

“엄마가 더 추워요.”

발렌틴이 훤히 드러난 엄마의 어깨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들이 숄을 돌려주려는 것을 마다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도 자말의 구출 팀이 자신을 따라 움직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선 가능한 크테시폰에서 멀리 떨어져야 했다.

그가 막 크테시폰의 선창 메인 출구로 나가려는 순간, 바깥에서 돌아오고 있는 거대한 무리와 딱 마주쳤다. 언뜻 보아도 100기가 넘는 기병 같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피해가자.”

모래폭풍 속에서 다가오는 형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케스난은 선창 좌현으로 난 다른 출구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렇지만 그 출구에서도 짙푸른 망토를 걸친 사나운 눈동자의 여자 무장과 눈에 익은 가디언이 성큼 들어서는 중이었다.

“익.”

바에자, 루토와 딱 마주칠 뻔했던 그는 허둥지둥 다른 출구를 찾았지만 마땅히 피할 곳이 없었다. 그 사이, 선창 후미 쪽의 기병 무리는 마치 그를 뒤쫓듯 속도를 붙여 달려와 선창에 휙 들어섰다.

케스난은 당황했지만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건 더 의심을 사기 쉬웠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선창 한쪽으로 보이지 않게 물러나 주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기병들의 선두에서 붉은 말에 타고 있던 자가 케스난에게 보란 듯 다가왔다.

“마스터 케스난 아니던가?”

케스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을 마스크와 고글로 가렸지만 방풍망토 안으로 보이는 검고 화려한 로브, 살짝 나온 배만으로도 말에 탄 이의 신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의 양옆엔 살름과 아트위야, 가르시바 마구스의 모습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좌현에서 그를 막았던 바에자까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케스난이 아들과 함께 얼른 자리에 꿇어앉았다.

“홀몸도 아니신 분께서 이 험악한 날씨에 말을 타셨군요.”

대신관 이디나는 헤네티의 도움을 받으며 조심조심 안장에서 내려서서 거추장스런 마스크와 고글, 먼지가 잔뜩 앉은 망토를 벗어던졌다.

“내 잠도 안 오던 차에 이참에 승마라도 배워 보려 나왔네. 워낙 전사의 핏줄이라 그런지 뱃속의 아이도 즐거워하는 것 같던걸.”

이디나는 달수에 비해선 많이 불룩한 배를 만지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엄마 옆에 함께 꿇어앉아있는 잘생긴 소년에게 움직였다.

“아하, 이 소년이 그대의 아들?”

이디나가 발렌틴을 손짓해 불러들였다. 엄마의 숄을 두르고 있던 소년은 그의 앞에 나아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케스난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차마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소년의 붉고 건강한 뺨을 손으로 쓰다듬던 이디나의 입가에 돌연 묘한 미소가 번졌다.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도 정말로 잘생겼구나.”

순간 케스난의 뒷골이 확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이디나와 함께 있던 아트위야까지 금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발렌틴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어허, 웬 아이가 이리 예쁘대? 크고 나면 정말로 근사하겠구나. 그땐 이 누나 그냥 지나치지 않기다.”

“푸핫, 웬 누나요? 눈 높은 아트위야 현신이 이젠 꼬맹이까지 눈독 들이기요?”

가르시바가 히히거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서운 세 어른 여자들의 눈빛 사이에 낀 발렌틴이 잔뜩 기가 죽었지만 고개를 숙이며 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절 길러주신 건 여기 계신 어머니십니다.”

이디나의 입꼬리가 더 길어졌다. 그는 소년의 턱을 들게 하고는 돌연 앞니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그의 표정에서 묘한 오싹함을 느낀 케스난은 자기도 모르게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디나는 그런 그를 못 본 척 소년의 갸름한 얼굴과 오뚝한 코, 움푹 팬 눈동자와 얇은 입술을 살살 쓰다듬었다.

“생긴 것만 훌륭한 게 아니고 똘똘하기까지 하구나. 내 뱃속의 아이도 이렇게 자라주면 좋으련만. 기왕 만난 김에 무료한 현신들과 잠시 말벗이나 해 주겠느냐?”

이디나는 발렌틴의 답도 듣기 전에 성큼성큼 안으로 걷기 시작했다. 당황한 케스난의 표정이 흙빛이 되었다. 발렌틴은 무서운 헤네티에게 손이 잡힌 채 크테시폰 안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엄마, 엄마도 와요?”

발렌틴이 벌벌 떨며 뒤쪽의 엄마를 돌아보았다.

‘맙소사.’

케스난은 달아나야 한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허겁지겁 아이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발렌틴, 마구스들과 함께 크테시폰 꼭대기의 대신관 처소로 이어진 엘리베이터에 막 오른 이디나가 문득 고개를 돌려 케스난을 빤히 쳐다보았다.

“움? 그대는 볼일 보고 오게. 아이는 잠시 데리고 있다가 숙소에 보내 줄 테니.”

“아, 아니,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해서 말입니다.”

그 어느 때도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은 일이 없던 케스난이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변명이 누구 귀에도 구차하게 들린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어떡해서든 아이와 떨어지지 않으려 기를 썼다. 하지만 마구스 일행만으로 엘리베이터가 꽉 차 그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디나는 그런 케스난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이며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이걸 어쩌나. 먼저 가 있을 테니 굳이 아들과 함께 있고 싶다면 다음 엘리베이터로 따라오게나.”

엄마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의 모습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사라져갔다. 혼자 남겨진 케스난은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하필 그때, 그의 귀에 꽂은 송신기로 자말의 다급한 목소리가 지직거리며 들려왔다.

“왜 안 나오고 계십니까? 곧 작전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빨리 나오십시오.”

케스난은 대답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패널에 나오는 층수 표시만 보고 있었다. 변하는 숫자가 너무나 둔해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마구스 처소가 있는 26층을 찍은 엘리베이터는 그가 아무리 눌러도 내려오지를 않았다. 대신관 구역인 26층에 올라갈 수 있는 승용엘리베이터는 이것 한 대뿐이었다.

“젠장!”

얼굴이 파랗게 질린 케스난은 거추장스런 스틸레토 구두를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옆의 계단에 뛰어들었다. 수신기로는 자말의 다급한 목소리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듣고 계십니까? 마스터? 시간이 없습니다!”

지직거리던 통신은 그가 선창에서 한 층을 더 오르자 아예 끊겨버렸다. 이곳은 외부 통신기기를 쓸 수 없는 곳이고, 이 순간부터 그는 혼자였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아들을 놓아둔 채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바에자 현신.”

다른 마구스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던 바에자는 아트위야의 느닷없는 부름에 눈동자를 힐끔 움직였다.

“팔찌는 어쩌셨소?”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바에자는 줄을 달아 목에 걸고 있던 마구스 팔찌를 보여주었다.

“왜요? 제가 가면 쓴 가짜이기라도 할 것 같아서요?”

바에자가 재빨리 둘러댔지만 눈썰미도 좋고, 쓸데없이 오지랖 넓기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여자의 시선은 쉽사리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전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팔찌를 안 벗던 양반이 요즘은 팔찌를 한 모습을 보지를 못해서.”

“하하, 팔찌를 벗고 며칠 있었더니 피 구멍이 막혀버려서 다시 뚫으려니 엄두가 안 나서요.”

바에자는 피 구멍의 흉터가 있는 왼쪽 손목을 내보였다.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백금제 마구스 팔찌는 언뜻 보면 멋지고 근사하지만 막상 안쪽을 보면 굵고 긴 침이 돋아있어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게 사람이 찰 수 있는 거냐?’라며 몸서리를 칠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침을 통해 손등 부분의 돌이 착용자의 피를 빨아들이게 하는 것이 용도였다. 덕분에 일단 뺀 후엔 상처가 아물어 다시 차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소름끼치는 팔찌의 원리는 정확치 않지만, 대대로 마구스의 피를 타고 이어지는 정체모를 물질이 신비한 돌에서 빛을 나게 한다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마구스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에서는 이 빛이 흐려지거나 사라져 사람들에게 마구스의 최후를 먼저 알려주곤 했다.

마구스라면 안고가야 할 그런 말 못할 고통을 딛고 돌이 내는 신비한 빛은 이들만의 고결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빛은 워프루트 개통 같은 아주 중요한 작업이나 때로는 마구스 궁전의 출입문 같은 비밀스런 곳을 통과하는 열쇠 용도로도 쓰이곤 했다.

그런데 희한한 건 마구스나 마구스 자녀들이라고 모두 빛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극히 드물지만 마구스와 전혀 혈연이 없는 사람에게서도 빛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안 나던 사람이 빛이 나거나, 반대로 멀쩡히 나던 사람이 빛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교단 초기에는 방탕한 생활과 악행으로 교단을 더럽힌 몇몇 마구스들이 몸이 멀쩡한데도 이 빛을 잃어 격분한 헤네티들이나 신관들 손에 살해당한 경우도 있었다.

“크테시폰엔 보안문도 많은데 그렇게 다니시다가 낭패 보십니다.”

아트위야가 바에자의 손목을 곁눈질하며 말을 맺었다. 바에자는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저 눈치 빠른 여자의 시선을 얼마나 피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26층에 막 도착했을 때, 이디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프라스 야투 박사의 굳은 얼굴이었다. 대신관과 함께 온 소년 발렌틴을 돌연 빤히 쳐다본 야투 박사는 대신관에게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아침에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문서의 첫 줄과 마지막 줄을 재빨리 읽은 이디나는 갑자기 휙 돌아서더니 엘리베이터에 [폐쇄] 버튼을 눌러버렸다. 엘리베이터에서 제일 마지막에 내린 발렌틴은 [사용 중지]가 깜박거리자 깜짝 놀라며 패널에 손을 뻗으려 했다.

“어, 엄마가 올라오셔야 되는데요?”

“곧 엄마한테 보내줄 테니 기다려.”

야투 박사와 함께 이들을 기다리던 살름이 엘리베이터를 내려 보내려는 아이의 작은 손을 탁 낚아챘다. 엄마를 통해 살름과 몇 번 안면이 있던 발렌틴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 남자의 능글한 눈빛에 바싹 얼어붙었다. 살름은 아이를 거칠게 안으로 잡아끌었다. 아이는 살름의 큰 손에 붙들린 채 연신 엘리베이터를 연신 뒤돌아보며 멀어져갔다.

“전 그럼 임무가 있어서 이만.”

함께 올라온 바에자도 무언가에 쫓기듯 허둥지둥 다른 쪽 계단으로 멀어져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트위야가 대신관 행렬을 따라가려던 야투 박사의 굽은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여보게나.”

“예에?”

야투 박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늙고 기운이 없어도 그 역시 남자다보니 이 아름다운 현신의 느닷없는 손길에 얼굴까지 붉어져 있었다.

아트위야가 돌연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조심 물었다.

“내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바에자 현신 말이야. 혹시…….”

아트위야의 귀엣말에 야투 박사도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새파란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현신께서도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크테시폰의 13층 공동구로 기어든 바에자는 또다시 초인적인 체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각종 전선과 설비가 한데 뭉뚱그려있는 공동구는 어른 딱 한 명이 엉금엉금 기어 지나갈 수 있는 크기였다. 어느 구간은 수평의 설비구가 이어졌지만 중간중간 수직의 구간도 나와 기어오르거나 기어내리는 고역도 감당해야 했다.

인화물질을 짊어진 일행은 좁은 구멍 벽을 실수로 쳐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바싹 곤두세우고 네 발로 좁은 틈을 기어갔다.

- 대충 여기쯤인 것 같습니다. -

수직코스를 낑낑대며 내려온 바에자는 타크마가 등을 툭툭 치는 느낌에 자리에서 멈추었다. 공동구는 3차원의 그물망처럼 복잡했지만 케스난이 전해 준 도면은 놀랄 만큼 정확했다. 덕분에 그들은 길 한 번 잃지 않고 13층에 있는 아프라시아 연구소의 보관고와 데이터실 가까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선체 곳곳이 수리중이라 보안장치도 이전만큼 완벽치 못했고 성공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아보였다. 타크마는 가져간 장치로 공동구의 패널에 박힌 리벳을 뜯어내고 조심조심 머리를 내밀었다.

-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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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에 무리까지 해서 그런가 독감에 걸려 죽을 맛입니다. 빨리 출판 끝내야 하는데 몸은 안 따라주고.....독자님들도 독감 주의하시고요.... 오늘 올리며 보니 차기작에 등징하는 소재들을 글 중간중간에 (그냥 재미로...혹은 그 이상으로?) 박아놓은 것들이 있는데 여기에도 또 있네요. ^^;;

이번 에피소드는 바에자-케스난 사이를 오가면서 벌어질 겁니다.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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